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4월(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戊寅)
◯ 정릉에 가다
◯ 목성이 적시성을 범하다
◯ 궁성 감역관 정의 등 16인을 귀양보내다
◯ 각도 경차관이 어량의 장부를 만들고 세를 거두어 유비창에 들이다
◯ 간관 박신 등이 관작을 줄이고 녹과전을 감할 것을 건의하다 간관(諫官) 박신(朴信)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전조(前朝)의 말엽에 관작(官爵)이 쓸데없이 많아서, 양부(兩府)의 수효가 많기가 70에 이르렀었는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에 감(減)하여 줄였사오나, 10년이 되지 못하여 수효가 56에 이르렀습니다. 주관(周官)의 제도를 보건대, 오직 삼공(三公)·육경(六卿)으로 천하를 다스렸사옵고, 지금 명나라 조정에서도 또한 육부(六部)로 다스리는데, 오직 우리 나라는 땅이 천리에 불과하면서도 재상(宰相)의 많기가 배(倍)나 될 뿐만 아니어서, 떼로 나오고 떼로 물러가니 명기(名器)가 심히 넘치옵니다. 비록 주관(周官)과 명나라 조정은 본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원하옵건대, 상의(商議)의 직임(職任)과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신설한 직책을 없애고, 한성부에도 또한 윤(尹) 하나만을 두고, 그 나머지 작은 벼슬은 없애고 합병할 수 있는 것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상정(詳定)하게 하여 시행하소서. 또 충신 한 사람에게 녹(祿)을 중하게 하는 것이 비록 선비를 권하는 방도는 되오나, 저축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하는 것이 실(實)은 국가의 좋은 계책이 되옵니다. 전하께서 녹봉(祿俸)이 부족함으로써 호조(戶曹)와 급전사(給田司)에 명하여 녹과전(祿科田)을 더 정하게 하셨으니 참으로 후(厚)한 일입니다. 그러하오나 여러 도(道)의 밭이 각과(各科)의 이미 정한 것을 제외하면 군자(軍資)에 속하는 것이 10만여 결(結)에 불과하온데, 매양 묵고 손실[陳損]된 것으로 인하여 조(租)로 들어오는 것이 실상은 적사오니, 만일 녹과(祿科)로 옮기어 정한다면 축적(蓄積)에만 절핍(絶乏)이 생길 뿐 아니라, 중외(中外)의 연례(年例)의 용도도 또한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변경(邊警)이 있다면 무엇으로 응하겠습니까? 하물며, 원래 정한 녹과(祿科)의 조세(租稅)도 수운(輸運)하기가 어려워서 오히려 시기가 뒤지고 있사온데, 지금 또 더 정한다면 민력(民力)이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삼사(三司)로 하여금 그 원래 액수를 상고하여 녹과를 알맞게 감(減)하고, 군자전(軍資田)으로 더 정하지 말아서 저축에 대비하고, 민력을 유족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양부(兩府)에서 상량(商量)하여 감하여 덜라."
◯ 광주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한 종을 보다. 군사 1,300명을 동원, 서울 종각 아래에 옮기다 광주(廣州)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鑄造)한 종을 보고 제조(提調) 권중화(權仲和)에게 안마(鞍馬)를 내려주고, 좌·우도(左右道) 군사 1천 3백 명을 풀어서 시가(市街)의 누(樓) 아래에 수운(輸運)하여 놓았다. 처음에 종을 주조하라고 명하고, 조금 있다가 시가(市街)에 누(樓)를 짓고 권중화와 이염(李恬)으로 제조관을 삼았었는데, 염(恬)은 성질이 강퍅(剛愎)하여 제 마음대로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아서, 세 번이나 주조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오로지 중화(仲和)에게 맡기니, 중화가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청취하고, 또 교묘한 생각을 써서 한 번에 주조하여 만드니, 임금이 기뻐하여 이 상(賞)이 있었던 것이었다.
◯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이 지은 종의 명(銘)과 그 서문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學士)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종(鐘)의 명(銘)을 지었는데, 그 서문(序文)은 이러하였다.
"조선(朝鮮)이 천명(天命)을 받은 지 3년에 도읍을 한수(漢水) 북쪽에 정하고, 이듬해에 비로소 궁침(宮寢)022) 을 경영하고 그해 여름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큰 종을 주조하여 이미 완성되매, 큰 시가(市街)에 누각(樓閣)을 세워서 달았으니, 성공한 것을 새기고 큰 아름다움을 길이 전하자는 것이다. 옛날로부터 국가를 차지한 자가 큰 공을 세우고 큰 업(業)을 세우면 반드시 종(鐘)과 솥[鼎]에 새기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소리가 갱갱(鏗鏗) 굉굉(鍧鍧)하여 후인(後人)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시키고, 또 통도(通都)와 대읍(大邑) 가운데에서 새벽과 어둘 무렵에 쳐서 인민의 일어나고 쉬는 시한(時限)을 엄격하게 하니, 종의 쓸모가 크다. 공경하여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로부터 덕망(德望)이 날로 높아져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귀부(歸附)가 저절로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어진 사람들이 힘쓰고 보좌하여 모두 그 지력(智力)을 다해서 하루아침에 고려씨(高麗氏)를 대신하여 차지하고, 소의 한식(宵衣旰食)하며 생각을 다하여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베풀어서 자손 만대의 태평을 기초하였으니, 공(功)은 세워졌고 업(業)은 정하여졌다고 이를 만하겠다. 이것을 마땅히 새기어 밝게 후래(後來)에 보여야 하겠다. 또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천지(天地)의 대덕(大德)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대보(大寶)를 위(位)라고 하는데, 무엇으로 위(位)를 지키는가? 그것은 인(仁)이다.’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천지(天地)의 생물지심(生物之心)으로 마음을 삼아서 확충(擴充)하기 때문에 능히 그 위(位)를 보유(保有)함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나 그 마음은 한가지인 것이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시는 날에 군사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중외(中外)가 편안하고 조용하여, 백성이 학정(虐政)에 시달리던 자가 모두 생생(生生)의 낙(樂)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호생(好生)의 덕(德)이 더할 수가 없으므로 이것을 더욱 명(銘)하지 않을 수 없다."
명(銘)에는 이러하였다.
"심원(深遠)하신 우리 임금께서 천명을 받은 것이 넓고 컸다. 이에 와서 새 도읍을 세우니 한수(漢水) 북쪽이었다. 옛날 송도(松都)에 있었을 때에 국운(國運)이 쭈그러들어, 우리 임금께서 이를 대신하여 포학을 덕으로 제거하였다. 백성이 전쟁을 보지 못하고 일조(一朝)에 청명(淸明)하여졌고,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힘을 다하여 태평을 이룩하여 놓았다.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귀부(歸附)하여 이미 많아졌고 이미 번성하여졌다. 이에 저 종(鐘)을 주조하여 새벽과 저녁에 소리를 울리게 하고, 내 공(功)과 내 업(業)을 이에 새기고 이에 파낸다. 신도(新都)를 진압하는 것이 천만년이리라."
◯ 삼사에 명하여 염세 및 어량과 고깃배의 세금을 조사하게 하다 삼사(三司)에 명하여 각도의 경차관(敬差官)과 함께 바다를 졸이[煮海]고 모래를 굽[燔沙]는 염세(鹽稅)의 다소(多少)와, 어량(魚梁)과 선세(船稅)의 다소(多少)를 조사하게 하였다.
◯ 양천이 분명치 않은 자에 대한 처리 방법 등을 노비 변정 도감에 지시하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도당(都堂)에 전지(傳旨)하였다.
"근자에 변정 도감(辨定都監)에서 신청한 양천(良賤)에 대한 일은, 양인(良人) 적(籍)이 명백한 자는 양인(良人)이 되게 하고, 천인(賤人)의 적(籍)이 명백한 자는 천인(賤人)이 되게 하며, 양천(良賤)의 적(籍)이 함께 명백하지 못한 자는 몸은 양인(良人)이 되게 하고 역(役)은 천역(賤役)으로 결정하여 관사(官司)의 사령(使令)으로 정속(定屬)시킨다 하였는데, 지금 선주참(宣州站)과 영주참(寧州站)에 소속된 문적[文契]이 명백하지 못한 자가 변정 도감에 양인(良人)으로 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 문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몸은 양(良), 역(役)은 천(賤)으로 결정하여 도로 두 참(站)에 소속시키면 반드시 천례(賤隷)와 똑같이 역사(役使)시킬 것이니, 연대가 오래되면 영영 노비(奴婢)가 될 것이다. 그 원통하고 억울함을 펼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양적(良籍)이 분명하지 못한 자는 외방 각 고을에 소속시키지 말고, 경중(京中) 각사(各司)의 사령(使令)과 성문(城門)·원관(院館)의 파직(把直) 같은 것에 정속(定屬)시키도록 허락하여, 특별히 보기드문 공(功)을 세운 자가 있으면 마땅히 벼슬과 상(賞)을 주고, 그 딸자식과 외손은 영구히 양인이 되게 하라."
◯ 임금이 마전포에서 돌아오다
◯ 간관이 아일마다 조회 받을 것과 종 운반을 대장(隊長)에게 시킬 것을 아뢰다 간관(諫官) 박신(朴信) 등이 대궐 뜰에 나아와서 아뢰었다.
"옛날 제왕(帝王)은 매일 조정에 임하여 친히 만기(萬機)를 결단하였사온데, 지금 국조(國祖)에서는 여섯 아일(衙日)을 당하면 정전(正殿)에 앉아 조회를 보는데도, 오히려 조회를 폐한 것이 지금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매양 아일(衙日)을 당하면 정전(正殿)에 앉아 조회를 받고 만기(萬機)를 친히 하소서. 또 때가 바야흐로 농삿달이어서 촌음(寸陰)도 오히려 아끼옵는데, 지금 농민을 발하여 큰 종(鐘)을 운반하오니 참으로 미편(未便)하옵니다. 원하옵건대, 대장(隊長)·대부(隊副)로 하여금 수운(輸運)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말한 바가 옳다. 그러나 조금 병(病)이 있고 천기(天氣)가 아직 차서 조회를 보지 못하였다. 장차 청(請)한 것과 같이 하겠다. 종(鐘)을 운반하는 폐단은 나도 또한 심려(深慮)하나, 명령이 나간 지가 며칠이 되었으니, 군현(郡縣)에서 반드시 소집(召集)하였을 것이다."
이에 예조(禮曹)에 명령하였다.
"이제부터 매양 조회하는 아일(衙日)에 전서(典書) 이하가 뜰에 들어와서 반열(班列)을 정한 연후에야, 내가 나가서 조회를 보겠다."
◯ 서리가 내리다
◯ 익명서를 만들어 전 현령 이적을 무고한 김귀생을 사지를 찢어 조리 돌리다 전 산원(散員) 김귀생(金貴生)이 익명서(匿名書)를 만들어 전 현령(縣令) 이적(李迪)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誣告)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지(四肢)를 찢어서 조리 돌리었다. 처음에 귀생(貴生)이 적(迪)과 더불어 노비(奴婢)를 가지고 다투어 틈이 생겼었는데, 도당(都堂)에서 익명서(匿名書)를 보고서 적(迪)을 신문하기를,
"네 원수가 누구냐?"
하니, 적(迪)이 말하기를,
"오직 귀생뿐입니다."
하였으므로, 도당(都堂)에서 곧 사람을 시켜 귀생(貴生)을 잡고 그 집을 수색하였더니 과연 익명서(匿名書)의 초본(草本)을 얻었다.
◯ 서북면 영원진을 영청현에 합하여 영녕현으로 개청하다
◯ 천둥치고 눈이 내리다. 임금이 마전포에 가다
◯ 서리가 내리다
◯ 양가 도승통 상부가 중이 술마시는 것을 금할 것을 청하다 양가 도승통(兩街都僧統) 상부(尙孚)가 중[僧]이 술 마시는 것을 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헌사(憲司)로 하여금 엄히 금(禁)하게 하고, 이를 범(犯)하는 자는 머리를 길러 충군(充軍)하게 하였다.
◯ 동교에 거둥하여 목마장을 시찰하다
◯ 여장(女裝)으로 박수 노릇하며 백성들을 속인 복대를 복주하다
◯ 종루에 거둥하여 종 다는 것을 보다
◯ 겸 서운 주부 김서가 월식을 예측하여 아뢰었는데 끝내 월식이 없었다
◯ 임금이 조회를 보다. 산남왕 온사도가 조회에 참석하다
◯ 경복궁 왼쪽 산등성이의 소나무가 마르다
◯ 대마도 사자가 오다
◯ 월식을 오보한 김서를 견책하고 늦게 논죄한 헌부의 관리에게 일을 보지 말게 하다 간관(諫官) 박신(朴信) 등이 상소(上疏)하였다.
"겸 서운 주부(兼書雲注簿) 김서(金恕)가 월식(月食)을 추산(推算)하여 예조에 고하였으나 끝내 월식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서(恕)는 직책이 추보(推步)를 전문으로 하면서, 이제 천상(天象)에 혼미(昏迷)하여 나라 사람들을 속이었사오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직첩을 거두고 율(律)에 의하여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이때에 이르러 소(疏)는 올렸으나 아직 아뢰지는 않았으므로, 임금이 간관(諫官)·헌사(憲司)·형조(刑曹)를 불러 꾸짖었다.
"일관(日官)이 추보(推步)를 잘못하였으니 마땅히 그 죄를 의논하여야 할 터인데, 맡은 바 법관(法官)이 내버려두고 묻지 않으니 죄가 또한 같다. 김서(金恕)의 잘못은 사람들이 함께 다 보는 것인데 오히려 말을 하지 않으니, 과인(寡人)의 실덕(失德)과 재상(宰相)의 과실을 어찌 말하겠는가?"
잡단(雜端) 전시(田時)가 대답하였다.
"장무(掌務) 시사(侍史) 윤창(尹彰)이 견책을 당하여 집에 있으므로, 신 등이 모두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형조 정랑(刑曹正郞) 유영문(柳榮門)은 대답하였다.
"형조에 일찍이 교지(敎旨)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탄핵하지 못하였습니다."
보궐(補闕) 허지(許遲)는 대답하였다.
"소(疏)를 이미 올렸습니다."
임금이 오히려 간관(諫官)이 죄주기를 청한 것이 늦다 하여 박신(朴信)과 허지(許遲)로 하여금 일을 보지 말게 하였는데, 소(疏)를 보고 나서 서(恕)를 죄주기를 상신(上申)한 대로 하였다.
◯ 헌부에게 일을 보게 하다
◯ 오랜 가뭄 때문에 산천에 비를 빌다
◯ 정도전과 권근을 성균관 제조로 삼아 3관 유생 등을 모아 경사를 강습케 하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화산군(花山君) 권근(權近)으로 성균관(成均館) 제조(提調)를 삼아, 현임(現任)·한량(閑良) 4품(品) 이하의 유사(儒士)와 삼관(三館)의 유생(儒生)을 모아 경사(經史)를 강습(講習)하게 하였다.
◯ 종묘·사직·원단과 용추에 비를 빌다 용추(龍湫) : 폭포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있는 웅덩이.
◯ 환관 이광에게 궁금 숙위의 일을 맡기고, 조순에게는 왕명의 출납 등을 맡게 하다 환관(宦官) 이광(李匡)으로 궁금(宮禁)의 숙위(宿衛)를 고찰하고 신문(申聞)하는 등의 일을 맡게 하고, 조순(曹恂)으로 명령을 출납(出納)하고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등의 일을 맡아, 항상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임금이 순(恂)에게 하교(下敎)하였다.
"너의 죄악이 대간(臺諫)의 말한 바로써 본다면, 비록 성문(城門)이라도 다시 들어 올 수가 없는데 하물며 궁금(宮禁)이겠느냐? 너는 허물을 고치고 근신(謹愼)하라."
◯ 형률의 적용이 엄정하게 시행되도록 하는 방안을 형조에서 건의하다 형조 전서(刑曹典書) 유관(柳觀)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형옥(刑獄)의 관리는 인명(人命)이 매여 있어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적에 고요(皐陶)가 사사(士師)가 되었을 때에 전형(典刑)으로 보이고 오형(五刑)025) 을 귀양[流]으로 용서하며, 편(鞭)026) 으로 관형(官刑)을 만들며, 복(扑)027) 으로 교형(敎刑)을 만들며, 금(金)으로 속형(贖刑)을 만들었사오니, 대개 형(刑)이란 것은 다스림을 보좌하는 제도이므로 성인(聖人)도 마지 못하여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법을 범한 것이 중하여 오형(五刑)에 들면 그 법으로 죄를 주고, 경(輕)하여 편복(鞭扑)의 형에 들면 또한 그 법으로 죄를 주며, 혹 중하거나 혹 경하거나, 정상이 불쌍하고 법에 의심나는 것은 귀양으로 용서하고, 금(金)으로 속죄(贖罪)하거나 하여, 흠휼(欽恤)하는 뜻이 모두 그 사이에 들어 있사오니, 진실로 만세(萬世)에 형(刑)을 쓰는 자의 준칙(準則)이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오형(五刑)에 유유(流宥)는 있어도 금속(金贖)은 없었는데, 주 목왕(周穆王)에 이르러 비로소 오형(五刑)의 속(贖)이 있었으니, 예전 제도가 아닙니다. 후세에 이를 인습하여 마침내 부유한 자는 죄를 면하고 가난한 자는 형(刑)을 받게 하였으니, 대단히 성인(聖人)의 형(刑)을 제정한 본의(本意)가 아닙니다. 대개 사람의 죄가 경(輕)한 데에 들어서 의심스러우면 속(贖)하게 하여 자신(自新)하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가하옵지마는, 중(重)하고 의심스러운 자를 또한 속(贖)하여 준다면 사람이 법을 범하는 것을 경(輕)하게 여기어 장차 그 폐단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사람이 장(杖) 60, 도(徒) 1년 이상의 죄를 범한 자는 비록 정상과 법이 의심스럽더라도 속(贖)을 허락하지 말고, 다만 도(徒)와 유(流)를 써서 용서하되, 그 죄의 경중에 따라서 그 땅의 잇수(里數)를 달리 하여 간궤(奸宄)한 자를 징계하고, 단방(斷放) 이하의 죄를 범한 자도 또한 정상과 법이 의심스러운 연후에야 속(贖)하여 주면 거의 율문(律文)에 어그러지지 않고 예전 제도에 합할 것입니다.
장물(贓物) 계산에 따르는 죄는 율(律)에 상고하면 감수(監守)하는 자가 스스로 도둑질한 자는 장물이 40관(貫)이 되면 극형(極刑)을 당하게 되어 있사온데, 지금 상포(常布) 5필(匹)을 1관(貫)으로 계산하면, 베[布] 2백 필이 40관에 해당하오니, 사람이 베 2백 필을 도둑질하고서 극형을 당하는 것은 대단히 불쌍한 일입니다. 또 곤장 1백을 때릴 자를 베 30필로 속(贖)을 받는다면 형(刑)을 가볍게 하는 잘못이 있사오니, 형을 쓰는 중도가 아닙니다. 비옵건대, 상포(常布) 15필로 돈[錢] 1관(貫)에 해당하게 하면 6백 필 이상을 도둑질한 자라야 극형에 해당하게 되고, 곤장 1백을 때릴 자는 베 90필을 속(贖) 받으면 형(刑)과 속(贖)이 또한 경중의 마땅함을 얻을 것입니다.
또 율(律)에 상고하면 사람이 법을 범하는 것이 지극히 여러가지이온데, 율에는 똑바른 조문[正條]이 없는 것이 십상팔구(十常八九)나 되어서, 죄를 처결하는 데에 경중을 잃는 것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오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전 말에 이르기를, ‘땅을 그어서 옥(獄)을 만들더라도 들어가지 않기를 의논하고, 나무를 새기어 아전[吏]을 만들더라도 대(對)하기를 기약하지 않는다.’ 하였사오니, 이것은 모두 아전을 미워하기를 심하게 하는 비통한 말입니다. 아전이 형옥(刑獄)으로 출신(出身)하면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옥(獄)을 다스리는 자가 대개는 무식한 사람이 많아서, 율문(律文)을 자세하게 익히 알아서 그 임무에 당하지 못하옵고, 형(刑)을 맡은 관리가 되어도 또 율문에 유의하려고 하지 않아서, 무릇 사람의 죄의 출입(出入)과 고하(高下)를 한결같이 율학(律學)을 한 사람에게 맡기오니, 이것이 율을 적용할 때에 경중(輕重)의 적당함을 참작하지 못하여 마땅히 경하게 할 자는 도리어 중하게 되고, 마땅히 중하게 할 자는 혹 가볍게 되는 까닭입니다. 어찌 다만 법률에만 어그러질 뿐이겠습니까?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되, 율에 똑바른 조문[正條]이 없는 것은 근사(近似)한 율에 비교하여, 만일 본죄(本罪)는 경한데 율이 중한 것은 몇 등(等)을 감(減)하고, 본죄는 중한데 율이 경한 것은 몇 등을 더하여, 모두 계문(啓聞)하여 재가를 받은 연후에 시행하게 하옵고, 이미 시행한 사건은 모두 글에 실어서 세월(歲月)을 쌓으면, 법률이 자연히 글이 되어서, 형벌이 처결하기 어려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도당(都堂)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형조(刑曹)에서 품신(稟申)한 것과 같이 하기를 청하였다.
◯ 능침에 제사하고 돌아온 정탁에게 술을 내려 주다 김사행(金師幸)을 보내어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탁(鄭擢)에게 술을 내려 주었으니, 이때에 명을 받고 가서 능침(陵寢)에 제사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 큰 바람에 새로 지은 군자고가 무너지다
◯ 고 시중 조민수의 재산과 곡식을 돌려주도록 도당에 명하다
◯ 궁궐의 도색을 다시 하다. 도색에 쓰인 기름이 400말이었다
◯ 단주 이북 각 고을의 군량으로 천 석을 경원부에 수운하고, 병선 10척을 두만강에 배치하다 도당(都堂)에 명하여 단주(端州) 이북 주군(州郡)의 군량(軍糧) 1천 석을 경원부(慶源府)에 수운(輸運)하고, 또 병선 10척을 두만강에 정박시키고 신익 만호부(新翼萬戶府)를 경원부의 경계에 두었다.
◯ 계룡산(鷄龍山)에 진눈깨비가 내리다
◯ 오랜 가뭄 때문에 죄수를 석방하다. 도랑을 치고, 흩어져 있는 시체를 묻어 주게 하다
◯ 개성 유후사의 성을 지키는 군관을 3백 40명으로 정하다
◯ 좌·우 정승 조준과 김사형에게 신도 팔경 병풍 한 면씩을 주다. 정도전의 팔경시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에게 신도 팔경(新都八景)의 병풍(屛風) 한 면(面)씩을 주었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팔경시(八景詩)를 지어 바쳤는데, 첫째는 기전(畿甸)의 산하(山河)였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기전(畿甸) 천리,
표리(表裏)의 산하가 1백 둘이로다.
덕교(德敎)의 형세를 얻어 겸하였으니,
역년(歷年)이 천년[千紀]은 점칠 수 있도다."
둘째는 도성(都城)과 궁원(宮苑)이었다.
"성(城)은 철옹성(鐵甕城)028) 천 길[千尋]이나 높고,
구름은 봉래(蓬萊)의 오색(五色)으로 둘렸도다.
연년(年年)이 상원(上苑)029) 의 꾀꼬리와 꽃,
세세(歲歲)에 도성(都城) 사람들이 유락(遊樂)하도다."
셋째는 열서 성공(列署星拱)이었다.
"벌여 있는 관서(官署)는 높고 우뚝하여 서로 향하니,
마치 여러 별들이 북신(北辰)을 둘러싼 것 같도다.
달빛 새벽에 관가(官街)는 물과 같은데,
옥가(玉珂)030) 는 울리나 가는 티끌 일지 않는도다."
넷째는 제방(諸坊)의 기포(碁布)였다.
"제택(第宅)은 구름 위에 치솟아 우뚝 서 있고,
여염(閭閻)은 땅 위에 가득차 서로 연하였으니,
아침저녁 피어오르는 연화(煙火),
일대(一代)의 번화(繁華)가 찬연하구나."
다섯째는 동문(東門)의 교장(敎場)이었다.
"종(鐘)과 북[鼓]은 요란하게 울리어 땅을 움직이고,
정기(旌旗)는 펄럭이어 공중에 연하였도다.
만마(萬馬)가 주선(周旋)하는 것이 한결같으니,
몰아서 전장에 나갈 만하도다."
여섯째는 서강(西江)의 조박(漕泊)이었다.
"사방(四方)이 서강(西江)에 모여드니,
용(龍)같이 날치는 만곡(萬斛)의 배로 나르는도다.
천창(千倉)에 붉게 썩는 것을 보려무나.
정치하는 것은 먹이가 족한 데에 있도다."
일곱째는 남도(南渡)의 행인(行人)이었다.
"남쪽 나루의 물 도도히 흐르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행인 성(盛)하게 이르도다.
늙은이는 빈몸이고 젊은이는 졌으니,
노래 불러 앞뒤에서 화답하도다."
여덟째는 북교(北郊)의 목마(牧馬)였다.
"바라보면 저 북교(北郊) 숫돌과 같은데,
봄이 오면 풀은 무성하고 샘은 달구나.
만마(萬馬)가 구름처럼 모이고 까치처럼 날뛰는데,
목인(牧人)은 멋대로 서(西)로 갔다 남(南)으로 갔다 하도다."
철옹성(鐵甕城) : 튼튼하고 굳은 성.
상원(上苑) : 금원(禁苑).
옥가(玉珂) : 말굴레에 다는 옥으로 만든 장식.
◯ 원단과 산천에 비를 빌다
◯ 종루에 거둥하여 종소리를 들어보고 흥천사에 가서 사리전 터를 보다
◯ 예문춘추관 학사 안경량의 졸기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學士) 안경량(安景良)이 졸(卒)하였다. 경량(景良)은 순흥(順興) 사람인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종원(安宗源)의 둘째 아들이다. 온량(溫良)하고 독실(篤實)하며, 처사(處事)하는 것이 정(精)하고 자세하여 충청도(忠淸道)를 관찰(觀察)하고 서북면(西北面)을 순문(巡問)하였는데, 백성들이 사랑하여 그의 죽음을 듣고 식소(食素)를 행한 자도 있었다. 첩의 아들이 있는데 안민수(安民秀)이다.
◯ 벌레가 종묘 북쪽 산의 솔잎을 먹다
◯ 이달은 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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