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루테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알콜 농도가 낮은 와인 한잔을 들고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화려하게 꾸민 아가씨 둘이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우루테보다는 한, 두 살 정도 어려보이는 것이 이실로테와 같은 나이 또래 같았다. 조우루테는 그녀들의 인사를 가볍게 목례로만 받아넘기고 시선을 돌렸다.
“저기, 조우루테님 맞죠?”
이미 알고 다가왔을 텐데도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려는 여인을 돌아본 후 조우루테는 짧게 그렇다고만 답했다.
“정말 화사한 금발이네요.”
“낮에 봤다면 더 좋을 뻔 했어요.”
익히 들어왔던 자신의 머리카락에 대한 찬사를 그는 무의미하게 흘려듣고 있었다. 곁에서 뭔가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려는 여인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그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만을 쫒고 있었다.
“공주님과 각별한 사이시라더니 맞나 보네요.”
그의 시선을 눈치 챈 여인의 질문은 조우루테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런 소문이 있습니까?”
“소문이야 무성하죠. 공주님이 어떻게 해서든지 조우루테님을 곁에 두려 한다는 말도 있는 걸요.”
조우루테야 그렇다 치고 공주까지 끌어들이는 게 불안했는지 다른 한명은 친구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말하는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조우루테는 잠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없는 말을 지어내고 있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공주님 곁에 있기를 원하는 건 저 자신입니다. 소문을 정정해서 퍼트려 주십시오.”
그가 냉정하게 말하자 여인은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우루테는 아랑곳 하지 않고 돌아서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자비를 베풀어주기에는 어쩐지 상당히 기분이 나빠져 버렸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는 이실로테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이실로테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아, 조우…루테.”
이실로테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중간에 시간을 둔 건 평소의 습관 때문이었다. 조우루테를 본 그녀의 표정은 어린아이 같이 환해졌고, 조금의 긴장감도 없는 그 표정에 조우루테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잠시 숨을 죽여야만 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경어를 쓰는 조우루테에게 이실로테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납득한 듯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곧 돌아올게요. 말씀들 나누고 계세요.”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이실로테는 그들에게서 조금 멀어지자마자 살 것 같다는 듯이 후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모두의 앞에서 편한 만남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는 하나 평소의 그녀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무리해서 절도란 걸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조우루테는 이실로테의 내쉬는 숨소리에 조금 전까지의 불쾌감이 한꺼번에 휩쓸려 내려가는 듯한 기분에 소리 내어 웃었다.
“어라? 왜 웃어?”
“너다워서. 그래서 안심이 됐어.”
“‘나답다’는 거 어쩐지 욕같이 들려.”
“설마.”
“하아- 역시 내 취향이 아니야, 이런 자리는. 아까 조우가 경어를 쓸 때 쇼크로 넘어갈 뻔 했다니까.”
이실로테가 고개를 휘휘 내젓는 걸 보고 조우루테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계속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만큼 그녀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연회가 시작하고 불과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표정은 이따금씩 지루하다는 내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기 위해 눈이 마주칠 때 마다 웃어주고 있었으니 돌아서자마자 숨이 트일 만도 했을 것이다.
“이런 방법 밖에 없나 몰라.”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으나 또 다시 연회를 연다는 건 생각도 하기 싫어 이실로테는 다른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바로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지 점점 더 생각에 몰두해 가는 그녀의 눈앞에서 조우루테는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거기까지만. 생각에 빠지기 시작하면 연회가 끝날 때까지 헤어 나오지 못할 거야.”
“아, 연회 중이었지.”
가능하면 연회 중이란 것도 잊고 싶다는 듯한 말투였다.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시간이 많다는 건 생각하기 나름이잖아.”
“조급해하지 마.”
따스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조우루테를 올려다보며 이실로테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마음은 뭔가에 쫒기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뭔가를 집어낼 수는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자꾸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연회라도 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침묵을 지키며 걷는 사이 그들은 연회장에서 꽤 벗어나 언제나 다같이 모이면 찾곤 하던 하얀 꽃이 만개한 나무 아래 서 있었다. 올해는 평소보다 꽃이 피어 있는 시기가 길었다. 평소라면 이미 며칠 전에 꽃이 다 졌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올해는 꽃이 피고 거의 보름이 지나도록 꽃잎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원인이 자신 때문이란 걸 조우루테는 알고 있었고 그에게는 너무도 다행이게 다른 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었다.
이실로테는 나무 기둥에 기대서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두운 청람색 바탕에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정도로 많은 별들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예쁘다.”
조우루테는 별을 한가득 눈동자에 담은 채 말하는 그녀의 곁을 아무 말 없이 지키고만 있었다. 이실로테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는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그의 시선이 따라 움직인다. 아마도 그가 그녀의 정식 기사가 된 이후부터 일 것이다. 예전에도 마치 오빠처럼 자신을 지켜주려 했던 조우루테가 기사가 된 이후로는 그 위치 때문인지 더욱 예민하게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모든 행동을 지켜보면서도 그는 이실로테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 그녀를 지켜왔던 다른 사람들이 그래왔듯이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라는 요구를 그만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실로테가 어떤 일을 벌이든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우는 항상 그렇게 날 바라봐.”
이실로테의 말에 조우루테는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뒀다.
“보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야.”
이실로테는 조우루테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나, 조우의 시선이 싫지 않은 걸. 게다가 조우는 다른 호위 기사들처럼 뭔가 요구하지 않으니까.”
눈앞의 작고 갸름한 얼굴에,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조용하게 미소가 번지자 조우루테는 가슴 한 편에서 찌릿한 통증이 번지는 걸 느꼈다. 단지 기사이기 때문에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알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지만 말이야. 가끔은 날 보고 있는 조우의 시선이 단지 날 지켜야 하는 기사이기 때문이 아니란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덜컹하고 뭔가가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조우루테의 눈이 커졌다. 이실로테는 그의 동공이 확대되는 걸 보지 못한 채 생긋 웃으며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기사이기 전에 조우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그렇지?”
다시 돌아본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조우루테는 긍정의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친구’라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조우루테가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서서히 이실로테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혀갔다. 뭔가 조우루테의 표정이 심각함을 느낀 것이었다.
“어디 아파?”
조우루테는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려는 이실로테의 손목을 잡아서 내려놓았다. 그러나 손목을 놔주지는 않았다. 이실로테는 의아한 듯 그에게 잡힌 손목을 그대로 둔 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무슨 일 있는 거야?”
점점 더 깊어지다 못해 이제는 빠져들 것만 같아지는 조우루테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실로테는 천천히 입을 뗐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이 사람이 뿌옇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려오고 있었다.
“용서해.”
조우루테는 마주보고 있던 시선을 피해 눈을 감았다. 뭘 용서하란 것일까. 이실로테는 뭔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조우루테가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볼 때까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실로테에게는 숨이 막힐 정도로 시간의 흐름이 더디게 느껴졌다.
“이시아…”
사그라질 것만 같은 음성에 비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조우루테의 손에는 점차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조우, 손목 아파. 그만 놔,”
이실로테가 말을 맺지 못한 것은 빨갛고 선이 분명한 그녀의 입술 위로 따스한 숨결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숨결이 그녀에게서 멀어질 때까지 이실로테는 커진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스쳐지나가 듯이 한 잠시 동안의 입맞춤에 이실로테와 조우루테의 사이에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정적만이 남았다.
“저, 지금…”
결국 정적을 깨뜨린 건 이실로테였으나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실로테는 이미 조우루테에게 닿아있는 시선을 거둬들이지도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우루테는 10여 년 간 그녀를 봐오며 말문이 막히는 건 난생 처음 본다는 생각에 쓰게 웃었다.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투명한 눈동자에 가슴의 통증은 심해지고만 있었다.
“용서해. 그냥… 용서해.”
여전히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 이실로테를 바라보며 조우루테는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