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4월 6일부터 12일까지 평양에 머물며 한국 ‘병합’ 대책을 강구하던 일본의 국가주의자 우치다료헤이는 ‘안창호의 귀국과 평안도 민정에 관한 비밀 보고서’에서 민회 등을 저항 조직으로 지목하였다. 1910년 3월 9일바 대한매일신보는 천안군민회의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충청남도 천안 인민들은 가옥세와 주초(酒草)세를 반대하기 위하여 3일 전에 인민 60여명이 회집하여 그 지방 재무서를 압박코자 하는데, 일 헌병과 경찰관리가 그 회집한 사람을 해산시키고자 하나 그 인민들은 따르지 아니하고 점점 더 모인다더라” 제국의 황혼기에 민회는 식민지 권력에 대한 저항의 보루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회의 역사는 향회(鄕會)로부터 나왔다. 조선 전기에 향회는 사족 주도의 조직으로서 관에 대한 자치와 민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였다. 18세기를 전후하여 향회는 지방관이 잡세 부과를 위해 여론을 수렴하고 동의를 구하는 모임으로 변질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자족의 자치가 약화되었지만, 사족이 아닌 민도 잡세 부과의대상자로서 향회에 활발히 출입하게 되었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민이 적극 참여하여 향회를 저항의 조직으로 활용하기도 하여 민란이 야기되었는데, 사족이 아닌 민이 주도하는 향회를 민회라고도 했다.
개항 후 구미의 의회를 알게 된 한국인은 그것을 보고 민회를 연상하였다. 한성순보 1883년 11월 10일자에 의하면, 공화제와 군주 전제를 제외하고 “각국에서는 모두 군주와 인민이 같이 다스린다. 그래서 각국 정부가 전국 인민으로 하여금 의원을 선거하게 하여, 모두 정부에 모여 법률을 의정하는데, 이를 민회라 한다”고 했다.
1894년 보은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이 모임은 어떤 무기를 휴대하지 않아 곧 민회이다. 일찍이 듣건대 각국에도 민회가 있으니, 조정 정령이 민국에 불편한 것은 회의하여 의정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고 주장하였다.(취어·聚語)
갑오개혁을 추진한 정부는 면마다 대표자를 선거하여 읍 단위로 향회를 만들어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의 정치 격변으로 이 결정은 실행되지 않았는데, 갑오개혁기 내부대신으로서 향회 자치를 추진하던 유길준은 1908년에 한성부민회 회장으로서 서울에서 민회를 조직하고 나아가 전국적으로 확대할 것을 구상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는 입헌정치체제의 쟁취를 위한 만민공동회를 열었는데, 그것은 민회의계승·발전된 형태라 하겠다. 애국계몽운동기에 국권 회복, 지방 자치 등 다양한 동기에 의해 향회·민회·방회(坊會)·군민회·민의소(民議所)·인민협의회 등 다양한 명칭의 단체가 설립되었다.
1907년 국내에서 결성된 신민회, 국외에서 결성된 국민회도 저항조직으로서 민회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식민지화로 자치와 민주의 기반으로서 민회의 전통이 발전적으로 계승되지는 못하였지만, 독립운동을 위한 민주적인 조직체를 만드는 역량은 민회에서 배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헌창 고려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