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만 보고 떡도 못 얻어먹고 박래여
날궂이 하는 날은 몸이 착 까라진다. ‘여보, 오늘 비 온다고 했어?’ 흐린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내일 비 온다고 했는데.’ 그는 고추모종 이식한 자리에 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물을 주고 상추며 오이, 토마토에도 물을 준다. 비 오기 전에 이식을 하고 비가 왔으니 활착이 빠를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햇볕이 따가워지자 시들시들 기운을 잃어가는 모종이 눈에 띈다. 두더지가 뒤졌나보다. 꾹꾹 눌러 밟아주고 물을 준다. 어린 모종 키우기는 어린애 키우기랑 다를 바 없다.
다 됐다. 덕산 갔다가 총회 다녀오자.
그는 주전자를 쪽마루 밑에 넣고 손을 씻는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00협동조합 임시총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협동조합이 살아남느냐 죽느냐 기로에 서서 간당간당 하단다. 부실 운영으로 인해 발생한 적자를 메울 길이 없단다. 비상대책 위원회가 꾸려졌다는데. 출자 조합원으로서 무심할 수 없다. 출자를 많이 한 농민조합원은 목돈 날리게 생겼으니 어찌 무심할 수 있으랴.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하필이면 일이 있어 부산 가는 중이란다. 그냥 고향의 봄빛 구경하고 한 바퀴 돌아 절에 다녀오자며 길을 나섰다. 고향도 변해 낯설기만 하다. 더구나 댐 건설 찬반 토론이 분분하다니 고향도 수몰지구가 될지 모르겠다. 관광지가 되면서 들어온 사람도 많고 기존 사는 사람도 많은데. 그 많은 이주 보상금을 국고에서 충당할 수 있을까.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지가 있고 덕천 서원이 물에 잠기게 되는데. 다른 곳으로 옮겨 복원한다지만 오랜 연륜이 쌓인 자리의 거목들은 어찌 할 것인가.
고향 집을 바라보며 어린 추억 줍기를 한다. 도도하게 흐르던 덕천 강, 배를 타고 넘나들던 강의 물도 줄어들어 볼품없는 얕은 강줄기를 드러냈다. 강변의 하천부지는 메워져 상가가 되었다. 사방에 잘 빠진 길, 우후죽순 들어선 아파트, 생수 공장, 굵직굵직한 건물들, 어린 추억이 깃든 자리는 흔적 없이 사라진 고향, 지리산 들입이다. 덕산 면소재지에서 중산리 쪽, 대원사 쪽으로 갈라지는 길, 내 친구 순이가 붙박이로 사는 곳, 그녀가 경영하는 음식점을 바라보며 들어가 얼굴이나 보고 갈까. 망설이다 돌아섰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낯익어 보이는 것도 고향사람이라 그럴까. 아는 사람 같고, 만났던 사람 같고, 친구 같고, 선후배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덕산을 떠나 대원사 쪽으로 길을 잡았다. 내가 좋아하던 절 내원사가 덕산사로 이름을 바꾼 곳을 지나며 농부에게 전설 한 자락 들려주었다. 지리산 골짝에서 나고 자란 내가 여학교 진학을 위해 진해 군항도시로 유학을 했을 때 나는 외로웠다. 그 외로움을 독서로 풀었고, 글을 썼었다. 그렇게 써 낸 ‘내원사 전설’이 뽑혀 학교 문예지에 실렸다. 그 기행문으로 일약 문학소녀, 시인으로 불렸고 도 내외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뽑혀 다녔고, 굵직한 상도 여러 번 탔었다. 시와 산문을 썼었다. 여고 3학년 때부터 소설을 썼다. 첫 소설이 실린 문예지를 아직 간직하고 있다.
고향의 숨결을 흡입하며 삼장 홍계를 지나 밤머릿재를 넘었다. 구불구불한 옛길 아래 긴 터널이 뚫렸고 오가는 차량도 많았다. 바른 길, 쌩쌩 달릴 수 있는 길보다 천천히, 구불구불한 옛길이 운치 있고 좋은데. 왜 사람들은 빨리만 외칠까. 마음의 여유는 스스로 갖는 것이다. 빠르게 지나치기만 하면 무엇이 남겠는가. 쉬어가며 넘는 길, 옛 모습 상기하기도 하고, 새로운 모습 각인시키기도 하면서 느릿느릿 걸어도 좋을 고향 길.
아름다운 절에 들러 부처님을 뵈었다. 스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머문 잘 다듬어진 절, 은은한 찬불가가 퍼지는 절, 몇 달 사이 어수선하던 절간은 잘 다듬어졌고, 깨끗하고 단정했다. 스님의 안목이 빼어나다. 예술적 감각이 없으면 그런 절 도량을 꾸밀 수 없으리라. 관람객은 꾸준히 찾아오고, 찻집은 성업 중이다. 거기에 주말을 이용해 100인 분 한정으로 메밀국수를 판다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먼 곳에서 찾아오는 관람객을 위한 배려일까. 음식 장사를 곁들인다는 것, 스님은 그렇게 부를 축적해 무엇을 남기려고 하시는 것일까.
법당의 부처님 앞에 앉아 눈을 감았다. 돌아가신 시부모님과 남편, 남매의 모습도 떠올리며 부처님의 가피를 빌었다. 내 마음이 부처라고 하던가. 구복신앙이 몸에 밴 나는 우리 가족의 평안을 비는 것이 부끄러워 그냥 ‘부처님 고맙습니다.’ 마음의 기도를 올릴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는 구구절절한 기도도 알고 보면 남을 위한 기도보다 내 욕심을 위한 기도이기 일쑤다. ‘잘 되게 해 달라. 건강하게 해 달라.’ 그런 기도들이다.
절 주변을 돌아 나오는 길에 스님을 뵈었다. 그렇게 맛있는 단감 처음 먹어봤어요. 처사님이 진짜 단감농사는 끝내주게 지었어요. 모두 맛있다고 해요. 가을에 단감 따면 또 갖다 드릴게요. 가을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스님은 여전히 소탈하고 활기차고 밝다. 생동감이 넘치는 스님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같다.
산청 동의보감 촌에 들러 한정식을 먹었다. 비싼 가격이지만 밥상 가득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진수성찬이다. 옆 좌석에 여승 세 분과 보살 한 분이 앉아 밥을 먹는다. 얼굴빛이 참 해맑다. 세파의 찌든 때가 없는 순수한 얼굴빛이랄까. 노인이 되어도 지금 모습 그대로 간직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맑은 눈빛, 얼굴빛이 좋다. 나도 닮고 싶은데. 가능할까.
점심을 먹고 나와도 회의시간이 일러 산청 환아정 누각에 올라갔다. 거기 앉으니 사방으로 산청 경내가 눈 아래 펼쳐진다. ‘여름에 여기서 놀면 신선노름이겠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청소가 안 된 정자는 먼지투성이다. 그 마당에서 풀을 뽑는 아주머니도 지친 모습이다. 말벗이 되어드렸더니 불만을 토 한다. 삼백 평이 넘는 이 정자를 내 혼자 관리하라는데 힘들어 죽것소. 화장실도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오. 하루 3시간 일하는데 누각에 빗자루 질하고 걸레질만 해도 되요. 마당의 풀도 뽑아야 제. 화장실 청소도 해야 제. 한숨을 쉰다. 힘드시겠어요. 친구가 있어야 일하기도 수월한데. 인원 보충을 해 달라고 하세요. 두세 사람은 배치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아주머니 혼자 두량하기에는 너무 넓네요.
내가 무슨 도움을 주랴. 아주머니 불평 달래주고 돌아 나와 00협동조합으로 향했다. 회의는 중구난방이고, 조합장도 비상대책 위원장도 참석한 조합원도 말 말 말 뿐이다. 대책이라니. 아무 대책도 못 세우고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라 두어 시간 지나는 것을 보고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되겠지. 출자금 적게 낸 것이 다행스럽다. 출자금 포기하고 발 빼는 게 낫지 않을까. 조합장을 선두로 운영진에서 책임을 지고 00협동조합을 살릴 길을 찾아야 하는데 제대로 된 사업을 못 했으니 적자운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업이든 개인 이득보다 단체 이득을 도모해야 하는데. 그 역량에 미칠 만한 인재가 없었나보다. 자신의 이익부터 챙기다 난 꼴이 아닐까. 국가에서 주는 보조금만 곶감 빼 먹듯이 빼 먹고 자부담은 빚으로 남은 것 같다. 그 자부담을 조합원에게 떠넘기려는 것일까. 농민이 출자금을 내고 조합원이 된 것도 그 출자금으로 이익 배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맨 처음의 취지대로 사업을 잘 했으면 흑자가 날 수도 있었겠지만 방만한 운영을 했든, 개인이 조합의 돈을 제멋대로 활용했던 잘못 한 것은 조합장을 비롯한 운영진에게 있지 않을까.
조합원들에게 인감증명 받고 위임장 받아 은행에 빚을 내서 빚 청산을 하겠다는데. 그 빚도 다 써버리면 조합원들 개인에게 빚 갚으라는 독촉장이 날아올 것 같네. 98억이나 되는 국가 보조금이랑 5백 명이 넘는 조합원이 출자한 금액은 어떤 놈이 어떻게 다 빼 먹고 협동조합을 빚더미에 올려놓고 발 뺀 거야? 조합원만 손해 보게 생겼네. 잘못하다간 덤터기 쓰겠는 걸. 그냥 갑시다. 굿이나 봐야지. 떡은 고사하고 맹물도 없을 것 같지만. 우리도 발 뺄까? 출자금 포기하고?
그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
첫댓글 아까운 출자금!
더도 말고 본전 생각이 납니다.
양심을 갖고 공정한 운영이 필요하건만 세상은 늘 예외라는 항목에 발목을 잡힙니다.
덕분에 고향나들이에 감사해야 할것 같습니다.
그래요. 샘, 옛 어른은 내 이득보다 다수의 이득을 앞 세웠지만 요즘은 내 이득이 먼전 것 같아요.
감투는 쓰고 싶고, 개인 돈은 안 쓰고 싶고, 단체 돈을 내것처럼 쓰고 싶은 욕심이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되겠지요.
덕분에 고향나들이 잘 하고 왔어요.^^
샘, 건강 잘 챙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