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리 길, 집으로 돌아가던 길
박무형
1990년대 말 공직을 은퇴하고 2년간 진주에 있는 국립 경상대학병원 상임감사로 근무했다. 처음엔 나는 특별한 볼일이 없는 한 주말에는 서울에 있는 집으로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갔었다.
토요일 휴무도 없는 때였고, KTX 고속열차도 생기기 이전이었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진주-서울행 열차를 오후 3시경에 탔었다. 정차역도 많아 탑승 시간도 5~6시간이나 걸려 때로는 꽤 지루했었다.
그래도 새마을호의 객실은 쾌적했다. 오후 남녘의 햇빛을 받으며 단조로이 타고 가노라면 푸른 바다에 하얀 유람선을 타고 고향 섬으로 찾아가는 것처럼 설레기도 했다. 창 측 좌석에 앉아 스치는 계절의 풍경을 감상하거나 주중에 읽다 남은 책을 마저 읽거나 하게 된다.
열차가 마산, 창원을 거치고 삼랑진에 이르러 경부선에 접어든다. 밀양을 거치고 동대구역으로 향할 즈음이면 얼추 1시간 반쯤의 시간이 흐른 셈인데 출출해지는 시점이다. 그때 식당칸으로 가서 맥주 한 병과 안주를 시켜놓고 비치된 잡지류를 뒤적이며 무료함을 달랜다. 차창으로 일몰이 닥치면 아예 간편한 저녁 시사를 하면서 1시간여를 보낸다.
동대구역을 지나면서 한적했던 식당칸이 붐비게 되면 나는 객석으로 돌아와 가방에서 포터 벌 CD 플레이어를 꺼내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좌석을 누이고 반쯤은 취침 모드를 취한다. 내가 좋아하는 오페라 전곡이 수록된 CD 한 장이면 대전쯤에서 서울 영등포역까지 나를 지루하지 않게 데려다줄 것이었다.
그사이에 동대구역에서는 경주빵을, 천안역에서는 호두과자를 1상자씩 사서 보태면 큰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과 함께 집에 가져갈 짐이 혼자서 버거울 정도다. 영등포역이나 서울역에서 우리 집으로 가는 지하철 1호선, 상당히 붐빌 때가 많다. 그럴 때는 마치 귀성열차를 타고 우리 집에 다다르는 기분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경상대학병원 시절 집으로 가는 길의 한 패턴이 이뤄지는 것이다. 진주라 천 리 길이라고 나의 임지가 서울 집에서 너무 멀고 다니기가 불편해서 주말마다 왕래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느껴졌다. 때로는 주말에 그곳 등산 동호인들과 지리산을 비롯하여 영호남 일대 명산을 섭렵하느라고 서울집에 못 갈 때가 많아졌다.
주말 산악회와 어울릴 경우, 목적지가 강원도나 충북 이북인 경우, 즉 돌아갈 길이 진주 직장보다 서울 우리 집이 훨씬 가까우면 나는 산행을 마치고 일행과 헤어져 서울 집으로 향할 때가 많다. 이것도 나의 경상대학병원 시절에 서울집으로 가던 길의 한 패턴이 되었다.
한번은 진주에 있는 단골 산악회에서 주말에 무박 2일로 서울 북한산 종주 등반을 한다고 했다. 서울 집에도 갈 겸 이에 합류하기로 했다, 금요일 밤 10시에 출발한 진주 산악회 관광버스는 이튿날 새벽 4시경 서울에 도착했다. 밤새 불 꺼진 버스 속에서 간헐적으로 눈을 붙여 얼떨떨 한 채로 산악회서 마련한 간단한 아침 요기를 하고 5시경부터 북한산 북측 송추지역 부근 산성 입구에서부터 북한산 종주 산행이 시작됐다. 대서문-의상봉-문수봉-대동문-백운대-우이동까지 장장 18km의 거리를 8시간에 걸쳐 종주한 것이다.
서울에 살면서 수십 년간 북한산을 숱하게 다녔지만, 종주는 처음이었다. 북한산이 전국 명산 중에서도 큰 명산임을 느꼈고 완전 새로운 산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북한산을 몇몇 코스만 반복하여 다니면서 북한산을 다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지리산도 진주에 있으면서 유명골짜기나 봉우리를 오르내렸지 막상 종주 코스는 2박 3일로 서울서 내려오는 지인 산악회원 들에 합류하여 체험한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른 저물녘에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애들이 뜻밖의 등산복 차림이라 놀라는 표정이었다. 집을 나설 때는 정장 차림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땀에 전 등산복 차림이라니, 나의 이러한 귀가 패턴은 나중에는 몇 번 더 있었다. 심지어는 진주에 돌아갈 때도 무박으로 서울 근교 산에 왔던 진주 산악회팀과 마중으로 합류하여 산행을 한 번 더하고 진주로 내려가는 형식을 취했다.
한번은 서울에서 꽤 먼 곳, 충북 소백산에 오는 진주 산악회 팀을 맞이하려고 일요일 새벽 청량리역에서 6시 중앙선 첫차를 2시간이나 타고 가서 풍기역에서 내려 그들과 소백산 연화봉과 비로봉 능선길을 함께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타고 왔던 산악회 버스에 같이 타 우리 집에 오듯 진주 숙소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내가 산에 미쳐도 어지간히 미쳤던 것 같다,
ㅣ나의 진주 시절 내 집에 가는 패턴이 또 하나 생겼다. 그 당시에 대전 진주간 고속 도로가 완성되었다. 얼마 후 그것이 통영시까지 확장되어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한반도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게 됨에 따라 자가용차로 서울 가기가 여간 원활해진 게 아니었다.
진주에 머물며 지리산 등 주변 등산지까지 동원되던 나의 차 애마 레간자는 서울 우리 집까지 가는데 정체만 되지 않으면 4~5시간이면 족하다. 명절 때나, 집에서 행사가 있을 때, 가져갈 짐이 많을 때는 나의 애마 레간자를 운전하고 갔다.
대전까지 가는 도중에 경남의 거창, 함양, 산천, 전북의 무주, 진안, 장수지역을 지날 때 그 지역 휴게실이나 농막, 과수원을 둘러 먹거리, 농산물 과 일등 지역 특산물을 차 트렁크에 사서 가득 싣고 집으로 가는 기쁨에 마음이 들뜬다. 서대전을 지나 서울이 가까워지면 차량이 정체된다. 그랬을 때는 마치 고향으로 귀성하는 기분이다. 집에 가면 아내가 애들과 함께 함박 같은 웃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아내는 가정에 갇혀 가사와 육아의 굴레 속에서 밖의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고 가사노동의 과부하를 혼자서만 감당했다. 남편인 나는 밖에서 하고 싶은 취미활동은 다 하려 들었고 아내와 동부인 외출도 별로 안과 혼자 다녔다.
인사이동으로 지방 근무가 잦았던 나는 집에 오가는 길에 해외 출장이나 다녀오는 것처럼 바퀴 달린 큰 가방을 끌고 다녔다, 집에 올 때는 그 가방 속에 세탁물이 가득 찼었고 임지로 갈 때는 깨끗이 세탁하여 다름질한 옷들이 정갈하게 접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근무처에서 항상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착용하는 것이 기본 예의로 알았다. 나는 왜 그때 임지에서 세탁물을 처리하지 못하고 굳이 아내에게 가져와 혹사했는지 후회 막급이다. 차로 집에 가는 길에 차 트렁크에 잔뜩 실었던 먹거리들, 그것들도 아내에게 조리하도록 수고를 시킨 물건들이다. 그보다 아내에게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같이하고, 동부인해서 어디든 많이 다니고, 젊을 때 등산도 함께 즐겼어야 했다.
지금은 피차 80이 넘어가는 늘그막, 나는 집에서 아내의 병시중과 가사노동에 갇혀 지내고 있다.
첫댓글 음악과 산을 끔직이 좋아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