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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후반의 비잔티움 군인들. 불행하게도 이 전사들의 모습은 실제와는 차이가 있다. 정강이받이는 오래된 형태의 것이며 아마 이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을 소지가 높다.
러멜러 조끼와 클리바니온, 오른손의 무장은 실제와 유사하지만 그의 동료가 입고 있는 근육이 보이는 가죽조끼는 오래 전의 것이다. 두 조끼의 어깨와 허리에는 두꺼운 가죽으로 된 천조각이 붙어 있는데 이는 프테루게스-(그리스어로 깃털이란 뜻)란 장식이다. 그 입은 망토는 아마, 이들이 기병이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비잔티움인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기에서, 군사 전략 및 정치에 매우 철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들은 전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님을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으며, 별로 성과가 기대되지 않는 군사 행동보다는 뇌물과 책략으로 적들을 처리했다.
6세기부터 역사가 프로코피우스가 어느 한 적에게 돈을 주는 짓은 또 다른 적의 공격을 야기시킨다고 심술궂게 언급하긴 했지만, 이 정책은 무수한 적에 둘러싸인 제한된 인력-그나마도 잦은 내분으로 잡아먹는-을 가진 제국이 1453년까지 살아남는데 매우 큰 효과를 거두었다.
제국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고 그밖의 적들은 황금과 명예, 거짓 편지와 반란을 지원하는 경우로 해결했으며, 이 수단들로 처리가 불가능한 적은 거의 없었다. 스크리니움 바르바로룸(혹은 스크리니온 톤 바르바론-Bu reu of Barbarian)은, 황제가 현재 상황을 판단하는데 필요한 정확한 흐름과 상황을 제공할 수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동시대인들은 아첨과 위협-제국 외교의 기본 요소-이 복합되거나 혹은 역으로 펼쳐진 제국의 음모를 이해하기 힘들어 했으며, 그 대부분은 제국의 외교적 행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황제와 그의 대사가 펼치는 행동의 군사적인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았다.
비잔티움이 지난 천 년 동안 역사가와 연대기 작가로부터 받았던 ‘나쁜 압박’은 이것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오늘날 음험하고 비열한 행동은 ‘비잔티움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런 책략과 음모의 배경과는 반대로, 결코 잊으면 안되는 중요한 요인이 있다. 그런 위협과 뇌물을 통한 정책은 강력한 군대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이며, 비잔티움 제국은 10세기와 11세기 초반에 힘과 효율성의 절정기에 있었고 당시 알려진 세계-서구, 동구, 이슬람 등-국가들 중 가장 잘 조직되며 훈련되고, 가장 좋은 급료를 지급받는 군대였다.
조직
비잔티움인들은 그들의 로마적 유산을 굉장한 많은 존경심으로 완강히 고수했지만(그들은 스스로를 로메이-로마인이란 뜻이다-라 일컬었다.), 군대 조직은 그 어느 요소도 없었다.
마우리키우스가 유명한 병법서 스트라테기콘을 펴냈을 때인 6세기~7세기 초의 이른 시기에도, 이미 고대 로마 제국의 유산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마우리키우스의 군대 조직은 적어도 10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로도 1세기 동안 더욱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병법서인, 현군(소포클레스)레오 6세에 의해 그 유명한 탁티카(903년 경에 기록되기 시작하였다.)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레오의 시대에서는 보병이든 기병이든 대대(반둠 혹은 반돈)가 기본 조직이었고, 이는 앞선 시기의 스트라테기콘에선 타그마나 아리스모스(라틴어 누메루스를 그리스어로 직역한 것이다.)라 불렸다.
반돈이란 말 자체가 게르만어인 바너(영어와 독어 공히 Banner)에서 온 것이며, 이것은 외국의 영향이 이미 6세기에 제국의 군대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의미한다.
보병 대대는 16개의 로카기에로 구성되었고 각 로카기에는 16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로카고스(종대의 지도자란 뜻이다.)라 불리는 자들이 통솔하였다.
그는 데카코스, 펜타키스, 테트라키스, 우라고스(종대 닫는 자란 뜻-File Closer)들의 보좌를 받았다. 4개의 로카기에는 알라기온( 작은 날개란 뜻)을 형성했으며, 이들은 주로 한 쌍으로 편성되었다.
중보병의 3/4는 스쿠타토이라 불린 창병이었고 나머지 1/4는 궁수였는데, 궁수는 독립 로카기아나 알라기온으로 편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경보병과 근위대는 창병과 궁수와는 다르게 통짜로 부대를 형성했으며, 특히 경보병의 경우 그 로카기에는 16명이 아닌 8명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스트라테기콘이 기록된 시기의 기병 대대는 세 에카톤다키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각은 에카톤다키스 혹은 일라키스라 불리는 고참병-이들은 부대대장의 역할을 맡았다-의 지휘를 받았고 대대장은 보병이든 기병이든 코미스라 불렸다.
레오 6세의 시절에는 에카톤다키온이 사라지고, 대신 반돈은 여섯 알라기아(아마 펜테콘타키스들의 지휘를 받았을)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보통 보병 대대와 짝을 이루었으나, 각 조는 여전히 에카톤다키스(혹 켄티리온)의 지휘를 받았다.
여섯 알라기아는 각기 5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50명은 10명씩으로 구성된 다섯 데카키아로 구성되었고, 각각은 데카코스, 펜타키스, 테트라키스, 우라고스, 그리고 나머지 여섯 명의 병사로 이뤄졌다. 전투에서 기병 데카키아는 보통 2열 종대를 짜고 싸웠으며, 앞 열에는 데카코스와 테트라키스가 위치했고 뒤에는 창기병 한 열이 따라왔다. 그리고 두 열의 궁수가 그 뒤를 따르고 맨 뒷 열에는 테트라키스와 우라고스가 위치했다-네 부사관 모두 창기병이었다.
기본적으로, 1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기본적인 보병부대는 256명(16*16)으로 이루어졌으며 기병은 300명(6*50)이 기본 단위지만, 실제 병력은 정확하지는 않고 200~400명 이었다.
정확한 병력 수가 실제 전장에서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었고, 이는 아마 부상병, 환자, 아픈 말 그리고 풋내기 신병까지 포함하는 숫자였을 것이다. 전투에 나서는 숫자는 공식적인 숫자보다는 적은 경우가 많았다. 기수, 군악대, 관료에는 로카고스나 데카코스가 나타나지 않는다.
니케포루스 2세(963-969년)의 재위기인 10세기 후반의 기병대는 50명으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는 차라리 알라기온이 의미하는 바에 더 가깝다. 어쩌면 레오 6세 시절과 반돈의 의미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두 자료에 따르면, 보병의 최소부대는 16명이 아닌 10명으로 이뤄져 있다.(궁수와 창병의 비율은 3:7이다) 하지만 11세기 후반에 쓰여진 미카일 프실로스의 크로노그라피아는, 여전히 16명으로 구성된 로카기에를 언급한다.
높은 등급의 기병-그리고 아마 보병도-조직은 미라-Moira(미라코스의 지휘를 받았다.)혹은 드룽고스(드룽가리오스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투르마나 메라로 구성되었다.
미라나 드룽고스는 가변적인 숫자의 대대로 구성되었다. 아마 평균치는 2~5개였을 것이며, 투르마 혹은 메로스는 세 미라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스트라테기콘에 따르면 미라는 2,000-3,000명, 메로스는 6,000- 7,000명으로 이뤄졌지만, 레오 6세의 시기에는 가장 큰 테마가 기병만 따져도 1만 5천 명이었으나 가장 작은 건 겨우 4천 명에 불과했다. 특히 838년의 투르마들 중에는, 2천 명 밖에 안 되는 것도 있었다.
첫댓글 그당시 비잔틴인들도 정확히 이해하고잇엇군요 강력한 군사력없이 어떤 술책이든 외교적능력이든 소용없고 오히려 적들을 불러들인다는 것을요
그걸 터키가 충실히 이행하죠 지금은(러시아가 있으니..깡패보단 양아치급이지만)
못보고지나칠뻔 잘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