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야 구야 수기현야 약불현야 번작이끽야 의 옳은 번역
"아홉족장아 아홉족장아 우두머리를 내어라 만약 우두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나는 김수로를 왕으로 추대할때 가야부족이 아홉개 또는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왕의 선출방식에 주요 아홉족장들이 회당에 모여 형식적 이지만 유서가 깊은 거북점을 쳤을 것으로 생각해왔다
왜냐면 가야 6국설은 신라가 가야국가들을 병합하던 시기 6개의 가야를 병합시켰다는 시점적 역사일뿐 가야에 몇개의 부족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 근래 지리산 일원과 전북 장수군 일원 김해의 옛 바닷가 경계면 등에서 6국 가야와 무관한 새로운 가야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한다
새 유적들은 기존의 가야국들에 뒤지지 않고 뛰어난 문화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한다
예를 들어 권력의 크기와 금속주조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세계적으로도 흖치 않은 왕의상징 환두대도가 이미 심한 도궄을 격은 탓으로 신라에서 한자루 백제에서 두세자루 일본에서 한자루 기타 서구권 중앙아시아에서도 낱개만 발굴되었는데 이들 새로운 가야권 유적의 고분군에서 대여섯 자루씩 발굴되었다
신라에 6가야가 복속되기전 3개 이상의 가야국이 백제나 이웃 가락국들에 복속되었을 것이다)
허황후는 밝혀진 발원지 대로 인도에서 도래한 공주 무리로서 김해 해안가에서 하나의 가락국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며 김수로와 혼인동맹 함으로써 가야의 왕으로 추대되는 것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구지가는 김수로가 허황후 일파와 연합하여 나머지 가락국들에게 자신의 추대를 압박한 내용으로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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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이유
제 고향마을 지명이 구이인데 중학교시절 때까지 거북구와 아홉구자를 혼용해서 썻습니다
중심에 암수로 볼수있는 거북이모양 산 두곳이 있어 거북구가 본래 지명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지만 뒷글자가 귀이자를 쓰고 있어 거북이 귀마을은 말이 안된다 아홉이다가 힘을 얻은 지금은 아홉구 귀이로 통일되어 사용됩니다
이러한 혼동은 구지가에 나타나는 것과 유사한데요
구전되는 초기에 거북과 아홉의 가야 발음은 각각 달랐을 것이므로 딱히 혼동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제에도 한자표기에 따라 거북구로 해석해야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오랜 동안 여러 왕조가 교체되어 지나온 과정에서 지난 왕조의 개국설화를 구태여 문자로 적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아홉과 거북의 발음이 같아져버린 후세까지 지나왔던 것입니다
근대 국문학을 정립한 학자와 역사가들이 한문으로 옮겨 적자하니 이미 두 단어의 발음이 같아져 있었고 신라가 6개 가야를 복속시켰다는 사기와 유사 기록에 혼동하였습니다
후세인들은 구지가에서 머리를 내어라의 머리수 뒷글자에 맞춰 앞글자인 구야 구야를 거북구자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라고 그럴듯하게 적어버린 탓입니다
그런대 보다 정확하게는 머리수자에는 우두머리 라는 뜻이 생물의 대가리 못지 않게 많이 사용되는 글자입니다
김수로 당시에 아홉족장아 아홉족장아 우두머리를 내어라 사실 화황후 일파와 연합한 김수로가 나머지 호족장들에게 나를 왕으로 추대하지 않으면 다 박살내버릴 것이라고 강압하는 내용이고 거북구자가 아니며 아홉구자가 적합합니다 분명코~~~
나의 웹 닉네임 시리는 늑대별 천랑성 시리우스로 불리는 가장 밝은 별을 줄여 붙인 것이다
이맘때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고 달을 빼고는 샛별 금성보다 몇 배나 밝은 별이다
각설하고 이번 주말엔 경주 남산에 다녀 올 생각이고 지난 번 북한산 산행기에 팔공산을 이어 본다
동서를 막론한 상고시대 지역별로 군웅이 할거하며 길고 날카로운 발톱과 긴 송곳니 한달음에 10미터를 뛰어 오르는 호랑이 같은 날렵한 맹수들을 반인반수로 상징화 해서 부족의 시조이며 용맹의 표상으로 하였다
국경과 민족 국가라는 개념이 없거나 희박하였었고 아시아의 한쪽끝에서 유럽 아프리카의 어디로든 반대로 남아메리카의 끝까지라도 이동하는 것에 여권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힘으로 밀어붙히거나 토착인들과 연합 하거나 했을 뿐 맹렬한 민족의 구분이 없었다
팔천년의 역사를 갖은 이집트와 이라크를 중심으로 하는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강가의 농경정착 문화이다
반면에 카자흐나 터키 신장 티벳 러시아와 몽골 만주의 대초원을 질주하던 북방계 인류 유목민은 농경정착이 아니어서 유물 유적이 남지 않아 4대문명으로 꼽지 않는다
그러나 흉노 선비 스키타이 유목민들은 가장 강력한 문명중 하나였으며 이들이 농경정착 문명에 나타나 휩쓸고 갈 때면 문명사에 대재앙이 있었고 수백 수천년의 역사가 흔적만 남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극동에도 이집트문명 역사에 모자르지 않을 중원의 황화문명과 요하와 흑룡강 유역의 만주중심 홍산문명이 있었다
홍산 고조선과 흉노인이 배링해를 건너서 마야 잉카 아즈텍문명이 된다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인더스 문명 대서양 바닷속에 잠든 아틀란티스 문명이 침팬지에서 인간이 분화한 이래로 명멸해왔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구상에 명멸한 이들 문명들에서 거침없이 동서교류의 산파역할을 한 인류가 유목민족인 투르크 돌궐로 불리는 흉노 선비 스키타이 몽골리안 들이었다
이들이 그리스 로마 이집트에 고루 혼혈되어 힛타이트족이 되고 유럽 프랑스지역 아리안 인종이 인도계 스키타이족과 혼혈하여 켈트족이 된다
지구의 동쪽과 서쪽을 관통하며 때로는 투쟁하고 때로는 합종연횡 하면서 인류사를 만들어 온 사람들 기마 목축인들은 샤머니즘 공히 늑대를 시조로 하였던 스키타이족 이었고 우리에게도 홍산 고조선 이래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홍산문화를 지나오며 시작하는 고조선이 동서양간 횡축으로 상고시대 샤먼 문화권의 종주국어었다
그러나 우리의 상고 흔적은 성리학 사대주의 후조선에서 대부분 멸실되어 알기 어렵게 됬고 헝가리 터어키 등에서 고조선을 언급하는 자료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수있다
지금이야 유튜브에서 온갖 정보들을 접할수 있지만 나는 30년 전에 노스님들에게 듣기도 하였고 이런저런 사색의 기회로 생각하게 된 것들이다
여튼 단군조선은 황하유역 중원과 산동성을 변한 만주 연해주 내몽골을 진한 간도와 한반도 지역을 마한으로 구분하여 다스렸었다
이들 중 진한이 종주국으로서 삼한체제로 지나왔고 정확히 고인돌의 분포지역과 일치한다
샤머니즘 국가인 고조선을 세분하면 9개의 토템 제후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익히 알고 있는 호랑이족 곰족 늑대족 등이 있었다
우리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한주를 반복하며 사는대 이러한 오행사상은 인간이 삶에 긴밀하게 접하는 순서이면서 신앙했던 시기적 순서 이기도 하다
일월성신을 숭앙한 것이 원시인류에게 가장 이른 신앙이고 불을 다루게 되면서 불을 숭앙했고 농경정착에서 수난이었던 물을 두려움과 숭상했으며 경외의 숲을 그리고 금속을 얻을수 있게 되면서 쇠를 숭앙했던 순서이다
따라서 오행사상은 고조선 시기에도 있었다
12간지와 궤효는 인도문명이 중서남아시아 문명으로 전래되어 한층 진화하고 중국으로 들어가 한반도와 일본에도 전해진 것이다
태호 복희씨와 여와 부부를 시조로 하는 중국한족들은 뱀을 숭앙하는 사족으로 한족이라고 뚜렷이 분류 할 정도가 아니었고 양자강 상류 산서성 섬서성 일부에 거주했던 소수족 이었다
그렇다보니 한족의 시초에 대한 특기할 창세설화가 없다가 은 허를 정복 포융하던 시기에 복희씨와 여와의 창세설화를 수융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상 한족도 아니었고 이민족인 하씨가 양쯔강 상류 하나라를 건국했던 것으로 중국 최초 국가를 주장하고 있지만 고고학적 흔적은 전혀 없다
반면에 요하와 흑룡강 유역에 홍산문명의 흔적과 유물은 명백히 존재한다
유물론적으로는 황하에서 상나라로 추정되는 흔적이 마지막 수도를 은이라 부르며 문명왕조를 이루었다가 주씨들에게 멸망하였다
은을 멸망시킨 주씨의 주나라는 양쯔강의 중상류이고 중원의 북서쪽인 호경을 수도로 개국하였던 나라이고 이때부터가 한족으로 특정하여 뚜렷한 실체가 인정되며 후에 낙양으로 옮기면서 한족의 역사는 낙양중심으로 머뮬게 된다
주지해야 할 점은 낙양 중심 주나라 때 까지 한족은 고조선의 영향력에 속해있던 중원의 중심 장안을 꿈도 꾸지 못하는 변방세력 이었다
상고 빙하기가 지나고 대홍수의 시대 고조선의 탱그리 단골래 당골 단군이 지금에서야 샤먼으로 무당에 불과하지만 옛적에는 하늘과 땅을 잇는 천지인의 절대적 군장으로서 제후국인 상나라의 팔년홍수 때 치수관 가문이었던 주문왕에게 치수의 방책을 내려주고 맹약을 하여 덕을 잃고 수재를 있게 한 상나라를 멸하여 주나라를 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한글판 사기 한 번 훑어 본 것으로 알수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단언하여 말할수 없음이다
이후 주나라가 약화되며 북방민족들이 대거진출 외래인들이 천하를 다스리는 춘추시대를 지나 역시 북방인인 진시황의 진나라를 거쳐 비로서 한족 유방의 한나라가 개국한다
한고조 유방이 대취하여 귀갓길 거대한 흰 뱀을 단칼에 동강내어 죽여버리자 산발한 노파가 홀연이 하늘로 솟구치며 통곡하며 외치기를 적제의 아들이 백제의 아들을 죽였다라는 도록은 황제시대에도 아직 토템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형태이다
시황제는 고조선의 진한과 관계가 매우 깊은 인물로서 만리장성을 쌓으며 양쯔강 이남에서 내륙 산맥을 돌아 산동성 산해관을 끝으로 방어하도록 축성한 것은 황하강 유역이 아직 진나라가 막고자 하는 고조선의 강역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시황제가 만리장성으로 중원을 닫아 걸었다 몰락하자 다시 중원을 통일한 한나라에 이르러야 본격적으로 고조선의 구이족과 한나라간의 영토전쟁 역사전쟁이 벌어졌다
위만은 본래 명망있는 고조선 출신으로 한나라에 귀순했던 장수로서 위만을 한나라 군대의 수장으로 한 침략을 당함에 큰 저항없이 회유되어 위만조선으로 받아들여졌다
위만조선이 쇠퇴하여 부여 고구려 여러 흉노 국가들로 중국시각에서 구이족 국가들로 분화되게 되었다
한나라가 멸망하자 중원에 다시 이민족들이 수많은 나라를 세우고 명멸하는 위진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를 수습하여 중원을 통일한 사람이 수문제로서 역시 한족이 아닌 고조선계 구이족 출신이었다
서쪽으로 시각을 옮겨보면 늑대족인 스키타이 시조설화는 이렇다
두 부족간 치열한 전쟁을 하였는대 한쪽이 전멸 단 하나의 어린 아이만 남았고 승리한 적은 수레바뀌 보다 작은 어린애는 죽이지 않는다는 초원의 법에 따라 팔다리를 잘라내고 들짐승의 먹이로 던져버렸다
암것늑대 한마리가 나타나 거두어 품고 키우니 자라서 그 암컷늑대와 교접하였다
적들은 팔다리를 잘라 버린 사내아이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되어 추격하여 마침내 죽였다
암컷늑대는 숲으로 도망처 열명의 아이를 낳았고 이들이 산악부족 국가들로 성장하여 늑대의 후예임을 잊지 않겠다는 맹세로 늑대머리를 깃발로 내 걸고 진군하였다
아시아의 산악부족이며 정복민족인 늑대족 스키타이의 후손 로물루스가 늑대의 머리 깃발을 내새우고 진군하여 초기로마를 건국하였다
스키타이족이 유럽백인 아프리카인과 잔인한 정복전쟁을 멈추고 유프라데스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혼혈하여 힛타이트 족이 되었다
힛타이트족이 수천년 장구하게 이어오던 파라오의 이집트를 격파 정복하고 13왕조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투탕카맨 등 아시아계 파라오들은 이들의 후손이다
이후로도 이집트 상층부와 결혼동맹하여 귀족 왕족 계층을 형성하여 근대까지 전승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지나며 태양신의 나라 이집트에서 나일강을 따라 12개의 오시리우스 늑대 사원이 세워졌는데 고조선의 9부족 토템에서 늑대족 스키타이가 힛타이트로 이어지고 이집트에서 결합한 것이 배경이다
이집트 제국의 영광인 오시리스를 시기한 동생 세티가 오시리스를 암살하여 14조각을 내어 나일강에 버렸다
결혼동맹을 상징하는 설화가 이어져 힛타이트 늑대부족 여자인 아이시스와 네프티스가 건져내어 성기부분을 빼고 장사지내자 오시리스는 죽은자들을 안내하는 신이되었고 나일강을 따라 지어진 12사원에 봉안 되었다
오시리스의 남겨진 성기와 아이시스가 교접하여 호루스를 낳았고 호루스가 세트와 싸워 승리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를 잇는다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고 외세가 밀려 들 때 까지 그렇게 믿어왔다
투탕카맨으로 대표되는 아시아계에 가까운 혼혈 파라오들
초기 로마제국의 늑대머리 깃발이자 유럽을 점령한 스키타이 전사들의 모습
구약 예레미아에 적혔기를 ''보라 스구다이인들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니 그들은 활을 쥐고 창을 잡았으며 잔인하여 자비가 없다
그들이 전사같이 다가오메 다 불사르고 죽이나니 시온 너를 치려하느니라"
스키타이와 흉노(흉노는 특정 부족이 아닌 중앙 서남동북아시아 동유럽을 넘는 강역의 초거대 연합국가로 선비족은 가한을 왕으로 했고 칸 마립... 고조선의 삼한처럼 나라를 크게 세개로 나누어 삼왕이 다스리고 휘하 제후체제로 유지 되었다
신라의 기마병들은 동복이라는 솥단지를 말잔등에 얹고 다녔는대 전형적인 스키타이 흉노 샤먼군주제의 병사들만 동복을 가지고 다녔고 동복은 중국에도 서구에도 기타 어떤 나라에도 없는 것이다
화려한 금관장식은 단군조선을 위시한 샤머니즘 문화권에만 있었다가 훗날 퍼진 것으로 곡옥은 용을 단순상징화 시킨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금와왕 동명 이전에도 존제하였는대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동명왕은 구려의 중창조 일 뿐 최초개국은 부여와 구려 사이에 고주몽 위로 수세기 여러 초기왕들을 적어 놓고 있다
단군조선을 직계로 태양신인 세발까마귀를 표상하여 천손을 이은 것 그 갈래에서 온조백제 비류백제가 이어져온 것이다
경주의 황남대총은 목곽을 안치하고 기단위에 고임돌을 세워 거대한 덮개돌을 올린후 고임돌 부분을 돌을 쌓아 막아 묘실을 조성하는 지석묘 방식으로 전형적인 스키타이 흉노와만 상통하는 묘제이다
그것에 흙을 덥고 잔디를 심어 토사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발전한 것이 목곽적석총이다
지금처럼 인적이동에 국경과 법제절차 민족개념이 없던 때 만주일원 고조선의 삼한중 진한역사가 부여로 이어졌다가 고구려로 전승되었고 평야와 강을 따라 남하한 고구려인들이 마한의 토착인들과 융합 백제가 되었다
신라는 우랄 몽골 시베리아를 이어 온 만주의 단군조선 진한에서 전래한 토착인들이 여섯마을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던중 흉노로 통칭되는 중국을 경유한 서역 위구르 등 북방인들이 산맥을 따라 대구 팔공산을 지나고 계림에 도래하면서 먼저 변한으로 자리잡은 토착인들과 투쟁과 합종연횡하여 지도층이 형성되었다
양산에 말이 울어 알에서 난 혁거세의 박씨는 북방 기마민족 도래설
석탈해는 캄차카반도의 다파나인 도래설
백제와 신라의 완충지대였던 김수로의 금관가야 대가야 아홉가야가 대가야를 마지막으로 신라화 되었다
아홉족장이 모여 거북점을 치고 김수로를 추대한 봉우리
구야 구야 수기현야 약불현야 번작이끽야 의 옳은 번역
(아홉족장아 아홉족장아 우두머리를 내어라 만약 우두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나는 김수로를 왕으로 추대할때 가야부족이 아홉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왕의 선출방식에 아홉족장들이 회당에 모여 형식적 이지만 유서가 깊은 거북점을 쳤을 것으로 생각해왔다
왜냐면 가야 6국설은 신라가 가야국가들을 병합하던 시기 6개의 가야를 병합시켰다는 시점적 역사일뿐 가야에 몇개의 부족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 근래 지리산 일원과 전북 장수군 일원 김해의 옛 바닷가 경계면 등에서 6국 가야와 무관한 새로운 가야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새 유적들은 기존의 가야국들에 뒤지지 않고 뛰어난 문화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한다
예를 들어 권력의 크기와 금속주조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세계적으로도 흖치 않은 왕의상징 환두대도가 신라에서 한자루 백제에서 두세자루 일본에서 한자루 기타 서구권 중앙아시아에서도 낱개만 발굴되었는데 이들 새로운 유적의 고분군에서 대여섯 자루씩 발굴되었다
신라에 6가야가 복속되기전 3개의 가야국이 백제나 이웃 가락국들에 복속되었을 것이다)
허황후는 밝혀진 발원지 대로 인도에서 도래한 공주 무리로서 김해 해안가에서 하나의 가락국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며 김수로와 혼인동맹 함으로써 가야의 왕으로 추대되는 것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구지가는 김수로가 허황후 일파와 연합하여 나머지 가락국들에게 자신의 추대를 압박한 내용으로 볼수있다
팔공산을 넘고 돌아 경주 남산으로 향했을 우리의 대륙기질을 제대로다 적어 설명도 어렵고 두서도 읎고 정리하지니 손가락 아파서 일단 마무리 합니다
백제시대 나주소제 전방후원적석묘
일본의 능묘는 한반도의 고인돌에서 적석총을. 거쳐 전방후원식 묘제를 영향받았으나 주변에 도랑을 파고 물을 채우는 일본식 변화가 더 해졌는데 나주의 고분에서 일본식 영향이 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