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역사(Ⅳ-2) : 독일에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이유는?
세계 역사를 바꾼 50대 사건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의 폭을 넓혀볼 수 있다. 역사의 중심엔 항상 ‘돈’이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그 이면에 있는 ‘돈‘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
이번 장은 독일에 집중해 보자. 1차 세계대전 말, 독일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적이 없음에도 식량난 속에 발생한 혁명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빌헬름 2세 황제마저 네덜란드로 망명함에 따라 독일은 일종의 무정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 등을 협의한 파리평화회의(Peace Conference at Paris)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승전국이 독일에 1,320억 금 마르크(gold marks) 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하였다. 참고로 배상금 규모는 전쟁 전 기준 독일 국민총생산의 3배를 뛰어넘는 액수다.
매년 갚아야 하는 배상금 규모는 국민소득의 10%이자 전체 수출액의 80%에 이르렀기에, 신생 독일 정부는 재정적자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엄청난 재정수요를 민간에서의 차입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지만, 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는 중앙은행의 발권력(發券力)에 의지해 전쟁 비용을 조달했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은 터라 이 해결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정치적 리더십도 부족했기에, 세금을 인상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화증발이었다. 즉, 중앙은행에 금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중앙은행권을 찍어내고 이 돈을 금으로 바꿔 프랑스 등 전승국에게 지불하는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물론 1921년에는 이 방법이 먹혔다. 사람들이 정부가 어떤 짓을 하는지 몰랐던 데다, 가격이 매우 경직적(硬直的, rigidity of price, 초과 수요․공급이 가격 변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은 매달 혹은 매주 조정되는 게 아니라 1년에 한 번 조정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고, 또 각 기업들이 가격표를 바꿔 다는 데 비용도 발생하고 혼선이 생길 수 있다고 여겨 즉각적으로 변동 사항을 가격에 반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보유한 금도 없이, 아니 금을 계속 프랑스에 지불하면서도 화폐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 채기 시작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여러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고 해외 사정에도 밝은 금융 및 기업가들이 인플레 징후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행동을 취하겠는가? 그렇다. 곧 휴지조각으로 변할 독일 마르크화를 다른 나라 화폐, 예를 들어 영국 파운드나 미국의 달러로 환전해 해외에 예치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 것이다. 이 결과 독일은 1922년부터 자본수지 적자가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 독일 마르크 환율은 급등하기 시작했다. 환율이 급등하면 수입물가가 상승할 수밖에 없으며, 수입물가 상승은 전체 물가 인상으로 이어진다.
아래 그래프는 1차 대전 및 그 이후의 유럽 물가 상승률(1914년=1)을 나타낸 자료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각국은 엄청난 인플레를 겪어야 했다. 그래프에서 가로축의 눈금 하나가 1천 배씩 늘어나니, 가장 끝에 있는 단위는 1천조다. 다시 말해 독일은 1조 배 이상의 물가상승을 경험했던 셈이다. 이렇듯 물가가 급등하면, 파운드나 달러 혹은 실물자산을 가진 사람은 승자가 되고, 반대로 예금이나 연금 등 금융자산을 가진 사람은 가장 큰 패자가 된다.
1920년 이후 독일에서는 월간 기준으로 물가가 50% 이상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를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초(超)인플레이션) 이라고 부르는데, 최근 짐바브웨, 베네수엘라에서 발생했던 사건 또한 이것이다. 하이퍼 인플레가 발생했다는 것은 지폐, 다시 말해 중앙은행권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월 50% 이상 물가가 오르는 상황에서는 월급을 받는 즉시 현물로 바꾸는 게 이득이 된다. 즉, 모든 사람이 지폐를 버리고 현물을 사기 위해 달려드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보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제가 돌아갈 수 없다. 1923년 독일의 산업생산은 1914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무엇보다 끔찍한 건 이러한 경제 위기가 낳은 사회․심리적 트라우마였다. 돈의 가치가 떨어져 돈으로 된 모든 형태의 부와 고정수입이 무가치하게 여겨지게 된 것이다.
물론 독일에서 발생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해외 채권, 즉 파운드나 달러로 발행된 채권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달러나 파운드에 대한 독일 마르크 환율도 급등해버려 외채에 대한 상환 부담은 하이퍼인플레이션 이전이나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쟁 전후 누적된 독일 국내의 모든 부채는 청산되었다. 엄청난 인플레로 인해, 가격이 고정된 모든 것의 실질가치가 폭락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고정적인 연금 수입을 받아 생활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독일 정부의 채권을 구매했던 사람도 대부분의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반면 토지나 공장 등 실물자산을 가진 사람들이나 다른 이에게 빚을 진 사람들은 승자가 되었다.
그런데 실물자산을 보유하면서 다른 이에게 큰 빚을 진 경제 주체는 정부와 기업 딱 둘뿐이었다. 결국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대다수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국가와 기업의 배를 불렸고, 이후 히틀러를 비롯한 전체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뒤이어 대공황(大恐慌, The Great Depression)이 발생하지 않고 오랫동안 평화가 이어졌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화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본위제에 내재된 불안 요소는 결국 세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고, 나아가 전 세계 수십억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고 말았다.
다음 장에서는 1929년 대공황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살펴보자.
홍춘욱.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The History of Money). 로크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