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문학기행
강명신
2024년 5월 14일 화요일. 파랑파랑 하늘과 산들산들 초록빛 바람 부는 날. ‘행복한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에세이 강남’과 ‘글뜨락’ 회원들과의 동행. 성북동 문학기행은 나의 첫 번째 문학기행이다. 이제껏 주로 성동구와 강남구에서 살아왔던 나에게 성북동은 낯선 곳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 성북동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성북동 땅을 밟는다는 자체가 이색적 경험이다.
문학기행 일정은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오전 9시 30분)에서 출발. 최순우 옛집(9시 50분). 문화해설사 안내(10시). 선잠 박물관(10시 30분). 간송미술관 외부 관람(10시 50분). 이종석 별장 관람(11시 10분). 수연산방(11시 30분). 금왕돈까스(11시 40분). 승설암, 배정국(오후 12시 50분). 노시산방(1시). 만해 한용운 좌상 및 심우장(1시 10분). 성북동비둘기(1시 40분). 북정마을 성문 한양도성 관람(1시 50분). 한양도성 순성길 걷기(2시). 와룡공원(2시 10분). 성북역사문화센터(2시 20분). 조지훈 시비(2시 40분). 마지막으로 구포국수(오후 3시)에서 뒤풀이를 하고, 한성대입구역 6번 입구에서 해산하는 일정이다.
최순우 옛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혜곡 최순우 선생(1916~1984)이 1976년부터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한때 성북동 재개발로 헐릴 위기에 처했으나 2002년 시민 성금으로 지켜낸 시민 문화유산 1호라고 한다. 한쪽 벽면 게시판에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6월 8일(토요일) 오후 5시에 열릴 ‘음악이 꽃 피는 한옥 ‘더블베이스와 비올라’ 공연 포스터. 한옥과 서양의 악기가 이곳에서 만나 고전과 현대 음악을 오가며 뜻깊은 시간 여행을 하겠구나. 앞뜰에 뚜껑 덮여 있는 우물과 검정 고무신 두 켤레. 뒤뜰 장독대 위에 크고 작은 항아리들과 약탕기. 땅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뭐가 그리 좋은지 올망졸망 모여 눈웃음치는 감꽃들. 너희 모두도 그날이 오면 더블베이스와 비올라 선율을 타고 시간 여행을하렴.
선잠대와 선잠박물관. 선잠제가 열린다는 선잠대에 잠시 머물다가 선잠박물관으로 향했다. 선잠박물관은 선잠단지와 연계하여 역사 문화를 계승하고 가치를 알리며 시민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공간 조성을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선잠박물관에는 선잠단에 대한 역사와 선잠제의 진행 과정을 볼 수 있는 3D 영상을 비롯하여 양잠과 직조 등에 사용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마다 디폼블록(10mm 이하의 작은 정육면체 모양의 블록)으로 선잠제 캐릭터를 만드는 ‘뚝딱선잠-디폼블럭 선잠제 캐릭터 만들기’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도 진행된다 했다. 불현듯 진주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손주들이 생각났다. 박물관 문을 막 나서려다 책갈피 꾸미기 코너에 잠시 들러서 선잠 관련 캐릭터 스탬프(stamp)를 찍어 책갈피 2개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
간송미술관.간송 전형필(1906년~1962년)이 일찍 부모를 여의고물려받은 재산으로 1938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이다. 간송미술관은 세계기록문화유산인 훈민정음해례본과 혜원풍속도를 포함해 국보 12점, 보물 10점 등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전형필이 지킨 문화유산 중 하나인 훈민정음해례본(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는 유일본)은 1940년 경북 안동의 고가에서 발견된 것을 전형필이 수장(收藏)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조선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무단반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재로 사들여 우리의 것이 되도록 애쓴 흔적이 보물로 남아 있는 이곳. 문우들과 함께 그의 동상 앞에서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묵념했다.
이종석 별장. 조선시대에 새우젓 장사로 갑부가 된 이종석이 1900년대 초반에 지은 별장으로 전통가옥의 가치가 인정되어 서울시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덕수교회(1947년 설립)가 1986년에 이 집을 매입하여 별장 명칭 대신에 누마루에 붙어있던 ‘일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원로목사의 사택으로 사용했다가 현재는 영성훈련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소그룹 성경공부’와 ‘덕수신학강좌’ 및 ‘한옥 체험’과 ‘다도(茶道) 배우기’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교회에서 결혼식이 열릴 때면 폐백실로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다락처럼 높게 만든 누마루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데, 이종석 별장을 품고 있는 덕수교회의 첨탑이 눈에 확 들어왔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있는 첨탑을 바라보며 80여 년 덕수교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갔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수연산방. 1933년에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속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수연산방. 이태준의 집필 공간이었던 이곳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그의 외종 손녀가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오늘따라 수연산방 대문엔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못내 아쉬웠다. 문학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이태준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행복한 글쓰기’ 시간에 최원현의 발제글 ‘<무서록>에서 찾는 현대 수필문학의 길-수필의 미학과 정취’를 통해 이태준 작품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머지않아 수연산방을 찾게 될 것이다. 고요히 홀로 앉아 전통차 향기를 마시며 이태준의 저서 <무서록>과 <문장강화>를 읽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금왕돈까스. 평일 점심시간인데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가 한 공간에서 먹는 모습을 보니 행복했다. 메뉴판에는 단품 메뉴와 세트 메뉴(금왕정식)가 있었다. 망설이다가 금왕정식을 주문했다. 정식은 세트 메뉴라서 등심까스와 치킨까스, 함박스테이크 맛을 골고루 맛볼 수 있어서 좋다. 스프, 양배추 샐러드, 마카로니와 완두콩, 밥, 깍두기, 쌈장과 고추. 특히 맵지 않고 사각거리는 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으니 음식의 뒷맛을 개운하게 잡아주었다. 여름방학 때 손주들이 서울에 오면, 구순이 된 친정엄마와 손잡고 4대가 함께 오리라.
승설암. 원래 백양당의 사장이자 서예가인 배정국의 집이었던 승설암은 서적이 빼곡히 들어찬 사랑채와 멋진 마당으로 이름난 곳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국화꽃이 한창일 때에 오면 좋을 것 같은 ‘국화정원’이라는 게장백반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1945년 봄, 상허 이태준과 수화 김환기 등의 예술가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상허의 요청을 받은 손재형이 즉석에서 그렸다는 <승설암도>가 있기에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백양당은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이태준의 <상허문학독본>을 비롯한 <이상선집> 등 30여 권의 단행본을 간행한 유수의 출판사였다고 한다. 이런 역사의 현장이 대를 이어 출판사의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것이 내심 안타깝다.
노시산방(老柿山房). 화가이자 미술 평론가였던 김용준(1892-1968)이 ‘노시’(오래된 감나무)가 있던 집으로 이사와 지은 이름이다. 1944년 김용준은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에게 노시산방을 신혼집으로 내주면서 당호를 ‘수향산방’이라 정하고, <수향산방전경>이란 그림도 그려 주었다고 한다.
‘갤러리 커피하우스’의 데크에 서서 폐가가 되어버린 노시산방을 바라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 문학기행의 리더인 최원돈 문우가 김환기와 김향안(본명, 변동림)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독특하여 흥미로웠다. 이상과의 사별 이후에 김환기의 아내로, 예술적 동반자로, 진취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김향안. 그녀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김환기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싶다. 빠른 시일내로 ‘환기미술관’에 가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을 관람해야겠다. 그 공간에 가득히 흐르는 김환기와 김향안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만해 한용운 좌상.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해 한용운의 좌상이 있는 만해공원에서 ‘님의 침묵’을 낭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고 시절 수업 시간에 배웠던 님의 침묵.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서 마주하다니.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한용운, 1926년.
주위를 둘러보니 ‘서울다원학교. 한용운 활동 터’ 버스정류소가 눈길을 끌었다. 서울시가 3.1운동 100주년에 한용운(1879~1944) 선생의 삶과 애국심을 날마다 기억하기 위하여 버스정류장 이름으로 새긴다는 문구와 함께 1111, 1112, 2112 버스 노선도가 붙어있었다. 만해가 그랬듯이 ‘아아, 님은 갔지마는 우리(성북동)도 당신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심우장을 향해 올라가는 길.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는’ 만해처럼, 올라가며 미리 내려갈 것을 염려하는 나. 오랜만에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며, ‘내려갈 때는 어쩌지?’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무릎 연골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이나 단발머리였던 그 시절이나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문제다. 어릴 때 산동네에 살았던 기억이 또렷이 살아 움직였다. 쌓인 눈이 녹지 않아 꽁꽁 얼어붙어 미끄러운 이른 아침 등굣길. 대충 깨뜨러져 나뒹구는 연탄재의 분신을 발로 톡톡 차서 으깨며 산꼭대기 아래로 엉거주춤 내려가곤 했던 기억이 왜 이 시점에서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걸까.
심우장. 만해 한용운이 생애 마지막 10년을 살았던 집이다. '심우장'이란 명칭은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삼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성북동 골짜기 셋방살이를 하던 차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지은 집이다.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이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북향으로 터를 정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그의 방 안에는 친필 원고와 논문집, 유품 등이 남아 있다.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썼다는 '심우장'(尋牛莊) 현판 아래 툇마루에 걸터앉아 산들산들 불어오는 초록빛 바람을 마시며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더 이상 올라가고 싶지도 내려가고 싶지도 않았다.
비둘기 쉼터. 심우장에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비둘기 쉼터가 나왔다. 처음엔 비둘기 공원으로 불리다가 2009년에 열린 제1회 ‘월월(Wall-月) 축제 2009’의 일환으로 이곳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비둘기 쉼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비둘기 쉼터 정면에는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시가 1연씩 새겨져 있는 커다란 3개의 동판과 비둘기 모양의 조형물들이 붙어있었다. 시판 옆에 있는 작은 동판에는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변추석, 김 민 교수를 비롯하여 석사과정생 23명과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생 25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이름을 카메라에 담았다. 비둘기 공원을 새롭게 단장하기 위하여 애썼던 풋풋한 젊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한용운의 좌대가 있는 만해공원에서 그러했듯이,비둘기 쉼터의 초록빛 그늘 아래에서도 시낭송의 시간을 가졌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성북동 메마른 산골짜기에는/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사람 가까이서/사람과 같이 사랑하고/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한양도성 순성길.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의 주위를 둘러싼 성곽과 문을 일컫는 말이다. 순성길은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며 과거급제를 비는 선비들을 보고 지은 것으로, 도성을 한 바퀴 돌아서 안팎의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순성놀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북적북적하여 북정이라 이름 지어졌다는 북정마을을 지나 성문으로 들어가 돌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성곽 너머로 널따랗게 펼쳐진 도성 밖의 풍경. 레고로 만든 미니어처(miniature)를 연상케 한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지나온 삶의 애환도 고만고만하게 느껴진다.
성북역사문화센터.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성북동의 관광 인프라 거점 시설로 건립되어 2020년에 개관한 곳이다. 관광 안내와 함께 여행자들이 쉬어 갈 수 있는 1층과 2층의 작은 도서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벽면에 성북동의 역사와 문화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자료들로 가득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성북동의 역사와 다양한 관광 정보를 둘러보았다. 다시 성북동을 찾게 될 때는 이곳에 먼저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지훈의 시비. 시인의 집터 방향으로 문을 내고 바깥벽에는 ‘낙화’가 새겨져 있는 이곳. 조지훈이 성북동에 한옥을 마련하여 ‘방우산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시인의 방’이라는 콘셉트(concept)로 세워진 조지훈 기념 건축조형물. 벽의 양쪽 기둥에 한 개씩 붙어있는 문짝 사이로 들어서니 널따란 열린 공간에는 아홉 개의 의자가 정해진 방향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상석이 따로 없는 공간, 시인의 방에서 ‘낙화’ 시낭송을 대하니, 나이 탓인가 가슴이 아려온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낙화> 조지훈, 1946년.
가까이에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입구’ 버스 정류소가 보인다. ‘서울다원학교. 한용운 활동 터’ 버스 정류소처럼 ‘조지훈 시비’ 또는 ‘조지훈의 방우산장’ 이라 했으면 성북동다움이 돋보였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구포국수. 옛날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온 듯하다. 막걸리의 알싸한 맛과 파전의 고소한 향이 어우러지고. 누군가가 “내일이 스승의 날이네”하는 말에 약속이나 한 듯 함께 노래를 불렀다. 성북동 문학기행의 백미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스승의 은혜> 강소천 작사, 권길상 작곡.
나의 첫 번째 문학기행. ‘스승의 은혜’ 노랫말로 마침표를 찍으며, 구포국수에서의 뒤풀이를 끝으로 한성대입구역으로 향했다. 성북동 거리에 최원현 선생님과 동행하며 웃음 가득했던 우리의 뒷모습을 남겨두고.
첫댓글 그때의 문학기행 다시 가는듯 생생한 기록 감탄스럽습니다 다시 가고픈 마음이 생겨나게 만드시는군요^^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