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김삿갓(대왕의 天命)30
다음날부터 김삿갓은 반월 행자의 안내를 받아 가며 석왕사를 속속들이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설봉산 석왕사는 규모가 워낙 거창하여, 금강산의 장안사나 유점사에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특히 절을 둘러싸고 있는 천년 노송들은 향기로운 송진 냄새를 강하게 풍겨 주고 있어서, 금강산과는 또 다른 정취가 농후했던 것이다.
반월 행자는 김삿갓을 깍듯이 스승처럼 모시고 따라다니다가, 한 번은 김삿갓에게 이런 말을 물어보았다.
"선생은 이 절이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절 이름을 왜 석왕사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 유래를 아시옵니까?"
"모르겠는걸. 석왕사는 어떤 유래를 가지고 있는 절이오?"
"석왕사의 유래를 모르신다니, 제가 자세한 사연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반월 행자는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유래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고려 말엽 이성계가 아직 영흥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청년 이성계는 무예를 닦느라고 각지로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밤에는 안변 산속에 있는 조그만 암자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져 보이기도 하였고, 또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부서지는 꿈도 꾸었던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이성계는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거 참 이상한 꿈이다. 이 꿈이 과연 길몽일까 흉몽일까?)
이성계는 암만해도 꿈이 마음에 걸려, 암자의 중에게 이렇게 물었다.
"스님은 혹시 해몽을 할 줄 아시오?"
"저는 꿈을 풀 줄 모르옵니다."
"이 부근에 혹시 해몽을 잘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여기서 산속으로 십 리쯤 들어가면 토굴 속에 도사가 한 분 계신데, 그분은 파자점을 잘 치기로 귀신같다는 분이옵니다. 그분이라면 해몽도 잘하실 것 같으니, 몽사가 궁금하시거든 그분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 도사의 이름을 뭐라고 하오?"
"무학 도사라고 부르옵니다."
이성계는 즉시 토굴로 무학 도사를 찾아가 보았다.
무학 도사는 나이가 육십 가량 되었을까, 토굴 속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점을 치려고 먼저 찾아온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평생 신수를 보려거든, 당신이 마음에 먹고 있는 글자를 한자만 써 보여 주시오. 그러면 그 글자를 가지고 점을 쳐주겠소."
무학 도사가 점을 치러 온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니, 그 사람은(問) 자 한자를 써 보인다.
이성계는 글자를 가지고 어떻게 점을 치는가 궁금하여, 등 뒤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무학 도사는 (問) 자를 손에 받아 들더니, 정신을 통일하느라고 오랫동안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활연히 떠서, (문) 자를 이리로도 바라보고 저리로도 바라보고 하더니, 문득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음..... 평생 신수가 아주 고약하군그래.... 당신은 암만해도 거지 신세를 한평생 면하기가 어렵겠소."
그 소리에 놀란 사람은 장본인만이 아니었다. 등 뒤에서 무심히 엿듣고 있던 이성계도 깜짝 놀랐다.
그리하여 당사자를 바라보니, 그는 옷도 깨끗하게 입었고 생김새도 제법 잘생겨서, 어디로 보나 거지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학 도사는 (거지 팔자)라고 한마디로 단정을 해버리니, 그야말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 제가 어째서 거지 팔자라는 말씀입니까. 저는 거지는 아니 옵니다."
거지로 단정 받은 사람이 그렇게 항의를 하자, 무학 도사는 단호하게 단안을 내린다.
"바른 대로 말하라고! (문) 자는 입(口)이 문(門)에 달려 있는 글자니까, 그대는 거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당사자는 그 말을 듣고 찔끔하니 놀라다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더니,
"나는 거지 신세를 면해 볼까 해서 옷까지 깨끗하게 갈아입고 점을 치러 왔건만, 암만해도 팔자 도망은 못 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혼자 탄식하며 총총히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무학 도사의 파자점은 족집게처럼 명확하게 들어맞은 것이 분명하였다.
옷을 깨끗하게 갈아입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거지라고 일언지하에 단정해 버리는 자신감을 보면 무학 도사의 점술이 방불한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성계는 그 점괘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학 도사의 이론대로라면 (問) 자를 써낸 사람은 모두가 거지라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놀라움과 함께 은근히 실망감도 느껴져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학 도사가 이성계를 바라보며,
"그대는 무슨 일로 왔는고?"
하고 묻는다.
"저도 파자점을 쳐보고 싶어 왔사옵니다."
"파자점을 치러 왔거든 마음에 먹고 있는 글자를 써내요. 그래야 그 글자를 가지고 점을 칠 게 아닌가."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이성계는 도사에게 골탕을 먹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무 글자를 써내도 상관없겠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물론이지! 무슨 글자라도 좋으니, 쓰고 싶은 글자를 써 보여요."
이성계는 잠시 주저하다가 조금 전에 거지라고 단정 받았던 사람과 똑같은 (問) 자를 써 내놓으며,
"이 글자로 점을 쳐보아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무학 도사를 곯려 주려는 생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무학 도사는 (문) 자를 받아 들더니, 또다시 정신을 통일하느라고 눈을 감고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런 연후에 눈을 활연히 떠서 (問) 자를 이리 바라보고 저리 바라보고 하면서, 좀처럼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자세를 가다듬더니 이성계에게 합장 배례를 해 보이며,
"장차 이 나라의 주인이 되실 어른께서 왕림해 주셨으니, 이런 황공한 일이 없사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뜻밖의 말에 이성계는 크게 당황하였다.
"도사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조금 전에 다녀간 사람이 (문) 자를 내놓았을 때에는 거지 신세를 한평생 면하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소. 나도 똑같은 글자를 내놓았는데, 나한테는 어째서 엉뚱한 말씀을 하시오."
이성계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무학 도사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파자 점이란 아무리 똑같은 글자를 내놓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심지와 성품과 기상에 따라 점괘가 제각기 달라지는 법이옵니다. 글자가 같다고 해서 점괘도 똑같다면 그게 무슨 점이겠나이까?"
조금 전까지도 반말지거리를 하던 도사였건만, 어느새 말투조차 존대어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무학 도사의 해명에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기로, 똑같은 글자의 해석이 그렇게도 다를 수가 있단 말이오."
무학 도사는 경건한 자세로 또 한 번 합장 배례를 하면서,
"소승은 다만 점괘가 나오는 대로 여쭈었을 뿐이옵니다. 거기에는 추호의 거짓도 없사옵니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점괘가 그처럼 다르게 나오는지, 그 이유를 한번 들어 봅시다."
어시호 무학 도사는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똑같은 (問) 자라 하더라도, 조금 전에 거지가 내놓았던 (問) 자와 지금 귀공께서 내놓으신 (問) 자는 근본이 아주 다른 (問) 자이 옵니다."
"근본이 다르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問) 자가 똑같은데 근본이 다를 리가 없지 않소?"
"소승이 자세한 설명을 올리겠사옵니다. 아까 그 사람이 내놓았던 (問) 자는 입(口)이 문(門)에 매달려 있는 (問) 자였었습니다. 그러나 귀공께서 내놓으신 (問) 자는 입이 문에 매달려 있는 (問) 자가 아니옵고, 좌로 보아도 (君) 자요, 우로 보아도 (君) 자가 되는 (問) 자이 옵니다. 좌로 보아도 (군) 자요, 우로 보아도 (군) 자라면 그 어찌 장차 이 나라의 임금님이 되실 분이 아니겠습니까."
이성계는 너무도 기발한 파자 점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당신은 장차 이 나라의 임금님이 되실 분)이라는 파격적인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설레어 견딜 수 없었다.
이성계는 무인 이자춘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무예에 자질이 풍부하여, 장차 장군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임금님이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꿈도 꾸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학 도사가 파자 점으로써 (장차 임금님이 되실 어른)이라고 부추겨 주니, 그로서는 마음이 으쓱해질밖에 없었다.
그러나 함길도 (함경도의 옛 이름)의 무명 촌부인 자기가 한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예언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기에 이성계는 웃으면서 무학 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상인즉, 내가 도사를 찾아온 목적은 파자점을 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간밤에 하도 이상한 꿈을 꾸었기에 해몽을 해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오. 도사는 물론 해몽도 할 수 있겠지요?"
무학 도사는 합장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대답한다.
"파자 점이나 해몽이나 모두가 같은 원리 옵니다. 모처럼 해몽을 하러 오셨다니 무슨 꿈을 꾸셨는지 말씀을 자세하게 들려주시옵소서. 해몽을 정확하게 하려면, 꿈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려주셔야 하시옵니다."
이에, 이성계는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떤 고가에 누워 있노라니까 별안간 모든 집에서 모든 닭들이 일시에 (꼬끼오!) 하고 요란스럽게 울어댔어요. 그리고 (꼬끼오!)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내가 누워 있던 집이 갑작스럽게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어마지두에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그 집을 뛰쳐나왔으니 그게 어떤 꿈이오!"
무학 도사는 꿈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꿈은 그뿐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밖으로 나오니까, 뜰에 피어 있던 꽃이 별안간 땅에 떨어지고, 그와 동시에 난데없는 거울이 깨지면서 갑작스럽게 요란스러운 소리가 나는 거예요. 암만 생각해 보아도 예사 꿈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흉몽은 아닐는지요?"
무학 도사는 꿈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숙연히 말한다.
"세 가지 꿈이, 아니 네 가지 꿈이 한결같이 크게 길한 꿈이옵니다. 길몽 중에서도 다시없는 길몽이오니 크게 기뻐하시옵소서."
너무도 뜻밖의 말에 이성계는 어리둥절하였다.
"많은 닭들이 한꺼번에 울고, 집이 무너져서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밖으로 뛰쳐나왔고,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이 모두 상서롭지 못한 꿈같은데, 어째서 그것이 길몽이라는 말씀이오?"
그러자 무학 도사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귀인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꿀 수 없는 대몽이옵니다."
이성계는 (대몽)이라는 말에, 암만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것이 어째서 대몽이라는 말씀이오?"
무학 도사는 옷깃을 바로 여미며 경건한 어조로 대답한다.
"빈도가 해몽을 자세하게 여쭤 올릴 터이오니 들어 보시옵소서. 닭은 만인에게 새 아침을 알려 주는 영물이옵니다. 모든 집의 모든 닭들이 일시에 요란스럽게 울었다는 것은 바야흐로 위대한 새 아침이 밝아 올 징조를 알려 주는 울음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더구나 닭들이 (꼬끼오) 하고 울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꼬끼오)라는 말은 한문자로 바꿔 보면 (고귀 위) 즉, 임금님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옵니다. 귀인께서는 닭들이 울기와 동시에, 서까래를 세 개 등에 짊어지고 무너져 가는 집에서 넓은 천지로 뛰쳐나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셨다면 그것은 (王) 자가 되는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귀인께서는 장래에 임금님이 되실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듣고 보니 이로 가 정연한 해몽이어서, 이성계는 가슴이 울렁거림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꿈은 그렇다 치고,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깨지는 꿈도 꾸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오이까."
무학 도사가 대답한다.
"그것 역시 다시없는 길몽이옵니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맺히는 법이니, 어찌 길몽이 아니 오리까. 그리고 거울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새 나라가 탄생하면 만천하가 어찌 크게 떠들썩하지 않으오리까. 그 꿈 역시 어느 면으로 보아도 귀공께서 반드시 대왕이 되실 꿈이옵니다."
"하찮은 꿈을 그처럼 대견스럽게 풀어 주셔서 고맙소이다."
"빈도의 해몽은 결코 헛된 말씀이 아니 옵니다. 귀인께서는 소승의 해몽을 굳게 믿으시고 금후에는 만사에 부디 자중 자애해 주시옵소서."
이성계는 무학 도사의 격려의 말에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임금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고맙소이다. 그러나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과연 그런 기회가 올 수 있겠습니까?"
무학 도사는 합장 배례를 세 번씩이나 하고 나서, 나무라듯 말한다.
"모든 운수는 하늘이 정해 주신 것이지, 사람의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 옵니다. 그 옛날 한고조 유방은 젊어서는 패현의 한량배에 지나지 않았건만, 후일에 한나라를 일으켜 중국 대륙을 통일했던 것이옵니다."
"음.... 좋은 격려의 말씀을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소승이 지금까지 여쭌 말씀은 모두가 천기에 속하는 기밀이옵니다. 천기를 누설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느 법이오니, 이런 말씀은 일체 입 밖에 내지 말아 주시옵소서."
무학 도사로부터 천기를 누설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받은 이성계는, 옷깃을 바로잡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아무리 철이 없기로 이런 일을 어찌 함부로 입 밖에 내오리까. 도사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가슴 깊이 아로새겨 두고, 금후에는 일거 일동에 더욱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무학 도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한다.
"실상인즉, 소승은 천기를 관찰하는 법술을 터득하고 있사와, 오늘 귀인께서 왕림하실 것을 이미 알고 있었사옵니다. 옛 글에 (왕후장상영 유종호. 왕후장상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귀인께서는 부디 뜻을 크게 품으셔서, 대업을 기어이 성취하도록 하시옵소서."
이성계는 왕후 장상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자, 별안간 이상하게도 새로운 용기가 복받쳐 오르는 것만 같았다.
"고맙습니다. 저를 격려해 주시고 깨우쳐 주신 오늘의 은공은 평생을 두고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날을 위해 소승은 부탁 말씀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슨 말씀인지 들려주시옵소서."
"매우 외람된 부탁이오나, 후일에 대업을 성취하시거든 중생을 제도하는 도장으로서 이 토굴 자리에 불전을 하나 지어 주시옵소서."
이성계는 그 말을 듣고, 무학 도사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날이 오기만 하면 어찌 불전이 문제이겠습니까. 이곳에 절을 지어 드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도사님을 대궐로 모셔다가 날마다 대정을 자문하는 국사로 받들어 모실 것이옵니다."
무학 도사는 다시금 합장 배례를 하며,
"너무도 과분하신 말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곳에 절을 지으신다면 절 이름을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이성계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절 이름은 그때에 가서 결정해도 될 일이 아니 옵니까."
그러나 무학 도사는 고집스럽게 다시 말한다.
"옛 글에 (일일지계는 재어신이요, 일년지계는 재어춘 이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모든 일은 목표를 정해 놓고 일로 매진하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법이오니, 절은 나중에 세우시더라도 이름만은 지금 지어 주시옵소서."
무학 도사가 절 이름을 (지금 당장 지어 달라)고 졸라 댄 데는 그 나름대로 깊은 사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대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이성계의 의지가 아직도 확고 부동한 것 같지 않아 보여서, 그의 신념을 명확하게 정립시켜 주고 싶어 계획적으로 그런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이성계는 무학 도사의 깊은 뜻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앉은 자리에서 절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도사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나의 신념을 굳히기 위해서도 절 이름을 미리 지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나 절 이름을 당장 짓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옵니까?"
무학 도사가 즉석에서 나무라듯 말한다.
"무슨 일이나 쉽게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시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신명을 다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는 법이옵니다."
그 말도 이성계의 장래를 훈계하는 말임이 틀림없었다.
"도사님의 훈계는 명심하겠습니다.... 절의 이름을 제가 짓기보다는, 도사께서 직접 지어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까?"
무학 도사는 아무 대꾸도 아니하고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더니, 문득 붓을 들어(석왕사)라는 세 글자를 써 보인다.
"소승더러 지으라고 하신다면 이렇게 짓겠습니다."
"석왕사?..... 그게 무슨 뜻이옵니까?"
이성계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보았다.
무학 도사가 대답한다.
"귀인께서 소승에게 파자 점과 해몽을 물어 오셨을 때, 소승은 귀인에게 장차 이 나라의 임금님이 되실 어른이라는 풀이를 해드린 장소가 바로 이 자리 옵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니, 만약 이 자리에 절을 지으신다면 그런 뜻에서 절의 이름은 (석왕사)라고 짓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이성계는 그 말을 듣고 가슴 벅찬 감격을 느꼈다.
"석왕사..... 좋습니다. 이 자리에 반드시 절을 짓기로 하되, 그 이름은 꼭 석왕사라고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석왕사라는 이름은 그때에 결정되었던 것이다.
반월 행자는 석왕사라는 이름에 대한 유래를 이상과 같이 기다랗게 늘어놓고 나서,
"삿갓 선생! 만약 무학 도사의 계시가 없었다면 이성계는 조선 왕국을 창건하지 못했으리라고 짐작되는데, 선생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옵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웃을밖에 없었다.
"허허허, 질문이 너무 어려워서 나는 명확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구료. 후일에 무학 대사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서울을 옮겨 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실만은 알고 있지만, 건국 이전부터 그처럼 깊은 관계가 있은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엄밀히 따져 말하자면, 조선 왕국을 창건한 사람은 이성계가 아니라 무학 도사였다고 말해도 그다지 망발은 아닐 것이옵니다."
반월 행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기 나름대로의 독단적인 역설을 들고 나온다.
김삿갓은 반월 행자의 독단적인 견해에 저항감이 약간 느껴져서, 얼른 이렇게 나무라 주었다.
"조선 왕조의 초대 임금님이 이성계인 것은 천하가 다 인정하는 일이오. 당신만이 조선 왕조의 창업주는 무학 도사였다고 우겨 본들, 누가 그 말을 믿겠소."
반월 행자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야 물론 표면상의 창업주는 이성계임이 틀림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이성계를 창업주가 되도록 정신적으로 뒷받침해 준 사람은 무학 도사였다는 말씀입니다. 이성계는 무학 도사를 찾아올 때까지는 (나라를 창건한다) 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었는데, 무학 도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산을 내려갈 때에는,(나는 왕이 되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먹게 되었으니, 그것은 무학 도사의 덕택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성계가 산에서 내려갈 때에 어떤 결심을 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오?"
"이성계는 무학 도사를 만나 보고 산을 내려오다가, 안하에 전개되는 천산 만봉을 한눈에 굽어보며, 자기 심정을 시로써 읊은 것이 있사옵니다. 삿갓 선생은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를 알고 계시옵니까?"
김삿갓은 무인 이성계가 시를 읊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이성계가 시를 읊다니?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 한번 들어 보고 싶구료."
"제가 외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반월 행자는 이성계의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보인다.
칡덩굴 움켜잡고 푸른 봉에 오르니
조그만 암자 하나 구름 속에 있구나
눈에 보이는 산천이 모두 내 땅이라면
초월 강남인들 어찌 수용하지 못하랴.
김삿갓은 그 시를 읽어 보고, 이성계의 웅장한 기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던가. 이성계야말로 선천적으로 대왕의 기개를 타고난 인물이었음이 분명했구나.)
반월 행자가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김삿갓은 이성계가 (대왕의 천명)을 타고난 인물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석왕사 본전을 둘러보고 후원으로 돌아오니,(명부전)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김삿갓은 지금까지 어느 절에나 명부전이 있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었다. 그러나 그 건물이 무엇에 쓰이는 건물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명부전은 어떤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이오?"
반월 행자는 그런 질문을 받고 나자, 소스라칠 듯이 놀란다.
"엣? 명부전이 어떤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이냐고요? 다른 사람도 아닌 삿갓 선생께서 그런 질문을 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김삿갓은 무안스러워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하, 명부전은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이 아니던가요?"
반월 행자는 불교를 많이 공부했는지, 정색을 하며 김삿갓을 나무란다.
"명부전은 지옥을 다스리는 십 대 왕을 안치한 곳이랍니다. 그런 부정한 곳에 신성하신 부처님을 어떻게 모시옵니까."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하기는 (명부)란 죄를 지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니까, 극락전에 모셔야 할 부처님을 명부전에 모실 수는 없는 일이겠구료. 그건 그렇다치고, 지옥을 다스리는 대왕이 열 명이나 있다고 하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일단 명부로 끌려와, 재판을 거쳐 처벌을 받게 됩니다. 죄의 경중에 따라 여러 가지 지옥으로 보내게 되는데, 열 명의 대왕들은 이를테면 여러 가지 지옥의 우두머리 장수들인 셈이죠."
김삿갓은 지옥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데 놀라움과 도시에 호기심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거 참 무척 흥미로운 얘기이구료. 열 명의 지옥 대 왕은 어떤 장수들이며, 그들의 소임은 각각 어떻게 다르오?"
"제가 말씀을 드릴 테니, 상식으로 꼭 알아 두십시오."
그리고 반월 행자는 명부전에 안치되어 있는 10명의 지옥 대왕들의 이름과 그들의 소임을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첫째 대왕은 염라대왕이다. 염라대왕은 이승에서 죄인이라고 인정되는 사람을 잡아다가, 죄의 유무를 가려 내는 재판을 맡고 있는 대왕이다.
두 번째의 대왕은 진광 대왕이다. 진광 대왕은 염라대왕한테서 유죄 판결을 받고 넘어온 죄인들을, 죄의 경중에 따라 어느 지옥으로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절차를 맡고 있는 대왕이다.
세 번째의 대왕은 초강 대왕이다. 초강 대왕은 연화지옥을 장학하고 있는 대왕이어서, 진광 대왕이 최악의 죄인을 넘겨 보내면 날마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기름 가마솥에 죄인을 잡아 넣었다 꺼냈다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대왕이다. 그러니까 지옥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처벌을 주는 지옥인 셈이다.
네 번째의 대왕은 송제 대왕이다. 송제 대왕은 냉동 지옥을 장악하고 있는 대왕으로서, 진광 대왕이 넘겨 보낸 죄인을 얼음 통에 집어넣어 낮이나 밤이나 사지가 추위로 오그라들도록 해주는 대왕이다.
다섯 번째의 대왕은 검술 지옥을 맡고 있는 오관 대왕이다. 오관 대왕은 창과 검이 총총하게 박혀 있는 땅바닥에 죄인을 알몸뚱이로 내던져 죽도록 고초를 겪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기다란 밧줄 끝에 죄인을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그 아래에서는 수많은 아귀들이 혀를 날름거리게 함으로써, 죄인의 간장을 타게 해주는 임무를 맡고 있는 대왕이다...
김삿갓은 반월 행자의 설명을 거기까지 듣고 몸을 부르르 떨어 보였다.
"말만 들어도 전신이 벌벌 떨려 오는구료. 지옥이 그렇게도 가혹해서야 어디 죄를 짓겠소."
반월 행자가 웃으며 대답한다.
"지옥이란 그렇게도 무서운 곳이랍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동안에 남에게 자비를 많이 베풀어, 죽은 뒤에는 반드시 극락세계에 가도록 불교를 꼭 믿으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불교를 많이 믿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소...... 열 명의 지옥 대왕 중에서 다섯 대 왕의 임무는 알았는데, 나머지 다섯 대 왕은 어떤 일을 하시오?"
"거기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릴 테니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반월 행자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여섯 번째의 대왕은 발설지옥을 맡고 있는 변성 대왕이다. 발설지옥은 생전에 언행이 바르지 못했거나 거짓말을 많이 해온 사람들을 보내는 지옥으로서, 거기서는 죄인의 혀를 길게 뽑아내어 질질 끌고 다니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혀에다가 쇳덩어리를 달아매고 다니게 하기도 했다.
일곱 번째의 대왕은 독사 지옥을 맡아 보는 태산 대왕이다. 독사 지옥에서는 수백수천 마리의 독사들이 토굴 속에서 우글거리고 있다가, 죄인이 들어오기만 하면 제각기 덤벼들어 죄인을 마구 물어 대기도 하고, 죄인의 몸을 휘휘 둘러 감아 숨을 막히게 하는 곳이다. 이 지옥에는 생전에 남에게 독사처럼 악독한 짓을 했던 죄인들만이 끌려오게 되어 있다.
여덟 번째의 대왕은 거철 지옥을 맡고 있는 평등 대왕이다. 이 지옥은, 죄인의 몸을 쇠꼬챙이로 콕콕 찔러 가며 사방으로 휘둘러 대는 지옥이다. 이곳으로 끌려오는 죄인들은 생전에 남의 돈을 함부로 떼어먹었거나 혹은 사기, 협박, 공갈 등으로 순진한 사람들을 괴롭혀 온 죄인들이다.
아홉 번째의 대왕은 철상 지옥을 맡아 보고 있는 도시대왕이다. 이 지옥은 생전에 품행이 좋지 못했던 여자들만이 끌려오는 지옥으로서, 여기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알몸뚱이로 있어야 하는데, 그 몸뚱아리가 더럽고도 추하기가 이를데 없다.
열 번째의 대왕은 암흑 지옥을 담당하고 있는 전륜대왕이다. 이 지옥은 죄상이 비교적 가벼운 사람들만이 끌려오는 지옥이다. 암흑 지옥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언젠가는 소나 말이나 돼지 같은 짐승으로 태어나 생을 다시 한번 누리게 되는 것이다...
반월 행자가 지옥 설명을 기다랗게 늘어놓고 나자, 김삿갓은 짐짓 안도의 숨을 내쉬어 보였다.
"후유.... 나는 지옥에 끌려갈 해당 사유가 하나도 없어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소."
반월 행자가 웃으며 반론을 제기한다.
"죄가 있고 없는 것은 염라대왕만이 아실 일이옵니다."
"생각을 해보시오. 나는 남에게 악독한 일을 한 일도 없고, 남의 돈을 떼어먹은 일도 없는데, 죄 없는 나를 어느 지옥으로 보낼 것이오. 안 그래요?"
그렇게 대꾸하며 몇 걸음 걸어 나오다 보니, 명부전 옆에는 (산신각)과 (칠성당)도 있지 않은가.
김삿갓은 절 경내에 산신각과 칠성당이 어엿하게 공존하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랐다. 칠성당과 산신각은 수천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만 전해 내려오는 무속 신앙으로서, 불교와는 대립되는 신앙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 절에는 산신각과 칠성당도 있으니, 이게 웬일이오?"
반월 행자는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지,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얼버무린다.
"절에는 산신각이나 칠성당 같은 것도 으레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 옵니까?"
"절에는 산신각과 칠성당도 있어야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불교는 인도에서 건너온 외래 신앙이고, 무속은 우리나라의 고유의 전통 신앙이 아니오. 무속 신앙과 불교 신앙은 서로 대립되는 신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절에 산신각이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구료."
"글쎄올시다. 저는 산신각이나 칠성당 같은 것도 으레 있어야 하는 것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들어 보니 모순되는 일이기는 하군요. 가만 계십시오. 주지 스님께서는 잘 알고 계실 테니까, 나중에 주지 스님한테 물어 보기로 하십시다."
산신각과 칠성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반월 행자는, 정확한 해답을 주지 스님에게 밀어 버린다.
"이 절의 주지 스님은 어떤 분이오?"
"경봉 스님이라고, 도가 굉장히 높으신 분이옵니다."
"경봉 스님?.....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름 같구려. 경봉이라고 어떤 글자를 쓰오?"
"거울 경 자, 메 봉 자를 쓰시는 분이옵니다."
"경봉 스님?"
김삿갓은 귀에 익은 이름을 두세 번 외어 보다가 별안간,
"아, 그분?"
하고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었다. 김삿갓은 강원도 어느 산속에서 칠십객 노부부에게 하룻밤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그들은 아들이 삼 형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호랑이한테 물려 가고, 하나는 중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집에는 절름발이 막내아들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절름발이 막내아들의 말에 의하면 중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간 형님의 법명은 (경봉)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장안사라는 절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반월 행자가 말하는 경봉 스님이란 혹시 그 스님이 아닐까 싶어, 김삿갓은 반월 행자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주지 스님으로 계시다는 경봉 스님은, 혹 금강산 장안사에 계시던 분이 아니오?"
그러자 반월 행자는 눈알이 휘둥그레지며 반문한다.
"맞습니다. 경봉 스님은 어려서부터 줄곧 장안사에만 계시다가 지난봄에 석왕사의 주지로 오셨습니다. 삿갓 선생은 경봉 스님을 잘 알고 계시옵니까?"
"나는 경봉 스님을 직접 만나 본 일은 없어도, 그분의 가족들을 통해 경봉 스님을 간접적으로는 알고 있다오."
김삿갓이 경봉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연유를 자세히 말해 주니 반월 행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말로만 들어오신 분을 오늘은 직접 만나 뵙게 되었으니, 그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니 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주지 스님을 찾아뵈면 어떻겠습니까?"
반월 행자는 그렇게 말하다가 별안간 발을 딱 멈추며,
"아, 주지 스님께서 저기 오십니다. 인사를 여기서 여쭙기로 하십시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눈을 들어 보니, 육십 가까운 노승 한 분이 이리로 조용히 걸어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삿갓을 벗어 들며 무언중에 허리를 굽혀 보였다.,
주지 스님도 두 손을 모아 합장 배례를 해 보인다.
그러나 반월 행자가 얼른 앞으로 나서며, 경봉에게 김삿갓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주지스님! 이 어른은 삿갓 선생이라고, 유명한 시인이시옵니다. 이분이 금강산에 들렀을 때 공허 큰스님께서는 이분하고 시 짓기 내기를 하셨는데, 공허 스님께서 이 어른한테 꼼짝을 못 하셨다고 합니다."
경봉 주지는 그 말을 듣고 무심중에 실소를 하면서,
"네가 무슨 말을 듣고, 그런 어릿광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
그리고 이번에는 김삿갓에게 새삼스러이 합장 배례를 해 보이며,
"일전에 장안사에 들렀다가, 선생 말씀은 공허 스님한테서 자세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걸음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바쁘지 않으시거든 방에 들르셔서 차라도 한잔 나누십시다."
그러나 김삿갓은 방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마침 마당가에 널따란 바위가 있기에, 김삿갓은 바위에 슬며시 걸터앉으며,
"방안보다는 여기가 좋겠습니다."
경봉 주지도 바위에 마주 앉자 반월 행자가 또 설치고 나선다.
"주지 스님! 제가 삿갓 선생과 글 풀이 내기를 해보았사옵는데, 삿갓 선생은 실력이 보통 분이 아니셨습니다."
경봉 주지는 반월 행자의 평소의 소행을 잘 알고 있는지, 껄껄껄 웃으며 말한다.
"유식한 손님들이 찾아오시면, 너는 글 풀이 내기로 손님들을 번번이 당혹하게 하는 버릇이 있지 않느냐. 네가 삿갓 선생한테만은 손을 바짝 드는 것을 보면, 삿갓 선생은 정말로 실력이 대단하신 어른이신가 보구나. 허허허."
그리고 이번에는 김삿갓에게 웃으며 말한다.
"선생은 이번 기회에 반월 행자의 고약한 버릇을 깨끗이 고쳐주시옵소서."
반월 행자가 또 대답을 가로막고 나선다.
"주지 스님! 그러잖아도 저는 삿갓 선생을 한평생의 스승님으로 모시기로 작정했사옵니다."
반월 행자는 모든 언행이 어릿광대 같기는 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김삿갓은 경봉 주지와 이런 말 저런 말 주고받다가, 문득 산신각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이렇게 물어보았다.
"지금 절 구경을 하다 보니, 대웅전 후원에 산신각과 칠성당이 있었는데, 그것과 불교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이옵니까?"
경봉 주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보통 사람들은 절에 산신각과 칠성당이 있는 것을 대개는 무심히 보아 넘기옵니다 그런데 선생만은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으셨군요."
"산신각과 칠성당은 무속 신앙에 속하는 건물이므로, 불교라는 외래 신앙과는 반대되는 신앙이 아니 옵니까. 그런데 절에 산신각과 칠성당이 있다는 것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 일이옵니다."
경봉 주지가 웃으며 말한다.
"선생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에 대해 다소라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모순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는 절에 토속 신앙을 숭상하는 제당 같은 것은 하나도 없사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만은 절 경내에 산신각이나 칠성당 같은 것이 공존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불교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이라뇨? 절에 산신각과 칠성당을 함께 모시고 있다면, 그것은 불교가 무속 신앙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경봉 주지는 허허허 소리를 내어 웃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무속 신앙을 인정하는 동시에, 무속 신앙조차 포섭하려는 넓은 포용력을 보여 주고 있는 증거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옵니다. 무속 신앙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민간 생활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불교 신앙을 널리 퍼나가려면, 전통 신앙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서는 안 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신앙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전통 신앙도 불교로 흡수해 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절에 산신각과 칠성당도 지어 주게 된 것입니다. 이를 테면 불교는 전통 신앙과 싸우지 아니하고, 전통 신앙조차 점진적으로 흡수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그런 건물을 허용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김삿갓은 그제야 절 안에 산신각과 칠성당이 공존하는 이유를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불교의 포용력이란 대단한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삼천대천세계를 제도하려는 것이 불교이니, 어찌 한낱 무속 신앙과 싸워서 이기려고 할 것이옵니까."
그러자 지금까지 옆에서 듣고만 있던 반월 행자가 또다시 설치고 나선다.
"주지 스님! 절에 산신각과 칠성당이 있는 이유를 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너는 오랫동안 절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절에 산신각이 왜 있는지도 모르고, 부질없는 글 풀이 내기만 하고 있었더란 말이냐."
경봉 주지는 반월 행자를 가볍게 나무라 주고 나서, 다시 김삿갓에게 말한다.
"선생께서도 보시다시피, 어느 절에 가도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은 중앙 복판에 의젓하게 앉아 있고, 산신각이나 칠성당 같은 건물은 뒷전에 조그맣게 지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믿지 않는 무속 신자들도 산신각 참배를 오기는 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산신령에게 기원을 올리면서도 산신령보다는 부처님이 훨씬 더 위대하다는 감회를 느끼게 되어, 그들도 언젠가는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 것이옵니다. 그것이야말로 불교의 위대한 포용력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듣고 보니 과연 그럴듯한 이론이어서 김삿갓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떤 고승께서 그런 포용력을 발휘하셨는지 모르지만, 절에 산신각을 허용했다는 것은 불교 보급을 위해 커다란 공로이셨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불교의 기본 목적은 중생을 제도하는 데 있사옵니다. 따라서 중생을 제도하는 데 어찌 사람을 가릴 수 있을 것이옵니까."
그리고 경봉 주지는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한 알씩 헤아리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로부터 10여 일 후에 석왕사를 떠나려고 하였다.
바랑을 둘러메고 나서니, 반월 행자가 울상이 되면서 김삿갓을 붙잡으려고 애쓴다
"선생은 석왕사를 꼭 떠나셔야만 하시옵니까.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러 계실 수는 없사옵니까?"
"나는 팔도를 편 답하기 위해 집을 나온 사람이오. 어차피 떠나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란 말이오. 불경에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지 않소. 한 번 만나면 이별은 반드시 있는 법이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마시오."
반월 행자는 순진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났으니 이별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선생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기로 작정한 저로서는 헤어지기가 너무도 가슴이 아프옵니다. 지금 떠나시면 어디로 가시 옵니까?"
"함흥을 거쳐 두만강까지 가볼 생각이지만, 어떻게 될지 봐야 알겠소."
"네? 함흥에도 가신다구요? 함흥에 가시려면 정평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정평은 제 고향입니다. 제 고향에도 꼭 들러 보아주시옵소서. 정평이 산골이기는 하지만, 풍치는 아주 좋은 곳이옵니다."
"정평이 고향이라니, 반월 행자를 생각해 정평에는 꼭 들러 보기로 하겠소."
반월 행자는 멀리까지 배웅을 따라 나오다가 별안간 발을 멈추더니, 싱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선생과 작별하는 기념으로 글 풀이 내기를 한 번만 더 해보고 싶사온데, 선생은 응낙해 주시렵니까?"
헤어지려는 마지막 순간에조차 내기를 하자고 덤비니, 김삿갓은 어이가 없었다.
"하하하, 내기를 좋아하는 버릇만은 영원히 고칠 수가 없는 고질인가 보구려. 소원이 그렇다면 한 번 더 해보십시다그려."
반월 행자는 어쩔 줄을 모르도록 좋아하면서,
"아마 이번 문제만은 도저히 풀지 못하실 것이옵니다."
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를 써 보인다.
사람들은 三十日 을 한 달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홀로 二十五日을 한 달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김삿갓은 문제를 읽어 보았으나,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동안 생각해 보다가 별안간 반월 행자의 어깨를 탁,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알겠소이다. 그것은 당연한 얘기가 아니오."
반월 행자는 눈알이 휘둥그레진다.
"뭐가 어째서 당연하다는 말씀입니까?"
"남들은 열흘이 세 개 (三, 十日)인 것을 가지고 한 달이라고 하지만, 나는 십오 일이 두 개 (二, 十五日)인 것을 가지고 한 달이라고 말한다는 소리가 아니오. 피차간에 표현하는 방법은 달라도 모두가 삼십 일이기는 마찬가지니까, 그게 바로 그게 아니냐 말요."
반월 행자는 그 말을 듣더니 별안간 땅바닥에 넓죽하니 엎드려큰절을 올리며 감격한다.
"아이구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실력을 올바로 알아뵙지 못하고 망령되이 또다시 내기를 걸었으니, 죄송 망극하였사옵니다. 선생께서는 어리석은 제자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내기를 좋아하는 고질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지만, 김삿갓은 천진난만한 반월 행자를 나무라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뭏든 반월 행자는 그와 같이 고약한 버릇을 가지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못난이)로 취급하기가 예사였다.
공허 스님은 반월 행자를, 그 애가 좀 모자라는 데가 있다고 웃으면서 말했고, 경봉 주지도 어릿광대 같은 녀석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김삿갓의 견해는 그렇지가 않았다. 반월 행자가 일견 못난이 같고 어릿광대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언동은 어디까지나 진실하고 선량하였다. 모든 언행이 진실하고 선량하기만 하다면, 그 사람은 성자가 아니고 뭐겠는가.
자고로 성자란, 항상 못난이 같고 어릿광대 같아 보이는 법이 아니던가.
김삿갓은 반월 행자의 그 점을 예찬해 주고 싶어, 문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기를 여러 번 당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내기를 한 번 걸어 볼까요?"
반월 행자는 호들갑스럽게 놀라 보이며 반문한다.
"에?......... 선생께서 저한테 내기를 걸어 보시겟다구요?"
김삿갓이 대답한다.
"내가 내기를 여러 번 당했으니, 나도 작별하는 인사로써 한 번쯤은 내기를 걸어 보고 싶구료."
"좋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문제가 너무 어려울 것만 같아, 저는 자신이 없사옵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 일이 아니오. 미리부터 겁을 먹을건 없어요."
"좋습니다. 내기라면 저는 미쳐 버리는 버릇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너무 어려운 문제를 내놓으시면 곤란합니다."
"반월 행자의 (半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문제를 낼 생각이니까, 결코 어렵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써보였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들 이지러진 달을 반달이라고 말하지만,
나만은 보름날 밤에 떠오르는 둥근 달을 반월이라고 말하오.
그 문제 속에는, 세상 사람들은 반월 행자를 이지러진 달같이 못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만은 반월 행자를 보름달처럼 원만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월 행자는 머리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 소리를 크게 외친다.
"아, 알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지러진 달을 반달이라고 말하지만, 선생만은 보름달을 가지고 반달이라고 말씀하신다는 말씀이군요? 그거 참 무척 재미나는 문젠데요. 그렇지! 보름은 한 달의 절반이니까, 보름달이 아무리 둥글더라도 반월임에는 틀림이 없겠군요."
"옳게 알아맞혔소. 이번 내기는 내가 졌소이다."
김삿갓은 반월 행자가 자신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그냥 넘겨 버리려 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반월 행자는 얼굴을 번쩍 들며,
"가만있자. 선생은 반월이라는 제 이름을 가지고 문제를 내겠노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면 이 문제는 반월이라는 저를 보름달처럼 원만한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시는 말씀이 아니 옵니까?"
하고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문제의 진의를 늦게나마 깨닫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반월 행자의 지능은 보통이 넘는 것이 확실한 것 같았다.
"허허허, 아뭏든 이번 내기는 내가 졌소이다. 내기는 그만하고, 이제는 작별하기로 합시다."
그러자, 반월 행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또다시 이별의 슬픔에 잠긴다.
김삿갓도 눈시울이 뜨거워 올라, 아무 말도 안 하고 걸음을 옮겨 나가며 맘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반월 행자는 세파에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원형적인 인간이다. 그러기에 그를 미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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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삿갓
지은이 정비석
옮긴이 주태백이
다시 봐도 뭉클 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