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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항복 조인 - 1945년 9월 2일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성명에 따라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해있는 미 함대 미주리함에서 항복 조인
8월 19일 항복문서와 절차 등 회의를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
일본에게 항복 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마닐라에서 개최했다.
8월 19일 마닐라에 도착한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이 공항에서 군악대의 환영 연주를 듣고
‘내가 들어본 연주 중에 가장 감명 깊은 순간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 1월 26일~1964년 4월 5일)
<위키백과 참조>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미군과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필리핀 식민지의 통치자였으며, 1945년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는 극동군의 지휘관을 지냈다.
또한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역시 그의 관리 대상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 1937년 퇴역하고 필리핀 명예 육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가, 1941년 미국 육군 대장으로 복귀한 후 1944년 미국 육군 원수 계급을 받아 진급하였다.
1945년부터 이듬해 1946년까지 1년간 일본 히로히토(裕仁; 昭和天皇, 1901년 4월 29일~1989년 1월 7일) 천황
대신 일본의 권력을 잡았기에 일본 역사 최초의 외국인 집정관이기도 한 맥아더는 일본에 대한 정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맥아더는 일본인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천황의 “천황은 인간”이라는 발언을 이끌어 낸 것으로도 유명하며, 성서를 대량으로 유포하는 등 종교로써 일본을 순응시키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맥아더는 쇼와 천황(昭和天皇)의 격을 깎기 위해 둘이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키 183cm의 맥아더와 키 165cm의 쇼와 천황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에서 쇼와 천황은 엄청 초라하게 찍혔다.
너무 큰 키 차이로 인해 사진 속에서는 쇼와 천황이 초라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사진상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동작도 대조되는데 쇼와 천황이 차렷 자세로 바짝 긴장하고 서 있는 것과는 대조되게 맥아더는 짝다리를 짚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로 서 있다.
1945년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왼쪽)와 쇼와 천황이 함께 찍은 사진. 이 사진은 일본 국민에게 굴욕감을 주어 큰 충격을 주었다.
문제는 이게 맥아더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상황이 돌아갔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본인이 어떻게 되든 말든 전혀 신경을 안 쓰고 그저 천황의 격을 최대한 깎아서 다시는 천황을 중심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 행동이었을 뿐이었지만 웃기게도 일본인들은 천황의 격을 깎기는커녕 되려 맥아더를 신으로 숭배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이 맥아더의 명의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보낸 팬레터가 엄청났는데 1946년 9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연합국 번역통역반(ATIS)에서 44만 1,161통의 편지 엽서를 읽고 처리했다는 공식 기록이 존재하며
맥아더는 본의 아니게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받아야만 했다.
평소 천황을 최고의 존재로 여겼던 일본인들은, 맥아더가 만든 이 상황을 목격하자 최고 위에 더 최고가 있구나라고 생각해버릴 뿐이었으므로 맥아더는 그야말로 일본인들에게 신으로 숭배되는 지경까지 갔다.
오죽하면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연합군 최고사령부(聯合軍 最高司令部, SCAP;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GHQ; General Headquarters. GHQ–SCAP 동일) 막부(幕府)의 더글러스 맥아더
쇼군(將軍)이라는 별명까지 지어서 불렀다. 이는 일본 신토(神道)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신토 토속신들 중에
맥아더가 포함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맥아더는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근거가 된다고 판단한 신토를 무력화시키고, 신화교육 등을 철저히 금지시켜
전쟁 도발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약간의 역효과가 나타나는데 신토 중에서 맥아더를 숭배하는 신토가 이때 생겨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일본의 항복이 있은 후 일본에 주둔하다가 한국 전쟁을 지휘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군이 대구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인민군들을 남북으로 양분시켰다.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외국인 신분으로 일본군 점령사령부 원수를 지냈다.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일본 대표는 군용기를 흰색으로 바꿔 칠하고 녹십자를 그려 붙인 비행기를 타고
8월 19일 12시 44분 이에시마섬에 착륙했다.
중장 도라시로 가와베와 그 일행이 12명이었다.
미국측 준장 찰스 윌로비가 안내를 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과 회의를 하기 위하여 미군 비행기로 갈아타고 마닐라로 갔다.
일본 대표들은 갖고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파인애풀 주스를 마셨다.
식사 후 미국 담배와 군표(군인들이 사용하는 돈)를 권했으나 거절했다
준장 윌로비의 안내를 받아 작은 키의 가와베 중장이 키 큰 미군과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마닐라 회의광경, 19시간 만에 떠나는 일본 대표단의 가방 속에는 항복문서와 절차,
맥아더 장군이 일본 총독이 된다는 문서가 담겨저 있다.
1945년 8월 30일, 연합군 최고사령부(聯合軍 最高司令部, SCAP;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GHQ; General Headquarters. GHQ–SCAP 동일)의 사령관에 새로 임명된 더글러스 맥아더가
요코하마시에 임시 사령부를 차렸다.
9월 2일,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천황 대리인단은 도쿄 만의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서에 정식으로 조인했다.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해있는 미 함대 미주리함에서 항복식이 거행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해있는 미 함대 미주리함에서 항복 조인식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해있는 미 함대 미주리함에서 항복식이 거행되었다.
히로히토(裕仁; 昭和天皇, 1901년 4월 29일~1989년 1월 7일)천황을 살려준다는 조건 하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에 서명했다.
맥아더장군의 서명
일본 마지막 외무대신 마모루 시게미수가 천황을 대신해서 서명하고 있다.
패망-1945년 9월 2일 - 일본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 조인
1945년 9월 2일 아침, 동경만(灣)에 정박한 미 해군 전함 미주리(U.S.S ‘Missouri’, BB-63) 함상에는 92년
전 일본을 무력으로 개항시킨 페리 제독의 기함에 걸렸던 바로 그 성조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연합군최고 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짤막한 연설을 시작으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린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저는, 제가 대표하는 국가의 관례에 따라, 항복 조항이 완전히, 즉각적으로, 충실하게
이행되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면서, 정의와 관용으로 책임을 수행해 나갈 것임을 확실히 밝혀둡니다.”
맥아더가 연설을 마치고 고개짓으로 신호를 하자 일본정부를 대표한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대신이
보좌관과 함께 앞으로 나와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테이블 위에는 연합군 측에서
미리 준비한 두 개의 항복문서가 놓여 있었고, 시게미쓰는 첫 번째 문서에 서명한 뒤 두 번째 문서에 서명하기 앞서 잠시 머뭇거린다.
‘조지프스틸웰’ 장군이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어디에 서명해야 하는지 가리켰고, 맥아더는 잠시 경멸의 눈초리로
시게미쓰를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이날 항복문서 조인식에 일왕은 참석하지 않았다. AP 자료 사진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
시게미쓰(重光葵)가 떨리는 손으로 서명한 항복문서에는
첫째, 일본군과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무장 세력은 즉각 무조건 항복할 것.
둘째,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명령에 따를 것.
셋째, 일왕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의 조항을
성실하게 이행할 것.
넷째, 일왕과 일본 정부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통제 아래에 둘 것 등의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시게미쓰와 일본군을 대표한 육군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 美治郎)’가 서명한 항복문서에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맥아더 원수가 서명한 뒤, 미국, 중국, 영국, 소련, 호주, 캐나다, 프랑스 등 승전국 대표들이 차례로 서명하였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인류역사상 전례가 없던 대참화가 막을 내리는 순간치고는 너무나 단순하였다.
맥아더의 연설로부터 연합국 대표들의 서명이 끝날 때까지의 시간은 단 10분 남짓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각국 대표들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만년필의 잉크 한 방울, 한 방울은 수백, 수천만 인류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군 중장 우메주가 서명을 하고 있고 그 뒤에 서 있는 부관이 눈물을 닦고 있다.
항복문서에는 그 외에 중국, 영국, 쏘련, 오스트리아, 카나다, 프랑스, 네델란드, 뉴질랜드 대표가 서명했다.
서명하였던 만년필
아침부터 날이 흐려 우중충했었는데 모두 서명을 끝내자 도쿄만에는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늘 위로는 400대의 B-29가 떠 있고 그 밑으로 1,500대의 전투기가 편대를 지어 미주리함 위를 날았다.
드라마틱한 순간이었고 마지막 승리에 대한 경의였다.
미군기 편대의 축하비행
미주리함의 일본항복기념
미주리함을 떠나기 전 일본대표단의 굳은 표정이다.
항복문서는 미국이 한 장, 일본이 한장씩 보유하기로 하였다.
미국은 5,000명의 가미가제가 존재한 일본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항복했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11월 1일 일차로 6군을 규슈에 상륙시켰다.
에어본 특수부대가 먼저 도쿄에 들어가 기본 활동을 시작했다.
뜻밖에도 일본인들이 적대시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1946년 봄에 8군과 10군을 도쿄에 상륙시켰다.
일왕(日王)이 맥아더 장군을 예방하겠다고 해서 장군이 미 대사관에서 일왕을 만나고 있다
일본인들은 천황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히로히토를 인간으로 만나는 자리라 넥타이를 안 매고 만났다.
미주리함에서 옛 승무원들의 기념행사
일본제국의 항복조인식에 안타까운 것은 이 자리에 한국 대표는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세계 그 어느 민족보다도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면서도, 끈질긴 무장 투쟁을 이어왔던 한국 대표가 제외되었다는 사실은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질 비극을 예고하는 것과 같았다.
스스로 지키지도 못했고, 강하지도 못하여 식민지가 되어 생활하다 타인(他人)에 의한 해방이 되어 사상과 전쟁의 힘든 역사의 과정을 일으킨다.
프랑스가 대전 초기에 독일에 항복하면서 실제 전쟁에 기여 한 바가 보잘 것 없었지만 승전국의 지위를 차지한
것과는 달리 한국인들에겐 아예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 몇 명이 일본의 패망 직후 여의도에 미군 군용기로 도착했다가 일본군들에게 쫓겨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당시 임정의 지위가 국제적으로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를 잘 말해 준다.
하지만, 일본의 항복 조인식장은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피어린 투쟁의 흔적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일본 대표 시게미쓰 외무대신은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 없는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의한 것이었다.
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였던 시게미쓰는 바로 이날 윤 의사의 폭탄 공격으로 한 쪽 다리를 잃었던 것이었다.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항복 조인식장에서 시게마쓰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는 한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힘은 없었지만 그 어느 나라보다도 독립과 해방의 염원은 간절하였다.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