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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명창 : 청하 최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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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후예 역사 스크랩 임씨 총설
국악 최수인 추천 0 조회 72 13.01.13 15:2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총   설>

본관은 평택(平澤)·나주(羅州)·진천(鎭川)·울진(蔚珍)·예천(醴泉)·부안(扶安)·순창(淳昌)·장흥(長興)·조양(兆陽)·은진(恩津)·선산(善山)·진주(晉州)·옥구(沃溝)·경주(慶州)·옥야(沃野)·전주(全州)·임천(林川)·임하(臨河)·길안(吉安)·밀양(密陽)·보성(寶城) 등 30여 본이 전해지지만 몇 본이 현존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모든 임씨는 당문종(唐文宗; 826∼840) 대에 신라 흥덕왕(興德王)·희강왕(僖康王)·민애왕(閔哀王)·신무왕(神武王)·문성왕(文聖王) 때 망명해왔다는 팔급(八伋)을 도시조(都始祖)로 하는 동계혈족(同系血族)이며, 대종(大宗)인 평택임씨에서 분파된 분적종(分籍宗)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임씨는 오랜 역사를 가진 씨족의 하나로 고려시대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고려 문종 때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개(?), 그의 아들로 인종 때 상서호부판사(尙書戶部判事) 유문(有文),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민비(民庇), 원종 때 무신으로 권세를 떨친 연(衍)과 그의 아들 유무(惟茂), 의종 때 문인으로 강좌 7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 춘(椿), 공민왕 때 대사성을 지낸 박(樸) 등이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12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나주임씨(羅州林氏:會津林氏)에서 우의정 1명과 많은 현신이 나왔으며, 그 밖에 평택임씨·선산임씨·울진임씨에서도 뛰어난 인물이 나왔다.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7만 2663가구에 인구 41만 3101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10위였고, 1985년 조사에서는 가구수 15만 9371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1.7%로 274성 중 제10위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가구수 237,145가구에 인구수 762,767명으로 286성씨중 10위를 차지했다.


(1) 나주 임씨(羅州 林氏)

1세는 고려의 대장군 임비(林庇)이며, 그의 14세손 붕(鵬)의 대에서 발신하여 그의 손자 서(?)와 제(悌)의 후대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서는 인조 때 황해도관찰사를 지냈고, 제는 병마절도사 진(晉)의 아들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 겸 지제교(禮曹正郞兼知製敎)를 지냈다.

서의 아들 담(?)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유탁(柳濯)의 모반사건을 처결하고 이조판서·의금부판사를 지냈다. 담의 현손이며 승지(承旨) 상원(象元)의 아들 한호(漢浩)는 정조 때 문과에 급제, 이조판서·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순조 때 우의정을 역임했는데 서얼(庶孼)의 등용을 주장하여 서자도 벼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담의 5세손 시철(蓍喆)이 공조판서, 6세손 경진(景鎭)이 이조참판, 7세손 영수(永洙)가 예조판서, 한수(翰洙)가 강원도·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서의 현손 영(泳)은 부제학을 지냈고, 붕의 9세손 한진(翰鎭)은 이조참판, 한진의 아들 긍수(肯洙)가 이조판서, 담의 7세손 최수(最洙)가 시종원시종을 지냈으며, 그 밖에 득명(得明)은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불리었다.


(2) 평택 임씨(平澤 林氏)

1세는 고려 말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을 지낸 임세춘(林世春)이며, 세춘의 증손 정(整)은 태종 때 예조판서를 지내고 성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현손 명산(命山)은 이조판서, 5세손 수창(壽昌)은 부총관, 6세손 규(珪)는 병조판서, 8세손 유명(有名)은 좌승지, 10세손 황(篁)은 중추부영사에 올랐는데, 임경업(林慶業) 장군은 그의 여덟 아들 중 넷째 아들이다. 그는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 병자호란 때는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용명을 떨쳤는데 역신(逆臣) 김자점(金自點)의 모함으로 피살되었다.

평택임씨의 또 다른 일파는 고려 말 삼중대광(三重大匡) 임언수(林彦修)를 1세로 하고, 그의 아들 성미(成味)·견미(堅味)·제미(齊味)가 모두 현달하였다. 성미는 우왕 때 왜구를 무찔러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이르렀고 견미는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고, 제주 목호의 난과 왜구를 쳐서 문하시중에 올랐는데 뒤에 전횡을 일삼다가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에게 살해되었다. 또 제미는 판개성윤(判開城尹)을 지냈다.

이 밖에도 평택임씨의 인물로는 제주목사 형수(亨秀), 인조 때의 광주목사(廣州牧使) 회(檜), 선조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여 청난공신(淸難功臣)에 오른 득의(得義), 세조의 총신으로 대사간을 지낸 수겸(守謙), 영조 때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구출하려다가 귀양간 덕제(德?) 등이 뛰어났다.


(3) 진천 임씨(鎭川 林氏)

진천임씨의 1세는 고려 혜종비(惠宗妃)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 임희(林曦)이다. 그의 후손 공연(公衍)은 고려 중기의 권신이며, 공연의 현손 지(智)는 고려 말에 문하시중·대제학에 이르고 지의 아들 구(球)는 조선에서 호조참의를 지냈다.


(4) 순창 임씨(淳昌 林氏)

순창임씨는 임연(林演)의 아들 중연(仲沇)이 충숙왕 때 우상시(右常侍)·밀직부사·첨의찬성사가 되어 순창군에 봉해졌으며 왕을 대신하여 동정성(東征省)을 다스렸다. 그의 아들 선미(先味)는 태학사(太學士)로서 퇴폐한 예법과 세속을 바로잡는 데 힘쓰다가 고려가 망하자 은거하여 두문동(杜門洞) 72현(賢)으로 일컬어진다.


(5) 옥구 임씨(沃溝林氏)

옥구임씨의 1세 임개(林?)는 고려 문종 때 내시(內侍)로서 선종 때 공부상서로 송(宋)나라에 다녀오고 추밀원동지사·서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형부판사(刑部判事)로 치사(致仕)하였고, 그의 아들 유문(有文)은 숙종 때 요(遼)나라, 예종 때 송(宋)나라를 다녀오고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지냈다. 또 후손 경한(景翰)은 순조 때 서예의 대가로 중국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6) 선산 임씨(善山 林氏)

선산임씨는 임의미(林毅味)의 후손 억령(億齡)·백령(百齡) 형제가 뛰어났다. 억령은 명종 때 동부승지로 등용되어 병조참의·강원도관찰사를 역임했는데, 문명이 높았다. 아우 백령은 명종 때 호조판서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위사공신 1등으로 우찬성에 승진되었다


(7) 은진 임씨(恩津 林氏)

은진임씨는 고려의 예조판서 임자미(林自味)의 후손인 진사 득번(得蕃)의 아들 훈(薰)·운(芸) 형제가 선조 때 학행과 효행으로 이름났다.


(8) 길안 임씨(吉安林氏)

길안임씨의 1세는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임박(林樸)이다. 그는 홍건적에게 개경이 함락되자 사적(史籍)·예서(禮書) 등을 땅에 묻어 보전했으며, 성균좨주(成均祭酒)·대사성·대언(代言)을 지냈다.


(9) 울진 임씨(蔚珍林氏)

울진임씨의 시조는 임우(林祐)이다. 그는 원래 평택임씨(平澤林氏)이며 고려시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중부상서(中部尙書)를 지냈다.


(10) 예천 임씨(醴泉林氏)

예천임씨의 1세는 고려 의종 때 서하처사(西河處士)로 일컬어진 임춘(林椿)이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서 한문과 당시(唐詩)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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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3.22 18:16

    첫댓글 감사합니다!
    예천지명을 본으로 하는 성씨
    예천임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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