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빨간 까치밥 젤리
"여기 거울을 들여다보세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처음 거울을 들여다볼 때,
자기 모습에서 가장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어디인지 말해 봐요."
LA행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레이저 성형외과 의사는 늘 가지고 다니는 듯한 손거울을
내 얼굴에 대고 얘기했고,
나는 진찰중이 아니었음에도 왠지 의사의 지시에 따르는 환자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눈 밑에 축 처진 살이요."라고 대답했다.
레이저 성형외과 의사는 정말 놀라운 눈으로 얘기했다.
"얼굴 가득한 깊은 주름이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깊은 주름을 먼저 신경쓰시는 게......"
LA에 도착한 나는 캘리포니아 정신 요양소에서 사귀었던 카라의 집을 찾아갔다.
언제나 조금은 부어 있는 듯한 얼굴과 손...
카라에게 나는 남들에게 비쳐지는 내 모습이 싫어졌으며
이젠 정말 살을 빼야겠다고 얘기했다.
"여자들이 살 뺀다는 얘기를 할 대 다이어트 프로그램보다
더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지요."
카라는 바로 전화를 걸어 어떤 영매와의 상담을 예약했고
우리는 작고 아담한 방에서 영매를 만날 수 있었다.
영매는 눈을 지그시 감고 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나를 애워싸고 있는
모든 혼령들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자네 할머니가 온갖 모자들을 이것저것 당신 머리에 씌우고 계셔.
할머니가 당신은 절대로 흰머리를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고 하시는데...?"
안그래도 요즘 들어 부쩍 눈에 띄는 흰머리들 때문에 골치였는데......
혼령에게서 미용 어드바이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믿겨지지가 않았다.
영매는 계속 중얼거렸다.
"마지막 남자가 당신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구만......
그런데 곧 다음 남자가 올거야.
그 남자는 블랜드(bland;온화한 사람)야."
"블론드(blond;금발)이라구......?
영매가 코를 찡그리는 것으로 보아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난 이미 헤어스타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영매는 다시 인상을 펴고는
"블랜드처럼 보여."
라고 말했다.
영매와 인사를 하고 나와서 카라는 영매와 다른 각도에서
내 문제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새로운 만남을 가질 생각일랑은 관둬요.
내 말은 보다 높은 목표를 가지라는 거예요.
자기 성취적인 사람이 되어보세요.
당신은 남자를 사랑하고 싶어서 몹시 애태우고 있어요.
사랑하고 싶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면서
무조건 사랑만 하겠다니......
왜 당신은 사랑이 두려운 결과로 끝이 났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우리는 픽 앤 세이브(대형 할인점)로 차를 몰고 가서는
쇼핑을 했지만 얘기에 열중한 나머지 여기 저기 빈카트만 몰고 다녔다.
"냉정하게 생각해 봐요.
당신을 실의에 빠져버리게 했던것도 당신 마음이었고
이제는 어떻게 살아남을까 라는 문제가 남았어요.
이것을 현명하게 해결하는 것이 정말 행복해지는 것을 배우는 것이죠..."
내가 항상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녀의 말들이
모타운(흑인 가수들이 활동하는 레코드 회사)식 노래가사와 관련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데, 흑인 음악은 나의 사회 생활 전체를 지배라고 있었고
그래서 흑인이 나에게 일 문제를 상의할 경우에는 나는 아주 쉽게 수긍을 해주곤 했었다.
나는 흑인들은 어떤 비결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대화가 아무리 기묘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끝까지 파고들었다.
실제로 나는 고작 무엇인가를 엎질럿을 때 단순히[제기랄]이라는 의미로만
[주여]라는 말을 쓰는 집에서 성장했는데 반해
흑인들이 [주여]라고 할 때는 진짜 예수님을 지칭한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그 여자가 신경이 쓰여 카트를 빨리 밀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아예 자기 카트를 버리고 우리에게 합류했다.
"당신은 철로 위의 기차에요."
카라는 이제 나보다 이 여자에게 더 많이 신경을 쓰는 듯 더 크게 얘기했다.
"기차는 사람들을 태우기도 하고 그냥 지나치기도 하죠.
어떨 땐 당신 옆을 지나는 작은 자동차가 있어
당신을 지나쳐가기도 하고 다시 당신 옆으로 돌아오기도 하죠.
그런데 당신은 누가 탈지 누가 당신 곁을 지날지 결정할 수 없어요..."
낯선 여자는 카라의 말에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퍼즐을 이루는 조각인데 그것은 당신이 철로 위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법이랍니다."
어느 새 카라는 낯선 여자와 팔장을 끼고 걸으며 말하고 있었다.
흑인 여자들이 만나자마자 서로를 자매처럼 대하는 광경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는데,
나는 그만 뜨끔했다.
나는 친 여동생조차 여동생 대접을 해준 적이 없지 않았던가......
LA를 떠나기 전 어느 날,
세븐 일레븐에 들러 간식거리를 사서 돌아오는데,
멋진 옷을 입은 정말 체격이 큰 남자가 여행가방을 두고
롤스로이스의 트렁크를 열어둔 채 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한 손에 다림질한 흰색 셔츠를 들고 모든 짐들을
어떻게 집어넣을 것인지 몰라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가 돌아보았을 때......
'무하마드 알리......'
일 때문에 많은 명사들을 만나보았음에도 특별히 나는 알리에게 압도당했다.
그것은 알리가 링 위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물리적 힘이 아닌 그의 얘기 때문이었다.
'인생은 결코 짧지 않다......!'
그의 생각은 내게 일어났던 안 좋은 일들을 극복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카라의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떠올렸고
그 말들을 노트에 정리해 봄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노트 속에 온통 빨간 점들이 튀겨져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 까치밥나무 열매 젤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붉은 까치밥나무 열매는 여름철이면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젤리를 만들기도 쉽다.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일에 넌더리날 경우에
의사가 내리는 처방도 이와 같다.
물론 의사가 내린 것은 프로작(우울증 치료제)이겠지만
젤리는 절대로 중독되거나 사람이 멍해지는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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