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인터뷰 기사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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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신학자를 만나다: 벤 핑크 댄딜라이언 교수와의 인터뷰
인터뷰어: 김흥수 본지 주간, 목원대학교 명예교수
날짜 및 장소 2023년 5월 5일, 강원도 철원
* 이 글은 국경선평화학교(대표 정지석 박사) 교사 완공 기념 강연자로 내한한 벤 핑크 댄딜라이언(Ben Pink Dandelion) 교수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댄딜라이언 교수는 영국 버밍엄대학교의 퀘이커학 교수이며 퀘이커학 연구센터(Centre for Research in Quaker Studies)의 책임자이다. 이 인터뷰를 주선해 주고 통역을 맡은 정지석 박사에게 감사드린다.-편집자
김흥수 아마도 이 자리가 한국 사회에 퀘이커리즘을 소개하는 첫 번째 인터뷰일 것입니다. 먼저 퀘이커리즘의 역사적인 기원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벤 핑크 댄딜라이언(이하 ‘벤’) 퀘이커리즘은 종교개혁의 연장선상에서 재세례파와 비슷하게 가장 급진적인 영역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퀘이커는 재세례파 이후에 등장했지요. 그 시기는 1647년 혹은 1652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퀘이커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조지 폭스(George Fox)입니다. 그는 1647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심적으로 우울한 상태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종교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는데,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누군가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어떤 것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침울한 상태에서 그는 자기 안에 들려오는 영적인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이해했습니다.
바로 내적(inward) 그리스도 경험이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해하지요. 「기독교사상」 독자들은 이 점에 관심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육적인 재림을 기다리지만, 초기 퀘이커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길거리에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내적으로(inwardly) 내려오신다’는 내적 경험을 말합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오셨고, 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내적인 경험을 이미 한 퀘이커 교도에게는 오셨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오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대목은 이것이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퀘이커는 칼뱅주의 같은 다른 기독교 그룹들과는 달리,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고 또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뱅은 예정론에 근거하여 일부의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퀘이커와 일반 침례교(General Baptists, 예수 그리스도가 택함 받은 자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는 믿음을 유지하는 침례교-편집자) 신자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매우 급진적이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성직자이고, 모든 교회는 수평적 교회이지요. 위계질서가 없고, 주교나 교황도 없이, 오직 하나님이 이끄시는 수평적 교회입니다. 예배를 구성할 때에는 모든 사람이 성직자이기에 ‘이번 주에는 내가, 다음 주에는 그녀가’ 하는 식으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맡습니다. 순서를 맡은 사람은 ‘우리 침묵하며 앉읍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 나눌 이야기가 있는지를 살핍니다. 퀘이커 신자들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침묵 속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누구든 침묵을 깰 수 있고 몇 분 정도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모두가 사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저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사람은 없고, 더 위대한 영적 권위를 가진 자도 없습니다. 더 특별한 장소도 없습니다. 모든 공간은 신성하고 모든 시간은 신성하기에 신성하게 여기는 교회 건물도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례전도 없습니다. 빵도, 포도주도 없지요. 왜냐하면 고린도전서에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빵을 나누라고 하셨는데, 퀘이커 교도들은 주님이 다시 오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퀘이커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 그러니까 예수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예수가 그에게 들어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내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조지 폭스는 이것을 ‘내적 성만찬’(inward communion)이라고 말합니다.
김흥수 내적 성만찬이라는 것이 영적 성만찬이라는 의미인가요? 공식적인 성만찬 의식이 없는 것인가요?
벤 네. 그렇습니다. 영적 세례와 비슷하지요. 오늘날 몇몇 퀘이커 교도들이 성만찬을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적 세례, 영적 성만찬이 있지요. 성만찬과 세례는 영적인 체험을 통해 사람들의 삶과 실천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본래의 목적은 잊어버린 것 같아요. 퀘이커 교도들은 그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에요.
모든 사람은 동등하고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퀘이커 교도들은 박사나 교수 등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인사할 때 모자를 벗지도 않습니다. 그 시절 영국에서는 누군가를 만날 때 모자를 벗어서 매우 정중하게 맞이한다는 뜻을 나타냈는데, 퀘이커 교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하는 등의 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동등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실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퀘이커를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것이 있었어요. 당시 영국에는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어요. 만약 당신이 ‘you’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그것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이르는 정중한 표현법입니다. 한국어로는 무어라 말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반면에 매우 친밀한 사이일 경우에는 ‘thou’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어에는 ‘vous’와 ‘tu’가 있고, 스페인어에서는 ‘usted’와 ‘tu’ 이렇게 두 가지를 사용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모든 사람이 친밀하다는 의미로 정중한 표현법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이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또한 누구든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없어요. 이 역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인해 퀘이커는 처음부터 평화주의(pacifism)를 유지하고 있어요.
또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이 있어요. 모든 이들이 동등하다는 말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또한 마찬가지라는 의미입니다. 17세기 영국의 대부분의 집단은 여성이라는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어요. 퀘이커 공동체에서는 여성이나 젊은 사람이나 누구든 사제가 되었기에, 이런 측면에서도 급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28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온전하게 보장되기 시작했는데, 그보다 한참 전의 일이니까요. 이렇게 당시 사회에 많은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퀘이커는 매우 인기가 있었어요. 보편적 구원(universal salvation)과 평등의 관점에서 희망을 제공하는 공동체였기 때문이에요.
김흥수 말씀을 들어보니, 마치 마르틴 루터의 만인사제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퀘이커는 모든 제도적인 형식을 철저히 거부하고 보편성과 평등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급진적 기독교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벤 그렇습니다. 퀘이커 운동이 시작되고 10년간은 굉장히 많이 퍼져나갔어요. 당시 영국에는 왕이 없었어요. 공화정 시기였는데, 검열이 없어서 퀘이커들은 자유롭게 이동하고 자유롭게 인쇄할 수 있었지요. 영국 인구의 1%가 퀘이커 신자가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군주가 다시 복귀하자, 퀘이커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퀘이커 신자가 되는 것은 불법이었지요. 이후 30년간 퀘이커들은 매우 힘든 시기를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고, 많은 사람이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윌리엄 펜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 펜실베이니아에서 집단 거주지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니까 퀘이커는 첫 10년간은 왕성하고 열정적이고 힘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살아남기 위해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각은 동일하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전히 순종하려고 노력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직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본이 있으므로 듣고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다는 퀘이커의 기본 명제는 직접적인 계시라는 말입니다. 신비적인 체험이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퀘이커를 신비주의 계통의 부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비적 요소들은 가톨릭에도 있지만, 퀘이커는 전적인 신비주의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가톨릭 신비주의자라면 그 사람은 미사를 드리거나 사제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지만, 퀘이커에게는 이런 매개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저는 이것이 일반적인 기독교와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흥수 신도 개개인이 ‘내적 빛’(inner light)을 경험하는데, 그것이 참된 내적 빛인지 아닌지 판별해야 하는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기도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이야기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 이단으로 간 경우가 있어요. 퀘이커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는지요?
벤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집단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침묵의 예배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경험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만일 우리 중 누군가가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하고 말하면, 우리는 이것을 집단으로 공유하며 “이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집단으로 테스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집단 전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 말을 집단으로 테스트해서 그것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집단적으로 결정합니다. 성서 텍스트를 따르거나 특정 리더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따른다는 말에는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집단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룹에서 일치를 추구하는데요. 우리가 일치를 이룬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합의가 안 되면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투표하지 않고 일치할 때까지 기다려요. 그렇게 예배를 통해서 모든 결정이 이루어집니다. 만장일치로 이루어지는 거죠. 어떤 사안에 대해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일치를 이루어 가는 거죠. 매우 느린 방법입니다.
김흥수 예를 들어, 퀘이커 예배(미팅) 시간에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나는 성서에 비추어서 베트남전쟁을 지지한다 혹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하고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그럼 그 의견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 자리에서 토론하나요? 아니면 예배 끝난 뒤에 하나요?
벤 예배 중에는 그냥 앉아 있습니다. 토론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지요. 그러나 결정을 내리기 위한 회의라면 누군가가 일어나서 그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거예요. 예배 중에는 토론하지 않지만, 회의에서는 서로 다른 관점이 표현될 수 있어요. 한편 회의의 모든 결정은 기록됩니다. 서기(clerk, 리더 역할)를 두어서 모든 결정사항을 담은 회의록을 작성하지요.
김흥수 지금 말씀하신 회의도 예배인가요?
벤 네. 우리는 토론까지도 다 예배로 생각해요. 그냥 침묵하면서 예배할 수도 있지만, 어떤 쟁점이 있을 때에는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예배 모임’(meeting for worship), ‘사무 모임’(meeting for worship for business)이라고 나누기도 하지만, 사실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아요. 그래서 사무 모임에서 하는 토론도 예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고, 서기가 서로 다른 의견들을 기록해 놓지요. 이런 의견, 저런 의견을 다 적고 사람들이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서기를 비롯하여 공동체의 모든 역할은 구성원 모두가 돌아가면서 맡습니다. 어떤 사람이 3년 혹은 6년간 서기 역할을 하고, 이후에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최대 6년 동안 장로로 일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회계나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서로 역할을 바꾸기 때문에 공동체 내에 고정된 리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김흥수 퀘이커 예배 모임이 아주 작은 모임부터 큰 모임까지 있을 텐데, 영국을 예로 들면 보통 몇 명이 모이나요?
벤 서너 명이 모임을 가질 수도 있고요. 영국의 옥스퍼드에 가면 백 명이 모일 수도 있어요. 최근에 1년에 한 번 여는 연례 모임을 가졌는데요, 천 명 넘게 모였어요. 여전히 앉아서 기다리고 경청하는, 같은 방법으로 예배드렸습니다.
한국에는 두 개의 퀘이커 그룹이 있는데요. 서울에 있는 그룹은 일요일에 20명 정도 모이는 것 같고, 대전에 있는 그룹은 5명에서 10명 정도 모이는 것 같아요. 팬데믹 기간 동안 퀘이커 교도들은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기가 쉬웠습니다. 퀘이커에는 사제가 없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그냥 줌(zoom)모임에 들어가서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면 돼요. 예배 현장에 몇 사람이 있고, 줌을 통해 참여하는 사람들 몇 있는, 그러한 예배 드리게 된 것이지요. 이를 하이브리드(hybrid) 또는 블렌디드 미팅(blended meeting)이라고 부릅니다.
김흥수 화제를 조금 바꾸어, 어떻게 퀘이커가 되었는지 교수님 개인의 신앙 경험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벤 부모님은 매우 엄격한 무신론자였어요. 아버지는 지적으로, 어머니는 감정적으로 무신론자였죠. 그래서 집안에는 종교가 전혀 없었어요. 영국에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주를 이루는데, 제 부모님은 독립적인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아주 작은 규모의 학생이 한 반을 이루는 사립학교에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사를 했는데, 로마가톨릭 학교나 퀘이커 학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어요. 부모님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덜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저를 퀘이커 학교(secondary school, 한국의 중고등학교)로 보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종교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실 그곳에서 6년 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퀘이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 채 졸업했습니다. 그 학교는 제가 전에 다녔던 학교와는 조금 달랐어요.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잘못을 하면 지팡이와 회초리로 매를 맞았지만, 퀘이커 학교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리고 남학생뿐만 아니라 여학생도 있었고요. 그래서 저에게는 새로운 학교였어요. 남녀공학이었고 패거리도 없고 싸우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지요. 그러나 퀘이커리즘에 대해서는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점심 식사 전에 약간의 침묵이 있었던 점 그게 다였습니다.
퀘이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호텔 매니저가 되기 위해 호텔경영학과에서 공부했어요. 그런데 대학에서 좌파 정치와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공산주의 단체를 경험하고서 결국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호텔경영학과를 그만두었습니다. 알다시피 경영은 사업이잖아요? 거기서 무정부주의자가 뭘 할 수 있겠어요?(웃음) 그리고 6개월 정도 미군 공군기지 밖에 있는 아나키스트 평화 캠프에서 살았어요.
무정부주의는 매우 이데올로기적이고, 개인주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또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어요. 그들은 혁명이 직장에서 일어날 거라고 믿었기에 여전히 직장에서 일을 했고, 여전히 투표도 했기 때문이죠. 아나키스트는 투표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매우 엄격하고 순수하지만, 매우 개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죠.
김흥수 1980년대의 상황이지요?
벤 네. 맞습니다. 마거릿 대처가 집권한 시절인 1984년에는 영국 석탄노조의 파업이 일어났어요. 우리는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했지요. 당시 우리는 평화 캠프 텐트에서 먹고 자면서, 투표하지 않고 의사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채택했어요. ‘합의된 의사 결정’(consensus decision making) 같은 거였죠. 우리는 다양한 머리 색과 스타일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 중 일부는 공군기지 울타리를 자르기도 했고요.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요. 채식주의자 종류도 다양했어요. 비건도 있었고, 프루테리언(fruitarian, 과일과 견과류만 먹는 채식주의)도 있었고요. 정말 다양했습니다. 저는 인구 증가에 대한 도덕적 문제 때문에 절대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소수자 정치, 성 정치학(sexual politics)에도 관여했습니다.
그중 모두가 동의한 유일한 일은 이름을 특이한 것으로 바꾸는 거였어요. 항상 아버지의 이름이 대물림되는 기존의 방식에 항의하기 위해서였지요. 이름을 바꿨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터무니없는 이름을 선택하는 방식이었죠. 그래서 저의 법적 이름은 ‘핑크 댄딜라이언’(Pink Dandelion, 분홍 민들레)입니다. 벤(Ben)은 그냥 제가 불리고 싶은 이름이고요. 여권에도 핑크 댄딜라이언입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이름이지요. 민들레 색깔이 분홍색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분홍색으로 한 이유는 남자아이는 파란색, 여자아이는 분홍색으로 규정된 통념에 항의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영국에서는 보통 남자아이에게는 파란색 옷을 주고 여자아이에게는 분홍색 옷을 주어야 한다는 게 통념이었죠.
그 시절 저는 미군기지 담장을 자르거나, 길거리에 앉아 있다는 이유로 6개월 동안 8번 정도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 무렵 영국 석탄노조의 파업도 실패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영국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멈췄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사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나누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에 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제가 취해야 할 정치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그룹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회 내에서 일하고 있는지 생각해봤는데요. 순간 퀘이커 교도들을 떠올리게 됐지요. 그들은 무정부주의자처럼 지도자도 없고 투표도 하지 않지만, 시스템 내에서 움직이는 매우 강력한 평화주의자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무정부주의 활동을 그만두고 도시를 옮겨 평화운동가로서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김흥수 1980년대 영국의 아나키즘 운동에 대해 조금 더 말씀해주시지요. 한국에서는 1945년 이전 일본 치하에서 아나키즘 운동이 있었습니다.
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영국에도 아나키즘 운동이 있긴 했지요. 아주 소규모로요. 잡지 같은 것도 있었고, 사람들의 네트워크도 있었습니다. 모임에 가면 다양한 공산주의 단체와 아나키스트가 있었는데요. 사유재산을 파괴하거나 건물을 폭파하기를 원하는 등 폭력에 매우 열광하는 아나키스트도 있었어요. 저는 평화주의 아나키스트 그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다치게 하거나 어떤 것도 파괴하고 싶지 않았어요.
당시 퀘이커에서 침묵하는 게 좋았어요. 물론 이 시점까지 저는 불가지론자였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2년 후 어느 날 미국에서 버스를 탔는데, 어떠한 힘에 의해서 사로잡히고 위로 들려지는 매우 강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적합한 단어를 몰랐지만, 그 당시 틀림없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니었고, 필요한 게 딱히 없었는데도,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 거예요. 그 이후로 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는 삶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것(하나님이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를 듣는 행위), 사무 모임에 참석하여 귀를 기울이는 것 등 퀘이커리즘이 잘 와닿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매우 헌신적인 퀘이커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퀘이커에 대해 박사 학위를 받고 퀘이커를 위해 일하게 되었지요. 풀타임 퀘이커가 된 것입니다.(웃음)
김흥수 왜 ‘퀘이커’(몸을 떠는 사람)라는,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이름이 붙은 건가요? 또 왜 퀘이커들은 ‘친구들’(friends)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지도 궁금합니다.
벤 원래 퀘이커들은 ‘빛의 자녀들’(children of the light) 혹은 ‘진리의 친구들’(friends of the truth)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지 폭스를 재판한 판사 중 하나가 그에게 “너는 주님 앞에서 몸을 부들부들 떤다며? 그럼 너는 ‘퀘이커’로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름이 끼어든 건데, 굳어지고 말았지요. 사람들이 계속 퀘이커라고 불러서 그게 이 운동의 이름이 됐지만, 공식적인 명칭은 ‘종교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입니다. 그래도 다들 퀘이커라고 부르긴 하죠. 왜냐면 예배 중에 사람들에게 떨림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떨림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흥수 우리도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 경우는 많지만, 몸이 떨리는 경험은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는 것도 쉽지 않고요. 퀘이커에서는 그런 떨림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건가요? 또 그 떨림의 경험은 육체적인 건가요, 영적인 건가요? 영적인 거라면 눈에 보이지 않겠고, 육체적인 거라면 눈에 보이겠지요.
벤 떨림은 눈에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떨림의 경험 중에 숨이 차서 헉헉거리기도 해요. 지금은 흔하지 않지만 정말 문자적으로 떨림이 있고 나서 사역을 하곤 했습니다. 오늘날 그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심장이 엄청나게 뛴다고도 하고, 갑자기 하나님에 의해 발이 밀린 채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고도 합니다.
김흥수 ‘내면의 빛’(inner light)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벤 퀘이커에게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방식(the way God breaks in)이나 하나님을 듣는 방식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후자의 경우 빛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빛’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또 다른 이름이지요.
원래 이렇게 외부의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내부를 향하는 무언가를 가리킬 때는 ‘이너’(inner)가 아니라 ‘인워드’(inward)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우리 안에 조금이나마 하나님이 있으며, 어떠한 타고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이너 라이트’(inner light)라는 표현을 씁니다. 모든 사람이 타고난, 그 사람 안에 내재한 무언가를 뜻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너’라는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용하지 않으며, ‘인워드’라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게 하나님은 외부에 있는 분이고, 동시에 내면으로 들어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인워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오늘날 퀘이커들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하나님의 일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화주의자가 되어야 할 또 다른 이유입니다만, 조금 다른 해석입니다.
김흥수 그러니까 ‘인워드’는 외부에 있던 하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방향성, 또는 그런 경험과 관련된다면, ‘이너’는 이미 내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과 관련되는 표현이네요. 오늘날 퀘이커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군요. 이런 믿음이 인권운동의 영적인 기반이 될 수 있고, 평화주의 역시 이로부터 나온 결과인 것 같습니다. 퀘이커가 평화운동을 하는 방식은 어떤가요?
벤 퀘이커는 다양한 방법으로 평화운동에 참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울타리를 자른다든가 무기 박람회 개최를 저지하는 식으로 참여할 겁니다. 그들에게 평화라는 개념은 전쟁보다 훨씬 큽니다. 그래서 평화는 기후정의에 관한 것이 될 수 있고, 인종차별이나 “Black Lives Matter”와 같은 구호와 관련되거나 이러한 것들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퀘이커는 다양한 시위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 다른 법안에 표를 던지도록 설득하기도 하고, 청원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린피스(Greenpeace) 같은 단체나 멸종 반란(Extinction Rebellion)과 같은 점거 운동에 함께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다양한 접근이 가능한 것이죠. 단순히 이웃과 대화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각자 다른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의 퀘이커 교도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주장하여 병역 면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 사용될 세금을 내지 않고 버티는 것도 퀘이커들이 사용하는 또 다른 전략입니다.
김흥수 이러한 평화운동의 기반이 되는 퀘이커의 평화주의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벤 퀘이커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왜 평화주의를 택하지 않는지 상상하기 어려워합니다. 영국교회에는 미사일을 축복한 주교들이 있는데, 그것은 매우 기이하게 보입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계시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성서를 자주 인용하지는 않습니다만, 성서에는 분명히 살인하지 말라거나 평화를 만드는 이들을 축복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전쟁이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은 왜 전쟁에 뛰어들까요? 그들은 정당한 전쟁 이론(just-war theory)을 내세웁니다. 그 전쟁이 정당하다는 것을 근거로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일부 퀘이커들은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실제로 싸워야 해.’ 하고 결정을 내린 그런 퀘이커 교도들은 대개 스스로 퀘이커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더 이상 퀘이커에 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퀘이커 조직은 지금껏 전쟁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표명했으며, 전쟁 준비는 물론 전쟁이 곧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추동하는 문화에도 분명한 반대를 표명해왔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퀘이커는 그들 자신이 참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자신들은 참 교회이고 다른 모든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을 멈춘 것이죠. 무엇이 참 교회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퀘이커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며, 사회 정의를 위해 감리교나 장로교와 같은 다른 기독교 교단들뿐만 아니라 불교 신자, 무슬림과도 협력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퀘이커는 다른 교회에 비해 사회적으로 좀 더 진보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그래서 성서 텍스트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퀘이커에는 주교 직제가 없지만, 성공회나 로마가톨릭에 여성 주교가 존재하지 않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성은 왜 주교나 사제가 될 수 없는지 의문을 가지지요. 이러한 신학적 질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러한 것보다 어떻게 함께 일할지에 대해 주된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김흥수 오늘날 영국에서 퀘이커를 포함해서 기독교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벤 오늘날에는 다양한 종교전통이 존재하는데, 자유주의적 전통의 종교들이 전형적으로 겪듯 퀘이커 또한 수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형태의 종교가 더 잘 살아남는 듯합니다. 보수적인 종교가 어떤 측면에서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요.
하지만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퀘이커는 이론적으로 매우 급진적이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여전히 퀘이커를 찾습니다.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만 이론적으로는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성 종교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굴레’를 씌워서 사람들이 싫어하지만, 퀘이커는 다른 종교 조직보다 영성을 강조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영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적이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들은 의무를 강조하는 종교 조직에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퀘이커는 해야 할 일을 지시하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각종 위원회나 공동의 일이 많은 구조가 되었습니다. 매우 복잡해졌죠. 사회적 활동 때문에 그런 측면이 있지요. 그래서 영국에서 신자 수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이들은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퀘이커주의는 소수의 사람으로 생존할 수 있습니다만, 3세기에 걸쳐 쌓아온 복잡한 구조는 지속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교회들이 근본적으로 다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건물과 조직체계 및 계층구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카페 같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등 교회 건물이 아닌 예배에 오로지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퀘이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하기를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침묵을 바탕으로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개방적인 형식의 예식이지요. 특히 장례식은 삶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예식이라는 점에서 좋아합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예배를 위해 모이면 다들 자기가 맡은 일을 하느라 바쁩니다. 현실적으로 흥미로울 수가 없지요. 그래서 예배에 다시 집중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조에 대한 것 말고요.
조금 더 설명하자면, 퀘이커 결혼은 주례자(사제)가 없는 열린 모임입니다. 결혼 당사자들은 준비가 되면 일어나서 예물을 교환합니다. 예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서 예식에 참여한 누구든지 그들에게 축복의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장례식 역시 누구든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사람과의 기억, 추억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바로 예식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로가 되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주례자(사제)도 없고 거창한 예식을 거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지요. 이것이 예배의 본질 아닐까요?
김흥수 결혼식은 얼마나 걸리나요? 결혼식이 끝난 다음에 음식을 먹거나 춤을 추나요?
벤 보통 한 시간이 약간 안 됩니다. 결혼식이 끝났다고 모두가 생각할 때까지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요. 정해진 시간은 없습니다. 장례식도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모두가 음식을 함께 준비하고 예배가 끝난 뒤 음료와 비스킷을 나눕니다. 일종의 축제이니까요. 누가 주도하여 예배를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악수하고 나서 음식을 먹습니다.
김흥수 저는 영국의 퀘이커 신학자를 만난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퀘이커의 역사와 예배 등 퀘이커에 관하여 소상하게 이야기 들은 것도 처음입니다. 벤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퀘이커가 내적 빛에 의지해 교회의 모든 형식과 권위, 교리에 대항해 온, 매우 급진적 종파라는 것도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 우리 「기독교사상」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