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느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중에
늦가을 부석사 오르는 길 옆의 사과나무가 좋아서 부석사에 오르는 사람이 있다. 해질녘
안양루에서 바라본 소백줄기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부석사에 가는 사람이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서 마냥 있기만 해도 좋기 때문에 부석사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있다.
이들 모두 부석사를 찾아가는 목적은 단 하나다. "단지 부석사가 좋 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부석사는 뭇사람들의 가슴속에 한 번쯤은 가보고 절로 뽑혔으며 특히 가을만 되면 부석사의 추억을 되새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부석사가 단지 좋기 때문에 찾아간다고 하지만 뭔가 그 속에 담긴 뜻깊은 사연이 가슴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의상과 선묘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있어서, 그리고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한 의도가 우리같은 세속사람들에게 감히 생각해낼 수 없는 위대함을 가르쳐주어서였을 까.. 이유가 어떠하던간에 우리가 찾아가는 부석사는 치열한 삶의 경쟁으로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의 휴식처를 제공한다는 점은 틀림없는 일이다.그러나 가슴을 비우려고 가는 부석사에 찾아가는 사람에게 또다시 답답한 삶의 방편인 지식을 심어주어한다는 사실에 착잡한 느낌을 감출수가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면 위안을 얻으면서 지식까지 얻을 수 있을까.. 아!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군..
'부석사를 알면 부석사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언제나 가슴 속에 부석사같은 정경이 우리의 지친 심신을 풀어 줄 수 있을꺼야...'
자.. 지금부터 너무나 딱딱하지만 그래도 꼭 알아야만 하는 부석사의 몸뚱아리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우리에게 그리운 부석사가 있기에....
a.부석사는 왜 이곳에 세워졌나
사찰을 보려면 먼저 건물들이 놓인 터와 그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는 게 순서이다. 이런 점에서 부석사의 지리적 위치는 다른 절에 비해 깊게 생각해 볼 만하다. 의상은 왜 넓고 넓은 땅을 제쳐두고 이 곳에 부석사라는 절을 지었는지 그리고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의 상황이라
던지 하는 부수적인 내용까지 살펴봐야만 부석사가 위치한 곳이 주는 진정한 지리적 의미를 알 수 있다.
부석사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영풍군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하지만 이런 행정적 구분으로는 부석사 위치의 심오한 뜻을 알 수 없기에 이제부터 좀더 자세히 설명해보기로 하겠다.
부석사가 위치한 터는 봉황산 중턱으로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 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 소백산맥이 휘어돌아 거대한 울 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뭇 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하고 있는 형상으로서 풍수지리학상으로도 뛰어난 길지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국이 좁고 가파른 땅이라는 약점을 보
완하기 위해 높은 석축과 건물을 잘 이용하여 짜임새 있게 공간 배치를 함으로써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또한편 부석사가 화엄사상을 근거로 지어졌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절의 지리적 위치를 화엄사상과 연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의 줄
기인 도솔산을 미륵이 주재하는 도솔천인 미륵 정토로 비유했고, 연화봉과 비로봉을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주재하는 연화장 세계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이러한 근거로 화엄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이 문제는 다시 부석사의 가 람배치와 사상에서 다뤄보기로 하겠다.
부석사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 그 당시 정치,사회상을 반영하여 말할 수도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였지만 그 영향력이 소백산맥 이남을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부석사의 입지가 옛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 관문이었던 죽령을 경영할 수 잇는 곳임을 되새겨 본다면, 부석사의
창건은 바로 신라 국경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을 확보한 것으로 해석 을 내릴 수도 있다.
삼국 통일 당시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이 운집한 죽령을 확보하기 위하여 왕이 의상 조사를 도와 그 무리들을 몰아내고 통일신라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건립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왕을 용이라 표현함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선묘용의 뜻깊은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또 다른 관점은 군사적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설명이다. 이는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중첩되어 전개되는 장엄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부석사의 입지 선택의 또다른 이유를 알 수 있는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석사가 이 곳에 세워진 이유가 어떠하던간에 지금의 부석사의 위치가 길지라고 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든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하기 때문에 의상이 이곳에 부석사를 세우기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했고 (이 곳에 거주한 사람들의 신분이 무엇이었나는 학자
마다 의견이 다르다) 이 사람들이 의상의 부석사 창건에 방해를 주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여러 가지 의상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전해진 것일지 모른다.
이제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어진 부석사가 창건되기까지의 역사와 그 후의 부석사가 어떻게 변모해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b.부석사 창건의 역사와 의문점
우리는 지금 의상의 뛰어난 안목과 입지선택으로 멀리 도솔봉 쪽을 바라보며 소백의 연봉들이 펼쳐있는 장엄한 장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기회를 주게한 의상조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까지의 역사와 그의 행적 그리고 그 후의 부석사의 변모과정을 살펴 보기로 하자.
우선 의상의 생애와 사상을 아는 것이 부석사 창건의 의의와 부석사 가람배치의 심오한 뜻을 깨닫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였기에 우선 이번 장에서는 의상의 생애, 의상에 관련된 설화, 그리고 의상의 사상을 중점적으로 이
야기하고자 한다.
의상은 29세에 서울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서 현장의 신유식을 배우기 위해 마침내 원효와 함께 떠나나 첫번째는 실패하고 두 번째는 혼자 떠나게 된다. 등주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 곳에서 어느 신사(信士)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의 마음이 돌과 같아 움직이지 않자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에 불사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습니다."는 원을 세웠고, 의상은 종남산에 있는 지엄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지엄의 전날 밤 꿈에는 해동의 큰 나무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여 신주 즉 중국으로 와서 덮고 그 위에 봉의 집이 있었다. 올라가 보니 한 개의 摩尼보주가 있었는데, 그 밝은 빛이 멀리까지 비치었다. 꿈을 깬 후 놀랍고 이상스러워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
렸더니 의상이 왔다. 특별한 예로 맞아 조용히 말했다.
"내 어제 밤 꿈에 그대가 올 징조를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제자가 됨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종의 미묘한 뜻을 隱微한 부분까지 분석했다. 지엄은 좋은 상대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 새로운 이치를 나타내니 깊은 곳을 파고 숨은 것을 찾아 내어서 藍草와 천초가 그 본색을 잃은 것(제자 의상이 스승 지엄보다 낫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화엄학을 공부한 뒤 본국의 金欽純 등이 당나라에 가서 갇혀 있을 때 고종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하매 欽純 등이 몰래 의상에게 먼저 돌아갈 것을 권유하므로 671년, 그의 나이 48세에 되는 해에 귀국하게 된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두었던 법복과 집기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
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誓願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의상은 신라로 돌아 온 그 해에 낙산사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장발원문>은 그의 관음사상을 알게 해주는 261자로 된 간결한 명문이다. 그 후 의상은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으므로, 의상을 항상 보호하던 선
묘가 변한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 선묘룡은 자신을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안의 아미타상 밑에서 부터 앞마당의 석등까지 몸을 묻고 전법의 등불이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지었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우리는 의상의 생애를 통해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할 6가지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의상이 귀국한 목적은 무엇인가,
둘째 의상과 선묘의 관계는 어떠한 의미를 주고 있는가,
셋째 원래 부석사 터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넷째 부석사 창건당시의 모습이 지금과 같은 대가람의 모습이었나,
다섯째 그 석룡은 전설상으로만 존재하는가,
여섯째 의상이 진정으로 펼치려고 했던 사상은 무엇이었나라는 의문점들이다.
여섯 번째 의문은 의상의 사상과 관련하여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고 나머지 다섯 가지 의문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의상이 귀국한 목적은 무엇인가란 의문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의 귀국 동기가 당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본국에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하고, 중국의 기록 <송고승전>에는 화엄대교를 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전자의 이유로 해서 귀국이 서두러졌다
고하지만, 의상이 뜻은 아마래도 후자로 인해 귀국을 했을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의상과 선묘의 관계는 어떠한 의미를 주고 있는가란 의문이다. 우리는 의상과 선묘의 관계에서 한 세속적인 사랑이야기가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단지 이러한 관계가 의상의 종교적 굳은 의지와 선묘의 헌신적인 사랑만을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용은 단지 선묘가 변한 용이라고 해석을 내릴 수가 없다. 선묘이야기를 통해 그 선묘룡은 왕권을 상징하는 강력한 힘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 이유는 부석사의 위치가 지리상 매우 중요한 위치였고, 그 터에는 이미 어떠한 무리들이 정착하고 있었기에 합법적으로 이곳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낸 지배층들이 선묘이야기를 통해(종교적인 이유로 가장하여) 유리한 위치를 구축하게 되었다는 추론에서 밝힐 수 있다. 다시말해 선묘와 의상의 설화는 비록 종교적인 목적과
선묘의 정성이 부석사 터를 얻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상 의상 역시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했고, 국가지배층들은 갓 통일한 신라 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멋지게 굴복시킬 수 있는 화엄의 위력이 또한 필요하였기에 그들의 절묘한 조화가 이러한 설화를 창조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설화상의 선묘의 아름다운 정신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 원래 부석사 터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란 의문이다. 이 사람들을 사교적인 집단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아마도 전통적인 사고에 집착하여 통일을 즈음해서 크게 변화해가는 신라 사상계의 추세에 맞서고 있던 세력이었음직하다. 이들은 화엄사상을 널리 펴갈 중심 도량을 세운다는 의상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그를 지원하는 신라 조정의 사상정책에 대한 반발로 신라조정에 탄압을 받게 되어 결국은 사라지게 되고 만다. 넷째, 부석사의 창건 당시의 모습이 지금과 같은 대가람이었나란 의문이다. 부석사가 왕권과 결합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대가람이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설화의 내용에서 보면 의상과 왕권(문무왕)의 관계는 그렇게 밀접한 사이가 아니었으며, 그리고 의상이 겨울은 양지바른 곳에서 여름은 그늘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며, 지금의 모습과 같은 정대석이나, 석등의 구조와 대석단의 형태를 9세기 정도의 것으로 보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부석사는 아주 청빈한 형태의 사찰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 의상은 화엄경 일승교지의 심오한 뜻에 따라 경내에 탑도 세우지 않았고 보처도 없이 소조로 만든 아미타 불상만을 모시고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다섯째 부석사 무량수전에 묻혔다는 석룡은 전설상으로만 존재하는가란 의문이다. 일인들에 의해 이 절이 크게 개수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석룡이라 일컬어지는 이 석물에는 자연으로 된 용의 비늘 모습까지 있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석룡은 의상 당시 만들어진게 아니라 선묘와 의상의 설화가 만들어질 즈음과 맞물러 만들어진거라 추정되고 있다. 비록 우리 눈으로 그 존재를 볼 수 없지만 설화구도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부석사의 치밀한 계획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다섯가지 의문점을 정리
함으로써 비록 자세한 부분까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느 정도 부석사에 대한 궁금점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 의문점은 의상의 사상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c.의상의 사상은 무엇인가
알고 있다시피 의상은 우리 나라 화엄종의 초조로서 신라 이래 고려까지 그 法이 사자상승(師資相承: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학예를 이어 전함)되어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의상은 화엄경의 일승교지(一乘敎旨)에 따라 매우 청빈한 생활을 했으나, 그의 제자들에게는
돈톡한 사제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 후 그 법통을 잇는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처럼 훌륭한 제자들을 얻어 그들에게 열심히 화엄학을 가르쳤으며, 의상의 고매한 인품과 깊이 있는 사상으로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교화해서 세상을 이롭게 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의상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생활까지도 화엄사상과 일 관했으며,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華嚴一乘法界圖>를 보면 더욱 그의 화엄사상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그의 저서 말미에는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의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 저자명을 기록하지 않는다.>란 기록이 있어 이 책의 저자가 지엄이 아니냐 하는 설명이 있지만 최치원의 <義湘傳>을 보면 저자가 의상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는 화엄일승법계도의 詩 <법성게>만 해석글을 옮겨 보았다. 그 뜻이 너무나 깊고 많은 분량을 차지하기에 자세한 내용을 이 지면에 할애를 못한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법성(法性)은 원융(圓融)하여 두 모습이 없고 모든 법은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다.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일체(一切)가 끓어져 깨달아 알 바요 다른 경지는 아니다.
진성(眞性)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해 자성(自性)은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룬다.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여럿 가운데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요 다(多)가 곧 일이다.
한 티끌 속에 시방(十方)세계를 포함하고 모든 티끌 속에도 이와 같다.
한량없는 먼 시간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무량한 시간이다.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서로 부합되지만 흐트러지지 않고 따로 이룬다.
처음 발심할 때가 곧 정각이요,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한다.
이(理)와 사(事)가 명연하여 분별이 없으니 십불(十佛)과 보현의 대인(大人) 경계이다.
부처님의 해인삼매 속에 들어가 번출(繁出)의 여의함이 부사의한지라
우보(雨寶)가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우니 중생이 그릇을 따라 이익을 얻는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제(本際)에 되돌아가 망상을 끓어 버려 다시 얻지 않는다.
걸림 없는 선교방편 뜻대로 잡아 귀가함에 분수 따라 자량(資糧) 얻는다.
다라니의 무진한 보배로 법계의 진실한 보전을 장엄하여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으니
예부터 부동하여 부처라 이름한다.
이 내용은 화엄경의 내용을 30구 210자 54각의 인도(印道)로 축약해 놓은 것이다. 이 내용을 보아 의상 화엄 사상의 요체는 연기(緣起)의 정법(正法)을 바로 알아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유지되는 세상의 모습과 바로 보고, 거기서 하나와 전체, 일념과 무량한 시간, 진리와 현상의 운용을 중도의 관념으로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화엄사상의 대가이자 그에 정통한 의상이 아미타정토사상을 받아들인 의미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린 여섯 번째 의문을 생각해 낼 수 있는것이다. 의상이 처음으로 세운 낙산사는 관음신앙이고 부석사의 아미타불은 아미타신앙이다. 이는 현실의 고난에서 구제하려는 관음 신앙과 극락 왕생을 희구하는 아미타 신앙이 융합적이고 습합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지극히 서민적인 불교로서 부석사의 구조에 반영이 되었다. 이러한 근거는 <부석사 원융국사비문>에 잘 나타나 있으며 무량수전 불상이 왜 一乘 阿彌陀佛인지 알 수 있다. 의상은 아미타불을 화엄사상과 같이 一乘으로 이해했고, 우주를 포섭하는 화엄이라는 사상적 배경 위에 극락 정토의 현실화, 부석사의 정토화를 위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의상은 "극락은 연화장 세계에 통섭되어 원융 상즉하고 극락 왕생은 곧 연화장 세계로 왕생하는 곳이다."라고 생각한 스승 지엄의 영향으로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그리고 아미타 신앙을 신앙한 황복사에서 의상이 출가한 점으로 보아 중국에서 화엄학을 배운 의상은 아미타불 바탕 위에 새롭게 수용한 화엄학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부석사의 조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의상은 "아미타 신앙과 화엄 신앙을 원융하게 조화"시켰던 것이다. 앞으로 계속 이야기가 되겠지만 의상이 진정으로 바라는 세상은 화엄이나 정토다 하고 따로 생각하며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롭게 융화하면서 보다 나은 극락의 세계(현실의 정토화)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석사의 가람배치가 화엄사상의 반영이다 정토사상의 반영이다란 학설을 논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그것을 알고자하는게 다음 장의 목적인걸...
d.그 후의 부석사 이야기
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부석사는 뛰어난 의상의 제자들 덕분에 인 적, 물적으로 넉넉한 수행생활을 하게끔 되었다. 많은 인재를 길러내면서 부석사의 화엄종은 크게 중창되었으며 규모면에서 현재 부석사의 기본 구도라고 할 수 있는 대석단과 석등, 석룡, 장대석, 석탑 등 이 경문왕 무렵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또한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배운 지증 대사, 징효 대사 등이 신라 하대에 들어온 새로운 학문인 선종을 공부함으로써 구산선문을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부석사는 선달사 또는 흥교사라고 불리워졌다. 이는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의 향음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고려시대에 배출한 인물로는 지금 남아있는 원융국사비의 주인공인 원융국사가 있으며 이 비로 인해 의상 당시의 부석사의 모습과 그의 법손들이 줄곧 이곳에 주석해 온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부석사의 취현암이 사명 대사 등 여러 선객들의 수도처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화재를 인한 안양루가 중건되었으며 조사당 지붕의 개수와 무량수전 중보의 중수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제 시대에는 무량수전과 조사당이 일제에 의해 해체 수리되었으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전체 사역을 정화하면서 일주문, 천왕문, 승당 등을 신축하기 이르렀다.
2.부석사의 가람배치와 사상
계획에서부터 시공까지 건축 실천의 과정을 동양적 인식으로 환원하자면 體-用-相의 三大로 개념화할 수 있다. 體는 모든 사물과 현상의 근본이며, 相은 體가 나타나는 현상이며 가시적인 결과이고, 用은 體가 相으로 나타나게 하는 작용이며 움직임이다. 이를 부석사에 적용 시켜보면, 體는 부석사가 세워진 교리와 신앙체계가 요구하는 건축적인 원리이고, 用은 건축가의 해석 특히 지형적 해석을 통해 설정된 변용된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그리고 相은 섬세한 시각적 조작과 요소들의 선택 그리고 적절한 디테일을 구사하여 공간과 형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들은 매우 조직적인 그물 속에서 서로 작동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부석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살펴볼 문제는 바로 부석사의 體가 어떠한 用이 되느냐하는 점이다. 이는 바로 부석사의 가람 구조를 불교 교리에 따라 해석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찰의 배치(用)가 교리(體)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 건축에서 건축 공간과 신앙 체계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므로 건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다. 부석사는 바로 이 體가 두 가지 근거론에 의해 用으로 변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화엄 사상에 근거한 작업이고 둘째는 정토 사상에 근거한 작업이다. 지금 학계에 서는 이 정토 사상 근거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두가지 면을 모두 살펴보는 것이 부석사의 體가 用과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알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에 두가지 모두 다뤄보기로 하겠다.
a.부석사의 가람배치와 화엄사상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부석사의 독특한 구성의 방법을 화엄경근거론에 두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화엄 사상과 건축 공간 사이에 연관이 있을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화엄경근거론은 부석사가 화엄사상의 으뜸사찰이었다는 점이고, 전체 석단이 10단이라는 점, 입법품계의 최종단계인 34품의 주인이 비로자나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라는 점이다. 이는 <화엄경>의 <입법품계>의 근거로 <화엄경> 맨 마지막 장 '내가 죽으려 할 때 모든 장애를 없애고 저 미타불을 뵙고 안락찰(安樂刹)에 왕생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한 보현보살의 계송으로 부석사 가람의 종국점인 무량수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닌 아미타불을 모실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부석사의 지리적 의미에서 설명했듯이 도솔산을 미륵이 주재하는 도솔천인 미륵 정토라면 연화봉, 비로봉은 비로자나불이 주재하는 연화장 세계를 의미한다는 <화엄경>의 이상향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가 아니라는 쪽에서는 종파적 교리와 신앙의 체계가 혼동되고 있다는 점과 부석사 전체를 이루고 있는 석단 구성의 문제라는 이유를 들고 있다. 전자의 이유는 의상이 비록 화엄학의 대가였지만, 부석사에 투영된 신앙은 아미타 정토신앙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 무량수전의 기단까지 석단의 수가 보기에 따라 9단에서 12단까지 셈할 수 있는 가변적인 구성이라는 점에서 근거를 두고 있다. 아무튼 화엄 사상에 입각해서 부석사를 보면 이와 같은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기에 여기에 소개해본다.
부석사의 전체 가람구조를 <화엄경>과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화엄경>의 34품, 8회, 10지의 각 단계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중문(현재의 천왕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의 석축을 쌓아 만든 10개의 터는 <화엄경>에 나타난 초지부터 제10지까지의 단계
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석사의 이르기 전(첫 석축 전)까지는 세간을 의미한다. 처음 나오는 석축의 터는 제1품인 <세간정안품>과 제2품인 <노사나불품>에 해당된다. 이를 초지라고 한다. 호지는 수미산 남쪽 염부제주에 있는 곳이다. 그 위의 석축단은 제3품인 <여래명호품>부터 제8품인 <현수보살품>으로 제2지에 속한다. 그 다음 대석단부터는 아래의 지상 세계에서 벗어난 욕계 6천의 세계(높이 천궁을 쌓고 건물을 지어 천궁을 만들었던 것)라고 한다. 대석단 위는 제9품인 <불승수미정품>부터 제14품인 <명법품>에 해당되는 제3지의 도리천의 세계이고 두 번째 석축단 위는 제15품인 <불승야마천궁자재품>부터 제18품인 <보살십무진장품>인 아마천이다. 이는 제4지에 속한다. 다음 석축단 위 없어진 회전문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제19품인 <여래승도솔천궁일체보전품>부터 제21품인 <금강당보살십회향품>에 해당하는 도솔천이다. 이는 제5지이다. 여기서 회전문의 회전은 지은 죄를 뉘우쳐 전향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제21품의 심회향과도 통한다. 낙변화천의 제6지와 타화자재천의 제7지는 범종각이 있는 석축단과 그 윗단 법당과 선당, 승당이 있었던 자리로 제22품인 <십지품>부터 제32품인 <보왕여래성기품>에 해당된다. 부석사가 화엄종의 사찰이었으므로 과거에 있던 법당은 비로자나불을 모셨을 것이다.
이는 화엄만다라의 중심점이 되는 전각으로 제30품인 <불소상광명공덕품>과 제31품<보현보살행품>과 통한다. 안양문이 위치한 석축은 제 33품인 <이세간품>에 해당되는데 이곳은 대범천의 제8지와 제9지에 속한다. 안양문은 세간을 벗어나 윤회가 없는 진정한 극락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므로 제33품 <이세간>과 의미가 같다. 때문에 회전문에서 범종각 위의 법당 건물에까지 적용되었던 축을 버리고 남향한 새로운 건축물을 채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람의 종국점인 무량수전은 <화엄경>의 마지막 단계인 제34품인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제10지인 대자대천의 세계이다. 비로소생멸 이 없는 아미타여래의 서방 극락세계, 심신의 고통이 없고 즐거움만 있는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회전문)-범종각-(법당)-안양루-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부석사의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소 어려운 내용일 수 있다. 화엄경 경전 자체가 어떤 내용인지 모르고선 부석사에서 앞서 말한 내용을 상기한들 머리만 아플 뿐이다.
앞서 의상의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화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 맛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엄의 기초적인 내용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이번 단락을 마치고자 한다.
<화엄경>은 대승불교의 경전으로, 원이름은 크고 방정하고 넓은 이치를 깨달은 부처님의 꽃같이 장엄한 경이라는 뜻으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화엄경은 고래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10대 제자들도 이 경의 법문을 듣고는 모두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이 경의 교설이 넓고도 무한한 만큼 지극히 난해하여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 경 속에 펼쳐져 있는 세계관은 현상세계는 상호 교섭.활동하여 무한한 연대관계를 갖는다는 사사무애(事事無 )의 법계연기의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진리를 근본바탕으로 할 때 삼라만상의 모든 사상은 서로 연관되어서 걸림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초목 속에도 온 세상이 반영되어 있고, 한순간 한찰나에도 영원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시간과 공간에 걸쳐 서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이 세상에 고립적이고 독존적인 존재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는 곧 일체요, 일체는 곧 하나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세계관에 입각하여 구도자, 즉 보살의 수행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그리고 화엄사상의 핵심이 될 만한 품명으로는 다음과 같다. 여래명호품.정행품.십주품.십행품.십무진장품.십회향품.십정품.여래출현품.입법계품 등이 있으며 부석사의 가람배치와 관련된 것은 입법계품(入法界品)이다.
b.부석사의 가람배치와 정토사상
'화엄사상과 부석사의 가람배치'에 이어 '정토사상과 부석사의 가람 배치'에 대해 이번 단락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이 화엄사상을 반영하는 전각이나 불상을 세우지 않고 정토사상을 반영하는 가람배치와 불상, 전각 등을 왜 지었을까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분명 그 속에 남다른 의미가 있기에 그렇게 지었을거나마는 여기서 의상이 추구했던 정토사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힘으로서 이 해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정토사상이 무엇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기에 정토사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정토사상을 반영하는 부석사를 통해 우리는 불교의 이상향인 서방정토를 그대로 모사한 축조양식을 보게 된다. 혹자는 부석사의 석단이 3단으로써 극락정토의 9품연대를 상징하는 것이 명확한 근거가 없다고 하지만 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으로 나누어진 정토신앙의
근본경전인 정토삼부경을 근거로 부석사가 중생들이 서방정토에 이르는 계단을 3, 또는 세분화하여 그 3배수인 아홉 단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아홉 계단은 왕생의 길로 가는 9가지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무량수전 앞에 있는 안양루가 극락의 또다른 이름이니 서방정토를 그대로 옮겨놓은거나 다름없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 정토사상이 무엇인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정토사상 또는 정토신앙이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믿음, 사상을 말한다. 이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서 연유된 부처로서 모든 생명 있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의 이타정신으로 탄생한 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살사상이란 구체적으로 이러한 내
용을 말한다. "대승의 구도자인 보살은 모든 생명 있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의 이타정신에 의하여 남을 이롭게 하고 구제하려는 서원을 세우고 그 완성을 향해 실적 하는 존재이다. 이 실적을 완성했을때 보살의 이념인 자기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동시에 남을 이롭게 하는 두 가지 면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고 自利利他가 실현될 때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 되고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 성불, 곧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이 부처님은 지금 서방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하시는 부처님으로 법장비구가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닦아 중생을 구제하려는 48원을 세워 그 원을 성취, 지금부터 10겁전에 부처님된 분이시다. 이 아미타불의 48원 본원은 정토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정토사상의 전개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본원의 내용을 크게 나눈다면 아미타불 자신에 관한 것, 아미타불의 국토에 관한 것, 불국토에 태어난 이에 대한 것, 앞으로 불국토에 왕생하려는 이에 관한 것이다. 그 중 13원(내 목숨이 한량없어 백천억겁으로도 세 수 없을 것)과 15원(내 불국토에 와서 태어나는 중생들은 목숨이 한량없을 것) 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드러내는 부분으로서 모든 인간의 근원이며 종교가 담당해야 항 구제의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광명은 지혜를 상징하고 수명은 자비를 상징하는 말로서 지혜와 자비로 이룩된 본래의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다짐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미타불이 사는 극락세계란 어떤 곳인가.. 정토라는 말을 해석해보면 알 수 있다. 정토란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화된 국토라는 뜻이며 곧 그것이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중생을 청정하고 완전하게 하는 일들을 하는 곳
이다. 따라서 이 정토의 실행을 위해 중생들은 꾸준히 서원을 세워 실천하고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극락정토왕생은 우리가 무엇을 행할 때 가능하게 되는가? 이 점을 밝힌 부분이 구품상생이다. 또한 극락세계를 관상하기 위한 16가지 방법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품이란 숙명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고정화시킨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수행단계를 제시한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닦아나갈 수행의 과정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구품상생의 9단계란 어떤 것이며 어떤 사람들이 가는 곳인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상품상생: 불국토에 가서 나고자 하는 중생들이 세 가지 마음(진실한 마음, 깊이 믿는 마음, 회향하여 발원하는 마음)을 내어 왕생하는 이
상품중생: 반드시 대승경전을 배우거나 독송하지 않더라도 그 뜻을 잘 알고, 최고의 진리를 들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며, 인과를 깊이 믿고 대승을 비방하지 않으며, 이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세계에 나고자 원하는 이
상품하생: 인과를 믿고 대승을 비방하지 않으며 위없는 보리심을 내어 이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세계에 가서 나고자 하는 이
중품상생: 오계와 팔계를 지키고 여러 가지 계행을 닦으면서 오역 죄를 범하지 않고 허물이 없이 이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이
중품중생: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팔계를 지키거나, 혹은 하루 낮과 밤 동안 구족계를 지켜 위의에 결함이 없는 이런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세계에 가서 나고자 하는 이
중품하생: 선남자 선여인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세상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낸 이
하품상생: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지만, 대승경전을 비방하는 일만은 하지 않는 이
하품중생: 오계와 팔계와 구족계를 범하고 승단에 속한 물건을 훔치거나 명예와 이욕을 위해 부정한 법을 설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
하품하생: 오역죄와 십악업과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 그 과보로 지옥에 떨어져 오랜 겁을 두고 고통받을 이
더불어 16관법도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해를 생각하는 관: 지는 해를 보아서 극락정토를 관상하는 것
물을 생각하는 관: 극락의 대지가 넓고 평탄함을 물과 얼음에 비유하
여 관상하는 것
땅을 생각하는 관: 극락의 대지를 분명하게 관상하는 것
나무를 생각하는 관: 극락에 있는 보배의 나무를 관상하는 것
연못의 물을 생각하는 관: 극락에 있는 연못의 팔공덕수를 관상하는 것
누각을 생각하는 관: 극락의 오백억 보루각을 관상함
연화좌를 생각하는 관: 칠보로 장식된 부처님의 대좌를 관상케 함
형상을 생각하는 관: 금색상으로 나타나는 부처님을 관상케 하는 것
몸을 보는 관: 참된 부처님의 몸을 관상케 함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관: 극락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관음보살을 관상케 함
대세지보살을 생각하는 관: 아미타불을 보시고 있는 대세지보살을 관상케 함
두루 생각하는 관: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것을 두루 관상케 함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관: 우둔한 이를 위하여 1장6척의 아미타불을 관상케 함
상배관, 중배관, 하배관: 상.중.하의 3품에 각자 자기에게 적당한 행업으로 왕생할 것을 관상케 하는 것
16관법을 통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주변의 사물들은 정토의 일부로 변화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물들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는 나의 눈, 나의 관점이 문제이고 나의 마음이 정토화되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토가 내 마음에서 이룩된다는 것을 16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토사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부석사의 경영이 정토경의 교설에 근거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한 무량수전, 아미타불, 안양루가 정토사상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으며 부석사의 구획이 어김없이 9단으로 되어 있어 3배9품왕생사상과 일치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돌계단 하나하나를 오를 때 9품왕생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몸가짐을 단정히 하도록 했고, 안양루 즉 극락세계에 오르고 나서는 바로 이곳이 극락의 재현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사람들에게 만든다. 입구 정면에 봉안하는 불상은 일반적인 봉안양식을 무시하고 옆으로 모신 것 역시 이곳이 서방정토가 재현된 장소임을 알려 준다. 정토사상의 결정체 부석사인 부석사.. 마지막으로 부석사가 정토사상을 근거로 지어졌다는 이유를 간략하게 정리함으로서 이번 단락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정토사상의 체계에 의거하여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삼고, 삼배구품의 교리에 따라 전체 영역을 9개의 단으로 구성했다는 점이다.(우선 회전문터부터 무량수전 기단까지 총 9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전문터-범종각루-안양루)
둘째 무량수전 내부에 들어가면 곧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미타여래를 만나게 되어 진정한 극락왕생의 염원을 이루게 되는 구조라는 점이다.
셋째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무량수전 내부에는 서방정토의 주인인 일승 아미타불이 앉아 3층석탑으로 상징되는 동쪽 사바세계를 바라보며 극락왕생자들을 맞이하는 구도라는 점이다. 넷째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기 때문에 사리묘를 뜻하는 탑을 세우지 않고 광명극락을 뜨하는 석등으로 밝히고 있는 구조라는 점이다. 다섯째 무량수전 내부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갈아서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세계의 바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보인다는 점이다.
c.부석사의 가람배치와 사상을 접으며
의상의 사상편에서 이야기했는 듯이 의상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정토 사상과 화엄사상의 조화였다. 이런 점 때문에 화엄 사상과 정토 사상을 설명하면서 약간의 중복된 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중복된 교리를 통해 결국 화엄과 정토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바로 극락세계에서 왕생하는 방법과 길이었다. 그 수행방법이 다를지라도 종교적인 힘으로 자신의 바램을 성취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인간들에게 조금이나마 배려를 해주었던 것이 의상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지금과 같은 부석사의 모습이 의상에 의해 만들어 지지 않았지만 그의 법맥을 이은 제자들이 부석사의 뜩깊은 가람배치를 구획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부분에서 다소 아쉬운 점은 相부분을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體-用相의 절묘한 조화와 작용을 설명했으면 더욱 體와 用이 살아났을거라는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이번 장을 마친다.
3.부석사 소장 유물과 건축
지금 부석사에는 많은 유물들이 남아있다. 우선 불화로는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와 괘불이 남아있으며 불상으로는 무량수전 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 자인당 석조비로자나불좌상 2구(보물 제230호), 자인당 석불좌상, 그리고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무량수전
출토 소불상들이 있다. 석물로는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과 당간 지주(보물 제255호), 그리고 원융국사비(경북 유형문화재 제127호)가 있으며 건축물로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안양루, 조사당(국보 제19호), 자인당 등이 남아있다. 그 밖에도 많은 유물들이 소장되
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언급된 유물 중심으로 설명하되 무량수전과 조사당은 따로 설명해놓았다.
부석사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거의 완전한 형태를 보전한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 손꼽히는 걸작이다. 4매로 짠 방형의 지복석(地覆石) 위에 1석으로 된 지대석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네 면에는 각각 2구씩의 안상(眼象)이 장식되었으며 상면에는 팔각의 하대석받침 2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모서리를 향하여 한 잎씩 복판복련(複瓣覆蓮)이 조각되었고 꽃잎끝은 말려서 귀꽃이 되었다. 특히 복련 중심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이 있어 연꽃 속에서 간주(竿柱)를 받쳐 올리는 듯이 표현되었다. 간주
는 전형적인 팔각주로서 굵기나 높이가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다. 상대석은 통식에 따라 평박(平薄)하나 여기에 조각된 8엽의 앙련(仰蓮)은 상당한 입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 곳에 장방형 화창을 내었고 화창 주위에는 작은 구멍을 돌려 뚫었으며
나머지 네 면에는 앙련 위에 보살입상 1구씩이 조각되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하다. 지붕 돌은 물이 떨어지는 면이 우뚝하고 추녀밑에 약간의 반전이 있고 정상에는 복련이 조각되었다. 상륜부에는 보주가 남아있지만 연봉은 결실되었다. 그리고 이 석등은 정토사상
근거론에 의해 광명극락을 뜻하는 구도로서 무량수전 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무량수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고려시대의 소조불좌상이다. 무량수전안에서 동남쪽을 향하여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이 상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놓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에 육계(肉 )가 큼직하고 얼굴은 풍만한데 길게 올라간 눈꼬리, 날카로운 콧날, 두터운 입술 등의 상호(相好)에서는 근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또한 건장한 신체의 결가부좌한 자세는 안정감과 엄숙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의 특징적인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두 손이 파손되는 등 손상을 입어 조선시대에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불상의 원래 모습이 항마촉지인을 취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봉안된 전각의 명칭은 무량수전이고, 또한 부석사 경내에 있는 원융국사탑비(1054년)의 문에 보처가 없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여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존상의 명칭은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상 뒤에는 당초문과 화염문이 조각된 목조 광배가 별조(別造)되어 있는데, 원형의 두광과 신광 안에 각기 3구와 4구씩의 화불(化佛)을 부착시켰던 흔적이 남아 있다. 광배 안에 새겨진 치밀한 당초문이나 광배 밖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한 화염문은 불상의 위엄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교한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으로서의 위엄이 잘 배어 있으며 정교한 제작기법을 보이는 우수한 예에 속한다. 또한 소조상으로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어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지금은 유리상자 안에 넣어 벽화유물전 안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모두 6폭인 벽그림의 내용은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사천왕(四天王) 등의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인데, 제석과 범천은 불교의 호법신 가운데 최고의 신들이며, 사천왕도 이 두 천신에게 직접 통제되는 천
왕들이다. 제석과 범천은 풍만하거나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무장상인데, 위풍 당당하거나 우아한 형태와 능숙한 필치 등에서 고려불화 가운데서도 독특한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의 채색에 몇 번에 걸쳐 새로 덧 칠한 것이 많아서 원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고려불화풍이 꽤 간직되어 있는 편이다. 원래 이 그림은 조사당 입구에서부터 사천왕과 제석천.범천의 순으로 배치되어 석굴암과 비슷했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림들은 불(佛) 대신 부석사 창건주이자 화엄종의 조사인 의상조사를 외호(外護)하는 신장들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조사당의 의상조사는 부처님과 동격으로 존숭되는데, 화엄종의 수사찰(首寺刹)에서 신라 화엄종의 초대 조사에 대한 존숭의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좋은 예이다. 이것은 조사당의 본법당보다 높은 데 위치하게 한 것과 함께 화엄종에서는 초대 조사를 부처님보다 오히려 더 받들어 모셨던 것을 시사하는 중요한 회화자료이다. 동시에 양식적으로는 12세기 내지 13세기의 불화양식과 근사하며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서, 고려시대 회
화사상 가장 중요한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된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서 발췌>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부석사의 석단으로 올라가는 제일 아래 층계의 왼쪽 길가에 우수한 당간지주가 있다. 석재는 화강암으로서 총 높이 480㎝이며, 아래에 비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무척 단아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주가 있는 곳은 초창 당시의 원위치로 생각되며, 두 석주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안쪽은 아무런 조각 장식이 없고 그 측면에는 두 지주 모두 주연(周緣:둘레)에 폭 6㎝의 한 가닥 선이 음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양쪽 모서리의 각을 약간 죽여 부드럽게 나타내고 있다. 두 지주 사이에는 간주를 받는 둥근 대석이 있어 이것이 곧 장대를 받치는 돌임을 알 수 있다. 이 대좌는 한 돌로써 이룩되었으며 중앙에는 직경 30㎝의 원공(圓孔)을 만들어 당간의 밑부분을 받고 있다. 그 아랫 부분에는 주위에 복련(伏蓮)을 조각하여 역시 당간을 받들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가 의상 전교(傳敎)의 신라화엄 십찰 중의 하나인 이상 화엄종을 찬양하는 깃발을 달았으리라고 생각되어진다.
<일지사-한국의 사찰,부석사에서 발췌>
부석사삼층석탑(보물 제220호)
대체적으로 일탑식의 가람인 경우 탑은 법당 정면에 위치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 탑은 본전(本殿) 중앙에 놓이지 않고 남향한 무량수전 동쪽 낮은 언덕에 위치해 있다. 원융국사비에는 <스승 지엄법사는 一乘 阿彌陀佛은 涅槃에 들지 않고 十方淨土로써 體를 삼아 無生無滅하 여 法界에 充滿해 있으므로 補處佛도 影塔도 두지 않음이니 이가 바로 一乘深旨라 했다.>란 내용으로 보아 애당초 불탑건립이 없었음을 증명한다. 이 석탑은 무량수전의 가람배치에는 직접 관계된다고는 볼수 없고 법당건립 후에 이룩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의상
과 사상과 관련해 본다면 이 탑의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비록 이 삼층석탑이 무량수전 아미타불과는 무관한 독립체이지만, 아미타불과 대비되는 석가모니불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무량수전 내부에는 서방정토의 주인인 일승 아미타불이 앉아 3층석탑으로 상징되는 동쪽 사바세계를 바라보며 극락왕생자들을 맞이하는 구도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의 확실한 건립시기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어떤이는 부석사의 창건이 문무왕(667년)이지만 조형양식으로 보아 8세기의 작품, 또는 8세기 후반을 오를 수 없는 탑으로 보고 있는 반면, 어떤 이는 지세와 양식으로 볼 때 비보사탑설이 크게 풍미하던 고려 말기쯤 그러니까 무량수전이 중창될 즈음에 신라 양식을 그대로 조술하여 만든 지방 양식이라고 보고 있다. 건립시기가 어떠하던 간에 우리는 이 탑의 의의와 이 탑에서 바라본 무량수전의 아름다운 모습과 소백의 줄기의 장엄한 모습에 흠뻑 젖어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안양루(安養樓)
평생에 여가 없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은 밤낮으로 떠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우주간에 내한 몸이 오리 마냥 헤엄치네
백년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세월이 무정하네 나는 벌써 늙어있네
부석사에 한 번쯤은 찾아간 이나 부석사에 관련된 책을 읽어본 사람이면 한 번쯤은 들어
봄직한 시이다. 이 시는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이 안양루에 올라앉아 읊은 시로 안양루에서 바라본 경치에 감동을 받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 시 한편으로 부석사 안양루에 대한 소개에 모두 끝나겠지만 그래도 건축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을 소개하면 안양루에 올라온 감회가 더욱 새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부석사의 주불전인 무량수전 바로 앞에 세운 2층 누각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기와집 건물이다. 2단으로 쌓은 높고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있는데, 앞쪽 2줄의 기둥은 아랫기단 위 자연석 주춧돌에 놓여 있고, 뒷줄의 짧은 기둥은 윗기단에 놓이게 하였다. 누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을 들어서게 한 일종의 누문이다. 누 위의 기둥 배열은 아래층과 똑같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룰 깔았고, 기둥은 층단주(層斷柱)형식으로 되어 있다. 위 아래 층 모두 기둥 사이에 벽체를 가설하지 않고 개방 하였다. 가구(架構)는 기둥 윗몸에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그 위에 공포를 짜올렸다. 공포는 안팎으로 각각 3출목, 2출목의 포작을 짜 맞추었는데, 외부의 살미첨자는 모두 쇠서(牛舌)형이고, 내부의 살미첨차는 다메뚜기머리모양을 택하고 있다. 첨차의 조각 수법이 견실하여 조선 중기 건물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첨차 끝부분을 호형(弧形)으로 처리하지 않고 경사지게 끓어진 모양으로 다듬어서 부석사의 고려시대 건물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내부의 가구는 앞 뒤 기둥 사이를 대들보가 지나가도록 하고, 그 위에 조각된 화반대공을 올려 놓아서 마루보를 받치게 한 무고주(無高柱) 오량가(五樑架)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井자형 귀틀에 천장판을 끼우고 소란대로 고정시키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단청은 금모루(錦毛老) 단청인데, 원래의 단청은 아니고 뒤에 다시 칠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건물 가운데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앞면의 浮石寺란 편액은 1956년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이 곳 방문시에 쓴 것이며 부석사의 현판기문을 모아두었는데, 그 중 중요한 내용을 기록한 사명당의 <안양루중창기>가 주목을 받는다.
선묘각(善妙閣)
선묘가 있었기에 부석사의 창건 설화는 더욱 뜻깊고 아름다워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선묘여인을 너무 초라하게 대접하고 있는 우례를 범하고 있다. 부석사에서도 이 선묘를 모신 전각이 있지만 너무나 대우가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 선묘각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규모도 작고 기단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며 전각 안에 모셔진 선묘의 영정 또한 최근에 그려진 그림이다. 비록 선묘를 모신 전각이 초라하지만 우리가 항상 선묘의 아름다운 사랑과 그 뜻을 생각한다면 그도 흐뭇하게 생각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줄지...
범종루(梵鐘樓)
대석축단과 안양루가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많은 건축가들이 부석사에 대래 갖는 의문 중의 하나가 범종각 의 지붕모습인데, 이 범종각은 전면으로는 팔작지붕을, 뒷면 안양루 쪽으로는
맞배지붕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선 확실한 답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지만 이런 면에서 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우선 안양루에 서서 범종각을 바라보면, 범종각의 지붕이 마치 멀리 펼쳐진 소백산맥 연봉들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 같으므로 대자연을 향한 매우 강렬한 시각축을 형성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된다. 아무튼 그 당시의 목수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의 범종각을 왜 지었는가는 알 수 없지만 화엄종찰에 어울리는 건물을 짓기위해서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또 다른 의문점은 '범종각'이라는 현판과 달리 내부에는 대고(大鼓)와 목어만 대들보에 달려 있다. 건물 자체가 종을 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인 것으로 보아 옛 만세루 자리에 누각을 재건하고 당호만 범종각이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범종각은 건립연대가 비록 18세기로 시기적으로 뒤지지만 건물의 앉음새라든지 의장 기법, 장식성 등에서 상당히 뛰어난 건물로 평가받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부석사의 유물이 전부는 아니지만 분명 이들이 있기에 부석사가 더욱 빛을 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진다. 부석사 전체구조에 비추어 하나하나 유물들은 생각하기에 너무 작은 일부분 일지라도 이들이 하나가 되어 부석사의 오묘한 가람배치를 이룩된 것
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런 것이 의상이 말한 원융이 경지가 아닐까하 는 생각이다.
5.부석사를 마치며
해질녘 안양루에서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장엄한 소백줄기의 모습을 가슴속에 담아둔채 우리의 발걸음은 서서히 부석사와 멀어져간다.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아오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고....
이상으로 부석사의 지리적 위치, 역사, 의상의 사상, 가람배치, 그리고 유물 소개를 마지막으로 부석사 알기는 끝을 맺었다. 사실 이 내용만으로 부석사를 알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부석사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으니 읽어보시길 바란다. 그렇다면 간질간질한 부분을 시원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곳에 찾아갔을때의 감회 또한 새로워질 것이다. 부석사 편을 정리하는데 있어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참고문헌과 그 정리 방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부석사 부분을 마치고자 한다. 우선 주참고문헌으로 사용했던 책은 <대원사-빛깔있는 책들, 부석사>과 <일지사-한국의 사찰, 부석사>이다. 그리고 <홍신신서-화엄경>과 <민족사-정토삼부경>, <대원사-명찰순례1>,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대백과사전>, <이상건축 95년 11월판>을 참고로 했다. 우선 짜집기식 내용정리는 가능한 배제하려고 했으나 능력이 부족한 관계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