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관한 시모음 10)
이상한 계절 /김선재
돌아설 곳이 없는 밤입니다
모닥불은 꺼지고
부풀어 오르는 구름들이
점점
먼 곳으로 흘러갑니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찢어진 하늘에 매달린 맨발들을 따라가면
이 길 끝은 섬들의 무덤
가라앉은 섬들이 울고 있습니다
버려진 신발에 발을 넣어 보는 일은
어제로 다가가 보는 일
나의 생에 당신의 먼 생을 포개 보는 일
잃어버린 말과 잊지 못할 이름들 사이에 서 있습니다
점점
달은 차오르고
발목을 자르고 흘러가는 구름들
영영 가지 않는 어제와 오지 않을 내일 사이에서
아직 내게 남은 부위를 확인하는 나날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소금을 찍어 먹듯 분명해졌습니다
사실은 그뿐입니다
떠난 적 없는 사람들이 내내 돌아오지 않는,
이상한 계절입니다
더 이상 돌아설 곳이 없는 밤입니다
떠나고 싶은 계절에 /藝香 도지현
비가 유리창에 부딪혀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길을 그린다
구불구불 휘어진 길
저 길을 따라가면 어디가 될까
소슬한 바람이 불어와
문을 덜거덕거리며 흔들면
누군가의 유혹하는 소리로 들려
불현듯 집시처럼 방랑하고 싶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가슴을 적시며
가다 힘들면 쉬어 가고
동반할 사람이 있으면 더 좋겠지
낭만에 물든 가을이란 계절은
가만히 있는 집안의 대들보도 흔들어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는
배겨내기 어렵게 하는 마력이 있는데
정치의 계절 /권오범
우렁잇속끼리 한솥밥 먹다
밥그릇 챙기기
공천에 어긋나
점입가경인 야바위판
눈에 쌍심지 켜고
본색 들어내더니
쌍지팡이 짚고 나서
척짓는 오구잡탕들
발등에 불 떨어지자
말짱 개차반이라
악취 진동하는
춘삼월 언저리
계절의 이름 /손계 차영섭
봄이란 말은
날 좀 보아달라는 말인가 봐
여름이란 말은
열매가 열리는 계절이란 말이고
가을은
이제 소풍 끝내고 돌아간다는 뜻인가 봐
겨울은
겨우 겨우 살고 있다는 의미인가 봐.
꿈꾸는 계절 /임영준
길은 사방으로 열리고
창가에 걸린 계절은
상큼한 초록 덩어리
흩날리던 향기가
한꺼번에 모여 있으니
바로 낙원 아닌가
풋풋한 연분 그리며
아름다운 숨결을
다시 한 번 꿈꾸어도 될까
초록 담쟁이, 계절의 낙서 /정민기
담벼락에 담쟁이가 초록 잉크를 넣은
기다란 만년필을 들고 낙서하고 있다
아이가 지나가다가 우두커니 가로등처럼 서 있더니
풀잎의 마음을 닮은 초록 크레파스를 들고
아직 담쟁이가 낙서하지 않은 빈 담벼락에 담쟁이를 그린다
넓은 담벼락에 담쟁이 혼자 낙서하기 힘들까 봐,
초가의 계절 /이원문
눈 덮힌 지붕 위
저녁 연기 피어 오르고
밤 새우는 부엉이의 밤
그렇게 깊어 갔다
그 며칠 삼월이라
담 밑 난에 숨은 봄
장독대가 알리는 듯
소쩍새의 먼동에
제비 날아 들었고
앞 뒷산 울긋 불긋
뜨락의 봄바람인가
툇마루 양지에 졸음 불러
그 많은 꽃 다 지웠다
보릿고개 언덕 넘어
찾아온 뻐꾹새
굿은비에 슬피 우는
논 가운데의 뜸북새
옥수수꽃 떨어지니
어느새 옷 얇은가
아침 저녁 앞 세워
숨어 부는 찬 바람
수수밭 위 기러기
달빛 따라 떠나더니
우물둥치의 매화 단풍
그 시간을 덮는다
물사슴의 계절 /이병일
뿔은 늘 두개골 깊은 곳에 있어
뇌의 협곡은 건드리지 않고 머리통을 뚫고 자란다
희끗희끗하고 거무튀튀한 筍 속엔
더는 갈 곳 없는 몸의 분노들이 모여있다
침묵의 부스럼을 만드는 시간이 잠겨있다
그러나 단단하고 유연한 뿔은
죽음보다 높은 곳을 향해
수직의 고단함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자주 공중을 치받아 상처를 내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무 껍질을 긁어 뿔의 냄새를 숨기곤 했다
뿔은 까다로워지기 위해
톡톡 긋는 빗줄기의 감촉을 건드리기 위해
겁 없는 용기를 내비치지 않기 위해
아름다운 나뭇가지 冠을 뒤집어쓴다
오늘도 목숨의 깊이만큼 뿔은 들키고 싶지 않아
공중을 쥐고 높이높이 가지와 가지 사이에서
구름 빛으로 번져나간다
해와 달을 찌르고 새를 찔러 어둠을 부른다
그때 뿔에 끌리고 뿔에 밀리는 물사슴의 게절이 우거진다
계절(季節) /박인걸
한 중년 신사가 공원 밴취에 앉았고
빛바랜 낙엽이 뚝뚝 떨어진다.
사색에 골몰(汨沒)하던 사내는
어떤 결심을 한 듯 일어나 사라졌다.
차가운 바람이 공원(公園)을 맴돌고
낙엽들이 따라 맴을 돈다.
사라지는 바람을 따라가던 잎들은
제풀에 꺾여 힘없이 주저앉는다.
또 바람이 불면 낙엽을 날려갈 테고
운 좋게 아직 붙어있는 잎들도 질 것이다.
텅 빈 공원에는 허무(虛無)가 자리 잡고
긴 침묵(沈默)만 무겁게 쌓인다.
계절은 해마다 반복되는 시간의 유희일까
삶의 의미를 깨우치는 실물교훈일까
매년 이맘때의 공원 풍경은
나를 존재와 인식(認識)의 세계로 이끈다.
익은 모과하나가 내 발 앞에 떨어진다.
짙은 향(香)이 후각을 자극한다.
아름다운 계절 /강성은
눈보라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다
죽은 개를 묻으러 무지개 너머로 갔다
어젯밤 내 얼굴을 핥던 개
잠 속에서도 내 얼굴을 핥았다
깊은 밤
내 혀는 한없이 길어져
낯선 얼굴을 핥았다
침이 흥건했다
죽은 개를 묻으러 무지개 너머로 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지쳐버린 계절 /정일남
은행잎이 지는 길을 은행 여직원이 지나간다
여직원은 지폐와 종일 시달리며
고객들에게 미소를 건넸다
퇴근길에 보도에 깔린 조락을 밟고 간다
헤어지면 어디서 만나게 되는 것이냐
몰락의 갈림길은 저렇다
잘 살아라, 은행 여직원의 뒤에
복면한 강도가 뒤쫓아 와 권총을 쏜다
삽시간에 경적을 울리며 구급차가 도착했다
또 생명은 이렇게 끝나는 구나
피살자는 은행 여직원이 아닌 강도의 자살이다
죽음은 예측불가의 모순인가
가을은 염세주의자가 되는 것
살인강도가 시를 썼다고 한다
그러니 감각이 혼란에 직면한다
죽음은 하늘 아래 눈 감고
불편한 것이 없다
강도가 자살해버리니
설악이 온통 핏빛이다
계절 타기 /정연복
시간의 강물 따라
흘러가는 게 인생인데
어찌 계절을
타지 않을 수 있을까.
봄에는 살랑살랑
봄바람에 가슴 부풀어
나도 모르게
사랑 바람나야지.
여름에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
사랑의 불꽃
정열적으로 피워야지.
가을에는 홀로
낙엽의 오솔길 걸으며
나그네 인생길
쓸쓸함을 느껴봐야지.
겨울에는 찬바람 속
나목의 의연한 모습 따라
안으로 깊어지는
마음공부도 해보아야지.
쉼 없는 흐름 속
계절의 리듬에 맞추어
나의 하루하루도
흐름 속의 삶이 되어야지.
혹독한 계절 /박인걸
살아오면서 몇 번의 겨울을 만났다.
공전을 멈춘 지구본을 걸을 때
한 여름에도 가슴은 얼음동굴이었다.
풀리지 않는 신발 끈의 비밀은
교과서를 뒤적여도 답이 없다.
가진 것이 없는 영혼이 복이 있다고 하나
그것은 사막 수도사의 교설일 뿐이다.
빈털터리 호주(戶主)의 목구멍에는
조석으로 면도날이 넘어갔다.
아이앰에프가 다시올까봐 나는 떨고 있다.
그 해 겨울 닫힌 철문을 열 수 없었고
가시 철망을 뚫을 절단기가 없었다.
숨이 끊어지던 단말마처럼
어두운 지하실에서 일흔 밤을 부르짖었다.
쏟아지는 잠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뛰는 심장 부근에 찬물을 끼얹으며
깊은 어두움이 자유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아도
나는 한 줄기 길을 찾으며 몸부림쳤다.
재앙이 화폐 위에서 일어나지는 않아도
해결의 열쇠는 그가 쥐고 있다.
혹독한 계절에 힘없이 넘어졌지만
오뚝이의 내공이 벽돌처럼 포개졌다.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또 한 번 겨울이 와도 내 손에 열쇠가 있다.
돈 보다 더 좋은 비밀번호가 있다.
사랑의 계절에 /정심 김덕성
싱그러운 신록의 오월
가슴 속에 담아 있는 빨간 사랑이
곱게 익어가면서 사랑의 열매가
맺기 시작하는 계절
누구나 나누어야 하는 사랑
불타오르는 사랑과 함께 접목되어
사랑으로 정성을 다해 가르치신
존경하는 그리운 스승님
훈장님은 매를 들었지만
선생님은 사랑 하나만을 들고
교단에서 정성을 다하여 가르치시는
고마우신 사랑하는 선생님
가시는 길이 영광스러운 길이기에
빛을 남기신 모든 스승님에게
사랑의 계절 스승의 날에
축하의 꽃다발을 드립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길섶에서 /은파 오애숙
계절이 지나가는 길섶엔
늘 아쉬움 가슴에 물결치기에
외초로운 겨울 나그네가 되어
축쳐져 있는 이 같아 나 자신
돌아다 보며 점검합니다
삶이 가끔 아수라장에
얼키설킷 어설프게 빗나가
고뇌 스미어 올 때 있었기에
가을날 과일 익어 가던 게
후뭇했던 기억 스밉니다
나의 일상도 나일 먹으면
알맞게 익어가면 좋겠다 싶어
탐스러움 열매 바라다 보면서
그 옛날 앞마당의 홍씨처럼
나도 익어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