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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묵상글 들 ( 설. - 축복받고 축복하는 올해. 등 )
섣달 그믐 밤
새하얀 눈이 온누리에 ---.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제이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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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새 아침을
새 날로 맞으시기를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즐겁고 기쁨 가득한
설명절 지내세요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합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평화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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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축복받고 축복하는 올해
임인년 새해가 밝았고 새날이 왔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이렇게 새해와 새날이 왔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새해와 새날이 오고 명절이 되어도 무덤덤합니다.
그것은 저뿐이 아니라 나이 드신 분들 대부분이 그럴 텐데
많이 살아본 결과 새해에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새해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코헬렛서가 얘기하듯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지금 있는 것은 전에 있었던 것이요 장차 있을 것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력으로 작년 12월 31일과 신년 1월 1일을 맞이하며
저 개인적으로는 정말 무덤덤하게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는데
이번 설을 맞이해서도 이렇게 새해와 새날을 맞이해도 되는지 성찰해봤습니다.
우리는 새해와 새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우선 물리적으로 새로운 한해가 오고 새날이 밝은 것이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새해와 새날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해와 새날을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새해와 새날의 주인은 시간이 아니고 하느님이지요.
이렇게 새해와 새날을 하느님께서 주셨으면 우리는
새해를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덤덤하게 맞이해야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 새해를 새로 태어난 손자처럼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해가 주어진 것이 너무도 고맙고 놀라운 선물로 말입니다.
한번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봅시다.
하루를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그래서
새날이 되어도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너무도 통증이 심합니다.
그래도 나는 더 살고 싶고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너무도 행복하고 새날은 너무도 고맙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얘기하지만 새해와 새날은 달력이 바뀌는 새해와 새날이 아니고
더 살고 싶은 새해 곧 생명의 새해가 선물로 주어진 새해요,
더 하고 싶은 일 곧 사랑의 새날이 선물로 주어진 새날이어야 하겠습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내게만 새해와 새날을 주시지 않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새해와 새날을 주시고 그래서
이 명절을 같이 지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 명절에 같이 지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그런 명절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는 새해가 주어진 것을 감사하는 것만큼이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같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지금 미워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는 얘기입니다.
지금 미워하는 사람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지요.
지금 미워하는 사람이 올해 내가 사랑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명절에 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주심에 감사하는 우리는
이제 그렇지 못하고, 그럴 수 없는 분들을 생각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이 명절에 너무 아픈 분들,
북에 가족을 두고 온 분들,
독거 노인이나 생이별을 하신 분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복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분들을 기억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사랑을 올해 빼앗아가실 겁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빼앗으시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 버린 것이니 사랑이 없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올해는 축복받는 올해, 축복하는 올해가 되고,
사랑받는 올해, 사랑하는 올해가 되시길 바라며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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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이는 진정 복된 이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르크,브라크하)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설”인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사실, 축복을 빌어주면 빌어주는 이에게 축복이 먼저 옵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비는 행위는 이미 ‘축복을 비는 축복’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상대를 축복해주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위하는 마음’(호의, 선의)을 북돋으십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설”을 맞이하여 축복을 빕니다.
용솟음치는 ‘축복’이 먼 하늘로부터
무수한 시간을 달려와
“설”이라는 고귀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베푸신 ‘축복’이
날마다 온몸에 사랑의 지문을 새겨 주고
가슴 속을 따뜻하게 지펴 줄 것입니다.
꺼지지도, 식지도 않는 변함없는 보살핌으로 감싸며
멈추지도, 지치지도 않는 줄기찬 사랑을 퍼부어 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한 삶의 반려자가 되어 주고
하는 일마다 전폭적인 사랑과 신뢰로 지지하고 성원해 줄 것입니다.
혹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들 때가 있더라도
늘 다정한 벗이 되어 주고 사랑을 강화시켜 주며
올 한해를 사는 힘과 용기의 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저희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인 “축복”을 건네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이 축복을 받은 이들이 한 해 내내 참된 행복 안에 머무르고
또한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저희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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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을 빌어주는 사람」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데에 근신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날 전통적으로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설빔을 해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고 한 해를 살아갈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덕담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입니다. 그리고 명절을 기다려온 것은 서로의 만남을 통해 친족애, 가족애를 돈독히 하고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절제된 만남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간절함만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우리 만남의 중심에 사랑의 예수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할수만 있다면, 덕담도 성경말씀으로 하면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설 명절에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하며‘통통,통통’ 복을 받으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1.의사소통, 2.운수대통, 3.만사형통. 4.쓰레기통입니다.
첫째는 의사소통입니다. 서로 의사소통을 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부모, 형제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통해야 합니다. 잘 통하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으면 아픕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잘하시길 빕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면 이웃과는 물론 모든 것이, 잘 통하게 됩니다. 기도는 잘 통하는 방법입니다.
둘째는 운수대통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열어주신 길에 장애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이 풍성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연장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만사형통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는 일마다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2-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김으로써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기쁨을 차지하시면 좋겠습니다. 가슴에 새기고 행동으로 옮길 때 열매를 얻게 됩니다.
넷째는 쓰레기통입니다. 아무 불평 없이, 아무 불만 없이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든 것을 담고 품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마음이 넓어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속이 좁으면 감싸 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간직하면 가능합니다.
여기에 '전화한통'을 덧붙입니다. 자주 인사하고, 먼저 안부 전하는 '전화 한 통'입니다. ‘주전자’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전화하여 자주 만나자! 코로나로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하지만 자주 전화하여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전에는 세뱃돈과 설빔을 받는 기쁨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의 만남에 의미를 두고 고향을 찾게 됩니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병이 생기기도 했지만, 고유명절은 그래도 가족의 유대관계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고향을 찾기보다 여행이나 캠핑을 즐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명절이 되면 도심으로 나가 있던 삼촌과 누나를 기다렸습니다. 명절에는 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용돈을 얻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선물이나 돈의 액수가 줄어들면 마음속으로는 서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저 공짜로 받는 주제에 주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크게 받으면 다음에 받을 때는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게 되고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받았으나 감사할 수 없으니 줄 때도 잘 줘야 하고 받을 때도 잘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짜로 언제든지 주십니다. 알맞게 주십니다. 그러나 내 잣대로 재고는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면서 투덜댑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 받은 것에 감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이 또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명절의 의미는 바로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마련하시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명절의 두 번째 의미는 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르신께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 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 치례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순간순간을 늘 깨어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믿는 이들은 영원한 복을 추구합니다. 참으로 복 중의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을 주관하시고 천상의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세성을 넘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이미 하느님을 차지하시고 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복을 결코 잃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에는 “너희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머리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복을 받으시길 희망합니다.
시편에서는“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고 하였습니다. 만사형통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아론 집안에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낮은 사람들에게도 높은 사람에게도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께서 너희를, 너희와 너희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리라. 너희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께”(시편115,11-15). 복을 주시는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복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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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오늘은 설 명절이고, 올해는 호랑이의 해인 임인년(壬寅年)입니다. 동북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서는 하늘의 뜻과 질서가 지상의 질서를 다스린다는 생각에서 오래 전부터 천문을 관측해 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사는 지구별이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을 일 년으로, 지구 옆에 있는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한 달로 잡아 역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를 만들어 일 년을 넘어가는 시간 질서를 가늠해 왔습니다. 이 안에 동북아시아인들이 고대로부터 하늘의 이치와 지상 세계의 질서를 가늠해 온 기본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 등의 십간(十干)은 하늘의 별들이 운행하는 질서를 상징하는 방패라고 상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열(十)이라는 숫자는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의 주요 별 다섯 개인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의 오행을 두 배로 합한 수로서 십진법의 기본 단위입니다. 십간은 각각 다섯 가지 기운 즉 오행(五行)과 방위(方位)와 색상(色相)을 나타낸다고 가정하였습니다. 즉, 오행의 기운에 있어서 갑을(甲乙)이 나무(木), 병정(丙丁)이 불(火), 무기(戊己)가 흙(土), 경신(庚辛)이 쇠(金), 임계(壬癸)가 물(水)의 기운을 지녔다고 가정하고, 방위에 있어서는 갑을이 동쪽, 병정이 남쪽, 무기가 중앙, 경신이 서쪽, 임계가 북쪽을 가리킨다고 가정하며, 색상에 있어서는 갑을은 청색, 병정은 적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백색, 임계는 흑색을 나타낸다고 가정합니다.
그 다음, 십이지는 동북아시아의 지상 세계에서 흔히 발견되는 열두 종류의 동물로서, 땅의 질서를 표시하는 시간과 계절을 나타냅니다.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등의 동물이 각각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인데, 밤 12시를 자정(子正)이라 부르고 낮 12시를 정오(正午)라고 하는 것도 이 십이지로써 시간을 표시하던 흔적입니다.
그리고 십간과 십이지를 교차시켜서 60년 단위로 지상세계와 인생의 질서가 순환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올해가 임인년이요 검은 호랑이의 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서양에서라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사물 질서에 관심을 가지고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으로, 그래서 거의 종교적인 수준의 의미를 부여하여 현세를 정성껏 살고자 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60살이 된다고 해도 별일이 아니지만, 동북아시아의 동양에서는 60년 주기의 질서가 다시 시작된다는 뜻에서 환갑이라고 부르며 특별히 축하를 해 주기도 하는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이에 비해 성경에서는 천문과 지상의 질서에 대해서보다는 이 모두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축복을 내리신다는 계시 진리에 민감했고 이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모든 복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고, 이 복을 받아서 자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새 해를 음력으로 다시 시작하는 설 명절이 되면 흔히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덕담을 나누지만, 성경의 말씀대로라면 서로가 받은 하느님의 축복을 나누라는 덕담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온 새 해 인사말이,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라는 덕담인데, 뜻은 알겠는데 어딘지 좀 어색하지요? 그러니 덕담의 인사말은 그대로 하되, 복을 주지도 않으면서 받으라고 하면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그 복을 내려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신 줄을 특별히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민수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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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는 지인이 감동적인 영상이라면서 제게 하나의 파일을 보내주셨습니다.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 ‘아메리칸 갓 탤런트’ 무대에 오른 제인 마르크레프스키라는 어느 여가수의 영상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기 전 인터뷰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이 노래는 서른 살 내 생명의 마지막 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여성은 폐와 간 그리고 척수까지 전이된 암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작곡으로 ‘It’s Okay’라는 제목의 노래를 들고나왔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습니다. 노래 후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이 쉬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행복해지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나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주변의 환경이 먼저 바뀌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일분일초가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의 행복을 위해 먼저 결심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라면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종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삽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을 언제 얻을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언제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늘 나라에 갈지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1독서의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라는 민수기 말씀처럼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즉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삶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후회는 늘 남이나 주변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면서 기다릴 때 생기는 감정이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남보다 ‘나’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를 줄이면서 행복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설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많은 결심을 합니다. 올해에는 남 탓, 주변 탓, 환경 탓에서 벗어나서,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탓’만 하다가 결국 후회만 남는 마지막 날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을 힘주어서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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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은 비일상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 존재한다(고레에다 히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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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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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설날입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2022년은 범의 해입니다. 비범하고, 대범한 것도 좋지만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맛볼 수 있는 2022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마스크 없이 서로의 환한 얼굴을 마주보고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2022년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한해를 덤으로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지난 한해 인생의 그림을 성공적으로 그렸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지난 한해 시작부터 인생의 그림을 망치고 후회와 번민 속에서 한해를 마쳤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잘 그리던 인생의 그림이 끝에 가서 그만 엉망이 되어버린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에게 새로운 한해라는 흰 색의 도화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배려와 따뜻하신 사랑에 감사를 드리면서 새로운 한해 열심히 인생의 그림을 그려야겠습니다.
뉴욕에 있으면서 코로나 검사를 3번 받았습니다. 별 증상이 없어서 가능하면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동료 신부님들이 외부활동이 많으니 받아보라고 해서 부득이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를 받고 하루가 지나면 인터넷으로 결과를 알려줍니다. 음성이 나왔을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손수 검사할 수 있는 도구가 있습니다. 신부님 4명이 약국에서 구입해서 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다행히 4명 모두 음성이 나왔습니다. 오미크론이 등장하면서 주위에 많은 분들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검사를 받으면서 3부류의 유형을 보았습니다. 본인과 타인의 안전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자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행을 가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려면 증명서가 있어야 하기에 검사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피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검사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증상이 없는데도 확진 판정을 받으면 격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좋은 생각’ 12월호를 읽으면서 ‘회피, 도피, 대피’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피한다는 의미에서는 비슷하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많이 달랐습니다. 회피는 무의식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코로나 검사를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회피는 가상의 위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회피는 위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회피는 위험을 외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피는 의식적인 차원의 반응입니다. 도피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도피는 실재하는 위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면 일단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도피는 위험에서 멀어지고 위험을 느낀 대상에서 확실하게 도망치는 것입니다. 대피는 아직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생길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준비입니다. 어릴 때 민방위 훈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입니다. 컴퓨터의 자료들은 외장하드에 따로 저장해 놓기도 합니다. 삶의 태풍이나 폭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당 할 수 없는 문제와 역경 앞에서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위험이 약해지거나, 감당할 힘이 생길 때 앞으로 나가면 됩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마귀가 팔을 벌려 수레를 막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강한 상대에게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을 일컫습니다.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너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니 자공이 답했습니다. “저는 길에서 주워들은 것을 제 것인 양 떠벌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만용을 용기로 아는 자를 미워합니다.” 세상길을 걸어갈 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만용은 용기와 다릅니다. 셰익스피어는 “세상에 환영받는 충고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새해에는 남의 탓과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기 전에 좀 더 신중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남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욱 성실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도 더욱 건강하시고, 소망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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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복福(성인聖人)이 됩시다
-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
새벽 일어나 숙소문을 열으니 새하얀 눈이 온누리를 덮었습니다. 새하얀 침묵의 축복이 온누리에 내린 듯 잠시 황홀했습니다. 새해 첫날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어제 1월의 끝은 오늘 2월의 시작입니다. 1월 달력을 넘기고 2월 달력을 보는 순간 새로운 풍경의 사진과 더불어 와닿은 깨달음입니다. 2월1일 오늘은 음력으로 새해 첫날인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여전히 코로나로 우울하고 힘든 날의 연속이지만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니 앞으로 날마다 주님의 복이, 주님의 성인이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복중의 복이 주님의 성인이 되는 복입니다. 누구나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미사중 화답송 후렴 역시 그대로 주님의 복이 되게 해달라는 간청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것이 강복을 주는 일입니다. 하루에도, 그러니 사제수품후 얼마나 많은 강복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존재 자체가 주님의 복이 된 듯합니다. 면담고백성사후는 꼭 보속으로 말씀 처방전의 영약과 더불어 강복을 드립니다. 역시 복중의 복이 말씀의 복일 것입니다. 말씀과 하나되면서 주님의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령은 온누리에 강복하시고, 슬픔과 불안과 병고중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위로와 평화와 치유를 주소서.”
새벽마다 산책시 수도원 십자로 한복판에 서서 동서남북에 십자강복을 하면서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오늘 새해 첫날 설날 미사 중 세 기도문이 은혜롭고 아름다워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마음 깊이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 하느님, 오늘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오니,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베푸시어, 저희가 조상을 기억하며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본기도.
“주님, 새해 첫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감사와 찬미의 예물을 봉헌하오니,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한 해 내내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예물기도.
“주님, 이 거룩한 친교의 제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올해도 저희가 주님의 보호로 모든 해악에서 벗어나, 언제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영성체후 기도.
한 마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의 복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로, 오늘 강론 제목과 일치합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면서 받은 주님의 축복이 그대로 여러분에게 주어집니다. 창세기 내용중 일부 인용합니다.
“내가 너에게 큰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12,2-3참조)
바로 아브라함과 예수님은 물론 우리 하나하나에게 해당되는 복된 말씀입니다. 복중의 복이 하느님 자녀다운 복일 것입니다. 그러니 복받은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며 살도록 합시다. 문득 생각나는 말마디입니다.
“그대 하느님의 자랑이듯, 하느님 그대의 자랑이어라!”
얼마나 멋집니까! 이런 긍지와 자부심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고 멋지고 예쁘고 아름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를 구약에서 찾아보니 ‘사제의 축복’이란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천주교 사제로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얼마나 좋은 주님의 복인지요! 공동체 전체는 물론 우리 하나하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복입니다. 그러니 축복받은 형제 하나하나가 참으로 귀한 하느님의 선물이자 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형제를 내몸처럼 사랑해야 맞는 것입니다. 새삼 인간의 정의는 주님의 복덩어리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런 귀한 존재의 나를 방치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만큼 큰 불경의 죄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슬프게 하는 죄가 바로 이런 죄입니다.
복중의 복이 평화의 복이요 겸손의 복이요 깨어있음의 복입니다. 주님께 평화를 주십사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가 되게 하여 주십사 기도하는 것이요 주님의 겸손이, 깨어있음이 되게 하여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무지에서 나오는 자만입니다.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각자 본분을 알아 주님의 뜻에 따라 선물 인생 살라는 것입니다. 연기는 안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지 살아 있는 한 하느님 공부가 제일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생명과 사랑의 영원하신 하느님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저절로 회개와 더불어 겸손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 삶의 궁극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이신 하느님을 망각하여 불행하게도 폐인니아 괴물로 전락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복받은 귀한 존재임을 생각한다면 자살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슬프게 하는 것이 자포자기의 절망이요 자살일 것입니다.
다음 깨어 있음의 복입니다. 막연한 깨어있음이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의 깨어 있음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음의 기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주님이 아니곤 기다릴 대상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저는 하루하루 날마다 매일 주님을 기다렸다 만나는 기쁨에 살아갑니다. 새벽마다 주님 뵈올 기쁨에 잠깨어 강론을 씁니다. 잠자리에 들면 기다렸던 주님 품에 안기듯 잠이 듭니다. 주님의 다음 복음 말씀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음은 영성생활의 목표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도 깨어 있음을 목표로 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죽음이, 불행이, 사고가, 병이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유비무환의 대책에 깨어 있음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참 중요한 것이 깨어 있음의 영성훈련입니다.
하루중 깨어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깨어 있음의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깨어 있음의 사랑이자 생명이요 빛이자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의 침묵이자 아름다움이자 기품이자 존재의 향기입니다. 깨어있을 때 어둠의 유혹도 범접치 못합니다. 깨어 있음은 하느님의 현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깨어 있음의 축복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깨어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온갖 좋은 축복을 내려 주시어 우리 모두 당신의 복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얼마전에 나눈 새해 소원 기도문을 다시 나눕니다. 새해 소원을 평생 소원으로 바꿨습니다. 한마디로 복의 근원인 하느님이, 하느님의 복이 되게 해달라는 청정욕의 절정이 되는 기도입니다. 이런 소원은 하느님께서도 흡족해 하실 것입니다.
평생 소원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모세처럼
하느님과 대면하여 대화 나누고 싶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이
당신의 빛이
당신의 영이
당신의 품이
당신의 꿈이
당신의 뜻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길이
당신의 문이
당신의 복이
당신의 종이
당신의 벗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증인이
당신의 배경이
당신의 반석이
당신의 생명이
당신의 은총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현존이
당신의 성체가
당신의 신비가
당신의 거룩함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침묵이
당신의 경청이
당신의 순종이
당신의 환대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온유가
당신의 겸손이
당신의 가난이
당신의 비움이
당신의 충만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미풍이
당신의 미소가
당신의 향기가
당신의 순수가
당신의 섬김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친절이
당신의 연민이
당신의 치유가
당신의 지혜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인내가
당신의 자유가
당신의 기쁨이
당신의 정의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평화가
당신의 위로가
당신의 격려가
당신의 선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자랑이
당신의 행복이
당신의 찬미가
당신의 감사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승리가
당신의 영광이
딩신의 천국이
당신의 모두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 성모님이
성요셉이
성아브라함이
성모세가
성요한이
바로 그러하였나이다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眞我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원
단 하나 이것뿐이옵니다
오, 주 하느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아멘
-2021.12.8.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드린 헌시獻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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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음력으로 새해 첫날을 보내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고대 사람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즐겨 입었기에,
일을 하거나 여행을 떠날 때는 움직임을 편하게 하려고
긴 옷을 허리띠로 조절하고 동여매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허리에 띠를 매고 있으라 함은 즉시 움직이거나
일할 채비를 미리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불이 켜진 등불은 집 안에 있는 사람이 깨어 있음을 뜻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맞이하려면
종은 등불을 켜 놓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고 늘 깨어 기다리는 자세.
새로운 한 해의 출발점에 선 우리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다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천 년 동안 오지 않은 재림의 순간이 설마 오늘은 아니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 우리는 동여맨 허리띠를 풀고 긴 옷을 느슨히
늘어뜨린 채 주인이 되도록 늦게 오기를 바라는 게으른
종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재림 때만이 아니라
매일같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그 앞에 서서
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는 자’는 사실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 다가와 문을 두드리시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재림 때 맞이할 주님을 이미 일상에서 맞이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깨어 기다리는 시간은 더 이상 지루할
틈이 없는 기쁨의 시간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기다리느라 고생한 종들을 위하여 몸소 시중을 드시는
주인의 감동적인 사랑을 충만히 느끼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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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 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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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 40)
우리가
놓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마음이다.
따뜻한 마음이
삶의 버팀목이
되고 관계의
아랫목이 된다.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이
되어간다.
설명절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따뜻한 마음의
축제이다.
살지 못한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삶의 기쁨이다.
삶을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따뜻한 사랑이
그립다.
모든 것은
처음과 똑같이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또한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준비하는
삶이란
복음안에서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은총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땅에서
설명절을
맞이한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우리들이
세상을 더
건강하게
만드시는
하느님께
협력하는
자녀들이길
기도드린다.
삶속에
설명절이
있다.
삶의 리듬에는
슬픔도 기쁨도
있다.
하느님의
손으로 만드신
이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길
기도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진실되게
복을 빌어주며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설명절의
생명력은
우리가
놓치고 사는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건강하고
건전한 삶을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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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깨어 있어라.>
우리가 새해를 맞이한 것은, 우리의 공로나 능력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조금 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나의 시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시간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고,
또 그만큼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 빌어주는 ‘새해의 복’은,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만 바라는 일이 아니라,
아무 두려움 없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설날의 복음 말씀은 바로 그것을 묵상하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이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지금’입니다.
신앙인은 ‘지금’ 깨어 있어야 하고, ‘지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는 말씀은,
‘지금’ 준비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이라는 말씀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이라는 뜻인데,
‘때’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그 ‘때’를 마음대로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7,21).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종말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종말의 날’이라는 말은
이미 시작된 종말이 ‘완성’되는 때를 뜻합니다.)
따라서 “문을 두드리면”이라는 말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에
문을 두드린다는 말이 아니라, 주인이 이미 도착해서
‘지금’ 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으로만 생각하면,
이 말씀이 실감나지도 않고, 긴박감도 생기지 않고,
막연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임종’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뜻이 분명해지고, 느낌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 가고,
수술실과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깨어 있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이 더욱 실감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몇 시간 뒤에 끝나는지,
오늘 끝나는지, 내일 끝나는지, 그것을 모르니까,
하느님 앞으로 갈 준비도 ‘지금’ 해야 하고, 회개도 ‘지금’ 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신앙생활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잘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생활”로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현실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 앞으로 갈 준비를 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무의식중에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언젠가” 생길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지금의 일’이 될 수 있음을 의식하면서
자만하지 않고 방심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곧바로’ 라는 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회개할 시간 없이 곧바로 심판이 진행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이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곧바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고,
왜 벌써 부르셨냐고 항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떠나야 합니다.
여기서 ‘행복하다.’는 ‘복되다.’(복을 받을 것이다.)인데, ‘복’은 ‘구원’을 뜻합니다.
주인이 종들의 시중을 들 것이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실제로 주님께서 제자들의 시중을 드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ㄱ.13).”
제자들은 그때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충실한 종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만,
뒤의 45절-46절에는 ‘불충실한 종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5-46).”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행복과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처벌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는
‘지금’ 각자의 선택과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이 말씀은 그날은 틀림없이 온다는 것과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는 것,
그리고 ‘지금’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입니다.
여기서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가, 즉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당하는 일이 없도록
평소에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훈계입니다.
잘 준비한 사람에게는 그날은 갑자기 당하는 무서운 날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행복을 누리는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1테살 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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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준비하며 맞는 하느님의 축복 ♣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
설날은 산 이와 죽은 이들의 축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데 모여 조상들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서로를 축복하며 감사와 기쁨을 나눕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이 축제의 주인이신 주님이 누구이신지 생각해야겠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조상들과 우리에게 해주신 은총에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제 1독서에서 주님은 축복의 원천이요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한편 제 2독서 야고보서에 따르면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나약한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길을 충실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내 삶을 주관하시는 선하신 주님의 축복 안에서 축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한 길을 제시해줍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 주님을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까요?
우리는 복음에 나오는 종처럼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 맞이할 준비를 하고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만이 온갖 선의 원천이시요 주인이시기에 우리는 그 좋은 것을 받기에 합당한 자세로 기다려야겠습니다. 오시는 분이 내 주인임을 인정하고 그분께 좋은 것이 있음을 믿으며 사랑의 설렘 속에 기다리는 것이 복받을 사람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믿음과 희망 속에 오시는 주님을 인내롭게 기다릴 때 주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주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기다리던 종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주십니다(루카 12,37).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섬김을 친히 받는 것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까요?
그런데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생각지도 않을 때에"(12,40) 오신다 하시니 그분의 섬김을 받는 축복을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도권이 주인에게 있으니 내가 복을 받고 싶은 때에 오시라고 할 수도 없지요. 주님께서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 세 가지 조건, 곧 깨어 있음, 합당한 준비, 인내하며 기다림을 요구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오시는 분이 나의 주인이시며, 좋은 것을 주시려고 오심을 의식하고 그분께 집중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합당한 준비란 사랑과 겸손의 자세로 주님을 맞아들여 함께할 내적 외적 준비를 말합니다. 그러나 준비하고 깨어 있다 해도 사랑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한다면 헛된 일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설 명절을 맞아 우리가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며 복된 축제를 열어주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으면 합니다. 사랑의 설레임 속에 사랑하는 님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을 키워가야겠지요. 사랑의 마음과 사랑 실천을 멈춘 채 잠들어버린다면 축복은 지나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늘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것은 또한 주님께서 벌려주실 축제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잠들게 하는 세상 유혹과 고달픈 시련, 기다림을 포기하고 내 뜻대로 살려는 어리석음에 맞서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 사랑의 주님을 갈망하고, 인내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며 주님의 섬김을 받게 될 행복을 그리워하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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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번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너무 전투적으로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저희 피정 센터에 멋진 야외 식당을 개장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피정객들이 몰려오셔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명절을 이곳에서 지내시는 분들이 계셔서 열심히 요리를 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밥이 최고더군요.
가마솥 찰진 밥으로 밥을 얹히고, 부랴부랴 제 특기인 자연인표 김치찜에다가, 모듬 조개탕에다가 맛갈진 마약 김치에다가, 순식간에 10인분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화목 난롯가에서, 밖에는 펄펄 함박눈이 내리는데, 다들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드셔주시니 제 마음이 얼마나 뿌듯하고 훈훈해졌는지 모릅니다.
또 다시 맞이한 설 명절입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가족·친지들과 함께 지내면서, 내가 윗사람이니, 니가 아랫사람이니 따지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앞다투어 따뜻하고 맛갈진 밥 한 끼 차려주면 좋겠습니다.
괜히 14후퇴 때 서운했던 이야기 꺼내서, 또다시 상처를 주고받지 말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것 먹어봐라, 저것 먹어봐라, 잘 먹어야 힘이 나지, 하면서 격려해주고 위로해주는 이번 명절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두번째 독서인 야고보 서간은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요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보서 4장 14절)
특별히 설날 아침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추모하는 분들, 제삿상 건너 편에 앉아계신 분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
나라며 가문, 공동체나 가정 전체를 쥐락펴락, 좌지우지 하셨던 분들...
그 권세, 그 위세가 백 년, 천 년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50년 지나가니, 그 모든 분들,
마치도 한 줄기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우리네 눈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우리 역시 불과 30년, 50년 후면 어쩔 수 없이 그분들 뒤를 따라나서겠지요.
생각할수록 참으로 아름다운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어찌보면 야고보 서간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입니다.
이 세상 일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 영혼이나 상위 가치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순식간에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재산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세상 모든 확실성은 오직 하느님께만 기인합니다.
뭐 엄청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네 인생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 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전투적으로도 살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도 않되겠습니다.
찰라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마주한 가족들, 친지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이 세상 소풍의 둘도 없는 동반자들입니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배려하고 서로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오랜만에 가족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설 명절은 서로를 향한 더 많은 배려와 지지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내 목소리는 좀 많이 줄이고, 상대방의 말을 더 많이 경청해야겠습니다.
공동체가 좀 더 살아나기 위해, 내가 좀 더 작아지고 겸손해지며, 좀 더 부드러워지고 온유해져야겠습니다.
우리 가정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서로를 위해 그런 노력을 지속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 가정을 기쁜 마음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기 6장 24~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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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전삼용 요셉 신부님.
꿈에서 본능이 통제되지 못하는 이유: 잠이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
오늘은 우리의 명절 ‘설’입니다.
설은 한 해의 시작입니다.
시작은 마침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심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있으라는 내용입니다.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깨어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주인이 그들을 시중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한 명의 종을 대상으로 시중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고 하십니다.
또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에게 시중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에 머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유튜브에 개신교 ‘다니엘라’라고 하는 여자 청년의 간증이 있습니다.
20대로 보이는 이 자매는 부모님을 지독히 미워하였고, 학교에서는 집단 따돌림을 받는 아이였습니다.
그 외로움 속에서 동방신기라는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팬클럽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게 된 동성애자들 때문에 자신도 동성애자가 되었습니다.
가족이 그녀를 깨어날 힘을 주지 못했고, 그녀는 예뻐지고 유명해지려는 것, 육체의 쾌락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두바이로 가서는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렸고 어느새 인스타 유명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텅 비어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가끔 나가기는 했지만, 설교시간에 나가 화장을 다 고치고 돌아오면 목사님 설교는 이미 끝나있는, 뭐 그런 신앙인이었습니다.
외로워도 보았고 유명해져도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먼지를 먹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니엘라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찬양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한 오래된 동영상이 그녀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1990년대의 교회 집회 영상이었습니다.
세련되지도 않고 그야말로 오래된 기도회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는 뜨거웠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기도하며 찬양하는 그 뜨거움이 다니엘라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다니엘라는 지금 청년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그런 뜨거운 교회 공동체가 사라진 것이라 말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찾지 않고, 무엇보다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데 왜 요즘 친구들이 하느님을 못 만나냐면 정말 전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교회가 없어서 그래요.
제가 하느님 그렇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께서는 저같이 악한 자를 하느님께로 돌이키시게 하려고 어떤 세련된 말,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고, 누가 나에게 찾아와서도 아니고 그냥 우리나라 성도들이 모여서 나라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찬양하는데 거기서 예배가 진실하게 드려지니까 그걸 통해서 저에게 임재해 주시는 거예요.”
왜 공동체가 사람을 바꿔놓을까요? 양심을 작동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혼자 있을 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리스도 공동체에 속하면 엄청난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변하고 싶은 사람은 변화된 공동체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이 깨어있을 줄 아는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은 함께 머무시는 은총을 주십니다.
깨어있음과 반대로 잠은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꿈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꿈은 바로 자신의 ‘무의식의 표현’이라 하였습니다.
무의식이란 바로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잠에 빠졌을 때 양심이 작동하지 않아 욕망이 활개를 쳐서 그런 꿈들이 제어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몸이 아프다고 하며 프로이트를 찾아왔습니다.
프로이트는 몸의 증상도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몸이 아픈 이유를 꿈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꿈은 무의식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통로로 보았습니다.
그녀가 자주 꾸는 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녀가 조카가 죽어서 장례식에 있었는데 그녀는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심지어 기분이 좋은 마음마저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조카가 죽었는데 기분이 좋다는 것에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비슷한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가 언니의 남편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그러한 관계를 언니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는 형부와의 관계를 청산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언니가 죽게 된 것입니다.
언니가 죽으니 다시 형부와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서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일입니다.
프로이트는 원초적 욕망을 ‘원초아’(Id)라 하였고, 이 욕망을 제어하는 양심과 같은 기재를
‘초자아’(Super-ego)라 불렀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처음엔 원초아밖에 없습니다. 원초적 본능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아는 초자아보다 더 먼저 형성되는데 젖을 먹고 싶은데 숟가락이 입에 들어올 때 생겨납니다.
자신의 욕망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자아가 생기는 것입니다.
초자아는 부모님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특히 배변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에 세상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사회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더 활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원초아 – 자아 – 초자아는 가정에서 사회성이 형성되면서 함께 발달한 것이기에 덜 사회적일수록 더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더 사회적일 때 더 윤리적 인간이 됩니다.
요즘 가정이 많이 분해되고 있습니다.
명절은 특별히 가족이 왜 한 데 모여서 친교를 나누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가족은 바로 우리가 생존 본능에서 양심에 통제받는 사람이 되는 성장을 처음으로 이룩한 공동체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때는 우리가 왜 교회 공동체에서 형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현명한 처녀, 미련한 처녀 내용에서 미련한 처녀들은 현명한 처녀들 안으로 들어올 줄 몰랐습니다.
현명한 처녀 무리로 들어왔다면 그들이 하는 일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얻어지는 성령의 기름으로 죄에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다섯이라는 육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섯이라는 성령으로 육체를 이긴 이들 무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원초아를 눌러줄 초자아는 반드시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 힘을 발휘하는 특징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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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설 명절 미사-묵상과 기도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 하느님,
오늘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오니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베푸시어
저희가 조상들을 기억하며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음력 정월 초하루 오늘, 설날에 조상들을 기억하고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립니다. 덕담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가족과 공동체의 친교와 사랑을 나눕니다. 설 명절을 맞이하여 모두에게 복과 평화를 빕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민수 6,22-27
사랑하는 여러분,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야고 4,13-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35-40
실천
축복, benedicio. 곧 좋은 말씀, 복된 말씀이 '축복'입니다. 말 한마디에 천량 빚을 갚는다. 말이 '씨'가 된다. 고 합니다. 콩 심는 데 콩나고 팥 심는데 팥이 납니다. 복있는 말을 전하면 '복'이 되고, 사랑의 말을 전하면 '사랑'을 받게 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그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복이 있는 이와 거룩한 이에게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복의 시작은 축복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사제인 아론은 새해 첫날에 그 축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빌어주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 향하고 그분의 얼굴을 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그 은혜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설날, 여러분이 그 마음을 하느님께 열 수 있다면, 그분께 마음의 문을 활짝열고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다른 형제들에게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기회와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면, 올 한 해 주님의 크신 사랑과 그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의 은혜를 청하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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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은 말씀의 날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을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32
설 명절에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그리고 넘치도록 받으소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고백합니다.
'축복'은 좋은 말, 선한 말, 복이 있는 말, 거룩한 말입니다. 그렇게 축복합니다.
복 받으십시오. 하고 말하면 복이 오고, 사랑합니다. 말을 하면 사랑이 솟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감사가 오고, 감사가 넘칩니다.
상대가 무리한 말을 하고, 불편하고 거북스럽게 말을 해도 내가 편한하게 시원하게 기쁘게 말을 하면 그 순간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희망이 솟습니다. 그 희망 다음에는 기쁨이 다가옵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 그분의 은혜를 찾는 것입니다.
성경은 새해 첫날에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아론과 그 사제들은 백성들에게 주님의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 복을 빈다는 것은 주님께 마음을 돌리게 하고 마음으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그분의 알고 그분의 얼굴을 보며 그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특히 고해성사에서 그분께 말씀드리고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미사에서 성체를 모시고 그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머무시고, 내 안에 그분이 머무시니 두려울 것, 무서울 것 없습니다.
우리가 눈을 열고 그분 얼굴을 보고 있으며, 그 마음을 열고 귀를 열면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찬미를 드립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그분 앞에 부끄럽고 잘못을 할 때, 죄를 짓고 탐욕을 부릴 때입니다. 그것을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넘어선 사람은 늘 그분의 얼굴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좋고 아름답고 행복한 곳으로 나아갑니다.
죄와 허물, 그 부끄러움을 넘어갑니다.
탐욕과 허위를 넘어갑니다.
선과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사랑과 평화의 길을 걷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정의와 공정을 걸어갑니다.
칭찬과 격려를 통해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도록 합니다.
복음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전합니다.
이 모든 복된 마음과 그 말씀으로 축복을 전합니다.
오늘 설날. 그날이 명절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으로 복을 전합니다.
화요일은 말씀의 날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을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32
주님, 오늘 설날.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게 하소서. 그 말씀이 제게 살아있게 하소서. 그 말씀이 복된 말씀이 되어 축복이 되게 하소서. 사랑과 자애, 진실과 평화가 되게 하소서. 모두가 행복하게 하소서.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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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십자가도 따뜻한 위로의 말 앞에서는 무너지더군요.
우리는 살면서 많은 강론과 말씀에서 언급하는 십자가를 생각하면 보통 어떤 생각을 할까요?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는 고통이고 또 피하고 싶은 존재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만약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도 '제 십자가'에서 보면 자기만의 십자가가 있을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누구도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품을 것인가 이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세를 받고서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경남 고성에 있는 올리베따노 수도원에서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과 수도원 밖에 있는 방갈로에서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그날 말씀하신 것은 지금은 다 잊었지만 한 가지 기억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진다의 그 진다의 의미가 품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성경적인 번역의 의미를 가지고도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과 품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지는 것은 수동적인 의미를 다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품는 것과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품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지는 것 같은 의미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회피하고 싶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와 함께하는 삶이 우리의 신앙여정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은 지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날마다'라고 하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사는 날까지는 십자가와 공생을 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운명이라면 십자가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십자가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삶 그자체가 고통과 같은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마다의 십자가를 매일 그것도 지어야 한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길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중의 한 방법이라면 그건 무자비한 하느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무자비한 하느님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리는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어야 할 십자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십자가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십자가는 고통이고 짐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만약 그게 진정 고통이라면 그런 하느님은 당장에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의 각도를 조금 다르게 보면 어떨까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인데 그 창조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즐기시겠습니까? 이런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뭔가 우리가 모르는 피치 못할 하느님의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영국 국립 박물관에 도자기 하나가 전시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불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고 하나는 불에 들어간 도자기였던 것입니다. 수상이 그 이유를 관장에게 물었습니다. 왜 불에 들어가지 않은 도자기를 전시했는지 말입니다. 불에 들어가지 않은 도자기는 도자기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무언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둘을 나란히 전시했던 이유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가 세상이라는 불가마 속에서 달구어지는 도자기와 같은 것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주인은 언젠가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 것 같습니까? 복음에서는 깨어 있는 것을 강조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와 연관지어서 깨어 있다는 의미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십자가를 품을려고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품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 그자체를 보면 절대 품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 자기만의 아킬레스건 같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에게는 많은 십자가가 있지만 공동체 내에서 겪는 십자가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본당으로 교적을 옮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밝힐 수가 없습니다. 정말 세상 집단 같으면 고민도 할 것 없이 여기 아니더라도 다른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한 누나가 말을 했긴 했습니다. 지금 조금 고통스럽다고 다른 본당으로 옮긴다면 베드로씨는 패배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씨를 응원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에겐 참 이 문제가 어려운 십자가입니다. 얼마전에 최종 결종을 했습니다. 아예 먼곳으로 이사를 해서 교적을 옮기려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까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평소 가까이 지내는 형제님께 저의 이런 고민을 여러 차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한번 찾아가 이런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이때 이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어려운 것은 알지만 그래도 참고 우리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같이 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인정에 약한 게 저의 단점입니다. 완곡하게 말씀하시면서 같이 공동생활을 하자는 말씀에 또 저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십자가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번에 무너졌다고 해서 또 안 생긴다고는 보장을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십자가와 싸우는 게 신앙인 것 같습니다. 만약에 신앙에서도 이런 형제님이 없었다면 저는 그냥 교적을 다른 본당으로 옮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저희 본당에 계시는 누나인 자매님이 하신 말처럼 그냥 패배자가 되어 다른 본당에서 생활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누나가 인간적인 표현으로 패배자라고 했지만 누나도 저희 본당에서 같이 생활했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표현으로 저의 생각을 단념하게 하려고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와 상관없이 만약 누나의 표현대로라면 제가 저의 십자가를 잘 이기지 못해 교적을 옮겼더라면 제 신앙의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기는 선례가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앙 안에서 위로의 따뜻한 말 한 마디였던 것입니다. 또한 보이지 않게 응원해 주는 자매님 같은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안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지금 나의 따뜻한 한 마디와 또 남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며 위로하며 사는 게 그 사람에게는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를 들어줘서 한결 수월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도 큰 사랑 실천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해서 꼭 거대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인사를 해도 상냥하고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하는 것도 인사를 받는 사람에게는 한 줄기 생명과도 같은 빛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따뜻한 미소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가치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걸 많이 느낍니다. 어쩌면 따뜻한 미소 하나가 사람의 영혼에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가 모르는 그만의 십자가에 눌려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며 하느님을 따라 가는 교우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모르는 우리로서는 그와는 상관없이 만약 그런 상황에 있는 형제자매라면 이때 우리가 전하는 따뜻한 말 한 마디에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아끼지 말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게 된다면 이 또한 하느님의 사랑 실천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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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해 우울해진 신앙을 극복하는 대안을 모색한다면.....
가톨릭 굿뉴스 신앙마당에 묻고답하기 코너에 올라온 내용입니다. 자매님의 친구분이신 교우이신 것 같습니다. 코로나 여파로 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러 가지 활동에 제약을 받다보니 약간 우울증 같은 증상을 가지고 계신다고 토로하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저는 조언을 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누어봤으면 하는 취지로 제 생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코로나 하면 격리와 폐쇄라는 말과 자주 접하게 됩니다. 로마에서 원래는 더 계셔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공부를 접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신 신부님 때문에 제가 사실 신부님도 뵙고 싶은 마음에 인천에 도착 후에 천안에서 격리가 된 후에 천안으로 직접 갔습니다. 저는 관구장님이 서울에서 내려오신다는 말씀을 들어서 실제 먼거리에서 뵌 적이 있었지만 윤주연 베네딕토 신부님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신부님이 내려오셨더군요. 그분도 아시는 신부님인데 중간에 관구장님으로 되신 것입니다. 저는 그날 알게 된 것입니다. 마산에 계실 땐 성소담당 신부님이셨습니다. 이날 신부님과 관구장님과 천안에서 식사를 하고 신부님과 광주 수도원으로 가면서 그동안 메일로만 주고받았다가 단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방금전에도 신부님으로부터 문자를 받았지만 신부님과 알게 된 세월이 6년 정도 되지만 단 한 번도 세상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영적인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부님은 저와 이제는 신분을 떠나서 영적인 친구처럼 지냅니다. 신부님께서 격리중에 있었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옆 방에 한 아가씨가 있었는데 격리가 며칠이 되니 처음엔 노래를 부르다가 나중엔 소리도 지르고 했다고 합니다. 요즘 같으면 폰도 다 있고 해서 그 안에서 인터넷으로 소통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만약 제가 저런 상황이라면 답답한 면은 분명 있을 겁니다. 저도 힘은 들긴 들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고 또 때로는 성체 앞에서 조배를 하는 것과 같은 기도로 어느 정도는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긴 다르지만 2차 세계대전 때 이런 것을 실험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자유를 박탈되게 되면 심리적으로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의도적인 폐쇄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말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퇴직을 한 후에는 그동안 열심히 일을 했으니 퇴직 후엔 열심히 자기 시간을 가지고 여행이나 하면서 즐겁게 인생을 보내고자 한다고 말입니다. 막상 그렇게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도 힘든 생활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뭔가 구속되는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구속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구속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인간은 생존을 하면서 의미를 추구하는 가치실현을 느껴야만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게 되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삶이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어느 일정 기간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걸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간도 무작정 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유통기한처럼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기간을 벗어나면 그런 생활마저도 단조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단조로움에 뭔가 의미가 있다면 결코 단조로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의미가 있는 생활이냐 아니냐 여기서 갈라지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유례없는 팬데믹으로 인해서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예전과 같은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판단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을 시련이라고 말하기엔 그렇지만 역경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역경이 없을 순 없습니다. 생각의 관점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역경이라는 것을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라면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달라야 할 것입니다. 지금 전체적으로 보면 세 가지 현상으로 나누어졌습니다.
하나는 코로나로 인해서 오히려 신앙이 성장한 그룹이 있습니다. 신앙이 떨어진 그룹도 있습니다. 그럭저럭 그런 대로 유지하는 신앙도 있습니다. 두 가지의 경우는 이해가 될 수 있는데 코로나로 성장한 신앙이라고 하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근데 사실 심리적으로 보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랜 시간 애들을 지도한 사람입니다. 어학이라는 것은 단시간에 지식을 올리기 힘듭니다. 어학은 인내와 반복과 싸움입니다. 사실 무엇보다도 머리도 머리이지만 지루함과 싸워야 합니다. 알아도 끊임없이 반복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나라 말을 잘 배울 수 없습니다. 저는 애들한테 방학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항상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평소에 공부하는 양도 중요하지만 실력이 뒤처진 사람은 방학이라는 것을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실력을 보충할 수 있는 시간이자 기회라고 말을 합니다. 실제 애들을 봤을 때 제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이런 생각을 가진 아이도 있습니다. 똑 같은 시간과 환경이 주어졌을 때 실력이 떨어진 아이는 그 시간을 이용해 자신의 실력을 보충할 시간을 버는 학생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실력이 더 나은 학생은 더 실력을 보충할 시간으로 만드는 학생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논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욕심은 좋은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만약 지금까지 나의 신앙이 조금 미진했더라면 이때 지금까지 하느님께 부족한 자신의 신앙을 보충해서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 돼 열심히 해서 보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면 힘을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팬데믹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인식을 바꾸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는 이번 코로나 시국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로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기회는 누구나 다 적용되지만 살리는 사람이 있고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성숙도에 상당한 차이기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시간에 신앙을 지킬 수 있기 위해서 자기만의 노하우를 만들어야 하고 또 그런 신앙생활이 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건 교회가 해 줄 수도 있지만 천주교의 생태를 보면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자기가 살 방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정부방침을 따르면서 신앙 안에서도 마음에 맞는 신앙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나이가 비슷하면 좋겠지만 굳이 나이가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신앙인이라는 틀 안에서 사람을 만나면서 서로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기쁨과 슬픔을 교감하는 것도 우울한 신앙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이게 아주 좋은 방법이 될 거라고 저는 확신하는 정도입니다. 이건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지극히 최소한의 몸부림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수준에서 머문다면 코로나 이전의 신앙과 비교해봤을 때 그냥 그럭저럭 하는 신앙과 같을 것입니다. 그 수준을 넘어가기 위해서 그럼 어떤 것을 하면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교우들과 교제를 하면서 자기만의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신앙이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세상 모든 것과 떨어져서 하느님과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진다면야 그처럼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사랑하는 수도자라도 그렇게만 하고 살아라고 한다면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말씀을 공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성장도 성장이지만 신앙을 잘 유지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쩌면 성장보다는 유지가 더 현실적인 의미가 있을 겁니다.
앞으로 팬데믹이 어떻게 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설령 지금 코로나 사태가 종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역사를 보면 또 앞으로 어떤 바이러스가 인류를 위협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만약에 앞으로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이 된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럼 이론적으로는 코로나 이전의 신앙생활로 돌아갈 것 같은지요?
저는 그게 쉽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가 일어난 지 근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신앙생활을 떠나서 사회학자들이 진단하기로는 지금 시점은 코로나 이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임계점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금의 상황에서는 종식도 종식이지만 설령 종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신앙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앞으로 몇 년을 단기적으로 바라보는 신앙에서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시간 동안 어떻게 생존할지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 유지해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잘 유지할 거라는 보장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힘들 것입니다. 그건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신앙의 유통기한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1년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3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유통기한을 늘려야 할 것입니다. 이 길만이 지금의 어려운 시간과 역경을 잘 해쳐나갈 수 있을 겁니다.
장문의 글을 작성했지만 결론은 단 한 줄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한 줄로 결론을 말할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장문을 작성한 이유는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신앙을 놓치지 않고 붙들 수 있을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시간이 계속 지속된다면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조금씩 신앙에 균열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지금 괜찮다고 해서 언제나 괜찮을 거란 생각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유비무환'일 것입니다. 비단 우울한 신앙으로 되는 문제만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우울한 것도 문제지만 우울한 것도 차라리 낫다고 평가할 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언제일까요? 만약 신앙이 격격하게 떨어져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리 됐을 때입니다. 그땐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차라리 우울할 땐 우울하긴 했지만 하느님과 이처럼 관계가 멀리 소원하지는 않았지 않았던가 하면서 말입니다.
한 가지 마지막으로 다시 추가할 내용이 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신앙이 위축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코로나가 없었다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건 의미없는 반복된 신앙생활이 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삶에 있어서 의미가 없다면 또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삶 그자체가 무미건조한 삶이라고 생각해서 우울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우울증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팬데믹으로만 볼 게 아니고 시야를 넓혀서 자신의 신앙 반경을 넓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변화가 없기 때문에 지루한 신앙으로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지루한 것으로 생각된다면 바로 신앙의 권태기가 될 것입니다. 신앙의 권태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지금까지 해왔던 신앙의 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줘야 할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없다면 결국 하느님과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지금 이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해서 하느님을 놓치지 않고 이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많은 고민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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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1. 설. 김 로마노 형제님.
음력설 제1독서 (민수 6,22-27)
◀구약의 사제(제사장)의 임무▶
① 사제는 <(번)제단>에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성결케 하는 일을 행했다. (레위16,18-19) (번)제단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갈바리아산 십자가 제단을 의미한다.
② 사제는 <물두멍>에서 수족을 닦는 일을 행했다. (탈출30,19-21) <물두멍>의 씻음은 영적으로 회개와 성령을 의미한다. 날마다 자신을 씻어야 하고, 씻어야만 <성소>에 들어가 봉사를 할 수 있고 씻지 않으면 죽었다.
③ 사제는 <제사상>에 <제사빵>을 놓아 두어야 했다. (탈출 25,30 : 레위24,6-8) 사제는 성소안에 있는 제사상에 매 안식일마다 12개(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를 올려 놓아야 한다. <제사빵>은 영적으로 생명의 빵(성체)이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④ 사제는 <등잔대>(탈출25,31-40)에 불이 꺼지지 않게 점검하고, 정리하는 일을 했다.(탈출30,7-8) 올리브유의 순결한 기름으로 등불을 켜고, 저녁부터 아침가지 사이 사이 점검하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사명이 있었다. 이 빛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일곱 등불은 칠성사를 상징한다.
⑤ 사제는 <분향 제단>에 향을 피워야 했다. (탈출30,7-8) 사제는 아침마다 향기로운 향을,<등>을 정리(손질)할 때와 저녁(해거름)에 등을 켤 때도 피워야 한다. 사제는 분향 제단에서 향이 끊이지 않고 타오르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향을 피우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구약의 대사제(대제사장)의 임무▶
① 지성소에서 속죄하는 일을 행했다.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 7월 10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자신과 온 백성들의 지은 죄를 속죄하는 의식의 임무를 담당했다. (레위16,17 : 히브9,7)
② 판결하는 일을 했다. (신명21,5)
③ 만남의 천막안의 모든 일을 총지휘했다. (민수3,21-37 : 4,46-48)
④ 하느님의 말씀(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2역대15,3 :신명6,6-7 : 8,3) 대사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살 수 있도록,가르치는 임무를 담당했다.
⑤ 대사제는 대를 이어 종신토록 직무를 담당했다.
⑥ 대사제는 축복하는 일을 하였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을(레위의 자손 사제들) 선택하시어 당신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며, 그들의 판결에 따라 모든 송사와 폭력 사건이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명21,5)
대사제는 모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 주어야 한다. 주님께서 대사제 아론과 그의 아들들 사제들에게 일러,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축복을 빌라고 하셨다. 그 축복이 바로 유명한 사제의 축복이다. (민수6,24-26)
"주님께서 그대(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6,22-26)
주님께서는 사제가 백성들을 행해 비는 복을 그대로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민수6,27)
주님께서는 사제들에게 축복권을 주셨다. (신명21,5) 축복은 사제가 하지만, 축복을 보장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사제는 계속 축복해야 한다. 주님의 종 모세도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마음껏 축복했다.
바로 유명한 축복장이 있는 곳이 신명기 28장 1-6절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땅의 모든 민족들 위해 너희를 높이 세우실 것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 소와 새끼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음력이든 양력이든 설에는 항상 새해 첫날이기 때문에, 미사를 통해 사제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민수기 6장 22-27절의 말씀을 선포한다.
구약을 통해 사제들의 변천사를 보면, 축복의 변천사도 함께 묵상할 수 있다.
아담으로부터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족장(가장) 사제들이었고, 그 다음 율법시대에는 아론과 그 아들들, 그 다음은 레위지파, 그 다음은 나지르인으로 넘어가다가 이제 신약의 시대에는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말미암아, 만인 사제단이 탄생하였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1베드2,5)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베드2,9)
오늘 음력 설 미사를 통해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사제의 축복을 받은 우리들도,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삶의 노고와 희생을 통해 영적 제물을 바치는 사제이기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가깝게는 가족들, 친지, 친척, 친구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하고 복을 빌어 주자.
2월 1일 [설날]
대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증언하실 성령을 간직하는 것이 깨어 있음이다.
(루카12,35-40)
3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 삶의 중심(허리)을 띠(진리)로~
(에페6,14) 14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 의로움의 갑옷, 예수님의 대속 그 의로움의 옷이다.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진리의 의로움이신 그리스도를 입는 것, 구원이며 한 몸이 되는 혼인이다.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겨 졌으니 신랑,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히브12,2)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 이 모습,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미리 보여 주셨다.
(요한13,3-5) 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대속)는 것을 아시고, 4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5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 겉옷- 죄인들의 대속을 위해 성자 하느님 그 권위를 벗으신 것이다. 씻어줄 모든 죄, 곧 제자(죄인)들이 걸어왔던, 그리고 걸어 갈 길의 모든 죄를 씻어 당신의 영원한 신부로 맞으시려는 것이다.
(히브10,14)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 이 모든 약속, 진리의 말씀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고 기다리는 것, 등불을 켜 놓고 있는 것이다.
38 주인(신랑)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 주님이 밤(어둠)으로 오시든 새벽(빛)으로 오시든, 곧 우리의 삶에 고난(시련)이 있든, 기쁨이 있든 그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시니 희망을 갖고 기다리라는 말씀이시다.
(로마8,28)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구원)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 내가 주인이면 도둑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기름, 곧 진리의 성령께서 주인이 되시면 도둑을 막아 신랑께로 안전하게 이끌어 주신다.
(마태25,3-5) 열처녀의 비유에서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 모두 졸다가 다 잠이 들었다.- 모두 육적 삶으로 영이 잠들었다는 것이다. 등(교회)을 갖고 있으면서, 곧 교회를 다니면서 기름(성령)을 간직한 사람이나, 간직하지 못한 사람이나 겉으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은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름을 간직한 사람, 곧 성령의 이끄심으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람 안에 진리의 성령께서 신랑을 만나게 하신다.
(마태25,10.13)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 구원의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아 마음에 간직한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다.
(로마8,8-10)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믿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믿으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다가의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마음 안에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셔서 모두가 감사드립니다.~아멘.!!!
설날 복음(루카12,35~40)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5~36)
루카 복음 12장 35절에서부터 38절까지는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인데, 루카 복음 12장 35절에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와 관련해서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모습이다.
'페리에조스메나이'(periezosmenai; girded about)는 '띠를 매다'는 뜻의 동사 '페리존뉘미'(perizonnymi)의 완료 수동태로서 '이미 허리에 띠가 매여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허리띠를 지금 당장 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맬 것도 아니며, 이미 허리띠를 맨 상태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입었던 겉옷은 길고, 그 통이 넓은 것이었다.
따라서 일을 할 때나 여행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할 때에는 겉옷을 허리띠로 졸라 매야만 했다.
여기서 종들이 허리에 띠를 맨 이유는 문맥상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느님의 백성들도 혹시라도 나태해져 방심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깨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항상 준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등불을 켜 놓은 상태로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켜 놓고'로 번역된 '카이오메노이'(kaiomenoi; burnning)는 '불을 켜다'는 뜻의 동사 '카이오'(kaio)의 현재 분사 수동태로서 '계속적으로 불이 켜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불을 켜 놓고 있는 목적은 어두워진 이후에도 계속 일을 하며 기다리던 주인을 맞아들이기 위한 것이다(마태25,1~13).
따라서 본문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있어라'에 해당하는 '에스토산'(estosan; let be)은 '에이미'(eimi; be) 동사의 현재 명령형 3인칭 단수로서 '계속적으로 있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에이미'(eimi)동사는 '있다' 또는 '존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가 여기서 현재형으로 사용된 것은 이러한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혼인 잔치'로 번역된 '가몬'(gamon; wedding banquet)의 기본형 '가모스'(gamos)는 혼인 잔치 자체를 가리킨다.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주로 밤중에 이루어졌기에, 그 주인이 혼인 잔치로부터 돌아올 때는 모든 사람이 잠든 시간이 되므로, 그 종들은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라는 교훈을 주기에 적절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러한 배경 설정의 이유만이 아니라, '혼인 잔치'는 천상에서의 기쁨과 영광의 혼인 잔치를(묵시19,9), '그 주인'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혼인 잔치의 집'은 하늘 옥좌를 암시함으로써, 종말론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돌아오는'으로 번역된 '아날뤼세'(analyse; he will return)의 기본형 '아날뤼오'(analyo)는 '풀다'는 뜻에서 발전하여 '떠나기 위해 천막을 걷거나 배의 닻줄을 푼다'는 점에서 '떠나다','출발하다'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는 혼인 잔치 집을 떠난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주님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하늘 옥좌를 떠나 내려오실 것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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