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주몽'에 재미를 들인 지 꽤
되었다.
재미도 재미지만 우리의 고대사를 엿볼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 드라마를 보게된 동기였다.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하여 각색된, 픽션 성격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는데, 과연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그 생각이 어느 정도 적중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주몽'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처음 대하는 말들에 대하여
여기저기서 조사한 것을 정리하여 보았다.
웹의 자료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생각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궁금했던 몇 가지 사실들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이 기쁘다.
심심풀이로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올린다.
<편집환경 : 텍스트크기 / 보통>
<편집자>
주몽(朱蒙) :
고구려의 시조(BC 37~19 재위)로
성은 고(高)이고 이름은
주몽·추모(皺牟)·상해(象解)·추몽(皺蒙)·중모(中牟)·중모(仲牟)·도모(都牟) 등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동국이상국집〉·〈광개토왕릉비문〉 등의 관련기사에 의하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정을 통하고 버림받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태백산(太白山) 우발수(優渤水)에서 북부여(北扶餘)의 왕 금와(金蛙)를 만나 그의 궁중에
유폐되어 있었다. 어느 날 해모수가 햇빛이 되어 나타나 유화에게 잉태시켜 알을 낳게 했는데, 여기서 태어난 것이 주몽(부여의 속어로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받던 중 대소(帶素) 등 금와왕의 7명의
왕자가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어머니의 권고로 마리(摩離)·오이(烏伊)·협보(陝父) 등과 함께 화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갔다.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佳江) 유역의
홀본(忽本 : 懷仁·桓仁)에 이르러 땅이 비옥하고 산천이 험준한 것을 보고 도읍으로 정했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라 하니, 대략
BC 37년에 해당된다.
당시 동가강 유역에는 여러 성읍국가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우세한 것이 비류국(沸流國 : 일명 多勿國)이었다. 비류국의 지배층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주몽 집단보다 먼저 이동해 정착한
집단이었다.
주몽은 BC 36년 비류국의 왕인 송양(松讓)을 굴복시켜
합병했으며,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이듬해에는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다시 BC 28년에는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키는 등
여러 성읍국가들 사이에 연맹국가(聯盟國家)로의 통합운동을 전개, 국가기틀을 마련해갔다.
BC 19년 4월 부여로부터 도망쳐온 아들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았다.
그해 9월에 죽자 용산(龍山)에서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했다
소서노(召西奴) : 자료를 종합해 보면 고구려, 백제를 세운 실제적인 영웅이 소서노라는
이름의 여자일 가능성이 많다.
한나라 말기에 흉노족에 '왕소군(王昭君)'을
시집 보내야 할 정도로 국가의 힘이 형편없이 약해지고 왕봉, 왕망 일가에게 한나라의 실권이 넘어가서 결국은 한나라가 망해 버리고 만 그 시점에서
변방 지역에서 조그만 나라 한두 개를 세운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나라를 두 개, 세 개 씩이나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분명히 쉬운 일은
아니다.
소서노는 여자에 대해 극히 인색했던 『삼국사기』에서도 기록을 남겼을
만큼 대단한 여자였다.
한나라는 한때 잘 나가는 나라였지만, 무엇이든지 오래 되면
내부로부터 썩어 간다는 진리에서 벗어 나지는 못하였다. 왕망이 두 살짜리 황제를 내세우고 황제 노릇 대신하다가 결국은 한나라의 막을 내려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왕망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도 전에 이미 한나라의 힘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여기저기에서 조그마한 나라들이 울쑥불쑥 마구 생겨 나게 되었다.
한나라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머나먼 동쪽에 '낙랑'이란
파견국이 있긴 했지만 관할 지역이 좁은데다 또 제대로 힘도 못 쓰는 그 빈틈을 타서 여러 나라가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부여'란 나라가 중심이 되어 북부여와 동부여가 생겨 나게
되는데 부여의 해부루가 동쪽으로 이사 가면서 동부여를 세웠으나 원래 부여는 해모수가 나타나 나라를 '북부여'라고 불러 달라
했다.
해부루는 산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얻어 '금와'라
이름지었다. 이 아이가 드라마의 황제 금와왕이다.
한편 유화부인이 낳은 알에서는 "주몽"이 태어
났다.
기록상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 당시 상황을 살펴
보면
해부루가 동부여로 옮긴 뒤에 해모수가 북부여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금빛 개구리' 금와가 왕위에 오른 뒤의 일이다. 주몽은 금와왕의
일곱 번째 아들보다 더 어리다고도 했다.
비류, 온조 왕자의 어머니는 어느 기록에서나 "소서노"가 확실한데
그 아버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기록이 엇갈린다.
즉 '둘 다
주몽이다.", '둘 다 우태이다.', '비류는 우태, 온조는 주몽이 아빠다." 등이다.
그러나 소서노가 29세 때 21세인 주몽과 정략 정략 결혼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비류,
온조의 아버지는 아빠는 해부루왕의 손자인 '우태'가 맞을 듯하다.
부여에서 밀려 난 21세의 주몽 왕자가 아이 둘을 둔 29세의
미망인 소서노를 만나는데 소서노의 '나라 만들기' 야망에 좋은 명분과 맞아떨어지면서 고구려의 개국 시조가
된다.
사실 고구려 개국의 실질적인 공로자는 '소서노'라 해야 옳을 것
같다.
소서노는 원래 졸본의 세력가 '연타발'의 딸인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이 직접 족장의 자리에 올라가도 되는 처지였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부여의 왕족과 인연을 맺어 두는 것이 계루부 부족의 발전을 위해서
좋은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서노가 기껏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워 제법 반석 위에 올려
놓았으나 '일곱 모가 난 바위의 소나무 밑'이라는 비밀을 풀면서 나타난 유리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됨에
따라 졸지에 밀려나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소서노는
비류, 온조의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향하게 된다. 비류왕자는 미추홀이란 곳에 '백제'를 세우고 온조왕자는 위례성에
'십제'를 세우게 된다. 물론 이 두 왕자에게 각각 나라 하나 씩을 만들게 한 원동력은 어머니 어머니 소서노에게서
나왔다. 어렵게 세운 고구려를 유리에게 빼앗긴 뒤임에도 이렇게 두 나라를 세우는 여인 소서노는 대단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미추홀이란 곳이 땅도 질고 물도 짜서 못 살겠다고 하여
위례성으로 합체하여 이 때부터 '위례성 백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면서 온조 왕자가 그냥 백제국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형
비류 자의 이름은 이 때부터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십제'와 '백제'가 평화적으로 통합이 되었는지 아닌지 여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당시의 미추홀이란 곳이 지금의 '인천', 위례성이란
곳이 지금의 '풍납토성 지역'이라는 것이 확실한지 솔직히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온조왕 때의 백제 기록을 보면 '북쪽으로는 말갈과,
동쪽으로는 낙랑과 붙어 있어 항상 신경이 쓰인다.'는 기록도 있고 '이들과 때로는 전쟁도 하고, 때로는 화친을 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보이는 걸로 보아 백제 위례성이란 곳이 지금의 평안도 어느 지역이 아닐까 추정되는데, 적어도 지금의
한강변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때 낙랑이란 존재도 그리 만만한 규모는 아니었던 것 같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가 낙랑 공주와 함께 낙랑을 십년 약간 넘게 한반도에서 쫓아낸 적이 있지만, 서기 44년에 중국 후한의 광무제가 또 다시
사람을 보내서 낙랑은 다시 고구려를 밀치고 옛 땅을 되찾아 갔다. 그리고는 평안도 근처에 있으면서 수백 년간 고구려와 공존하다가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 때 낙랑이 고구려에 완전히 접수된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가 모두 없어진 뒤인 고려시대에 쓰여진
기록이기는 하지만, 주몽은 성이 고(高)씨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그 아들 아들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5대
모본왕까지는 성이 해(解)씨로 나와 있고 백제로 독립해 나간 온조왕은 부여(夫餘)씨로 나와 있는 것이 첨으로 흥미롭다. 고구려가 제법 국가 형태를 갖추는 시점이 6대 태조왕 때라고
하는데, 유리왕의 손자인 태조왕부터는 또 고(高)씨를 쓰고 있다. 대무신왕과 민둥왕은
유리왕의 아들들이고 모본왕과 태조왕은 유리왕의 손자인데, 아버지는 다르다.
소서노는 온조왕 13년에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지만 소서노의
이름은 이 땅에서 성공한 여걸의 한 사람으로 역사의 한 장면을 화려하게 장식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또 다른 자료
상인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는 고사책에서는 졸본부여의 왕이라고 되어
있다.
아버지 연다발 밑에서 그 당시 중국 대룩의 패자인 한나라와 그밖
어지러운 동북아 소수민족의 상황을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상인 수련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 연타발은 더 큰 장사를 하기 위하여 딸이지만 착실하게
상인 수련을 하게 하였다. 훗날 바로 그녀가 우리 역사상 아니 세계사 어디에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겼다. 바로 그녀의 힘으로 두
나라를 창국한 것이다.
나라를 건국하는 것을 천명(天命)이라고 한다. 나라를 건국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이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하늘의 명을 받아 가능하다는 뜻이다.
고려를 세운 왕건의 아버지 왕융은 집을 지을 때 36칸의 거대한
집을 지으면 큰 일인물이 난다는 도선대사의 말을 듣고 그리 행하여 고려를 세운 왕건을 낳았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임금이 되기 전
파옥(破屋)에 들어가 등에 세 서까래를 지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풀이한 무학대사가 세 서까래는 왕(王)자를 뜻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대로
이성계는 고려를 엎고 조선을 건국한 왕이 외었다. 이처럼 개국 시조에게는 천명의 조짐이 전해진다.
물론 이는 개국조의 신성성을 나타내기 위함이지만 그만큼 한 나라를
건국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위와 같이 개국조에게는 항상 신기한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 선생은 소서노에 대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건국한 조선 유일의 창업 여제왕이라고 극찬하였다.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임금 연타발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는 부여왕 우태와 결혼하였으나
우대가 일찍 사망하여 그와의 사이에서 난 비류와 온조를 기르고 있었다.
이 때 동부여에서 도망쳐온 주몽을 만나게 된다. 당시 22세였던
주몽은 패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주몽의 재능이 보통이 아님을 간파는 소서느논 주몽과 결혼하게 된다. 당시 소서노는 37세였다.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젊은 영웅 고주몽과 졸본부여의 세력가 소서노의 결합을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졸본 지역에는 다섯 부족이 느슨한 연맹을 이루고 있었다.
소서노는 다섯 부족으로 산재해 있는 졸본 지역을 통합하여 국가를 건국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졸본으로 망명한 주몽은 스스로를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토작 세력들은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지만 소서노는 그런 토착세력과는 다른 눈으로 주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득권을 유지하라려는
길 대신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길을 택하기로 아였다.
소서노에게 중요한 것은 토작 세력이냐 이주 세력이냐의 여부가 아니라
능력이었다.
토착세력들은 단신이다시피 졸본으로 망명한 주몽을 거들떠 보지
않았지만, 소서노는 주몽의 능력을 간파하였다. 총명한 머리,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 뛰어난 무예 실력.... 이러한 주몽의 실력을 높이 산
소서노는 결국 그와 결혼하였다.
주몽과 소서노의 결합은 졸본 지역에 산재해 있는 부족들을 통합시킬
새로운 힘의 탄생을 의미했다. 토착 세력과 이주세력의 결합, 이로써 만주와 요동, 요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서 수, 당과 천하를 놓고 다툰
고구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소서노의 힘과 재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고구려의 탄생, 그만큼 고구려는 절대적으로 소서노의 힘이 아니었으면
등장하지 못했을만큼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이바지한 점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원전 19년에 동부여에서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유리가
고구려로 옴으로써 소서노의 운명은 바뀌게 되었다. 주몽을 왕으로 앉히는데 일등공신이 소서노임에도 불구하고 주몽이 자신의 후사를 유리로 삼은
것이다.
주몽에게서 배신감을 느낀 소서노는 결국 자신이 새로이 나라를
건국하기로 결심한다. 고구려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어 준 소서노는 힘으로 유리를 내쫓고 자신의 아들을 등극시킬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새로운 나라 창업의 길을 택한다.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얼마나 지대한 공이 있는지는 비류가 온조에게
한 말에서 잘 나타난다.
'장차 대왕께서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오셨을 때 우리
어미니께서 가진 재산과 노력을 모두 기울여 나라를 세우도록 도왔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난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여기에서
불필요한 혹처럼 지내느니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 지방으로 가 좋은 땅을 택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
기원전 19년 소서노는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남쪽 신천지를 향했다.
소서노, 비류 온조가 떠날 때 오간, 마려 등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는 것은 그만큼 소서노의 세력이 강성했음을 뜻한다. 남쪽으로 내려가 패수(浿水 : 고조선 때 중국과 경계를 이루던 강)와 대수(大水 : 압록강)를
건너 한산에 도착하였다.
이때 비류는 미추홀을, 온조는 한산 부아악을 놓고 어디를
수도로 삼을 지 논쟁하였다. 온조와 그를 따르는 오간 마려 등은 한산 부아악이 수도로 삼을 장소라 주장하였다. 그들의 하남의 땅이 북쪽으로는 큰 물을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뫼들에 의지했고,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판이 펼쳐졌고
서쪽은 큰 바다가 막고 있으니 하늘이 내린 요지라 하여 이곳을 수도로 삼을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비류느 바닷가에 면한 미추홀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그는 바다에 자리잡으면 세 가지 이로운 점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뭍에서 농사를 지으면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 둘재 바다를 끼고 있으면 군사의 이동이 쉬워 해외로 뻗어나가기
쉽다는 점, 셋째 감당하기 힘든 강자의 공격을 받으면 배를 타고 바다로 피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온조와 열명의 신하의 반대가 거세여 결국 비류와 온조는
갈라지고 말았다.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하여 백제를 세우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하여
십제를 세웠다. 소서노는 비류의 편을 들었다. 이로써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는 갈라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의 불화, 대립이 심해지자 소서노는 미추홀과 위례성을
오가며 타이르고 설득했지만 이미 벌어질대로 벌어진 양 진영은 타협조차 하지 않으려했다. 게다가 온조는 독립을 선언하여 소서노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서기 6년 소서노는 결단을 내렸다. 날쌔고 범같은 장수 5명과 함께
위례성에 잠입한 것이다.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의 불화가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제거하고 비류와 온조 두 형제를
화해시켜 분리된 두 나라를 하나로 합치려 하였다. 그래서 비밀리에 장수 5명과 함께 위례성에 잠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오간, 마려는 미리 군사를 매복시켜 소서노와
특공대원을 죽였다. 이로써 소서노의 기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고구려와 백제 두 건설한 창업 여제왕 소서노는 이렇듯 어이없는 죽을 맞이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 13년조를 보면 이상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이 국모(소서노)를 시해한 참글을 은폐한 기록이라고 한다.
'왕도에 늙은 여자가 사내로 변장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사망하였다.'
비극의 해 서기 6년(온조왕 13년)은 비류의 재위 연대인 동시에
온조가 비류와 분립한 첫해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온조왕 13년은 곧 소서노 여왕이 치세 마지막
해요 그 이듬해가 온조왕의 원년이라고 주장하였다.
소서노가 죽은 후 온조는 천도를 단행하였다.
조선상고사를 보면 온조가 '모씨(소서노)와 같은 성덕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다.'며 천도를 단행하는데 이는 백제 창업에서 소서노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하였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고대에 있어 여성의 몸으로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도 한 나라가 아닌 두 나라를 개창한 인물은 세계 역사에서 그 유래가 드물다.
그렇기에 소서노는 우리 역사 뿐만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금와왕(金蛙王)
: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제1 시조동명성왕조(始祖東明聖王條)와 ≪삼국사기≫
권1 기이(紀異) 제1, 동부여 고구려조에는 금와왕의 탄생설화가 있는데 두 책에 실려 있는 설화 내용은 거의
일치한다.
금와왕탄생설화는 인간 생명의 용출(湧出)로서의 지생관(地生觀)을
바탕으로 하여 천생관(天生觀)과 대립된다. 이는 또한 자연 발생적 인간 기원을 이야기하여 견훤설화(甄萱說話)류의 인위토생적(人爲土生的) 기원론과
대립된다. 한편, 금와왕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신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하고 왕위를
이을 아들〔嗣子〕을 구하였는데, 하루는 왕이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를 보고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추어 보니 그
밑에 한 어린 아기가 있는데, 빛은 금빛 같고 모습은 개구리와 같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대를 이을 아들을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거두어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금와가 장성하자
태자를 삼고 해부루가 죽은 뒤 왕위를 잇게 하였다.
금와왕은 즉위한 뒤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그 여자는 본시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인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사통(私通)하여 부모에게 내쫓기어 우발수에
살고 있었다. 금와가 유화를 데려왔는데, 햇빛이 유화의 몸을 따라다니며 비추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더니 마침내 닷 되들이만 한 알을 하나
낳으니, 금와는 이를 내다 버리도록 명령했다.
러나 개·돼지·소·말 들이 이 알을 피하여 먹지 않으며, 새들이
보호하려 들자 왕 자신이 알을 깨뜨리려 해도 깨뜨리지 못하게 되니 왕은 알을 어미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알에서 태어난 아기가 바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다.
해모수(解慕漱) :
전설상의 부여 시조로 〈삼국유사〉 북부여조에 인용된 〈고기 古記〉에 따르면 천제(天帝)로서 직접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칭하며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고 했으며, 아들 부루(扶婁)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설화에는 천제의 아들이자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아버지로 나온다.
즉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유인하여 결혼한 후 여러 가지
신통술로 하백의 인정을 받았으나 결국 하백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하늘로 올라가 버렸으며 그뒤 유화가 낳은 이가 주몽이었다고 한다.
고구려와 부여의 건국설화는 전승에 따라 중복되거나 혼란된 부분이
많은데, 부여에서 갈라져나온 고구려인이 부여계통의 설화를 차용하여 자신들의 건국설화를 꾸몄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다른 자료
생몰년 미상.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인물. 시조
주몽(朱蒙)의 아버지이다.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천제의 명령에 따라 서기전 58년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렸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천왕랑(天王郎)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웅심산(熊心山)부근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하백(河伯)의 맏딸
유화(柳花)를 발견하고 유인하여 관계를 맺었고, 이어 하백을 찾아가 자신이 천제의 아들임을 입증함으로써 정식으로 유화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딸을 버릴까 두려워한 나머지 옳지 못한 행동을 한 하백의 처사에 분개하여 유화를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그뒤 유화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한편, 그는 천제로서 직접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는 곳으로 내려와 북부여를 세웠으며 부루(扶婁)를 낳았다는 전승도
있다. 그런데 고구려 건국신화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인 광개토왕릉비나 《위서 魏書》에는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원래 북부여의
시조로 전승되어오던 것을 5세기경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한 뒤 부여인을 무마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결합,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나라 신작 3년 임술년에 천제가 태자를 보내어 부여왕의 옛도읍에 내려가 놀게 하였는데 해모수라고 이름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다섯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따르는 자 백여인은 모두 흰 고니를 탔다. 오색구름이 그들 위에 떴고 음악 소리가 구름 속에서 흘러 나왔다. 웅심산에
머물렀다가 십여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내려왔다. 머리에는 가마귀 깃을 꽂은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의 칼을 찼다. 그녀들이 왕을 보고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좌우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대왕임은 어찌하여 궁전을 마련하지 않으십니까? 여자들이 방에 들거든 문을 닫아 가로막으시옵소서.'하니
왕이 '그러리라.'하고는 말채로 땅에 금을 그으니 동실이 문득 서서 장관을 이루었다. 방 가운데 세 자리를 준비하고 통술을 차려놓았다. 그녀들이
각각 자리에 앉아 서로 권하여 술마시더니 크게 취하였다고들 한다. 하백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인데 내 딸을
붙들어 두었는고?'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지금 하백과 혼인을 맺으려 한다.'고 하였다. 하백이 또 사자를 시켜 고하기를
'그대가 천제의 아들로서 나에게 구혼할 뜻이 있다면 마땅히 매자를 시킬 일이지 지금 갑자기 내 달을 붙들어 두는 짓은 어찌 실례가 과하지
않은가?'하므로 왕이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또한 해모수, 이는 말이 많지만 대부분 북부여의 시조는 동명성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해모수는 일반적으로 추모성왕(주몽)의 아버지로 나온다. 그러나 한단고기를 인용하자면 추모성왕은 북부여의 시조 단군 해모수의 둘째아들
고리군의 왕 고진의 손자인 불리지(옥저후)의 아들이라 했다. 어머니는 하백녀 유화(유화부인)이다. 이 해모수는 천제(하느님)의 아들이며 북부여의
시조이다.
하백녀와 동일 인물. ?∼서기전 24(동명왕
14).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주몽(朱蒙)의 어머니.
전설에 의하면 수신(水神)인 하백(河伯)의 장녀인 유화는 동생
위화(葦花)·훤화(萱花)와 함께 압록강가에서 놀다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를 만나 크기가 닷되들이만한 알을 낳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주몽이 나왔다고 한다.
또, 이규보(李奎報)의 서사시 〈동명왕편 東明王篇〉에서는 주몽이
부여에서 남쪽으로 이주할 때에 신모(神母 : 柳花夫人)가 오곡(五穀)의 종자를 가지고 가라고 싸주었으나 이별하는 슬픔에 보리종자[麥子]를
빠뜨렸는데 신모가 사자(使者)인 비둘기를 시켜 주몽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실은 유화부인, 즉 주몽의 신모가 맥류경작(麥類耕作)과 관련된
농업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화부인은 서기전 24년(동명왕 14) 8월 동부여에서 죽었는데, 그 왕 금와(金蛙)는 태후(太后)의
예(禮)로써 장례를 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워주었다.
연타발(延陀勃) : 생몰년 미상. 백제 시조인 온조왕의
외할아버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의하면 백제 건국시조를 비류왕(沸流王)으로 설정하는 새로운 설이 추가되어 있다. 즉,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優台)로서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인데 졸본인(卒本人)연타발의 딸이다.' 라고 하면서, 그의 딸인 소서노는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이며,
둘째 아들은 온조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추측할 때 그는 졸본지역의
호민(豪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기반이 주몽에 의한 왕실 교체식의 고구려 건국역량에
흡수되었음을 시사하여 준다.
예씨 부인 :
주몽이 부여의 왕자로 있으면서 7명의 이복 형들로부터 괴롭힘을 받던
시절, 형들에게 쫓기는 그 와중에서도 번갯불 사랑을 나눈 여인이 있었으니 그 여인이 예씨 부인이다.
'약 아들을 낳거든 어디어디에 있는 보물을 찾아서 나에게
보내시오.'
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하고 사라진 사랑
이야기이다.
결국 아들을 낳게 되고, 그 아들(유리)이 보물을 훌륭하게
잘 풀어 고구려의 2대 왕 유리왕이 된다. 그
영향으로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 온조가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유리(琉璃)
: ?∼18(유리왕 37). 고구려 제2대 왕으로 재위 서기전 19∼서기
18까지 37년간이다.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유리(類利)·유류(儒留)
또는 누리(累利)라 했고, ≪위서≫ 고구려전에는 여달(閭達)·여해(閭諧)라고 적혀 있다.
동명왕 주몽(朱蒙)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씨(禮氏)이고, 왕비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아버지 주몽을 찾아 서기전 19년(동명왕 19) 4월에 부여에서
고구려로 와서 바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9월 동명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서기전 17년(유리왕 3)에는 계비인 치희(雉姬)를 그리는
〈황조가 黃鳥歌〉를 지었고, 서기전
9년에는 선비(鮮卑)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서기 3년에는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년에는 중국의 왕망(王莽)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 군사의
출동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한(漢)나라를 공격하자 왕망은 유리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비칭(卑稱)하였다.
13년에 부여가 침범했으나 대패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18년 두곡(豆谷) 이궁(離宮)에서 사망했으며 두곡 동원(東原)에
장사지냈다.
왕자 도절(都切)을 태자로 삼았으나 1년에 사망해, 4년에 다시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았으나 그가 외국과 분쟁을 일으키자 자결시켰다. 그 뒤 14년 왕자 무휼(無恤)을 태자로 책립, 18년에 유리왕이
사망하자 대무신왕으로 즉위하였다.
유리왕과 주몽의 관계는 부자관계였고, 유리왕의 왕위 계승도
부자상속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유리왕은 개인적인 성격이나 정치적 세력·활동 등 여러 면에서 주몽과 대등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고 주몽과 대응 관계에 있는 인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동명왕의 성(姓)은
고씨(高氏)로, 유리왕 이하 제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解氏), 그리고 제6대 태조왕 이후는 다시 고씨(高氏)로 되어 있다. 또한 태조왕 이후의
고씨 왕들만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주몽과 유리왕의 혈통이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렇게 혈통이 다른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왕실이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구려 초기에는 유리왕계의 해씨 세력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뒤에 태조왕 때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는 계루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계루부의 조상인 주몽을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에 올려놓고 주몽을 개국시조로 삼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유리왕은 고구려 초기 왕실의 교체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주요한 왕이다.
* 황조가
翩翩黃鳥 펄펄 나는
꾀꼬리여 雌雄相依 암수가 서로 어울려
정다웁구나
念我之獨 그대 생각에
외로운데
誰其與歸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
송양(松讓)
:
고구려 초기 압록강 중류지역에 있던 소국(小國).
비류국(沸流國)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주몽설화〉에는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해 졸본에 도읍했을 때, 이웃 나라 비류국의 송양왕(松讓王)과 대결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비류국을 복속시켜 다물도(多勿都)로 삼았다고 한다.
이 비류국이 곧 고구려 5부의 하나인 비류부이며, 송양국은 곧
비류국왕 송양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송양국의 '송양'과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전(前) 왕족으로
전하는 소노부(消奴部)의 '소노'는 그 음과 뜻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비류부가 곧 소노부임을 알 수 있다.
송양왕이 주몽에게 항복했다는 것은 고구려 연맹체의 주도권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넘어갔음을 뜻한다.
양정
:
극중 한나라의 현토성 태수로 나오는 양정은
원래는 개마국의 왕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나라가 개마국을 멸망시키고 왕자
양정을 볼모로 잡아왔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한나라 궁정 호위무사가 되었다가 그 재능이 너무 특출나서 한나라의 황제가 양정을 현토성 태수로 봉한 것이라고
한다.
그밖에
드라마에는 시청자들의 관심과 재미를 주기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
많다.
즉 여미을 신녀, 영포 왕자, 부득불, 모팔모,
사용, 무송, 도치 등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인물이다.
다물군(多勿軍) :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물군이란 없다. 존재조차 없다.
한나라가 부여를 침략할 적에 동명왕(고주몽이 아님)이 의병을 일으켜
연전 연승 하며 한나라군을 몰아낸다.
그러니 다물군이라는 것은 필요 자체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해모수가 장수로 나오지만 해모수는 최고통치자이다.
해부루나 금와왕은 해모수의
후예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해모수와 고무수를 착각,
북부여조에 해모수가 북부여의 시조라면서도, 고구려 건국설화에 또 나오나, 해모수가 나오는 삼국유사 북부여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기에 이르기를, 전한 선제 신작 3년 임술(서기58년 :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한 시대의
임술년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말하는 것임)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에 내려왔는데 오룡거를 탔엇다.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북부여라고 하고
스스로 이름하여 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로서 성을 삼았다. 왕을 위해 상제의 명열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부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를 이룩하였으니 이가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다음은 해부루에 대한 삼국유사 동부여조의 기록이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대신인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을 하였다.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인 즉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 동해의
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만한 곳이다 라고 하였다. 부루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루는 산천에 세사를 지내어
후사를 구하고자 하엿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서 그
돌을 들추니 거기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 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라 하고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이후 부루가 죽자 금와가 이어 왕이 외었다. 그리고 다음의 왕위를 태자 대소에게
전했다. 그러나 지황 3년 임오에 이르러 고구려 왕 무휼이 이를 쳐서 대소를 죽이니 이로써 나라가 망하였다.' 이것을 보면 해부루가
아란불의 말을 듣고 도읍을 옮기고 고구려 부여를 멸망시키는 과정이 있다.
또 한단고기 북부여기를 보면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다. 그
책에서 부여는 200여년 이상 갔다고 한다. 북부여가 고조선 말기 건국되어 고조선의 단군(단군이라는 말은 최고 통치자에 붙는 고조선 때의
호칭이다. 그 이전에는 환웅, 환인이었다.)을 퇴위시키고 자신이 고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한다.(위만조선은 중국대륙 동쪽의 고조선 제후국 왕을
내쫓고 자신이 독립하여 세운 나라이다.) 건국년인 임술년은 298년이라고 한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다물군이 조선의 유민으로 나온다는 것은
픽션이다. 다음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二年 夏六月 '松讓' 以國來降, 以其地謂'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謂'多勿', 故以名焉 2년 여름 유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말로 옛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아라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을 삼은 것이다.
세상이 나를 오라하네
하루를 살아도 붉게 타는 광야 위로 날아가
저 태양을 쏜 힘찬 화살처럼
그 누구도 간 적 없는 길 외로워도 난 혼자 가겠지만
세상 끝에 서 있는데도 절망없는 시작일 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을 가야한다면
두려움이 날 막아도 저 목마른 세상으로
세상이 나를
오라하네
하루를 살아도 붉게 타는 광야위로
날아가
저 태양을 쏜 힘찬 화살처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을 가야한다면
두려움이 날 막아도 저 목마른
세상으로
세상이 날
오라하네
하루를 살아도 붉게 타는 광야 위로
날아가
저 태양을 쏜 힘찬 화살 나처럼
세상이 날
오라하네
하루를 살아도 지친 세상 자유롭게
날아가
저 하늘 높이 나는 새가 되리
자료 수집 및 편집 : 권 오
신 |
첫댓글 좋은자료 잘 읽었네
소서노가 참 대단한 인물인 줄 알게 되었네. 이런 자료 여러 곳에서 찾느라고 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