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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봄은 속도전이다.
제 아무리 꽃샘추위가 브레이크를 잡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고야 만다. 두터운 외투를 다 벗기도 전에 매화며 산수유가 피어나더니, 물앵두며 살구꽃, 벚꽃들이 삽시간에 섬진강과 지리산을 점령하고 있다. 마음도 몸도 아직 봄을 맞을 준비나 봄꽃에 대한 예의와 격식도 갖추기 전에 만화방창(萬化方暢) 봄기운에 포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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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을 뚫고 얼굴을 내미는 설중 변산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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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빛의 계절이다. 햇빛, 꽃빛, 물빛, 산빛, 눈빛 등 현기증이 나고 두 눈이 멀어버릴 정도의 빛 잔치다. 지난 2월 말, 봄이 채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어느 방송의 촬영 때문에 목포 연안의 섬 달리도에 다녀왔다. 목포 유달동의 섬, 반달 모양의 달리도에서 쪽빛 바다보다 더 강렬한 눈빛들을 만났다. 그동안 소주 안주에 즐겨 먹던 광어의 눈빛을 처음으로 자세히 보았다. 막 잡아와 펄떡거리는 광어의 눈빛 속에 쪽빛이, 그것도 깊은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딥 블루, 울트라 블루가 강렬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어부의 딸인 말괄량이 섬 소녀, 달리도분교 2학년 유정이의 눈빛을 보는 순간 아주 오래 전에 본 몽골 유목민의 딸이 떠올랐다. 어릴 적 고향 돌담 아래서나 보던 눈빛이었다. 바닷가 모래밭에 뒹구는 홍합 껍질도 역광을 받으니 쪽빛이 선연하게 살아나고, 섬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배를 타고 육지로 팔려나가는 소의 그 큰 눈동자에도 바다와 하늘이 깃들어 쪽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섬의 소들이 난생 처음 뭍으로 나간다는 것은 곧 도살장행과 죽음을 의미한다. 이틀간 섬 이 곳 저 곳을 둘러보고 마지막 배를 탈 때 소의 슬픈 눈빛과 마주쳤다.
블루는 영혼의 빛이 분명하다. 하지만 육체도, 영혼도 다 빠져나간 폐가의 창호지문과 선풍기와 예수님 초상화 등을 보았을 때는 분명 빛이 나긴 나는데 다만 쪽빛이 없었다. 광어와 소녀와 홍합과 소의 눈빛이 이토록 닮았다는 것을 달리도에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빛나던 눈빛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먹고 살 만해지는 만큼, 나이가 들어갈수록 잃어버리는 것은 눈빛이 아닐까. 물론 절대고수는 함부로 눈빛을 보여 주지 않고 안광을 흐릿하게 숨긴다는 얘기도 있지만 말이다.
너도바람꽃도 막 꽃망울 터트려
섬에서 나와 허기진 영혼을 달랠 겸 곧바로 산속으로 달려갔다. 밀린 일이 태산 같았지만 그 산의 깊은 계곡에 고개를 내밀고 있을 변산바람꽃이 자꾸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화르르 피어나는 꽃들 속에서 노니는데 참으로 특이한 변산아씨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일명 쌍두화(雙頭花)로 불리는 두 얼굴의 여인이었다. 쌍두 변산바람꽃! 일란성쌍둥이 꽃을 처음 보았다. 그것도 변산아씨 자매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웅다웅 인간도 사실 알고 보면 모두 지구촌의 쌍둥이들이 아닌가. 산속에서 나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섬진강변을 어슬렁거리며 생각해도 대체 뭐가 그리 다른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모두 시절인연이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만난 꽃이며 사람이며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강변의 버들강아지 노랑 꽃가루가 다 지고 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하며, 지금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또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마저 무슨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갈 수 있을 때 가고, 볼 수 있을 때 보고, 사진 찍을 수 있을 때 찍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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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틀임하며 피어나는 용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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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매화꽃과 산수유가 피어나니 따스한 남동향이 아니라 북서쪽 혹은 북동쪽의 아주 추운 이끼 골짜기에는 너도바람꽃이 피어날 때가 된 것이다. 네가 꽃이면 나도 꽃, 내가 바람이면 너도 바람이니 너도바람꽃 아닌가. 지난 2월 23일의 지리산행복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후다닥 달려가 보니 그 산 그 북향의 숲속에 너도바람꽃이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봄바람 살랑거리는 바람꽃, 그 종류도 참 여러 가지다. 원조의 바람꽃과 더불어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변산바람꽃, 풍도바람꽃, 꿩의바람꽃, 남방바람꽃. 회리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들바람꽃, 태백바람꽃 등.
전국을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모시다 보니 그중에 색감이 단연 돋보이는 꽃은 변산바람꽃과 남방바람꽃이었다. 하지만 모두 형제자매 혹은 사촌지간이니 바람의 이름으로 저마다 환한 일가친척의 얼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네가 피면 나도 필 것이다. 내가 지면 너도 질 것이다. 바람이 피우고 또 지우니 어이 바람을 탓하랴. 시절인연이 닿았으니 일단 꽃부터 피우고 볼 일 아닌가. 나중에 질 것을 미리 걱정하지는 말자. 지지 않는 꽃은 이미 더 이상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SNS 중에서도 페이스북을 즐겨하는 편이다. 야생화 사진을 올리고 그에 걸맞은 시를 올리기도 하는데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아 주니 고마울 뿐이다. 소유보다는 공유의 개념으로 야생화를 보여 주고, 함께 봄을 맞이하자는 의미에서다. 그리하여 매화꽃이 피면 “매화꽃 위로 눈썹달이 떴습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그대의 눈썹 위에도 매화꽃이 피었는지, 안부를 묻습니다”는 등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한다. 아수라지옥 같은 세상사에 소통과 공유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며칠간 경북 칠곡과 경남 양산 등지를 떠돌다 섬진강변 집으로 돌아오니 그 사이에 훈풍을 넘어 만화방창 봄꽃들이 줄지어 피고 있다. 칠곡에서의 인문학 교과서 발표행사는 감동적이었다. 칠곡의 가장 보통사람인 5명을 선정해 그들의 일대기를 구술과 사진으로 엮어 책을 내기로 했다.
내가 담당한 묏자리를 잡아 주는 지관(地官) 신석규씨의 삶과 지혜는 놀라운 것이었다. 망자(亡者)들의 영원한 안식처를 잡아 주는 것이 생업인 그의 눈빛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지수화풍을 읽어내는 그는 산을 보면 어디로 수맥이 흐르고, 묘를 보면 그 곳에 물이 찼는지 아닌지, 시체가 육탈(肉脫)이 잘 됐는지, 생체(生體)인지, 미라인지 단박에 알아내는 것이었다.
칠곡에서 산을 읽어 내는 새로운 눈을 뜨고는 곧바로 양산 통도사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봄밤에 열린 ‘주변인과 문학’ 제1회 문학기행도 참으로 알차고 행복했다. 나의 짧은 문학강연에 이어진 시낭송가와 가수들의 공연은 마치 통도사 홍매화처럼 가슴 설레게 했다.
물과 불이 잘 맞아떨어지면 꽃이 돼
하루가 다르게 매화와 산수유는 섬진강 황어떼를 따라 북상 중이고, 언 땅을 뚫고 올라온 청노루귀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첫사랑처럼 달뜨게 했다. 문득 청노루귀의 안부가 궁금했다. 흰노루귀, 분홍노루귀 등 노루귀 중에서도 참으로 보기 힘든 야생화가 아닌가. 1년 전에 참으로 어렵게 만났던 청노루귀 일가를 찾아갔다. 지난해에는 3월 10일에 처음 보았었다. 올해는 더 빨리 피어 성질 급한 일가족들이 막 눈을 뜨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날씨가 흐려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찍히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걱정이겠는가. 청노루귀가 귀를 쫑긋 세우며 다시 보러 오라는 뜻이니 그마저 고맙고 행복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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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설중 복수초가 노란꽃을 피워 주의를 끌고 있다. 2 설중 노루귀는 보라색꽃을 피우고 있다. 3 섬진강 갯버들. 4 홍매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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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만난 청보라빛 노루귀처럼 1년 만에 문득 마주칠 때 두 귀를 쫑긋 세우며, 눈빛을 빛내며, 환하게 포옹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 약속도 없이 마주쳐도 모두 반가운 사람들이라면 그동안 그만큼 잘 살았으니 분명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행여 단 한 명이라도 외면하거나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안 보거나 마주치지 않으면 그만일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얼마나 서로 내상을 입는 일인가.
돌이켜보니 나 또한 입산 16년 만에 두어 명 생긴 것 같으니 썩 잘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청노루귀 앞에 엎드려 다짐해 보는 것이다. 행여나 단 한 사람이라도 불편한 관계를 만드느니 차라리 청노루귀처럼 숲속에서 혼자 살다 가자고, 차라리 그리워만 하다가 수풀 속으로 스러지자고 말이다.
나도 한때는 물불 안 가리며 살던 시절이 있었다. 지천명이 지나서야 겨우 물과 불이 잘 맞아떨어지면 꽃이 된다는 것을 알 듯도 하다. 물론 나 아직 천명은 잘 모르더라도 일단 물과 불이라도 가리며 살아야겠다고 속다짐하는 것이다. 청노루귀를 보고는 구례 상사마을의 ‘천년고리 감로영천’ 당몰샘을 보며 그 북서향 추운 계곡의 환한 너도바람꽃을 읽고 변산바람꽃을 읽는다. 달밤의 늑대로 살던 시절을 지나 바야흐로 달밤의 식물 혹은 초식동물이 되어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내 몸 속에도 뭔가 약수나 고로쇠 수액이 차오르는 이 느낌이 좋을 뿐이다.
이 모두 지난 1년간 야생화들에게 배운 것이다. 배우고, 얻고, 건강까지 되찾았으니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지천의 큰개불알풀꽃이며 광대나물이 어찌 하찮을 것인가. 어느새 우리 마을엔 골목마다 매화향이 어슬렁거리며 절정으로 치닫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왕지사 꽃이 피려면 이렇게 만화방창 피어야 한다. 올해의 첫 상춘객으로 소설가 김훈 선생과 작가이자 기자인 조용호 형이 다녀갔다. 1박2일 봄밤의 술추렴은 결국 대취의 용맹정진으로 끝났다.
가지 끝에서 송이송이 피는 매화도 좋지만 이른 아침 숙취의 눈을 번쩍 뜨게 한 매화꽃이 있었다. 가지가 아니라 나무둥치에서 곧바로 몸을 열고 나오는 매화였다. 바로 일초직입의 자세 그대로였다. 기다려도 봄은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온다지만 내 몸에는 언제 이런 꽃이 피어날까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 그리고 또 그대와 나 사이엔 또 언제 이렇게 꽃망울이 터질까 가슴이 부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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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먹먹하고도 아찔한 블루. 대천항에서 삽시도 가는 새벽배 위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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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속에서도 물앵두 꽃 피워
눈길을 돌려 산수유나무를 보니 노란 꽃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붉은 열매를 만나고 있었다. 이승에서는 함께 못 할 인연이 한 철 동거를 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열매와 꽃이 만나는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가 된 것이다. 겨우내 공중에서 언 몸으로 견디더니 미라처럼 말라 가며 어린 꽃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마침내 서럽지 않은 육탈의 때가 다가왔으니 어디선가 장례식의 문상객이 아니라 잔치의 축하객으로 직박구리 한 마리가 날아왔다.
문득 구례의 산수유마을인 산동에 가보고 싶었다. ‘산동애가’를 부르며 한평생 산수유 씨앗을 까다가 이빨이 까매진 산동할매들에게도 봄은 오고 있을까. 매화향을 내뿜으며 섬진강을 타고 오르던 황어떼가 마침내 구례에 당도했으니 구례 산수유마을에서 망설이던 봄은 순식간에 밤재를 넘어, 지리산을 넘어 북상할 때가 된 것이다.
‘봄을 알리는 꽃’ 보춘화(報春化)가 피고 양지 바른 무덤가엔 산자고(山慈姑)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산자고의 꽃말은 ‘봄처녀’다. 전설에 따르면, 며느리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애 쓰던 시어머니의 사랑(慈姑)을 듬뿍 담고 있는 꽃이다. 요즘도 항암제 등의 약재로 쓰인다니 일리 있는 전설이다. 산자고 꽃을 렌즈로 들여다보며 내가 아는 사회복지사 ‘산자야 누님’을 떠올렸다. 산자고는 한자요, 산자야는 인도말이니 아무 상관없지만 얼마 전에 쓴 시와 산자고 꽃이 다를 바 없었다.
완연한 봄이 왔으니 꽃샘추위에 내리는 비마저 겨울비가 아니라 봄비다. 지난 3월 13일, 추적추적 내리던 봄비가 저녁부터 눈발로 바뀌기 시작했다. 춘우에서 춘설로 몸을 바꾸자 덩달아 내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곳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청노루귀가 피어 있는 바로 그 산, 그 북동향의 계곡이 밤새 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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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녘 섬진강 물수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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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 레이더를 들여다보며 자는 둥 마는 둥하다가 3월 14일 날이 밝자마자 17년 된 나의 애마, 아프리카 트윈의 시동을 걸었다. 화개장터를 지나 구례 토지면까지는 진눈가랑비가 내리더니 마침내 구례군 산동면을 지나는데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폭설이었으니 눈길에 미끄러질까봐 일단 모터사이클을 세우고는 잠시 기다렸다가 노심초사 눈길의 밤재를 넘었다.
마치 목숨을 걸기라도 한 듯이 어렵사리 그 계곡 입구에 도착했다. 일전에 미리 봐두었던 그곳에 가보니 눈에 덮인 채 아직 잠이 덜 깬 늦잠꾸러기 청노루귀 아씨들이 머리에 잔설을 이고 겨우 고개를 들고 있었다. 눈밭을 뒹굴며, 오체투지 큰절을 하며 생애 처음으로 설중 청노루귀를 만난 것이다. 금방 눈이 그치고 청노루귀가 꽃잎을 다 열기도 전에 눈은 순식간에 다 녹아버렸다. 많이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일생일대의 세 시간이었다. 그리고 덤으로 설중 산수유와 광대나물 꽃까지 찍는 행복한 하루였다.
폭설 속의 설중 광대나물과 산수유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서늘한 북동향의 이끼 계곡에서 저의 온몸으로 봄빛을 일구는 청노루귀와 꿩의바람꽃과 만주바람꽃 등을 보며 생각한다. 동남향의 양지바른 곳에서 꽃을 피우는 것은 역시 상투적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생의 진면목은 북쪽에 있는 것이다.
봄이 오고 가는 길목에서 봄꽃을 맞이하는 자세와 인간적인 예의를 생각한다. 어느새 살구꽃과 물앵두 꽃이 피기 시작했으니 말 그대로 “미치겄다, 우야노?” 하는 말이 연신 튀어나온다. 물앵두 꽃이 피면 일주일이나 열흘 뒤에 반드시 벚꽃이 핀다. 물앵두는 벚꽃과 꽃은 똑같지만 열매가 좀 다르다. 물앵두는 말 그대로 머루포도만 한 붉은 앵두가 열리고, 벚나무엔 보랏빛 검은 버찌가 열린다. 술을 많이 마신 날이면 물앵두나무에 올라가 한움큼 물앵두를 따서 먹으면 갈증이 가시면서 술이 확 깬다. 벌써부터 입속에 신물이 고인다.
어쩌란 말인가. 아직은 몸도 마음도 제대로 봄을 맞을 준비가 덜 됐는데, 겨울옷도 안 벗고, 심장 아래 한 골짜기엔 아직도 폭설이 몰아치고, 세상은 여전히 아수라지옥인데 어쩌란 말인가. 봄은 이렇게 속도전으로 오는 것이다. 두서없는 삶이지만, 그래도 오시는 봄에게 맞절하며 정신 좀 차려야겠다는 마음뿐이다. 그렇다.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다.
첫댓글 '모두 형재자매 혹은 사촌지간이니 바람의 이름으로 저마다 환한 일가친척의 얼굴들이 아닐 수 없다'
참 좋네요.
글 기다렸답니다...
꿈에 쌤까지 만나면서...^^
책에는 실수로 사진이 잘못 올라갔던데...
한번 물어봐야겠네요^^
안 그래도 읽으면서
글과 사진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찌리릿 하구만요.
단편적으로 접했던 글들을 지대로읽으니
ㅎ갑자기 이씬님 보고잡다.
텃밭에 얼갈이.열무 파종하고 카페에
들어오니 반가운글에
차한잔 내려 즐겁게 읽었슴다.
딥 블루!
요안나님, 늘 고마워요.
근데, 이번 호 사진은 월간 산의 착오로, 지난 달 사진이 중복 게재되는 실수가 있었네요 ㅎ
최근 봄날 글들의 종합판이군요.... 역시 시인은 이렇게 날아다녀야 제맛. ^^
점.입.가.경.
시인님! 이노인네 생각에는 더 이상 멋져지시면 안될것 같애요..
읽는내내 그저 설레고 마냥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