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개성지역 기행문
석산 김영준
2008년 02월 14일 목요일 06시10분에 임진각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만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새벽 바람이 쌀쌀하게 불어 5분을 밖에 서 있을 수가 없어 차안에서 히터를 틀어야 했다.
하나 둘씩 차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06시30분 임진강역에 집결하기 위해 역앞으로 갔다.
현대아산 셔틀버스가 관광객을 도라산역 남측 C.I.Q.(출입국관리사무소)까지 실어나른다.
이곳에서는 남한, 북한이라는 말대신 남측,북측이라고 해야 한다. 호칭도 동무라고 한다.
07:00 부터 08:30 까지 남측에서 발권 및 출경수속을 마치고 북측 C.I.Q.에서 입경수속을 마쳐야 한다.
휴대폰과 필림카메라, 망원경, 비디오카메라는 소지할 수 없다. 디지탈 카메라만 허용되는데 원거리 촬영용
줌 카메라는 안된다. 사용할 돈은 미화 뿐.(남측 C.I.Q.나 북측 C.I.Q.에 우리은행 직원들이 나와서 환전해준다.)
북측 C.I.Q.수속을 마치고 버스 타기전에 잠깐 바라본 벌판의 그리 멀지않는 곳에 2층건물이 한 채 있는데
김일성 초상화와 그의 찬양문구 및 조선 로동당 만세라는 프랑카드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버스에 오르자 버스기사가 잠깐 주의 말을 한다.
북측안내원이 3명 타는데 2명은 운전석 뒤편 1명은 맨 뒤에 탄다고 한다. 앞의 2명은 버스가 지날 때마다
지역 설명하는 안내자이고 맨 뒷자석 1명은 관광객들이 차창 밖의 사진촬영을 감시하는 역활을 한다고 한다.
차가 이동하는 동안 버스내에서의 사진촬영은 엄격히 금하고 있으나 차가 정차하는 관람지역에서는 사진촬영이
허용된다. 그러나 주민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가옥이나 주민들 촬영은 안된다.
북측 C.I.Q.에서 08시 30분 박연폭포를 향하여 드디어 출발했다. 관광인원은 모두 330명이었다(버스 11대).
난생 처음으로 바라 본 북녁 땅, 그러나 곧 실망하고 말았다.전후좌우를 둘러 보아도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
식량난 해결을 위해 조금씩 개간하는 산과 들의 흔적이 보인다. 돌맹이를 한쪽에 쌓아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 생각과는 달리 북측 안내원은 곧잘 서울 말씨도 섞어 사용했으며 정치적 및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민감한 질문 외에는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개성외곽을 지나 버스가 달리자 안내원이 통일고속도로라고 자랑(?)하는데 2차선으로(차선이없다) 남측의
지방도로보다 훨씬 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개성시내의 전경 또한 남측의 면소재지 정도라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지나는 동안 지역 이름은 알 수 없으나 황페한 산과 들 그리고 여러 가구가 사는 길다란 집과 붕어빵 같은
단돋주택들... 집의 채색은 아예 없고 마을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마을 어구에 군인 정복을 한 병사가 장승처럼 혼자 서서 버스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그랬고 사람이 다녀야 할 길에도 정복 군인이 서서 멀리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논(畓)은 단 한 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박연지역으로 접어들자 산에 소나무와 잦나무가 몇그루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목적지에 거의 근접해서야
나무가 많은 산으로 접어들었다.
09시35분에 도착한 곳은 북한 첫번째 관광지인 박연폭포였다.
09시40분부터 11시 10분까지 박연폭포와 대흥산성 그리고 관음사를 돌아 볼 수 있다.
주차장에서 100 여m 올라가자 넓다란 콘크리트 벽을 쌓고 박연폭포를 찬양하는 글이 붉은 글씨로 적어 놓았다.
북한에서의 첫 사진을 찍었다. 50여m 올라가자 금강산 구룡폭포와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삼대폭포로 일컬어지는 박연폭포가 펼쳐졌으나 아쉽게도 겨울이라 폭포는 꽁꽁 얼어 그 형상만 보여주고 있었다.
저토록 꽁꽁 얼었는데도 그 위용이 엄청난데 봄이 되어 폭포가 풀리면 가히 송도삼절(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이라고 찬양할만 하리라. 폭포아래 고소담도 꽁꽁 얼었다. 폭포 서쪽 용바위도 잠을자고 동쪽의 범사정(정자)만이
폭포가 긴 잠에서 깨어나기를 쓸쓸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범사정 아래 판매대를 임시로 만들어 놓고 판매양들이 커피와 마른 산채 등을 진열하고 관광객을 맞았다.
처음 가까이서 대하는 북한 민간여성이었다. 남남북녀라드니 정말 예쁘구나 생각했다.
범사정을 올라 폭포를 바라보며 산등성이로 100여 m 지그재그로 오르자 대흥산성의 북문이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우리를 맞았다. 북문 위 누각으로 올라가 성벽을 바라보니 옛 장군의 위엄이 서린다.
누각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 박연(폭포 위 못)을 바라보니 박진사와 용녀의 사랑이 꽁꽁 언 얼음속에서 꽃으로
피어 나는 듯 하다. 누각 아래로 내려가니 그곳에서도 판매대가 설치되어 있고 붉은 상의 정장을 한 판매양
아가씨가 미소 띄우며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관광객들과 곧잘 사진 촬영도 하였다. 커피 한 잔을 1 달러에 사서
마셨다. 여기서부터 관음사까지는 860m 라고 팻말이 서 있었다. 바위마다 한자로 글을 새겨놓았지만 가까이
가지않으면 읽을 수가 없다. 커다란 바위에 붉은 글씨로 김일성 김정일 부자 찬양 문구와 조선 로동당 만세라는
글귀가 군데 군데 한글로 크게 쓰여 있다.
관음사는 천마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만 절이었다. 스님들이 참선하는 건물이 초라하게 관광객을
먼저 반긴다. 그 건물 뒤로 대흥전 법당이 자리하고 그 앞에 유적 540호 관음사 칠층탑이 서 있었다.
법당안에는 민간복장에 붉은 천을 양어깨에 걸치고 머리가 긴 스님이 앉아 있었다. 정말 스님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남한에서 보아 온 스님들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북측 안내원에게 참선방에서 스님들이 기거 하느냐고 물었더니 스님 한 분이 이 절에 계시며 절에서 좀 떨어져
조그맣게 지어진 집에서 생활한다고 했다.
관음사에서 약 1 km 올라가면 좀 더 큰 절인 대흥사가 있는데 그 곳은 관광이 허용되지 않았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10시 40분. 출발 시간이 약 30분이 남았지만 짜여진 시간 계획대로 버스가 움직이게 되어
있어 기다려야 했다. 날씨가 추워 거의 모두 버스 안에서 기다리고 몇몇 관광객들만이 북측 안내원들과 담소
하고 있었다. 개울가를 따라 내려가며 주변을 살피는데 정복을 한 군인이 붉은 삼각 깃발을 흔들며 삐 하고
호각을 불며 올라가라고 제지한다. 말은 한 마디도 안한다.
나도 북측 안내원들과 얘기하는 곳으로 가서 합류했다.
북측 안내원이 관광객에게 숭례문 화재 범인 잡았는지와 그 화재배경을 묻고 있었다.
주차장 한 쪽에 현대 아산에서 판매점을 운영하기 위해 건물을 샌드위치 판넬로 지었다는데 아직 빈 건물이었다.
현대아산에서 운영하려고 지은건지 아니면 북측에 지어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11시10분이 되자 버스는 정확하게 출발해서 점심식사를 위해 개성시내에 있는 통일관으로 향했다.
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갈 때와 똑 같이 마을주민은 볼 수 없었고 정복차림의 장승처럼 서 있는 군인
한 사람뿐이었다.
버스가 개성시내로 들어서자 길가 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거의 다 검정색 옷이었으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많이 눈에 띄였다. 차가 없는 시내, 신호등은 볼 수가 없고 길 복판에 하늘색 옷차림을 한
교통순경(?)이 하는 수신호가 전부였다. 3시간 반 동안 머물면서 개성시내에서 본 자동차는 겨우 2대 뿐
갤로퍼 비슷한 자동차와 짚차가 전부였다.
개성시내 하면 북한에서도 몇째 안가는 도시로 알고 있던 나는 우리나라의 시골 면소재지 정도에 불과함에
또 한번 놀랬다. 시내 한 복판에 이르자 북측 안내원이 개성의 남대문이라고 소개한 곳을 바라보니
며칠 전 불타버린 우리의 숭례문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점심 식사를 하려는 통일관이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없어 1호차 ~ 4호차는 한옥이 줄비한 민속여관으로 가고 5호 차 ~ 11호 차는 통일관으로 향했다.
나는 10호 차에 타고 있었다. 남대문을 바라보며 우회전하자 바로 통일관이 보였고 길 끝 동산에 김일성동상이
한 눈에 들어 왔다.
통일관 안으로 들어가니 둥그런 탁자에 점심식사를 준비해 놓았는데 한 사람씩 누런 놋쇠그릇에 담긴
11첩 반상이었다. 밥(쌀 + 조), 국(닭국), 김치, 묵무침, 도라지무침, 오이무침, 숙주나물, 돼지고기볶음, 생선튀김,
달걀, 새우튀김, 김(청태), 약밥에 고려인삼주 한 잔이 가지런히 삼각형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옆 판매점에서 들쭉술, 고려인삼주 등을 한 병에 12달러 주고 사와서 마시기도 했다.
우리팀도 백두산 술을 한 병 사와 반주로 나눠 마셨다.
서빙 안내양들이 모두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상냥하고 아름다웠다. 식사가 끝나고 안내양 아가씨에게 촬영
요청을 했더니 쾌히 승낙하며 옆에 와 선다. 자연 스럽다. 이 순간만은 내가 남한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판매점에 가서 48달러 주고 들쭉술 4병을 샀다. 버스에 오르려 하자 기사분이 술병을 옆으로 두지말고 반드시
세워두어야 한다고 일러준다. 10병중 5~6병은 술이 샌다고 한다. 병마개 조이는 기술이 아직 낮다고 한다.
밖에 나와서 남대문을 촬영하려고 내려가자 군인이 붉은 기를 들고 저으며 삐 하고 호각을 불었다.
내려오지말라는 것이다. 저 멀리에서 개성시민들이 우릴 쳐다보고 있고 그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으나
대화는 엄격히 차단되고 있었다.
통일관 전면을 촬영하려 하자 그것마저 제지당했다. 건물 옆은 괜찮다고 했다. 나와 있던 일행과 사진을 찍으려
개성 시내 쪽으로 서자 촬영하면 안된다고 북측 안내원이 저지한다. 나는 그 북측 안내원에게 김일성 동상 쪽은
괜찮느냐고 손가락으로 동상을 가르켰더니 북측 안내원이 눈을 부라리며 "김일성이라 부르면 안됩니다!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이라 하십시오! 또 손가락질하면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13시까지 중식을 마치고 이동하여 13시10분~13시40분까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위패와 초상화가 모셔진
숭양서원을 관광했다. 내려 오는 도중 담너머를 슬쩍 넘겨 보았더니 6~7,8세 되는 어린아이들 6명이 웅크리고
놀다 쳐다보는데 눈망울만 둥그렇다. 얼른 디카 셔터를 누르고 돌아서는데 북측 안내원에게 들키고 말았다.
디카를 뺏어 촬영한 사진을 보더니 규정된 이외의 사진을 찍으면 안된단다. 어차피 돌아 갈 때 디카 검열을 받는데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북측안내원에게 사진을 한 장 한장 보여주면서 지울 것을 물었더니 무려 23장이나 되었다.
다행히 올 때 내가 탔던 버스에 오른 북측안내원(이름을 밝힐 수 없다)이어서 잘 무마되었다.
숭양서원 관광을 마치고 선죽교로 이동했다. 13시50분~14:20 까지 선죽교와 그 맞은 편에 있는 표충비를
관람했다. 다리의 길이는 매우 짧았지만 포은 정몽주 선생께서 이방원이 사주한 자객 조은규에게 살해됐던
곳으로 그 후손이 선조가 피흘린 곳을 밟고 다니게 할 수 없다 하여 다리난간을 만들어 봉쇄하고 바로 옆에다 돌다리를
새로 만들었다 한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천이며 후일 후손들이 풍덕군에서 이장하려고
상여를 운구하던 중에 명정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곳을 택해 묘를 쓰니 그곳이 바로 경기도 용인시 묘현면 능원리이다.
확성기를 든 안내양의 선죽교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안내양을 따라 우르르 표충비가 있는 곳으로 가자
선죽교에서 비로서 사진을 촬영할 수가 있었다.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표충비(表忠碑)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비석으로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의 충절을 높이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비각속에는 두개의 비석이 있는데 비석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것은 조선시대 1740년에 영조가,
오른쪽에 있는 것은 1872년 고종이 각각 세웠다.
안내양의 일설에 의하면 비석을 받히고 있는 거북의 코를 비빈 손으로 자기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자
여성들이 저마다 그 행동을 하느라 거북의 코가 번질번질 해졌다.
다음은 고려박물관으로 이동하여 14시30~15시 40분까지 관광과 쇼핑을 하였다. 고려박물관은 고적 제 23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원래 고려성균관이었으나 지금은 고려시대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박물관을 들어서자 좌우 양쪽에 1200 년이 넘는 은행나무기 버티고 서 있어 고려의 옛 영화를 말해주는 듯 하였다.
전면에 명륜당이 말없이 반겨주고 그 한 옆으로 느티나무 몇 그루가 고려 유생들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장정 네 사람이 팔을 둘러야 할정도로 아름드리 나무들이다. 명륜당 좌측으로 돌아서자 고려 유물 전시관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을 죽 둘러 보고 나왔으나 안타깝게도 유물들의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판매점을 둘러보니 갖가지 기념품들을 파는 아가씨들이 상냥하게 맞이 한다.
마른 산채나물이나 살까 했지만 남측 입국시 검역을 필하여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나 아리랑 소주
2홉들이 2병만 샀다. 박연폭포를 제외한 모든 관광은 개성시내에서 이루어졌다.
15시50분 고려 박물관을 떠나 개성공업지구를 차로 빙빙 돌며 둘러보고 16시30분에 북측 C.I.Q.에 도착해 출경
수속을 밟았다. 처음 들어 올 때와는 달리 출경 수속이 지연되었다. 북측 공안원들이 디지털 카메라를 일일히
검사하기 때문이었다. 규정된 이외의 사진을 촬영했을 때는 10달러에서 100달라까지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17시20분부터 입경 수속을 마치고 도라산 역을 떠나 임진각으로 돌아 왔다. 분명 나는 타임머쉰을 타고 5~60년
전으로 돌아갔다 온 느낌이다. 정말 우리는 지금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첫댓글 빡빡하게 적혀진 기행문속에`~즐거웠던 모습이 떠오릅니다....북한은 지연이 어린시절을 연상케 할정도의 시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후 좋은 델 다녀오셨네요좋은 구경 하셨으리라 믿어요 사진방에도 사진 오려주심 못가시는분 눈팅이라도 하지요^^
작품 사진방에 올렸군요. 자리를 잘못 잡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