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마지막 황후가 고려 여인이었다는데
이익주(명지대 강사)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중국에서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잡는 대변동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몽고족의 지배를 받아왔던 한족 농민들의 봉기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원나라 조정에서는 황제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거듭되고, 권신과 환관들이 발호하는 등 왕조의 말기적 현상이 두루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의 한 가운데에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순제)의 황후였던 고려 여인 기씨- 기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나라에 공녀로 들어갔다가 순제의 눈에 들어 황후의 지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순제의 다른 황후들과 벌였던 암투는 우리 ‘왕비열전’을 능가하는 궁중 비사였다. 결국 그녀가 낳은 아들이 황태자가 되었는데, 만일에 원나라가 망하지 않고 순조롭게 황위가 계승되었다면 고려의 피가 섞인 황제가 출현하였을 것이다.
고려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되고, 그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이 과연 고려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보다 먼저,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이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서는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가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부터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와 원나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나?
13세기에 고려는 몽고족의 침략에 맞서 30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싸웠다.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몽고족과 그토록 오랫동안 싸운 나라는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항전의 주체가 되었던 고려 민중의 투쟁담은 역사 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항쟁의 결과, 고려는 몽고에서 요구하는 강화의 조건을 대폭 완화시켜 강화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 강화교섭을 위해 몽고에 간 태자가 쿠빌라이(뒤의 원 세조)를 만났을 때,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리나 되는 큰 나라이다. 당나라 태종이 친히 공격했어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쿠빌라이가 고려를, 고구려를 계승한 강국으로 인식하였던 것은 끈질긴 고려의 항전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때 쿠빌라이는 동생 아릭부게와 황제 자리를 다투고 있었으므로 고려 태자가 자신에게 찾아 온 것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음직하다. 결국 쿠빌라이가 황제가 되었고, 태자가 쿠빌라이 쪽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중요한 고비에서 외교적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고려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외교교섭에서 실리를 얻을 수 있었다.
고려는 몽고와의 이 첫 교섭에서 전통적인 풍속, 즉 ‘토풍’을 고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로써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고려의 문화뿐 아니라 독자적인 국가체제의 존속을 인정받은 것으로, 이를 근거로 ‘고려’라는 국가와 왕실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몽고에서 볼 때 고려는 엄연한 하나의 외국이었고, 고려와 몽고의 관계는 외교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몽고족이 이때까지 정복한 지역을 모두 자기 영토로 편입시켰던 것과 비교할 때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강화에 반대하는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몽고의 군사력이 개입하였고, 이에 따라 고려의 자주성은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몽고의 군대와 다루가치가 고려에 상주하고 내정에 간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렬왕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여 원 황실의 부마가 되어 있었다. 이 점은 이후 두 나라의 외교 과정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유목민족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원나라에서는 국가의 중대사를 쿠릴타이라고 하는 회의에서 결정하였는데, 부마도 왕자들과 나란히 참석할 수 있었다. 이같이 부마의 지위가 왕자와 동등하였으므로, 충렬왕은 이러한 지위를 활용하여 원나라의 간섭을 줄이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 할 수 있었다.
충렬왕은 직접 원나라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나 담판을 벌였고, 그 결과 원나라의 다루가치와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고려에는 원나라의 관리나 군대가 주둔하지 않게 되었다. 또 호구 조사를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시행하기로 합의하였다.
호구 조사는 일차적으로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이므로, 이 합의를 통해 고려의 백성들은 원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고려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필요할 때마다 사신을 보내 내정에 간섭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필요할 때마다 사신을 보내 내정에 간섭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이런 정도의 느슨한 지배방식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책봉이란, 중국 왕조와 주변 국가 간의 사대관계에서 조공의 반대급부로 주어지던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나라의 왕위 문제에 직접 간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왕위 계승을 추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책봉의 기회를 이용하여 고려의 왕위 계승에 개입하였고, 이 때문에 국왕이 갑자기 바뀌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왕위를 두고 다투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원나라에서는 책봉권을 이용하여 고려 국왕을 조종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당시 몽고족이 지배하던 세계질서 속에서는 드물게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하였지만, 대신 원나라의 간섭을 강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주와 사대라는 기준으로 볼 때 분명히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이중성을 어떻게 수용할 것이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고민 꺼리였을 것이다.
자주와 사대가 종이 한 장 차이?
당시 고려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지만,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일연(1206- 1289)의 <삼국유사>와 이승휴(1224- 1300)의 <제왕운기>가 모두 충렬왕 때 쓰인 역사책들이다. 이 두 책은 무엇보다도 단군신화를 처음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우리 역사의 유구함을 강조하고, 또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지 무려 600년이 지난 뒤까지도 각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계승의식을 극복하여 민족의 일체성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몽고와의 전쟁을 전후하여 신라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이 각각 일어났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제왕운기>의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은 “요동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 왕조와 뚜렷이 구분된다”는 말로 시작된다. 중국과 구분되는 딴 세상이란 곧 우리의 독자적인 혈연 및 문화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때 새삼스레 이 점을 강조한 것은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토풍’으로 표현되는 독자적인 문화와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들보다 한세대 뒷사람인 이곡(1298- 1351)이 자기 시대를 말하면서 “오늘날 천하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사직이 있는 곳은 우리 삼한뿐이다”라고 한 것도 원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고려가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몽고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서 인정하고 있었다. <제왕운기>에서는 원나라를 중국의 정통 왕조로 인정하면서, “토지는 광대하고 인민은 많으니, 개벽한 이래로 이런 나라 처음이네”라고 노래하여 융성함을 극찬하였다. 또 충렬왕이 쿠빌라이의 부마가 되고, 그 아들인 쿠빌라이의 외손자가 세자가 됨으로써 고려의 왕업이 빛나게 되었다고 찬양하였다. 따라서 원의 간섭 역시 부정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종족에 관계없이 중원을 차지한 나라가 곧 중화이고, 그에 대해 사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로써 합리화되었다.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전통에 대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족의 간섭을 인정하는 이중적인 가치관이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고려가 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 원의 정치적 간섭을 강하게 받던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 현실과 타협하는 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원에서 고려의 노비법을 고치려 한다던가, 고려를 원의 한 행성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그 곳에서 관직에 오른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그러한 태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원 간섭기를 생각하면서 반원과 친원, 또는 자주와 사대라는 술어를 사용할 때, 그것들은 모두 제한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제왕운기>에 보이는 이승휴의 역사인식은 단군신화를 수록하고‘요동의 별천지’를 강조한 데서 보듯이 자주적이지만, 동시에 사대의 논리를 들어 원의 간섭을 현실로서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의 ‘자주’는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당시 현실에서 자주와 사대, 반원과 친원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원의 정치적 간섭을 현실로서 인정하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지만, 고려가 독자적인 국가체제와 문화전통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에 단군신화가 기록된 것은 몽고족이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서나마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지탱해가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반면, 원나라의 간섭에 빌붙어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의 책동은 궁극적인 고려의 국가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데 이르렀다. 이러한 사람들을‘친원파’또는 ‘부원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생각은 모두 원의 간섭을 현실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종이 한 장의 작은 차이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차이가 현실 정치에 있어서는 고려왕조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고려왕조를 없애고 원의 영토로 편입될 것인가 하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로 발산되어 나타났다. 좀 더 적극적으로 원의 간섭을 부정하고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그 시대의 한계였다.
원에 기대어 출세하려는 자들
고려에서 부원배가 출현한 것은 몽고와 전쟁을 할 때부터였다. 몽고족의 침략을 맞아 고려의 군민들은 치열한 항쟁을 벌였지만,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때에도 외적에게 항복하여 그 앞잡이 노릇을 한 반역자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홍복원(1206∼1258)으로, 그는 일찍이 몽고가 고려를 처음 침략해왔을 때 항복한 뒤로 몽고군을 안내하며 고려 침략을 도왔다. 이 공으로 몽고에서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이로부터 아들 홍다구와 손자인 홍중희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고려 조정에 반역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밖에도 전쟁 중에 항복했던 사람들이 원나라의 위세를 업고 폐해를 일으키는 일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몽고에 있으면서 고려의 어느 지역에서 어떤 특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하고는 고려에 파견되어 토색질을 일삼거나, 이것을 빌미로 고려에서 관직을 얻기도 하였다. 몽고에서 배운 몽고어 실력을 앞세워 통역관으로서 두 나라 사이를 오가며 사실대로 전달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움으로써 국익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나라 사이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원나라에 연고를 갖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확대하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한 예로 공녀라고 해서 원나라에 처녀를 보냈는데, 그 때문에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소란이 일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거꾸로 자기 딸을 원나라의 실력자와 혼인시켜 그 덕을 보려는 사람들로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원의 요구에 따라 환관도 많이 보냈는데, 그것이 출세의 한 방편이 됨으로써 원나라에 환관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기 스스로 거세하는 사람들조차 있었다.
특히 충숙왕 이후로는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정쟁에 패배한 사람들이 원나라로 도망해 들어가 부원비로 변신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원나라로 도망해 들어가 부원배로 변신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원나라에 있으면서 고려를 원의 영토에 편입시키려는 책동을 벌였다.
이처럼 원 간섭기에는 환관이나 공녀의 친족들과, 정쟁에서 패하여 원으로 도망한 사람들이 주로 부원배가 되었다. 이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고려의 정치질서를 문란케 하고, 더 나아가서는 고려의 국가체제 자체를 없애려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원배들의 도움을 받아 고려의 기씨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될 수 있었다.
원나라 기황후는 고려의 공녀
기황후는 행주를 본관으로 하는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나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졌다.
1333년(충숙왕 후4)경에 원나라 황궁의 궁녀가 되었고, 1339년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은 뒤 이듬해 제2 황후에 봉해졌다. 그녀는 먼저 가 있던 고려인 환관들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고, 황후가 된 뒤에도 고용보, 박불화 등 고려인 환관들이 그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기황후와 고려인 환관들은 원나라에서 막강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기씨가 제2황후에 봉해진 바로 그 해에 자정원이라는 황후의 부속관청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고려인 환관 뿐 아니라 원나라의 고위 관리들도 포함되어 ‘자정원’이라 불리는 당파를 형성하였다. 당시 이들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어서 관리들의 인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당시 원나라의 재상이 이들과 가까이 하였다가 “권세에 아부한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였다.
1353년(공민왕 2)에 기황후의 아들이 황태자에 책봉되자 자정원의 세력도 더욱 강해졌고, 그로부터 몇 해 뒤에는 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하도록 압력을 가한 일도 있었다. 기황후의 득세에 대하여 원나라 말, 명나라 초에 살았던 권형은 <경신회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색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기황후가 고려의 미인을 많이 데리고 있으면서 대신 중에 권력이 잇는 사람들에게 보냈는데, 당시 원나라 서울의 고관들과 귀인들은 반드시 고려 여자를 얻은 뒤에야 (명가)라고 하였다. 고려 여자들은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며 섬기기를 잘하여 이들이 이르면 대부분 사랑을 빼앗았다. 수제 이후로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태반이 고려 여자였으므로 의복과 신발, 보자, 물건 등이 모두 고려의 것을 따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기황후가 원나라의 실력자들을 상대로 미인계를 썼다는 것인데, 이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황후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유지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기황후의 존재는 고려의 정치에도 당연히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고려에 있던 기황후의 일족들이 권세를 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