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삿갓 31화
(효자시)
김삿갓은 언덕길을 혼자 걸어 올라가며 생각해 본다.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일까, 악한 것일까?)
일찍이 맹자는,(사람은 태어났을 당시에는 누구나 착하다)고 말하며,(성선설)을 주장한 바 있었다. 본시는 착하던 사람이 (사회악)에 물이 들어 악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학자였던 순자는 맹자와는 정반대로 (성악설)을 주장하였다.사람은 나면서부터 이기적이기 때문에 본성은 악하지만, 교육을 받아 착하게 된다는 것이 성악설의 주장이었다.
김삿갓은 두 학설의 시비에 가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금방 태어난 갓난 아기를 (악한 존재)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도 잔인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순진한 사람을 보면 흔히들 난 대로 있는 사람이니, 혹은 법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 오지 않던가.
반월 행자야말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석왕사에 들러 많은 지식을 얻었다. 산신각의 유래를 알게 된 것도 커다란 소득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 흐뭇한 소득은, 이 각박한 세상에 아직도 반월 행자와 같이 천진 난만한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김삿갓은 반월 행자를 생각하며 기나긴 고갯길을 무심히 걸어 올라오다가, 별안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좁다란 오솔길 위에 시체 하나가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언제 죽었는지 몰라도 썩어 가는 시체에는 파리떼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시체 옆에는 쌀이 조금 들어 있는 뒤웅박과 지팡이가 하나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시체의 주인공은 거지임이 틀림없다.
"츠츠츠! 거지도 사람인데, 이 사람이 어쩌다가 깊은 산중에서 이꼴이 되었을까!"
김삿갓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손을 휘둘러 파리 떼를 멀리로 쫓아 보냈다.
그러나 썩은 고기에 맛을 들인 파리들은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가 또다시 시체에 새까맣게 달라 붙는 것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도 하나의 걸객에 지나지 않으므로 김삿갓은 눈앞의 시체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세상 인심이 야박도 하지. 시체가 썩어 가는 것을 본 사람이 노상 없지도 않았을 터인데, 흙 한 줌 끼얹어 줄 선심도 없었더란 말인가?)
김삿갓은 시체를 매장해 줄 생각에서 삿갓과 두루마기를 벗어 부쳤다.
그러나 광혈을 파려 해도 무슨 쟁기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시체를 오목한 장소에 끌어다 놓고 여기저기서 흙을 옮겨다가 무덤을 만들어 주자니, 무덤답지 못한 무덤을 만들어 주는 데도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무덤을 만들어 놓고 나니, 이제는 형식적이나마 제사를 지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 주려면 젯떼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제사는 한 수의 시로 대신할밖에 없었다.
김삿갓은 무덤 앞에서 고개를 깊이 수그려 절한 뒤에, 다음과 같은 시를 소리 내어 읊었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그대여
그대의 고향은 어데이던고
낮에는 썩은 몸에 파리가 들끓더니
저녁에는 까마귀가 고혼을 울어 주네.
짤막한 지팡이는 그대의 유물이요.
몇 됫박 남은 쌀은 구걸한 먹거린가
앞마을 사람들은 내 말 좀 들어 보소
흙 한 줌 날라다가 풍상이나 가려 주지.
제사를 지내 주고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내 팔자는 기박하기도 하지. 언젠가는 깊은 산중에서 복상사 한 젊은이를 내 손으로 장사지내 준 일이 있었는데, 오늘은 거지의 시체를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구나!)
김삿갓은 팔자 타령을 하며 발길을 서둘렀다.
날은 자꾸만 저물어 오는데, 아무리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는다.
(제 길헐! 인가가 없으니 오늘밤도 어느 토굴 신세를 져야 한다는 말인가!)
비록 토굴 속에서 자는 한이 있어도, 거지의 시체를 매장해 준것은 무척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인정이라도 없다면, 인생을 무슨 보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땅거미가 져 갈 무렵에 고갯길을 넘어오다 보니, 저만큼 산기슭에 오막살이 하나가 있었다.
그 집을 찾아가 하룻밤 신세를 부탁하니, 주인이 고맙게도 좋은 수를 가르쳐 준다.
"오늘이 바로 고개 넘어 김 참봉 댁 회갑날이오. 이왕이면 그 집으로 찾아가 보시오. 그 집에서는 회갑 잔치를 위해 소까지 잡았으니까, 그 집에 가면 진수 성찬을 배가 터지도록 얻어자실 수 있을 것이오."
말만 들어도 입에 군침이 돌 지경이었다.
"김 참봉 댁이 어디오이까?"
"저기 보이는 고개 위에 올라서면, 그 집이 바로 눈 아래 내려다보이오. 오늘밤은 회갑 잔치를 지내느라고 마당에 차일도 쳐놓았고, 등불도 환히 켜 놓아서, 장님도 찾아갈 수 있을 것이오."
김삿갓은 고갯길을 부지런히 걸어 올라왔다.
고개 위에 올라서니, 과연 저 산 아래 잔칫집 등불이 휘황 찬란하게 보인다. 불이 밝은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오가는 모습도 분명하게 보였다.
(회갑 잔치를 지내기 위해 소까지 잡았다면, 김 참봉 댁은 이만 저만한 부자가 아닌가보구나.)
오랫동안 절에서 채식만 해온 김삿갓은, 오늘밤이야말로 술과 고기를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작 잔칫집으로 찾아와 보니, 술좌석은 여기저기서 푸짐하게 벌어져 있건만, 김삿갓을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나는 지나가던 과객이올시다. 이 좋은 잔치에 나도 한몫 끼어 보고 싶군요."
김삿갓은 염치 불구하고 한몫 끼어들려 하였다.
그러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김삿갓의 초라한 몰골을 멀거니 바라보더니,
"이 자리는 점잖은 분들을 모시는 좌석이니, 다른 좌석으로 가 보시오."
하고 일언지하에 퇴짜를 놓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은근히 부아가 동했다. 자고로 잔칫집에서는 지나가던 거지에게도 배불리 먹여 보내는 미풍이 있지 않았던가.
그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미풍이었다.
그러나 시비를 따질 수는 없는 일이기에 다음 좌석으로 찾아가 똑같은 부탁을 해보았다. 그러나 거기서도 역시.
"여기는 당신이 동석할 자리가 아니오. 다른 데로 가보시오."
하고 따돌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마침내 분통이 터졌다.
"여보시오들! 회갑 잔치 때는 지나가던 거지도 융숭하게 대접해 보내는 법이오. 이런 인사가 어디 있단 말이오."
"아니, 당신은 남의 잔칫집에 와서 시비를 걸려는 것이오?"
"시비를 걸려는 것은 아니오. 술을 한 잔 얻어먹거든 축시라도 한 수 써올릴까 했는데, 이제는 축시를 쓰기는 틀렸소. 축시 대신에 다른 시를 한 수 써줄 테니, 김 참봉에게 꼭 전해 주시오."
그리고 김삿갓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써갈겼다.
사람이 사람 집에 와도 사람 대접 안하니
주인의 인사가 사람답지 못하다
잔칫집에서 손님을 쫓음은 인사가 아니니
주인 인사가 사람답지 못하다.
김삿갓이 이 시 한 수를 갈겨 놓고 그 자리를 막 떠나려고 하는데, 이날의 주인공인 김 참봉이 달려와 그 시를 읽어 보고 김삿갓의 손을 황급히 붙잡는다.
"아이구머니! 아랫사람들이 황망간에 선비님을 몰라 보아 결례가 많았소이다. 내가 이 집 주인이니, 선비님은 나를 보아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나와 함께 한잔 드십시다."
김 참봉은 글줄이나 배운 사람인지, 선비에 대한 대접이 제법 깍듯하였다.
김삿갓은 굳이 심술을 부릴 생각은 없어서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오늘의 수연을 축하 올리옵니다."
김 참봉은 노인들이 모여 앉아 있는 자리로 김삿갓을 데리고 오더니,
"이분은 지나가던 선비님이시오. 시가 매우 능하신 모양이니 모두들 자리를 같이합시다."
하고 말하며 김삿갓을 상좌로 모시는 것이었다.
노인들은 불의의 불청객을 한결같이 시덥잖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중의 한 늙은이가 옆에 놓여 있는 삿갓을 몇 번이고 눈여겨보더니,
"아니, 저 어른은 삿갓 선생이 아니시오이까?"
하고 놀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에 동석했던 사람들은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 삿갓 선생?"
"이 사람들아! 그 옛날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를 하신 그분 말일세. 자네들은 그 분의 시를 천하의 명시라고 노상 감탄해 오고 있지 않는가?"
"엣? 저분이 바로 그 시를 지은 어른이시란 말인가?"
노인들은 백일장에 장원 급제한 김삿갓의 시를 평소에도 무척 애송해 오고 있었기에, 문제의 인물이 그 시의 작자임을 알고 나자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김 참봉도 김삿갓에게 새삼스러이 술잔을 올리며 말한다.
"고귀하신 어른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노생으로서는 다시없는 영광이오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앞을 다투어 가며 술을 권하기 시작하였다.
김삿갓은 오랫동안 술에 굶주렸던 판인지라, 한 잔도 사양하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그리하여 모두들 취흥이 도도해 왔을 때, 김 참봉은 아들 7형제를 모두 불러 내어 김삿갓에게 일일이 인사를 시키고 나더니,
"오늘은 노생의 회갑날이옵니다. 선생은 우리 가문을 위해 축시를 한 수만 휘호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우리 집에서는 두고두고 가보로 삼을 것이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동석자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 갈채를 보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삿갓 자신은 그렇게도 귀객 대접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글쎄올시다. 주인 어른께서 그처럼 말씀하시니 한 수 써보기로 할까요."
김 참봉은 어쩔 줄을 모르도록 기뻐하며, 아들더러 지필묵을 빨리 준비해 오라고 긴급 명령을 내린다.
이윽고 김삿갓은 붓을 들어 일필 휘지로 첫 행을 써갈기는데 필적은 장강 유수처럼 활달했으나, 그 문구는 너무도 놀라운 내용이었다.
저기 앉아 있는 저 노인은 사람같지 않구나!
너무도 모욕적인 문구여서 좌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 참봉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김삿갓을 에워싸고 구경을 하고 있던 아들 7형제의 얼굴에도 분노의 빛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김 참봉은 그러잖아도 조금 전에 (주인 인사가 사람답지 않다)는 시를 보아 온 일이 있는지라, 김삿갓을 몹시 아니꼽게 여겼다.
그러나 장본인보다도 더욱 노여움이 복받쳐 오른 사람들은 7형제들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사람 같지 않다니? 그렇다면 짐승 같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나이가 가장 어린 막내 아들이 주먹을 움켜쥐며,
"여보시오, 당신은 죽고 싶어 환장을 했소?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정면으로 시비를 걸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김삿갓의 태도는 태연 자약하였다.
"허어.......젊은 양반이 성미가 왜 그렇게도 급하오. 다음 구절을 두고 보시오."
그리고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써갈기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오신 것만 같으네.
두번째의 구절을 보고 난 노인들은 제각기 혀를 털며 감탄을 마지 않는다.
"그렇지! 신선이니까 사람일 수가 없는 일이지."
"글이란 참으로 절묘한 것이로구나. 기구를 보았을 때에는 모욕적인 말인 것 같더니, 승구를 보고 나니까 모욕적이던 구절이 대번에 기막힌 명구로 되어 버리는걸!"
"아닌게 아니라, 삿갓 선생이야말로 시에 있어서는 귀신 같으신 분이네."
동석했던 노인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주고받는다.
그러나 김삿갓의 기발한 재주에 감탄하는 사람은 비단 노인들만이 아니었다.
모욕감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던 김 참봉 자신도, 일약 신선으로 둔갑하는 바람에 입이 찢어지도록 기뻐하였다.
그리고 7형제의 얼굴에도 환희의 빛이 넘쳐 올랐다.
김삿갓은 알은체도 아니하고, 이번에는 전구를 써갈긴다.
슬하의 일곱 아들은 모두가 도둑놈이네.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모조리 도둑놈으로 몰아버리는 데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모처럼 환희에 넘쳤던 분위기가 또다시 송두리째 뒤집히고 말았다.
도둑놈 소리를 듣고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7형제의 얼굴에는 또다시 불쾌감이 넘쳐 올랐다.
동석한 노인들도 모두가 불안스러워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일은 아랑곳 아니하고, 거기서 일단 붓을 놓는다.
그리고 주인 아들 7형제를 하나씩 둘러보며 이렇게 말한다.
"목이 컬컬하니, 나 술 한 잔 주려오? 마지막 구절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서 술을 마셔 가며 좀 천천히 생각해 봐야 하겠소."
그야말로 사람을 맘대로 주물러 대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고 보니, 젊은이들은 마지막 한 구절을 좋게 써받기 위해 제각기 술을 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맏아들이 김삿갓에게 술잔을 받들어 올리며 말한다.
"선생님! 마지막 결구만은 부디 좋게 써주시옵소서."
김삿갓은 술잔을 받으며 껄껄껄 웃는다.
"허허허, 부처님의 코가 높고 낮기는 석수장이의 손에 달려 있는 것. 칠 형제가 효자가 되느냐 패륜아가 되느냐 하는 것은 나의 붓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은연중의 엄포였음은 새삼스러이 말할 것도 없으리라.
김삿갓이 그처럼 도도하게 나오니, 7형제는 아무리 싫어도 술을 저마다 권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마지막 결구를 쓰지 않고 감질만 내고 있으니, 좌중의 관심은 그리로 집중될밖에 없었다.
김 참봉도 등이 은근히 달아오르는지, 주전자 하나를 새로 들고 오더니 김삿갓에게 술을 직접 따라 주며,
"이 술은 노생의 회갑날을 위해 노처가 손수 담가 두었던 옥로주올시다. 이 술을 드시고 우리 아들 칠 형제를 모두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소서."
하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춘당께서조차 그처럼 간곡하게 말씀하시니, 아드님 칠 형제를 모두 효자로 만들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김삿갓은 술을 마실 만큼 마시고 나서 붓을 다시 들더니, 다음과 같은 결구를 일기 가성으로 휘갈겨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늘에서 복숭아를 훔쳐다가 수연을 올리는구나.
(천도는 하늘에만 있는 복숭아로서, 이 복숭아를 먹으면 2천 년을 산다는 전설이 있다.)
김삿갓이 마지막 구절을 휘갈기고 붓을 던져 버리자, 좌중에서 환호성이 폭발하였다.
그도 그럴밖에 없는 것이, 조금 전까지도 도둑놈 취급을 받아 오던 7형제가 순식간에 효자로 둔갑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의 장수를 위해 하늘에서 복숭아까지 훔쳐 올 정도라면 세상에 그런 효자가 어디 있으랴.
그야말로 천변 만화의 신기라고 볼 수밖에 없는 글재주였다.
"아아, 글이란 참으로 절묘한 것이로구나!"
"누가 아니래! 그러기에 옛날부터 필지묘.설지묘.도지묘를 삼 묘라고 일러 오지 않는가."
동석했던 늙은이들이 제각기 감탄을 마지않는 중에, 늙은이 하나가 김삿갓에게 말한다.
"삿갓 선생의 절묘한 필봉에는 귀신도 떨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오."
김삿갓은 웃으며 대답한다.
"글쎄올시다. 나의 필봉에 귀신이 떨는지 어쩔는지, 아직 시험을 해보지 않아 모르겠소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술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쓰는 못난놈인 것만은 틀림이 없사옵니다."
김삿갓이 익살을 부리는 바람에, 좌중에는 또다시 폭소가 퍼졌다.
김삿갓은 축시를 한 수 써준 덕택에, 김 참봉 댁에서 10여 일동안이나 날마다 주지 육림 속에서 살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10여 일을 붙박이로 고기만 먹다 보니, 나중에는 고기를 보기만 해도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고기하고 나하고는 본디 인연이 없는 것, 이제는 이 집을 떠나 나의 길을 가야 할 때가 왔구나.)
김삿갓은 어느 날 조반 후, 주인이 없는 틈에 바랑을 둘러메고 표연히 방랑의 길에 올랐다. 인사를 정식으로 나누고 떠나려면 수속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떠날 때에는 언제나 말없이 떠나는 것이 그의 습성이었던 것이다.
이날도 산천 경개를 구경하며 진종일 산길을 걸었다. 새소리,물소리를 들어 가며 산을 바라보고, 숲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은 언제나 가을 하늘처럼 맑아 왔다.
얼마를 오다 보니, 저만큼 노승 하나가 고갯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한여름인 탓인지 노승은 하얀 가사를 입고 있는데, 가사의 빛깔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서로 지나치게 되자 김삿갓이 고개를 수그려 보이니 저쪽에서도 합장 배례를 하며 지나가 버린다.
말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래도 웬일인지 마음속으로는 서로간에 깊이 통한 것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불교에서는 소매만 스치고 지나가도 (타생지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막 지나쳐 버린 그 스님하고 자기하고는 그 이상의 깊은 인연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이상의 깊은 인연이 있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김삿갓은 산길을 걸어가며 곰곰 생각해 보다가 별안간.
"아! 그 스님하고 나하고는 산을 사랑하고 물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었구나!"
하고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대자연 속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점에 있어서는, 김삿갓도 탁발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탁발승은 마음의 도를 닦기 위해 떠돌아다니지만, 김삿갓은 단지 산이 좋고 물이 좋아서 자연 속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피차간에 산을 사랑하고 물을 좋아하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이 아닌가.
그러자 김삿갓은 옛날 처능이라는 탁발승이 읊었다는 명시 한 수가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하얀 가사 눈처럼 하얀 가사
입고 다니는 지 몇 세월인고
봄바람에 가볍게 불리며
산과 물과 끊임없이 이별하오.
산과 물과 끊임없는 이별을 계속하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탁발승의 심정을 절묘하게 표현한 시였다.
이날 날이 저물자, 김삿갓은 산기슭에 있는 객주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김삿갓이 객실로 들어서니, 먼저 온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방 한복판에 큰 대 자 형으로 네 활개를 쭉 뻗고 누워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기는 했으나, 눈두덩이 실룩거리는 것을 보면 잠을 자지 않고 있는 것은 분명하였다.
(고약한 친구! 사람이 들어와도 일어날 줄을 모르다니, 경우가 먹통 같은 놈이로구나.)
김삿갓은 비위가 거슬려, 한편 구석에 주저앉으며 헛기침을 크게 해보였다.
돼지같이 뚱뚱한 손님은 그제야 꿈질꿈질 일어나 앉으며,
"두 사람이 한방에서 자려면 방이 비좁을 터인데, 노형도 여기서 자고 갈 생각이오?"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좁으면 좁은 대로 하룻밤 같이 지냅시다. 나는 김삿갓이라는 사람이오."
김삿갓은 듣기 좋게 말하며 초면 인사를 청했다.
그러나 뚱뚱보 손님은,
"나는 농사를 지어 먹는 박 서방이오"
하고 간단한 한마디만 내던지고 그냥 외면을 해버린다.
농사꾼이라는 사람이 무엇을 먹고 살이 그렇게도 쪘는지, 방안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몸이 부대하였다.
이윽고 저녁상이 들어왔다. 저녁상은 겸상으로 들어왔는데,반찬은 된장찌개와 콩나물 무침 한 접시가 있을 뿐이었다.
겸상일 경우에는, 두 사람이 식사를 동시에 시작해야 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삿갓이 손을 씻으려고 밖에 잠깐 나갔다 들어와 보니, 박 서방은 벌써부터 밥을 먹기 시작하여 된장찌개와 콩나물 접시가 어느새 바닥이 드러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숟갈을 들고 마주 앉았다. 그러나 박 서방은 본 체도 아니하고 나머지 된장찌개마저 정신없이 먹어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숟갈을 손에 든채 멍하기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배알이 꼴려 와서 마침내 이렇게 말을 걸었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노형의 띠가 무슨 띠인지 알 수 있겠소."
신랄하게 꼬집은 소리였다.
그러나 박 서방은 음식을 연방 씹어 가면서,
"노형이 관상을 공부했다구요? 그렇다면 내가 무슨 띠인지, 한번 알아맞혀 보구료."
하고 건성으로 말할 뿐이다.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관상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말투다. 무지 막지하기 짝없는 위인이었다.
김삿갓은 이왕 말을 꺼내 놓았으니, 그냥 넘겨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보나 마나 노형은 돼지띠가 분명하오. 어떻소? 내 말이 맞지요?"
박 서방의 반성을 촉구하려고 그렇게 말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둘이 나눠 먹어야 할 반찬을 혼자만 처먹고 있으니, 그게 바로 돼지 행실이 아니고 뭐겠느냐 하는 뜻이었던 것이다.
뚱뚱보 박 서방이 정말로 돼지띠였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돼지띠가 아닌 사람을 덮어놓고 돼지 취급을 했다면, 박 서방이 뺨을 갈겨도 김삿갓은 할말이 없었을 것이다. 김삿갓은 그런 경우까지 각오하고 돼지띠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서방은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된장찌개와 콩나물을 연방 퍼먹어 가면서,
"틀렸소. 나는 돼지띠가 아니오. 관상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그런 것도 알아맞히지 못하오."
하고 김삿갓을 비웃기만 하고 있었다.
그제야 깨닫고 보니, 어느새 반찬 접시는 완전히 바닥이 드러나 버렸다.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숟갈을 덜렁 놓아 버렸다.
"이왕이면 내 밥까지 모두 자셔 버리지 그래요."
반찬 없는 밥은 먹을 수가 없어, 김삿갓은 숫제 저녁을 굶기로 작정하고 그런 방법으로나마 박 서방에게 수모를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서방이라는 자는 내 밥까지 먹으라는 소리에 귀가번쩍 트이는지, 댓바람에 밥그릇을 집어 들며 말한다.
"왜 그러시오. 배가 불러 밥 생각이 없어 그러는 모양이구료."
김삿갓은 갈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친구는 정말로 인두겁을 쓴 돼지였더란 말인가!)
돼지가 아니고 사람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신경이 무딜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먹고 싶지 않으니, 안심하고 내 밥까지 자시란 말이오."
"그러면 노형의 밥을 내가 대신 먹어 주리다."
그러고 나서 박 서방은 김삿갓의 밥을 탐욕스럽게 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도 좋았다. 사람이면 체면이라는 것이 조금은 있어야 하는 법인데, 박 서방은 맨밥을 꾸역꾸역 입 안에 처넣어 가면서,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두 그릇을 다 먹게 될 줄 알았으면 반찬을 적당히 나눠 먹었을터인데, 반찬 없는 밥을 먹자니 목이 메어 오는걸."
그 소리에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여보시오. 밥을 빼앗아 갈 사람은 없으니까, 천천히 자시오. 반찬 없는 밥을 허겁지겁 자시다가, 아차 잘못하면 목이 막혀 저승에 가게 되겠소."
"아따! 먹다 죽으면 그야말로 상팔자지 뭘 그래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김삿갓은 웃으면서 다시 말한다.
"참, 아까 얘기를 하다가 중단되었는데, 당신은 돼지띠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띠요. 그거나 좀 압시다."
"......."
박 서방은 먹기에 바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는지, 대답조차 안한다.
그는 목춤을 추어 가며 맨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잠깐 사이에 먹어 치우고 나더니, 목을 내뽑아(꺼르륵!) 하고 용트림을 길게 하면서,
"이제야 겨우 간에 기별이 오는군! 뭐니 뭐니 해도 농사꾼은 순대가 불룩해야 하는 법이야."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웃을밖에 없었다.
"만약 밥이 더 있다면, 한 그릇 더 자실 수도 있겠소?"
"주기만 하면 먹지요. 뭐가 무서워 못 먹겠소이까."
"도대체 당신은 무슨 띠이기에, 밥을 그렇게도 많이 자시오?"
"밥을 많이 먹는 것이 띠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런 것은 왜 물어 보시오?"
"상관이 있구 말구요. 그러니까 물어 보는 게 아니오."
김삿갓은 임시방편으로 어거지 대답을 꾸며 대었다.
"그렇다면 말해 주리다. 나는 돼지띠가 아니고 개띠요. 병술생이니까, 개띠가 아니고 뭐겠소."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일부러 크게 내쉬어 보았다.
"후유.......개띠라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오. 나는 당신이 혹시라도 호랑이 띠가 아닌가 해서, 아까부터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오."
박 서방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개띠거나 호랑이띠거나 그게 그것인데, 뭐가 무서워 가슴을 졸였단 말이오."
김삿갓은 눈 딱 감고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당신은 개띠면서도 음식을 그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으니, 당신이 만약 호랑이띠였다면 나까지 잡아먹었을 게 아니오."
좀처럼 말하기 어려운 신랄한 조롱이었다.
그러나 박 서방은 그 말이 조롱인 것도 모르고 제법 점잖게 이렇게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에이, 여보시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잡아먹소. 개띠거나 호랑이띠거나 사람은 다 마찬가지라오."
박 서방은 밥상을 물리고 나자, 그 자리에 쓰러지기가 무섭게 코를 골기 시작한다.
김삿갓은 박 서방이 무섭게 뚱뚱해진 원인을 그제야 깨달았다.
저녁밥을 두 사람 분이나 처먹고 그 자리에 쓰러져 잠만 자고 있으니, 돼지처럼 살이 찔 것은 뻔한 일이 아니던가.
김삿갓은 그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현듯 반월 행자를 연상하였다.
반월 행자는 내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괴벽은 있었지만, 남을 도와 주려는 데는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박 서방은 남이야 굶거나 말거나 자기 욕심밖에 모르는 사람이니, 세상은 그래서 요지경 속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박 서방이 자기 욕심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해괴한 사건이 그날 밤 오밤중에 또 한 건 발생하였다.
바로 그날 밤 삼경 무렵이었다.
김삿갓은 정신없이 잠을 자다가, 웬일인지 한밤중에 잠이 절로 깨어졌다. 그리하여 옆을 돌아다보니, 분명히 곁에서 자고 있어야 할 박 서방이 온데간데 없지 않은가.
(아니, 이 사람이 어디를 갔을까?)
깜짝 놀라 일어나 알아보려고 하는 바로 그때, 장지문 너머 주인 방에서 이상한 속삭임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누가 알면 어때! 혼자 사는 과부가 재미를 좀 보기로 뭐가 나쁘냔 말야."
하고 우격다짐으로 졸라대는 목소리는 분명히 박 서방의 음성이었고,
"누가 알면 내가 곤란하잖아요."
하고 말로나마 거절해 보이는 음성은 틀림없는 주인 마누라의 목소리였다.
(박 서방이라는 자가 밥을 두 그릇이나 처먹고 초저녁부터 잠을 자더니,이제는 한밤중에 주인 마누라까지 덮치는구나.!)
김삿갓은 솔직이 말해 박 서방의 후안 무치가 괘씸하기보다도, 그의 만용이 은근히 부럽기까지 하였다.
박 서방이 또 졸라댄다.
"한밤중에 단둘이 하는 일을 누가 알겠느냐 말야. 아무 소리 말고 어서 말 들어요."
"윗방에 손님이 있잖아요."
모질게 거절할 생각은 안하고, 엉뚱한 핑계만 대고 있는 것도 어쩐지 수상하였다.
거기 대한 박 서방의 항변이 걸작이었다.
"그 사람은 정신없이 자고 있는걸. 그 친구는 워낙 시원찮은 위인이니까, 알고 있었자 별것 없다구."
김삿갓은 무시를 당한 것이 분하기보다도 우습기만 하였다.
그래도 주인 마누라는 얼른 결심이 서지 않는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잖아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어요. 이러지 말고 어서 저 방으로 올라가세요."
그런다고 선뜻 물러날 박 서방은 아니었다.
"대장부가 칼을 뽑았다가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야. 피차간에 좋은 일인데, 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느냐 말야!"
박 서방은 그렇게 투덜대며 여인의 어디를 어떻게 눌러대는지 여인은 별안간.
"으흑!"
하고 외마디 감격성을 지르더니, 다시는 말이 없었다. 박 서방의 목적이 달생되어, 이제는 일진 광풍이 일어날 형편이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그 이상 아무 소리도 듣지 않으려고 이불을 머리 위까지 푹 뒤집어써 버리고 말았다. 도둑고양이한테 제물을 도둑맞은 듯한 아쉬움만이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날이 밝아 오자, 박 서방은 천연덕스럽게 아랫방에서 올라온다. 그야말로 개선 장군처럼 우쭐하는 얼굴이었다.
"어디를 갔다 오시오?"
김삿갓은 시치미를 떼고 물어보았다.
박 서방이 만약 양심적인 인물이었다면, 다소나마 어색한 빛이라도 보여 주었어야 옳을 일이다.
그런데 그는 어찌나 뻔뻔스러운지 이불 위에 네 활개를 쭉 뻗고 큰 대 자로 누워 버리며,
"소변을 보고 오는 길이오"
하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꾸며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자꾸만 밉살머리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한 감정은 일종의 시기심임이 분명했건만, 아뭏든 그냥 넘겨 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소변을 보고 오는 길이라구요? 주인 마누라의 배 위에서 소변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무의식중에 채신머리없는 말투로 쏘아 붙였다.
박 서방은 그제야 비밀이 탄로된 것을 알았는지 싱긋 웃어 보인다.
"노형은 모든 것을 죄다 알고 있었구료. 말이야 바른 대로 말이지, 남녀 관계란 알고 보면 모두가 그렇고 그런 게 아니오."
박 서방은 비밀이 탄로된 것을 알고 나서도, 개구리가 물을 뒤집어쓴 것만큼도 놀라지 않는다.
김삿갓은 그의 후안 무치가 더욱 괘씸하게 여겨져서, 다시 이렇게 비꼬아 주었다.
"당신은 개띠라고 했지요? 그러나 여자를 함부로 잡아먹는 걸 보면, 역시 당신은 호랑이띠가 분명하오."
그러나 박 서방은 코방귀를 뀌면서 자신 만만하게 이렇게 씨부려대는 것이었다.
"내가 여자를 잡아먹었다구요? 천만의 말씀..... 오늘 아침에는 반찬이 어제 저녁보다 훨씬 좋게 나올 테니, 두고 보시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조반상이 나왔는데, 과연 박 서방이 예언한 대로, 아침 반찬은 저녁 반찬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호화판이었다. 어제 저녁에는 된장찌개와 콩나물이 모두 한그릇으로 나왔었는데, 아침상에는 된장찌개도 따로따로 나왔거니와, 닭고기국에 굴비까지 곁들여 있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삿갓은 먹기는 먹으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아, 또 한번 비꼬아 주었다.
"생각조차 못했던 닭고기까지 먹게 된 것은 노형이 간밤에 수고 한 덕택이오."
박 서방은 씩 웃으며 말한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게 아니오."
김삿갓은 조반을 먹기가 무섭게 길을 떠나며, 또 한번 비꼬아 대었다.
"나는 먼저 떠나오. 당신은 며칠 더 묵어야 할 거요!"
"에이, 여보시오 나도 곧 떠날 테니, 노형은 한 걸음 먼저 떠나시오."
말은 그렇지만 박 서방의 그 말은 누가 믿을 것인가.
김삿갓은 이날도 전과 다름없이 산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웬일인지 이날따라 산천 경개의 아름다움이 전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조용히 반성하였다.
(나는 수양이 너무도 부족하구나. 남의 일에 대해 내가 왜 이다지도 감정이 거칠어졌단 말인가!)
진종일 삭막한 기분으로 산길을 걸어오다가 해거름에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길가에 있는 부잣집을 찾아갔다.
주인을 부르니 오십 가량 되어 보이는, 유관을 쓴 영감님이 나온다.
"지나가던 나그네올시다. 죄송스럽사오나 하룻밤 신세 좀 지고 가게 해주시옵소서."
김삿갓은 주인 영감님에게 허리를 정중히 굽혀 보이며 부탁하였다.
최 풍현이라는 주인 영감은 김삿갓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저녁만은 내 집에서 대접하리다. 그러나 집에 사정이 있으니, 잠자리만은 다른 데서 구해 보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밥만 얻어먹고, 잠자리를 구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열사흘 달이 대낮같이 밝은 밤이었다.
최 풍헌 댁 마당가에는 연자 방앗간이 있는데, 방앗간 옆에는 헛간이 하나 달려 있었다.
헛간 속을 들여다보니, 마른 풀이 그득히 쌓여 있다.
(에라,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자.)
김삿갓은 마른 풀 속에 몸을 푹 파묻고, 초저녁부터 잠을 자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잠 늘어지게 자고, 한밤중에 잠이 깨었을 때의 일이었다.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하기에 무심코 밖을 내다보니, 젊은 사내 하나가 커다란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젊은 아낙네와 함께 저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불현듯 박 서방 생각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실소하였다.
(잘들 놀아나는구나. 어젯밤에는 박 서방이라는 자가 객주집 주인 마누라와 통정을 하더니, 오늘밤에는 어떤 놈이 남의 계집을 꾀어 가지고 밤도망을 친단 말인가.)
시골서는 흔히 있는 일이기에, 김삿갓은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다시 잠을 자려 하였다.
그러나 한번 설치고 나니,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꾸물거리기만 하고 있노라니가, 마침 그때 주인집 대문이 별안간 요란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숨 가쁜 목소리로,
"도둑이야! 도둑이야. 모두들 달려나와 도둑을 잡아라!"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밖을 내다보니, 손에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며 고함을 지르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최 풍헌 노인이 아닌가.
(아니 그러면, 한 시간쯤 전에 어깨에 보따리를 둘러메고 계집과 함께 밤도망을 친 놈은 도둑놈이었더란 말인가.)
마을 사람들은 (도둑!)이라는 고함소리를 듣고, 이 집 저 집에서 몽둥이를 들고 달려나오며 야단 법석이었다.
김삿갓은 그 광경을 보자,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만있자. 도둑놈은 이미 도망가 버린 지가 오랜데, 어름어름 하다가는 내가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될 게 아닌가.)
김삿갓은 순간적으로 그런 겁이 나자, 부랴부랴 헛간에서 뛰쳐나왔다. 말썽이 일어나기 전에 숫제 몸을 피해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군자는 위방불입)이라는 말이 있다. 김삿갓이 헛간에서 뒤쳐 나온 것은, 단순히 말썽스러운 일에는 버물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 놓고 보니, 주위의 분위기가 무섭도록 살벌하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몽둥이를 들고 달려나오며 한마디씩 외친다.
"어떤 놈이 도둑놈이야."
도둑이 눈에 띄기만 하면 당장 때려 죽일 듯한 형세다.
사태가 그처럼 험악해지고 보니,김삿갓은 싫든 좋든 간에 이제는 시급히 몸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헛간에 숨어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을 괜히 뛰쳐 나와 가지고 일이 복잡하게 되었구나!)
김삿갓은 순간적으로 그런 뉘우침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밖으로 나온 이상, 헛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김삿갓은 삿갓을 깊숙이 눌러 쓰며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달이 대낮같이 밝아서 몸을 피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다음편 -萬事皆有定- -계속-
-만사개유정-
옮겨온글
소설 김삿갓
지은이 정비석
옮긴이 주태백이
김삿갓 일 났다~ 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