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무식한 반역자들이 그 당시 조선 수군의 화력과 병기가 우수했기 때문에 승리했던 것이지, 충무공이 명장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진짜 정신나간 소리를 해서 반박을 추가한다. 애시당초
칠천량 해전만 봐도 얼마나 뛰어난 장군인지 알 수 있다.
1. 당시
판옥선과 화약 무기는 먼치킨 무기가 아니다. 중세기 화약 무기답게 완벽하지도 못했고, 그 당시 포라는 개념 자체가 폭발하는 탄환이 아니라 쇳덩이 날려서 적의 배를 깨부수는데 목적이 있는건데, 이는 포를 정확히 상대 배의
흘수선 밑으로 여러 발 쏴야 배가 격침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 화포는 톱니바퀴 식으로 고여서 전후 좌우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다. 즉 정확한 조준 사격이 쉬운게 절대 아니고, 게다가 그 포 자체도 흔들리는 선상에서 방포되는 것이다. 무슨 판옥선에 화포 주렁주렁 싣고 다니다가 적선 발견하면 빵빵 터뜨리면 왜군이 알아서 죽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는건지. 현재 사용되는 일반 포는 고폭탄이라고 하는데 이런 류의 무기는 그로부터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대체역사소설인
신쥬신 건국사에서도 잘 표현을 했지만, 당시의 대포는 사정거리가 실제로 그리 길지 못하다. 더군다나 해전에서의 사용이라면 그 사용이 더더욱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당시의 무기를 현대의 무기 체제와 동일하게 여겨서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다.
다음 함상 화포 무기의 제한점을 살펴보자.
함상에서의 화약무기 운용, 특히 대포의 운용에는 많은 제한 사항이 따른다. 적 함선뿐만 아니라 대포가 거치된 아군의 함선도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상에 떠있는 선박은 롤링(rolling), 요잉(yawing), 피칭(Pitching) 등 다양한 흔들림(동요) 현상의 영향을 받는다. 이 같은 흔들림 현상은 지상에서 보다 함상에서의 화약무기 명중률을 현저하게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
조선 수군이 화약무기를 운용할 때 어떻게 롤링이나 요잉 같은 다양한 흔들림 현상에 대처했는지, 혹은 반대로 이런 현상으로 인해 함상에서의 대포 운용에 어떤 제약사항이 있었는지 규명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탄도곡선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한 박혜일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사각 5도일때 사거리는 152m, 10도 일 때는 289m, 20도일 때는 525m라고 한다. 이러한 사거리 계산이 정확한 것인지는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사각에 따라 상당한 사거리 차이가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5~10도 수준의 롤링은 황천이 아닌 일반적인 해상 조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각 5도를 적용했을 때 5도의 롤링으로 인한 오차가 더해진다면 사각이 10도가 된다. 박교수의 계산결과를 참고할 경우 이때 발생하는 사거리 오차는 137m나 된다. 단거리라면 표적이 되는 선박의 크기가 있으므로 롤링에 따른 오차를 극복할 수 있겠지만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사격시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당히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각 변화에 따라 발사체의 비행 최고 고도 문제이다.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 사격시 계산결과를 보면 사각 10도시 대장군전 비행중 최고 고도는 13m다. 이 정도 비행 고도라면 어느 정도 사거리 오차가 발생하더라도 표적 선박의 높이가 13m 이내라면 어떻게든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에 명중할 수가 있다.
하지만 사각 20도면 대장군전의 비행중 최고 고도가 50m, 사각 30도면 최고 고도 100m, 사각 44도면 최고 고도가 200m에 달해서 이야기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다. 조선 수군이 10~20도 정도 수준의 사각으로 사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5~10도 수준의 롤링이 발생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 사각은 15도, 20도, 25도, 30도로 변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사거리 오차는 둘째 치고 대장군전의 비행고도 자체가 50~100m로 높아지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높이라면 총통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의 돛보다 더 높은 고도로 선박 상공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롤링에 따른 사각 변화와 이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보다는 사각 변화에 따른 발사체의 최고 비행 고도의 변화가 명중률 향상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오차 부담 때문에 20도 이상의 사각으로 사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요잉 등에 따르는 좌우 오차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체 길이가 30m 정도인 일본의 대형 아다케 정도라면 배의 중심부를 겨냥했을 때 배의 선수와 선미 사이의 각도차이는 사거리 50m 일 때는 33도, 사거리 100m 일 때는 그 절반정도인 17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거리 100m 일 때는 17도, 사거리 50m 일 때는 33도 이상의 요잉의 발생하지 않는 한 오차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나마 요잉은 롤링보다는 부담이 적다는 의미이다.
박혜일 교수는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때의 사거리와 비행고도를 계산했지만 롤링과 요잉, 피칭 등에 따른 오차 문제는 천자총통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총통에 적용되는 공통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오차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방법은 가급적 근거리에 접근한후 사격을 하거나 사각 자체를 가급적 작게 잡는 길 뿐이다.
만약 사각 5도로 사격할 때 발사체인 대장군전의 최고 비행 고도는 3.2m에 불과하므로 이 경우에는 사거리 오차가 발생해도 좌우 조준만 정확하다면 어떻게든 표적이 되는 선박을 맞출 수 있다. 10도의 경우에도 최고 고도는 13m이므로 어느 정도 오차 극복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흔들림 현상이 있는 함선에서 화약무기를 사격할 때 높은 명중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해서 사격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사각을 선택, 수평에 가깝게 사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세기 이전 조선의 포가는 사각 조절이 매우 어렵거나 불편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조선군이 간접사격에 참조할 수 있는 사각별 사거리 제원이나 화약량별 사거리 제원이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는 실정이다. 이 경우 체계적인 사거리 수정은 불가능하고 경험에 기초한 임의적인 조절만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수평사격에 가까운 낮은 사각이 아닐 경우 화약무기 운용요원의 숙련도가 이례적으로 높지않는한 실질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명중률을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유럽 전근대 해군들이 상대적으로 수평에 가까운 사각으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도 이 같은 롤링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나 비행고도 오차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까지 조선 수군은 막연하게 총통의 긴 사거리로 상대적으로 사거리가 짧은 조총을 압도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같은 오차 문제를 고려한다면 조선 수군은 상대적으로 낮은 사각의 수평에 가까운 사격을 할 수 밖에 없고 이때 함포의 유효사거리는 함포 자체의 성능상 최대사거리보다는 훨씬 짧았을 가능성이 높다.
박혜일 교수는 롤링에 따른 사각의 불확실성, 화약량과 발사체의 무게 차이를 고려할 경우 사거리 약 70m 정도까지는 높은 명중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100m가 넘어갈 경우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선 수군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전거리는 표준형 조총 유효사거리인 50m를 벗어나면서도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거리라고 할 수 있다. 천자총통을 기준으로 할 경우 아무리 크게 잡아도 이상적 사각은 20도 미만, 유효 사거리는 400m 이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피차 이동하는 선박 간에 벌어지는 해전에서 과연 아군이 원하는 교전거리를 계속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실제로는 이 보다 더 근접한 상태에서의 교전도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군에서 유효사거리가 50m가 넘는 9몬메 이상의 대형 조총을 사용하기도 했으므로 실제 교전상황은 훨씬 복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수군 함선이 조선 수군 함선에 과도하게 접근했을 경우에도 화약무기 운용상의 제약점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가 완전히 붙는 접현전의 경우에도 火砲의 사용이 제한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일본의 대형 아다케 등 적의 함선 높이가 판옥선과 동일하거나 더 높다면 접현전 상태에서도 화포 운용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세키부네나 고바야처럼 일본 함선의 높이가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보다 현저히 낮은 상태라면 접현시에 하향사각을 해야만 사각이 나올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하향사격시 대포 운용에 어떤 제한사항이 발생하는지 여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럽에서는 하향사격(Depressed Fire)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약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만약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포가의 형태가 동거라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일정 거리 이상 접근했을 때, 특히 완전히 배가 붙는 접현 상태에서는 총통의 사각 제한 때문에 사격 불능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는 질려포통 등 손으로 투척할 수 있는 화약무기나 활 등 일반적인 투사무기를 운용할 수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 화약무기의 우수성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화약무기의 우수성 덕택으로 아주 쉽게 일본 수군에 승리했다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하지만 위에서 검토한 화약무기 운용상의 여러 제한점을 고려한다면, 조선 수군이 약점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나름의 치열한 고민과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조선군의 화포에 몆차례 맞는다고 안택선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그 화포가 빠른 속도로 연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조준이 쉬운 것도 아니고, 발사 하더라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일본 수군이 모두 죽는 것도 아니다. 일본 수군이 바보도 아니고 화포에 몆차례 당했으니 기를 쓰고 노를 저어서 판옥선에 달라붙으려고 했을 것은 자명한 일.
2. 왜선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날래고 또 수가 많았다. 판옥선은 무겁고 둔중하다. 이것은 조금만 잘못하다 보면 금방 거리가 좁혀진다는 걸 의미하는 것. 그래서 정확한 진법과 상황에 따른 기민한 판단력, 그리고 때로는 유인책부터, 적을 한 데 몰아 단박에 격멸하는 전술 전략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한산도 해전만 해도 나오지 않는 적을 유인해서 쌍학익진으로 적을 단숨에 격멸했는데, 이 유인술이라는게 거짓패퇴 전술인데, 이 전술은 자칫하면 진짜 패퇴로 이어지기도 하는 만큼 쉬운게 아니라는 말이다.
3. 왜선에 타는 칼잡이나 조총수들은 나름 전국시대 거치면서 경험을 많이 쌓은 칼잡이나 싸움꾼들인데 반해, 조선 수군의 병졸들은 태반이 농군 출신들이고, 그나마도 한 함선에 승선하는 인원 중 절반 이상이 노 젓는 격군들이다. 2번 항목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자면,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거나 군율이 흐트러져서 접근을 허용하면 그건 아주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다만 조선수군이 백병전으로는 단한명의 일본군도 죽일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병사 개개인의 기량이 백병전에 한해 열세라는 말이니 절대 착각하거나 오해하지 말자.)
4. 왜군들은 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출병했으나, 충무공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뒤에도 조정으로부터 쌀 한 톨도 지원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라 통제영은
군자금,
군량,
화약,
금속, 배를 수리할 목재 등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을 유지해주기 위해서 공물을 보내야 했는데 조정에서는 늘 공물이 부족하다고 닥달했다.(…)
5. 정보전과 탐색전도 항상 철저히 하여 단 한 차례도 왜군의 기습이나 야습을 허용하지 않았고, 항상 왜군이 어설프게 야습을 시도하다가 되려 역관광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6. 일본도 전란 중반으로 밀폐형 층루선과 대조총이라는 화포사촌급 화기를 일부 투입하면서 전력을 대폭 강화했다. 하지만, 애당초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함선이 조선의 판옥선처럼 안정감이 있는 함선이 아닌데다 선상 백병전을 선호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화포계통 무기를 조선군처럼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화포라는 것도 구경을 늘린 화승총이었다. 대조총이나 일본말로 오오오쓰 계통의 무기말이다. 그 대조총도 널리 사용된건 아닌걸로 추정된다. 기록에 대조총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는 등의 공식기록을 사실상 찾기 힘들기 때문이며, 칠천량 해전과 관련된 자료들 중에도 일본측 기록에 '판옥선 한척에 대해 서너척의 배로 포위하고 선상백병전으로 가야 승산이 있다'라는 식의 자료들이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 어짜피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에게 선상백병전으로 공격해와도 방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7. 아무리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지휘관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것들이 큰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렵다. 개전 초기에 충무공이 있던 전라좌수영에 비해서 큰 덩치를 자랑하던 경상우수영의 원균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모든 무기를 없애 버린 것이라든지
칠천량 해전에서 충무공이 온갖 노력으로 간신히 마련한 조선 수군을 한큐에 말아 먹어버린 궁극의
팀킬을 자행한 것을 보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단순하게 무기의 차이로 조선군이 이겼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도 큰 억측이다.
8. 기를써서 위의 부분을 인정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충무공의 임진왜란을 떠나서 역사성의 돋보임을 무시할 수는 없다. 충무공의 승전은 확실히 임진왜란 이후 잇따른 패전으로인해 막장수준에 빠진 한반도를 처음으로 완전히 단합시켰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한민족이 한반도에서 살아오는 동안, 이정도 국가 수준으로, 그것도 단 한번의 승전고를 시작해서 단합했던 일은 찾아보려고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런 이유없이 선조가 이순신을 경계하고 못잡아서 안달났던것이 아니다. 일명 레알 패왕색 패기
첫댓글 잼있는 글입니다....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친일파인 박정희에 의해 역사에서 부활하고 조선 정사에선 오히려 부정하는 것 아닌가요?
이순신 없었다면 일본군의 중국 침략도 현실화 되지 않았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