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대한민국의 제13代 대통령 盧泰愚(노태우)는 1932월 8월14일(음력 7월16일), 팔공산의 자락에 있는 慶北 達城郡 公山面 新龍洞 596(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596번지)에서 長男(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盧秉壽(노병수), 어머니 金泰香(김태향)은 결혼한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자식을 보게 되었다. 盧 대통령은 生家(생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이렇게 추억하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으로 바깥채에 할아버지가 계시던 사랑채, 그리고 아버지의 書齋, 방앗간, 창고가 있고 마당을 가로질러 맞은편 안채에는 부엌과 할머니가 계시던 큰방, 마루, 어머니 방 등이 있었다. 집은 서남향(西南向)인데 마루에 앉아 바라보면 앞산이다. 해가 뜨면 앞산의 얼굴이 보이고, 해가 질 때는 앞산의 그림자만 보였다. 팔공산은 집 뒤쪽에 있는데다가 너무 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팔공산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팔공산을 보게 된 것은 집에서 멀리 나다닐 수 있게 된 후의 일이다.
집 옆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저녁 무렵 아버지가 걸어서 올라오시는 모습을 사랑채에 앉아 열린 대문을 통해 바라보곤 했다. 개울 옆길을 따라 올라오시는 아버지께선 늘 책이나 유성기판을 끼고 계셨다. 아버지는 나를 서재로 불러 무릎에 앉히고 새로 사 온 유성기판을 틀어 노래를 들려주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실 때에도 그 방에 들어가 유성기와 책, 퉁소 같은 것들을 가지고 놀았다>
盧泰愚가 만 여섯 살이 채 안 된 1938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스물아홉 살에 별세하였다. 그 뒤 盧泰愚는 동생 載愚(재우)와 함께 막내 숙부 盧秉祥(노병상)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평생 守節(수절)하면서 살다가 1999년에 90세로 별세하였다. 1972년에 달성군으로부터 孝婦賞(효부상)을 받았다.
국민학교 시절 盧泰愚 소년은 운동, 음악, 독서를 좋아하였다. 특히 피리와 휘파람을 잘 불렀다. 잊을 수 없는 스승으로는 일본인 교사 사토 아키라(佐藤彰)씨가 있었는데, 盧 대통령은 1988년 5월에 일본 구라사키에 살던 선생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을 대접하고 환담하였다.
2. 將校의 길
盧泰愚는 1945년에 公山(공산)국민학교를 졸업, 대구공립공업학교(뒤에 대구工高로 이름을 바꿈)에 應試(응시)하여 전기과에 입학하였다. 6학년 105명 중 진학한 사람은 盧泰愚를 포함, 4명이었다. 盧泰愚 학생은 대구공립공업학교로 진학하면서 生家(생가)를 떠나 대구 칠성동 막내 숙부 집에 머물면서 학교를 다녔다. 이 무렵 그는 洪思容(홍사용)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즐겨 暗誦(암송)하였다.
盧泰愚 학생은 대구공업학교에서 3학년을 마친 뒤 경북중학교에 편입시험을 쳐 합격, 4학년에 입학하였다. 1950년 6・25 남침 직후 경북중 6학년이던 그는 학도병으로 육군에 자원입대, 헌병부대 교수부에서 사병으로 근무하다가 1952년 정규 육사 1기(통산 11기) 시험에 합격, 진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동기생은 200명이었고 全斗煥(전두환) 생도도 있었다. 盧 생도는 럭비부를 만들어 3士체육대회에서 우승하였다. 陸士(육사)는 1954년 초여름 화랑대로 이전하였고, 盧泰愚 생도는 1955년 졸업, 소위로 임관된 후 5사단에 부임하여 사단장 朴正熙 장군의 총애를 받았다.
盧泰愚 대위는 1959년 5월31일 同期生(동기생) 金復東(김복동)의 여동생인 세 살 아래 金玉淑(김옥숙)과 결혼식을 올렸다. 式(식)의 사회는 全斗煥(전두환) 대위가 보았다. 신혼 생활중 渡美(도미)한 盧泰愚 대위는 1959년 11월에 미 육군 특수전 학교 심리전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3. 제5공화국 出帆, 서울올림픽 主導
盧 대위는,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ROTC 창설 및 교관 요원으로 근무중 朴正熙 소장이 지휘한 5․16 군사혁명을 맞이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朴正熙 장군은 盧 대위를 특명조사관으로 쓰는 등 특별히 아꼈다. 盧泰愚는 육군방첩부대 보안계장, 최고회의 연락장교, 육사졸업생들의 총동창회 북극성회 4代(대) 회장, 방첩부대 정보과장을 지냈고, 육군대학에서 공부한 뒤 1968년엔 20사단(사단장 윤필용) 60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11월 초 맹호부대에 소속되어 越南(월남)전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재구부대 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戰功(전공)을 많이 세운 뒤 1969년 10월 귀국하였다. 육군 참모총장 수석 부관, 8사단 21연대장 등을 거쳐 1974년 1월1일 준장으로 진급, 공수 여단장으로서 9여단을 창설하였다.
1978년에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한 뒤 소장으로 진급, 수도권을 방어하는 9사단장으로 근무중 朴 대통령 弑害(시해)사건(10․26 사건)과 12․12 사건을 겪었다.
1980년의 격동기에 수도경비사령관 및 국군보안사령관으로서 全斗煥(전두환) 장군을 도와 혼란을 수습하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盧泰愚 장군은 1981년 대장으로 轉役(전역), 정무제2장관에 임명되어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작전을 지휘하였고, 체육부장관, 내무장관, 대한체육회 회장,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올림픽 준비사업을 主導(주도)하였다.
4. 6・29 선언으로 대통령 당선
그는 1985년 2・12 총선에서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직후 民主正義黨(민주정의당)의 대표로 임명되었다. 집권여당을 이끌면서 12代 총선으로 분출하기 시작한 국민과 야당의 민주화 욕구에 대응하고 올림픽 준비와 경제성장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야 하는 難題(난제)를 맡았다.
1987년 6월10일 민정당은 盧泰愚(노태우) 대표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이날부터 시작된 학생, 야당, 종교인을 주축으로 한 민주화 대시위에는 중산층까지 加勢(가세)하여 정부와 민주화 세력이 정면 대결하는 局面(국면)으로 치달았다.
6월29일 盧泰愚(노태우) 대표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 그는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6·29선언)을 발표, 대통령 직선제 改憲 등 전면적인 민주화를 약속, 극적으로 局面을 전환하고 그해 12월18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6・29 선언 8개항
1. 대통령 직선제 개헌
2. 공명한 선거관리
3. 김대중 사면 복권
4. 국민 기본권 보장
5. 언론규제 철폐
6. 지방자치와 사회단체의 자율 보장
7. 정당활동의 보장
8. 사회淨化
5. 전환기의 국가 大戰略: 민족의 活力을 드높이고 활동공간을 드넓히다
1988년 2월에 취임한 盧泰愚 대통령은 1987년 6·29 선언에서 약속한 8개항의 실천을 國政의 중심과제로 삼았다.
盧 대통령 在任(재임) 5년간은 국내외의 전환기가 겹친 시기였다. 國內(국내)에서는 민주화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國外(국외)에서는 소련 및 東歐(동구) 공산권이 무너졌다. 대통령은 전면적 민주화와 북방정책이란 국가 대전략으로 세계사적 전환기에 창의적으로 對應(대응)하였다. 국회를 정치의 중심무대로 삼고, 민간부문의 자율과 경쟁을 촉진하였으며, 공산권 붕괴의 호기(好機)를 이용해 서울올림픽 성공을 이어받은 북방정책으로써 국가의 활로(活路)를 열었다. 盧 대통령은 튼튼한 韓美(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남북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잡고 ‘남북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내었다.
언론자유가 滿開(만개)하고 사회 各(각)부문의 자율성이 획기적으로 提高(제고)되었으며, 권위주의적 관행이 완화되고, 지방자치 선거가 실시되었다.
盧 대통령은, 東歐(동구), 러시아, 중국 등과 修交(수교)하여 냉전시대 禁斷(금단)의 땅이던 유라시아 대륙을 한국인의 새로운 활동공간으로 활짝 열어놓았다. 특히 1992년 韓中(한중) 수교는 세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성장하는 13억 중국시장을 한국 경제와 연결시킴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다. 韓中(한중)무역액은 수교 17년 만에 韓美(한미)-韓日(한일)무역액을 합친 것보다 많아졌다.
盧 대통령은 한국 경제의 장기적인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사회간접자본에 집중 투자하였다. 영종도 신공항, 경부고속전철(KTX), 서해안 개발 사업을 시작하였다. 특히 주택 272만호 및 수도권 신도시 건설로 주택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였다.
盧 대통령은 1988년 총선으로 국회가 與小野大(여소야대)가 된 상태를 극복하여 國政(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1990년 초 三黨(삼당)합당을 단행하였다.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당,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재출범하였고, 이 안정된 보수연합 구도 덕분에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자당 후보 金泳三(김영삼)이 당선될 수 있었다.
6. 달라진 나라, 달라진 삶
*1987년에 3200 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5년 사이 7200 달러로 늘어났다. 노사분규가 늘었지만 근로자의 소득도 5년간 倍增(배증)하여 내수시장이 커지고 중산층이 충실해졌다. 노동소득 분배율은 1987년 53%에서 1991년엔 60%로 늘었다.
*1987년 224억 달러였던 우리나라 순외채가 1992년에는 110억 달러로 줄었다. 무역규모는 이 기간 거의 배로 늘었다.
*1977년부터 시작된 국민의료보험제도를 1989년 7월 도시지역 일반주민에게까지 확대‧적용했다. 1987년 51%에 지나지 않던 의료보험 수혜자가 1992년에는 95%로 증가했다. 극빈층에 대한 의료보장 제도도 확대하여 1990년엔 모든 대상자가 혜택을 보게 되었다.
*국민연금제도를 확대했다. 1988년에 10인 이상 고용사업장을 가입시키고 1992년에는 5인 이상 사업장에까지 확대‧실시했다.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개발 및 지원예산이 1987년의 1조6000억 원에서 92년엔 4조6000억원으로 늘었다.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을 36만7000호 건설하였다.
*1988년 67개소이던 노인시설이 1992년 123개로 증가하고 수용 인원도 1만7000명에서 2만5022명으로 늘어났다. 9만1000명에게 사상 처음으로 老齡(노령)수당이 지급되었다.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복지 전문요원을 洞(동) 단위로 3000여 명을 고용했다.
*전교조를 해산시켰다. 법적으로 엄정하게 대응하여 1만2000명이던 가입자가 15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잔류를 고집한 교원들을 해직시켰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경찰관 2만4400여명을 증원,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民生(민생)치안을 확보하였다.
*언론자유를 보장함으로써 6・29선언 이전에 32개이던 일간신문은 121개로, 7개 방송사는 14개로, 1404개이던 주・월간지는 6570개로 급증하였다.
7. 약속을 지킨 대통령
盧泰愚 대통령은 6・29 선언에서 국민과 약속한 정책을 충실히 지킨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다. 在任(재임) 기간의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통령 직선제 개헌(민정당 총재 및 후보 시절)
2. 정치활동의 자유 보장
3. 언론자유 확대: 신문 출판의 자유화
4. 사회단체 자율적 운영 보장
5. 勞使(노사)관계 자율화: 노조에 대한 정부 개입 금지
6. 여성권익 보호 및 사회참여 확대: 가족법 모자보건법 保育法(보육법) 제정 및 개정. 공무원 채용 남녀구분 폐지
7. 지방자치 시작
8. 서울올림픽 성공
9. 유엔 가입
10. 韓中(한중)-韓蘇(한소)수교
11. 東歐(동구)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
12. 남북대화의 진전과 기본합의서 도출
13.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발표
14. KTX, 영종도 공항,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
15. 서해안 개발 시작
16. 5대 신도시 및 주택 272만 호 건설
17. 토지 공개념 도입
18. 全국민 의료보험화
19. 국민연금 확대
20. 중학교 의무교육 확대
21. 전교조 불법화 및 해산
22. 범죄와의 전쟁 선포
盧 대통령이 주도한 전면적 민주화와 북방진출은 1948년 建國, 1961년 군사혁명에 이은 세 번째의 國家改造(국가개조)이고 구조개혁이었다. 이 개혁에 의하여 대한민국은 소란하지만 活力(활력)이 넘치는 生動(생동)하는 ‘민주․자유․번영’의 국가로 거듭 났다. 盧泰愚 대통령은 1987년 大選(대선)의 구호대로 보통사람들이 역사의 主役(주역)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1993년 2월25일 퇴임, 청와대를 떠나 한 시민으로서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盧 대통령의 호는 陸士(육사) 생도 시절의 스승이기도 한 趙淳 부총리가 지어준 庸堂(용당)이다. 盧泰愚 대통령은 부인 金玉淑 여사와의 사이에 딸 素英(소영・1961년 출생), 아들 載憲(재헌・1965년 출생)을 두었다.
8. 盧泰愚 대통령 年譜
1932월 8월14일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596번지에서 出生 (음력 7월16일)
1951년 7월 경북고등학교 졸업
1955년 9월 육군사관학교 (제11기) 졸업, 육군소위에 임관
1974년 10월 제9공수특전여단장 (준장)
1978년 1월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준장)
1979년 1월 제9사단장 (소장)
1979년 12월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1980년 8월 국군보안사령관 (중장)
1981년 7월 전역 (대장), 정무제2장관
1981년 9월 국가안전보장회의 위원에 임명
1982년 3~4월 체육부장관
1982년 4월~1983년 7월 내무부장관
1983년 7월~1986년 5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1984년 10월~1985년 4월 대한체육회 회장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87년 6월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
1987년 6월29일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6·29선언) 발표
1987년 9월14일 백악관으로 레이건 美대통령 방문(한국의 정치발전, 韓美 통상마찰 해소 등 안보협력 등에 관한 광범위한 의견교환)
1987년 12월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투표
1987년 12월18일 중앙선관위, 盧泰愚 후보를 제13대 대통령선거 당선자로 확정, 공고
1988년 2월11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前 일본 수상 예방 받음(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방안 등 공동관심사 논의), 李賢宰 국무총리 내정자·洪性澈 비서실장 내정자 발표
1988년 2월19일 새정부 내각명단 발표(부총리 羅雄培, 외무 崔侊洙, 내무 李相熙, 재무 司公壹, 법무 丁海昌, 국방 吳滋福, 문교 金永植, 체육 曺相鎬, 농수산 尹勤煥, 상공 安秉華, 동자 李鳳瑞, 건설 崔同燮, 보사 權彛赫, 노동 崔明憲, 교통 李範俊, 체신 吳明, 문공 鄭漢模, 총무처 金容甲, 과기처 李寬, 통일원 李洪九, 정무2 趙敬姬, 법제처 玄鴻柱, 보훈처 全錫洪)
198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
1988년 2월26일 제6공화국 제1차 국무회의 주재
1988년 3월10일~4월22일 각 부처 및 道政 업무보고 청취
1988년 4월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1988년 5월 7일 개각(안기부장 裵命仁, 내무부장관 李春九)
1988년 5월 9일 청와대 국무회의 주재(4대 國政지표 제시 )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발표
1988년 9월17일 올림픽 개막식 참가(개회선언), 訪韓한 다케시타 일본수상과 韓日 정상회담
1988년 10월15일 서울 장애자올림픽 개회식 참석
1988년 10월19일 제43차 유엔총회 연설: ‘한반도에 화해와 통일을 여는 길’
1988년 10월21일 레이건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88년 11월3일~14일 말레이시아, 호주,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방문
1988년 11월 4일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와 정상회담
1988년 11월 7일 호크 호주 수상과 정상회담
1988년 11월10일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
1988년 11월12일 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과 정상회담
1988년 12월 5일 개각(국무총리 姜英勳, 부총리 趙淳 등)
1989년 1월30일 訪韓한 호크 호주 수상과 정상회담
1989년 2월27일 訪韓한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89년 3월20일 중간평가에 관한 담화 발표
1989년 7월19일 개각(안기부장 徐東權, 내무장관 金泰鎬 등)
1989년 9월11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천명 특별연설
1989년 10월18일 미국 상·하 兩院 합동회의 연설: ‘전진의 동반자-변화하는 세계 속의 韓美 관계’
1989년 11월18일~12월4일 유럽巡訪(독일, 헝가리, 스위스, 영국, 프랑스)
1989년 11월21일 콜 독일연방 수상과 정상회담
1989년 11월22일 쉬로시 헝가리공화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1989년 11월23일 헝가리 의회 연설: ‘화해와 새 시대를 함께 여는 동반자’
1989년 11월25일 들라므라즈 스위스 대통령과 비공식 정상회담
1989년 11월28일 대처 영국 수상과 정상회담
1989년 12월27일 신설 3부 장관 임명(문화 李御寧, 환경 曺京植, 공보 崔秉烈)
1990년 1월22일 신당창당 합의문 발표
1990년 3월17일 개각(부총리 李承潤 등 15개 부처)
1990년 5월9일 3黨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총재 취임
1990년 5월25일 일본 국회 연설: ‘변화하는 세계 속의 새 韓·日 관계’
1990년 6월5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0년 6월6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0년 9월19일 개각 (농수산 曺京植, 건설 李相熙, 환경 許南薰)
1990년 12월14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 모스크바대학 연설: ‘냉전의 벽을 넘어, 평화와 번영을 향하여’
1990년 12월27일 개각(국무총리 盧在鳳 등)
1991년 1월9일~10일 訪韓한 가이후 일본 수상과 정상회담
1991년 2월18일 개각(부총리 崔珏圭, 건설 李鎭卨, 서울시장 李海元)
1991년 4월20일 訪韓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제주)
1991년 5월24일 국무총리에 鄭元植 임명
1991년 5월26일 개각(재무 李龍萬, 동자 陳稔, 보사 安弼濬)
1991년 6월29일~7월7일 미국, 캐나다 공식방문
1991년 7월2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1년 7월4일 멀로니 캐나다 수상과 정상회담
1991년 9월17일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1991년 9월20일~30일 유엔 및 멕시코 방문
1991년 9월23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1년 9월24일 유엔총회 연설: ‘평화로운 하나의 세계 공동체를 향하여’
1991년 9월25일 살리나스 멕시코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1년 11월8일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 발표
1991년 12월18일 한반도의 비핵화와 관련한 특별발표
1992년 1월5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2년 1월16일 訪韓한 미야자와 일본 수상과 정상회담
1992년 3월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1992년 6월5일 국가환경선언 선포
1992년 8월14일 回甲
1992년 8월24일 ‘韓中 수교에 관한 특별담화’ 발표
1992년 8월27일 세라노 과테말라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2년 9월18일 중립선거관리내각 구성 결단과 관련한 청와대 대변인 발표
1992년 9월20일~25일 유엔 방문
1992년 9월21일 브룬트란트 노르웨이 총리와 정상회담
1992년 9월22일 유엔총회 연설: ‘평화와 번영의 21세기를 향하여’
1992년 9월24일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 아시아협회 초청 연설: ‘새로운 세계질서와 韓美 동반관계’
1992년 9월27일~30일 중국 방문
1992년 9월28일 楊尙昆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1992년 9월29일 李鵬 중국 총리 내외 접견, 江澤民 중국 黨 총서기 면담
1992년 10월9일 개각 (국무총리 玄勝鍾, 내무 白光鉉, 법무 李正雨, 공보처 柳赫仁, 정무1 金東益), 공정선거관리를 위한 중립내각 출범에 즈음한 대통령 담화문 발표
1993년 2월25일 대통령 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