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연구휘보 제163호 2013년 겨울호
제목 『전형과 변주 - 조선시대 한문학의 계보적 연구 -』
저자/편자 임준철
제1장 조선시대 최초의 북경 사행시使行詩, 장자충張子忠의 <판서공조천일기判書公朝天日記>
張婷婷, 明代朝鮮朝貢路線的演變 , 南陽師範學院學報(社會科學版) 第3卷 第4期, 2004.4,
조선 최초의 북경 使行詩, 張子忠의 判書公朝天日記 연구
임준철
<국문초록> 이 글은 조선초기의 연행록인 張子忠의 判書公朝天日記를 검토한 것이다. 필자에 의해 10년 전 발굴된 이 자료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판서공조천일기는 現傳하는 조선시대 최초의 북경 使行詩이다. 지금까지 발 견된 연행록 중 선초의 대명사행 관련 자료는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다. 이른 시기 명사행 기록으로 權近의 奉使錄(1389)이 있지만, 이때는 아직 조선이 개국하기 전이었고, 지 금까지 발견된 자료 중엔 李詹의 觀光錄(1400, 1402)이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觀光錄은 명 초기의 수도였던 남경을 다녀온 기록이어서 엄밀하 게는 ‘燕行’이라 할 수 없는 자료이다. 그런 측면에서 장자충의 판서공조천일기는 현전 하는 조선 최초의 北京(燕京) 使行詩로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연행록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자료이다. 둘째, 판서공조천일기는 연행록의 노정 변화 양상을 살펴보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이 다. 고려시대의 중국 사행은 대개 해로를 이용했다. 송대는 물론이고 북경에 도읍한 원대 * 이 논문은 2012년도 조선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 조선대학교 252 韓國詩歌硏究 第34輯 에도 해로로 登州에 간 뒤 다시 육로로 북경에 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명 건국 후의 연행 역시 대개 육로와 해로가 결합된 형태였다. 그러던 것을 1409년 영락제가 이전까지 해로 로 오던 사행길을 육로로 바꾸어 주었다. 판서공조천일기는 사행시기(1419년)가 사행 노정이 해로에서 육로로 바뀐 즈음이라는 측면에서, 또 현전 조선 최초의 북경사행이라는 측면에서 연행노정의 변천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무렵 정해진 연행노정은 1679년(숙종 5, 康熙 18) 遼東→廣寧驛 사이의 사행노정이 변경될 때까지 유지된다. 셋째, 판서공조천일기에는 명 永樂帝 시기 鄭和의 남해원정과 관련된 흥미로운 견문 담이 시에 담겨 있다. 1419년(영락 17) 제5차 원정에서 귀국한 정화 함대에는 페르시아만 의 호르무즈[忽魯謨斯]․아라비아 반도의 아덴[阿丹], 아프리카의 모가디시오[木骨都 束] 등에서 영락제에게 선물한 각종 동물들이 실려 있었다. 장자충을 포함한 조선 사행단은 10월 18일 奉天殿에서 사자․기린․福祿(얼룩말) 등을 구경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영락제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조선에 과시하기 위한 외교적 행사였지만, 우리가 본 최초 의 기린․사자․얼룩말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일정한 의의가 있다. 주제어: 조선, 최초, 북경, 使行詩, 연행록, 장자충, 판서공조천일기
* 이 논문은 2012년도 조선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 조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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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 戶曹判書諱子忠, 陪王子奉使朝天朝日記
甲辰十二月日北坪開刊
路程記 혹은 判書公(諱)天志遺 稿
張天志는 丹陽 張氏 判書公派의 派祖가 된다. 丹陽張氏乙亥大同譜에는 判書公 (諱)天志遺稿라는 제목으로 판서공조천일기의 일부 내용이 轉載되어 있다. 장남숙 외 편, 丹陽張氏乙亥大同譜 第一卷(단양장씨대종회대동보청, 1995), 728~736면. 또 전주 이씨 경령군파종회에서 발행한 敬寧君史蹟에도 판서공조천일기의 일부 내 용이 路程記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책에선 자료의 출처가 경상북도 하동군 옥종 면 대곡리에 거주하는 장천지의 후손 張奎三씨가 1930년대 후반에 경령군파 문중에 送呈 한 것이라 했다. 이종남, 敬寧君史蹟(全州李氏敬寧君派宗會, 1968), 113~122면. 10) 장자충의 본관은 단양으로 볼 수 있으나, 정작 본인은 <二十三日留別李鎭撫謙口號十 六韻> 시에서 자신을 ‘南陽 張子圓’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본인 집안을 남양 장씨로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增補文獻 增補文獻備考 卷五十 氏族五 張氏條에는 南陽이란 본관은 있지만 丹陽이란 본관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양 장씨는 본래 張順翼이 丹陽君에 봉해 진 데서 연유하였는데, 장자충의 집안은 아버지 張天志부터 별도의 파로 분가하였다고 한다. 한편, 韓國系行譜 地(寶庫社, 1992), 1508면에는 張子忠의 자를 子圓이라고 했으 나, 현대에 출간된 丹陽張氏乙亥大同譜에선, 장자충의 아버지 張天志의 자가 子圓 이고 장자충의 자는 而孝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판서공조천일기에는 장자충 자 신을 ‘南陽 張子圓’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 장자충의 자는 子圓임이 분명하다. 而孝 는 장자충의 또 다른 자인지 아니면 문중 전언의 오류인지 현재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다.
高麗史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단 편적 기록들에 의거하여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눈에 띠는 내용은 고려말 판사로 재직할 때 金克恭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간 사건이다. 고려 우왕 8년에 李仁任의 사위 姜筮의 집에 누가 林堅 味․廉興邦 등이 李仁任과 崔瑩을 제거하고 定昌君 王瑤를 왕으로 세우려 모의한다는 익명의 투서를 하였다. 이를 들은 전판사 김극공이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전하고, 그 사람이 다시 임견미에게 전하자, 임견미는 이를 김극공이 꾸민 일이라 보고 가혹한 심문을 하여 자복을 받아 내었다. 이 때 장자충은 김극공의 말을 듣고 나라에 보고하는 대신에 정창군에게 사사로이 알렸다는 죄목으로 연루되어 고초를 겪은 것이다.11) 장자충은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조선 개국에 가담하여 개국 후 비교적 순조로 운 관직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후 삼등공신으로 책록되었으며, 내직 으론 工曹典書․戶曹典書․中樞院副使․戶曹判書 등을, 외직으론 敬興 尹․전라도 풍해도 강원도의 都觀察黜陟使 등을 역임하였다. 權近의 문집에 관찰사 張子忠을 전송하는 시 한 편이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2) 강개함과 고상한 포부 사림 중에서 뛰어나더니, 몇 고을에 끼친 혜택 민심을 흡족하게 했네. 관찰사로 부임하여 위엄을 떨쳤고, 중추원 높은 자리 임금 총애와 은택 깊구나. 새벽에 대궐에서 황월을 받드니, 금강 남쪽 봄이 繡衣를 비춰주리.13) 세상 구제할 방책 더욱 더 펼쳐, 공명이 고금에 으뜸 되도록 하게나. 慷慨高懷出士林, 數州遺愛洽民心. 按臨左部威聲振, 秩峻中樞寵渥深. 黃鉞曉分丹闕下, 繡衣春照錦江陰. 勉旃更展匡時策, 須使功名冠古今. 장자충에 대한 따뜻한 격려의 마음이 담긴 이 시는 권근과 장자충과의 돈 독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판서공조천일기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 중의 하나가 權執義라 호칭된 權蹈인데, 그는 권근의 둘째 아들이기도 했다. 권근 사후에도 아들인 權蹈와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집안의 관계가 비교적 돈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판서공조천일기에는 권도의 시에 차운 한 작품이 유독 많이 실려 있을뿐더러, 장자충은 往還 길에 모두 宣川의 林 畔 山城 東軒에 걸려있는 權近의 시에 차운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 시의 함련은 장자충이 觀察使와 中樞院副使를 역임한 것을 말하고 있 는데, 경련에서 錦江 남쪽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 관찰 사로 부임할 때 지어진 시임을 알 수 있다. 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7년 무인(1398)에 장자충을 전라도 都觀察黜陟使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14) 이 무렵 지어진 시가 아닌가 한다. 장자충은 모두 두 차례 사행을 하였는데, 첫 번째는 1395년(태조4, 洪武 28, 乙亥)에 정례사행인 千秋節使로 남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것이고, 두 번째는 1419년(永樂 17년, 세종1, 己亥) 謝恩使로 북경을 다녀온 것이 다. 자신의 두 번째 사행 기록이 바로 판서공조천일기인 것이다. 이제 판서공조천일기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위해 함께 사행한 인물들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 태종의 謝恩使 敬寧君(?∼1458)은 이름이 裶이고,15) 자는 正淑이다. 태 종의 제1서자로, 어머니는 孝嬪 金氏, 부인은 淸風 金氏로 灌의 딸이다.16) 학문에 밝아 讓寧大君․孝寧大君․세종에게 글을 가르쳤고, 태종․세종․ 문종․단종․세조의 5조에 걸쳐서 왕실과 국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태종의 상중에 기녀 一點紅과의 염문이 문제되어 여러 차례 탄핵을 받기도 했다.17) 그는 후일 세조가 즉위하자 충주로 피하여 여생을 마쳤다. 시호는 齊簡이다. 경령군의 후손으로 눈에 띄는 인물로 李希儉, 李睟光, 李敏求 등이 있고, 조선전기 李荇의 아내도 경령군의 후손이 된다.18) 왕조실록의 기록에는 1419년(세종 1) 1월 공신과 여러 君들이 사은 사로 떠나는 경령군에게 전별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19) 세종의 사은사 鄭易(?∼1425)은 본관이 海州이고, 자는 順之, 호는 栢亭 이다. 아버지는 判禮儀司事 允珪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薛文遇의 딸이다. 1383년(우왕 9) 후일 태종이 되는 李芳遠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조선 개국 후 은둔해 있다가 이방원의 권유로 출사하고 혼인 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후일 그의 큰 딸이 孝寧大君 李補에게 시집가 효령대 군의 장인이 되었다. 1411년(태종 11)에 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각종 청요직을 역임하고 대제학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정역 역시 두 번째 사행길인 셈이다. 시호는 貞度이다.20) 정역은 사행 기간 중 경령군과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정역은 귀국 후 상왕에게 경령군이 북경으로 가는 도중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고집불통이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21) 상왕은 권근의 아들인 權蹈와 경험 많은 통사 宣存義를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하곤, 결국 경령군에게 실례했 다는 문제로 정역을 질책하였다. 정역은 태종의 벗인 동시에 효령대군의 장인으 로서, 왕자이긴 하나 서자인 경령군을 다소 경시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장자충은 판서공조천일기에서 정역에게 주는 시를 여러 수 남기고 있다.22)
사행단의 副使로 참여한 洪汝方(?∼1438)은 본관이 南陽이고, 자는 子 圓, 호는 戀生堂이다. 판서 吉旻의 아들로, 사마시를 거쳐,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세종 즉위 후 예조․형조 참판을 거쳐 대사 헌,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그는 1419년과 1438년 두 차례에 걸쳐 대명 사행 을 경험하였다. 시호는 文良이다.23
23) 왕조실록의 기록 중에는 판서공조천일기에서 장자충이 수행한 일들이 홍여방이 한 것으로 기록된 내용들이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후술할 ‘三獸圖’를 가져온 인물이 홍여방 이란 기록이 그것이다. 세종실록 6권, 1년 11월 27일(정묘) 두 번째 기사. 공교롭게도 홍여방의 본관은 南陽이고, 자는 子圓이다. 장자충이 자신을 南陽 張子圓이라 했던 것 을 감안하면, 이 사행시의 저자가 장자충이 아니라 홍여방이 아닌가란 의문도 들 수 있다. 하지만, 판서공조천일기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이 책의 저자를 홍여방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추후 관련 자료의 발굴을 기다려야 할 듯하다. 여기 에선 잠정적으로 판서공조천일기의 내용을 따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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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회군공신의 명단에 없는 6인은 회군 1등공신 최영지(崔永池), 3등공신 남성리(南成理)·이지(李至)·장자충(張子忠)·최윤수(崔允壽)·황순상(黃順常) 등이다. 다만 최영지의 경우 최윤지(崔允池)의 개명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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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0월 13일 갑자 2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이조 판서 홍여방 졸기
○吏曹判書洪汝方卒。 汝方字子圓, 南陽人。 少登第, 補藝文檢閱。 扈從溫泉時, 有權貴僕隷恃勢橫恣, 掠取芻藁, 司憲掌令朴翺移牒豐海道按廉金汾, 劾問掠取者姓名。 汾畏勢, 寢不報, 翺捕汾從吏, 榜搥訊問。 上聞之, 大怒, 召翺命還其家。 汝方進曰: "翺實有罪, 然已在風憲, 糾察非法, 乃其職也。 臣職非諫諍, 然古者諫無官, 至於庶人, 皆得言之。 故敢昧死以聞。" 卽賜酒慰諭, 命召翺復職。 累遷司憲監察、禮ㆍ兵ㆍ吏三曹佐郞、司憲持平、吏曹正郞, 陞議政府舍人, 尋拜司憲執義, 又兼知刑曹, 擢代言, 遷吏曹參議, 出爲江原道都觀察使, 歷恭安府尹、禮ㆍ刑曹參判, 拜大司憲, 以言事配長鬐, 量移長湍。 構戀主亭, 以寓愛君之誠。 召拜仁順府尹, 出爲平安、慶尙道都觀察使, 又爲全州府尹, 陞判漢城府事。 至是, 爲吏曹判書卒, 停朝市, 致弔致賻。 諡文良, 學勤好問文, 溫良好樂良。 有三子: 元用、亨用、利用。 汝方生長膏梁, 頗以詩酒自娛; 不喜浮屠, 父母之喪, 不作佛事。
이조 판서 홍여방(洪汝方)이 죽었다. 여방의 자는 자원(子圓)이며 남양 사람이었다. 젊어서 과거에 합격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어서 온천에 호종(扈從)하였는데, 권력 있는 자의 하인이 세력을 믿고 횡포하고 방자하여 꼴과 집을 노략질해 감으로, 사헌 장령(司憲掌令) 박고(朴翺)가 공문을 풍해도 안렴사(豐海道按廉使) 김분(金汾)에게 보내어 노략해 간 자의 성명을 검문하라 하였으나, 분(汾)이 세력을 두려워하여 두어두고 보고하지 아니하므로, 고(翺)가 분(汾)의 종리(從吏)를 잡아다가 때리며 신문하였다. 임금이 이를 들으시고 크게 노하시어 고(翺)를 불러 그 집으로 돌아가라 하시니, 여방이 나아가 아뢰기를,
"고(翺)는 진실로 죄를 지었으나 이미 풍헌(風憲)으로 있었사온즉, 불법을 검속하는 것은 그의 직무입니다. 신은 직무가 간하는 것이 아니오나 예전에는 간하는 직관이 없고, 서민들도 모두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죽는 것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하니, 즉시 술을 주어 위유(慰諭)하고 고(翺)를 불러 복직시켰다. 여러 번 승진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예(禮)·병(兵)·이(吏) 3조 좌랑(佐郞)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고,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올랐다가 곧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다. 또 겸지형조(兼知刑曹)가 되었고 대언(代言)으로 발탁되었다가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옮기었다. 나아가서는 강원도 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공안부 윤(恭安府尹) 및 예·예조·형조 참판을 역임하고, 대사헌에 임명되어 어떤 일을 말한 죄로 장기(長鬐)로 귀양가고 조금 풀려서 장단(長湍)으로 옮기니, 연주정(戀主亭)을 지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표시하였다. 불러서 인순부 윤(仁順府尹)에 임명되고 나아가 평안·경상도 도관찰사가 되었고, 또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승직되고, 이번에는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죽은 것이다. 조회와 시장(市場)을 정지하고 조상을 드리고 부의를 보내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온순하고 착하며 어짐을 좋아하는 것을 량(良)이라 한다. 세 아들이 있으니 원용(元用)·형용(亨用)·이용(利用)이었다. 여방은 부귀한 집에서 태어나 시(詩)와 술을 즐겼으며 부도(浮屠)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부모의 상사에도 불공을 드리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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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1월 4일 甲申 1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사헌부에서 대신이 연회로 술에 중독되지 않도록 경계하기를 아뢰다
○甲申/司憲府啓: "比者一二大臣設宴會飮, 有中酒而死者, 乞推劾以警其餘。" 蓋指洪汝方之死也。 上曰: "風聞之事, 豈宜擧劾? 雖擧劾, 其罪幾何? 不過笞耳。 且今汝方之死, 非因醉也。 還家翌日, 發風而死, 豈可謂之因酒而死乎? 宜勿推劾。" 汝方爲司譯院提調, 禮曹判書閔義生、僉知中樞院事金乙玄, 亦同爲提調。 乙玄請汝方、義生於其家, 設宴慰之。 汝方沈醉, 倒載還家, 夜半發狂, 翌日乃死。
세종 20년 무오(1438) 11월 4일(갑신)
20-11-04[01] 사헌부에서 대신이 연회로 술에 중독되지 않도록 경계하기를 아뢰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근자에 한두 대신이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고 술에 중독되어 죽은 자가 있다 하오니, 추핵하여 그 외의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소서.”
하였으니, 대개 홍여방(洪汝方)의 죽음을 가리킨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풍문에 들은 말을 어찌 조사하여 입건하겠는가. 비록 입건한다고 하여도 그 죄가 얼마 되겠는가. 태(笞)에 불과할 것이다. 또 이번 여방의 죽음은 취한 것 때문이 아니다. 집에 돌아간 이튿날 풍(風)이 일어나 죽었으니 어찌 술로 하여 죽었다고 하겠는가. 조사해 입건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그때에 여방이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가 되었는데 예조 판서 민의생(閔義生)과 첨지중추원사 김을현(金乙玄)이 역시 제조가 되었으므로, 을현이 여방과 의생을 그 집에 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였다. 여방이 몹시 취하여 거꾸로 실려서 집에 돌아갔는데, 밤중에 발광하여 이튿날 이내 죽었던 것이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권오돈 (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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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 3월 15일 기유 5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좌의정 이원을 공신의 녹권과 직첩을 회수하고 여산에 안치하게 하다
○司憲府啓: "左議政李原, 自己家僮非少也。 一口婢金莊, 稱買於金道練之妻, 已爲難信。 且其妻娚崔孟良奴妻都思加, 歲甲午, 金道練已曾得決從賤, 其所生四口, 非孟良之奴婢, 受贈於金道練明矣, 冒稱傳得於孟良。 且子息收養之人, 不問賢否, 皆受官職, 不直不正莫甚。 歲戊戌, 原與洪汝方, 爭富商內隱達之女爲妾, 事覺見劾, 太宗以皆大臣, 特原勿論, 仍命: "非有內旨, 毋嫁他人。" 太宗升遐, 纔過卒哭, 原以勳臣首相, 欺君逆命, 任意作妾, 殊無股肱大臣之義。 若濫受官職, 事在赦前, 固不足論, 其以非理, 受人臧獲, 至今役使, 違敎强娶, 因仍爲妾, 不可以赦前例論。 請按律痛懲, 以戒後人。" 命收功臣錄券與職牒, 自願礪山安置, 後四年卒于貶所。 原字次山, 慶尙道 固城縣人, 密直副使岡之子也。 子七人, 臺、谷、垤、埤、場、增、墀。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좌의정 이원(李原)은 자기의 집안 노비가 적지 아니한데, 한 명의 여종인 김장(金莊)을 김도련의 처에게서 사들였다는 것부터 벌써 믿기 어려우며, 또한 그의 처남인 최맹량(崔孟良)의 종의 아내인 도사가(都思加)는, 갑오년에 김도련이 벌써 소송에서 판결을 얻어 천민으로 되게 되었으니, 그의 소생인 네 사람은 맹량(孟良)의 노비가 아니요, 김도련에게서 증여받은 것이 분명하온대, 거짓 맹량에게서 전하여 받았다 하며, 또한 자식으로 거두어 기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좋고 나쁜 것을 상관하지 않고 모두 벼슬을 받게 하였으니, 곧지 못하며 바르지 못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무술년에 원(原)이 홍여방(洪汝方)과 부자 상인(商人)이었던 내은달(內隱達)의 딸을 서로 첩으로 들이려고 다투다가, 일이 발각되어 탄핵을 받았었는데, 태종(太宗)께서 그들이 모두 대신이므로 특히 용서하여 문제를 삼지 아니하고, 인하여 궁중에서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못하게 하셨는데, 태종께서 승하하시고 겨우 졸곡을 지내자마자, 원(原)은 공신이며 수상(首相)으로서 임금을 속이며 명령을 거스리고 마음대로 첩으로 삼았으니, 자못 임금의 수족과 같은 대신으로서의 의리가 없습니다. 함부로 관직을 받은 것 같은 사실은 사(赦)가 내리기 이전에 있던 것이며, 본시 문제를 삼을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가 사리에 어긋나게 남의 노비를 증여받아 부리고 있으며,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강제로 장가들어 첩을 삼은 사실은 사(赦)가 있기 때문에 이전에 관한 예(例)로 넘겨버릴 수 없는 일이오니, 바라옵건대 법에 의하여 철저히 징계하시와 뒷사람에게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명을 내려 공신의 녹권(錄券)과 직첩을 회수하고 자원에 따라 여산(礪山)에 안치하게 하였는데, 4년 후에 귀양사는 자리에서 죽었다. 원(原)의 자는 차산(次山), 경상도 고성현(固城縣) 출신이며, 밀직 부사 이강(李岡)의 아들이다. 아들이 7명인데, 이대(李臺)·이곡(李谷)·이질(李垤)·이비(李埤)·이장(李場)·이증(李增)·이지(李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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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2월 15일 경자 1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남양군 홍길민의 졸기
○庚子/南陽君 洪吉旼卒。 吉旼, 檢校中樞院副使普賢之子。 洪武丙辰, 以典法正郞登第, 嘗按廉江陵道, 痛抑豪强, 略不屈撓, 以司憲掌令召。 恭讓君庚午, 拜右司議大夫, 及鄭夢周爲右相, 吉旼謂同舍曰: "此人起自寒微, 憑恃寵遇, 囚逐言官, 紊亂田制, 豈宜居冢宰之任!" 遂不署告身, 坐此失官。 壬申七月, 太上王受命, 拜左副承旨, 錄開國功爲二等, 賜推誠協贊功臣之號。 再轉商議中樞院事, 進階資憲, 封君就第。 卒年五十五, 諡文景。 吉旼家世貴顯鉅富, 奴婢千餘人, 然性端亮, 不事奢麗。 一子汝方。
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이 죽었다. 길민(吉旼)은 검교057) 중추원 부사(檢校中樞院副使) 홍보현(洪普賢)의 아들인데, 홍무(洪武) 병진년에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과거에 올랐다. 일찍이 강릉도(江陵道)를 안렴(按廉)하였는데, 호강(豪强)한 자를 모질게 억제하여 조금도 굽히고 흔들리지 않았다. 사헌 장령(司憲掌令)으로 부름을 받았다. 공양군(恭讓君) 경오년에 우사의 대부(右司議大夫)를 제수하였는데, 정몽주(鄭夢周)가 우상(右相)이 되매, 길민이 동사(同舍)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한미(寒微)한 데서 일어나서 〈임금의〉 총우(寵遇)를 믿고, 언관(言官)을 가두고 추방하며, 전제(田制)를 문란하게 하니, 어찌 총재(冢宰)058) 의 직임에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고신(告身)059) 에 서경(署經)060) 하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벼슬을 잃었다. 임신년 7월에 태상왕(太上王)이 천명(天命)을 받으매,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제수하고 개국공(開國功) 2등(等)에 녹훈(錄勳)하여 추성 협찬 공신(推誠協贊功臣)의 호(號)를 주었다. 두 번이나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전임(轉任)되었고, 자헌(資憲) 계급에 올라 봉군(封君)되어 집에 나가서 죽었는데, 나이 55세였다.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다. 길민은 대대로 귀현(貴顯)061) 하고 거부(鉅富)062) 여서 노비가 천여 명이나 되었으나, 성품이 단정하고 밝아서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아들이 하나 있으니 홍여방(洪汝方)이다.
[註 057]검교 :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정원(定員) 이외에 임시로 증원(增員)한 때나, 실지의 사무는 보지 않고 벼슬 이름만 가지고 있게 할 때에, 그 벼슬 이름 앞에 붙이는 말.
[註 058]총재(冢宰) : 재상(宰相).
[註 059]고신(告身) : 직첩(職牒).
[註 060]서경(署經) : 임금이 관원(官員)을 서임(敍任)한 뒤에 그 사람의 성명(姓名)·문벌(門閥)·이력(履歷)을 갖추 써서 대간(臺諫)에게 그 가부(可否)를 구하던 일. 고려 때에는 1품(一品)에서 9품(九品)까지 모든 관원의 임명(任命)에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을 거쳤으나, 조선 때에는 5품 이하의 관원만 서경하였음.
[註 061]귀현(貴顯) : 귀(貴)하고 현달(顯達)함.
[註 062]거부(鉅富) : 큰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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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방 (洪汝方)
자 자원(子圓)
호 연생당(戀生堂)
시호 문량(文良)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438년(세종 20)
본관 남양(南陽, 지금의 경기도 화성)
정의
조선 전기에, 평안감사, 한성부윤,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원(子圓), 호는 연생당(戀生堂). 홍유(洪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보현(洪普賢)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길민(洪吉旻)이며, 어머니는 경진(慶臻)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마시를 거쳐,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에 원자우동시학(元子右同侍學)이 된 뒤 예문관검열과 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1410년 지평이 되고, 1414년 집의가 되었다.
이듬 해에 동부대언(同副代言)과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했으나 판결을 잘못한 책임으로 한때 면직되었다. 1415년 복관되어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된 뒤, 1417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인하여 일시 사직했다가 곧 순승부윤(順承府尹)이 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예조·형조 참판으로 옮겼다.
다음 해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병조의 아전(衙前)을 불법으로 책문해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다. 처음에는 장기(長鬐)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단으로 이배되었다.
1426년에 풀려나서 인순부윤(仁順府尹)·평안감사·한성부윤 등을 거쳐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진상한 문어가 정결하지 못하다 해서 파직되었다. 1433년 복관되어 전주부윤이 되었고, 1437년 판한성부사에 올랐다.
이듬 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본국으로부터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귀국 때는 황제가 칙명을 내려 원유관복(遠遊冠服 : 먼 길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관리복장)을 보내주었다. 귀국 후 이조판서가 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시와 술을 좋아하며, 직언을 잘하였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