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교회(안상홍증인회
(이 내용은 안상홍 증인회에서출판된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를 중심으로 반론한 것임)
1. 이단의 정의
안상홍증인회에서 이단의 정의를 개신교를 대상으로는 크게 다음의 4가지로 내리고 있다.
1)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교회는이단이다.
2)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교회는 이단이다.
3) 성경에 근거가 없는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지키는 교회는 이단이다.
4) 십자가를 숭배하는 교회는이단이다.
그 외에 영혼문제 부인, 삼위일체 부인 등등으로 이단을 정의 하고 있다.
안상홍에서그들이 이단을 말하면서 제일 먼저 인용하는 성경말씀이 벧후2:1-3 말씀이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 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하지만여기에서 이단은 어떠한 자라고 말씀하는가?
안식일이나 유월절 따위를 지키지 않는 다거나 날 따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사신 주를 부인하고’라고 이단을 말씀하고 있다. 우선 결론적으로말하면 예수를 부인(그들은 안상홍이 곧 예수라 함으로 결론적으로 예수를 부인함)하고 안상홍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세례를 받으며 찬양하는 그들이 자신의 인용한 말씀 속에서 자신들이 이단이라고하는 증거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몇몇 이단의 정의를 보고자 한다.
이단 종파란 성경에 입각한 기독교 신앙을 임의로 변형 왜곡시키고 역사적 근거를 가진 교회의 교훈을 배척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월터 마틴은 다음과 같이 이단 종파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단 종파’란 어느 한 특정인의 비정상적 성경 해석을 중심으로 한 극단주의자들의 모임이다.또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골자에 있어서 한결같이 정통 기독교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상통하고 있다
이단종파들을 다음 몇 가지 신학적인 전제로 보면
1) 성경을 가감하면 이단이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뜻과 의미를 바로 알고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뜻과 의미를잘 못 알면 잘못된 인용이 되고 그것이 곧 성경의 가감이 된다.
예)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 다 하였느니라(마4:6)
2)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제한하거나 부인하면 이단이다.
3) 지금도 계속적 계시와 영감을주장하면 이단이다.
4) 비윤리적이요, 반사회적이고, 반국가적인 집단은 이단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롬13:1)
5)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주장하면이단이다.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2:2)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고전5:10)
결국성경으로 보면
1) 다른 복음(예수 이외)을 전하면 이단이다.
그러나 그들은 안상홍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7-8)
2) 내(예수) 이름으로 오는 사람이 이단이다.
안상홍에서는 성자(예수)는 곧 성령(안상홍)이라고 한다. 안상홍은사람으로 왔지만 예 수가 성령으로 온 자이기 때문에 안상홍이 성령예수라고 한다. 결국 예수 이름으로온 사람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단이란 말이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24:5)
3)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자가 이단이다.
물론 안상홍에서 하나님과 예수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도 예수도 안상홍 이라하여 모든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대신 안상홍을 사용하므로 결과적으론 부인한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 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2:22)
4) 다른 예수를 전하거나 다른영을 받게 하면 이단이다.
안상홍은 다른 예수며 다른 영이다. 안상홍을 재림예수 성령 하나님이라 한다.
바울은 예수의 이름만을 전했지 안상홍을 전하거나 말하지 않았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 납하는구나(고후11:4)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 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11:13-14)
5) 사람이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하면 이단이다.
하나님은 다시(참조: 살전4:14-15 죽었다가 사신 후에는) 사람으로 오시지 않는다. 오직 심판 주로서 공중에 임하신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 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 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 리라(살전4:16-17)
결국 이단이란 안상홍에서 말하듯이 안식일, 유월절, 성탄절 등의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 빙자하는자들이 이단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생을 얻게되는데 이 부분을 가감, 오도하는 자들이 이단이고 사이비고 사단이며거짓선지자며 이리들이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1-12)
물론 여기서 아들이란 안상홍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씀하고 있다. 요한은 복음서의 서두에서도 이를 많이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복음서로부터 시작하여 사도들에 의하여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안상홍과 같은 이단이 나오고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이다.(롬1:25) 거짓을 섬기고 피조물을 섬기는 자가 많기 때문에 그들에게 섬김 받으려는 거짓 주가 끊임없이 나타나는것이다.
심지어 안상홍은 예수 초림 당시를 언급하면서 큰 건물과 많은 교인을 확보한유태교가 이단이었고 소수의 무리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인 그들이 진리였다고 하는데(내양은 내 음성을듣나니 p49), 그렇다면 유태교에 비하여 소수의 무리인 몇 백 명이 따른 유다나 드다도 진리이고(행5:36-37), 지금 수도 없이 많은 재림예수나 적은 무리가 따르는교주나 자칭 하나님들은 다 진리라는 말인가?
진리라는 것은 믿는 무리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다. 때로는진리를 따르는 숫자가 많을 수도 있고, 혹은 적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안산홍도 이단의 보편적인 특징을 그대로 잘 나타내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두려움이다. 즉, 안상홍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거나 빠지면 공갈 협박(사고를 당한다 하거나 아프게 된다고 하기도하며 망한다고 하는 등)하여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했으며(딤후1:7)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롬8:15)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도 부활 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평안을빌어주셨다. 안상홍은 두려움을 주고 예수님은 평안을 주신다.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성도들은 예수를 믿으므로 소망을 갖게 되고 그러므로 평안을 누리며 기뻐하는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이 기쁨을 안상홍에게 빼앗기는 자들이 불쌍할 뿐이다. 기쁨 뿐 아니라 모든 삶의 가치와 생명을 빼앗기니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2. 안상홍
안상홍은 단기 4250년 1월 13일(음력), 서기 1917년에(안상홍 증인회에서는1918년 이라고 함) 출생하였다. 안상홍은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재송교회(현재는 수영교회와 해운대교회로분가되었다)에서 단기 4287년 10월 9일, 서기로는 1954년에 침례를 받고 입교하였으나 단기 4295년 3월 24일, 서기 1962년에 자신 외에 23명이 재림교회(안식일교회)를 탈퇴하였고, 3월 31일에 재림교회에서는 안상홍을 제명하였다.
그 후 1964년 4월 28일 부산 해운대에 ‘하나님의교회 예수증인회’를 설립하였다.
1985년 2월 28일 안상홍은 사망한 뒤 3월 22일 서울로 총회본부를 옮겼으며
동년 6월 22일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로개칭하였다.
안상홍은 자신이 3년 뒤 재림할 것을 예언하였고1988년에는 추종자들이 충남 연기군 전의면(현 소정면)의전의산에 수천명이 모여 안상홍의 재림을 준비하였다. 결국 안상홍의 거짓이 들어 났지만 장길자를 중심으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다시이탈 신도들을 모았다.
현재 전국에 걸쳐 교회 수는 약 1백에서 1백 2십여 곳으로 이미 침례를 받은 수가 12만을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수 14만 4천이 임박하고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종말의 소동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14만 4천이 되더라도 그들은 또 다시 알곡 중 가라지가 있다고 하거나, 아님 이제 환난의 때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교를 계속 확장하여 나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3. 안상홍을 성령 하나님이라고 한다.
안상홍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안상홍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받고 안상홍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이유는 안상홍이 성령 하나님으로 성령의 이름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인용의 말씀은 마28:19인데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세례 를 주고
에서 이름이라고 했기 때문에 성부의 이름과 성자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성부는 ‘여호와’ 성자는 ‘예수’ 성령은 ‘안상홍’이라는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성부의 이름을 왜 말씀하여주셨는가? 그것은 모세에게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시며 말하였을 뿐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나 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 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 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 다 하라(출3:13-14)
즉, 여호와가 유일한 성부의 이름이아니라 스스로 계신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나타내시는 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의미를 겉으로나타내는 표호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 뿐만이 아니라 ‘기묘’라 하시기도 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13:18)
‘임마누엘’이나 ‘모사’ 등의 이름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들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사9:6)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성자는 육신으로 오신 분이시다. 성자는온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시다. 사람이시니당연히 부르는 이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의 이름과 같이 의미를 나타내는 이름이시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자라는 뜻을 나타내시는 이름이시다.
그럼 성부와 성자처럼 성령의 다른 이름이 가능한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성령은 히브리어 ‘루하’이며바람이나 기운 등을 나타내는 뜻이고 헬라어는 ‘프뉴마’로숨, 생명, 영, 정신등의 뜻이다. 즉, 성령은 이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신)’을뜻하고 ‘예수의 영’ 생명,정신 등을 뜻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나의 이름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영이 있고 생명이 있다. 영에게 생명에게 나의 또 다른 이름을 갖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영의 이름을 가지시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말하였듯이나타나시는 속성에 따라서 이름을 가지실 뿐이셨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므로 말미암아 사도들에게 임하셨고 제자들에게 임하셨고 성도들에게 임하셨으며 오늘 날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임하셨다. 안상홍이 임한 것이 아니고 안상홍의 이름으로 임한 것도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임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내 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므로 성령의 이름을 굳이 말하려면 ‘보혜사’라고 할 것이지만, 이도 성령의 이름이 아니라 성령의 하시는 역할을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안상홍에서 말하는 마28:19의말씀과 주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세례를 주고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섭리하셨을 때의 이름은 여호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로서 역사 하셨을 때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그러면성령님의 권세로 나타나실 때의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내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p257)
라고 안상홍에서는 성령의 이름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28:18을 보면 ‘예수께서 나아와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다. 이는곧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주신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권세가 예수에게주어졌기에 사도나 제자들은 단 한번도 성부의 이름으로 일을 행하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였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3:6)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정돈하 라 한대 곧 일어나니(행9:3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이름이 ‘예수’이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그럼 성령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사도나 제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행한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즉, 자신들에게 주어진 능력을 예수의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속에 임하신 성령의 능력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다. 성령의이름이란 성령께서 행하심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1-3)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의 성령께서 베드로와 함께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는 베드로를 속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인 것이다.
사도들은 일찍이 이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세례 줌 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 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행10:47-48)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이를 믿으 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행 19:4-5)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이름으로’라는 것은, 예수는 독자적으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과 성령과 함께 행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의 사역이란 말씀이다.
그리고 안상홍에서 말하듯이 성령이 육신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예수의 영, 진리의영, 성결의 영,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등으로 성도에게 임하시는 것이지 자신이 육신을 입는 것이 아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 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곧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누구 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부 르게 하셨느니라(갈4:6)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것이지 자신을 육신으로 나타내셔서 자신을 증거하고 자신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무서워하 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 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4-1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 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5:5-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4. 안상홍을 재림예수라고 한다.
안상홍이 재림예수라고 하기도 하고 참 하나님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안상홍의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예수님=성령님 이라고 하는 주장에 근거한다.
먼저 안상홍이 재림예수라고 하는 것은 다윗의 위에 앉는 하나님을 말하기 때문인데 이는 물론 예수를 말하기도 하지만 예수는 공생애의기간이 3년6개월이었고 다윗은 40년간이었으므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는 예수는 나머지 37년을 마저채우기 위하여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안상홍이 바로 그 기간을 채우기 위하여 온 예수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이를 이루시리라(사9:6-7)
다윗이 삼십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년 육개월 동안유다 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삼하5:4-5)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안상홍의 일기를 통하여 살펴보았듯이 그는 1954년에 침례를 받았고 1985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종교적생활(?)은 37년이아니라 31년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다윗처럼 40년 간 왕위를 앉으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앉으신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 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무궁하리라(눅1:31-33)
그리고 예수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공생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것을 말씀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땅위에 나타나지 않으신다. 공중에서 성도들을 맞이하신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그리스 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 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 리라(살전4:16-17)
물론 안상홍에서는 강림과 재림을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재림의 광경은 ‘강림’이라고하고, 아기로 태어나 다시 한번 오는 것을 ‘재림’이라고 주장한다. 성경 히9:28의 ‘두번째 나타나시리라’는 말씀을 재림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전히 강림은 남아있다는 주장이다. 물론 강림도안상홍이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구원에 이 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그러나 결코 위의 말씀이 아기로 태어나는 재림을 말하지 않는다.
‘재림’(再臨)이라는 말은 ‘재강림’(再降臨)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강림은 초림(初臨)이며 두번째 강림은 재강림(再降臨) 혹은 재림(再臨)이라고 한다.
히9:28의 말씀도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는 말씀이다. 초림은 오직 죄를 사하시며 대속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기에 십자가위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두 번째는 죄와 상관없이 나타나신다고 했다.안상홍처럼 죽을 필요가 없다. 또한 새로운 성경해석을 위하여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 예수의 재림(재강림)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재림(재강림)하신다는말씀이다.
자기(예수)를 바라는 자들의 재림을 생각하는모습이 어떠한가? 우리는 행1:11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올리우 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
그것은 하늘로부터 오심이다. 그러므로안상홍은 재림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태어난 것 뿐이다. 모든 사람과 똑 같이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 외에 결단코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는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이로서는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 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1-12)
예수께서 이미 육신으로서 이루어야 할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다시 육으로오시지는 않는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성소에 들 어 가셨느니라(히9:12)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자기를 단 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그리고 안상홍이 예수(구주)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몇 가지 분명히 있다.
세상 죄를 예수께서 지셨지 안상홍이 지지 않았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우리 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죄사함은 예수의 이름으로 받지 안상홍의 이름으로 받지 않는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예수께서 여셨지 안상홍이 열지 않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의 제사직분이 안상홍에게 갈리지 않는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히7:24)
5. 안상홍을 멜기세덱이라고 한다.
하나님의교회 안상홍 증인회에서는 ‘멜기세덱 성서 교육원’이라는명칭으로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설문지를 조사하다가 최근에는 ‘세계복음선교원’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설문지를 가지고 다니며 포교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물론 멜기세덱은 안상홍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앞에서는안상홍이 재림예수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완전히 예수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교리의 모순이다.
히브리서 7장을 인용하면서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1절) 멜기세덱은이방 나라 왕이기 때문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11절)은 이스라엘에서 난 예수님은 될 수 없고, 그 왕과 같이 이방 사람이되어야 하는데 안상홍은 이방 나라 한국 사람이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한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3절)라고 한 것처럼 안상홍은 불신자의 가정에서 났기 때문에 불신자는 부모가 아니므로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자라고한다.
이런 터무니 없는 말을 반론 한다는 것 자체가 무가치 하지만 이런 말에 속아넘어가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긴말 할 것 없이 안상홍이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위하 여 들어 가셨느니라(히6:20)
멜기세덱의 반차란 이방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지파인 레위 지파가 아님을말하는 것이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히7:11)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한 것을 어찌 불신의 부모에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이방인 이기 때문에 ‘누가 내 모친이며’(마12:48)라고 부인하셨나? 이는멜기세덱은 혈육이 아님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이지 혈육을 따라 나신 것이아니다. 그러나 안상홍은 그 증인들이 말하듯이 성령으로가 아닌 불신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과 방불(彷佛)하다. 즉, 하나님아들과 같다는 말씀이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아들과 방불하여(히7:3)
6. 안상홍을 오실 자의 표상, 장길자를 실상이라고 한다.
‘안상홍증인회’에서는 기존교회의 모든 진리가 거짓이므로 다시 예수께서 오셔서 알려 주셔야만 한다고 가르치면서 마지막 구원자는다시 오신 예수를 받아 들여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오실 자의 표상(롬5:14)은 안상홍이라고 한다.
하지만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듯이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말씀은 ‘한 사람’이다.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을 때 안상홍이 아니라 아담을 말한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5:14)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사람이 죽 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 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5:15)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많은 사람 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8)
이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하리라 (마24:5)
그리고 안상홍에서는 아담과 같이 영적아내가 있어야 한다며 장길자를 아담의 아내와같이 오실 자의 실상으로서 하나님 어머니라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말씀을 살펴보았듯이 오실 자의 표상은 아담이고 실상은 장길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5:15))이시다. 안상홍에서주장하듯이 아담에게 아내 하와가 있었다고 아담과 같이 영적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아담의 모든 면을 말하려면 예수님도 아담처럼 아내가 있어야하고, 유혹도 받고 범죄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영적 아내도 물론 없었다. 근간에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영화로 기독교계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도 얼마나 무지한 행동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심지어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애인이었다는 글을 읽어 본 적도 있다. 예수님은물론 우리와 같이 육체를 가지신 완전한 인간이시다. 하지만 예수님을 우리와 같이 이성적인 인간으로 생각하면안된다. 예수님을 마지막아담(고전15:45) 혹은 아담의 실상(롬5:15)이라고하지만 아담에게서 갈비뼈하나로 하와를 만들기 이전의 아담을 생각하여 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이성의 존재가 아니라 그 한 몸에 완전한 하나의성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즉,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남자가 아니라 아담의 몸 속에 하와가 있을 때(갈비뼈로 여자를 만들기 전)처럼 이성이 아닌 완전한 독립의 한 성이시다.
예수님의 나심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말한다. 이는 사람의 몸과 피를 받은 것은 아니란말이다. 오직 성령으로서 나신 분이다. 즉, 예수님은 분명한 살의 몸이시고 그 몸 속에는 피가 흐르고 있으나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진 몸이고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우리와는성분이 다른 몸이란 말이다. 그러니 죄가 없으시고 우리를 대속하실 수 있다. 아기가 엄마의 배속에 있지만 엄마의 살과 피와 절대 석이지 않는다. 만약석인 다면 둘 다 죽고 말 것이다. 엄마와 이이의 혈액형이 다른 경우가 그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나셨지만 결단코 마리아의 살이나 피를 석어 태어나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이 느끼는 이성의 감정은 없으시다. 여자에대한 유혹만큼은 없으시다는 말이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이시기에 다른 인간의 모든 유혹(시험)은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일에 우리 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표상은 상징적인 것이기에 실상의 그림자이다.즉, 실상을 증거하기 위한 한 표이다. 그러므로표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상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 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3:5-6)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는 표인데 사환이라고 하며, 그리스도는 실상이며 그의 집 맡은 아들이라고 한다. 모세보다 그리스도가중요함은 두말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이미 앞의 로마서 5장14-15절을통하여서도 살펴보았듯이 오실자의 표상은 아담이고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아담보다 예수그리스도가중요함은 너무 당연한 말씀이다.
안상홍증인회의 주장대로라면 안상홍은 장길자보다 나을 수 없다. 장길자가 안상홍보다 더크고 귀중한 자라는 말이 된다. 안상홍은 표상 즉, 그림자이고장길자는 실상 즉,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 아내란 말이 얼마나 모순인지 알아야 한다. 성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나천사들에게는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
안상홍에서는 갈라디아서 4장 26절을 인용하며 장길자를 말하지만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
21절부터 읽어보면 무슨 말씀인지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육신을 따라 낳은 하갈의 자손 곧 율법의 자손이요. 위에있는 예루살렘은 약속의 자손이요, 성령으로난 자손이라는 말씀이다. 즉,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사래의 자녀요. 약속의 자녀라는것이니 믿음으로 우리가 약속의 자녀라는 것이지 우리에게 영적 어머니 장길자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3)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4:28)
안상홍에서는 장길자를 돕는 배필로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돕는 배필은 불완전한인간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돕는 배필이 필요치 아니하다. 다만 증인으로 세우실뿐이다. 안상홍에서 장길자를 하늘 어머니로 세운 것은 야생마 꿈을 꾸고 그 자리에 장길자가 있었기 때문이라한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요 15:26-27)
안상홍에서 사용하는 신도교육 중급교재 제 3장천국가족과 지상가족에서 '지상의 제도는 하늘의 제도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족제도가 더욱 그러하다.' 라고 하며 히브리서 8장 5절(저희가 섬기는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을 인용하지만, 지상의모든 제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제도의 직분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8:4-6)
7. 삼위일체
안상홍에서는 삼위일체를 ‘한 개의 물질이 변화하여 나타나는 형태’로 혹은 ‘양태론적 해석법’으로설명하고 있다.
“성삼위일체에 대한 문제를 간단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물(H2O)의 상태 변화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물 그 자체는 액체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온도로 내려가게 되면 물은 얼음이라고 하는 딱딱한 고체의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반대로 물을 끊이게 되면 그 물은 수증기라는 기체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물, 얼음, 수증기 이 세 가지 형태는 모양과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그것을구성하고 있는 근본 원소는 똑 같은 물이라는데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라디오의 모노드라마(Mono Drama)와도 같은 것으로써 방송국의 성우 한 사람이 아버지, 아들, 손자 세 사람의 음성으로 극을 엮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아버지의 역할, 아들의 역할, 손자의 역할을 해낸 사람은모두 몇 사람입니까? 바로 한 사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구원사업을 진행하시는데 등장하셔야할 시기와 형태와 그 때마다 불리워질 이름이 다르게 호칭되어진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일인삼역(一人三役)으로 구원사업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을 성삼위일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pp241-243)
하지만 성경에서 표현되어지는 삼위일체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한 개의 물질이 변화하여 나타나는 형태가 다른 것이라면 이는 삼위가 아니라 ‘일위삼변’일 것이다. 삼위란각각 다른 신격이 계심을 말하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다른신격을 가지고 계신 것을 말한다. 성우의 예에서 역할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삼위가 아니라 ‘일위삼역’이다. 안상홍에서는 일인삼역을 삼위일체의 표현이라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보게 된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은 수적으로는 한 하나님이시며, 질적으로 순수한 영으로서 단순하시지만이러한 신적 본체 안에 서로 구별이 되면서도 혼돈 되거나 섞여있지 않은 세 위가 존재한다. 세 위는서로가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한 위가 다른 위에 예속되지 않는다. 삼위는 각 위속에 완전한 신성을갖추고 있으며 삼위의 존재양식을 떠나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하나님은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으로 성자가 없었을 때의 성부를 생각할 수 없으며 성령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에 성부와 성자를 생각할수가 없는 동시선재적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하나님의 신(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 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 노라 하시니라(눅3:21-22)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나를 영 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처음부터 성부, 성자, 성령은 함께 계셨지 안상홍이 말하듯이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시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분명 한 분 하나이시다.
8. 안식일 문제
이제 안상홍에서 주장하는 이단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단에 대하여 말하면서 제일먼저 안식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말씀의 뜻을 낱낱이 말할 필요도 없이 결론을 말할 수 있으나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의미로 그들이 인용하는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한다.
안상홍에서 인용하는 말씀 대부분이 구약 성경이다. 신약의 말씀을 두 곳 인용하는데 우선한 곳이 누가복음 4장 16절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성경 을 읽으려고 서시매(눅4:16)
이 말씀을 가지고 안식일은 예수님 자신의 규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규례란 혼자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사람들의 일정한 규칙과 일정한 사례을 말하는 것이다. 혼자의 행동은 습관(눅22:39)이며, 굳이 말하려면 규범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17:2)도 같은 뜻으로 이는 유대인의규례임을 말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유대인답게 사는 것이고 이방인은 이방인으로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예수님도 바울도 저희(유대인)을 오해케 하지 않고 아무쪼록 복음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규례를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먼저 오르 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 시니라(마17:27)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 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20)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는가? 복음적으론할례를 행하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지만 유대인을 위하여 행한 것뿐이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할례 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행16:3)
그리고 안상홍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로하여금 살게 하고자 안식일의 규례를 주셨습니다.’(내양은 내음성을 듣나니p35)라고 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만일 능히 살게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3: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그 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정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가 이단이고 유대인 만의 규례가 아니라고 한다면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 당연히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여야 하겠지만 사도들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것과 음행 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행15:19-20)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잘 되리 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29)
라고 했다. 물론 이것도 구원의조건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격동치 않게 하고 믿음의 공동체적 조화를 위해서 였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돌아오는 자들에게 한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 말씀도 안상홍에서는 자신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즉, ‘이방인이 할례는 행하지 않아도 되지만 안식일은 모든 기독교인이 다 지켜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은 언급할 필요조차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믿거나, 행하거나 하여야 할 것이 마땅하다고 언급할 필요가 없이 묵인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사도행전 15장을 읽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할례의 질문에 대하여 할례의 문제만 말하지 않고 우상의 제물, 피, 음행 등을 말한 것은 꼭 지켜야 할 것들을 말한 것이다.(이미 구원의조건이 아니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7장 22절부터 23절을 보면 할례와 안식일의 차이를 잘 알 수 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 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 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 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노여워하느냐(요7:22-23)
율법의 대표적인 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할례이고 할례를 위하여는 안식일도 범한다는말이다. 안식일이 할례보다 중요하다면 안식일을 범하면서까지 할례를 받을 수는 없다. 율법을 폐하지 않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는 것이다.(안상홍에서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5:17)를 인용한다.) 그러므로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방인처럼 그냥 일하고 하루 쉬는 것뿐이다. 할례의 문제 속에는 모든 율법의 문제가(안식일 까지도) 담겨져 있는 것이다. 할례는 모든 율법의 시작이고 근원이다. 그러므로 할례가 폐하여진 것은 모든 율법이 폐하여진 것(완성의 차원)이다.
어리석게도 안상홍에서는 요한복음 13장 15절을인용하면서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본을 보여 주신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긴말할 것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의 본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안상홍에서 가장 많이 기독교를 힐문하는 것이 일요일 예배이다. 물론 여기에서 나는 분명한일요일 예배를 성경에 근거하여 말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먼저 선행되어 알아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일요일(주일 혹은 주의 날) 예배가 구약의 토요일 안식일 예배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약의 안식일토요일이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 등의 이유로 일요일이 안식일로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고 주일 예배를 마치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로 생각하는것은 모순이다. 안식일은 안식일일 뿐이고 주일은 주일인 것이다. 주일이결코 토요일적인 안식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토요일뿐만이 아니라 성일(유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등)을 안식일로 지킨 것이다.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레23:5-7)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민28:26)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레23:24)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레16:29-31)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도 더 이상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십계명의 제4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 주일은 성일이기때문에 거룩한 안식일인 것이다.
물론 안식일을 지킨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구원의 조건도 아니다. 다만 성경에서는 이런 날의 개념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을 약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 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두려워 하노라(갈4:9-11)
날은 안식일, 달은 월삭 즉, 번제일 절기는 유월절이나 칠칠절, 초막절 등을 말한다.
유월절 등 절기를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안상홍의 거짓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 라(골2:14-16)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은 폄론할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한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마음에 확 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 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 하느니라(롬14:5-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하면 좋다는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과 절기는 이단의 기준도 아니고 구원의 조건도 아니다. 물론 여기서 주란 안상홍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
안상홍에서는 창세기 2장 1절부터 3절까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고 하는데, 창세기 2장 1-3절에서는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 뿐이다. 즉, 모든창조를 이루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결코 창세기 2장 1-3절에서 ‘안식일’이라는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창세기 2장 3절에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3)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다른날과 구별된 날’이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아직 인간의범죄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이 여세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는 반복의 안식일이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계속적인 안식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일곱째 날로부터는 계속하여 안식을 주시는 거룩한 날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사람이 지음 받기 전의 날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날들임이다.
사람은 여섯째 날에 지음을 받았고 지음을 받고 첫날을 맞이하는 날이 거룩한 날이었다. 즉, 사람에게 주어진 날은 거룩한 날이라는 말씀이다. 이 거룩한 날은하나님 안에서 계속되어지는 것이다. 칠일마다 하루씩 반복되는 안식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육일의 일이 반복하여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과인간은 계속적으로 거룩의 만남과 관계만이 있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곧 계속적인 안식일, 거룩한 날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여세동안 수고하였기 때문에 안식일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여세동안일하지 않은 사람은 안식일을 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아니하다. 안식과안식일은 수고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물로 맞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지고첫날을 맞이하는 바로 그 날이 거룩하고 복된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언급된 곳은 출애굽기 16장 23절 말씀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거 룩한 안식일이라(출16:23)
이 말씀의 이해를 위하여 17절부터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는 부분에서 평일에는 일용할 양식을거두게 되었다. 많이 거둔다고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다고 부족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만나를 하나님께서 먹이셨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 나니(요6:31-32)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노력의 대가가(많이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되어지는 말씀이다. 그런데 제 육일에는 모든 사람이 평일의 두 배를 거두었다. 오일동안은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는데 육일 째에는 모두가 두 배의 만나를 거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 육일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식하게 하신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조건적 계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안식을 주시는 것이다. 안식을 주시며 안식을 누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하신 말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담 이후 잃었던 하나님 은혜의 안식을 다시금 알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거룩한 안식일이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거룩한 안식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날을 지키기 때문에 거룩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복을 주시기 때문에 안식일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서 그 날을 더럽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럽히는 것이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자는 죽 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출31:14)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안식의 은혜는 안식일이 아니라 에덴동산의 모든 날이었다. 하지만 아담은 그 은혜를 지키지 못하고 더렵혔다. 오늘 이스라엘백성들 역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미리 만나를 주셨고 쉬게 하셨는데그 쉼을 누리지 못하고 그 날을 더럽히는 자들이다.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출16:27)
우리들에게는 안식으로 에덴동산을 주시지 않았다. 물론 안식일과 같이 어느 특정한 날을 주시지도 않았다. 오직 우리에게안식으로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12:8)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을 지킨다는 것은 안식일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지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지키는 것이다.
안상홍에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자신의 날(주의 날)로선포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1절부터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물을 먹은 다윗과 그 일행의 예를 말씀하시며 피곤에 지쳐 있었던 그들에게 쉼을 주기 위하여진설병을 준 것에 대하여 옳음을 말씀하셨으며, 제사장들이 안식일 사람들의 죄를 사함 받게 하려고(참 안식을 얻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일들이 죄가 아님을 지적하시면서자신은 자비(자신이 은혜로 주시는 안식)를 원하고 제사(안식을 얻기 위한 율법의 대표적 행위)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참 안식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안식일의주인이라는 것은, 안식일이(사람이 안식일을 지키므로=율법적 행위)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예수)이 안식을 주는 자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말씀이 또 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아니 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3:18-19)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 4:1-2)
이상의 성경을 보더라도 안식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안식일 날이 주는 것이아니며,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안식을 누리는 것이지 안식일을 지키는 자가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0장 8절부터 보면 안식일을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 주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 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
물론 칠일 중에 하루를 기억하여 거룩한 날로 지키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 날이 진정 안식의 날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설명하였듯이 처음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주었던 안식을기억하고 또한 현재의 안식(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지키는것이 장래의 첫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것 즉, 믿음 안에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자는 결코 장래에도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안식의 그림자를 바라며 믿음의 은혜를 지키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지키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통하여 보았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쉬셨다 하 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 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 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4:4-11)
제 칠일에 관한 것은 날이 아니라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있다.
그러므로 복음에 순종하지 못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고 무가치한 것이다.
9. 일요일(주일) 예배
이제 우리가 일요일(주일) 예배를 드리는 정당성을성경에 의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구약에서는 ‘주의 날’(헤 헤메라 [투] 큐리오)이라고 하면심판이나 임재 등의 의미로 사용되어진다. 물론 안식일을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하셨기에 주의 날이라고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베드로후서 3장 10절과 12절 등에서 심판이나 임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지기도하지만, 주의 날의 요한계시록 1장 10절 말씀은(헤 큐리아케 헤메라)‘주께 속한 날’이라는 뜻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날이다.
주의 날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날이라고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 붙인 것이다.물론 주의 날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날을 말하기도 하지만, 신약 성경의 한결같은 의미가 예수님과관련되지 않은 하나님의 날이란 없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체질이 뜨거 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3:12)
계속되어지는 역사의 배경을 살펴보아도 이를 잘 증명하여 준다.
그러면 왜 요한이 주의 날이라는 말을 했을까? 무엇을,무슨 사건이나 일을 생각하면서 주께 속한 날이라는 말을 했을까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선 계시록 1장 9절의 말씀을 보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말씀과 예 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
라고 한다. 증거란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이고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그의 증거의 핵심은 죽음과 부활이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자들의 손 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3-24)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2)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입었 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 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1:1-4)
부활은 분명 주의 영광이며 승리였다. 그리고안식이 하나님께만 거룩한 날이 아니라 인간에게 거룩하고 복된 날이었듯이 부활 또한 우리에게 새로운 성취였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살아나셨 느니라(롬4:25)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확증의 순간이다. 또한 부활의 사건은 죄에 대한 해방이요. 죄에 대한 해방은 곧 사망에대한 승리이고 이김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 을 것이요(고전15:17)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우리에 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6-57)
예수님께서 영광과 승리를 얻고, 우리가의를 입으며 모든 죄의 짐을 벗고, 아담 이후 잃었던 새로운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날, 요한은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하는 섬에 있으면서 주의 날이라고 하였던 요한, 요한은 예수의 증거의 핵심인 부활의 날을 주의 날이라고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한 주의 날이란 안상홍에서 주장하는‘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자신의 날(주의 날)로 선포하신 것이다.’의뜻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이란 예수님께서 새로운 의의 세계를 여신 날이다. 이미 안식일에 관하여도 언급을 하였지만 하나님과 범죄 전의 아담에게 있어서 안식일이란 반복적으로 6일이 지나고 7일째가 아니라 계속되어지는 안식일만 있을 뿐이라고하였듯이, 주의 날 역시 그러하다. 7일마다 주기적으로 하루가주의 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 후 계속되어지는 모든 날이 주의 날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6일 동안 사망이나 죄에게 내어놓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자들은할 수만 있다면 매일 모여 주의 복된 날을 누리며 살았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마음 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 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6-47)
안상홍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절기를지킨다고 말하면서 부활을 말하지만, 부활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예수님의 부활은 절기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신앙의 삶의 원동력이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6:10-11)
3세기 초반기 경의 신학자인 오리겐은 “주의날 같은 날을 습관적으로 준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접하게 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생각과말과 행위에 있어서 주님 즉, 말씀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의모든 생애가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이므로 당연히 그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의 날을 지켜야 한다.”(AgainstCelsus,22장)라고 하였다.
초기 기독교인은 대부분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 후 첫날 주일도 지켰던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 17:2)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20:7)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것 같이 너희도그렇게 하 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1-2)
그러나 주일은 꼭 쉬었다는 것이 아니라 떡을 나누며 예배를 드리는 모임으로서, 특별한 봉사의 날로 지켜진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이미밝혔다. 오직 유대인을 위한, 유대인과의 관계 때문이다. 복음에 장애를 받지 않기 위하여서였다. 오늘 날 우리는 토요일 안식일이마치 주일(일요일)로 바꾸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그렇지 아니하다. 안식일은 안식일이고 주일은 주일일 뿐이다. 이는처음부터 달랐고 의미도 다르다. 물론 인간에게 안식을 준다는 의미는 같고, 우리가 주일을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이미 안식일에 관한 부분에서 말씀을 통하여 보았듯이 모든 성일을안식일로 하여 거룩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쉬는 휴식을 뜻하고 주의 날은 부활의 승리를 뜻한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라고한다면 주의 날은 깨어나고 활동하는 날이다. 저스틴이 말하였듯이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드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를 처음 시작하신 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고 하였다. 창조를 처음 시작하신 날, 물론천지 창조의 첫날이기도 하지만 부활의 첫 열매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되셨도 다(고전15:20)
잠자는 자는 쉬지만 깨어있는 자는 일한다. 예수님은살아 계시고 깨어 계셨기에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그것도 안식일 일을 하시면서말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예수 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5:16-17)
지금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쉴 때가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을할 때이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라면 주의 날은 일하는 날이다. 영혼을위하여 일한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며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한다. 초대교회는 그러기 때문에 주의 날 쉬지 않고 모여 예배드리고 봉사하며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오직 하늘의 안식, 참 안식을 바라면서 말이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우리로 또 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우리가 주일 날 단순히 쉰다면 이는 아직도 바른 주일을 지킨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육신의 일을 하는 것이 주일의 의미는 물론 아니다. 이미우리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우리가 다시 그 가운데 살수는없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
이제 역사적으로 주일 모임(예배)에 관한 증거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안디옥 교회의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는 2세기 초반 경에 마그네시아교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었는데 그 서신 중에 처음에는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를 신봉하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안식일을 준수하지아니하고 주의 날을 준수함으로서 생명에 넘치는 생활을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새로운 소망을 지니게되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생활에 활기를 더하고 있다.”(Magnesians9:1-3)
사도 교부 문서 중의 하나인 디다케는 2세기초반기 경에 쓰여졌는데 그 문서에서는 주의 날에 드린 예배 의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다.
“매주일 주의 날에 모든 교인들이함께 모여 떡을 뗄 것이며 각자의 죄를 고백한 후 주께 감사를 드리라. 이것이 바로 너희가 드릴 신령하고온전한 예배이니라”(Didache14:1)
순교자 져스틴(A.D.100-165)은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하였다.
(1) 주일은 하나님께서 그의창조를 처음 시작하신 날이기 때문이고
(2)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First Apology67장)
리용의 주교를 지냈던 이레니우스(A.D.140-200)는 A.D.178년에 로마의 주교 빅토르와 서신을 교환하였는데 그 서신에서 그는 많은 논쟁이 되어 왔던 문제 즉, 부활절을 주일에 지켜야 하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그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기념하는행사는 주의 날 이외의 다른 어떤 날에도 행해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Eusebius, Church History, Bk.V,24장)
3세기 전반기 경의 변증론 자였던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에게 쓴 그의 서간문에서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는 안식일이나 유대인이 지켰던축제일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이방교의 축제일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렇다. 우리는 주의 날과 기독교인의 축제일, 예를 들면 오순절 같은 날을가장 엄숙하게 지켜야 한다.”(On Idolatry,14장)
또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그의 다른 서간문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우리모두는 무릎을 꿇지(우상을 섬기는 행위) 말아야 하며 근심의원인이 되는 모든 사무를 멈추어야 한다. 심지어는 사탄이 틈탈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각 개인의볼일까지도 다음 날로 연기해야 한다.”(De Oratione,23장)
그리고 앞에서 이미 오리겐의 말을 인용하였듯이
“주의 날 같은 날을 습관적으로준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접하게 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주님 즉, 말씀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의 모든 생애가 모두 주님께속한 것이므로 당연히 그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의 날을 지켜야 한다.”(Against Celsus,22장)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상의 역사적 사실들을 통하여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그의 후계자인 주교들, 그리고 교부들이나 지도자들에게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주의 날(일요일)의 예배 행위가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주의 날에 대한예배 행위를 위하여 안식일과 같이 휴일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토요일 안식일의 의미로 지킨다거나 토요일이 안식일로 바꾸어진안식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주의 날’을살아야 한다. 하지만 계명에서의 안식일처럼 주의 주시는 은혜와 안식과 영광을 생각하며 우리는 주기적으로도주일을 지켜야 한다. 이는 오직 기념하는 것이다. 절기도안식일도 기념하고 기억하라는 말씀을 하나님은 늘 강조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출20:8)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 22:19)
일주일에 한번 주일을 지키기 위하여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우리의 삶, 날들이 주의 날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이미 안식일을 다루며 말한 바이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의 은혜와 영광과 우리의 참 안식을 기억하고 기념하지못하는 자가 매일의 삶에서 주의 날로 살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상홍에서 뿐만이 아니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자들은, 일요일 예배는 태양신을 섬기는 것이고 A.D.321년에 콘스탄틴황제에 의하여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꾸어 진 것이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아니한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초기 변증론자들도 주의 날과 태양신의 날이 같음을 인식하고 무릎을 꿇지 말아야 된다고 이미 오해의 소지를 경고하였다.
분명한 것은 일요일이 휴일로 제정되기 전에도 계속하여 기독교에서는 주의 날로 예배를 드려왔다. 물론태양신일과 날이 같긴 하지만, 날이 같다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면 누가 기뻐하고좋아하겠는가? A.D.321년엔 다만 일요일이 공식적인 휴일로 제정됨으로서 우리가 안식일 날을 바꾼것이 아니라, 예수님 부활이후 주의 날로 영광을 돌리며 은혜를 누리던 우리에게 유익한 날들이 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