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국제심포지움 강연원고(발표: 데이나 로버트 교수)입니다.
------------------------------------------------------------------------------------------------------------------
세계 기독교 시대의 지구촌 선교: 하나님 나라에서 나누는 우정
데이나 로버트 보스턴대학교 교수
번역: 새문안교회 학술팀
* 이 글은 새문안교회(이상학 목사)가 주최한 제14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2023. 5. 27-28)에서 발표된 데이나 로버트(Dana L. Robert) 교수의 강연 원고이다. 심포지엄에서는 총 세 차례의 강연이 진행되었고, 이 글은 두 번째 강연 원고이다.-편집자
서론
이번 언더우드 심포지엄에서 세 강연의 주제는 세계 기독교 시대의 지구촌 선교이다.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선교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을 때 세계 기독교인의 80% 이상은 유럽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완전히 다른 국면에 진입해 있다. 기독교는 현재 세계적인 종교로서 여러 대륙에 거의 골고루 흩어져 있지만 아프리카 대륙에 가장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있다.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부분은 대략 남한 인구의 1/3이다. 기독교는 모든 대륙에서 깊은 문화적 뿌리를 내린 전 세계적인 신앙이다.
만약 언더우드가 현재 살아있다면 선교사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언더우드 시절의 선교적 실천들은 다문화적이며 세계적인 종교가 된 현재의 기독교 시대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나는 이번 강연에서 과거와 현재의 기독교 선교에서 중요한 세 가지 기초적인 실천들을 탐색하기 위해 1908년 출간된 언더우드의 책 『한국의 소명』을 시금석으로 사용한다. 첫 번째 강연은 전 세계를 향해 경계를 넘어선다는 의미의 “최전방(frontiers)”에 관해서이다. 두 번째 강연은 선교에서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인 “우정(friendship)”의 중요성을 다룬다. 세 번째 강연은 선교와 기독교 공동체와의 관계, 즉 “교제(fellowship)”를 성찰한다. 최전방, 우정, 교제라는 용어 각각은 성서적, 역사적, 신학적 토대를 지닌 선교적 실천들을 나타낸다. 언더우드가 선교사로서 사역을 할 때 실천적인 원동력이 된 세 가지, 즉 최전방, 우정, 교제는 세계적 종교로 자리잡은 오늘날의 기독교 시대에도 여전히 적실성이 있다.
1. 언더우드가 『한국의 소명』에서 설명한 관계의 네트워크
나는 연구하면서 참고했던 연례 선교 보고서나, 공식적 통계, 신학 성명서, 학회지 등에서 기독교적 실천에 관하여 경계를 넘어서는 관계의 형성이 있었다고 주장했다.1 결코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문화를 넘어서는 관계 형성은 존재했다. 그런 관계들은 다문화적이며 세계적인 종교로서 갖는 기독교의 진정성과 증언을 위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담고 있는 언더우드의 책 『한국의 소명』(The Call of Korea, 1908)에는 “한글 성경 번역위원회”라고 명명된 사진이 있는데, 이것은 언더우드의 수십 년의 사역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활동으로, 1910년까지 성경 전체를 한국어로 번역한 일이었고, 사진에서 번역위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언더우드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면밀하게 살펴보면 문화를 넘어서는 관계 형성이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뒷줄에 한복을 입은 세 한국인들은 문경호, 김명준, 정동명이다. 김명준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으며 손을 허리에 올리고 매우 태평스럽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다. 한편 정동명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앞줄에는 레이놀즈 목사, 의장 언더우드 목사, 게일 목사, 서기 조지 허버 존스 목사 등 네 명의 선교사들이 앉아 있다. 언더우드는 펼쳐진 책 위로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이고 있는데 이 책은 아마도 한국어로 인쇄된 신약성경일 것이다. 이들은 탁자를 덮은 고상한 비단천과 아름다운 한국적인 병풍을 배경으로 자세를 취하고 있다.
2023년의 시점에서, 이 사진에 관해 한국과 미국 사이의 권력 관계를 포함한 몇몇 질문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국인의 정서로 바라본 이 사진은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선교사 가부장주의를 질문할 수 있다. 왜 한국인은 서 있고 서양 선교사는 앉아 있는가? 미국인의 학위명은 언급되어 있지만 언더우드가 보통 “현지인으로 구성된 조수”라고 명명했던 한국인들에 대한 설명은 왜 없는가?2 그럼에도 이 사진은 본질적으로 다문화적이며 초교파적인 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위해 번역위원회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번역위원들은 도중에 건강이 나빠져 사망하여 다른 이들로 대체되기도 했다. 이 특별한 사진 속 인물들은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목적을 가졌던 북미와 한국의 헌신적인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작은 연합을 나타낸다. 신약 번역 작업을 매일 진행하여 7년 반이 걸렸고 1904년 번역 완료 후 개정을 거쳐 1906년 최종본으로 인쇄되었다.3 그 후, 언더우드는 건강 회복을 위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구약 번역을 마치기 위하여 레이놀즈 목사와 이승두, 김정삼은 함께 전주로 갔고 일상적으로 과중한 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2년 동안 거의 매일 작업하였다.
언더우드가 쓴 『한국의 소명』의 목차는 모두 사람들에 관한 내용임을 알려준다. 책의 앞부분에서 언더우드는 한국인들의 삶을 기술하였고, 다음으로 선교사와 이들의 활동에 관하여 썼다. 한국의 관습, 통치체제, 조직에 관한 기술 및 기독교적 진보에 관한 낙관적 이야기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정신 안에서 서로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개개인과 가족들의 변화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언더우드는 남녀 사이의 변화된 관계를 복음에 비추어 썼다. 언더우드는 부유했지만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김씨를 방문하였는데 김씨 자신의 방은 유리창과 같은 그 당시 최고의 사치품들로 갖춰져 있었다.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김씨의 부인을 만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연로한 할머니의 심방을 위해 언더우드를 그 시절 안주인(부인)의 거처인 내당 안으로 모셨다. 내당 안으로 들어서자 언더우드는 진흙 바닥, 지저분한 거적, 연기가 낀 것 같은 창호지문 등 여성의 방(내당)은 김씨의 현대적이고 깨끗한 방과는 확연히 대조적임을 발견했다. 그 후 12년이 지나 언더우드는 이미 기독교인이 된 김씨 가족을 다시 방문하였다. 이전과는 달리 언더우드는 가족 모두를 만날 수 있었고 가족 모두 함께 그에게 인사하였다. 언더우드는 김씨가 아내와 어머니, 여자아이들을 고려하여 더러웠던 내당에 유리창과 기름칠한 바닥, 멋진 조명등을 설치하였음을 발견하였다. 반면에 김씨 자신의 방은 사치품으로 채워졌던 과거에 비해 훨씬 수수해졌다. 언더우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주목하였다. 무엇이 변화되었는가? 가족들은 이제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로 본 것이었다.4
언더우드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한 가지 관계는 한국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성 의료 종사자인 애니 엘러스와 관련이 있다. 엘러스를 기억하고 싶은 이유는, 그녀가 내가 봉직하고 있는 보스턴대학 의대생이었고, 이 대학에서 한국 여성들과 간호사 훈련의 중요한 관계가 시작된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5 엘러스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가 한국에 도착한 지 2년 후인 1886년 7월 3일 한국에 들어왔다. 간호사이자 의대 학생인 엘러스는 한국에 도착한 지 한 달 후에 명성황후(민비)를 만나고 그 후 민비의 주치의로서 선교에 합류하였다. 고종과 민비 사이의 친밀함은 일부 초기 선교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첫 개신교 선교사들이 도착하였을 때 여전히 한국에서 기독교는 불법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에 기독교를 알리고자 하는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왕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본질적으로 중요했다. 엘러스는 왕실과 빈번하게 가진 비공식적인 대화를 기술하였는데 왕실이 자신과 영어로 대화하며 연습하는 것을 즐겼다고도 하였다. 고종과 민비는 1887년 엘러스가 선교사 교사와 약혼한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 민비는 1888년 1월 엘러스에게 정경부인의 관직을 제수(除授)하였고 엘러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왕비 폐하는 유능한 여성이었다. … 자애로우며 친절한 왕은 왕비가 국정을 펼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내가 있는 동안 중국으로부터 온 사신이 들어왔다. 사신이 가져온 쪽지를 왕이 전달받고 정독할 때 왕비가 왕의 팔을 살짝 건드리자 왕이 말하기 시작하였으나. … 직접적인 사항은 왕비가 지시하였다. 왕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 상황을 묵인하였다.”6
민비는 한국을 개방하여 서양 나라들과의 수교를 찬성하고 근대화를 주장한 개혁자였다. 민비의 조카는 최초로 한국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으로 갔다. 민비는 정치, 종교, 여성교육, 그리고 그 외 다른 중요한 주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언더우드는 엘러스가 민비로부터 “많은 애정의 표시를 받았다”고 언급하였다.7 또한 민비는 여러 여성 선교사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고 1886년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이 설립한 한국의 첫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승인하고 후원하였다.8 1887년에 엘러스는 병원에서 지내던 가난한 여자 고아들을 데리고 와서 왕비의 승인을 받아 여학교인 정신학당을 설립하였다.9 이후 왕비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1889년에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결혼한 릴리어스 호튼에게 엘러스는 민비의 주치의를 물려 주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 설립에서 여성교육과 근대 의술에 대한 왕비의 후원은 개인적인 관계의 중요성을 예증한다.
언더우드의 책 『한국의 소명』에서 성경 번역위원회의 사진, 김씨 가족의 변화된 남녀관계, 엘러스에 대한 민비의 긍정적인 배려 등에서 나타난 인간관계 네트워크는 19세기 말 한국에서 개신교 발흥의 기저가 되는 예시들이다. 복음의 전파는 경계를 넘어서는 관계를 장려하였고 그러한 관계 형성은 사회적 변혁을 촉발하였다. 이와 반대되는 측면도 사실로서 즉, 언더우드가 언급한 복음의 변혁은 국적, 민족, 교단, 사회적 계급, 성별의 경계를 넘어서는 기독교적 우정에 의존했던 것이다.
2. 성서적 성육신을 실천하는 우정
이번 장에서 나는 언더우드의 책에서 보았던 것처럼 기독교적 변혁을 바탕으로 한 관계들은 복음의 가치에 기초한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 외에도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들을 모형으로 이루어진 기독교적 우정은 성육신에 기초한 성서적 실천이다. 우정은 많은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우정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토대로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는지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해석과는 차이를 보인다. 기독교 윤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가족 같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증언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는 돌봄의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위대한 중국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는 자신의 『우정론』에서 우정이 지닌 신성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를 돕도록 상호 간의 우정을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만약 이 세상에서 우정이 사라진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10
1) 예수님과 친구 되기: 요한복음에서의 관계성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을 따라가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우정에 연결하셨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윌러드 스와틀리는 성경 전체에서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들의 용례들 중 10% 이상이 요한복음과 요한1-3서에 실려 있음에 주목한다. 요한복음은 관계적인 복음이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자들 사이의 교제의 일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며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종종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로 명명되는 요한복음의 이 중요한 구절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연합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관계를 결속시키고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스탠 스크레슬렛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다른 제자들과의 우정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한 요한복음의 독특함에 주목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 예수님에게 소개된다. 스크레슬렛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타인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열 때 일어난다. 이미 기독교적 관계 안에 있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인격적인 관계로 자신의 신앙 경험을 공유한다.”11 요한복음은 대위임령, 대계명과 더불어 선교적 존재 방식의 새 계명을 추가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요한은 기록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그러므로 기독교적 우정의 근원적 예시는 제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신 예수님 자신의 선교적인 삶이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시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새 계명을 확장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예수님의 마지막 성찰은 사랑, 우정, 희생, 그리고 공동체의 상호적 관계성을 보여주셨다.
특히 힘든 고난의 시기에 예수님과 친구가 되어 함께 동행하는 것은 기독교인을 영적으로 더 강건하게 한다. 그러나 존 웨슬리가 지적하였듯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함께 가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예수님이 나의 친구라면, 말 그대로 나는 예수님을 포함한 친구 공동체 안의 일원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손을 잡고 계시다면 나도 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고 내가 예수님과 친구라는 사실로 예수님과 손을 잡고 있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도 나 역시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의 이야기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할 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가 피하고자 하는 이웃들에게로 인도하시며, 또한 우리가 보통 찾지 않는 다른 친구들을 만나도록 인도하신다는 점을 보여준다. 성경과 역사가 보여주듯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은 역사 속 예수의 제자들이 미래 세대와 연결되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적 우정은 사사로운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선교적 훈련이다! 다른 사람들과 맺는 우정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기를 고대하는 신앙의 사람들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표현한다.
2) 우정에 대한 기독교적 재정의
고대부터 현재까지 우정의 의미는 철학자, 신학자, 저술가, 그리고 시인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중국의 현인 공자는 우정을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상호적 관계이며 사회를 단결시키는 신성한 유대 중의 하나로 여겼다.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키케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우정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랑하는 자를 향한 호의로 정의하면서 “동등한 정도에 따라 상호적으로 형성되는 관계”라고 여겼다.12 그리스 철학자인 플루타르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참된 우정은 무엇보다 중요한 다음 세 가지, 즉 선한 것으로서 덕을, 기쁜 것으로서 친밀함을, 필수적인 것으로서 유용성을 추구한다.”13 이와 같이 우정에 관한 영향력 있고 고전적인 정의는 다음의 내용과 일치한다. 즉, 우정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우정은 일방적이기보다는 상호적인 것이고 개개인을 향상시키며 질서정연한 사회를 지탱하도록 고무시킨다.
그러나 기독교의 도래는 우정에 대한 정의와 절박함으로 확장되었다. 예로 들었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우정에 대한 고전적 이해를 하는데 새로운 차원의 중요성을 추가하였다. 즉,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상호적인 사랑이 서로를 향한 우정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우정을 귀족적인 남성 고유의 가치관을 기르는 장치가 아닌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상한 이상과 초월적 관념으로 생각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우정에 관한 기독교적 관념은 공동체의 경계를 확장하였다. 기독교 공동체는 남성 특권 엘리트 외에도 여성, 노예, 노동자 등을 포함하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상징하는 ‘카리타스’(caritas)라는 개념은 우정의 가능성이 확대되어 잠재적으로 전 세계를 향한 사랑의 의미를 포함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반영할 때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영국의 신학자 제레미 테일러는 1657년에 저술한 우정에 관한 대중적인 논문에서 심지어 불완전한 인간의 우정조차도 신성한 우정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우정을 형성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14 테일러의 정신에 영향을 받은 나도 기독교인들이 많은 친구를 만들어야 하는 책임을 대대에 걸쳐 느껴왔었다고 주장한다. 우정에 관한 기독교적 이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로 언급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보듯이 자아를 초월한 상호적 관계로 형성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테일러는 남성과 여성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여겨 여성은 남성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그럴 능력이 안 된다고 여기는 시대에서 테일러의 생각은 혁명적이었다. 기독교적 우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는 물론이고 인간적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3. 우정, 선교 그리고 세계 기독교
세계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경계를 넘어선 긍정적인 기독교적 관계이다. 프란시스 교황은 자신의 2020년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에서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에 관한 우정의 윤리적 필요성을 상세하게 말한다. 프란시스 교황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자신과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어떻게 먼 거리를 가서 문화와 종교적인 경계를 넘어섰는지에 관한 논제를 다룬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돌보도록 하신다. 기독교적 우정의 영성과 규율은 사람을 사물처럼 취급하는 세상 세력에 반대한다. 노예제도, 인신매매, 전쟁, 인종차별, 종교적 박해는 모두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형제와 자매임을 부정한다.15 프란시스 교황은 길에서 상처입은 낯선 자를 돕기 위해 멈추었던 선한 사마리인 비유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이 비유는 분명하고 직설적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우리가 형제, 자매와 맺는 관계를 통해 점차적으로 드러나는 우리 자아를 경험하면서 겪게 되는 내적인 갈등을 환기시켜 준다.”16 프란시스 교황은 이웃은 경계에 의해 나뉘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기독교 시대에서 경계를 넘어서는 우정에 관한 교황의 강조는 중요한 통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 세계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반드시 자신의 문화, 인종, 또는 정치적 신념들을 공유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안전한 지대를 벗어나 우정의 힘으로 모르는 타인에게 우리 자신을 개방하더라도 진지한 마음으로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위험과 취약함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적 우정의 관점으로 되돌아가서 초기 한국 선교를 다시 고찰한다면, 새로운 차원의 믿음을 증거하는 한국 선교를 보게 될 것이다. 선교 역사가로서 여러 해 동안 진행한 나의 연구는 경계를 넘어서는 대담한 기독교적 우정들을 조사하면서 위험한 선교 상황들이 초래하는 친구들의 큰 희생을 목격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분열의 세계에는 “값싼” 우정이라 칭할 수 있는 것조차도 전혀 없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처럼 기독교적 우정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희생이 따를 수도 있다. 정치와 인종적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독교적 우정을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증언이며 복음의 온전성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우정에 관한 다음의 두 이야기는 힘든 냉전의 시기였던 1970년대부터 시작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나의 남편인 네덜란드 개혁교회 선교사 이누스 다닐과 짐바브웨의 아프리카 토착교회의 주교 매튜 포리지와 관련된다. 두 번째는 1970년대에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과 관련된 이야기로 내가 만났던 몇 명도 포함된다. 각각의 이야기는 겸손과 희생, 그리고 민족과 인종적 경계를 넘어 모르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심오한 증언을 포함한다. 이러한 많은 이야기들은 서로 다투고 잘못을 범하기 쉬운 인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서사적인 신학을 규정한다.
1) 내전 동안 경험한 인종 간의 우정
1965년 11월 11일 로디지아의 총리 이안 스미스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400만 명의 인구 중 흑인들이 대다수인 나라에서 22만 백인들의 자치 정부를 발표하였다. 그 결과로 초래된 15년간의 독립 전쟁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극심한 갈등, 부족 간의 불화, 정치적 신념이 다른 아프리카인들의 분쟁으로 이어졌다.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로디지아 내의 여러 다른 게릴라 분파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흑인 게릴라 전사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기 위하여 전통적인 아프리카 종교의 영적 매개자들을 색출하였다. 그들은 로디지아 정부를 위해 싸우는 아프리카인의 친척들과 백인 정권에 협력하는 흑인 기독교인을 표적으로 삼았다. 전 세계로부터의 제재가 스미스 정부를 고립시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로디지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1979년에 이 모든 갈등과 전쟁은 끝났고 1980년 다수파가 지배하는 나라 짐바브웨로 되었다.
내전 동안 다양한 인종 간의 관계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양 진영으로부터의 공격을 받았다. 서양인과 토착교회 지도자들 사이의 깊은 우정을 보여준 예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선교사 이누스 다닐과 쇼나족의 주교 매튜 포리지이다. 선교지에서 성장하여 쇼나어에 능통한 다닐은 인종차별에 반대하여 1965년 쇼나 공유지 안으로 들어가 3년을 살면서 결국 쇼나의 전통종교 지도자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해방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도 다닐은 신학연장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여러 시골 지역들을 오갔다.
내전이 한창인 1972년에 다닐과 12명의 아프리카독립교회(AIC) 지도자들은 아프리카 독립교회 회의(Fambidzano yamaKereke avaTema)를 설립하였다. 아프리카 독립교회 회의는 공유지에서 공동 신학 교육과 그에 따른 발전 프로젝트를 펼치기 위해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설립한 100여 개의 교회들을 모았다. 이후 10년에 걸쳐 1만 5000명의 사람들이 쇼나어로 가르치는 강사들이 있는 시골 현장교육 센터들로 다니며 2년 과정의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다닐은 자신의 신학적 확신을 갖고 만난 시골 교회 흑인 지도자들과의 개인적 관계로 인해 백인 민족성에 대한 충성보다는 에큐메니컬 인종 간의 관계에 대하여 더 충성을 갖게 되었다. 다닐은 쇼나 사람들을 자신의 회중으로 생각하였기에 그들에 맞서 무기 드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로디지아 전선당(the Rhodesian Front)의 대령 조지아 하틀리에게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고, 백인의 대의에 대한 반역으로 기소되었으며, 고문으로 악명높은 치쿠루비 감옥에 수감되었다.
신학연장교육을 위해 다닐과 함께 활동했던 아프리카 시골 기독교 지도자들도 비슷하게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은 백인과 협력한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처형한 반(反)-기독교 게릴라들이 진행하는 밤샘 기소 및 여론 조작용 재판을 받았다. 시온 기독교회의 연로한 지도자인 포리지 주교는 교회 지도자이며 아프리카 시골 기독교 지도자들과 가까운 친구였다. 포리지 주교와 아내는 신학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포리지는 전쟁이 악화되면서 아프리카 독립교회의 본부로부터 목숨을 무릅쓰고 자신이 있는 지역의 여러 마을들을 자전거로 오가면서 신학 교재들을 전달하였다.
어느 날 포리지 주교가 집에 오니 8명의 게릴라 전사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포리지가 백인에게 받아 지니고 있던 문서들을 보자고 요구하였다. 게릴라 전사들은 성경 교재들을 읽느라 오후를 보낸 후에 자신들도 그 교재들을 좋아하고, 기독교인이라며 게릴라가 통제하는 지역에 교재들을 배포하는 것을 돕겠다고 밝혔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대단한 위상을 가진 포리지는 게릴라 전사들에게 내 남편을 암살하지 말도록 요청하였다. 어느 날 게릴라들이 한 무리의 백인 차량들을 공격하였는데 내 남편의 차는 통과시켰으나 그 뒤의 차량은 제거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다닐이 그 지역을 지나다가 포리지 주교가 전쟁 중에 그를 보호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어느 날 포리지의 교회 본부 근처 도로에 설치된 폭탄이 터졌고 로디지아 순찰대를 폭파시켰다. 로디지아 세력은 마을을 불태움으로써 대응하였다. 포리지 주교는 자신의 처소로 달려가 그와 아내가 신학훈련을 받고 취득했던 수료증 하나만을 불 속에서 건져 내었다. 로디지아 세력은 포리지 주교를 체포하였고 그와 게릴라들과의 관계를 추궁하며 수 주 동안 고문하였다.
인종 간의 경계를 넘는 우정을 포기하지 않고 시골의 쇼나 마을사람과 성경훈련을 하고 에큐메니컬 협력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다닐과 포리지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의 기독교적 연대는 인종 전쟁 가운데에서 적대적 세력들 사이에 끼였음을 의미하였다. 다닐은 동료 백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였다. 다닐이 짐바브웨 개혁 교회의 설교에서 백인과 흑인의 인종차별 없이 함께하는 예배가 바람직하다고 제안하였을 때 동료 백인들은 예배 도중에 나갔고 로디지아 군 관계자들은 그를 반역으로 고발하였다. 포리지는 자신의 집뿐 아니라 고문으로 건강과 청력을 잃었고 단지 성경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백인과 협력했다는 의심을 받고 게릴라들이 자신의 추종자들을 살해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증언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내하였다.
다른 인종과 문화를 지닌 사람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냉전 민족주의 정치의 일부인 짐바브웨 해방전쟁 동안 그런 친구가 된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을 목숨을 걸고 확증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이야기는 혁명의 상황에서 문화와 인종의 경계를 넘어서는 우정은 가장 위험한 것임을 예증한다. 경계를 넘어 상호 관계를 맺고 인종과 민족의 분열을 인내하며 자신의 친구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통치자와 권력자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다른 문화를 넘어서는 기독교적 상호 관계의 친구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늘 오해받고 비난받는 상황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다른 문화의 사람과 친구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전쟁, 억압, 결핍 같은 상황의 원인이 이방인 혹은 인종적 ‘타인’ 때문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의심하고 혐오하라는 현 정권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2) 상호 문화적 관계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투쟁을 증거하는 기독교적 우정의 역사에서 아주 매력적인 주제는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는 결혼이다. 결혼은 기독교적 우정의 또 다른 이면이다. 17세기 신학자 제레미 테일러는 결혼이 기독교적 우정의 완성된 형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혼으로 갖게 되는 여러 특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인종이나 문화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때때로 양 집단으로부터 추방되는 것을 의미했고 만약 민족이나 국가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면 결혼을 앞둔 사람들은 힘든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은 이 가혹한 현실을 감내하며 자신의 기독교적 증언을 위해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기독교인들 사이의 인종 간 결혼과 다문화 가정에서 자녀의 양육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하나님 나라 가치들을 가시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냉전의 상황에서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의 인종 간 여러 건의 결혼을 포함한 상호 문화적 관계는 민주주의를 위한 한국의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시대를 지킨 양심(More than Witnesses)』이라는 책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한국에서 보낸 시간에 관해 썼다.17 이들이 월요일 저녁마다 친교로 만났던 모임은 친-민주주의 옹호 단체로 바뀌었는데 자신들의 집에서 매주 만나 기도하고 한 주간 수집된 정보를 공유하였다. 놀랍게도 이 선교사들 중 몇몇은 서로 다른 문화의 경계를 넘어 결혼을 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선교사들의 충성은 매우 개인적이었지만 이러한 이들의 충성은 기독교 신앙과 한국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상호작용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 선교사 단체에는 한국 신학자들의 미국인 아내들도 있었다. 페이 문은 하트포드 신학교에서 만난 자신의 남편 스티브[문동환-편집자]와 결혼할 때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페이는 1961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라, 한국으로 이주하여 가정을 꾸리고 정착하였다.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페이는 민주화를 지지하는 선교사 단체에 참여했고, 그 후 1974년 남편은 민중신학을 지지하는 “해직교수들” 중의 한 명으로 해고되어 친-민주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친-민주주의 선교사들의 월요 저녁 모임은 페이를 지지하는 단체가 되었고 페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서울에서 월요 저녁 모임의 일원이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우정과 이해가 나에게 얼마나 필요했는지를 알게 되었다.”18 재판 중인 다른 수감자의 아내들과 함께 페이는 거리 시위에 참여하였고 시위의 재정적인 지원을 위해 보라색 숄을 만들어 팔았다. 그리고 1976년에 페이는 미국장로교(PCUSA) 전국 여전도회에서 한국의 압제에 관하여 증언하였다. 남편이 수감되었던 2년 동안 비밀경찰이 페이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페이는 미국 통신 채널들을 가까스로 이용하여 한국의 억압 내용과 친-민주주의 선교사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몰래 내보내고 시위자들을 돕기 위한 정보를 받았다. 페이는 억압이 심했던 당시 미국으로 피해야 했지만 5년 후 미국장로교(PCUSA)의 지원을 받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미군기지 밖의 한국인 성매매 여성들을 위해 사역하였다.
한국인 김용복과 결혼한 미국인 여성 매리언 김은 1969년에 한국으로 왔다. 한국어를 배운 매리언 김은 그의 남편을 도와 친-민주주의 신학자들의 신학 성명서를 편집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에 매리언은 김관석 목사와 협력하여 친-민주주의 결의문과 인권 침해에 대한 이야기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잔혹 행위들에 관한 주요 보고서를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서양에서 출판하고자 한국 밖으로 몰래 내보냈다. 1979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한국 상황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자 이 인권보고서를 사용할 수 있었다. 매리언을 위한 지원은 선교사들의 월요 저녁 모임의 기도와 교제에서 이루어졌다. 이 모임의 우정으로 매리언은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을 지원할 힘을 얻었다. 1980년 체포되어 심한 구타로 죽을 뻔했던 매리언은 월요 저녁 모임의 도움을 받아 군사정권으로부터 피해 숨어 있었다. 매리언이 요약한 월요 저녁 모임의 동기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우정의 힘이라는 것이다. “이 모임은 인간 정신의 힘과 선함에 대한 나의 믿음을 지키게 해 주었고 우리는 모든 종류의 경계를 넘어 하나의 공동체임을 깨닫도록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한국인들과 연대의 감정을 공유했다.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용감한 행동을 배웠으며 서로 공감하는 행동과 함께 실천하려는 노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개의 가장 큰 계명을 배웠다.”19
감리교 선교사 진 매슈스는 선교사로서 첫 번째 임기를 마친 후에 한국인 아내 인숙과 결혼하였다. 매슈스는 1972년 계엄령 선포 후 정부에 의해 고문을 받았던 한국인들의 친구가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썼다. 5개의 정부 기관들이 매슈스를 감시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자신을 매일 조사하는 중앙정보부원과 결국 친구가 되었다. 매슈스의 옹호가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1975년에 일어났다. 이때 중앙정보부는 8명을 체포하고 이들을 “인민혁명당”의 “주모자”로 기소하였다. 이들은 반역이라는 이유로 끔찍한 고문을 당했으며, 가족들을 보지도 못한 채 사형이 집행되었다. 월요 저녁 모임은 가혹하게 지속된 시련 동안 8명의 무고한 사람들의 아내들을 지원하였다. 남편의 시신을 찾는 아내들을 돕는 월요 저녁 모임 사람들이 전경에 의해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20 한국인들과 연대하고 옹호하였던 시기에 매슈스는 남편과 아들들을 위하여 한국 정부에 맞섰던 여성들이 영적인 감화를 준다는 특별한 점을 발견하였다. 매슈스는 한국에서 41년을 활동한 후 1997년 선교사역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기간 동안 나는 기쁘게 웃었다. 이 암흑기 속에서도 나의 한국인 친구들이 지칠 줄 모르는 유머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쓰라린 눈물을 흘렸다.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깊은 슬픔을 나와 함께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에 대한 갑작스러운 기억들이 압도해 올 때마다 나는 여전히 운다. 하나님께 찬송이 있기를.”21
짐바브웨 내전 동안 이누스 다닐과 매튜 포리지가 보여준 예와 냉전 시대의 인종 간 상호 문화적인 월요 저녁 모임의 예는 문화를 넘어서는 우정이 어떻게 복음의 소망을 증언하는지, 고통과 인간 분열의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지를 보여준다. 인종, 민족, 성별을 넘어서는 우정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형제와 자매로서 우리가 공유하는 평등을 강력하게 증언한다. 이 우정들은 지상의 권력자들이 다스리는 어떤 정권이나 통치보다 더 큰 정의와 평화의 장소인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통치하는 정부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고 넓으며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한다.
결론: 세계 기독교 시대의 우정
지난 2년 동안 내가 총괄해 왔던 북미 선교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 중의 하나는 경계를 넘어서는 관계에 대한 갈망이다.22 정치적 분열, 전쟁, 강제 이주, 기후 위기가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경계를 넘어서는 우정은 기독교 자체의 진정성을 위한 필수적이며 윤리적인 전제조건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은 어려우며 동등하지 않은 권력의 역학 관계를 가지고 오해를 일으킨다. 타인과 우정을 키워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며 “효율적”이지 않다. 그것은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을 따르는 선교를 나타낸다. 언더우드 때의 우정은 복음을 증언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무의식 중에 확산되는 비인간적인 관행에 도전하였다. 세계 기독교 시대는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의 세속적인 사회에서 언더우드 시절과 달리 근대화는 기독교에서 더 이상 매력적인 측면이 아니다. 알맹이가 없는 기관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못한다. 사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 형성되는 관계의 윤리적 요구보다 기관에 초점을 두는 기독교의 정의를 거부한다. 약 10년 전에 대한 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이라는 주제를 통해 위와 같은 사실을 밝혔다.”23 세계적 종교로서 기독교 시대의 선교는 세계가 한 가족이 된다는 것, 그리고 서로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랑받는 존재로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24 선교는 고령자, 외로운 자, 이주자,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자, 잊혀진 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는 제자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제자도는 구체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 기독교 소망을 구현한다.25
제자들이 주님, 구원자,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부활하신 예수님만을 계속 바라보았기에 서로에 대한 신실함이 깊어졌다.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삶은 경계를 넘어 대대로 연결된 관계들이 확장되는 네트워크의 시작이었고 비로소 세계 기독교를 형성하였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 어찌 좋은 친군지! 예수님과 동행하는 선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형성된 우정의 관계로 우리가 부름받았음을 의미한다.
주(註)
1 참고문헌: 선교의 핵심인 우정에 관한 문헌. Dana L. Robert, “Cross-Cultural Friendship in the Creation of Twentieth-Century World Christianity (21세기 세계기독교의 창조에서 문화를 넘어서는 우정),”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35, no.2 (2011): 100-107; “Global Friendship as Incarnational Missional Practice (성육신적 선교적 실천으로서의 세계 우정),”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39, no.4 (October 2015): 180-184; “Scottish Fulfilment Theory and Friendship: Lived Religion at Edinburgh 1910 (스코틀랜드 충족 이론과 우정: 1910년 에딘버러에서의 생활종교),” Scottish Church History 49, no.2 (2020): 63-82; Faithful Friendships: Embracing Diversity in Christian Community (신실한 우정: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다양성의 포용), foreword by Christine Pohl (Grand Rapids: Wm. B. Eerdmans, 2019).
2 Horace G. Underwood, The Call of Korea (한국의 소명), 121.
3 William D. Reynolds, “How We Translated the Bible into Korean (한글 성경 번역 과정),” Union Seminary Magazine 22 (1910-11): 292-303. http://koreanchristianity.cdh.ucla.edu/images/stories/1911_reynolds_translation.pdf
4 Underwood, Call of Korea, 53-54. 사무엘 마펫은 기독교의 전래가 한국에서 남녀관계를 더 긍정적인 관계로 바꾸었다고 회상하였다. 1934년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장로교 개척선교사들이 쓴 회고록에는 선교 시작 이후로 인간관계와 한국 전통적인 지도력의 변화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n.a. The Fiftieth Anniversary Celebration of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June 30-July 3, 1934 (Seoul: Y.M.C.A. Press, 1934). https://nla.gov.au/nla.obj-52873355/view?partId=nla.obj-107572428#page/n3/mode/1up
5 보스턴대학교가 한국 간호학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ttps://sites.bu.edu/koreandiaspora/issues/the-impact-of-boston-university-in-the-history-of-korean-nursing/. 선교사들이 기여한 한국 간호학의 여러 역사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Sung-Deuk Oak, Sources of Nursing History in Korea (projected five volumes), published by the Korean Nurses Association. 애니 엘러스에 관해 다음을 참조하라. Oak, Sources of Nursing History in Korea, Vol. I 1886-1911 (Korean Nurses Association, 2011), 33-52.
6 Ibid., 51. 민비가 지닌 권력과 영향력 때문에 한국을 정복하려는 일본의 압박이 계속되다가 1895년 민비는 일본인 암살자에 의해 시해되었다.
7 Underwood, Call of Korea, 152.
8 메리 스크랜튼도 다른 한국인 여성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예를 들면, 이화학당에서 자신의 개인 비서이자 첫 한국인 교사인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음에 주목하라. 다음을 참조하라. Leighanne Yuh, “Korean Female Education, Social Status, and Early Transitions, 1898 to 1910 (한국여성교육, 사회적 지위, 초기 변화기, 1898년부터 1910년),” Korea Journal vol. 61, no. 4 (winter 2021): 271-305.
9 Ibid., 286. 이 학교는 10년 후 양반 여자아이들의 입학을 허락하였고 나중에 한국의 첫 여성 총리를 배출하였다.
10 다음의 글에서 인용함. Dana L. Robert, Faithful Friendships, 31. 이 강연의 다음 절은 이 책으로부터 수정한 것이다.
11 Stanley H. Skreslet, Picturing Christian WitnessNew Testament Images of Disciples in Mission (기독교적 증언의 모습: 신약적 이미지로 선교하는 제자들) (Grand Rapids: Eerdmans, 2006).
12 Constant J. Mews, “Cicero on Friendship (키케로의 우정론),” in Friendship A History (우정: 하나의 역사), ed. Barbara Caine (London: Routledge, 2009), 66.
13 Dirk Baltzly and Nick Eliopoulos, “The Classical Ideals of Friendship (우정에 관한 고전적인 이상),” in Friendship A History, 43.
14 David Garrioch, “From Christian Friendship to Secular Sentimentality: Enlightenment Re-evaluations (기독교 우정에서 세속적 감성으로: 계몽주의적 재평가),” in Friendship A History, 172.
15 Pope Francis, Fratelli Tutti, paragraph 24,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encyclicals/documents/papa-francesco_20201003_enciclica-fratelli-tutti.html
16 Ibid, paragraph 69.
17 Jim Stentzel, More than Witnesses How a Small Group of Missionaries Aided Korea’s Democratic Revolution (시대를 지킨 양심 -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월요 모임 선교사들의 이야기) (Mequon, WI: Nightengale Press, 2008).
18 More Than Witnesses, 149.
19 More Than Witnesses, 239.
20 매슈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여러 사제들과 선교사들이 팔꿈치를 괴고 장의차 앞에 있는 한 무리의 여성들을 둘러섰다. … 장의차 문이 홱 열렸고 송상진의 아내가 끌려가며 발을 차고 도로 쪽으로 소리를 지를 때 나는 공포 속에 지켜보았다. … 나는 몸이 얼마간 뒤로 밀렸지만 어머니와 딸을 보호하고자 전경들을 뚫고 다시 돌아섰다. 어머니는 손으로 장의차 범퍼를 꼭 잡았지만 건장한 경찰이 전투화로 어머니의 팔을 찼다. 나는 그의 발을 서툴게 잡아 거꾸러뜨렸고 이후 나는 다시 뒤로 밀쳐졌다. 뒤로 밀쳐지면서 나는 경찰이 한 여성 선교사를 잡고서 아주 강하게 내팽개치는 것을 보았다. 이 여성 선교사는 다른 여성에게 부딪혔고 이 둘은 배수로로 굴러떨어졌다. … 그래서 나는 경찰을 뒤에서 붙잡았고 막대하게 흔들었으며 그를 굴러떨어지게 하는 데에 거의 성공하였다. 그는 곤봉을 가지고 나를 붙잡았지만 내가 팔짱을 끼고 아래로 내려보자 뒤로 물러섰다.” More Than Witnesses, 214.
21 More Than Witnesses, 222. 2005년 한국의 민주정부는 사형된 8명이 잘못된 혐의로부터 무죄임을 밝혔다.
22 D. L. Robert, with contributions by D. Benac, B. Carlson and C. Cardoza-Orlandi, J Laxton, W. Gregory, A. Kach, D. Scott. “Missional Collaborations, 2021: A Report from North America (선교적 협력들, 2021: 북미보고서),” in Risto Jukko, ed., A Hundred Years of Mission Cooperation the Impact of the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1921-2021 (100년의 선교협력: 국제 선교협의회(IMC)의 영향) (Geneva: WCC Publications, 2022), 369-412.
23 https://cofswmc.wordpress.com/2012/09/24/past-present-future/
24 Todd M. Johnson and Cindy M. Wu, Our Global FamiliesChristians Em-bracing Common Identity in a Changing World (우리의 지구촌 가족들: 변화하는 세계에서 공동의 정체성 수용하기) (Grand Rapids, Michigan: Baker Academic, 2015).
25 선교를 제자도로 이해하는 아루샤 선교 선언문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ttps://www.oikoumene.org/resources/documents/the-arusha-call-to-discipleship#:~:text=The%20Arusha%20Call%20to%20Discipleship%20The%20World%20Council,traditions%20and%20from%20every%20part%20of%20the%20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