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권한과 종된 자의 할일
( 행 1 : 6 - 11 )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그 역사의 권한을 바로 알고 일할 때에 모든 일은 질서 있게 되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승천할 때에 때와 권한에 대하여 말씀한 것은 그 제자들이 필요 없는 일에 간섭을 하기 때문에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할 일은 증인이 될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권한과 종된 자의 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의를 알아야 한다.
1. 하나님의 권한 (6-7)
예를 든다면 어떤 주인이 품꾼을 부를 때에 그 시간을 정하는 것은 주인의 자유에 있는 것이니 품꾼은 극력껏 맡은 일에 주인의 요구대로 일할 것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어느 종이나 들어 쓸 적에 예정 아래서 한계를 정하여 일하게 한 것이니 사도들이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은 어느 종이나 역사 하게 할 때에 그 기한은 알려 주지 않고 마음 가운데 재림의 주를 갈망하게끔 역사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한 종을 들어서만 그 사명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종에게 어느 때까지 세상에서 일한다는 기한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할 사명을 할 때에 때와 기한에 있어서는 조금도 알아보려고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목적이 그 기한 안에 수를 채우기 위해서는 모략적인 방법을 쓰되 그 종의 마음에 기한이 급했다는 마음이 생기게 하신다. 이것은 어느 종이나 자기가 일할 기간을 주었으므로 그 기간 안에 자기 할 일을 하라는 뜻에서 때가 임박한 줄 생각이 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왕국을 기다리는 심정이 불탔으므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선지를 통하여 묵시의 글을 기록하게 할 때에 목적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목적 하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 육적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할 때에 이스라엘 말기에 바벨론에게 먹힘을 당하여 황폐화되었다가 회복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 질 때도 극도로 교회가 부패하여 바벨적인 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심판이 올 것을 말씀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어 십자가의 피로 산 백성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은 세계적인 역사가 있게 될 것과 세계적인 환난이 북방으로 올 것과 세계적인 심판에서 구원받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다시 있은 후에 그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지상 왕국의 축복을 받게 되고 순종치 않는 자는 바벨론이 망할 때에 같이 망한다는 것이다(계 10:7, 11:15).
둘째 : 잃었던 지상 축복을 다시 찾는 일은 부활성도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 재림시에 남은 종이 될 자와 백성이 찾을 것을 말할 때에 선지서 전체는 부활성도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변화성도에게 해당된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사도의 사명은 친히 주님의 부활을 본 자이므로 이것을 세계 만방에 전할 것뿐이라는 것이다.
2. 종된 자의 할 일 (8-11)
첫째 : 성신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종이 성신 권능을 받지 않고 일하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나리는 주님과에 대적이 되는 동시에 성신을 근심케 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은혜시대의 법을 어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던 것이다(눅 24:49). 왜냐하면 성신을 받기까지 한 곳에 모여서 합심 기도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데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14). 하나님의 종들은 종된 자격을 가진 것이 아니고 성신권능을 받음으로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생각하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것이 종된자의 먼저 할 일이라고 본다. 자기가 성신권능을 받지 못하고 나선다는 것은 자칭 유대인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 : 순교적인 생활이 있어야 한다 증인이라는 것은 순교가 없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상이 가득한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에 역사적인 종교를 반대하고 역사 적인 모든 풍속을 반대하고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를 가나 박해를 받을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또는 유대 본국에 과거 종교 제도를 다 없애고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한다는 것은 자기 본국에서도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유대인에게 핍박을 받았고 이방인에게도 핍박을 받았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증인된 생활에 피를 뿌린 종교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셋째 : 승천한 그대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종이 할 일(11). 계시록을 보면 주님 다시 올 때는 예언을 지키는 자가 복 있다고 계22:7에 말씀했다. 그러면 예언을 증거하는 종도 큰 난국을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붉은 짐승에게 용의 큰 권세를 주어서 세계를 침투하게 할 때에 그 짐승의 표를 받고 머리를 숙이면 멸망을 받는다는 증거를 해야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계14:9 이하를 보면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라고 한 것을 보면 진노의 날에 양떼를 살리는 종이 되려면 예언을 증거할 때에 붉은 짐승의 환난에서 계11:6이하와 같이 증거하는 자라야 양떼를 살리는 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 종은 권세를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다.
결 론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것은 말세 증인이 증거를 마친 다음에 죽은 자는 순교자라야 부활하고 남은 자는 예언을 증거하던 자라야 들림을 받아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는 지상 강림할 때에 바벨론이 불타는 동시에 백마 탄 군대가 짐승의 군대를 없이 하므로 완전한 이스라엘적인 다윗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계 19:19-20:4).
주님의 승천과 새 출발
( 행 1 : 6 - 14, 요절 14 )
서 론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시어 구름을 타고 승천하기까지는 전부가 타락한 인생의 죄의 대가를 짊어진 생활이었다. 그러나 부활 승천할 때부터는 인간의 타락한 생활에서 새 출발을 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주님을 따라 간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 그들의 생활은 새로운 출발이 되지 못하고 육의 사람으로 일시 주님을 따라가던 자들이었으므로 열매 없이 쓰러지고만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할 때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는 단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새 출발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대지 : 시대를 바로 알게 되므로 (6-8)
주께서 승천하기 전에는 사도들까지라도 시대를 모르고 그 즉시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왕이니 이 땅에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눅24:21).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물어 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사명이 아니고 성신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고 저희 보는데서 승천하시었다. 그때야 모든 사람들은 시대를 바로 알고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죄를 위하여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세계적인 복음 운동을 할 사명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한 기간으로 정하여 그 때부터 새로이 출발한 그 사명은 오늘에까지 계속된 것이다.
2 대지 : 재림에 대한 것을 알게 되므로 (9-11)
이날까지 모든 사람은 초림의 주가 오므로 그 즉시에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구약 예언서에 이스라엘의 회복은 육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세계적인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메시야가 오므로 이 세상은 메시야 통치 왕국이 오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할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너희 주가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다. 그 때부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구름을 타고 올라간 그대로 온다는 것을 확신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고대하고 새로운 출발을 가지게 된 것이다.
3 대지 : 한곳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게 되므로 (12-14)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을 보고 돌아온 120명의 무리들이 한곳에 모여 합심 기도를 하는 일은 이날까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까지도 새로운 출발을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오순절 다락방 교회라고 한다.
결 론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이 땅에 타락한 인생들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 일에 큰 역사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승천이 없다면 타락한 일생은 새로운 출발을 가질 수 없고 영원한 죄 값으로 흑암의 권세 아래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오므로 어느 민족이나 하나같이 삶의 길을 찾게 되었다.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와
말씀에 전력하는 교회
( 행 1 : 12 - 14, 계 11 : 3 - 4, 22 : 16 )
서 론
하나님께서 언제나 시대적인 역사는 개인을 통해서가 아니고 성도가 뭉쳐진 교회를 통하여 역사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는 것을 순종하는 기관이니 하나님의 시키심을 순종할 것뿐이다.
1.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 (행1:12-14)
주님께서 구름 타고 승천할 때 남은 교회는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였다. 이것은 왜냐 할 때 성신 강림을 목적했기 때문이다. 성신이 강림한다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의 피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강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환난이 올 때 흩어졌던 무리들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보고 새 힘을 얻어 전혀 기도의 힘을 쓰는 다락방 교회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때 교회는 기독교 종말적인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아니요, 기도를 전력하여 성신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와 부활을 만방에 전하는 큰 사명을 맡은 본부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 그들이 기도에 전력을 두지 않고 산재 상태에 있었던들 이러한 큰 성신의 역사를 맛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의 부탁을 하나같이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자기의 사생활을 생각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합심 기도의 주간을 정했던 것이다. 합심이라는 것은 주님의 뜻만 순종한다는 것 외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과거는 열 두 제자로 기도의 전력을 두고 뭉쳐진 일이 없었다. 겟세마네 동산의 하룻밤 기도도 잠만 자고 있던 그들은 십일이라는 기간을 전력을 다해서 뭉쳐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어려운 환난을 통과함으로써 깊이 깨닫는 지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니 십자가의 환난기를 지나고 보니 자기네가 가졌던 주관과 기대는 어긋나는 일을 당할 때 자기를 포기하고 승리의 부활을 이루신 주님의 명령만을 순종하자는 것으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은혜 시대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을 위하여 성신의 역사를 기다리고 합심 기도로만이 세계를 정복했던 것이다.
2. 말씀에 전력을 둔 촛대교회 (계11:3-4)
말씀에 전력을 둔다는 것은 말씀대로 재앙이 나리고 말씀대로 재앙으로 땅을 치고 말씀대로 보호가 있고 말씀대로 심판하는 시기에 남은 교회를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는 증인이 권세를 받아 예언하는 기간에 나타난 감람나무 촛대교회다. 이 때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이것은 은혜 시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때는 전혀 기도의 힘을 써야 할 때는 지나고 이미 기도의 힘을 써서 기름 준비한 처녀들이 예언의 말씀의 등불을 들기에 전력을 두는 재림기다. 재림 전 일 천 이 백 육십 일이라는 기간에 되여 지는 일이니 시대적인 종말의 예언을 밝히 증거하는데 전력을 두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재앙의 날에는 예언을 가해도 감해도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 계22:18-19에 있기 때문이다. 이 촛대교회는 재앙의 날에 대중을 살리기 위한 사명을 띤 교회이니 원수가 피해를 못 주도록 하나님은 보호한다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씨를 뿌리는 역사보다도 알곡을 모으는 때 남은 교회다. 영혼이 천당에 가는 시대가 아니고 살아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남은 종 남은 교회로서 새 시대를 정복하는 권세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이 내릴 때 그 진노를 받지 않는 교회는 말씀에 전력을 두어야만 될 것이니 진노의 날은 성령을 부어 주는 날이 아니고 재앙이 쏟아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말씀의 전력을 두지 않는다면 이 교회는 종말의 큰 미혹을 가져오는 거짓 선지의 세력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권세의 역사는 예언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결 론
우리는 교회가 바로 서느냐 못 서느냐 하는 문제가 은혜 시대라면 끝을 바로 맺느냐 못 맺느냐 하는 것이 환난기다. 기도에 전력을 다하는 교회가 은혜 시대의 중심이 되었다면 말씀에 전력을 두는 촛대교회가 환난기에 중심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시대적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있는 것이니 교권은 우리와는 하등의 필요가 없는 것이니 하나님께로 오는 권세를 받는 자밖에는 참된 교회를 인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신을 보내심
( 행 2 : 1 - 13, 요절 4 )
서 론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천국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하는 말씀을 하시었다.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하였고(마3:2),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천국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역사가 이 땅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성령과 불과 세례를 베풀리라고 말했고(마3:11), 예수님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했다(행1:5).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승천하시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성신이 강림하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역사는 완전히 이 땅에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성신을 보내시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징조가 나타났다.
1 대지 : 다 같이 모인 곳에 보내심 (1)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한데 모여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순종하는 무리들은 10일 동안 개인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단체적으로 한 곳에 모여 합심 기도를 계속했던 것이다. 만일 이들이 한데 모이지 않고 각각 개인 행동을 취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면 이러한 역사가 나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대로 한 곳에 모여서 기다릴 때에 성신을 받았던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성신 역사를 내리려고 하여도 땅에 있는 사람들은 합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기 때문이다(행5:32). 성신을 받는 것은 도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부족해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가 받게 되는 것이다.
2 대지 : 강한 바람같이 임하였다 (2)
성신의 역사가 강한 바람같이 온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 모든 만물의 생명은 바람이 없이 있을 수 없다. 바람이 있으므로 호흡이 있고 바람이 없이는 호흡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죽은 영들이 다시 소성 할 수가 없다.
둘째 :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세계를 통일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신은 세계 통일의 역사를 하고 계신 것이다.
3 대지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임하였다 (3)
불이라는 것은 강하게 일어나는 힘이 있으므로 얼마든지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다락방에 성신의 역사가 나리므로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불은 무한의 번창을 할 수 있는 거와 같이 성신도 무한의 역사를 하고 있다. 불이 가는 곳에는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성신의 역사가 임하는 곳에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4 대지 : 방안에 성신이 말하게 하는 방언이 나타남 (4-13)
성신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의 입을 열어서 말하게 하는 것이니 성신의 역사가 없이 방언을 할 수 없다. 방언이라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의 방언이 있고. 둘째, 하나님 편에서 비밀을 알려 주는 방언도 있고. 셋째, 말씀을 널리 전파하는 방언도 있다. 언제나 성신은 방언으로 역사 하는 것이다. 본래 방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 바벨탑을 쌓았다가 각 나라 방언이 생긴 것도 사람이 스스로 한 방언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하게 하므로 했던 것이다(창11:7). 그러나 다락방 방언은 저주로 임한 방언이 아니고 저주받은 백성들에게 복음을 속히 전하기 위한 방언이었던 것이다.
결 론
성신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왕권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아 오는 것이니 성신을 받은 자는 마귀를 이기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때부터 기독교는 승리의 용사적인 출발을 하여 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이다.
주의 승천과 교회의 발전
( 행 2 : 37 - 47, 요절 41 )
서 론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한 교회도 세워진 일이 없었고 아무런 발전도 없었지만 승천하신 후에 교회 발전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1 대지 : 종된 자의 발전 (37-38)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는 제자들에게 아무런 발전이 없이 결국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도망을 가서 숨었던 제자들도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증거하는 인격이 이루어졌던 것은 사람으로 볼 때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대중 앞에서 담대히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할 때에 듣는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베드로 앞에 와서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것은 종된 자의 인격 발전의 큰 증거이다. 그물 한 채를 가지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앞에 모든 사람들이 찔림을 받고 머리를 숙이고 어찌할꼬 하는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성신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의 종된 자들이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고 점점 미약해지고 열매 없는 마른나무같이 되는 것은 성신의 권능을 받지 못한 증거이다. 누구든지 성신의 권능을 받을 적에 사람의 인격 발전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불과 50일 전에는 작은계집 아이에게 떨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하던 베드로의 인격이 이렇게 올라갔다는 것은 교회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발전이 되려면 종된 자의 인격 발전이 있어야 한다.
2 대지 : 교회 발전 (39-42)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한 사람도 완전한 신앙에 선 사람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하루에 삼천 명이나 되는 신자가 일어났다는 것은 교회의 큰 발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완전 승리의 열매로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다. 무서운 박해 속에서 기독교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보좌 우편에 계셔서 대언 기도하시는 열매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주님께서 직접으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고 종의 인격을 발전시켜 쓰실 적에 교회 발전은 그 때부터 일어난 것이 세계를 정복하는 발전을 보게 된다.
3 대지 : 경제 발전 (43-47)
교회의 발전이 있는 동시에 경제까지라도 풍성한 축복을 받아 주의 사업에 활발성을 가지고 일하게 되므로 교회의 영육이 아울러 생활의 발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부요한 자들이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성도들의 생활 발전을 위하여 도와주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인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발전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을 초월하여 성신의 역사로 되는 것이니 주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지금까지 큰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얼마든지 성령의 역사를 나려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주의 승천과 주의 이름의 영화
( 행 3 : 6 - 10, 4 : 10 - 12, 29 - 31, 요절 6 )
서 론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일이 없었지만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역사가 있게 되었다.
1 대지 :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걸어감 (3:6-10)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역사가 있게 하되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에 놀라운 이적 기사가 나타나게 하시었다. 이것은 인생 자체에게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완전 승리의 이름으로 악마의 세력이 세상에서 물러가는 동시에 병마가 물러가게 된 것이다. 인간의 질병이라는 것은 죄 값으로 오는 것이니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에 무슨 병이든지 다 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사람이나 다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에 기사가 나타나게 한 것은 베드로를 대표적인 종으로 쓴다는 증거를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시어 모든 성도들이 하나같이 베드로 앞에 뭉쳐지도록 하신 것은 언제나 시대를 따라 대표적인 종을 신과 같이 쓰되 사람 스스로가 역사 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 때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할 때 기사가 있었고 신약 시대는 예수의 이름으로 이적 기사가 있은 것은 구약 때는 여호와께서 언약을 세우는 때이므로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할 때에 기사가 나타나는 것이요, 신약 시대에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여 만민의 죄를 사하는 화목 제물이 되셨으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만일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없다면 십자가의 도가 널리 전파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되므로 십자가의 도는 세계 만방에 전파된 것이다.
2 대지 : 천하 인간이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게 됨
(행4:10-12)
세상에 많은 영웅도 있고 성인도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으로는 아무런 역사가 없되 예수의 이름으로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될 때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고 예수의 이름으로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준다는 것을 자랑하게 된다.
3 대지 : 예수의 이름으로 큰 응답이 나림 (4:29-31)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날 때에 소위 예루살렘 공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권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을 주었다(4:15-18). 그러한 가운데서도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부르짖는 호소를 올릴 때에 땅이 진동하며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리들은 어려운 핍박이 올 때에 예수의 이름을 더 높이며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서 여러 가지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예수의 이름 아래에서 완전한 단체가 이루어진 것이 초대교회의 역사라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라면 이것은 예수교가 아니다. 예수교라는 것은 예수의 이름만 자랑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적 기사가 있고 예수의 이름으로 큰 응답이 나리는 것을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라는 것이다.
결 론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행하신 일이 있으므로 기독교는 큰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요14:12-13).
승리를 이루는 기도
( 행 4 : 23 - 37 )
서 론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들어서 승리를 이루는 열매를 가져올 때 대적의 세력을 강퍅케 하는 동시에 당신의 종들을 더 강하게 일으켜 승리를 이루도록 역사 하는 것은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르킬 수 있는 기도가 있지 않고는 하나님은 역사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나라를 좌우하고 있는 신의 본부니 신의 본부의 활동은 땅에 있는 종들의 강한 기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 승리를 이루는 기도에 대한 비결을 본문에서 배울 수 있다.
1. 일심 호소 (23-24)
일심이라는 것은 기분 좋고 환경이 좋을 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수에게 죽게 될 난관에 부딪히고 전도문이 꽉 막혀서 어찌할 수 없는 가운데 그들은 조금도 동요를 받지 않고 낙심이 안되고 더욱 일심으로 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교회 지도자를 어떤 법관이 잡아다가 때리고 전도하지 말라는 일이 있을 때 겁을 내고 그 교회가 일심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하나님이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종이 누가 환영을 하면 힘을 내고 박해하고 어떤 교권이 탄압을 할 때 용기를 잃으면 하나님의 종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력에 굴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면 하나님은 사람만도 못하니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할 것이다. 정권, 교권을 초월한 힘을 하나님께 받는 호소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마귀가 강할 때 더 일심 단결해서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는 일이 없이는 승리를 볼 수 없는 것이다.
2. 예언을 기억하는 기도 (25-26)
그들은 무서운 박해를 당할 때 시편 2편에 이방이 분노해서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말씀이 응한다는 사실을 볼 때 필연코 승리는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대적이 일어나는 것이 예언의 말씀이 응하는 것이라면 시온산 정부가 이루어지는 것이 필연코 있을 것이라는 굳은 신앙의 힘을 소유했던 것이다. 금일의 붉은 세력이 이 땅 3분지1을 점령하고 세계를 침투해 나오고 마귀의 앞잡이 거짓선지의 세력이 교회를 침투하는 것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사실이라면 동방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나서 원수를 짓밟게 하겠다는 것을 믿고, 필연코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호소해야 될 것이다. 즉 원수가 강하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 편이 승리한다는 말씀도 문제없이 될 것은 사실이다.
3. 하나님이 하감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기도 (29)
우리는 사람이 나를 안다는 것보다도 무소불능 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하감 하시되 내 양심을 아시고 우리 사정을 더 분명히 아시고 우리 자체가 우리 앞길을 모르나 하나님은 미리 하감 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양을 인도하는 목자는 앞길을 다 보면서 인도하는 것이다. 양은 아무리 위험해도 따라만 가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4. 하나님이 역사 하면 된다는 마음에서 기도한다 (30)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 하느냐 안하느냐는 것을 문제시 할 것이니 당장 위험하다 또는 소망이 없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 하면 승리는 필연코 있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결 론
이와 같은 기도가 있는 교회에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큰 역사가 떨어졌던 것이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아울러 큰 축복이 왔던 것이다. 인간의 어느 정권이 이 교회를 다치지 못할 큰 단결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31-35). 우리의 뭉쳐지는 힘이란 기도의 열매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의 경제가 곤란하다고 압력을 받는다든지 또는 교인이 합심이 안된다고 낙심한다는 것보다도 나의 기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눈물겹게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기도의 열매가 아니고는 아무런 가치를 세상에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세계를 정복할 힘은 기도라는 것을 계5장 9-10절에 말했다. 승리의 기도가 있는 교회로 끝을 맺는 새시대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인간 권력으로 막을 수 없는 위력
( 행 5 : 17 - 32, 요절 29 )
서 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는 인간의 정권이나 교권으로 탄압하는 일이 있게 하는 동시에 그 교권과 정권을 초월한 역사로 교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만민이 알도록 끔 증거를 하기 위한 방법이다.
1 대지 : 주의 전사가 도와준 역사 (17-20)
소위 대제사장이라는 무리가 교권을 쥐고 사도들을 탄압하며 이방 적인 로마의 정권을 배경 삼아서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밤에 주의 천사가 나타나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내어 말하기를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일을 천사가 도우지 않으면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 없는 난국을 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도 기독교가 이러한 일이 있기 전에는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 없는 난국이 올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교권, 정권의 탄압을 받고 발전하지를 못하고 만다면 이것은 생명의 종교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이러한 증거를 나타낸 것은 기독교 역사가 종말에 가서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알파와 오메가가 언제나 같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성경에 기록하게 한 것은 이것을 보고 교회는 그 힘이 어떠하다는 것을 만민이 알게 하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2 대지 : 새벽 예배의 힘 (21-25)
천사가 옥에 갇힌 사도들을 이끌어 내어 새벽에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게 했던 것이다. 대제사장과 소위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이 함께 회의를 열고 사도들을 옥에서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관속들이 가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의혹 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던 중에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도저히 교회 발전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본다면 새벽 기도에 모이는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천사들도 새벽 예배를 도와서 역사 했던 것이다.
3 대지 : 사도들의 담대한 증거 (26-32)
아무리 비겁한 사람들이라도 성신 충만을 받음으로 인해서 큰 능력을 받아 담대해 질 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증거했다. 첫째,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절대적으로 교권과 정권을 무서워하지를 안해야 된다고 증거했다(26-29).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다(30). 셋째, 예수님은 임금과 구주라는 것을 증거했다. 넷째, 순종하는 자에게 성신을 주신다고 증거했다(32). 이 때는 증거할 때에 성신의 역사가 같이 하므로 교회가 큰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결 론
교회 발전의 힘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이것은 천사가 도와주는 동시에 성신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서 사도들을 강하게 증거하도록 하면서 그 증거를 도저히 인력으로 막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교회 지도를 바로 하므로 발전
( 행 6 : 1 - 7,요절 4 )
서 론
교회라는 것은 지도를 바로 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역사를 나리지 않아도 교회는 유지할 수 없고 또 지도를 바로 하지 못하고 사명자들이 혼란하게 되어도 도저히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로써 바로 하는 일에 대하여 공부하기로 한다.
1 대지 : 사명적인 한계를 바로 하여야 됨 (1-2)
하나님의 교회는 몸과 같다. 몸이라는 것은 각 지체가 자기의 할 분야를 바로 하게 될 때에 완전한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도 사명의 한계를 바로 알아서 움직이게 되어야 완전한 교회가 된다. 말씀을 전할 사명자가 물질에 치우친다는 것도 잘못이요, 물질로 움직여야 할 사명자가 그 처리를 잘못해도 안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도 물질을 가지고 구제 사업을 할 때에 사도들이 물질을 맡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은 사명의 한계를 바로 못하는 일 인줄 알고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데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 사도들이 사명의 한계를 바로 움직이도록 처리를 할 때에 주의 역사가 더 크게 임하였다.
2 대지 : 집사를 세워 물질적인 사명을 맡기게 됨 (3-6)
물질의 사업보다도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혀 힘쓰는 것이 더 큰 일이므로 사도들은 지혜롭게 일을 처리할 때에 물질에 관한 모든 문제는 집사들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영적 방면에서 전력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교회 발전의 큰 힘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맡은 사명의 한계를 바로 아는 사람에게 역사 하신다. 예를 든다면 세상의 군대도 각자가 맡은 부서를 바로 하여야만 승리하게 되는 것과 같다. 언제나 강단에 서는 종은 신령한 양식을 일반에게 주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되며 교회의 제직은 말씀을 전하는 종을 위하여 물질 방면에 있어서 명철하게 일을 처리해야만 교회에 시험이 없이 발전할 수 있다. 교회 발전이 큰 지장이 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종이 다른 방면에 치우치게 되면 교회는 자동적으로 영적 혼란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3 대지 : 정상적 발전을 가지게 됨 (7)
생명이 있는 활동이라는 것은 정상으로 점점 왕성하게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푸른 나무가 시냇가에 위치를 정하게 되면 언제나 정상적으로 푸른빛을 내는 것과 같다. 교회도 말씀이 충만한 위치에 있게 될 때에 정상적으로 부흥 발전을 가져오게 되므로 승리의 열매를 이루게 된다. 교회가 정상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순서를 첫째, 말씀이 왕성하는 일. 둘째, 일꾼이 많아지는 일. 셋째, 대적을 굴복시키는 일이다.
결 론
교회를 지도하는 자는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니 한 사람도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처리하여야 되며, 무슨 일이든지 질서 있게 움직이되 인물 선택을 바로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집사로 택하여 세우고 교회를 움직일 때에 정상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교회 지도자는 자기가 직접으로 모든 것을 다 한다는 것보다도 사람을 바로 택해서 세우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불능의 신이시지만 언제나 사람을 택해서 세우고 그로 하여금 교회를 발전시키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가 독선적으로 일한다는 것은 교회 발전의 큰 지장이 있는 것이다.
순 교 와 발 전
( 행 7 : 54 - 8 : 8 ).
서 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평안한 가운데 두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환난과 핍박 속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하셔서 더욱 발전하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왕권 반열에 들 자를 먼저 집사 중에서 나오게 했고, 둘째는 집사가 순교하는 동시에 사도 바울이 나오게 했고, 셋째는 사도 바울이 나오므로 세계적인 복음 운동이 일어나므로 세계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1 대지 : 스데반의 순교
첫째 : 영안이 열려짐(54-56).
하나님께서 기독교 순교의 첫 열매가 되는 스데반에게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한 것은 누구든지 순교하는 자는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같이 왕권을 누린다는 증거로 보여준 것이다.
둘째 : 돌에 맞음(57-58).
셋째 : 기도를 함(57-60).
스데반이 억울하게 돌에 맞을 적에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면서 순교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대 승리를 본 처음 열매가 된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비극이요, 낙방할 일이지만 이 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세계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2 대지 : 사울의 핍박과 교회 발전 (8:1-8)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울이 교회를 진멸하고 각 집에 들어가서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박해가 있어도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간 데마다 복음을 전하므로 교회는 널리 전파되는 동시에 많은 무리가 전도를 받고 돌아올 때에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되었다. 사울에게 교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는 핍박을 하게 하시던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회개시켜 세계적인 전도사로 삼으셨다(행9:15). 이것을 본다면 기독교라는 것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더 유익이 되도록 하시는 역사가 있다. 이렇게 악하게 교회를 전멸시키던 사울을 회개시켜 이방의 사도를 삼은 것은 십자가의 도는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체험하고 증거할 사도를 세우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러한 사람을 불러서 세우는 것이 큰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준 것이다. 기독교를 핍박하던 자가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할 위력이다.
결 론
하나님의 역사는 왕권 받을 사람을 속히 이루자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울을 들어서 교회를 핍박하여 순교자를 내는 동시에 순교자를 나게 한 박해자 사울이 회개하고 세계적인 복음 운동의 선구자가 되게 한 것이 생명 있는 기독교의 위력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순교의 처음 열매
( 행 7 : 54 - 60 )
서 론
기독교는 순교 없이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순교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는 축복의 열매다. 스데반 청년이 기독교에 순교의 첫 열매가 된다는 것은 그 자신도 축복이요, 기독교에 큰 열매가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이 시키는 순교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는 것이다.
1. 스데반의 담대한 증거 (51-53)
담대한 증인이라는 것은 외식을 용납치 않고 절대적인 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동시에 시대를 바로 증거한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 자라도 참된 종을 대적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참된 종을 피 흘리게 한 예루살렘이니 너희가 회개치 않으면 멸망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어떤 교권이나 어떤 정권을 무서워하지 않고 증거하는 자 이였다. 만일 어떤 종이 역사적인 교권을 무서워한다면 이것은 순교자의 동무는 될 수 없다.
2. 영안이 열리며 천계(天界)를 봄 (56)
담대한 증거 자가 될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한다는 증거는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하며 주님의 자체가 그에게 나타나는 일이다. 이것은 순교자인 스데반에게 큰 힘을 주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하나님은 순교자에게 큰 담력을 주지 않으면 순교자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스데반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그 우편에 서신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3. 간곡한 기도 (59-60)
스데반은 기도에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 돌무더기 속에서도 괴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돌로 치는 무리를 향하여 간절한 기도가 나온 것은 위에서 주는 축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린 청년의 하나에 불과한 집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올린 기도를 그 입에서도 올리게 됐다는 것은 예수와 같이 왕권에 도달하는 승리의 기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열매라는 것은 이것이 성신 충만의 승리의 열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스데반의 피로 땅을 적시게 하시고 그 대신 사울을 세웠던 것이다. 사울은 그 당시에 순교의 피를 쏟는 스데반을 바로 죽였다고 판결을 내렸던 사람이다(행8:1). 하나님은 피가 땅에 떨어진 그 피를 대신해서 원수가 되었던 사울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강권 발동을 시켰던 것이다. 주님은 다메섹 길에서 홀연히 하늘로 빛이 비춰지면서 사울은 엎드려 떨었던 것이다. 사울은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는 스데반을 죽이는 순교의 눈동자가 되었던 자이었으나 고요한 음성이 들려 오는 소리는 사울의 고막을 울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였다. 그 음성을 들은 사울은 회개치 않을 수 없는 자리에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이다. 스데반 청년이 순교를 한 열매는 이방의 사도를 대신 세우는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이천 년간 역사의 한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는 순교의 피가 흐르는 땅에 반듯이 큰 열매가 나타났다는 것이 20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열매이다. 공산당 세력에서 피 값을 갚는 14만 4천이 일어나는 종말의 역사가 될 것이니 20세기 끝을 맺는 역사는 억울한 피를 흘린 셈의 장막에서 일어날 것은 사실이다.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
( 행 8 : 26 - 40 )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한 종을 쓰시는 것은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쓰는 것뿐이니 택한 종은 겸손히 순종할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하여 택한 종을 들어 쓰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종은 겸손히 그의 역사에 순종할 것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자기의 어떤 방법으로 일한다는 것은 그 근본적인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그날 일하는 것을 절대로 순종해 나간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아무런 것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겸손히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역사는 다음과 같다.
1. 천사의 인도를 받게 됨 (26-27)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나타나서 이르기를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조건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는 빌립은 큰 열매를 맺게 되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종이 순종하는 길을 갈 때에는 인간이 볼 때에 어리석은 일 같으나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역사 하시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방 고넬료의 가정에 전도할 때에도 천사의 인도를 받았고, 바울이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갈 때에도 천사의 인도를 받았던 것이다. 크나큰 열매는 베드로가 가이사랴를 향하여 가는 길에서부터 있었고, 구라파를 통하여 세계를 움직이는 운동도 바울이 순종의 걸음을 걷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순종의 걸음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축복을 가져오는 열매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택한 종 하나가 순종하는 걸음은 얼마나 귀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도 앞으로 주의 천사의 인도를 따라가는 길에서 큰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2. 성경을 바로 깨닫게 됨 (28-35)
택한 자는 성경을 읽기 좋아하는 동시에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 국의 큰 국고를 맡은 내시가 길을 가면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성신의 인도로 말미암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사53장을 읽게 되었다. 언제나 택함을 입은 사람이 성경의 뜻을 모르고도 은혜롭게 읽게 되는 것은 자기의 어떤 흥분이나 감정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에게 그 성경을 바로 깨닫도록 하는 것은 택한 종을 들어서 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천사의 방언을 할찌라도 택함을 입지 못한 자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로되 택함을 입은 자는 성경 본문을 읽는데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므로 택한 종을 통하여 간단히 말하여도 깊이 깨달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인간의 학설이 필요가 없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에게 성경대로 담대히 증거할 것뿐이다. 언제나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성경 본문을 간절한 마음으로 읽게 하는 동시에 그 성경 본문을 깨닫게 하되 선각자를 들어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아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요, 겸손히 성경을 읽는데서 참된 종을 통하여 알게 하는 것이 성신의 역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선각자를 무시하고 자기가 스스로 성경을 알아보려고 한다면 교만한 일이라고 본다.
3. 세례의 축복을 받게 됨 (36-40)
오늘에 교회가 세례의 큰 축복을 등한시하는 일이 있다고 본다. 언제나 세례는 성신의 역사 아래서 성신의 인도를 받아 물 속에 잠겨 올라 올 때에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이 법을 시행치 않는다는 것은 세례의 축복을 받지 못할 과오가 있는 일이다. 우리는 택한 자의 몸이 성신의 역사로 물에 잠겨 올라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주받았던 사망의 몸은 물에 아주 장례가 되고 축복을 받을 몸으로 물에서 올라오는 것이 세례의 축복이다. 내시가 물에 잠겨 올라 올 때에 주의 성령이 빌립을 인도한 것을 본다면 얼마나 귀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물에 잠겨 올라 올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한 사실을 보아도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물을 통과시키는 것은 큰 축복을 그 몸에 주기 위한 방법이다.
결 론
택함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택한 종을 만나게 되는 일이나 하나님의 택한 종이 택함을 입은 자를 찾아서 만나게 되는 일은 너무나 귀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택한 종을 들어 쓰는 주님의 역사이므로 여기에는 조금도 인간의 방법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울의 회개와 교회 발전
( 행 9 : 1 - 18, 요절 15 )
서 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운 목적은 천국인 동시에 당신의 종들에게 왕권을 주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순교의 피가 흐르게 하고 그 대신 역사 하는 종이 순교하면 다른 종을 세워 역사하게 하여서 기독교 역사를 순교적인 역사로 보게 되는 것이다. 사울은 스데반이 순교를 할 때에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하등 양심에 꺼리끼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사울이 회개하고 기독교 발전의 큰 열매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1 대지 : 살기 등등한 사울 (1-2)
사울은 기독교를 없애 버리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므로 스데반을 죽이는 것을 옳게 보는 동시에 큰 격동을 받아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기독교를 없이하는 결정을 하고 사방으로 흩어진 교인들을 없애기 위하여 길을 떠났던 것이다. 사울은 율법주의자로 율법을 숭배하는 사람이니만큼 기독교를 크게 오해하고 나섰던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불법적인 이단으로 보고 정통 유대교에 충성을 다하는 청년으로 나섰던 것이다.
2 대지 : 땅에 엎드려진 사울 (3-5)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사울은 땅에 엎드려 졌다. 왜냐하면 해보다 더 밝은 빛이 자기에게 비쳐졌기 때문이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인간 세력이라는 것은 감히 주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의 빛만 나타나도 꼼짝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 인간이다. 오늘날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으며 공산당들은 기독교를 세상에서 없이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나오지만 주님의 빛이 나타날 때에 엎드려진 사울같이 되고 말 것이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온유하게 나타나셨지만 오늘날 예수님을 반대하고 나오는 원수들은 진노하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슬피 통곡을 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 앞에 감히 머리를 들 수 없이 쓰러지고 말 인간이다. 지금은 주님께서 잠잠히 계신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때이니 사람마다 주님께서 나타나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도 특별한 종에게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일이 있다.
3 대지 : 눈이 어두워진 사울 (6-9)
사울의 눈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의 빛이 눈에 비쳐졌기 때문이다. 눈이 어두워진 것은 사울은 눈먼 소경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자가 하나님의 교회를 없이 하겠다고 나선 것은 소경 중에도 소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눈을 멀게 하여 절실히 회개를 하도록 끔 하게 하신 것이다. 사울이 너무나 강포한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4 대지 : 이방 사도로 택한 사울 (10-18)
주님께서 “아나니아” 라고 하는 종에게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첫째 :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서 안수하라고 하심
둘째 :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이라고 하심(13-15).
셋째 : 핍박을 많이 받으리라고 하심(16)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니 새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택한 자를 찾는데 있어서는 아무리 불의한 일을 하여도 찾아서 의로운 종으로 쓰는 것이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대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었다 하여도 회개시켜서 완전한 사람을 만들어 쓰는 것이다. 기독교를 박멸시키던 사울이 기독교를 세계에 전파한다는 것이 교회 발전의 큰 위력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를 계속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아무리 공산당이요, 무신론자라도 택한자는 강권으로 회개시켜 구원하는 것으로 새시대를 이룰 것인데 이것을 기독교의 위력이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언제나 위대한 역사를 하실 적에 인간의 생각과는 달라서 인간이 볼 때에는 안될 것 같으나 되게 하시는 것이다.
해를 받기로 택한 그릇
( 행 9 : 10 - 18 )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태로부터 사람을 택할 때에 주를 위하여 해를 많이 받기로 택한 그릇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주를 위하여 해를 많이 받은 자라고 본다. 십자가의 도를 가장 밝히 증거한 사도는 해를 많이 받은 바울이다.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밝히 증거한 편지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십자가의 도에 대한 변론을 완전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진리를 정확히 변론하는 은혜를 받은 것은 다른 사도보다도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해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해를 많이 받기로 택한 그릇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많은 성도에게 피해를 준 일 (13-14)
바울은 누구보다도 성도들에게 피해를 많이 준 사람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지나친 열성을 바울이 가졌기 때문이다(갈1:13-16). 하나님의 택한 그릇이 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열심과 강한 성격을 받았다고 본다. 모태로부터 강한 성격을 받은 자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강하게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교인으로서 누구보다도 정통을 주장하였으며 율법으로는 책망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와 같이 열심과 강한 성격을 가졌으므로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성도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알지 못해서 과오를 범하고 있는 바울에게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하여 나타나셨다(딤전1:13-14). 왜냐하면 아무리 택한 자라도 깨닫게 해 주므로 만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기 싫어하는 자라면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을 때에는 살수가 있었지만, 알게 될 때에는 그 즉시에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고도 성도를 해치는 일을 했다면 택한 자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택한자라는 것은 언제나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다.
2.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일 (15)
하나님께서는 예지와 예정이 계시므로 모태로부터 사람을 택하실 때에 어떻게 들어 쓴다는 작정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태로부터 사람을 택하실 때에 어떠한 일을 하라는 사명을 맡겼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택하여 쓰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뜻대로 부르시기도 하시고, 은혜를 주시기도 하시고, 들어 쓰시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을 스스로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 준 사명을 바로 알고, 그 일에 순종한다는 것 외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맡은 사명을 알고도 그대로 순종치 않는다면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본다. 왜냐하면 어떠한 일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이 순종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보다도 자기 인격을 상실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밭을 가는 쟁기를 만들 때에 도끼를 사용할 때도 있고 작은칼을 사용할 때도 있는데 도끼를 작은칼같이 쓸려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가 어떠한 일에 씌워진다는 것도 모르고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자기 인격을 모르는 사람이므로 모든 일이 다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3. 해를 많이 받게 되는 일 (16)
사도 바울은 택함을 받을 적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해를 많이 받기도 예정된 사람이었다. 고후11:23이하를 보면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피해를 많이 당한 사도였다. 사울이 이러한 피해를 당하기 전에 주님께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많은 해를 받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억울한 피해를 많이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주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주는 축복 인줄 알고 바울과 같이 항상 기뻐해야만 될 것이다. 언제나 대표적인 종이 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피해를 당하는 일이 많이 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해를 당하는 종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은 당신의 일을 위하여 피해를 많이 당하고도 감사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피해를 당하는 것을 원하셨던 것이다(사53:10). 그러므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심판의 대상자가 된다. 그리고 심판권을 가질 자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해를 많이 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택한 자를 위한 천사 활동
( 행 10 : 1 - 8 )
서 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타락하고 또는 위험한 자리에 들어갈 때 택한 자를 위하여 천사를 부리는 일이 있는 것이다. 마귀를 들어서 택한 자를 위하여 활동하는 일도 있다. 이제 택한 자를 위한 천사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예언적인 천사 활동 (눅 1:10-19)
하나님은 예고의 일을 위해서는 가브리엘을 활동시키는 것이다. 소식을 전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천사는 말했다(눅1:19). 하늘나라의 소식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일은 천사를 통해서 역사하는 것이다. 언제나 시대가 바뀌어지는 큰 역사가 생길 적에는 천사를 동원하는 일이 있다. 양심시대가 끝나고 언약신앙시대가 올 때도 대표적인 사람 노아나 아브라함에게 천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언약신앙시대가 지나고 율법시대가 올 때도 천사의 역사가 모세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율법시대가 지나고 은혜시대가 올 때도 천사가 세례요한의 부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은혜시대가 지나고 환난시대가 올 때도 천사를 동원하여 택한 자를 한 데로 모으는 역사를 말한다(마24:31). 천사는 하늘에서 보냄을 받기 전에는 인간의 마음대로 오지를 않는 것이다.
2. 택한 자를 인도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이 모르는 비밀을 알려주는 일도 하는 것이다. 또는 사람을 소개해 주는 일도 있다. 고넬료는 비록 이방 사람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이였던 것이다. 천사는 그 가정에 나타나서 사도 베드로를 데려다가 복음을 받도록 끔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부탁을 받고도 등한히 알고 있으므로 복음을 이방에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천사는 보냄을 받았던 것이다. 또는 빌립을 천사가 인도해서 구스 내시에게 전도한 일도 있다(행 8:26). 우리는 말세의 때가 급할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로 인도해서 복음을 받도록 인도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사야 52:12를 보면 마지막 때 사명자에게는 주의 천사가 같이 할 것을 말하였다. 언제나 주의 천사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같이 활동한 것을 말한 것이다.
3. 보호하기 위하여 활동한다 (단 12:1, 행 12:8-10)
하나님은 필요한 종이나 백성을 보장시켜 주기 위해서는 천사를 동원하는 것이다. 사드락, 메삭, 야벳느고도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 12장에 북방 세력이 오는 큰 환난에서는 네 민족을 호위하기 위하여 대군 미가엘이 일어난다고 했다(시 34:7).
4. 적군을 치기 위해서 천사를 동원한다 (사 37:36)
하나님께서 적군이 피해를 못 주도록 천사를 동원하여 막아 주는 일도 있으니 히스기야의 기도에 이와 같은 일을 보여준 것은 앞으로 환난기에 이와 같이 행하시겠다는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 것이다(욜 2:20).
결 론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종을 들어서 역사하는 일도 있고 천사를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일도 있고 마귀를 시켜서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천사나 마귀나 하나님이 부리는 것이니 최후의 승리는 천사와 같이 하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 것이다.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은 천사의 보호를 받을 만한 사람을 골라 세우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18장 11절 이하를 보면 백마 탄 자가 승리한 다음에는 마귀가 필요가 없으므로 무저갱에 가둔다는 것을 계20장 1-3절에 말씀하였다.
이방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됨
( 행 10 : 28 - 48, 요절 44 )
서 론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실천하는 일에 순종한 것이 위력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방과 유대 사이에 막혔던 장벽이 무너진 일은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으로 역사하는 일이 아니라면 안되겠으므로 이방인에게 지시하고 유대인에게도 지시해서 그 장벽을 무너뜨리게 한 것이다.
1 대지 : 유대인에게 지시하심 (28-29)
베드로가 “유대인으로써 이방인의 집에 가서 교제한다는 것은 위법인줄 알지만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않고 왔노라”고 하였다. 이것은 베드로가 해변 욥바 피장이 시몬의 집에서 이층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던 것이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데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앞에 드리웠다. 자세히 보니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 소리가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할 때에 베드로는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라고 하였다. 또 소리가 있어 가로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음성을 세 번이나 듣고 있을 때에 이방 가이사랴에서 사람이 찾아 왔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어느 사람이나 다 깨끗할 것이니 차별 없이 세계적인 선교를 시작하라는 것인 줄 깨닫고 서슴지 않고 이방인의 집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2 대지 : 이방인에게 지시하심 (30-33)
이방인 고넬료는 주의 천사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기도한 것이 하나님께 상달되고 빈민을 구제한 것이 하나님께서 기억 하셨다고 하면서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행 11:13-14). 이 때에 고넬료는 사람을 해변 욥바에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보내어 베드로를 청했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기 위해서는 직접 천사를 보내어 인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방 땅에 선교가 개척된 것은 하나님의 강권 역사로 시작된 것이다.
3 대지 : 베드로가 완전히 깨닫게 됨 (34-35)
베드로가 절대로 이방과 유대가 차별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받으시는 줄로 깨닫고 서슴지 않고 입을 열어 증거하게 되었다. 아무리 유대인이라도 하나님께서 하지 않는 자가 있고 이방인이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때부터 분명히 깨닫는 일이 있으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힘을 얻게 되었다.
4 대지 : 화평의 복음을 전함 (36-42)
화평의 복음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므로 하나같이 중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5 대지 : 성신이 이방인들에게 임함 (44-46)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신을 부어 주실 때 방언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방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6 대지 : 물로 세례를 줌 (47-48)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신 일을 베드로가 실행하는 것이다(마28:19).
결 론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자와 복음을 받을 자에게 하나같이 지시해서 이방의 전도문이 열리게 한 것이 세계 만국에 선교를 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기 위해서 직접 천사로 인도하고 보호하는 일이 있다.
성신의 보내심을 받아 선교를 하게 됨
( 행 13 :1 - 10, 요절 2 )
서 론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바나바와 바울을 먼 나라 선교를 위하여 보내라는 지시가 있었다. 바나바, 바울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전도에 나섰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교파적인 단체에 선교 기관이 있어서 보낸 것이 아니고 성신의 명령에 의하여 순종한 것뿐이다.
1 대지 :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신의 지시가 나타남 (1-2)
성신의 지시라는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니 성신의 지시가 없이 중대한 일을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에 간절한 기도가 있을 때에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서 일하게 하라는 성신의 명령이 있게 되었다. 언제나 참된 종은 성신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성신의 역사가 없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자칭 선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신의 지시에 따라서 순종하는 것은 자칭이 아니고 사도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2 대지 : 안수하여 보냄 (3-4)
사명적인 안수라는 것은 성신의 역사 없이 있을 수 없다. 성신의 역사가 없는 안수라는 것은 교회를 망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신의 역사 없이 안수를 하는 자도 안수를 받는 자도 형식을 따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사명적인 안수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은 사람이 명령을 받고 나가는 사람에게 안수하는 것이니 이런 안수는 복음을 세계 만방에 전파하는 위력이 되었던 것이다.
3 대지 : 거짓 선지를 굴복시킴 (5-12)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쓸 때에 두 가지로 쓰시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눈물 흘려 가며 깨닫도록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시는 것이요, 진리를 듣고도 짐짓 반대하는 거짓 선지는 책망을 해서 굴복시키는 일을 하신다. 바나바와 바울이 유대인 거짓 선지를 책망하여 굴복을 시킨 것은 복음 전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행한 일이다. 과거에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기독교를 없애기 위하여 폭행을 한 것은 알지 못하고 한 일이라고 하였다(딤전1:13). 그러나 이 박수는 바울 앞에서 책망을 받고 두 눈이 어두워지게 된 것은 짐짓 복음을 듣고도 방해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성신이 충만하여 말하기를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 하겠느냐 하면서 박수를 책망했던 것이다. 복음 전도자는 조금도 불의를 용납치 말고 강하게 나가야만 위력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절대로 사단의 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오늘 우리가 배울 것은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과 성신의 명령에 따라서 사명자 안수가 있어야 된다는 것과 전도자는 사단의 자식을 용납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철저히 행해 나갈 때에 선교의 위력을 얻게 된다.
결 론
하나님은 언제나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택한 종을 들어서 쓰는데 있어서는 강권 역사가 있으므로 종된 자로써 보내심을 받게 되므로 만 열매가 많게 되는 것이다,
이방의 빛이 되는 선교 운동
( 행 13 :44 - 52, 요절 48 )
서 론
하나님의 말씀은 이방으로 퍼져 나가는 빛이 되었다. 모든 선지가 이방의 빛이 되리라고 말씀한 예언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복음이 전하여 지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발악적인 행동을 하였고 이방인들은 기뻐서 환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보아서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악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할 일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1 대지 : 유대인들이 시기함 (44-45)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에 이방인들은 환영하며 말씀을 듣고자 모여들었지만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훼방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유대 나라가 망하게 된 동기다. 유대 민족이 예수를 반대하므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오늘날까지 남의 나라로 다니면서 압박을 받고 2차 전쟁 당시에는 독일에서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본다면 그 민족에게 얼마나 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말1:11에 해뜨는 곳에서부터 지는 곳까지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이루어진 것이다.
2 대지 : 이방 중심으로만 선교 운동을 함 (46-47)
어느 곳에 가든지 유대인들은 따라 다니며 복음 운동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이방인을 중심 하여 복음 운동을 하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예언이 응하는 일이므로 사도들의 마음까지도 다 이방을 향하여 나갈 마음이 불타게 했던 것이다.
3 대지 :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음 (48-49)
복음을 전할 때에 아무 사람이나 다 믿는 것이 아니고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사람들만 믿게 된다는 것을 사도들은 말하였던 것이다. 본문을 본다면 소위 성민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에게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가 적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 중에서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일이라고 본다. 진리 운동이라는 것은 사람의 자유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의 자유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역사라고 보게 된다.
4 대지 : 발에 티끌을 떨어버림 (50-52)
선교자들은 말씀을 전해도 짐짓 반대하는 자를 상종할 필요가 없고 그 사람에게서는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고 다시는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 자식이니 그와 동참한다는 것은 오히려 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자는 택한자를 찾기 위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니 조금도 불의의 세력에 눌림을 받지 않고 담대히 나서야만 위력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선교 운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 아래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도 없고 낙심할 것도 없이 강하고 담대히 나갈 때에 복음 전파의 큰 발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참된 전도자의 증거
( 행 14 : 8 - 18, 요절 15 )
서 론
오늘날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지만 자기를 숭배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목적하고 활동하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참으로 전도하는 종들의 증거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대지 :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중심 하여 역사함 (8-10)
‘루스드라’ 라는 땅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바울의 전하는 말을 듣는 것을 볼 때에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알고 바울이 큰 소리로 하는 말이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게 되었다. 이것이 그 땅에 큰 증거가 된 것이다. 언제나 참된 전도자는 이적을 중심하지 않고 말씀 하나를 증거할 때에 그 말씀을 믿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에 따라서 놀라운 이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떠나서 이적을 중심 한다는 것은 참된 지리를 증거하는 종의 역사라고 볼 수 없다.
2 대지 : 신과 같이 숭배함을 엄금함 (11-15)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메라 하여 쓰스신당의 제사장들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한 일이 있었다. 이 때에 참된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를 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인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라고 하면서 제사를 못하게 하였다. 이런 것을 본다면 바나바와 바울은 얼마나 참된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미혹시키는 거짓 선지라면 이런 기회를 타서 신과 같이 대접을 받고 숭배를 받으려고 하겠지만 자기를 숭배하려고 하는 일에 대하여 옷을 찢고 하지 못하도록 야단을 치며 말렸다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려는 종들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종들이므로 그 진리 운동은 세계를 정복하는 위력을 가져온 것이다.
3 대지 : 하나님만 공경해야 될 것을 증거함 (25-18)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것을 묵인하고 계셨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은혜를 나리고 구원하는 때이니 하나님만 공경해서 복을 받으라고 증거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복을 받으라는 것을 목적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종들이므로 가는 곳마다 핍박이 많이 있었지만 필연코 승리는 사도들에게 있게 된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선교 위력이라는 것은 언제나 핍박이 따르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표적과 증거를 나타내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문이 열려지므로 교회를 세우게 된다. 참된 전도자는 조금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것도 없는 것이다.
서방에 선교 개척
( 행 16 : 10, 24 - 34, 요절 10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아시아를 비롯하여 서방으로 전도를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신 것은 먼저 서방을 중심 하여 크게 발전을 가져오게 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입을 통하여 야벳이 창대하여 셈의 장막에 깃들인다고 하신 말씀대로 야벳에 창대한 축복을 주기 위하여 서방으로 선교할 문을 열게 한 것이다. 이것을 본문을 들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대지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심 (6-7)
성령이 바울에게 역사할 때에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일이다. 바울도 성신이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모르고 방황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서방으로 바울을 보내어 서방의 교회를 먼저 발전시켜서 아시아로 전도할 하나님의 경륜인 것이다. 이런 뜻이 있다는 것을 알 자는 심히 적었지만 오늘에 와서 경륜이 이루어질 때에 대표적인 바울에게 성신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2 대지 : 환상을 보여 주므로 서방으로 건너 감 (8-10)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이방 사람에게 전도하게 할 때도 환상을 보여 주었고 바울을 서방 사람에게 전도하게 할 때도 환상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욜2:28에 있는 말씀이 응한 것이다. 바울이 환상을 볼 때에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것이었다. 마게도니아 사람은 야벳의 장막에 있는 사람이니 만큼 색다른 민족이었지만 바울은 서슴지 않고 서방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용기 있게 건너가게 된 것이다. 순종은 제사보다도 낫다는 말과 같이 바울이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므로 서방에 큰 빛을 비추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3 대지 : 옥중에서 역사가 일어남 (24-30)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을 들어 쓸 적에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고 그 가운데서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이 서방에 건너가서 점하는 귀신들린 여자를 만났는데 바울에게 쫓아와서 소리를 질러 “이 사람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같이 여러 날 동안 떠들 때에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하는 즉시 귀신이 나가게 되었다. 이 귀신은 점을 치는 귀신으로서 귀신들린 여자의 주인이 이 일로 말미암아 돈을 많이 벌었던 것이다. 그런데 귀신이 나가고 점을 칠 수가 없을 때에 바울과 실라를 잡아 관원에게 끌고 가서 상관 앞에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는 것이었다. 그 때에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 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게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당할 때에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매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다. 그 때에 옥을 지키던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연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우리가 다 여기 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요”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므로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4 대지 : 세례를 베풀게 됨 (31-34)
그 날 밤 옥을 지키던 간수의 온 가정이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으므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서방에 건너가서 처음으로 일어난 역사이다. 인간이 볼 때에 큰 환난을 만났지만 서방에 크게 전도할 문이 열려진 것이다. 선교의 위대한 힘이라는 것은 어디를 가나 승리를 보게 된 것이다.
결 론
가장 위대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업이라고 본다. 아시아 사람이 서방에 건너가서 제 일보로 대승리를 보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야벳의 장막을 구원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심판 날을 작정한 하나님의 역사
( 행 17 : 22 - 31 )
서 론
하나님은 심판 날을 작정하신 일을 하나님만이 아는 일이다(마24:36).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생이 심판날에 구원받도록 활동하는데는 어떠한 역사를 하느냐에 대하여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자세히 알고 전해야 될 책임이 있고, 또 믿고 순종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아는 작정한 날을 향하여 쉬지 않고 가고 있는 심판의 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과거나 현재나 다 그 길에서 생활하다가 끝을 맺는 것이다. 죽었다가 부활하는 자도 그 날에 가서 갚음을 받을 것이다. 주님 올 때까지 살아남은 자도 갚음을 받을 것이다.
1.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6-27)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완전한 생활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금일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하나님을 바로 발견치 못하는 데서 헛된 수고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아덴 땅에서 알지못하는 신의 단을 보고 거기서 전도를 했던 것이다. 많은 종교가 다신 숭배를 하는 것은 어느 것이 참종교인지 모르니까 덮어놓고 섬기는 것이다. 하늘에 별을 섬기고 산에서 나무를, 물에서 물을, 돌에서 돌을 섬기는 것은 참신이 누구인지 발견치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금일에 과학자들도 하나님을 바로 찾지 못했기 때문에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못할 적에 무신론이요, 그 하나님을 찾을 적에 완전한 지식인 것이다. 세계를 통일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라는 것을 사11:9절에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아보려는 마음을 가진자에게 나타나시되 중심을 보시는 것이(마5:8) 하나님을 찾되 깨끗한 양심대로 살아보려는 마음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과거에도 마음이 깨끗한 생활을 하려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지시 한 일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시대 사람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시인들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2.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역사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라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심판하기 위한 종말의 역사이다. 과거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에게는 약간의 부족이 있어도 허물 치를 안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 동양에 성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천애인을 부르짖는 것도 그 시대에 한 등불 같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옛 시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지 아니했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역사한 사실도 있는 것이다(행10:34-35).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도 회개치 않는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복음으로 심판하기 때문에 고넬료는 복음을 믿기 전에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베드로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행10:35).
3.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로 심판이 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로는 그 부활증거를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생명의 은혜를 준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안다 하드라도 십자가의 부활을 믿음이 영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으로 영생을 줄 수 있는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벧전1:3-4). 그러므로 이날까지 세계 만방에 전한 증거는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한 것뿐이다(행17:31,눅24:46-47)
4. 심판시의 증거 (계14:6-7)
이것은 심판시기에 주 강림 후에 바벨론이 하루아침에 망할 때 심판하는 영원한 복음이다. 이것은 부활을 믿는 자라도 짐승의 표를 받으면 육체적인 구원을 심판 날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그 날이 오기 전에 세계 만방에 전하는 역사와 그 날이 올 때 전하는 역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모르는 아덴 사람에게 전한 말씀이 과거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허물 치 아니했거니와 지금은 회개치 안으면 멸망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말세 증인이 할 말은 과거에는 말세관이 혼선되었어도 허물치 안했거니와 이제 와서 만일 짐승의 표를 받으면 용서 없이 죽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시행할 때가 되기 전에는 허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께서 함께 하심
( 행 18 : 1 - 11, 요절 10 )
서 론
바울은 하나님이 돕는 역사가 아니라면 서방에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를 향하여 건너가게 된 것은 분명히 주께서 서방에 뜻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용기 있게 활동할 때에 다음과 같이 했다.
1 대지 : 장막을 만드는 업을 함 (1-4)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한다 하여도 사람이 할 일을 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업을 하면서 서방에서 전도를 한 것이다. 아무리 주님이 함께 하는 역사가 있는 신령한 종이라도 사람이 기술적으로 할 일은 했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이 함께 한다고 하면서 정신 작용에서 기술적으로 하는 일을 필요 없게 본다면 이것은 사도 바울적인 사상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교회 확장을 시키는 일은 성신 역사에만 있고 사람의 할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는 사명자들에게 사람의 할 일을 하게 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친히 역사를 나려 행하시는 것이다. 어떤 종이 자기의 할 일은 하지 않고 전부를 주님께만 만 맡기고 가만히 있다는 것은 탈선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2 대지 :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증거함 (5-7)
하나님의 종은 자행자지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증거해야만 교회가 확장되는 것이다. 어떤 종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반대가 있고 핍박이 있다고 하여서 증거를 못한다는 것은 말씀에 붙잡힌 종이라고 볼 수 없다. 말씀에 붙잡힌 종이 아무리 대적이 훼방을 하여도 더 담대히 증거할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사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사로잡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참된 종은 말씀에 사로잡혀 증거하면 항상 주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가 있다.
3 대지 : 택한 백성을 찾기 위함 (8-11)
교회라는 것은 아무 곳에나 사람의 마음대로 세울 수가 없다. 택한 백성이 있는 곳에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종을 들어 쓰기도 하시고 교회를 세우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두려워 말고 담대히 전할뿐이다. 사도 바울이 성신의 인도를 따라서 복음을 전할 때에 택한 백성을 찾으시는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셨다. 두려워 말고 잠잠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며 해롭게 할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결 론
사도 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해서 전도비를 사용하여 교회를 세울 적에 간 데마다 주님께서 함께 하는 증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절대로 원수를 무서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나가므로 서방에 교회를 확장시킨 것이다.
로마에 가서 증거할 것을
주께서 말씀하심
( 행 22 : 1 - 21, 23 : 11, 요절 22 : 21 )
서 론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 사명적인 안수를 받고 이방을 중심 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증거하고 로마에까지 증거하게 된 일을 공부한다.
1 대지 :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일 (22:1-21)
바울이 이방에 교회를 세울 때에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하지 말고 규례를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것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바울은 담대히 증거하게 되었다(21:21-40).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에 엄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었던 자다(22:3). 그러므로 기독교를 핍박해서 사람을 죽이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가두는 일을 했었다(22:4). 그는 대제사장에게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누구든지 예수 믿는 사람은 만나는 대로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던 자이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갈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비춰지는 것을 보고 땅에 엎드러져 음성을 듣게 되었다. 들리는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울이 뉘시오니까 할 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였다. 그러나 옆에 있던 사람들은 빛은 보았지만 말하는 음성을 듣지는 못하였다. 사울이 말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할 때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너의 모든 할 일을 거기서 누가 일러주리라” 하시었다(9). 이 때에 사울은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앞을 보지 못하고 눈이 어두워졌다. 그러므로 함께 가던 사람들이 사울을 끌고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사울을 찾아와서 세례를 베풀어주고 안수할 때에 사울은 성신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 그 때부터 바울은 담대한 종이 되었다(10-16). 그 후에 바울이 기도하는데 비몽사몽간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서 떠나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시었다(17-21). 그 때부터 바울은 이방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 어디에 가나 서슴지 않고 듣든지 말든지 자기가 받은 것을 증거할 때에 예루살렘에서도 대중을 모아 놓고 증거를 하는 것이었다. 듣던 대중들이 감동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서 바울을 때리고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지만 오히려 바울은 로마에까지 증거하게 된 것이다. 참된 증인이라는 것은 그 증거를 인하여 핍박을 당해도 서슴지 않고 증거하는 사람이다.
2 대지 : 주께서 바울에게 담대함을 주신 일 (23-11)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들어 쓸 적에 어려운 환난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이 있게 하면서 두려워 말고 담대히 증거하라고 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는 것이다.
첫째 : 충성된 종이 되어야 왕권을 받게 때문이요.
둘째 : 마귀의 세력아래서 주의 백성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요.
셋째 : 더 큰 상급을 주기 위한 모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종이나 참된 종이 더 환난이 많게 되는 것은 그 종의 축복이 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진보가 되는 것이다. 바울도 환난을 만나므로 로마에까지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다. 인간이 볼 때에 실패를 당하고 죽는 것 같으나 그 길을 감으로서 서방에 교회가 확장되었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자기를 핍박하던 자라도 강권으로 불러서 아무리 핍박이 와도 자기가 받은 경험을 말하면서 증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이 그 말에 감동을 받게 되고 감동을 받는 사람이 나가 전할 때에 핍박하던 사람이 감동을 받아 믿게 되고 계속으로 이렇게 된 것이 세계적인 복음 확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박해의 종교라고 하리만큼 누구나 다 박해를 하던 사람이 믿고 자기가 박해를 하던 것같이 자기도 박해를 받으며 참고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의 승리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로마에 전도의 문이 열림
( 행 28 : 16 - 23, 요절 23 )
서 론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소송에 걸려서 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자라는 말을 부쳤지만 바울은 아무런 죄가 없고 이런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어나게 되고 오히려 서방에 교회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전도의 문을 열어주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1 대지 : 소송한 일이 전도의 조건이 됨 (16-20)
바울은 로마에 가서 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이게 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다고 말함.
실지는 바울이 유대교를 훼방을 하든지 배척한 것이 아니고 유대교가 이러한 복음을 깨닫고 복을 받기를 바란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담대히 말했던 것이다(롬9:1-3).
둘째 :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말함.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므로 소망이 있는데 이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바울의 마음에 통분이 생각을 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고대하던 나라가 메시아를 반대한다는 것은 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 대지 : 바울의 사상이 어떠한 것을 듣고자 함 (21-22)
기독교는 바울의 사상을 가져야만 되는 것이다. 바울의 사상은 유대 주의적 사상이 아니고 십자가 중심에서 세계 인류는 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다는 그 말씀을 중심한 사상이다. 그러므로 유대교 사람의 사상은 독선을 가지고 이방인에게 구원이 없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를 원수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을 염병같은 이단이라고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사상은 바울이 가지고 나온 사상이라야 정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국을 세운 것은 세계적인 구원의 종교를 이루기 위한 것이니 구약의 모든 말씀을 육적 이스라엘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상이 아니다.
3 대지 : 하나님 나라를 증거함 (23)
바울은 일자를 정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되 모세 율법과 선지서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을 권하며 합법적인 강론을 했던 것이다. 로마는 로마 대제국의 수도이니만큼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 합법적인 변론을 듣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변론적인 강론을 할 때에 큰 열매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세계적인 복음 확장의 발판이 되었다. 로마에 기독교가 들어가므로 로마는 기독교의 발전 근본이 된 것이다. 한 때는 네로 황제 박해로 무서운 환난이 있어 많은 순교자를 내었지만 카타콤 시대를 지난 후에 로마 제국은 기독교 종교국이 되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는데 있어서는 억울한 피가 그 땅을 적시게 되는 일이 있었다.
결 론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온다 하여도 일할 문을 열어 주는 일이 있으므로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하고 로마에 끌려 갈 때에 여러 가지 풍랑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로마에서 크게 이루어진 것이다.
선지서를 전하는 바울과 말세증인
( 행 28 : 23 - 28, 계 10 : 5 - 7 )
서 론
하나님의 말씀인 선지서는 신약 성서의 원체와 같은 의미를 깊이 알고 우리가 성경을 논해야 될 것이다. 바울도 로마에 가서 이사야서를 들고 강론을 했던 것이다. 말세의 증인도 선지서를 들고 증거할 것을 말했다. 그러면 바울의 강론과 말세 증인의 증거의 차별 점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성서의 혼선을 가져올 염려가 있다.
1. 선지서를 강론하는 바울 (행28:23-28)
바울은 일생 동안 어디로 가나 선지서를 강론했다. 심지어 로마에 가서 셋방을 얻고 오는 사람마다 선지서를 강론했던 것이다. 그 목적은 예수님 한 분만을 이방인에게 말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사명은 여기에 국한된 줄 알므로 선지서 전체를 강론할 자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국한된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엡3:1-3). 바울은 계시로 받되 선지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일을 밝히 증거할 수 있는 영감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을 정확히 선지서를 들어서 강론을 권위 있게 한 사람은 사도 바울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친 수로 신약 성경 십사권을 쓰게 되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특별한 은혜를 받은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바울의 강론이 없었던들 기독교의 십자가의 복음은 확실한 광명을 이루지 못할 염려가 없지 않는 것이다. 그는 특히 바리새 교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성서에 능한 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구약 성서의 학자적인 자격을 가진 바울은 계시를 아울러 받게 될 때 천재적인 강론을 말로도 하고 붓을 들어 쓰기도 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일을 분명히 복음적으로 알려면 바울 서신을 볼 필요가 있다.
2. 선지서를 전하는 말세 증인 (계10:5-11)
사도 요한은 묵시를 볼 때 다른 천사가 몸에 구름을 입고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같이 부르짖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큰 소리로 외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우렁찬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천사가 전한다는 것을 본 것은 아니고 말세의 사명자가 이와 같이 외쳐야 할 광경은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한 일이 선지서와 같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제목으로 말했다면 말세 증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비밀인 선지서와 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을 목적한 해석이다. 만일 심판 날에 가서도 바울만 증거하고 그밖엔 증거 못한다면 이 사람은 말세 증인은 못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교회에 가서 예수 믿으시오 하며 전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바울의 강론인 편지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았다면 완전 계시인 계시록을 통하여 심판기에 될 일을 분명히 알되 선지서를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바울이 이사야서를 드는 것은 그리스도 한 분만을 목적하여 들었고 말세 증인이 선지서를 드는 것은 심판기에 남은 종과 남은 백성들에게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데는 어떻게 된다는 사실을 강론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가 세상에 와서 행한 일을 밝히 증거키 위한 목적이요, 말세 증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으로써 당할 환난과 또는 환난가운데 받을 보호와 환난 중에 역사하는 역사와 거짓 선지자의 미혹을 바로 알려주어서 미혹 받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안식에 들어갈 백성들을 살길로 인도하자는 목적이다.
결 론
우리는 바울의 서신과 계시록을 반대적으로 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편지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고 계시록은 예언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했으니 이것을 합할 수가 없다. 즉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말세 증인이 믿음으로 천당 간다고 해도 위험이요, 바울이 증거할 때 예언을 지켜야 한다고 했어도 탈선이 될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일만 바로 증거했기 때문에 탈선된 교훈은 조금도 강론한 일이 없다. 말세 증인은 심판 날에 재앙을 받지 않도록 하는 사명이 있으니 이 예언의 말씀을 증거해야만 탈선이 없을 것이다.
바울이 담대히 복음 전파함
( 행 28 : 24 - 31, 요절 31 )
서 론
하나님께서 특별히 바울에게 담대한 힘을 주시어 로마에서 복음 전하게 하신 것은 로마를 중심 하여 세계적인 복음 확장을 가져 올 경륜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강권으로 로마로 인도하되 원수들에게 결박을 당하여 머나먼 지중해를 건너서 로마로 가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벳을 창대게 하는 일을 할 때에 로마를 중심하여 역사를 하게 하신 것은 로마 제국이 가장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 수도로 바울을 보내어 거기서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하게 했던 것이다.
1 대지 : 반대자를 두려워하지 않음 (24-27)
바울은 마음이 강퍅한 유대인에게 무서운 박해를 많이 받았지만 거기서 약해지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을 생각하고 오히려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에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보고도 도무지 알지를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았기 때문 인줄 알고 거기서 완악한 자들에게 조금도 눌림을 받을 필요는 없다. 듣든지 말든지 담대히 전하는 것이 종된자의 사명이다.
2 대지 : 구원을 이방인에게 보내신 줄 알고 담대함 (18)
바울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을 것을 확신하고 담대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모든 성경은 세계 민족적인 구원을 가르친 것인 줄 깨달은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전력을 다 했던 것이다.
3 대지 : 금하는 사람이 없게 됨 (30-31)
바울은 이태동안을 자기 셋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은 다 영접하여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것을 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에서 자기 택한 백성을 찾기 위해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정확한 장소를 택하는 일이며,
둘째는 누구든지 오는 사람을 반가이 영접하는 일이며,
셋째는 담대히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담대하지 못할 때에는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역사를 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전하는 사람이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은 벌써 사단에게 눌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사람이 억지로 말한다는 것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신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서방으로 교회를 확장시키려면 로마에 복음을 전하여야만 되겠으므로 바울에게 무서운 환난을 만나게 했던 것이다. 이 환난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총궐기하는 환난이다. 유대인 중에도 바리새교인이요, 바리새 교인 중에서도 최고의 열심이 있는 사람이 기독교를 전멸시키려 나섰던 것인데 다메섹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본격적으로 이방중심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보다도 교회를 더 많이 세우고 율법과 은혜를 잘 구분시켜 유대적인 사상을 버리고 세계적인 사상을 가지고 나설 때에 아무리 따라 다니면서 유대인들이 방해를 해도 점점 더 강하게 일어나므로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만 오면 총궐기하여 바울을 없애기를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을 보고 유대인들을 전부 격동을 시켜서 죽이려 할 때에 바울은 로마 국적에 이름이 있는 사람이므로 유대인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을 함부로 피해를 줄 수가 없게 되어 로마 황제에게 결판을 내어 달라는 것이다. 로마인들이 이 일을 알아본즉 로마 제국에는 하등에 관계가 없고 단지 종교 문제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바울은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고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환난을 일으킨 것은 오히려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전도의 문을 열어 주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참된 종에게는 더 형통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도의 절대적 의무
성경 본문: 행 1:1-11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의 피를 사망전에 있는 우리는 곧 하나님의 것
이다. 특별한 사랑으로 빼내음 받아 하나님 백성 된 우리에게 거는 하나님
의 기대와 바램이 있다.
그 사실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내용이 본문이라 그 사역의 결정체가 십자가
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이로써 인간 구원의 도를 완성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기 위해 하늘날 올라가기전 자기를 추종하는 무리 앞에서 마
지막 유언적인 내용이 본문의 일부이다.
고로 선민된 우리는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구원 곧 선교를 감당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를 결행하여야 하겠다.
1.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예수님께서 향한 제자들의 질문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 하심이 이
때이니까? " 제자들의 배신 속에서도 묵묵히 십자가의 죽음을 감수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부활 하시어 40여일 동안 자기들과 함께 있다가 당시의 상황
은 하늘나라 올라가시기 직전의 만남의 장이다.
비겁하고 실수투성이던 제자들은 마땅히 무릎꿇고 "선생님 우리의 지난날
의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현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모르니 지
도하여 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충성하겠습니다."
이쯤 나왔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직시하신 주님, "그런 것은 너
희 알바 아니다"라고 하셨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 감격하며 기뻐뛰는 심정으로 나같은 죄인 구원시
키셨으니 여생을 어떻게 주님께 충성하리이까. 당연한 태도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태도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라에 빠져서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세상 것의 관심과 욕구를 채우려 하
니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시거늘 "그런 것은 너희 알바아니요"라고 돌이킬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성도들이여 제의 롯의 아내가 되어서는 안되지 않을까?
주님의 뜻은 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답게 변화됨에 있는데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같이 금식하며 하나님의 소명 받고자 자기들 대신하여
고난받은 시내산 산상의 자기 들의 지도자 모세는 뒤로 한채 금송아지를 만
들고 섬기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 본다.
2. 중심에 성령을 모시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성도는 자신이 성령의 몸된 성전임을 의식하여야 한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주님을 구주로 시인하여 주의 백성이 된 입장에서
무시로 성령과 교제하여 백성 다워질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성령의 충만을 받아 주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할 힘을 얻어야
하며 자신이 주의 이름을 위해 썩어질 밀알로 족할 줄 알때 육신의 소욕은
멀어지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느 참 주님의 사람이 되리라본다. 간판적
기독교인이 아닌 주님의 주장하심을 받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을 주님은 기
뻐하시니 그 무엇보다도 성령이 기쁘게 내 마음의 주인 되시어 성령의 온전
한 주장함을 받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었으면 한다.
3. 권능 받아 복음 전하자
복음이 복음 되도록 하려면 성령의 충만 속에서 능력이 역사할 때 복음의
역할이 열매를 맺는다 본다.
나는 태평양전의 선교를 생각하고 계획 중 태평양 바다에 산재되어 있는
섦의 선교 실태를 파악한 적이 있다. 거의 많은 섬에 교회나 성당 건물이
세워졌었으나 현재는 거의가 마을 사람들의 공회당이나 아이들의 놀이터로
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순간적 충동으로 건물은 세워졌으나 성령의 역사
가 끊겼기에 영적 폐허가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성령으로 무장한 사명자가
생명을 걸고 충성했더라면 후원자가 끈질긴 기도와 성령의 역사를 돈이상으
로 귀하게 여겼더라면 하나님의 역사속에서 그곳에 주일이면 이섬 저섬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성가의 소리가 메아리 치지 않았을까?
건물,지식,돈,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거기에 성령의 앞선 역사 뒤선 역사
가 재현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나?
현시 기독교는 마치 주인의 명패 붙은 집안에 객들이 침입하여 주인을 쫓
아 버리고 객들이 난장판 피우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참 주인을 주인되게 하라. 생명의 은인을 은인답게 대접하라. 영광 받으실
분께 영광을 돌려라.
이 모든 일은 성령 충만 속에서 말씀을 중심한 권능으로만이 가능할 수 있
고 이러한 바탕과 인격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 알찬 결실을 이룰 수 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가슴에 담고 나
의 모든 것을 복음전파에 전력하여 주님을 뵙도록 노력하자.
부활의 확실한 증거들
성경 본문: 행 1:1-5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온갖 이단들이 기독교의 진리와 유일성을
음해하고 파괴공작을 계속했습니다만 그러나 기독교만이 지니는 유일
성 때문에 전세계 인구이 3분의 1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이단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기독론 중심의 이단들입니다. 예
를들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한다든지, 아니면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
도 있고,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가 하면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에수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어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불교나 유교를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십
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
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도 존재할 수가 없고, 신앙도 성
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
는 증거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9:15을 보면 어떤 사건의 사실 여부와 진실 여부를 증언하려
면 2-3명의 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실 증명은 2-3명의
증인이면 성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 증거와 증인이 부지기수입니다. 그
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증거가 너무나 많고 확실합니다. 몇가지 증
거를 살펴보겠습니다.
1. 사도행전이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1:1을 보면 사도행전을 받은 사람이 [데오빌로]라고 했습니
다. 데오빌로는 그 당시 로마 정부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누가는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해서 데오빌로에게 보냈습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생애를 사실대로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
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데오빌로는 로마의 고관으로 예수님
을 영접했고 그 나애 도미틸라(Domitilla)와 함께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AD 96년 도미시안 황제 때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당시 로마의 고관이었던 [데오빌로]에게 보낸 공식 문서
이며 기독교 변증문입니다. 공식문서와 변증문에 어떻게 거짓증거를
써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때 누가가 보낸 사도행전이 거짓말 투성이었다면 데오빌로가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가끔씩 역사 기술의 오류나 왜곡시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잘못된 역사기록이나 왜곡된 부분들이 만천하에 드러나
게 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사도행전의 경우 만일 위증이나 오류가 있었다면 그 당시는 물론 훗
날 수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과 평가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기독교 2천년 동안 사도행전의 정경성과 정당성을 흔들리지
않은 채 초대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친히 나타나 보여 주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5:4-8을 보면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
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9베드로)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그?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고 그후에 야고보에게, 그후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니라"고 했습니다.
주경기 카알(Carr)에 의하면 다시 사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
나 자신을 보여 주신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에게 (마 28:9)
(2) 베드로에게 (눅 24:34,고전15:5).
(3) 글로바와 다른 제자에게 (눅 24:13-35).
(4) 도마가 없을때 제자들에게 (막 16:14,눅24:36,요20:19).
(5) 도마가 함께 열한 제자에게 (자됴20:26).
(6) 디베랴 바다에서 일곱 제자에게 (요21:1-24).
(7) 갈릴리 산위에서 열한 제자에게 (마 28:16).
(8) 500여 형제들에게 (고전 15:6).
(9)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 (고전 15:7).
(10) 예루살렘 부근에서 열한 제자에게..(막 16:19,눅24:50,행
1:3-12,고전 15:7).
횟수로는 열번 이상,사람 수로는 600여명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구약이 경우 사실 증거는 증인 2-3명이면 됩니
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시기 위해 계속해서 많은 제
자들과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
요하겠습니까?
본문 3절을 보면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동
안 저희에게 보이시며"라고 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40일 간을 세상에서 계시면서 부활하신 자신을 보여 주
셨습니다. 너무나 명확한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순교자들의 피가 증거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예수의 역사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Auguste Comte)와 영국 시인 칼라일 (Thomas
Carlyle)이 어느날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철학자 콩트가 의
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종교를 창설하기 위해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 새로운 종교는 기독교
가 내세우는 유치한 신비적인 이야기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에 완벽
하고 분명한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듣고 있던 칼라일이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니 좋은 일
입니다.그러나 그 전에 당신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수처럼 당
신도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만
들고자 하는 종교가 생명있는 종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독교는 부활과 생명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 힘 때문에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를 셀 수
없는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영국의 로지경 (Oliver J.Lodge)은 영국의 물리학자였고, 버밍엄대학
의 창설자입니다. 그의 아들이 1차대전 당시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했
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전사하기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버님 제가 죽더라도 제 무덤엔 오지 마세요. 전 거기에 없을테니
까요."
어거스틴(Augustine)의 어머니 모니카도 어느날 아들에게 '내가 죽거
든 장지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아무데나 묻어주기 바란다.나는 바로
하나님께로 가게 될테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떳떳하고 편안합니다. 이유는 죽음
을 넘어선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고대 로마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300년동안 기독교를 박해했습니
다. 그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기독교를 박멸하려 했습니
다.
나병이 만연된 골짜기에 몰아넣기도 했고 사자굴에 던지기도 했습니
다. 그런가하면 불속에 던졌고, 칼로 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게임은
기독교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예수가 로마를 이긴 것입니다.
생명은 강합니다. 예수의 부활생명은 오늘 우리 속에서 역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증거이며 웅변입니다.
예수는 다시 사셨습니다. 빈 무덤과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성경과 수
많은 증인들이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증인은 증
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이유 역시 예수가 누구시며 어떻게 죽으셨으며 다
시 사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부활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가지 감사할 조건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다시 사신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
죽은 신, 대답 못하는 잡신,우상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
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다시 사신 예수, 무덤이 없는 예수를 믿고 있
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둘째, 건전한 교단,건전한 교회에 소속돼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사이비 교단이나 이단 교히에 소속된 목사나 교인은 불행합니다. 그
집단이 잘못되면 교인도 낯을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다시 사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다시
말하면 죽은 예수를 다시 살아났다고 위증해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
럽겠습니까?그러나 다시 사신 예수를 전하며 사는 것은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넷째, 다시 사신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산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지난 3월 18일 새벽 6시 천호동 제일교회 김인식 목사님이 새벽 기도
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가 쓰레기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압축작업 직전의 청소차 곁으로 다가 갔습니다. 분명
신음소리, 울음소리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쓰레기 봉지 안에서 들
리는 소리였습니다.
미화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비닐 쓰레기 봉지를 개봉하자 그
안에 새파랗게 질린 피투성이 신생아가 들어 있었습니다. 한시간 정도
지난 신상아였습니다.
추위와 세균 감염 때문에 생명이 위급했습니다. 교회로 안고 와서 난
로를 피우고 물을 끓여 사모님과 함께 씻기고 응급조치를 취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누구가가 무책임하게 버린 생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이름을 (금봉지)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쓰레기 봉지에서 죽었어야 할 핏덩이가 금봉지가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핏덩이를 내다
버린 비정이나 타락한 윤리 이야기는 제쳐 두기로 합시다.
만일 그때 그 핏덩이가 본능적인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신음소리를
내내지 않았더라면 그 생명은 죽음의 봉지 안에서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소리, 그 울음, 그 신음 소리가 살게 해 준 것입니다. 성경은 소리
내어 부르짖고, 찬양하고,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목사님에게 발견되었다는 것, 그것은 보통 일이 아
닙니다. 그 생명은 자기를 버린 생모에게 양육받고 자라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쓰레기 봉지가 금봉지가 된 것입
니다.
저는 곰곰히 제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야
말로 나에게는 금봉지를 주신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 쓰레기에 묻힌 채 죽어야 할 조인, 죄의 비닐
봉지에 싸여 숨막힌채 질식해 죽어가던 나를 주님은 거기서 건져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새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금종지는 김 목사님의 호적에 입양이 됐지만 나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고 양자가 되었습니다.
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뉴스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시렵니까?
어떤 날 인도의 스테판 닐 주교가 성공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서
류를 내밀고 도움으로 요청했습니다. 대주교는 한참 동안 서류를 들여
다 보다가 옆으로 밀어 넣으며 이렇게 물었싸브니다."당신은 최근에
마지막으로 누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습니까"라고 .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고, 부탁을 드리는 우리네
열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시면서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최근에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나를 전했느냐"라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교회의 절대 과제입니다. 입
을 엽시다. "다시 사셨습니다."
"믿어야 다시 삽니다"라고.
아멘.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성경 본문: 행 1:1-8
예수께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당
신의 살아계심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과 대화도 나누고 식사
도 같이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소상히 설명해 주셨습니
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님의 부활과 천국보다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조국이 이스라엘의 광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님, 이스라엘이 광복할 때가 이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
문에 단호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
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다. 너희가 할 일은 예루살렘을 떠나
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
니와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성령이 너희에
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1:8).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 이전에 먼저 이땅에 하늘나라가 전파
되어야만 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
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3년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직
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에게도 주님께서는 천국 전파를 위해서는 성
령세례를 받아야 하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을하셨
습니다.
하물며,주님 부활 승천 2천년 이후에 사는 우리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반드시 위로부터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곧 성령 세례를 받아
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경을 통해 성령세례에 관하여 알
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성령세례의 체험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열심히기
도했습니다.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하는데, 열흘
후 오순절 날이 임하자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임
하자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머리위에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
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
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상상도 못한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자기들의 혀와 입술이 성령께 사로 잡혀서 자기들의 의지를 떠나 성령
의 말하기 하심을 좇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고함쳐 통성으로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주민들
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가서 담대하게 설교했습니다.
성령세례 받기 전, 조그마한 소녀 앞에서도 예순미을 모른다고 세 번
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이제는 강하고 담대하게 나가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하루에 3천명의 남자들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의 제
자가 되었습니다. 부녀자들까지 합하면 더 많은 수일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제자들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기도드리러 올라갈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40세쯤 된 남자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하은 그에게 "우리를 바라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얻
을까 하여 열심히 바라보는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명령했습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며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
미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충격이 얼만 컸던지 성전에 예배드리러온 사람들 중
에 5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세례 받기 전에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어부들이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식간에 성령
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변화되고 만 것입
니다.
2. 두번째 성령세례의 체험
두번째 성령세례의 체험은 오순절 첫 성령세례 체험 1년후 주후 31년
경에 빌립의 사마리아 성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오순절 성령세례 체험
1년후 성령이 충만한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예수 그리스도
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귀신이 크게 소리지르
며 나가고 많은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가 나아서 그 성에 기쁨이 충만했
습니다.
그 결과 사마리아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무도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지라 그는 즉시 예루살렘에 소식을 보내어 베드
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내려오게 했습니다. 그들이 내려와서 회개하
고 예수 믿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안수하매 그들이 곧 성령을 받기 시
작했습니다.
이 사마리아에 시몬이라고 하는 유명한 마술사가 있었는데 그는마술
을 이용해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쳐서 그곳 사람들은 그를 '신의 사
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조차 빌립의 복음증거와 이를 통해 나
타난 큰 이사와 기적을 보고 감탄하며 따라다녔습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회개한 사람들에게 안수하매 그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에게도 그런 은사를 팔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대노해서 "네게 사단이 꽉 들어차 하나님의 은
사를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했으니 돈과 함께 너는 멸망할 수밖에 없
다"고 책망했습니다.
마술사는 놀라서 자기를 용서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
고 빌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볼 때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
에게 안수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을 때 외적인 증거가 나타난 것이 확
실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나타난 증거없이 "성령을 받으라"고 말만
한 것을 보고 자기도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돈 주면서 팔라고 할 사람
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마술사 시몬이 제자들이 귀신을 쫓
아낸 것이나 병고치는 것을 보고 은사를 팔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자기도 가끔씩 그런 일은 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그것은 틀림없이
방언받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언은 성령의 능력으로 전에 알지 못하던 말로써 하나님께 기도드리
고 찬미하는 것이니 그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
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에는 여러가지 표적이 따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외적 표적이 방언임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세번째 성령세례의 체험
주후 40년경, 첫번째 성령 체험 10년후 가이사랴의 로마 주둔군 백부
장 고넬료의 가정에서 세번째 성령세례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고넬
료는 로마 사람으로 이방인었으나 야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근느 하
나님을 열심으로 섬겨서 기도와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
하루는 오후 3시 기도시간에 기도를 드리는데 환상중에 천사가 나타
나 그에게 마했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고 많이 구제한
것이 하나님께 기억된바 되었으니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는 베드로라 하는 사람을 청하라 그가 네게 구원의
도리를 전해 줄 것이라"
여기서 노라운 사실 하나를 배워야 할 것은 우리가 저금하면 은허에
예치되어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위한 사업을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
의 기업에 예금해 놓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진실한 군인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를 청해 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말미
암아 어떠한 죄인이든 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전했습니
다.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을 증거하자 갈급한 심령으로 있
던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순식간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심
으로 그들은 큰 소리로 기도하며 방언을 말하여 하나님을 높이기 시작
했습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비난하며 조용하게 기
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통성으
로 크게 기도할 수 박에 없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받은 성도들이 얼마나 고함을 쳐 기도했던지 온 예루살렘 사람들
이 몰려 나온 것을 보고도 알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로 48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
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
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라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
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
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가 증거한 것을 보십시오. 이방인 고넬로의 집에 성
령이 역사하신 것은 오순절 다락방에서 유대인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
사와 똑같다고 말한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고넬료의 가정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 보배로운 피로 씻음을받
으면 오늘날 하나님은 차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4. 네번째 성령세례의 체험
네번째 성령세례의 체험은 주후 53년 오순절 이후 23년만에 에베소에
서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가보니 교인 12사람이 있는데 예수
님을 믿는 제자라고 하면서도 죽은 사람들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에 아
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답답한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질문
했습니다. 그들은 눈을뜨고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습
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을 회개케 하여
물로 세레를 베풀고 난 후 안수하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언도 하고 에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그들은 뜨겁고 열렬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
을 중심으로해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이 석달 동안 그들과 같이 있으면서 복음을 증거하자 성령받은
이 열두 사람이 뜨겁게 복음을 전파하여 성도수가 자꾸 늘어 하나님
말씀이 능력이 되어 에베소 도시를 흔들었습니다. 수많은 이사와 기적
이 일어났는데 얼마나 에베소에 신앙이 충일했던지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가지고 가서 미친 사람이나 병자에게 얹어도 귀신이 쫓겨가
고 병이 나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히 나타나자 에베소의 마술사들은 모두
바울에게 나와 회개하고 마술책들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앞에서 불지르
니 그 책값이 은 5만냥이나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
나기 전에는 12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어도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
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와서 그 12사람에게 성령을 받게 하자 그들의
열렬한 복음증거로 에베소가 진동하고 온 아시아 사람들이 에베소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사도시대의 위대한 복음증거의 성공은 당시 성도들
이 성령세례의 체험을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는 체험은 오늘날도 우리가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레를 받아야 하늘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신앙이 담대해지고 능
력이 임하여 듣는 이의 영과 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권세가 따라서 귀신이 소리치며 나가
고 병든 자가 고침받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신 것을 더 뚜렷이 알게 되고 그리스도
를 더욱 힘차게 믿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되
고 됩니다. 그리고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분별
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병고치는 은사등 각양의 은
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하늘나라는 소설이지 살아있는 천국의 역사는 아닌 것입니다. 성령세
례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로 무장해서 원수의 진을 훼파하고 살
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살아서 역사하는 하늘나라를 사람들에게 나
타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진실로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있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생일 때 성령을 받고 싶어서 토요일 밤에 삼각산 꼭대기에
올라가 나무를 끌어안고 12시까지 기다렸는데 마음이 맨숭맨숭하고 성
령님이 도무지 임하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로 내려가고
싶으나 너무 어두워서 못내려 갔습니다.
그래서 이왕 올라왔으니 성령을 받아다겠다고 결심을 하고 회개기도
를 시작했는데 좌우간 어린 아이 때로부터 시작해서 그때까지 살아오
면서 지은 죄란 죄를 모두 회개했습니다. 국민학생 때인 일정시대에
학교갔다 오다가 배고 고파 남의 밭에 들어가 수박 따먹은 것까지 전
부 회개를 했습니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더군요.
그러자 불같은 성령이 임하시기 시작하는데 제 혀가 꼬부라지고 입술
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방언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고함을
치고 기도해도 방언만 유창하게 나오는데 생수가 뱃속에서 강같이 넘
쳐나는 것입니다.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저는 많은 시간을 방
언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36년간의 방언기도를 통해 이 기도가 하나님
과 나 사이에 교제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며 영적인 성장에 지대한 영
향을 미치는 가를 절실히 체험해 알고 있습니다.
둘째로,성령을 받고 싶은 갈급한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심정
이 없으면 기도를 하지 않게 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오시면 오시고, 안오시면 안오시고...'하면 평생 성령 충만함
을 못받습니다.
성경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
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내게 보이리라"고 했는데 부르짖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어떻게 성령을 받겠습니까? 마음이 절실하고 갈급하면 체면
볼 것 없이 부르짖어 기도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받기 위해 기도하라면 "하나님 나는 고함치거나
몸이 진동하지 않고 성령받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쓸데없는 조건을 많
이 세우는데 마음이 갈급하고, 절실하면 그런 조건은 다 사라지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미 성령 충만을 받은 주의 종들이나 지.구역장들이 함께 안
수하고 도와주면 성령을 빨리 받을 수가 있는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
게 충만히 임하시면 외적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방언을 말하려고 해
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자연적으로 방언을 하게 됨으로 성령
충만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를 통해 우리들
의 신앙이 성장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삶 가운데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개인의 신앙무장과 교회의 부흥, 복음증거의 성공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세례받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행 1:1-8).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10년,20년 믿었다는 신앙 연조도 중요하지만, 성령없이 믿은
세월은 그저 내 신앙만 간수했을 따름이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역사를
베풀지 못합니다.
중생은 속에서 넘쳐나는 우물에 비교한다면 성령세례는 속에서 흘러
나오는 거대한 강물에 비교되는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의 우
물을 가지고 있지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한강과 같이 넘쳐흘러 나
오는 강물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금년도에는 반드시 성령세례, 성령 재충만을 받고
성령의 권세에 잡혀서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