세계종교의 사후세계(死後世界)
사후세계(死後世界), 혹은 내세(來世) 또는 영계(靈界), 차계(次界)의 저승이란? 종교적으로 사람(또는 생명체)이 죽은 뒤에 가게 된다고 여겨지는 세계(世界)를 말한다. 내세(來世)의 경우 힌두교와 불교(佛敎)에서는 윤회(輪回)적 관점에 따라 '다시 태어날 삶, 다음 생(生)을 의미(意味)하기도 한다.
내세에 대한 설명은 각 종교(宗敎)마다 모두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종교(宗敎)적 시각(視覺)
과거부터 많은 종교에서 사후세계를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음양론 적으로는 죽은 뒤의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들어가 3년간 머무른다고 믿었으며, 특히 조상신은 후손을 수호한다고 믿었다. 3년 상의 근거는 죽은 귀신(鬼神)은 '죽은 자가 성불하여 사후세계로 간다'고 믿으며, 성불하지 않은 영혼(靈魂)은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이러한 시기 영혼은 저승으로 들어가 심판받으며 이에 따라 윤회하거나 천국(天國), 지옥(地獄) 등으로 배정받기도 한다. 이는 불교의 영향이 크다. 사후세계의 존재는 죽음을 맞이해도 거기서 끝이 아니라, 영혼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게 된다. 때문에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크게 달래 주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죽음으로써 본인의 의식이 아예 끊어지며,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에는 많은 이들이 공포를 안고 있기에, '내가 지금 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는데, 이 의식이 아예 사라진다는 것은 대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혹은 과학적 물음들이 많았고, 어떠한 것도 사후세계만큼 명확한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안심을 주는 해답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사후세계의 개념이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추앙(推仰)받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영생(永生)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그려지며, 어떤 종교도 인간의 영혼이 사후세계(死後世界)에서 죽는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연유로 아름답게 꾸며낸 사후세계를 통해 종교를 크게 성황 시키는 데도 일조했고, 더불어 전생에서 지은 죄는 사후세계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믿어, 사람들에게 더욱 도덕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도록 하였다.
또한 명예롭게 싸우다 죽은 전사(戰司)는 천당에 갈 수 있다고 여겼기에, 전장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싸울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종교색이 옅어진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인식에 짙게 남아있다.
실제로 사후세계에서 안식과 심판을 얻을 것이라는 발언들은 많은 공감을 받지만, 죽음과 관련한 이슈에서 사후세계를 부정하면 넌 씨눈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자살하면 그만이야' 같이 사후세계와 사회질서를 동시에 어지럽히는 발언은 크게 금기시 된다.
다만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와 다른 결과도 불러내게 됐는데, 임사 체험 경험담과 천국행 티켓 등 종교와 관련된 각종 사기 행각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사후세계에서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고 달래어, 하찮은 명예를 위해 죽음을 강요받는 피해자들 또한 발생하였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진 사후세계를 너무나 동경하여, 자살을 행하거나 다른 이에게 추천하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나게 된다.
좋은 일 했으면 편하게 놀고, 나쁜 일 했으면 고통 받는 세계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종종 차별이 없고 평등한 이상향으로 그려지기도 하며, 주로 선악 구분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샤머니즘에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
하던 일 그대로 사후세계에서도 일 한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음식을 남기면 그 음식들을 비벼서 준다는 도시전설도 있다.
물론 이는 밥 남기는 아이들을 혼내기 위한 이야기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영혼과 몸을 안 나누고, 몸이 그대로 사후세계로 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사후세계도 해당 지역의 문화를 영향을 받는지 종교나 풍습, 자연환경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며 이는 임사 체험 한 사람들에게 도 적용되기도 한다.
종교(宗敎)별 인식(認識)
한국 토속신앙(土俗信仰)
우리나라에서는 저승 가는 길에 꽃밭이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저세상 갈뻔 하다가 의식을 찾은 사람들의 말에서는, 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강 건너편 꽃밭에서 건너오지 말라고 해서 돌아왔다고들 한다. 여기에서 강이 삼도천이고 꽃밭은 서천꽃밭이다.
유교(儒敎)
공자(公子)의 에피소드중 제자 계로가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라고 묻자, "사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죽은 뒤를 어떻게 알겠는가? 미지생언지사(未知生焉知死)라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후세계 신경 쓸 시간에 현실에나 신경 쓰라는 얘기다. 이외에 도가(道家)도 "죽든 말든 뭔 상관? 어차피 자연의 도(道) 앞에서 다 쓸모없는 것을." 정도(正導)로 대접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고유의 사상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무속신앙 정도에서나, 유령이 되어 떠돈다든지 살던 곳에 그대로 머무른다든지, 구름 위에서 집 짓고 산다든지, 하는 얘기가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성리학(性理學)을 이념으로 삼은 조선(朝鮮)에서도, 사후세계(死後世界) 같은 이야기는 미신(未信)이라며 무시당했다.
물론 이건 성리학자들 이야기이고, 민간 차원에서는, 여전히 도교나 불교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니 사후세계의 개념에 집착(執着)하기도 했다. 사후 세계의 확장은 불교 이후에 본격화되었으며, 조선 후기 기독교가 사후세계와 구원론을 다룰 때도, 조선 지식인들의 반응은 대개 "불교 짝퉁이 와서 똑같은 소리 하는구나 하는." 식이었다.
불교(佛敎)
불교는 기본적으로 죽음이 끝이 아니고 사후 윤회(輪回)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영혼이 환생(還生)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참 쉬우련만 그렇지가 않다. 이런 건 힌두교식 윤회이고, 불교는 개인의 영혼(靈魂)과 자아(自我)조차도, 실은 실체(實體)가 없는 환상이라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윤회를 한단 말인가? 그것을 윤회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무아(無我, anatman)적 윤회의 이율배반성에 만년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있는데, 이 화살을 누가 쐈는지 독의 종류가 뭔지 왜 나를 쏜 것 인지부터 알아야겠다고, 그것이 밝혀지지 않으면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우긴다는 비유를 들어 사후세계에 신경 쓰기보다는, 현세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의 임제종 선승 구도 도쇼(愚堂東寔, 1577.4.25~1661.11.22) 역시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고요제이 천황으로부터 “해탈하면 즉시 부처가 됩니까?”라는 질문을 듣고 “제가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폐하는 그것이 참말인 줄 아실 것이고, 제가 아니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있던 것을 부정하는 모순을 범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사의 말에 더욱 의아해진 천황은 다음 날 다시 선사를 불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죽으면 대체 어디로 가는가?”라고 물었는데, 선사는 “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고요제이 천황이 “고명하신 선사께서 그런 걸 모른다고 하십니까?”라고 재차 물었을 때, 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제가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 자체도, 불교에서는 하나의 번뇌이고 아상(我相)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사실 교조(敎祖)인 석가모니부터가 세계는 상주(常住)한 것인가?, 혹은 무상(無常)한 것인가?,
나와 세계는 유한(有限)한 것인가?, 혹은 무한(無限)한 것인가?,
신체와 영혼(靈魂)은 하나인가 혹은 별개의 것인가?, 완전한 인격자는 죽은 뒤에 생존 하는가?, 혹은 생존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의 논의는 해결되지도 않는 문제를 가지고 집착하는 무익한 것이어서, 이러한 논쟁은 의의(意義)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십사무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렇듯 불교는 의외로 유교에서 비판한 것처럼, 사후세계를 중시하지는 않고 현세의 삶과 깨달음을 중시한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라는 게 기독교같이 일원화되어 있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이것저것 후에 들어온 게 많아, 하나의 성향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은 경향이 있어, 그런지 불교에 사후세계에 대한 체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육도윤회이다.
여기서의 극락이나 지옥과 같은 용어가 불교 바깥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내세에 대한 구복신앙과 인과응보를 바라는 사회 분위기상 그쪽이 강조된 면도 있다.
한편으로 육도윤회에 따르면 지금 생은 전생의 사후세계다.
애초에 윤회라는 개념상 그럴 수밖에 없는데, 그렇기에 지금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어쨌거나 전생에서 선업을 쌓거나 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고,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은 선업을 쌓지 못한 벌로서 태어나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 14세는, 칼 세이건 과의 대담에서 만약 환생이 과학에 의해 부정된다면, 티베트 불교의 신조(信條)를 바꿔야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승불교(大乘佛敎)에 한정해서 보면 사후세계 중에서도 지옥(地獄)이 상당히 강조되어 있으며, 사후세계(死後世界)를 다룬 부분 중에서 불교의 지옥이 손에 꼽을 정도로 방대하고 상세하다. 불교의 지옥은 기독교의 지옥처럼 종신(終身)도 무기징역도 아니다.
기독교
서양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 시절부터 엘리시온, 타르타로스 등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뚜렷한 편이었으며, 서양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던 중근동 지역에서 기원한 기독교 또한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다.
일단 기독교의 사후세계는 일단 사람이 죽고 나면, 자신의 믿음 여부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또는 연옥)으로 가지만, 이 같은 영적인 세계에 그 상태로 계속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다시 이 세상으로 부활하여, 재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최후의 심판을 받고, 구원받은 자들은 새롭게 달라지고 악한 것들이 제거된 이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지옥으로 다시 가서 그때 비로소 영원히 머물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기독교의 사후세계인 천국과 지옥은 ,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죽은 자들이 머무는 종말(終末) 전까지의 '대기소' 같은 개념이다. 기독교의 내세에서는 더 이상 현세에서처럼, 자유 의지로 죄를 짓거나 구원(救援)의 여부를 변동(變動)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에게 퍼져 있는 오해 중 하나로서, '기독교는 사후세계와 관계가 없으며, 이 세상에서의 부활(復活)만이 중요한데, 이런 주장은 신자들에게 무시당한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의 주류 신학도 아니고, 주류 교파들에 의해 공인된 교리도 아니다.
사후세계를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는커녕 아직 유대교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바빌론 유수 이전 시기에 한정된 것이었고, 그 당시에는 죽은 자는 최후 심판 때까지 스올이라는 곳에서 영원한 잠에 빠진다,
정도로만 생각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후 제대로 정립된 유대교, 기독교는 분명히 사후세계(死後世界)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종교이다.
초기 교부들을 비롯해 많은 초기 기독교도들은 사후세계(천국, 지옥)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해 왔고, 이는 과거나 현재나 기독교의 전통이나 다를 바 없이 중요한 교리 중 하나다.
그 외에 가톨릭의 고성소와 유아 림보도 있는데, 성조들의 고성소는 사도신경 해설을 통해 가톨릭의 믿을 교리로 정해졌고, 유아 림보는 엄밀히 말해 반드시 믿을 교리는 아니다.
이슬람교
이슬람교 권에서도 교리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착해도 천국(天國)은 못 간다고. (천국에는 알라만이 계신다고 한다.) 대신 천국보다 조금 격이 떨어지지만 낙원이라 할 만한 곳에는 갈 수 있다고 한다.
이슬람의 낙원
낙원(樂園)에서는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낙원에서 영생(永生)하니 그들은 어떠한 변화도 바라지 않노라"(쿠란 18장 108절)에 근거하여 낙원에서는 따분함이나 지루함을 느끼지 않으며,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낙원 거주자들은 나이가 33세로 통일된다.
무함마드가 말하길 "누군가 낙원의 거주자로 죽는다면, 그들의 나이에 상관없이 33세의 나이로 낙원에 들어갈 것이며, 그들의 나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니라, 지옥에 들어갈 자들도 마찬가지로 될 것이니라,"(티르미드가 전함) 인간에게 33세가 가장 아름답고 원숙한 시기이며, 또한 나이가 다르면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33세로 모두 보정해준다고 믿는다. 당연히 보정된 이후로는 아무도 늙지 않는다.
참고로 중세 가톨릭에서도 죽은 뒤의 연령이 30세로 고정된다는 관념이 있었다. 또한 신앙인의 자녀가 0세~15세 사이에 사망했을 경우, 하나님은 심판(審判)없이 낙원으로 바로 보내준다고 한다.
낙원에는 모든 종류의 나무와 과일들이 있다.
그 두 곳에는 온갖 과일이 쌍으로 있노라."(쿠란 55장 52절) 여기서 쌍으로 있다는 말은, 모든 과일이 생과일과 건조된 과일로 존재하며, 먹고 싶은 ‘대로 골라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과일들은 현세에 존재하는 그 어떤 과일보다도 감미롭고 아름답다고 한다. 또한 그 나무들의 가지는 아래로 늘어져 있어 따먹기도 매우 쉬우며, 사람이 과일보고 오라고 말하면 그 과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람의 말을 따른다고 한다.
또한 과일을 따낸 그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과일이 열리므로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다. 또한 먹은 것을 배설하러 화장실에 갈 필요가 없으며, 먹은 것은 땀의 형태로 아름다운 향기를 내며 배출된다고 한다.
낙원에는 특별한 술이 있다. 술로 그들은 두통을 앓지도 취하지도 아니하며"(쿠란 56장 19절) 낙원에는 특별한 술이 있으며, 이 술은 현세의 술처럼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하거나 구토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
낙원에는 솔로가 없다. 현세의 부부는 낙원에서도 영원히 부부이다.
만약 현세에서 결혼하지 못했거나, 배우자가 지옥으로 갔다면 다시 낙원에서 짝을 얻게 된다고 한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낙원에서는 결혼이 없다고 가르친다.
또한 결혼생활을 하는 등 육체적인 만족도 역시 있다.
하지만 낙원은 임신이나 출산이 없다고 한다.
모 하디스에 따르면 지하드를 성스럽게 마친 자들은 낙원에서, 72명의 처녀를 소유하고 그들을 마음대로 할 권리를 얻는다고 한다. 이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서 강조하는 내용이며, 자살 테러에 지원한 14살 소년이 내가 지원하는 건 이것 때문이다, 라는 식의 발언을 해 화제가 되었다.
IS, 자폭테러범들에게 '천국행 여권' 발급, "천국서 처녀 72명 선물 받아"(중앙일보)
기타
그 외에도 쿠란은 낙원에는 자신의 시중을 들어줄 7명의 하인이 있다고 말한다. 보통 미녀에 비유하지만 코란 원문에선 이 하인들의 성이 명시되어있지 않다.
단 율법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남자들에게는 여성 하인들이, 여자들에게는 남성 하인들이 따라온다고 한다.
낙원에는 여러 단계가 있는데 일단 하나님이 거주하는 천국에는 인간이 죽었다 깨어나도 갈 수 없다.
이슬람에서는 믿음만큼이나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종'만이 낙원에 갈 수 있다고 명시해놓고 있지만, 그가 신의 뜻에 완벽하게 위반되는 행동, 즉 완전 심각한 수준의 위선자나 할 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갈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자비롭기 때문이다. 대체로 낙원은 하늘에 있다는 것이 많은 종교의 일반론이나, 일부 중남미 고대 문명권에서는 거꾸로 지하에 낙원이 있고, 죄를 지은 영혼이 하늘로 가서 심판받는다고 믿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이승의 영역을 초월하면서도 이승보다 더 나은 곳으로 정의했다는 점은 같다.
식욕과 주거의 안정감은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성욕이나 성취감, 명예욕, 쟁취감, 자아실현 등은 종교적인 이유로 설명을 생략하거나 혹은 부각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넓은 시각에서 보면 누군가 좀 더 우월하거나 좀 더 조물주에게 사랑받는 설정, 노력한 만큼 얻어지고 인정받는 설정은 결국 낙원도 현세와 다를 것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대개에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반면 이슬람권은 순교자의 대우를 각별히 강조해 일반적인 사람들과 차별을 두어, 순교자는 17명의 여인들과 평생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에서 살 수 있다고 서술한다.
힌두교
동물(動物)도 사후세계에 갈 수 있는가? 동물도 사후세계(死後世界)에 갈 수 있는지는 각 종교마다 입장이 다르다. 구체적으로는 사후세계에 갈 영혼(靈魂)이 어느 선까지 존재하는지에 대한 교리(敎理)차이가 존재한다.
불교의 경우는 모든 지적 생명체에게 영혼이 있다고 보며 죽을 경우 사후세계가 아닌 인간이든 동물이든 죽으면 환생한다고 믿고 있고, 인간이 동물로 환생할 수도, 동물이 인간으로 환생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설령 동물이라 하더라도 불도를 접하고 깨달음을 얻는다면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물이 된 영혼을 불교에서는 축생계라 한다. 여기서 축생계란 지옥에 비하면 가벼운 형벌을 의미해서 인간보다 못한 동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많은 부분이 불교로 흡수되어 토착화된 한국의 불교와 그 영향 아래 있는 무속 신앙의 경우에도 동물령을 인정한다. 육도윤회 문서로.
기독교의 경우는 성경에는 동물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가 없고, 성경의 내용에 따르면 하느님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영혼을 주었고, 또 구원을 약속했기 때문에 동물은 딱히 천국이나 지옥이나 연옥에 갈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 많다. 가톨릭 교리 문답은 동물들이 사후에 천국에 갈 가능성을 별로 열어두지 않고 있는데, 동물과 인간은 같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온전한 지복(천국)을 위해 창조(創造)된 존재는 인간(人間)이지 동물(動物)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의 형상(形象)을 본떠 창조된 인간은 다른 피조물(被造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가톨릭 교리의 기조(基調)이다.
하지만 '동물은 사후세계를 가지 못한다, 고 완전히 확정 지은 것은 아니며, 딱히 동물 사후세계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고 ,기독교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동물은 죽으면 그냥 흙으로 돌아갈 뿐이라든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니 에덴동산으로 간다든지, 주인이 원한다면 천국에서 만날 수 있다든지 등, 실제로 교회 집사 등 신앙심이 강한 동물 집사들도, 자기 애완동물이 죽으면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종교와 상관없는 영역에서 보자면, 현대에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신보다 먼저 죽은 동물이 사후세계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 때문에 죽은 동물들이 가는 별이 있다거나, 천국 문 앞에서 인간을 기다려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인터넷 등지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다.
괴담으로는 어느 상가에서 떠돌이 개도 없는데, 개 짖는 소리가 자꾸 들려 이상하다 생각하고 바닥을 팠더니, 개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개의 영혼이 있다면 개 역시 죽으면 끝이 아니라 사후세계가 있다는 의미다. 이야기 속으로 에서는 두꺼비나 뱀을 실수로 죽였다가, 원한을 가진 뱀의 영혼과 저주(詛呪)에 시달려 제보를 한 사례도 있었으니, 상상임신처럼 믿는 대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맛있는 물이라고 생각하며 마실 땐 꿀맛이라고 느껴졌으니, 이런 플라시보 효과를 이용한다면 반려 견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믿으면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유인원들에게도 어렴풋하게나마, 자신들만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수화(手話)를 할 수 있었던 고릴라 코코는 "고릴라들이 문제가 있어서, 혹은 늙어서 죽는 것"이라고 했으며, "죽은 뒤에는 편안한 곳으로 간다"라고 했다고 한다.
과학계에서는 인간과 유인원이 공통조상에서 갈라져, 각자 진화해왔다고 설명하므로 유인원과 조상이 같으니 ,유인원에게도 영혼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유인원은 지능이 떨어지기에 영혼이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런 식의 논리라면 선천적이든 혹은 사고로 후천적이든 뇌의 심각한 장애를 입은 지적장애인들은 영혼이 없냐고 반론을 할 수 있다.
과학적 시각
과학계에서는 인간의 정신 활동은 뇌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러므로 뇌가 죽은 이후에도 정신이 유지된다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부정된다. 머리를 다친 사람이 정신 활동에 문제가 생기고, 뇌 수술 등이 이루어지는 이유이다. 신체를 연구하는 과학자, 특히 뇌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게 있다면, 뇌가 손상되었을 때 정신이 망가진다는 사실과 대치되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뇌 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는 좌 뇌에 출혈이 발생하여, 인지 기능과 언어능력을 상실하며 무아지경에 빠졌던 체험을 들려줬다. 출근 전 샤워를 하다 갑자기 어지럼이 느껴져, 욕실 벽을 손으로 짚었는데 손과 벽이 구분이 안 되었으며, 내가 누구인지 이름이 뭔지 점점 잊어버리면서, 모든 것과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며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했다. 또 마치 요술램프에서 빠져나온 지니가 된 것 같았다면서, 세상사의 고통과 번뇌에서 해탈한 듯한 심정을 느꼈다고 한다. 테일러 역시 임사체험을 했던 셈인데, '나'에 대한 정보를 담당하는 좌뇌가 뻗어버리니, '나'라는 통제에서 풀려나 마치 유체이탈과도 같은 체험을 했던 것이다.
자아 정체성의 자각으로부터 영혼설과 사후세계설이 생겨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을 품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의문으로 이어지면서, 비록 나의 육체는 사라진다 해도 나의 정신은 영생하리라는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도 이대로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슬프기에 이다음에 사후세계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이 필요했던 면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의 정보는 영혼에 담겨있다고 믿는 것인데, 문제는 테일러의 사례처럼 좌뇌가 손상되니 이미 기억에도 손상이 왔다는 것이다. 흔히 염라대왕을 만나 심판을 받을 땐 말을 잘 하는데, 테일러는 이미 좌뇌에 손상이 생기자 말조차 할 수 없고 기억들도 서서히 증발하며 고요하고 평온한 우주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영혼과 내세가 있다면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는가 라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점진적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이 내세에 갈 수 없다면 어느 시점에서 내세에 갈 수 있게 되는지 나누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육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성 정체성은 육체가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이 현실 외에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할까?'라는 것에 대해서는 다세계 해석, 평행세계, 다중우주론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이러한 이론들은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 등의 이론들을 기반으로 한, 형식적으로라도 과학적인 이론들인 것에 비해, 사후 세계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수용되기 어렵고 기타 여러 가지 의문점이나 모순점 등이 많아서 현실적으로 입증이 불가능하다.
유명한 과학자인 칼 세이건은 사후세계(를 포함한 신이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종교나 국가가 팔아먹기에 좋은 것이었다. 그 증거가 거의 무(無)에 가까울 정도로 희미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스티븐 호킹도 "천국과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동화에 불과하다"라고 말하였다. 마지막 순간 뇌가 깜빡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며 "뇌는 부속품이 고장 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이고,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이나 사후세계는 없다"고 했다.
또한 토마스 에디슨도 "내 평생 인격신의 존재나 죽음 이후의 삶, 내세, 천국, 지옥 등의 종교적 발상들에 대한 눈곱만큼의 과학적 증거를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예시로 든 세 사람뿐만 아니라 통계적으로 과학자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사후세계를 믿는 비율이 현저히 낮다.
뇌가 만들어낸 이미지인가?
민간에는 염라대왕에게 빌어서 살아오거나, 조상님이 구해줘서 눈떴다거나 하는 등,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난 뒤" 사후세계를 체험했다는 식의 증언들이 여럿 나돌기도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사후세계는 대부분 그 문화권의 저승의 이미지나, 혹은 그 사람이 믿던 종교의 사후세계의 이미지를 닮는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인은 저승사자를 만났다고 하고, 유대인은 모세를 만났다고, 기독교인은 베드로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고대 이집트인이라면 아누비스를 만났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사후세계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본 것은, 자신의 뇌가 만들어낸 이미지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죽기 전에 뇌에서 엔도르핀을 과다 분비해 환상(幻想)을 보게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죽은 사람을 봤다는 목격담으로 인해 사후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칼 세이건은 종종 환청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면서, 부모님을 보고 싶고 그게 실제 부모님의 목소리였다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그것은 뇌에 각인된 기억임을 안다고 했다.
실제로 귀신 목격담은 목격자의 뇌에 저장된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영혼이 알몸을 보이기가 부끄러운지 옷을 입고 다니는데, 옷은 어디서 난건지 노숙자 귀신은 죽어서도 굳이 거적때기 입고 다닌다. 목격자의 뇌에서 아담과 이브 마냥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건 민망하니까? 무의식적으로 노숙자 이미지에 어울리는 거적때기를 입힌 것이 아니냐고 해석해 볼 수도 있다.
또 영혼은 불멸의 존재인데, 신체의 노화에 영향을 받아 노인이 죽으면 노인의 모습으로 목격하고, 어린이가 죽으면 어린이의 모습으로 목격한다. 육체에서 탈피하고 물질을 초월한 존재인 영혼이라면, 생물학적 나이나 성별, 목소리, 음식(제사), 옷 등에 얽매일 이유가 없음에도, 육체를 단지 껍데기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유전자에 너무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구체적인 사후세계의 내용에 관해서는, 애당초 사후세계의 물리적 실체가 존재하질 않아서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없으니 논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예 과학적인 연구가 불가능하냐 하면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사후세계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것은 일부 사람들의 주장뿐인데, 인간 그 자체는 충분한 물리적 실체를 지닌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사후세계 그 자체는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사람들이 왜 사후세계를 믿고 어떻게 사후세계라고 믿어지는 경험들을 겪게 되는지는,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를 위해서는 인간 자체, 그중에서도 뇌와 의식에 관한 연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진전되어야 할 터인데, 기술적, 윤리적 이유 등 여러 가지 걸림돌들이 많은 상황이라 현재로서는 관련 연구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사후세계에 대한 주장은 개인적 경험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근사체험을 분석하여 영혼의 존재를 의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계속 되고 있다. 스튜어트 하메로프와 로저 펜로즈가 주장하는 조화 객관환원 이론이 하나의 예다. 국내에서는 소화기 내과 정현채 교수가 근사 체험 사례를 근거로 영혼의 존재를 논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일단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인 데다, 영매의 말이나 영혼 에너지 이론 같은 것을 자주 주장하여, 신빙성(信憑性)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반면 이와 전혀 별개의 관점으로, 아직은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 만들 수 있다는 비범한 주장도 있다. 오메가 포인트 이론에서는 먼 미래에 인류 혹은 다른 지적 생명체가 모든 다중 우주와 시공간을 통제할 정도로 문명이 발달한다면, 여태까지 살았던 모든 인간과 생명체의 정신을 복제해서 부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신을 복제했을 때에 그 복사본이 원본과 동일인인지에 대해서 논의하자면 또 복잡해지긴 하지만 적어도 복사본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 이후에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 사후세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넷플릭스 작품 블랙 미러에서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인 샌 주니페로(San Junipero)가 사후세계와 비슷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이쪽은 죽은 사람만 오는 건 아니고 다중 우주, 시공간까지는 아니며 기계 장치를 이용한 가상 세계라는 차이가 있다.
사실 근대까지만 해도 과학계에서도 사후세계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근대까지만 해도 사회 전반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매우 강하였다 보니 과학자들도 어려서부터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자라왔기에 신의 존재나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 등에 대해 '있다는 증거는 당장은 없지만 없다는 증거 또한 없기 때문에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있다'고 약간 입장을 유예하면서도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등의 굵직한 비극을 거치면서 전 세계적으로 기존의 '낭만적인' 관점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대폭 늘면서 종교에 냉담해지는 시각이 많이 늘었고, 과학자들도 이런 변화에 영향을 받아서 종교에 부정적인 입장으로 바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후세계에 대한 입장도 부정적으로 변하였다.
일각에서는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거론하며 이에 대한 언급이 어느 종교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종교적 사후세계를 부정한다. 당연하지만 종교를 만든 고대인들 입장에서는 내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가 두렵고 궁금할 뿐이지 기억에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궁금해할 리 없고, 태아 자체가 인지 기능도 거의 안 잡혀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게 유의미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이 주장은 태어나기 전에도 무였는데 죽고 나서도 무인 게 왜 이상하냐라는 식의 주장이라고 보면 된다.
비슷한 개념으로 전생이 있는데 비슷할 뿐이지 실제로는 다른 개념이다.
물론 사후세계의 개념이 반드시 종교와 관련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컴의 면도날개념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사후 세계와 거기에 들어갈 영혼을 설명하기 위한 부가 설정이 밑도 끝도 없이 필요하게 된다. 진화론적으로 어느 생명부터 사후세계가 있을 것이며(따개비, 세균, 바이러스에게도 사후세계가 있는가?), 발생학적으로 어느 시점부터 사후세계에 들어갈 생명이며(수정, 착상, 배아, 태아 중 어디?), 의학적으로는 언제부터가 죽음인가(심 정지? 뇌사?)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 ai로 의식을 업로드 한다면? 세포 일부로 복제인간을 만든다면? 냉동인간은? 등의 미래 과학까지 고려한다면, 사후세계 입장 조건을 정하는데부터 복잡한 설정놀음이 시작된다. 시작부터 이 모양인데, 사후세계가 어떤 모습이여야는지, 종교/문화권마다 달라야하는 이유가 뭔지는 가설조차 세울 수 없다.
역으로 사후세계가 없다고 가정할 때는, 감성적으로는 허전할지언정 크게 모순되는 내역은 발생하지 않는다.
양측 모두 입증이 불가능한 영역이라면, 모순점이 적게 발생하는 쪽을 기본으로 삼는게 무난할 것이다.
사후세계가 없으면 사회 질서를 통제할 수 없는가? 죽으면 그만"이라며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법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서, 사후세계 이론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사이비 종교의 경우 "죽으면 천국 갈테니 법이 무섭지 않다"며 반사회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위험도 존재한다. 일례로 지하디 존은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평범한 청년이었으나 이슬람 극단주의를 접하고 나서는 급기야 IS 영상에서 무고한 인질들을 무참히 참수하는 살인귀로 전락했다.
당시 전세계에서 자생적으로 IS를 추종하는 '외로운 늑대'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며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행복한 사후세계를 약속하는 IS의 이념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사후세계에서 수많은 여자와 진수성찬을 즐길 수 있다고 세뇌를 당해 묻지마 자살폭탄 테러로 사회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코로나 사태 때는 정부가 대규모 집회를 막으려고 했을 때도, 어차피 죽으면 천국 가니 코로나 걸려 죽는 것은 무섭지 않다고 무시하던 신도들로 인해 코로나가 많이 퍼졌다.
4살 IS '꼬마 지하디 존' 포로 처형 직접가담 '충격'(2016) "이교도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처음 모습을 드러낸 꼬마 아이는 급기야 처형 영상에 등장하여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치며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한 다큐에서 평화로운 종교단체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만약 지도자가 신도들에게 나쁜 명령을 내리면 어떨까요?"라고 반문했는데, 그래서 과거엔 수많은 종교전쟁으로 살육전이 벌어졌으며, 꼬마 지하디 존 역시 그런 부작용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종교들은 대개 합리적인 의심이나 과학적 회의주의 자세로 비판하는 것을 "너는 시험에 들었다!"라며 죄악시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사례가 많다 보니 지도자 발언의 권위가 높다.
신이 직접 '팩트 체크'를 해주지도 않으니 의심보다는 믿음이 강한 신도들이 내세를 내세우는 교주의 자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며 엇나가기 시작하면 1992년 휴거 대소동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처럼 동물이든 사람이든 경로의존성으로 인해 어린 시절 '각인'이 무척 중요한데 확실히 각인되면 무의식의 영역에서 통제가 되므로 사후세계 보장을 각인시키는 것보다는 현대 민주국가들처럼 '인권 교육'을 각인시키는 것이 반사회적 만행을 예방하는데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많은 선진국에서 '동물 학대'를 크게 다루는 이유 중에는 어린 시절 동물 학대를 즐기던 사람이 크면 사람에게도 옮겨갈 수 있다는 점도 있는데(유영철, 강호순, 이영학 등) 동물조차 괴롭혀선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각인시켜놓는 것이 사회질서 유지에 더 효과적이다.
실제 민주국가에서 정상적으로 자란 사람들은 아무리 화가 나서 주먹이 올라가도 차마 날리지 못하는 사례가 많은 반면, 프랑스에서는 중학교 교사가 이슬람 풍자 만평에 대해 표현의 자유라고 수업시간에 옹호했다가 10대 이슬람 청소년이 그 교사를 거리에서 참수시키는 등 인권 개념이 없어 충격과 공포를 주었다.
한국에선 조폭전쟁이 벌어져도 거리에 머리가 분리되어 나뒹구는 장면은 상상하기 힘든데, 10대 광신도 청소년은 거리낌 없이 교사를 참수했다.
또 사후세계 이론으로 겁을 줘서 사회질서를 통제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런 논리라면 종교인들은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정도여야 하는데 현실은 종교인들조차 법이 없으면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 성범죄가 통제불능인 사례가 많다. 종교에 관심없는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종교인들조차 법을 통해 간신히 통제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목사가 불륜을 저지르다 에어컨 실 외기에서 떨어져 죽은 에어장 사건도 있었고, JMS나 각종 사이비 종교 단체들은 광신도들이 신을 빽으로 법조차 무서워하지 않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혀 논란이 됐다.
대개 해외여행을 갈 때 잔혹한 처형과 엄한 처벌로 다스리는 종교국가보다는 정교분리 원칙의 법치국가인 현대 민주국가를 더 안전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면 사후세계가 사회질서 유지에 꼭 필요한 조건은 아니다.
물론 사후세계 이론을 듣고 겁을 먹어 자기검열에 신경 쓰며 조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소심한 사람들은 법으로도 겁을 먹으며 대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진짜 막장 행위를 작정하고 벌일 사람이라면 종교로도 막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든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란 말처럼 어차피 막장 행위를 할 위인이라면 종교로도 막기 힘든 법이다.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사후세계의 존재여부와 형태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일례로 지하상가에서 탁발 중인 스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엔 십자가를 들고 회개를 강요하는 사진이 ‘스님의 굴욕’이라는 제목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런 화가 날 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수행 부족 탓이라며 겸손한 모습에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찬사를 받았던 두타스님은 알고 보니, 동거녀를 죽도로 때리고 칼로 위협하고 가발을 쓰고 나이트를 다니는가 하면, 후원금까지 착복하는 등 평범한 중생들보다 훨씬 회개가 필요한 상태였기에, 수행으로도 막장 행위를 할 사람은 막을 수 없다란 것을 보여줬다. 조선일보는 "해탈한 줄 알았던 두타스님의 실체가 밝혀져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더군다나 업보와 윤회 이론은 현대 사회에서 차별을 정당화할 위험도 있다.
죄를 지으면 벌레로 태어나고 착하게 살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다소 유치한(?) 논리까지야 이해한다, 쳐도, 사람 간에도 엄연히 계급을 나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금 수저 계급의 아이는 전생에 훌륭한 사람이고, 흙 수저 계급의 아이는 전생의 범죄자라는 차별적 시각이 생길 수도 있다.
실제 과거엔 지배계급이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되기도 했다.
노예들은 왜 우리가 노예인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 그때 '업보'란 논리로 퉁쳤고, 아울러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 다음 생에는 너희도 지배층이 될 거라는 근거 없는 공수표 남발로 노예를 부려먹었다.
영국의 한 축구 감독은 업보를 믿는다며 장애 아동들은 전생에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발언으로 장애아 부모들에게 항의를 받고 짤린 적도 있었는데, 가뜩이나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저런 식의 혐오 발언으로 상처주고 차별하는 것이야 말로 죄악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처럼 평등한 민주국가는 저절로 탄생한 것이 아니다. 피지배계층이 업보라며 체념했었다면 계급사회가 이어졌겠지만 지배층에 대한 반란으로 심지어 왕족들을 단두대로 보내 버리며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업보 논리는 모순이라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는데, 살인자에게 죽은 피해자가 업보로 인해 자업자득으로 죽은 것이라면 살인자는 죄인가 아닌가란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과거엔 사건사고가 일어나면 신이 노했다며 제사를 지내거나 업보라며 넘어가곤 했는데, 현대엔 비행기 사고가 일어나면 철저한 조사를 통해 과학적 원인을 밝혀 개선을 하며 점차 사고를 줄이고 있다.
매일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시체들과 함께 하는 서울대 법의학과 유성호 교수는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한 이유는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후세계가 없다고 믿는다면 이 현실이 중요하니 현실에 충실하자며 적극적인 현실 개혁에 동기부여가 될 수 있으나, 천국이란 환상에 빠지면 현실 도피적으로 재산을 다 갖다 바치며 광신도가 되거나 심지어 교인들이 현세의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집단 자살까지 하는데, 헛된 망상에 심취할 에너지를 아껴 현실 문제 해결에 투자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계속 환생하며 생이 무한하다면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렸으니 다음 생을 기약하자"라고 쉽게 포기할 수도 있으나,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면 한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살아보자며 어떻게든 현실 문제를 개선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대체로 세속주의 적 성향이 강한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국가와 일본, 유럽 지역에서 낮은 비율을 보이며, 기독교가 강세인 미국 등 아메리카 지역과 이슬람이 강세인 중동 지역, 기독교/이슬람/토착 종교가 강세인 아프리카 지역이 높은 비율을 보인다.
전해지는 사후세계의 종류
극락 - 피안 – 정토
낙원 마그 멜 - 아래의 티르 너 노그와 동일시된다.
발할라 - 기묘한 점은 북유럽의 게르만 문화권에선 발할라를 천국으로 보았지만, 다른 문화권에서 보면 영락없는 마굴이자 수라도라는 점이다.
심지어 만찬만 존재한다 뿐이지 그것 딱 하나를 제외하면 발할라는 불교의 등활지옥과 동일하다.
아아루 - 이집트 신화의 사후세계. 세케트-아아루(Sekhet-Aaru)라고도 한다.
이름의 뜻은 갈대라는 뜻이며, 끝없는 갈대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오시리스가 다스리며, 이집트의 일상적인 생활이랑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질병 등 인간 세계의 나쁜 점들만은 없는 곳이다.
엘리시온, 천국 - 천당 - 천계
중립적인 이미지
고성소, 명계 - 명도 - 명부
북망산, 연옥, 중천 황천(黃泉) 헬헤임
부정적인 이미지
니플헤임, 나스트론드, 유도, 지옥, 타르타로스
시발바 - 마야 신화의 사후세계. 지하에 위치한 곳으로 들어오는 자들에게 온갖 끔찍한 시련을 안겨준다.
열두 명의 군주들이자 죽음의 신들에게 지배받고 있으며, 특이하게도 내부에 구기 스포츠용 구장이 존재한다.
경계에 있다고 여겨지는 곳
두아트 - 이집트 신화의 사후세계이자 저승 법원. 고대 이집트에선 생전의 죄를 지은 만큼 심장(영혼)이 무거워진다고 믿었는데, 두아트가 이 심장의 무게를 재는 곳이다. 이곳의 왕이자 주신이 바로 오시리스.
서천꽃밭, 저승의 강, 삼도천, 스틱스
살아있는 상태로도 갈 수 있다고 전해지는 곳, 물론 전설적인 의미다.
아발론, 이어도, 티르 너 노그
종교마다 다르긴 한데, 여호와의 증인은 교리 상 죽으면 일단은 그것으로 끝이다. 기존 기독교계의 천국과 지옥은 성경을 단어 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하며 죽으면 그냥 무(無)인 상태가 된다.
그런데 최후의 심판의 날이 도래하면 선택받은 이들만 기존 기독교계의 영적인 천국 같은 공간이 아닌 이 물리적인 지상에 부활하여 천국을 이룬다고 성경을 해석한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그냥 그렇게 영원히 죽어버리는 것이다. 불교와 같은 경우는 정말 완전히 사고 체계가 달라서 내가 사라진다는 공포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렇게 되어 버리려고 노력하는 종교인데 사후세계가 윤회의 형태로 존재해 영생과 같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고통이라고 여기며 완전한 자의식의 소멸, 다시 말해 무(無)로 없어져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것이 곧 열반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이렇듯 종교에서도 사후세계에서 완전히 죽어버려서 존재가 소멸한다는 개념이 존재한다. 현대 사회의 입장에서는 가장 난감한 문제 중 하나다. 처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것인데,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막장짓하는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기 때문. 죄는 죽음으로도 회피할 수 없다는 관념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최고의 가성비를 발휘한다. 임사 체험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과 다르게 과학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분야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로. 자살 이론을 정립한 인물 중 하나인 에드윈 슈나이트만(E.S.Schneidman)은 이를 두고 "죽음의 무시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의 도가와 유가를 비롯한 제자백가 사상은 종교나 철학보다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을 방법을 연구하는 정치학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도교는 애초에 자연 합일이나 신선이 되는 게 목표 중 하나라서 사후세계에 별 관심이 없을 만하다.
중국 유학자들도 불교를 공격하면서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이 극락이나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불교가 들어오고 나서는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이 꼭 극락을 봤네 지옥을 봤네 이런 소리를 하더라. 사후세계가 정말 있는 거라면 사람이 생전에 불교를 믿었든 안 믿었든 똑같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비판했다. 대지도론, 구사론, 불설전유경(佛說箭喩經)에서, 애초에 밀교와 부파 불교를 제외한 대다수의 불교 종파들은 사후세계 연구할 시간에 도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주된 목표다.
이 점에서는 유교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물론 사람으로 태어난 이들 중에서도 악업을 쌓아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근데 이 경우에도 악업을 쌓긴 했지만 그래도 선업도 있기에 사람으로는 태어나게 하되 벌로써 이전 생보다 불운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적고 짐승은 많기에 보통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은 적고 많은 경우 짐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예외적으로 지옥에 태어나게 된 죄인들 중에는 지옥도에서의 처벌도 모자라 아귀도를 거쳐 축생으로 태어남으로써 계속 벌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지옥과 아귀에 비하면 축생은 나은 편이라고.
또 가톨릭에서, 이미 천국행이 확정된 사람들 중 일부를 대상으로 생전에 갚지 못한 벌을 치르고 천국으로 나중에 들어가는 연옥의 영혼은 그 자체로는 이미 구원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구원 여부의 변동과 관계없다.
사후세계(死後世界)와 그곳에서의 인류의 개별 심판을 긍정하는 가톨릭, 정교회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통일된 교리가 적은 개신교에서도 '기독교는 사후세계와 관계가 없으며, 사후세계를 주장하는 건 무지몽매한 견해다' 식으로 주장하면 단박에 이단 판정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개신교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는 부활절 설교에서 진정한 부활은 사후세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죽어서 천국 가봤자 못 만난다고 강하게 잡아떼기보다는, 천국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있는 곳이니 생전에 친하게 지냈던 죽은 동물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하는 듯한 위로를 하는 게 좋다. 출처불명의 시체들을 모아 기괴하게 전시해놓은 인체의 신비전에 대해 외국에서는 호러 컨텐츠로 인식하고 간 사람들이 기절했다는 일화도 있었으나, 한국에서는 '교양 전시회'처럼 홍보되었기에 어머니와 아이가 손을 잡고 차분하게 관람하며 교양을 쌓은 적도 있다.
다만 의외로 윤회에 대해서는 윤회는 비록 여전히 의문스럽지만 최소한 약간의 실험을 통해 지지되고 있다. 물론 내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김영사, 2001, p.345)라는 약간은 호의적인 말을 하기 도 했다. 혹은 영생을 바라는 욕망과 신과 인간을 동일시 혹은 유사한 존재로 여기는 인간중심주의적 오만함으로 인해 실종된 아이가 죽었다는 무당의 말에 부모가 천도 제를 지낸 후 꿈에서 종종 만났으나, 나중에 장성한 아이와 재회하는 사례도 있다.
특히 한국은 과거에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이 있었을 정도로 실종된 아이가 고아원을 거쳐 해외로 입양 보내지는 사례가 많았는데, 그 아이가 해외에서 중년에 죽었어도 부모에게는 그 실종 당시의 어린 모습으로만 계속 남아 꿈에서 아이와 상봉을 하는데, 중년이 된 자녀의 모습이 부모의 뇌에 각인되어 있지 않아 그렇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임종 환자들을 자주 접했다는 점을 어필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장의사나 호스피스도 전문가를 자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설정도 검증이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에, 열이면 열사람이 다른 설정을 가지고 주장하게 된다. 정교분리가 정착된 현대 민주국가들에서도 정통 종교에서 악성으로 변형된 사이비 종교들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멕시코에서는 평범하게 예배 잘 다니던 아버지가 느닷없이 황당한 ‘렙틸리언’ 음모론에 빠져 SNS에 아이 사진과 '다윗과 골리앗' 등 자의적인 해석을 올려놓더니 급기야 두 아이를 태연히 살해하기도 했다.
체포돼서도 죄책감도 없이 여전히 당당한데, 이들은 '의심'보다는 '믿음'을 중시하다보니 음모론에 낚이기 취약하며, 한번 믿기 시작하면 무서워지기에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란 말도 있다.
그 아버지는 자기가 인류를 구원했다고 줄곧 주장하고 있다. 아이에 대한 인권 개념 그런 건 없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호랑이나 사자를 반려동물로 기르는 사람들은 대개 아기 때부터 길러 각인시킨 사례가 많다.
어렸을 적부터 사람을 공격해선 안 된다는 것이 각인되면 호랑이도 사람을 굳이 공격하지 않는 것처럼(물론 배고프거나 주인이 학대하면 방어적 차원에서 반격할 순 있지만) 사람도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나 동물을 괴롭혀선 안 된다는 것이 확실히 각인되면 커서도 굳이 법이나 종교가 없어도 행동이 통제가 된다.
마치 호랑이가 주인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 법이나 종교로 통제하지 않아도 각인만으로 통제가 되듯이 말이다.
일단 한번 각인되면 법이라든지 이성적인 영역을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정 부분 통제가 된다. 물론 동물이든 사람이든 선을 넘어 뚜껑 열리면 리미터 해제가 될 수는 있다.
지옥과 달리, 가톨릭에서 연옥은 시간이 지나면 죄를 씻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정교회와 개신교, 성공회에서는 연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이다.
지역에 따라 은하수가 시발바의 입구라는 전승도 존재한다.
초입부터 각각 전갈, 피, 고름으로 가득 찬 세 강을 건너야 하며, 네 갈래로 갈라진 길을 따라 겨우 들어오고 나면 신들의 곁에 앉아서 조롱을 받거나 조리 기구처럼 달궈진 의자에 앉아야 한다.
진정한 시련은 5~6채의 집에서 시행되는데, 어둠, 추위, 재규어, 박쥐, 칼날, 불로서 시험하는 것이다. 이 시련을 넘어서는 데 실패하면 모욕당하거나, 심하게는 살해당하기까지 한다.
심장의 무게가 정의의 여신 마아트의 깃털보다 가볍다면 위에 서술된 '아아루'로 갈 수 있지만, 심장이 마아트의 깃털보다 무겁다면 괴수 암무트가 죄인의 심장을 먹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