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면허재취득 차량을 장만하고 신이 나서 청주 철당간에 씌어진 내용을 직접 보러 다녀왔습니다
불교의 핵심사상은 만물.. 만민평등 사회적으로는 생명불가침 개인능력 우선주의 입니다
통일신라가 문경세제와 추풍령으로 진입해온 당군 35만을 거의 궤멸수준으로 격파하고 소정방을 참수하였고 잔당들을 청천강 압록강 넘어로 밀어냈으며 이 때문에 고구려의 후신 발해가 다시 봉기할수 있었습니다
나당전쟁이 끝나고 통일신라의 안정기에 장보고는 아랍해까지 세력을 뻗쳤고 중국해와 말라카해협을 앞마당처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은 발해의 궐기와 혼란을 틈탄 북잔들로 인해 혼란했던 상황에서 남쪽변방 해안에서 신라인들이 해적이 되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멈춰주면 다행일까 이겨낼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제해권을 완전히 빼았겼고 해안선을 따라 광활한 땅들을 신라영으로 빼았기게 된 것입니다
통일신라 이전 백제와 고구려 또한 중국대륙에 이민족의 침범하는 혼란기면 해안을 따라 여러 드넓은 점유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저의 어릴적 사회과부도책에도 분명히 중국해안 대분분이 내륙 깊숙히까지 삼국의 영토로 색칠되어 있었지요
사대주의 후조선처럼 중국의 눈치를 살피야 하는 한중수교 이후 현제도 지도에 신라방 구역을 표시하지 않거나 지금의 영사관쯤 면적을 당시의 구역으로 표시하고 있는데요
중국정부가 동북공정의 과정중 신라방 유적을 발굴했는대 백제방도 고구려방도 그 유적지들이 하나같이 담을 둘러친 면적이 넓어도 너무 넓고 건물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작업을 중단하고 되묻어 버렸던 사실이 최근에 있었던 사실입니다
신라인 백제인 고구려인들이 대사관을 저 멀리 북쪽의 낙양이나 장안에 두었다 치더라도 해안가도 아니고 200km를 넘게 내륙에 들어간 곳 현대에도 지리적 요충지로써 큰 도시들의 중심인 위취에 거대한 규모로 영사관을 짓고 담으로 둘러친 외교구역 안에서만 업무를 보며 살았을까요
방이란 글자는 집권수반이 머무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지방관이 근무하는 지방행정 지역이라는 용어이고 그 당시엔 외사업무를 관장하는 해외파견 관청이 따로 있었다기 보다는 각국의 사신들이 머물도록 제공된 관 원 숙 부 를 이용하는 것이 어느나라든 관례였습니다
한편 당나라의 입장에서도 방이라 불렀다는 것은 어떠한 지역이라는 뜻이므로 신라방은 신라인 또는 신라의 지역이 되는 것이지 어떤 거처나 건물 원이나 동산 관청정도에 한정되지 않는 포괄적 개념입니다
이로써 3국의 대규모 각방들이 삼국이 점령하여 집권한 지역들이고 그 중심에는 삼국 각각의 행정관청이 있었으며 상당한 자체권력이 있었음을 표방한 명칭입니다
1960~80까지의 지도에서 표기된 3국의 방들은 크기에 있어서 반지름 200km에 이르고 거의 전 해안선을 삼국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었으며 특히 주목할 점은 낙양이나 장안의 교통왕래와 무관한 위치들에도 너댓곳씩 간격을 두고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국의 해안선을 타고 내륙 200~400km정도가 삼국의 영토였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있으며
소정방의 35만이 신라에게 몰살당하는 패전을 격은 당나라로서는 고구려 구토에서 불길처럼 일어나는 발해의 봉기를 막는 것에도 급급하여 장보고 등의 신라군이 해안지대를 점령하고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에 변변히 대항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삼국을 통일하고 차츰 안정을 찾은 신라는 북쪽의 발해봉기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여 장보고 같은 위인을 내세우고 황하강 양자강 유역과 해안요충지들을 대부분 차지하는 전쟁으로 이어갔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나라의 사서에도 이 시기를 고구려의 고토에서 발해가 발흥하여 북방의 적들과 전쟁에 어려움이 컷고 해상에는 해적들이 너무도 강성하여 해군력을 여러번 투입하여 진압하려 했지만 패전을 거듭하였다가 더 이상 제어할수 없고 굳이 해상무역의 해로확보를 위해 전력을 기울일 기울일 필요는 없으니 바다를 포기하고 육로를 개척하여 상업을 장려했다 고 적고 있습니다
이들 해적이 바로 장보고가 이끄는 신라군이 아니었고서야 어떻게 청해진과 청도 말라카해협을 완벽히 장악한 해상제국이 있었을 것이며 중국의 해안지대를 확보하여 발판으로 삼았기 때문에 해상제국이 유지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는 한시절 아시아의 준 최강자였어요
다만 인도의 앞선 불교문명이 대게 육로로 먼저 서역 즉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서 융성하고 당에 들어와 발전하였기 때문에 의상 의천같은 신라의 고위층들이 유학을 다녀와 적극 수입한 것이었으되 신라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당에 볼모로 간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강대국인 신라인이 당에는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우대를 받았지만 당정부는 신라인의 도래를 막을 이유와 충분한 힘이 없었고 과거 제당동맹과 나당동맹도 배반하고 침략을 일삼았던 당인들이 신라에 입경하는 것에는 상당한 수준의 제약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신라방 지역에 드나드는 수많은 당인들의 인적교류를 관리하기 위해 대규모 관청도 존제했다고 볼수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불교국가였고 당대초일류 문명국 이었던 고려의 국력에 대해 인식이 너무나 낮은데요
청주시 중심가에 있는 국보 41호 철당간만 보아도 만천하에 고려가 지방 어디라도 황제연호를 썻고 천년이 지나도 녹슬지 않는 세계최고의 철기문화와 금속활자로 표방되는 초일류 문명선도국 이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대 흥선대원군이 그런 철당간을 잘라다가 경복궁 공사에 썻다고 전해지고 있어 참 통탄할 일입니다
고깟 금속활자 라니요
구텐베르그의 서구활자는 한권의 책을 만들자면 각 페이지를 만들어 총 페이지 만큼 늘어놓아야 하고 열권의 책만 편찬하려고 해도 거대한 창고에 가득 활자페이지를 쌓아놓은채 한페이지를 찍을때마다 몇명의 몸무게를 올려 고정해둬야 했으며 유행이 지난 책의 활자는 쓸모가 없어 폐기하고 오탈자를 수정할 방법도 없는채 근대 산업혁명 시기까지 이어졌어요
반면에 고려활자는 제작자별로 딱 한차례 자주 쓰는 글자는 여러개 드물게 쓰는 글자는 소수만 만들어도 당장 찍어낼 페이지만 조립하여 수백장이든 수천장이든 똑같이 찍어내고 수천종류 수만종류 어떤책이든 활자자체의 추가없이 혼자서도 한웅큼 갈대빗짜루로 문질러 얼마든지 찍어낼수가 있었습니다
페러다임을 바꾸는 선도문화에는 그만한 국력과 군사력이 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어요
몽골과 40년 전쟁 이전만 해도 고려가 중원의 거대한 송나라에 상국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고려는 세계를 정복한 몽골에도 결코 패전하지 않았고 승전국에 준해 쿠빌라이의 막내딸을 볼모로 받고 화친한 것이고요
유럽과 아프리카 북부까지 휩쓸었던 몽골군이 가장 두려워 했던 나라는 발해의 후신인 요나라였습니다
요나라는 송나라를 황하 이남으로 멀찍이 밀어내고 50만이 넘는 막강한 상비군을 갖은 나라로서 징기스칸도 맛붙기를 망설이고 두려워했던 최강국이었지만 20만 고려군이 격멸시켜버렸어요
고려가 당대최강 요나라 주력 기병대를 몽땅 전멸시킴으로써 요의 송나라 완전정복 전쟁이 도중에 지지부진 중단되었고 몽골군의 요나라 정벌이 비로서 시작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고려에게 송나라는 최상국의 예우를 다했었고요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갈때는 군대를 대동했으며 송나라의 어디를 지나도 지방관이 나와 엎드려 절을 하였고 고려사신들은 채찍으로 송인들을 후려치고 다닐정도로 기세등등 이름만 황제가 아니라 왕중왕 명실상부한 황제국가 였었습니다
송나라 황제도 요로부터 송나라의 안위를 지켜주고 있는 고려사신을 상국사신으로 대우했고 고려의 사신과 군인들은 송나라 부자들과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해오기가 부지기수 였습니다
소동파 같은 신하들이 맥적(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 백제인을 맥족이라 부름)들의 횡포가 극심하니 폐단을 막아달라고 상소를 올렸다가 송황제의 노여움을 받아 귀양을 가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후조선의 성리학 사대로 인해 우리의 역사와 자긍심을 너무나 많이 잊어버렸어요
한민족에 만민평듬 개인능력 우선주의 이념이었던 불교시대 였을때 세계의 으뜸국가로 궤를 같이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