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짚펄프 못합니다!” 박정희 앞에서도 굽히지 않은 소신

[크로바]

▲ 김종희 사장이 1969년 유니온오일과 경인에너지 합작 투자 계약을 하는 모습. photo 한화그룹

1960년대 들어 국가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행에 따라 김종희는 시대 변화와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일념으로 국가 기간산업 육성에 매진한다. 김종희는 절대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소신의 인물이었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 초청 방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1961년 11월 어느 날이었다. 난데없이 김종희에게 다음 날 오전 최고회의 의장실로 나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 무렵엔 다른 대기업들은 좋든 싫든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개발사업을 하나씩 떠맡아야 했다. 정부는 김종희에게 사업성과 장래성이 불투명한 볏짚펄프 공장을 건설하라고 권했다.
   
   아무리 박정희 의장의 혁명정부 경제개발 의지가 강력하더라도 안 될 일인 줄 알면서 억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며칠 뒤 김종희는 다시 박정희 의장과 대좌하게 됐다. 그 자리에는 송요찬 내각수반이 배석했다. 김종희는 볏짚펄프의 사업성이 희박한 점을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설명해 나갔다.
   
   김종희의 말이 끝나자 송요찬이 “각하의 관심사업인데 일단 공장을 짓고 일을 해봐야 할 것 아니냐”며 일갈했다. 그러나 김종희는 볏짚펄프는 기업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이익이 없다는 이유를 차근차근 들며 자기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송요찬은 “당신, 앞으로 사업해 나가는 데 정부 지원 필요 없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앞으로 정부 상대로 사업할 생각 말아요!”라며 꾸짖었다. 그러나 김종희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박정희는 송요찬을 제지했다. 박정희는 김종희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대견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감찰원으로부터 화약 원가계산서를 제출하라는 통고가 날아왔다. 한국화약에서 화약이 독점사업인 것을 이용해 화약값을 비싸게 받아왔을 것이라는 보복성 조사였다. 하지만 독점임에도 적정가격 유지, 무제한 공급, 철저한 서비스 3대 영업방침을 정해 놓고 철저히 지켰던 김종희는 조사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김종희는 석유화학산업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1962년에 이미 PVC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석유화학공업 진출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는 등 앞선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부터 한국화약 기획실은 김종희의 지시를 받아 1964년 11월 나프타 분해시설을 비롯, 석유화학 계열 공장을 망라한 석유화학 사업계획을 완성했다. 하지만 정부는 한국화약의 석유화학 진출에 소극적이었다. 그럼에도 한국화약은 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회사 설립을 밀어붙였다. 1965년 8월 25일에 김종희는 창립총회를 개최해 한국화약이 처음으로 투자한 한국화성공업을 설립했다. 곧이어 폭넓게 구성해온 석유화학사업 진출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PVC공장 건설 및 제2정유공장 건설에 필요한 동업자 물색과 함께 기술 및 자금 문제를 타진했다.
   
   그 결과 1965년 9월 미쓰비시상사와 공장 건설에 필요한 800만달러 규모 차관 도입에 대한 가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김종희는 한국에 돌아와 PVC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승인을 정부에 신청했다. 이 또한 순탄치 않았다. 그때는 한·일협정 비준서가 교환되지 않았기에 차관승인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여기에 기존 업체와의 마찰, 정부의 사업승인 지연 등으로 공장 라인을 가동하기까지는 회사 설립하고부터 3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출혈 경쟁과 원료 가격 폭등, 여기에 설상가상 경기불황까지 겹쳐 산더미처럼 쌓이는 재고로 자금회전이 어려웠다. 급기야 어음부도까지 발생했다. 이 위기의 시간은 1967년 시작되어 1972년까지 5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석유화학에 대한 의지와 집념으로 이런 난관을 지켜낸다. 이처럼 김종희는 한국화성공업을 설립하면서 화학산업에 본격 진출하고 이후 태평물산과 경인에너지도 설립한다.
   
   중화학공업에 역점을 두었던 박정희 정부는 1966년 4월 제1정유공장인 울산정유공장 증설과 함께 제2정유공장을 전남 여수에 설립하기로 한다. 곧이어 정부는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를 공모했다. 재계는 제2정유공장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김종희는 일본에 진출해 있는 미국의 유명 석유회사들과 접촉하는 등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 신청을 했다. 그러나 칼텍스와 제휴한 호남정유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김종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제3정유공장에 도전장을 냈다. 유니언오일과의 합작투자에 성공한 1968년 1월 가칭 경인전력개발을 만들어 같은 해 전기사업 경영허가를 따냈다. 결국 김종희는 1969년 11월 에너지사업을 총괄하는 법인 경인에너지개발주식회사를 발족하고, 이듬해 3월 17일 사명을 경인에너지주식회사로 바꾸어 민간 정유 시대의 개막을 선언한다. 경인에너지 설립으로 국가 경제의 최대 과제인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에너지 적기 공급체제를 갖추고 중화학공업의 성장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한국화약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밀폭약 및 함수폭약 국산화를 통해 우리나라 방위산업에서의 위상을 구축한다. 이를 토대로 한국화약은 정밀화학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이어서 고려시스템산업을 설립해 전자 분야에도 진출했다. 또 성도증권 인수, 서울 플라자호텔 운영, 태평양건설 출범 등을 통해 그룹의 면모를 갖춰갔다.
   
   한국화약은 1970년대 들어 대일유업·태평양건설·태평개발·제일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오늘날 종합석유화학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김종희는 1973년 2월 대일유업을 인수해 식품업에도 진출했는데 그 과정이 좀 독특했다. 대일유업은 운영미숙으로 인한 부실기업이었는데, 정부에서 한국화약이 인수해 줄 것을 적극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기간산업을 일으켜 국가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신념의 김종희로서는 식품업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사업 분야였다. 그러자 김보현 농림부 장관이 농촌의 딱한 사정을 늘어놓았다.
   
   “지금 시골 농가에선 젖소 한 마리면 큰 재산입니다. 그 사람들이 있는 돈 없는 돈에 빚까지 내서 애들 학비라도 보탤까 싶어 산 젖소들인데, 우윳값이 떨어지니 소값까지 폭락해서 난리랍니다. 대일유업 도농리 공장만 완공돼도 최소한 젖소 4000마리에서 나는 생우유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기간산업만 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김종희는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과 더불어 낙농국인 덴마크를 떠올리며 마음을 바꿨다. 마침내 대일유업을 인수해 국내 최초로 아이스크림을 생산하게 됐다. 이것이 오늘의 ‘빙그레’다. 제품을 선전하는 슬로건으로 내건 ‘먹고 싶은 마음, 주고 싶은 마음’은 이때에 널리 유행되었다. 이처럼 사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김종희는 백암문화재단을 설립하고, 1975년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이란 취지에서 학교법인 천안북일학원을 창학해 이듬해 천안북일고등학교를 개교한다.
   
   “다이너마이트 김은 19세기 미국 경제를 일으킨 카네기, 록펠러, J.P. 모건 등에 버금가는 인물입니다. 그는 언제나 활력이 넘쳤고 자제력과 통찰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죠.”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는 김종희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최장수 주한 미국대사(1971~1986)인 워커는 근대화가 시작되던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건너와 재계 거목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은, 걸어다니는 한국 경제 역사책으로 통하는 파란 눈의 인물이다. 특히 김종희와는 1922년생 동갑내기로 우정이 매우 깊어 김종희 타계 1주년 추모식에서 추념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그는 김종희를 ‘다이너마이트 김’이라고 불렀다. 일에 대한 열정과 화통한 성격을 빗댄 별명이다. 워커는 한국의 근대화 기적에 관해 토론할 때마다 김종희를 떠올린다고 그의 저서 ‘한국의 추억’에서 말하고 있다.
   
   “이봐요, 당신 몸에는 전기라도 흐르는 것 같군요. 우리가 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더라도 당신이 들어오면 우리는 직감적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말이지요.”
   
   

▲ 1977년 11월 11일 저녁 9시 이리역 폭발사고로 초토화된 이리역과 주변 시가지 모습.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로 최대 위기에 직면하다
   
   워커가 김종희에게 던진 이 한마디의 농담은 ‘다이너마이트 김’의 카리스마를 확연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김종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갖고 있었다고 워커는 전한다. 1977년 이리역 열차폭발 사고 때 사재를 털어 피해주민들에 대한 보상에 매달린 김종희의 모습에서 진정한 기업 지도자의 표상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또 워커는 대인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슴이 따뜻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업무로 만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인적 고충을 귀담아듣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국화약그룹 김종희는 1977년 일어난 이리역 열차폭발 사고로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자칫 창업 25년의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판이었다. 사고 당일 김종희는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종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인데 기업을 사회에 반환한들 어떠냐”고 허심탄회한 심정을 내비치며 오히려 직원들을 격려했다. 
   
   한국화약은 그룹 소속 예비군 전원을 사고현장에 급파, 재해복구 작업을 실시하고 그룹 산하 모든 임직원이 현지 부상자를 위해 헌혈에 참여하는 한편 그룹 임직원의 11월 급여 가운데 2%를 재해의연금으로 갹출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사고 대책을 곧바로 발표했다. 사고 엿새째에는 그룹이 피해복구비용으로 9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추가 발표했다. 지금 가치로 약 5000억원에 이르는 거액이다. 나중에 검찰조사 결과 화약류 취급에 있어서 철도청의 중대과실이 드러났지만, 이미 마음을 비운 김종희는 “피해보상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거듭 강조할 뿐이었다. 
   
   김종희가 폭발사고로 회사 형편이 어려워진 때에도 소액주주들의 선의의 피해를 우려, 회장 개인 주식을 팔아 배당을 실시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 정부는 피해복구액으로 50억원을 책정했으나 김종희는 90억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피해보상금으로 내놓고 사고 수습에 최선을 다했다. 사고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는 김종희의 의지는 다시금 사회 각계각층에 기업인 김종희와 한국화약그룹 이미지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김종희는 맨손으로 다시 출발하겠다는 각오로 이리역 열차폭발 사고 후유증을 딛고 전열을 재정비해 1970년대 끝무렵에는 오히려 더 빠르게 성장 발전해 마침내 재기에 성공한다. 1979년 한국화약그룹이 국내 10대 기업에 선정되었다. 이어 1980년에 최고 권위지 포춘(FORTUNE)에 선정, 세계 500대 기업 중에서 393위에 올랐다. 그러나 김종희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어 갔다. 그렇게 지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사업에 혼신의 열정을 바친 김종희는 결국 1981년 7월 23일 쉰아홉 나이로 불꽃 같은 삶을 마감한다.
   
   김종희의 삶과 사업은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외길’ 자체였다. 그는 “학문적, 전문적 기술개발 능력도 중요하지만 감각경영 능력을 지녀야 하고, 우수한 두뇌 기술도 필요하지만 훈훈한 마음 기술(mind tech)을 가지고 사업을 해야 성공한다”고 믿었다.
   
   
   아버지처럼 생각 깊고 너그럽게
   
   김종희의 맏아들 김승연(金昇淵)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77년 이리역 열차폭발 사고를 계기로 귀국해 아버지를 보좌하면서 본격적인 경영 수련을 받고 있었다. 김종희가 타계하자 김승연은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한국화약그룹 회장으로 취임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화약그룹의 경영 일선에 나섰다.
   
   1992년에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한화그룹으로 사명을 바꾸기도 했다. 모든 사무실에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사훈(社訓)이 걸려 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뜻으로 사훈치고는 지나치게 비장하다. 하지만 한화 임직원들에게는 이보다 피부에 와닿는 말이 없다. 외환위기가 몰아닥친 1997년 말 한화그룹이 진 빚은 자기자본의 12배였다. 대부분의 계열사가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생살을 자르는 듯한 고통을 동반한 인원감축, 분할, 매각, 통합, 중동진출 등을 감행했다. 한화는 여의도 63빌딩과 함께 대표적인 기업 구조조정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런 인고의 노력이 오늘의 한화그룹을 만들었다. 그리고 창업주 김종희 회장과 김승연 회장의 ‘한화식 의리경영’이 그것을 뒷받침한 것이다.
   
   김종희 집안과 인연이 깊은 장경순 전 헌정회장은 말한다.
   
   “김승연은 아버지 김종희를 닮아 추진력이 대단한 사나이지만 좀 더 인내하고 너그러움으로 자신을 다스려 나아간다면 한화를 중흥시킨 훌륭한 기업가로 남으리라 믿는다.”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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