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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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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 연구 스크랩 * 오인태 시인 ( 시모음 )
은하수 추천 0 조회 227 16.03.05 14: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인태 시인


◇ 1962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남
◇ 진주교대 대학원 졸업. 경상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문학교육 전공
◇ 1991년『녹두꽃』3집을 통해 문단활동 시작
◇ 시집『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1992년),『혼자 먹는 밥』(1998년),
  『등뒤의 사랑』(2002년), 『아버지의 집』(2006년) 펴냄
◇ 89년 전교조활동으로 해직되었다가 94년에 복직
◇ 현재 진주 문산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진주교대 등에 출강

 

 

오인태 시인 ( 시모음 )

 

 

 

 

시야 밥 먹고 놀자

 

아직 지상에서는 갖지 못한 집
가상의 세계에 집 한 칸 마련했습니다.

http://www.sibab.pe.kr/
누구나 쉽게 열 수 있는 열쇠도 걸어 두었습니다.
‘오인태’입니다.

시로써는 밥 먹을 수 없는 세상
시로 밥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기호에 갇혀
혹은 박제되어 함께 놀지 못하는 시,
그러므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놀이가 될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시가 아니라
이론이 되어 노래가 되지 못하는 시,
그러므로 사람들의 가슴에서
노래가 될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시야 밥 먹고 놀자.
이 집은 오인태가 시와 함께 살고,
밥 먹으며, 노래하며
놀고 있는 가상의 집입니다.

따뜻한 시밥 한 그릇 같이 합시다.

 

 

 

 

 

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시를 쓰지 못해도 좋습니다.

나무와 풀과 꽃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바람과 햇볕에
짐짓 응석을 부려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받아주는, 그래서
한 마리 벌레나 짐승처럼 착하디
착해지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서로에게 말없는 풍경처럼 편안한,
아주 낮은 목소리로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곳에서 흙 묻은 피감자 한 알이라도
세심하게 벗겨주며 같이 밥을 먹고,
이불깃을 고쳐주며 같이 잠을 자고,
눈 뜨면 천상에서 내려오는 눈부신

아침 햇살을 겸손한 실눈으로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너무 오래는 말고, 사는 일이
참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느낄 때쯤, 미끄럼틀처럼
등을 기댄 채 낮잠 자듯 스르르
눈 감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땐 함박눈이라도 펑펑 쏟아져
짧은 사랑의 흔적조차 깨끗이
덮어주면 좋겠습니다.

구구한 시는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산 그림자

 

산은 제 그림자를 보이지 않는다

그 그림자를 보았다는 사람,

구름의 그림자를 보았을 뿐이리라

 

산은 제억장을 천근만근 누르는 바위벽의

그림자에 매달린 낙랑장송 한 그루

비틀린 그림자를 굽어 보는 흰 폭포의 깊디깊은 음영

속에 흔들리는 잔가지 많은 물푸레나누

그림자의 발바닥을 간지르는 송사리떼의

잠긴 그림자까지 모두

제 가슴에 꼭꼭 묻어 두더니

 

단 한번 나는 보았다

깊은 장롱속에 수의를 꺼내듯

검은 그림자를 풀어놓고 넋을 잃던

 

그때, 또 다른 산 하나가 무너지던 날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숲이 눈부신 것은

파릇파릇 새잎이 눈뜨기 때문이지

저렇듯 언덕이 듬직한 것은

쑥쑥 새싹들이 키 커가기 때문이지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도랑물이 생기를 찾는것은

갓 깨어난 올챙이 송사리들이

졸래졸래 물속에 놀고 있기 때무이지

저렇듯 농사집 뜨락이 따뜻한 것은

갓 태어난 송아지 강아지들이

올망졸망 봄볕에 몸 부비고 있기 때문이지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새잎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새싹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다시 오월이 찾아 오고

이렇게 세상이 사랑스러운 것은

올챙이 같은, 송사리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송아지 같은, 강아지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시가 내게 왔다

 

한번도 시를 쓴 적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 버리고 토씨 하나                             

마저 죽여, 아침내

말의 무덤 같이 허망한 적요

뒤에 파르르 떤 달

빛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이

시가 내게 왔다 

 

 

 

 

 

우산이끼를 우러르다

 

저 고춧싹보다도 작은 것이

하늘 가릴 지붕 하나 받들어

제 한 생을 가뿐히 살아가고 있구나

 

두터운 숲을 뚫는 햇볕도

키 큰 나무의 목덜미를 후려치는 폭우도

저 우주 안을 감히 범접하진 못하리라

 

얼마나 낮추어 작아지면 내 생도

저처럼 온전히 받쳐 들 수 있으랴

 

발 아래 우산이끼를 우러르다

 

 

 

 

 

산 그림자

 

산은 제 그림자를 보이지 않는다

그 그림자를 보았다는 사람,

구름의 그림자를 보았을 뿐이리라

 

산은 제억장을 천근만근 누르는 바위벽의

그림자에 매달린 낙랑장송 한 그루

비틀린 그림자를 굽어 보는 흰 폭포의 깊디깊은 음영

속에 흔들리는 잔가지 많은 물푸레나무

그림자의 발바닥을 간지르는 송사리떼의

잠긴 그림자까지 모두

제 가슴에 꼭꼭 묻어 두더니

 

단 한번 나는 보았다

깊은 장롱속에 수의를 꺼내듯

검은 그림자를 풀어놓고 넋을 잃던

 

그때, 또 다른 산 하나가 무너지던 날

 

 

 

 

 

겨울산은

 

저처럼 등이 하얗게 휘어져도

그 무게를 다 버티고서

 

내색 한 번 한 적 없지만

어찌 사는 일에 한숨 내쉴 일 없으랴

 

이따금

산새 몇 마리 정적을 흔들며 날아 오르고

 

놀란

눈가루 어지러이 흩날리는 때도 있지만

 

그마저

그의 깊은 가슴속의 일이라네

 

해거름 속

무거운 지겟짐을 지고 돌아오시던

 

 

 

 

 

묘향산 바람방울

 

 

하, 바람방울이라니

방울이 된, 바람이든지,

바람에 흔들리는, 방울이라든지

묘향산엔 바람방울이 있었네

 

보현사 대웅전 앞마당

 8각 13층탑 옥개석 추녀마다 맺힌 바람

방울,

실오라기 같은 산들바람에도 운다는, 그

 

이후, 

내 몸 곳곳에 도꼬마리 열매처럼 붙어와

바람없는 날에도 뎅 뎅 뎅

울어대는데

 

 

 

 

 

 

 

산수유

 

꽃,

그늘 조차 따뜻하다

 

노오란 병아리

떼 몰리듯 하교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뭐라 모를 쫑알거림

알아들었는지

까르르 자지러지는 햇살

 

봄,

길목이 환하다

 

 

 

 

봄, 부치지 못한 편지

 

예감해던 것일까 지난 겨울 끝자락

꽃을 시샘하는 눈발 별스레 성성하더니

이 봄까지 막무가내로 내리는 비가

우울한 것이 아니라 비 온 뒤

곳곳에 패어 있는 웅덩이를 보는

일이야 말로 슬프지 그 웅덩이

?잎이라도 몇 장 떨어져

파리하게 떠다닌다면 오, 친구여

지금 나는 비보다 더 무겁게 가슴을

?셔 오는 슬픔을 도무지 말릴 수 없어

작은 짐승처럼 몸을 떨고 있다네

오늘도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잔인한 빗발, 바그다드의 가슴에 팰

그 깊고 많은 웅덩이는?

쟁쟁하네 소녀 샬롯 앨더브란의 절규

"여러분은 내 모습을 떠올려야 합니다"

지금 아라크 그 깊고 맑은 눈동자들 속으로

떠다닐 수많은 꽃잎 어찌할거나

아니면 그들 또한 이미 ?잎이 되었을지도 모를

이 야만의 봄에 이렇게 시를 쓴다는 것,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이만 접어야겠네

 

나도 잠시 떨어진 꽃잎처럼

 

 

 

 

정동진

 

굳이 여름날엔 오전 다섯 시

아니면 오후 여섯시쯤이 좋겠다

 

아직 남아있는 햇살

부서진 세월을 회유하든, 수작부리든

바다의 섬뜩한 지느러미를 볼 수 있는

그 무렵, 밀려오는 사람들에 익숙한

애늙은이 소나무 몇,등 굽은

그림자를 내려 깔고 손을 벌려도

잠시 못 본체 바다만 보자

 

등 뒤로 투덜투덜

투덜거리며 기차가 몇 번 지나갈 것이다

 

그새에도 시계탑의 모래는

하얗게 시간을 쌓으며,

 

어느 한 세월의 기억을 덮으며

떨어지고, 유리상자 속에 신기루처럼

갑작스런 누각 하나 또 세운들, 모래에서

기다리는 고래는 끝내 오지 않으리라

정동진,

 

그 시간쯤, 마침내 바다에

깊고 푸른 그림자를 버리고

해변을 따라 뉘엿뉘엿 사라지고 있는 한

사람,

사랑이라 해도 좋겠다

 

 

 

 

오월

 

하늘엔 흰 구름 

땅 위엔 보랏빛 구름 

 꽃, 자운영인가요

 

햇살 질펀한 무논엔 높은 음자리표를 그리는 물뱀

한 마리, 요리조리 떼 지어 몰려다니는 새까만

음표들의 알 수 없는 노래, 그래도 가슴은 바람든

풀섶 마냥 마구 일렁이는데,

 

어디로 가려는지

발 없는 개구리밥은

물 위에 동동

 

누가 저리도 그리운지

얼굴없는 쑥국새는

온종일 훌쩍훌쩍

 

 

 

 

 

 

역공 

 

어? 요놈 봐라

 

낙지는 접시에 흡반을 박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잘린 다리에서 나오는 저 완강한 근육질의 저항이라니,

나무젓가락이 뚝 부러졌다

가까스로 놈을 다시 집어 들어 참기름 종지에

처박자 대가리도 없는,

놈의 다리가 정확히 내 숙인

낯짝에 기름방울을 튀기는 것이었느데,

누구인가

 

흐흐 고놈 참 고소하겠다

 

 

 

 

라면 같은 시

 

꼬이지 않으면 라면이 아니다?

그럼, 꼬인 날이 더 많았던 내 살아온 날들도

라면 같은 것이냐

삶도 라면처럼 꼬일수록 맛이 나는 거라면,

내 생은 얼나나 떠 꼬여야 제대로 살맛이 날 것이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름조차 희한한 "생라면"을 먹으며,

영락없이, 맞다, 생은 라면이다

 

 

 

 

혼자 먹는밥

 

찬밥 한 덩어리도

뻘건 희망 한 조각씩

척척 걸쳐 뜨겁게

나눠먹던 때가 있었다.

 

채 채워지기도 전에

짐짓 부른 체 서로 먼저

숟가락을 양보하며

남의 입에 들어가는 밥에

내 배가 불러지며

힘이 솟던 때가 있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느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

 

이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누구도 삶을 같이하려

하지 않는다.

 

나눌 희망도

서로 힘돋우며

함께 할 삶도 없이.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

혼자 밥먹는 세상

밥맛 없다.

참 살맛 없다.

 

 

 

 

등뒤의 사랑

 

앞만 보며 걸어왔다

걷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하얀등이보였다.

아, 그는 내 등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그 수척한 등줄기에

상수리나무였는지 혹은 자작나무였는지.

잎들의 그림자가 눈물 자국처럼 얼룩졌다.

내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랑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앞만 보며

걸어올 때, 이따금 머리 위를 서늘하게

덮으며 내가 좇던 사랑의 환영으로

어른거렸던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때로

발목을 적시며 걸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이였을까.

그럴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등뒤의 사랑

 

끝내 내가 좇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되지만

나는 달려가 차마 그대의

등을 돌려 세울 수가 없었다.

 

 

 

 

 

2월 남해에서

 

시샘이냐

우수절 바람조차 매워

남해의 동백꽃이 춥다

쌀쌀한 시대는 독한

소주나 마셔 볼까 친구야

스므해 숨죽여 부른

우리들의 노래는
이 나지막한 바닷가
객주집에까지 밀려 서럽게
더욱 서럽게 뒤척인다
등 따숩고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세상
묵은 김칫독이나
다독이는 주모여
열정일까 뼈마디 속속들이
바람들어 시린 이 허망은
기껏 열정 끝의 몸살일까
술 오르면 두려운 입술
서둘러 남도 외딴
마을에도 밤이 내리면
방파림 우에로
머리 헝클리는 달빛
친구야 내일은 또 어느
등 굽은 기슭에나 서볼까
밤 포구엔
제 그림자에 묶인
동력선 한 척

 

 

 

 

 

역사

 

말 잃은 이 땅의 시인을 만나자
그리고 바람이 시퍼렇게 날 세우는 영토에 서자
다시 북소리 드높던 옛 성곽
거룩한 피의 의미를 생각할 때다
이 시대 우리들 진실 혹은 믿음은
미친 칼날바람에 지느러미를 잘리우고
내내 얌전히 잠재우던 아픈 기억들
침묵의 강물은 그친 것이 아니라
해일을 몰고 오기 위한 징조의 모음이다
누웠던 풀들 일어서고
잠들던 파도 날 세우고
백골의 나무들 귀열어서
다시

이 시대 말 잃은 시인을 만나자

 

 

 

 

 

그 해 긴 겨울

 

그 해 긴 겨울
고속도로 옆 좁은
다락방 작은 창을
열고 그리운 나라로
가는 차들을 세며
희망과 절망을 세며
아버지의 청자담배를
참 많이 훔쳐 피웠다
아버지의 생애를 몰래
훔쳐 피웠다

 

 

 

 

 

겨울 산사 가는 길

 

때 절은 설움 같은 건
툴툴 먼지로 털어 버리고
가자 겨울산
칡넝쿨이나 잡고 오르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세상은 한낱 굿판 같은 것일까
막소주 댓잔에 내장
뒤틀리는 속앓이
꿈결에도 목이 타는 갈증으로
됫박이나 마셔댄 새벽 냉수에
또다시 배앓이를 해야 하는
이 시대 우리들의 아픔은
엄살일까 투정으로나 볼까
망나니 칼날바람에 허리시린 잡목
여자는 허리를 따뜻하게 해야 한단다
소한까지 넘기고 몇 만 원 받는 월급날
사주팔자에도 없는 연탄 몇 장 사들인 죄로
손바닥만한 온기에 누워 죽어간 누이야
우리는 내내 이렇게 부끄러이 살아서
씻을 수 있을까 황천가는 개울물에
발이나 씻을 수 있을까
빈 맘 달래어 길을 오르면
그대 무덤없는 혼령을 위해
노승의 목탁 속에는
눈이나 내릴까

 

 

 

 

아버지의 이농기

 

인자 참말로 떠나는기라
저기 앞산만뎅이에
칡순 싸리는 움 돋아
봄이 왔응께 해동이나 하면
떠나자캤던 봄이 왔응께
인자 참말로 떠나는 기라
이노므 골짝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
금방 숨이라도 끊어질 거 멩키로
요날 요때껏 재 한번 넘어 보지 못하고
아둥바둥 그 자리 호리뺑뺑이를 돌아도
오데 치댄 자리 물이라도
한 방울 고이더나 고이더나
설움도 한도 모질게 마음 다잡으면
그게 한 밑천인기라 낯설고 물설고
풍속설은 땅 고생이사 되겄지마는
요 숭한 눈바닥멩키야 하겄나
어신 팔자모냥 어신 독재갈논
두 마지기 피눈물로 채우던
고생멩키야 하겄나
노상 배곯는 봄나절
가래 끓는 피울음이나 꾸욱 꾹
토해 쌌는 저 뻐꾹새소리
인자 참말로 엉기가 난다
영농기계화 농가소득 증대
새마을 모잔가 헌마을 모잔가 삐딱하게
쓴 것들 맨날 해쌌는 그 소리
무신 속뜻인지는 모르겄지마는
올챙이가 헤엄쳐도 반나절이
안 걸릴 손바닥만한 논바닥에
영농할 끼 뭐 있고
소득증대 될 끼 뭐 있노
지겟짐이사 배운 짓이 그 짓뿐잉께
고렇다치더라도 쌔빠지게 일해봤자
빚내서 빚갚고 이자는 자꾸
독새풀모냥 짖어 등골을 파묵는
이 짓 언제까지 마냥 할 끼고
그래도 묵고 숨붙이는 거사
산 입에 거미줄치겄나마는
고생 끝에 얻은 자식놈들
눈이나 틔워나야 이 애비 겉은
무지랭이 농태꾼 안 되제
요 숭한 데서 무신 수로
핵교를 시킬 끼고 핵교를
진 말 짜른 말 할 거 없이
떠나뿌리는 기 젤 상책인리가 고마
씨나락 같은 미련
있을 거도 없다마는 씨나락이라도
몇 알갱이 남았거든 톨톨 털어
뜨신 밥이나 한 그릇 해묵고
나무하러 가드끼 꼴베러 가드끼
펜한 마음으로 떠나는기라
저기 해동해서 썰썰 흘러가는
냇물멩키로 떠나서 떠다니다 보면
누가 버린 풋남새 같은 희망이라도
한 쪼가리 붙들 수 있을기라



 

 

고제에서

 

세상은 모두 잠들었다
낮에 불던 어지러운
황사 바람 소리 멎고
마을 쪽에서 들려오던 헛고함 몇
제풀에 지쳐 쓰러졌는지
이제 잠잠하다 투기도
이것보다 더한 투기 있겠느냐는
고랭지 채소 그 종잡을 수 없는
희망과 절망 또한 잠들었다
고제여, 늘 이곳에 와서는
들뜬 수심과 그늘로 구겨진
오기를 보았다 높은 다리
그 헛된 꿈과 현기증으로
아득하게 떨어져 내리는
끝없는 추락을 보았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던가
헛말이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추락할 뿐이다 어쩌다 몇 푼
요행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추락의
시작일 뿐이다 그 끝없는
추락의 악순환을 위하여
헛된 환상의 날개를 달기 위해
도회에서 몇 또 돌아왔다고
하던가 그들의 꿈도 수심도
추락도 지금은 잠들었다
국민학교 사택 견고한
이중창을 뚫고 어느 풀섶에서인지
혹은 갈아엎은 무논자락에서인지
개구리소리 밤이 깊을수록
더욱 또렷하게 들려올 뿐이다
그렇다 우리는 개구리처럼
듣는 이 없는 어둠을 향해
끝없이 목청을 돋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이 봄밤 개구리 울음조차
없던들 살아 있음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개골 개골 개골
갸르륵 갸르륵 갸르륵
절망으로 패대기가 쳐지고
밭채로 쟁기날에 갈아엎어질지라도
어제 옮겨 심은 무 배추 모종을
영 잠들지 않게 불러 깨우고
황사바람에 고개 꺾인 나무들
꺾였더라도 꺾인 가지 눈이라도
틔우게 일으켜 세워서
또 내일 날은 밝아올 것이다
고제, 높은 다리
이 헛된 꿈과 수심과
끝없는 추락 또한
함께 밝아올
것이다


 

 

 

냉이꽃 3

 

그리움에 낮게
흐느껴 본 사람만이
볼 수 있으리라 냉이꽃
엎드려 고개 숙이면
낮은 자리 거기
그리움이 또 하나의
그리움을 불러 마침내
수천 수만의 그리움이
함께 손잡아
질긴 사랑으로 어우러진
냉이꽃 볼 수 있으리라
수렁처럼 절망해 본
사람만이 볼 수 있으리라
엎어지고 밟혀
마침내 절망의 끝에서
절망의 뿌리까지 손톱으로
파헤치다 보면 거기
하나의 절망이 수많은
절망의 잔뿌리를 뻗쳐
서로 일으켜 세우는 봄
억센 희망으로 피어 있는
냉이꽃 볼 수 있으리라

 

 

 

 

냉이꽃 2

 

가장 먼저
언 땅을 헤집고 나와
묵은 겨울 신물난
우리들의 밥상에
혁명의 상쾌한
입맛 돌게 하고
남은 것들 더욱 아름답지
꽃다지 비름다지 구슬다지
더불어 낮게 어깨동무하여
조선천지 봄빛
무수히 반짝이는
깃발 되어

 

 

 

 

'토끼와 거북이'를 다시 가르친다

 

얘들아 만약 토끼와 거북이가
물 속에서 달리기를 했다면
그래서 토끼가 이겼다고 한다면
아마 너희들도 웃을 거야 그지?
그런데 토끼와 거북이가 산에서
달리기를 해 거북이가 이겼다는 것에 대해선
왜 한번도 우습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 지금까지 우리 모두 속아온 거야
이건 엉터리 우화이고 일방적으로 불공정한
경기였어 육상동물인 토끼와
다리가 발달하지 못한 파충류인 거북이가
산에서 경기를 했다는 자체가 모순이고
더구나 그 경기에서 거북이가
이겼다고 하는 것은 기만이고 허위야
거북이가 이긴 게 아니었어
토끼가 실수로 진 것이지
토끼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거북이가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야
보아, 오늘도 이 땅의 음흉한 토끼들이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베개삼아
기분좋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것을
이 땅의 수많은 거북이들이
열심히 '토끼와 거북이'을 읽으며
십중팔구 지게 되어 있는 경기에서
십중일이의 승률에 목을 매고 뻘뻘
비지땀 흘리며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을
당장 집어치우라고 그래 이 불공정한 경기
기만과 허위에 찬 엉터리 우화 덮어 버리고
얘들아 토끼들에게 이렇게 말해 보면 어때
이제 물 속에서 달리기를 해보자고
그러면 토끼는?

 

 

 

 

앞으로 나란히

 

아무 생각도 없이
선생들은 '앞으로 나란히'를 내뱉고
아무 생각도 없이
아이들은 '앞으로 나란히'를 따라하면서
우리들은 모두 앞으로 나란히가 되어갑니다
앞으로 나란히가 되어
누구에겐가 나란히 끌려가고 있습니다

 

 

 

 

낙엽을 쓸며

 

한 아이가
나무를 칵 베어삘라 한다
또 한 아이가
떨어질 테면 한꺼번에 떨어져라
나무에 발길질을 한다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는 낙엽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는 성화
가을 내내 아이들이 학교를 비질한다
가을 내내 아이들이 학교를 발길질한다

 

 

 

 

꽃씨를 따며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 해 늦가을
어둑발이 내릴 때까지 꽃씨를 따며

이따금 마른 꽃대궁 속에서
떠나간 이름들이 벌레소리처럼
윙윙거리며 달려 나왔지만
우리들은 열심히 사루비아
맨드라미 당국화
나팔꽃 등의 이름표가 붙은
봉지에다 익은 꽃씨를
가려 넣고 있었다.

개학을 하기가 무섭게
영이가 부산으로 전학을 가던 날
우리는 예보된 단비 속에
교장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대로
아무 차질없이 꽃모종을 옮겼었다.
작업을 마치고
운동장 배수로에
모종삽을 씻으며
돌아서 쏟아 내던 슬픔을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척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들의
불문율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름이 다 되었을 무렵
동성이가 훨씬 간편해진
전학수속에 얹혀 훌쩍
우리들 곁을 떠났을 때도
뒤이어 화주가 인천으로
뿌리뽑혀 갈 때에도
우리는 입을 앙다물며 침묵했다.
슬픔은 더욱 슬프게 안으로 닫아
꽃씨는 익고
성급하게 내리는 늦가을 어둑발
씨앗의 외피처럼
단단해진 어둠이 우리를 에워쌌고
어둠의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어둠을
꽃씨와 함께 밀봉하며
봉해 지는 봉지처럼
아무도 말이 없었다.

 

 

 

 

너희들은

 

올들어 우리 반에서 두 번째로
선자가 전학을 가는 날
소재지 정류소까지 전송을 하고
돌아오는 길엔
끝내 궂은 하늘 무너지는
비가 내린다.
텅텅 비어 가는 자리만큼
텅텅 비어 가는 가슴
장년기 지형 골 깊은
뼈마디를 울리며
비기 내린다.
유난히 황사바람 드셌던
올봄 같은 가뭄
엔간해선 바위산처럼 꿈쩍도 않는
아이들의 어깨를 흔들며
길옆 잡풀들이 비에 흔들린다.
흔들리면서 더욱 뿌리 깊어 지는
잡풀들의 생태
그래 너희들은 잡풀들이다.
삽날에 실뿌리 두어 개쯤 잘려도
더욱 마디 굵어지는
이 땅의 튼튼한 잡풀들이다.

 

 

 

 

추석

 

일흔 나이 불편한 몸보다
불편한 마음 때문이실까
끝내 아버지는 오시지 않았다
올해도 대추 밤 속살 달게 익고
산들 가득 구절초 마타리꽃 우거져
추석날이 이리 환한데
아버지 오시지 않은 제사상 앞에서
목이 메인다 이십육대 종손
말이 좋다 대학까지 나와서
제 밥줄 떼이고 마누라 밥줄에
매여 사는 못난 자식놈
차마 바라보기 민망스러워이실까
시퍼렇게 눈뜨고 살아
아직 사람사는 격식 빤한데
생전에 자식에게 제사일까지
물려주어야 하는
당신의 섧게 늙은 나이
독새풀처럼 끈질긴 가난이 미워서이실까
생애 접는 늘그막까지 낯선 타향에서
명절 때마다 거꾸로 자식놈을
찾아와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
치떨리신 것일까
설날에도 제사상 물리자마자
선길로 떠나셨던 아버지
끝내 오시지 않은 추석 제사상 앞에서
아버지 대신 술잔을 올리며
오만생각 어지러이 헝클리어
길고 긴 하룻날이 모질다
해직의 잘린 목을 누르며
찾아 드는 이 명절
오늘 추석밤도 문 걸어 잠그고
끝내 보름달 볼 수 없다

 

 

 

 

가을꽃

 

뜨거운 사랑도
죄가 되는 이 땅
교단의 바깥에서
서러워라
다가설 수 없는 거리
들국화 구절초는
저리도 예쁘게 피어
먼발치에서나
그리운 이름들
하나씩 불러 보면
그만 꽃은 지고
꽃은 지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하필 이 저물녘
긴 그림자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한 그루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사람을 그리워하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홀로 선 나무처럼
고독한 일이다.
제 그림자만 마냥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는
나무처럼 참 쓸쓸한 일이다.

 

 

 

 

 

저문 강엔

 

저무는 강에 나가
어둠이 강물에 어떻게
젖어드는가를 보았습니다.
강의 가장 깊은 곳에 젖어든
어둠은 이내 수면으로 피어 오르더니
어느 새 하늘에 자갈돌 같은
노란 별이 깔리더군요.

저무는 강에 나가
그리움이 가슴에 어떻게
스며 오는가를 느꼈습니다.
가슴 맨 밑바닥에 스며든
그리움은 금방 눈시울을 적셔 오더니
어느 새 하늘에 소금 같은
하얀 별이 흩뿌려지더군요.

저문 강엔 온통
별들만 반짝반짝 흐르더군요.

 

 

 

 

 

미조리 가는 길

 

생애의 절반은
멋모르고 살아왔고
나머지 절반은
부끄러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벌써 몇 번째인가
그곳에 다다르면 남는 건
늘 허망하게 돌아오는 일뿐이었다.

노란 유채밭 너머, 벌써부터
남빛으로 잔잔하게 일렁이는
앵강만, 이어 언덕길을 따라
등나무들이 연보랏빛 꽃등을
밝힐 것이다.

 

밝힌들, 늘 이렇게
그리움으로 몇 날의
몸살 끝에 달려가 만나는 건,

돌아오면서 주워야 할
내 사랑의 부끄러운 잔해들뿐이었다.

생애의 절반을
멋모르고 사랑하며 다 보내고,
돌아보며 가슴 칠 줄 알면서
나는 또 오늘 미조리에 간다

 

 

 

 

 

내 사랑은

 

그땐 그랬다. 그 신안동 골목길
아마 일본식 슬라브 건물이었을 것이다.
봄이면 견고한 담장 너머로 백목련과
산수유꽃이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피었다.
그러나 그 오래 되어 윤기 없는
목제 대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등뒤의 그녀는 무슨 말인가 끊임없이
보내왔지만 나는 내게 오는 말들을
모두 흘려보냈다. 세상 이쪽과 차단된
담 너머 저 눈부신 꽃 그늘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혹은 지금 누군가가
책갈피에 꽃잎을 끼우며 책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에만 골몰했었다.
아마 그 다음 해 봄이었을 것이다.
그때에도 어김없이 백목련과 산수유꽃은
전등처럼 환하게 골목을 비추고 있었고,
등뒤의 그녀는 내게 말을 보내왔다.
저 떠나요. 그래도 붙잡지 않겠죠.
나는 또 그녀의 말을 흘리며, 꽃의
눈부신 그늘에 앉아 있을 사람의
책장 넘기는 소리와 봄햇살에 바스락대는
옷자락 소리에만 모든 귀를 열어놓고
그리워했다. 그런 내 등을 등지며
그녀는 떠났다. 그 이후로도
내게 말을 보내오는 여자들은
그림자처럼 늘 내 등뒤만 따라다니다가
또 그렇게 떠나갔다.

지금도 그렇다. 그 신안동 골목길은
떠나왔지만, 등뒤에서 말을 보내오는
여자는 많았지만, 내가 정작
가슴 앓으며 그리워하는 이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신안동
그 골목길 백목련과 산수유꽃이 환하던
담장 안의 그런 사람이다.
등뒤의 여자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지만

내 사랑은 스스로도 영문 모를
늘 그런 사랑이다.

 

 

 

 

 

상처

 

아직 필 꽃이
남아 있으려나.

피는 꽃도 많고
지는 꽃도 참 많은데

이 꽃 피었다 진 자리
상처는 다 어떡하나.

싸움으로 받은 상처보다
사랑으로 입은 상처가
더 깊다는 것을 알면서

그래도 필 꽃이
아직 남아 있으려나.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그 여름 내내
기차는 하필 잠들지 못하는
늦은 밤이나 너무 일찍
깨어버리고야 마는 새벽녘에야
당도해서 가슴을 밟고 지나갔다.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는 것임을
그 해 여름 그 역 부근에 살면서,
한 사람을 난감하게 그리워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낮 동안 기차가 오고,
또 지나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딸랑딸랑 기차의 당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늘 가슴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 순간
레일 위의 어떤 금속이나
닳고 닳은 침목의 혈관인들
터질 듯 긴장하지 않았으랴. 이어
기차는 견딜 수 없는 육중한
무게로 와서는 가슴을 철컥철컥
밟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아주 짧게,
그러나 그 무게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는지를

아, 기차는 모를 것이다.

 

 

 

 

 

구절초

 

사연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만
하필 마음 여린 이 시절에 어쩌자고
구구절절 피어서 사람의 발목을 붙드느냐.
여름내 얼마나 속끓이며
이불자락을 흥건히 적셨길래
마른 자국마다 눈물꽃이 피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치대느냐.
꽃이나 사람이나 사는 일은
이렇듯 다 구구절절 소금 같은 일인 걸
아, 구절초 흩뿌려져 쓰라린 날

독한 술 한잔 가슴에 붓고 싶은 날

 

 

 

 

 

비 갠 아침 

 

이렇듯 맑은 구슬 하나 품으려고
간밤에 그렇게 무릎 세워
엎드려 우셨습니까.

누군가의 울음이 이렇듯 눈부신
아침을 만드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또르릉 또르릉……

당신의 가슴에서 구르는
아, 투명한 실로폰 소리를 듣습니다. 

 

 

 

 

 

백양사에서 

 

백양은 없었습니다.
희고 큰 바위산 하나
백양사 뒤로 무심하게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지요.
백암산이라더군요.

비 내리는 저녁 무렵
백양사 입구에서 비에 젖는
어둠만 멀거니 쳐다보다
그냥 자기로 했습니다.
잠결에도 빗소리가 들렸습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당신의 꿈을
몇 번이나 꾸었습니다.

산안개가 뒤척이는
소리에 잠이 깨었습니다.
아, 그때 나는 백양사의
백양을 보았습니다. 눈처럼
아름다운 백양 한 마리
백암산 중턱을 재빨리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이었습니다.

아주 잠시 내게 왔던
백양 사라지고, 백암산엔
보리수 잎처럼 푸른
매미 소리만 가슴에 서늘했습니다. 




능소화 

 

 누가 발목을 저리도
모질게 붙들고 있을까.
내 사랑은 끝내 담을 넘어
내게 오지 못했다.

여름내 안간힘으로
목만 늘이다가
눈 부릅뜬 채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화개리, 가을

 

나무들은 벌써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끊을 건 끊고 버릴 건 버려야
자꾸만 무거워 짓눌리는
이 삶을 부지할 수 있으리라.
일찍이 내 사랑이 꽃처럼 열렸던 곳,
또한 가을 잎처럼 무참히 져 내렸던 곳
화개리, 여기에 와서 또 한 번
수액을 모두 빼앗긴 나무처럼
이 현기증 도는 사랑의 무게를
도저히 떨치지 않으면 안되겠네.
잘 가라. 그 이후 줄곧 부질없던
내 사랑, 벌써 잎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도 할 수 없네.
화개리, 여기에 와서 모두 떨구고

나도 나무처럼 가벼워지기로 했다.

 

 

 

 

 

흘러가는 물이
길 가던 내게 물었다.
어디서 왔니?
나도 모르지.
길 가던 내가
흘러가는 물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니?
나도 모르지.

온 곳도, 갈 곳도
모르는 것들끼리
잠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또 길을 갔다.

 

 

 

 

화개리 벚꽃

 

꽃이 핍니다.
마음 두지 않겠습니다.

꽃이 진다 한들
마음 쓰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때아닌 폭설같이 당혹스럽게
세상을 덮쳐 오는 꽃
사람의 마음 또한 이렇게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것을

한때 아름다운 젊은 날
거기 잊지 못하고 찾아올
누군가 또 한 사람
그러나 그 사람조차 몰래

올해도 화개리 가겠습니다.

 

 

 

 

 

오월의 편지

 

그러기를 참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새 꽃들은 혼자 피었다 지고
꽃 진 자리엔 풀들이 돋기도 하면서
스스로 키운 나무들이 숲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숲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을 보며
그대가 참 많이 그립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대에게 가는 길은
숲들에 가려 향방조차 알 수 없고
그대 또한 그대가 만든 숲 속에서
내게 오는 길이 보이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렇게
모든 길이 가려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가슴에 풀물 같은 그리움 뚝뚝 젖더라도

그냥 이대로 있겠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으셔도 괜찮습니다

 

 

  

 

 

다솔사

 

여기는 산도 누워 있고
부처님도 누워 있지요.
스님의 목탁 소리도
늘어지다 더 늘어지다가
멈춰 버렸고, 화단의
꽃들도 고개를 꺾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지요.
길섶의 산비둘기도
먹이 쪼는 일도 잊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고요.
산나물 파는 할머니도
파리채를 든 채
파리와 입맞춤하며
함께 졸고 있지요.
이따금 지나가는 바람이
적멸보궁 풍경을 딸랑딸랑
흔들어보지만, 허!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요.

다솔사에 한 번 와 보시지요.

 

 

 

 

 

내가 미조리에 가는 이유

 

지금
누군가

사람 때문에
절망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잊어버리는 일이
죽는 일보다 어려우시면

굳이 잊으려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일이
죽는 일보다 힘드시면

그 사람을 가슴에 품고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꼭
남해 미조리에 한 번 가 보시라.

거기 누구 한 사람
만나게 되면,

그리곤 죽든지, 말든지
나는 모를 일이다.



 

 

길 떠나는 이를 위하여

 

뒤돌아보지 마시게.
선 길로 쭉 걸어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앞으로, 언덕길에서 미끄러지더라도
앞으로, 곧장 앞만 보고 가다가
누군가 뒤에서 나를 보고 있을 거라는
연민도 집착도 싹둑싹둑 잘라 버리고
앞만 보고 가다가
어떻게 걸어 왔는가조차도
되돌아볼 것 없이
앞만 보고 가다가 행여
외로움이든지 그리움이든지
사무쳐 환장이라도 들거든
그냥 아주 잠시 무릎 세워 엎드렸다가
그래도 곧장 일어나 앞만 보고 가다가
때로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도 머뭇거릴 것 없이
앞만 보고 가다가, 마침내
되돌아볼 미련이나
나아갈 오기마저 스러져
모든 길들이 환하게 사라졌을 때

거기 먼저 온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혹은, 먼저 피어 있는 꽃이든지.

 

 

 

 

시를 쓴다는 것

 

내 시가 사람들에게
밥 한 톨만큼의 희망이나
위안도 될 수 없는 것이라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내 시가 사람들에게
나무 한 그루만큼의 그늘이나
온기도 줄 수 없는 것이라면
참 미안한 일이다.

이 세상에
먼지처럼 풀풀 날아다니며
밥을 더럽히는 시여.
생살 찍혀 쿵쿵 넘어지는
숲이여.

시를 쓴다는 것,
참 두려운 일이다.

 

 

 

 

다솔사 단풍

 

산간의 절도 세상이었네.
절간의 스님도 사람이었네.
어디에다 저 뜨거운
불씨를 숨겨왔을꼬.
허, 일났네.
그래도 일없네.

 

 

 

 

 

대지국민학교 벌개미취

 

벌처럼 짧은 팔을 붕붕거리며
그래도 잘도 뛰어놀던 아이들
때로는 개미처럼 잘 맞지도 않는
줄을 지어 국민체조를 하던 아이들

그 운동장에 이제 벌 개미떼 같던
아이들은 없고, 못내 보고 싶어
산을 내려온 건지, 아니면
누가 그리움으로 심어 놓았는지
폐교에는 꽃만 우거졌다.

벌개미취, 연보랏빛 아스라이
추억컨대, 여기는 함양군 안의면
대지국민학교였다. 덕유산 심원동
초입의 이 학교엔 이영준, 김용태,
이남주, 이희숙, 차경주……
또 누구였더라?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하고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도대체 안부 또한 알 수 없는
그 새까만 아이들이 다녔다.

하필 비 붓는 이 여름 나절에
나는 이 폐교에 와서 공연히
가슴을 적시나니, 그립다.
개미 같던 그 아이들 지금도
세상의 대열 어느 한 꽁무니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을까.
혹은 벌처럼 그 짧은 날개를
내려놓지 않으려고 붕붕거리며
살고는 있을까.

이름조차 없어져
행여 살다가 찾아오기도 힘들
이 대지국민학교에 오늘은
다니는 벌도 개미도 없이
빗속에 아스라한
연보랏빛 꽃만 피어

벌개미취

  

 

 

 

 

제비꽃

 

허리를 굽혀야
눈 맞출 수 있는 꽃

무릎을 꿇어야
손잡을 수 있는 꽃

허리를 굽혀도
무릎을 꿇어도

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손 한 번 내밀지 않는

제비꽃
같은 아이들
같은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그 여름 내내
기차는 하필 잠들지 못하는
늦은 밤이나 너무 일찍
깨어버리고야 마는 새벽녘에야
당도해서 가슴을 밟고 지나갔다.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는 것임을
그 해 여름 그 역 부근에 살면서,
한 사람을 난감하게 그리워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낮 동안 기차가 오고,
또 지나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딸랑딸랑 기차의 당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늘 가슴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 순간
레일 위의 어떤 금속이나
닳고 닳은 침목의 혈관인들
터질 듯 긴장하지 않았으랴. 이어
기차는 견딜 수 없는 육중한
무게로 와서는 가슴을 철컥철컥
밟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아주 짧게,
그러나 그 무게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는지를

아, 기차는 모를 것이다.

 

 

 

 

 

개구리 우는 밤

 

눈물 꾹꾹 삼키며
이 세상 살다가
누구나 한 번쯤
목놓아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

그래그래그래그래……

속내 꽁꽁 숨기며
이 세상 살다가
나도 저처럼
가슴 열고 울고 싶은
밤이 있다. 그럼,

그럼그럼그럼그럼……

 

 

 

 

 

화개리, 가을

 

나무들은 벌써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끊을 건 끊고 버릴 건 버려야
자꾸만 무거워 짓눌리는
이 삶을 부지할 수 있으리라.
일찍이 내 사랑이 꽃처럼 열렸던 곳,
또한 가을 잎처럼 무참히 져 내렸던 곳
화개리, 여기에 와서 또 한 번
수액을 모두 빼앗긴 나무처럼
이 현기증 도는 사랑의 무게를
도저히 떨치지 않으면 안되겠네.
잘 가라. 그 이후 줄곧 부질없던
내 사랑, 벌써 잎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도 할 수 없네.
화개리, 여기에 와서 모두 떨구고

나도 나무처럼 가벼워지기로 했다.

 


 

 

                                                

  호미질

 

어린 날, 어머니와 고구마거두는 날이면

내가 캐는 것들은 하나같이 생살이 찍히거나

몸통이 잘려 허연 피를 쏟아냈는데

 

희한하게도 어머니의 호미 끝에

이끌려 나온 고구마와 감자들은

껍질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가만 보니 어머니는 호미 날을 수직으로

세우는 법 없이 멀찌감치 팔을 뻗어

마치 밭두둑을 싸안듯이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그 때, 그 어머니의 나이를

훌쩍 넘긴 이 나이에도

내 호미질은 서툴기만 한데

 

이런 내가 애 둘을 낳아 키우고

뻔뻔한 선생질을 하고 있다니

누군가의 호미질에 정수리를 내리 찍힐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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