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우리 반에서 두 번째로
선자가 전학을 가는 날
소재지 정류소까지 전송을 하고
돌아오는 길엔
끝내 궂은 하늘 무너지는
비가 내린다.
텅텅 비어 가는 자리만큼
텅텅 비어 가는 가슴
장년기 지형 골 깊은
뼈마디를 울리며
비기 내린다.
유난히 황사바람 드셌던
올봄 같은 가뭄
엔간해선 바위산처럼 꿈쩍도 않는
아이들의 어깨를 흔들며
길옆 잡풀들이 비에 흔들린다.
흔들리면서 더욱 뿌리 깊어 지는
잡풀들의 생태
그래 너희들은 잡풀들이다.
삽날에 실뿌리 두어 개쯤 잘려도
더욱 마디 굵어지는
이 땅의 튼튼한 잡풀들이다.
추석
일흔 나이 불편한 몸보다
불편한 마음 때문이실까
끝내 아버지는 오시지 않았다
올해도 대추 밤 속살 달게 익고
산들 가득 구절초 마타리꽃 우거져
추석날이 이리 환한데
아버지 오시지 않은 제사상 앞에서
목이 메인다 이십육대 종손
말이 좋다 대학까지 나와서
제 밥줄 떼이고 마누라 밥줄에
매여 사는 못난 자식놈
차마 바라보기 민망스러워이실까
시퍼렇게 눈뜨고 살아
아직 사람사는 격식 빤한데
생전에 자식에게 제사일까지
물려주어야 하는
당신의 섧게 늙은 나이
독새풀처럼 끈질긴 가난이 미워서이실까
생애 접는 늘그막까지 낯선 타향에서
명절 때마다 거꾸로 자식놈을
찾아와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
치떨리신 것일까
설날에도 제사상 물리자마자
선길로 떠나셨던 아버지
끝내 오시지 않은 추석 제사상 앞에서
아버지 대신 술잔을 올리며
오만생각 어지러이 헝클리어
길고 긴 하룻날이 모질다
해직의 잘린 목을 누르며
찾아 드는 이 명절
오늘 추석밤도 문 걸어 잠그고
끝내 보름달 볼 수 없다
가을꽃
뜨거운 사랑도
죄가 되는 이 땅
교단의 바깥에서
서러워라
다가설 수 없는 거리
들국화 구절초는
저리도 예쁘게 피어
먼발치에서나
그리운 이름들
하나씩 불러 보면
그만 꽃은 지고
꽃은 지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하필 이 저물녘
긴 그림자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한 그루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사람을 그리워하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홀로 선 나무처럼
고독한 일이다.
제 그림자만 마냥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는
나무처럼 참 쓸쓸한 일이다.
저문 강엔
저무는 강에 나가
어둠이 강물에 어떻게
젖어드는가를 보았습니다.
강의 가장 깊은 곳에 젖어든
어둠은 이내 수면으로 피어 오르더니
어느 새 하늘에 자갈돌 같은
노란 별이 깔리더군요.
저무는 강에 나가
그리움이 가슴에 어떻게
스며 오는가를 느꼈습니다.
가슴 맨 밑바닥에 스며든
그리움은 금방 눈시울을 적셔 오더니
어느 새 하늘에 소금 같은
하얀 별이 흩뿌려지더군요.
저문 강엔 온통
별들만 반짝반짝 흐르더군요.
미조리 가는 길
생애의 절반은
멋모르고 살아왔고
나머지 절반은
부끄러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벌써 몇 번째인가
그곳에 다다르면 남는 건
늘 허망하게 돌아오는 일뿐이었다.
노란 유채밭 너머, 벌써부터
남빛으로 잔잔하게 일렁이는
앵강만, 이어 언덕길을 따라
등나무들이 연보랏빛 꽃등을
밝힐 것이다.
밝힌들, 늘 이렇게
그리움으로 몇 날의
몸살 끝에 달려가 만나는 건,
돌아오면서 주워야 할
내 사랑의 부끄러운 잔해들뿐이었다.
생애의 절반을
멋모르고 사랑하며 다 보내고,
돌아보며 가슴 칠 줄 알면서
나는 또 오늘 미조리에 간다
내 사랑은
그땐 그랬다. 그 신안동 골목길
아마 일본식 슬라브 건물이었을 것이다.
봄이면 견고한 담장 너머로 백목련과
산수유꽃이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피었다.
그러나 그 오래 되어 윤기 없는
목제 대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등뒤의 그녀는 무슨 말인가 끊임없이
보내왔지만 나는 내게 오는 말들을
모두 흘려보냈다. 세상 이쪽과 차단된
담 너머 저 눈부신 꽃 그늘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혹은 지금 누군가가
책갈피에 꽃잎을 끼우며 책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에만 골몰했었다.
아마 그 다음 해 봄이었을 것이다.
그때에도 어김없이 백목련과 산수유꽃은
전등처럼 환하게 골목을 비추고 있었고,
등뒤의 그녀는 내게 말을 보내왔다.
저 떠나요. 그래도 붙잡지 않겠죠.
나는 또 그녀의 말을 흘리며, 꽃의
눈부신 그늘에 앉아 있을 사람의
책장 넘기는 소리와 봄햇살에 바스락대는
옷자락 소리에만 모든 귀를 열어놓고
그리워했다. 그런 내 등을 등지며
그녀는 떠났다. 그 이후로도
내게 말을 보내오는 여자들은
그림자처럼 늘 내 등뒤만 따라다니다가
또 그렇게 떠나갔다.
지금도 그렇다. 그 신안동 골목길은
떠나왔지만, 등뒤에서 말을 보내오는
여자는 많았지만, 내가 정작
가슴 앓으며 그리워하는 이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신안동
그 골목길 백목련과 산수유꽃이 환하던
담장 안의 그런 사람이다.
등뒤의 여자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지만
내 사랑은 스스로도 영문 모를
늘 그런 사랑이다.
상처
아직 필 꽃이
남아 있으려나.
피는 꽃도 많고
지는 꽃도 참 많은데
이 꽃 피었다 진 자리
상처는 다 어떡하나.
싸움으로 받은 상처보다
사랑으로 입은 상처가
더 깊다는 것을 알면서
그래도 필 꽃이
아직 남아 있으려나.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그 여름 내내
기차는 하필 잠들지 못하는
늦은 밤이나 너무 일찍
깨어버리고야 마는 새벽녘에야
당도해서 가슴을 밟고 지나갔다.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는 것임을
그 해 여름 그 역 부근에 살면서,
한 사람을 난감하게 그리워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낮 동안 기차가 오고,
또 지나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딸랑딸랑 기차의 당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늘 가슴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 순간
레일 위의 어떤 금속이나
닳고 닳은 침목의 혈관인들
터질 듯 긴장하지 않았으랴. 이어
기차는 견딜 수 없는 육중한
무게로 와서는 가슴을 철컥철컥
밟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아주 짧게,
그러나 그 무게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는지를
아, 기차는 모를 것이다.
구절초
사연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만
하필 마음 여린 이 시절에 어쩌자고
구구절절 피어서 사람의 발목을 붙드느냐.
여름내 얼마나 속끓이며
이불자락을 흥건히 적셨길래
마른 자국마다 눈물꽃이 피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치대느냐.
꽃이나 사람이나 사는 일은
이렇듯 다 구구절절 소금 같은 일인 걸
아, 구절초 흩뿌려져 쓰라린 날
독한 술 한잔 가슴에 붓고 싶은 날
비 갠 아침
이렇듯 맑은 구슬 하나 품으려고
간밤에 그렇게 무릎 세워
엎드려 우셨습니까.
누군가의 울음이 이렇듯 눈부신
아침을 만드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또르릉 또르릉……
당신의 가슴에서 구르는
아, 투명한 실로폰 소리를 듣습니다.
백양사에서
백양은 없었습니다.
희고 큰 바위산 하나
백양사 뒤로 무심하게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지요.
백암산이라더군요.
비 내리는 저녁 무렵
백양사 입구에서 비에 젖는
어둠만 멀거니 쳐다보다
그냥 자기로 했습니다.
잠결에도 빗소리가 들렸습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당신의 꿈을
몇 번이나 꾸었습니다.
산안개가 뒤척이는
소리에 잠이 깨었습니다.
아, 그때 나는 백양사의
백양을 보았습니다. 눈처럼
아름다운 백양 한 마리
백암산 중턱을 재빨리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이었습니다.
아주 잠시 내게 왔던
백양 사라지고, 백암산엔
보리수 잎처럼 푸른
매미 소리만 가슴에 서늘했습니다.
능소화
누가 발목을 저리도
모질게 붙들고 있을까.
내 사랑은 끝내 담을 넘어
내게 오지 못했다.
여름내 안간힘으로
목만 늘이다가
눈 부릅뜬 채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화개리, 가을
나무들은 벌써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끊을 건 끊고 버릴 건 버려야
자꾸만 무거워 짓눌리는
이 삶을 부지할 수 있으리라.
일찍이 내 사랑이 꽃처럼 열렸던 곳,
또한 가을 잎처럼 무참히 져 내렸던 곳
화개리, 여기에 와서 또 한 번
수액을 모두 빼앗긴 나무처럼
이 현기증 도는 사랑의 무게를
도저히 떨치지 않으면 안되겠네.
잘 가라. 그 이후 줄곧 부질없던
내 사랑, 벌써 잎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도 할 수 없네.
화개리, 여기에 와서 모두 떨구고
나도 나무처럼 가벼워지기로 했다.
길
흘러가는 물이
길 가던 내게 물었다.
어디서 왔니?
나도 모르지.
길 가던 내가
흘러가는 물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니?
나도 모르지.
온 곳도, 갈 곳도
모르는 것들끼리
잠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또 길을 갔다.
화개리 벚꽃
꽃이 핍니다.
마음 두지 않겠습니다.
꽃이 진다 한들
마음 쓰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때아닌 폭설같이 당혹스럽게
세상을 덮쳐 오는 꽃
사람의 마음 또한 이렇게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것을
한때 아름다운 젊은 날
거기 잊지 못하고 찾아올
누군가 또 한 사람
그러나 그 사람조차 몰래
올해도 화개리 가겠습니다.
오월의 편지
그러기를 참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새 꽃들은 혼자 피었다 지고
꽃 진 자리엔 풀들이 돋기도 하면서
스스로 키운 나무들이 숲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숲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을 보며
그대가 참 많이 그립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대에게 가는 길은
숲들에 가려 향방조차 알 수 없고
그대 또한 그대가 만든 숲 속에서
내게 오는 길이 보이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렇게
모든 길이 가려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가슴에 풀물 같은 그리움 뚝뚝 젖더라도
그냥 이대로 있겠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으셔도 괜찮습니다
다솔사
여기는 산도 누워 있고
부처님도 누워 있지요.
스님의 목탁 소리도
늘어지다 더 늘어지다가
멈춰 버렸고, 화단의
꽃들도 고개를 꺾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지요.
길섶의 산비둘기도
먹이 쪼는 일도 잊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고요.
산나물 파는 할머니도
파리채를 든 채
파리와 입맞춤하며
함께 졸고 있지요.
이따금 지나가는 바람이
적멸보궁 풍경을 딸랑딸랑
흔들어보지만, 허!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요.
다솔사에 한 번 와 보시지요.
내가 미조리에 가는 이유
지금
누군가
사람 때문에
절망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잊어버리는 일이
죽는 일보다 어려우시면
굳이 잊으려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일이
죽는 일보다 힘드시면
그 사람을 가슴에 품고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꼭
남해 미조리에 한 번 가 보시라.
거기 누구 한 사람
만나게 되면,
그리곤 죽든지, 말든지
나는 모를 일이다.
길 떠나는 이를 위하여
뒤돌아보지 마시게.
선 길로 쭉 걸어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앞으로, 언덕길에서 미끄러지더라도
앞으로, 곧장 앞만 보고 가다가
누군가 뒤에서 나를 보고 있을 거라는
연민도 집착도 싹둑싹둑 잘라 버리고
앞만 보고 가다가
어떻게 걸어 왔는가조차도
되돌아볼 것 없이
앞만 보고 가다가 행여
외로움이든지 그리움이든지
사무쳐 환장이라도 들거든
그냥 아주 잠시 무릎 세워 엎드렸다가
그래도 곧장 일어나 앞만 보고 가다가
때로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도 머뭇거릴 것 없이
앞만 보고 가다가, 마침내
되돌아볼 미련이나
나아갈 오기마저 스러져
모든 길들이 환하게 사라졌을 때
거기 먼저 온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혹은, 먼저 피어 있는 꽃이든지.
시를 쓴다는 것
내 시가 사람들에게
밥 한 톨만큼의 희망이나
위안도 될 수 없는 것이라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내 시가 사람들에게
나무 한 그루만큼의 그늘이나
온기도 줄 수 없는 것이라면
참 미안한 일이다.
이 세상에
먼지처럼 풀풀 날아다니며
밥을 더럽히는 시여.
생살 찍혀 쿵쿵 넘어지는
숲이여.
시를 쓴다는 것,
참 두려운 일이다.
다솔사 단풍
산간의 절도 세상이었네.
절간의 스님도 사람이었네.
어디에다 저 뜨거운
불씨를 숨겨왔을꼬.
허, 일났네.
그래도 일없네.
대지국민학교 벌개미취
벌처럼 짧은 팔을 붕붕거리며
그래도 잘도 뛰어놀던 아이들
때로는 개미처럼 잘 맞지도 않는
줄을 지어 국민체조를 하던 아이들
그 운동장에 이제 벌 개미떼 같던
아이들은 없고, 못내 보고 싶어
산을 내려온 건지, 아니면
누가 그리움으로 심어 놓았는지
폐교에는 꽃만 우거졌다.
벌개미취, 연보랏빛 아스라이
추억컨대, 여기는 함양군 안의면
대지국민학교였다. 덕유산 심원동
초입의 이 학교엔 이영준, 김용태,
이남주, 이희숙, 차경주……
또 누구였더라?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하고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도대체 안부 또한 알 수 없는
그 새까만 아이들이 다녔다.
하필 비 붓는 이 여름 나절에
나는 이 폐교에 와서 공연히
가슴을 적시나니, 그립다.
개미 같던 그 아이들 지금도
세상의 대열 어느 한 꽁무니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을까.
혹은 벌처럼 그 짧은 날개를
내려놓지 않으려고 붕붕거리며
살고는 있을까.
이름조차 없어져
행여 살다가 찾아오기도 힘들
이 대지국민학교에 오늘은
다니는 벌도 개미도 없이
빗속에 아스라한
연보랏빛 꽃만 피어
벌개미취
제비꽃
허리를 굽혀야
눈 맞출 수 있는 꽃
무릎을 꿇어야
손잡을 수 있는 꽃
허리를 굽혀도
무릎을 꿇어도
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손 한 번 내밀지 않는
제비꽃
같은 아이들
같은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그 여름 내내
기차는 하필 잠들지 못하는
늦은 밤이나 너무 일찍
깨어버리고야 마는 새벽녘에야
당도해서 가슴을 밟고 지나갔다.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는 것임을
그 해 여름 그 역 부근에 살면서,
한 사람을 난감하게 그리워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낮 동안 기차가 오고,
또 지나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딸랑딸랑 기차의 당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늘 가슴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 순간
레일 위의 어떤 금속이나
닳고 닳은 침목의 혈관인들
터질 듯 긴장하지 않았으랴. 이어
기차는 견딜 수 없는 육중한
무게로 와서는 가슴을 철컥철컥
밟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아주 짧게,
그러나 그 무게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는지를
아, 기차는 모를 것이다.
개구리 우는 밤
눈물 꾹꾹 삼키며
이 세상 살다가
누구나 한 번쯤
목놓아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
그래그래그래그래……
속내 꽁꽁 숨기며
이 세상 살다가
나도 저처럼
가슴 열고 울고 싶은
밤이 있다. 그럼,
그럼그럼그럼그럼……
화개리, 가을
나무들은 벌써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끊을 건 끊고 버릴 건 버려야
자꾸만 무거워 짓눌리는
이 삶을 부지할 수 있으리라.
일찍이 내 사랑이 꽃처럼 열렸던 곳,
또한 가을 잎처럼 무참히 져 내렸던 곳
화개리, 여기에 와서 또 한 번
수액을 모두 빼앗긴 나무처럼
이 현기증 도는 사랑의 무게를
도저히 떨치지 않으면 안되겠네.
잘 가라. 그 이후 줄곧 부질없던
내 사랑, 벌써 잎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도 할 수 없네.
화개리, 여기에 와서 모두 떨구고
나도 나무처럼 가벼워지기로 했다.
호미질
어린 날, 어머니와 고구마거두는 날이면
내가 캐는 것들은 하나같이 생살이 찍히거나
몸통이 잘려 허연 피를 쏟아냈는데
희한하게도 어머니의 호미 끝에
이끌려 나온 고구마와 감자들은
껍질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가만 보니 어머니는 호미 날을 수직으로
세우는 법 없이 멀찌감치 팔을 뻗어
마치 밭두둑을 싸안듯이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그 때, 그 어머니의 나이를
훌쩍 넘긴 이 나이에도
내 호미질은 서툴기만 한데
이런 내가 애 둘을 낳아 키우고
뻔뻔한 선생질을 하고 있다니
누군가의 호미질에 정수리를 내리 찍힐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