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도산으로 물러나 긴 시간 은자의 삶을 사셨던 진성 이공의 묘
많은 분들이 큰절을 올렸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 순간만은 심신을 최대한 정갈히 하여 큰 절을 올렸습니다… 때늦은 후회지만 그래도 간단히 酒果脯정도 만이라도 올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제사상의 음식을 제사도 모시기 전에 집어 드셨다던 퇴계선생의 두 번째 부인 안동권씨의 묘소 퇴계 묘소 약간 아래쪽에 자리한 선생의 맏며느리인 봉화금씨의 묘소에서 퇴계천 건너편 산자락을 바라보면 소나무 숲으로 둘러 싸여 있는 퇴계선생의 두번 째 부인인 권씨 부인의 묘소가 보입니다.. 퇴계는 27세에 첫 번째 부인인 김해허씨 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부인과 결혼을 하였으나 백년해로 하지 못하고 46세에 권씨부인과도 사별하게 되는데 바로 그 권씨부인의 묘소가 건너편 산자락에 보이는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만,, 권씨부인은 친정 집안이 사화에 연루된 이후로 그만 정신질환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자료들에서 권씨부인에 대한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참고로 대표적인 두 가지 일화를 옮겨 봅니다.. “한번은 일가친척들이 제사를 지내려고 모두들 종가에 모여 제사상을 차려놓았는데, 권씨 부인이 제사도 지내기 전에 상 위에 놓인 음식을 집어먹었다. 일가친척들이 무언중에 퇴계를 힐난하는 빛을 보이자, 퇴계는 ‘제사도 지내기 전에 며느리가 먼저 음복하는 것은 예절에 벗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조상께서 후손을 귀엽게 여기실 터이니 손자며느리의 행동을 노여워하시지 않을 겁니다’라고 감싸주었다.” “또 한번은 상가에 조문을 가려다가 흰색 도포자락이 해어진 것을 보고 그곳을 좀 꿰매 달라고 했더니, 권씨 부인은 흰 도포에 빨강 헝겊을 대어 기워왔다. 퇴계가 그것을 그냥 그대로 입고 갔더니,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며 ‘흰 도포는 빨강 헝겊으로 기워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예학에 정통한 퇴계가 옷을 그렇게 입고 오자 그것이 예법에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 한 것이다. 퇴계는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왜 그러셨을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일화입니다..
이육사 시인은 나의 모교인 대륜의 전신인 옛 교남학교시절 선생님이셨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는 이육사 선생입니다.. 퇴계묘소에서 당재고개를 넘어서면 낙동강 물줄기가 S자형으로 심하게 굽어 흐르는 지역에 원천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마치 다섯 개의 손가락 형상으로 산줄기가 낙동강을 향해 길게 뻗어 내린 형국의 이 마을(원천리 이전에는 원촌으로 불림) 손가락 사이 깊은 지점에 해당하는 산골 마을에서 이육사 선생은 태어나셨지요.. 풍수의 형국론으로는 다섯 손가락으로 거문고를 튕긴다는 뜻의 오지탄금형五指彈琴型으로 불리는 명당마을입니다.. 다섯 줄기의 산이 五指이고 마을 앞의 낙동수가 거문고 줄인 셈이지요.. 이육사 시인은 眞城李人으로 퇴계선생의 14대손입니다.. 본명은 이원록,아호는 李陸史인데 다들 아시다시피 이는 대구형무소 수감시절 수감번호 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무려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바로 이육사 시인을 기리는 이육사 문학관이 그의 고향인 이 곳 원천리 불미골에 세워져 있죠.. 개인적으로 저의 모교인 대륜중,고 졸업생들은 이육사 선생께서 대륜의 전신인 교남학교 시절 교편을 잡으셨다는 내용을 잘 알고 있죠.. 현 대구 대봉교 대백프라자 대각선 건너편의 수성벌에서 십 수년 전 현재의 만촌동으로 옮긴 대륜의 새 교정에도 이육사 시비가 자랑스럽게 세워져 있답니다..
하늘로 승천하는 飛龍을 만나다 풍수학인들은 산과 물을 대면하면 직관적으로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하여 임,자,계,축,간,인,갑,묘,을,진,손,사,병,오,정,미,곤,신,경,유,신,술,건,해라는 24방위를 머리 속에 띄워놓고 시야에 들어온 山水를 일차원의 점, 이차원의 직선, 삼차원의 공간으로 왔다갔다하며 순간적으로 인수분해와 이차방정식을 돌려 버리는 고약한 버릇을 지녔답니다.. 물론 내공이 튼실한 고수라면 사차원의 고차방정식까지 돌려보겠지만.. 이육사 문학관에 다다를 쯤.. 우측 차창 밖으로 보여지는 기묘한 산세에 놀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답니다.. 토계,상계,하계 등 낙동강을 끼고 도산면 일부 지역을 다녀본 금일 답사 중 가장 강렬한 기운이 감지되는 순간이였죠.. ‘허걱~~’ 강 건너 보이는 산의 한 용맥이 산정상에서 산아래 내살미 마을 들판까지 상하,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힘차게 내려오는 그 흐름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굵고 무겁게 뻗어 내리던 용맥이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다해 힘차게 용트림을 하며 만들어 놓은 제법 높은 마지막 산봉우리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인수분해,,방정식 가동…. ‘아.. 이런 곳에서 비룡飛龍를 만나다니.. 산에서 내려오던 용이 때를 만나 여의주를 입에 물고 飛龍昇天하는 순간이다… 아.. 저 산엔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 왕일까??… 아니 장수겠지….. 도대체 저 산… 뭐야!!!!’ 그 비밀은 이내 쉽게 풀어 집니다… 이육사 문학관 2층 영상실에서 영상물을 보고 난 뒤 스크린이 올라가면서 동시에 장막이 걷힙니다.. 장막이 사라진 공간에는 대형 통유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유리를 통해 멀리 아까 그 산이 내 눈 앞에 다시 나타납니다.. 유리를 통한 사진이어서 산세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 많이 아쉽군요.. 이동수 선생님의 설명이 이러 했습니다..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 안동일대로 피난을 왔을 때 공민왕의 어머니와 왕비인 노국공주가 피신한 산이라 하여 王母山이라 불리고 산 정상부에는 지금도 당시의 왕모산성이 일부 남아 있으며 공민왕은 이 곳에 70 여 일간 임시수도를 설치 했죠..,, 산 아래 마지막 봉우리에는 왕모를 모신 왕모당이란 성황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왕모산의 낙동강 쪽 절벽 5부 능선에 있는 뾰족한 암봉을 칼선대라 부르는데 이육사의 시 ‘절정’을 낳은 곳입니다..”
설명은 계속 이어집니다.. “또한 우측으로 보이는 쌍봉 윷판대는 육사의 시 ‘광야’의 시상을 떠올리게 한 곳이죠. 그리고 마을 하류지역에 안동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강변에 시무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고 그 시무나무에는 유난히 다래덩굴이 많았답니다.. 아마도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시상을 만들어 낸 것도 이 다래덩굴인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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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아도 온혜마을 최고의 명당은 노송정 퇴계태실이다. 아…… 안타깝게도 디카의 배터리가 기력을 다했습니다.. 백만스물 하나,,백만스물 둘 하는... 그 어마어마하다던 힘은 다 어딜가고… 아래의 사진은 ‘봉화 천삼골’이라는 이름의 블로그에서 퍼온 사진입니다.. 온혜리 마을 입구에서 모두 버스를 내려 퇴계태실을 찾아 걸어 들어갑니다..태실이라 함은 아기를 출산하는 방을 일컫는데 산실이라고도 하며 옛 전통이 살아 있는 종택들에는 이러한 형태의 산실을 따로 갖추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산온천이 있는 바로 그 마을이며,, 예로부터 온천이 있어 주변에 많은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에서 온혜溫惠라고 불렸다고 하네요.. 마을 앞의 시냇물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하여 온계溫溪라 불리며 이 물은 토계에서 퇴계와 합수를 하여 상계,하계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갑니다.. 버스에서 땅을 딛고 내려서는 순간… 또 한번 기막힌 명당의 형국을 만납니다.. ‘음..그렇군..마을이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의 입지로군.. 가만 보자… 서 있는 자리를 기준점으로 하여 한 바퀴 360도 주변을 둘러보니 7-8개의 산자락이 낮게 깔리면서 이 마을의 어느 한 특정지역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형국이구나.. 그러고 보니 모든 산들이 머리를 조아린 방향에 집이 한 채 있고 집 바로 뒤 용맥을 보니 온혜마을의 낮은 산들 중 가장 힘 있어 보이는 용맥이군.. 게다가 반쯤 꺽인 모습의 半回龍入首의 형국이네..그렇다면 물어볼 것도 없이 저 산자락 아래에 있는 건물이 퇴계태실이 틀림 없으렸다…’ 그렇습니다..바로 그곳이 퇴계선생께서 태어나신 태실이였던 것입니다.. “퇴계 선생이 엮은 온계전거사적(溫溪奠居事蹟)에 의하면 공(이계양)은 처음 예안현 동쪽 부라촌(浮羅村, 지금은 예안면 부포)에 살았는데 봉화현교도(奉化縣敎導)가 되어 봉화로 가는 길에 온계를 지나게 되었다. 공이 이곳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에 취해 이리저리 거닐다가 신라현(新羅峴) 고개에 이르러 잠깐 쉬었는데 어떤 스님이 온계로부터 오다가 함께 쉬면서 대화가 온계의 풍수(風水)에 이르게 되었다. 공은 서로 본 것이 부합됨을 기뻐하여서 드디어 스님과 손잡고 다시 온계로 돌아오니, 그 스님은 위 아래로 오가며 두루 살피다가 현재의 종택자리를 선정해 주었다고 한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여 공이 그 말을 따랐다고 한다. 그 때에는 온계의 시냇가에는 한 집만이 살고 있었는데 둘레에 묵은 땅이 많아 농사지을 농토가 넉넉했고 물을 끌어 논을 만들 수 있었으며, 나무숲이 울창하고 깊은 골짜기가 있어 항상 맑은 냇물이 흘러 물고기도 많았다고 한다. 공이 이 곳에다 세거지를 마련하고 은거한 후 두 아들을 낳으니 독실한 지행(志行)에 한 생애를 학문에 침잠한 진사 식(埴)과 참판에 관찰사를 지냈으며 시문에 뛰어난 송재공(松齋公) 우( )이다. 특히 진사 식의 7남 1녀 중 막내인 퇴계를 배출함으로써 영남의 명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퇴계태실로 불리는 이 곳 老松亭 종택을 방문했을 때 때마침 이곳에 잠시 들리신 대구의 00전문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신 종손으로부터 직접 이 집의 내력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종손어른신의 말씀 중… 딱 한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군요.. “우리 집안은 이 곳 온혜마을 노송정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대과급제가가 전무했습니다만,, 노송정에 정착한 후 태어난 인물부터 처음으로 대과급제자가 나오기 시작했죠..퇴계태실(노송정)터의 영험함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노송정과 퇴계태실 사이 건물 뒤편에서 半回龍入首하는 용을 보았거든요.. 이 집안사람들은 알고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집 뒤편 경사면을 잘 살펴보시면 유달리 볼록하게 솟아오른 채 퇴계태실이 있는 방 뒤쪽을 향해 뻗어 내려오는 입수룡이 있거든요.. 하회마을의 충효당 안채 뒷마당에도 볼록하게 솟아오른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는 빈 터가 있습니다.. 풍수에서는 이 곳 역시 화산의 혈이 내려와 뭉친 곳이라 하여 중히 여겨 나무도 심지 않고 어떠한 기물도 그 주변에는 놓아 두지 않은 채 빈 공간으로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노송정의 경우는 입수룡이 다소 소홀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집의 어른 되시는 분의 생각이 가장 존중되어야 할 터이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조상님들께서 풍수에 따라 이 터를 잡으셨고,, 이 곳에 뿌리를 내린 이후 나라 안 최대 명문가로 크게 일어섰다는 자명한 사실도 있고 하니 좀 더 자문을 받으셔서 집 뒤편의 반회룡입수처를 좀 더 세심하게 관리를 하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퇴계태실,노송정 성임문聖臨門입니다… 퇴계의 어머니 춘천 박씨가 퇴계를 가졌을 때 공자가 문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하여 성임문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사진 속 노송정 현판이 보이는 뒤쪽에서 좌측 사선 방향의 퇴계 태실 뒤편으로 흘러내리는 입수룡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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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께서 태어나신 태실입니다… 바로 이 방에서 퇴계선생을 비롯하여 친형인 온계 이해를 비롯한 여러 형제가 태어났죠…
답사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태실의 좋은 생기를 받고픈 마음이 앞선 탓인지… 여러분들이 방으로 들어가 앉습니다… 근데 남자분들은 아무도 안 들어 가시네요…
‘아… 피곤하다…’
끝으로 퇴계선생께서 자신의 묘비에 새겨 넣을 自銘을 생전에 직접 지어 놓으셨는데… 그 퇴계 자명을 한번 적어보고 글을 마무리 하렵니다...
生而大癡(생이대치) 壯而多疾(장이다질)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장성하여서는 병도 많았네
中何嗜學(중하기학) 晩何叨爵(만하도작)
중년에는 어쩌다가 학문을 즐겨했고 만년에는 어찌 벼슬을 받았던고.
學求猶邈(학구유막) 爵辭愈嬰(작사유영)
학문은 구할수록 아득하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進行之跲(진행지겁) 退藏之貞(퇴장지정)
나아감에는 잘못도 있었고 물러나서 갈무리는 곧게 하였네.
深慙國恩(심참국은) 亶畏聖言(단외성언)
나라의 은혜에 심히 부끄럽고 성현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
有山嶷嶷(유산의의) 有水源源(유수원원)
산은 높이 솟아 있고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구나.
婆娑初服(파사초복) 脫略象訕(탈략중산)
처음의 뜻대로 자유롭게 소요하니 뭇사람의 비웃음을 벗었지만
我懷伊阻(아회이조) 我佩誰玩(아패수완)
내가 품은 생각 누가 알 것이며 내가 지닌 패옥 누가 즐겨줄 것인가.
我思古人(아사고인) 實獲我心(실획아심)
내 옛사람을 생각하니 진실로 내 마음과 부합하는구나
寧知來世(영지래세) 不獲今兮(불획금혜)
어찌 오는 세상을 알리요마는 지금에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을
憂中有樂(우중유악) 樂中有憂(락중유우)
근심속에 즐거움이 있었고 즐거움 속에서도 근심은 있었네
乘化歸盡(승화귀진) 復何求兮(부하구혜)
천명으로 살다가 돌아가니 이 세상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요.
좋은 인연 지으세요..
풍경 송은석 두손모음..
참고자료
안동문화유적답사자료집(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육사 문학관 안내 팜플릿
인터넷 사이트 ‘퇴계이황 공부방’
안동시청홈페이지
기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