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일서정(秋日抒情)>
【시 원문】 - 김광균 시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즈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프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편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 [인문평론](1940년 10월) -
【해설】
김광균이 1940년 [인문평론]에 발표한 시. 이 시는 한국 모더니즘과 이미지즘 계열의 본보기로 널리 예시되는 작품이다. 그만큼 이 시는 독특한 이미지의 제시를 보이고 있으며, 거의 모든 시행에 비유가 쓰이고 있다.
이 시에는 특이한 비유가 많이 눈에 띈다. 김광균의 시의 회화성은 현대 도시 문명의 새로운 감수성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시는 회화이다'라는 모더니즘의 기초 위에 있다. <추일 서정>도 예외는 아니어서 쓸쓸하고 황량한 가을날의 풍경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 시는 김광균의 시 세계, 곧 “시는 회화이다.”라는 모더니즘의 본보기로 손꼽는 작품으로, 제2시집 <기항지(寄港地)>에 수록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이 작품에는 거의 모든 시행에 주지적인 단면을 보여 주는 비유가 쓰이고 있으며, 그 비유는 시인의 독특한 이미지 제시에 기여하고 있다.
이 시는 시각적 이미지와 참신한 비유가 돋보이는 시이다. 특히 이 시에서 사용된 시어와 비유는 현대 도시 문명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심은 현대 문명의 불모성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준 것으로 주목된다.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구겨진 넥타이' 등은 사물에 대한 관습적인 인식을 깨뜨린 독특한 비유들로 독자들의 지적인 태도와 상상력을 요구하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비유의 참신성이 사물의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것이 이 시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 사용된 소재들은 그것의 신기함이나 새로움 때문에 선택된 것일 뿐, 당대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다. 따라서, 이 시는 새롭고 신기한 이미지들이 결합되어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화를 이루고 있을 뿐,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나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개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주지시
▶성격 : 주지적, 회화적, 감각적, 애수적
▶어조 : 현대 문명 속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감
▶심상 : 시각(회화)적, 공감각적 심상
▶특징 :
① 주로 시각적 이미지를 비유를 통해 형상화함.
② 생경하고 과격한 비유의 연속으로 딱딱한 느낌을 줌,
③ 애상적(哀傷的) 어조가 강함.
▶제재 : 가을날의 풍경
▶주제 : 황량한 가을의 고독감과 쓸쓸함 / 가을의 애수
▶출전 : [인문평론(人文評論)](1940)
【구성 1】의미상 연의 구분 - 전반부(선경-秋日) / 후반부(제12행부터-후정-抒情)
▶제1∼3행 : 쓸쓸한 낙엽 - 상실, 소멸, 죽음
- '낙엽: 생명이 다한 자연의 모습 (망명정부의 지폐: 유통의 의미를 상실한 화폐 - 상실, 죽음, 소멸의 심상)
▶제4∼11행 : 구불구불한 길, 급행열차, 포플라, 공장, 철책, 구름에서 느껴지는 황량함, 소외감
▶제12∼16행 : 적막 속에서의 고독한 나
【구성 2】
① 제1∼3행 : 가을의 애상감, 공허감
② 제4∼7행 : 가을이 주는 소멸과 조락(凋落)
③ 제8∼11행 : 가을이 주는 고독감, 황량감
④ 제12∼16행 : 황량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독한 화자
【구성 3】
① 제1∼3행 : 낙엽 - 허무적 애상
② 제4∼7행 : 길 - 적막감
③ 제8∼11행 : 구름 - 고독과 황량함
④ 제12∼14행 : 돌팔매 - 무기력한 자아
⑤ 제15∼16행 : 가을(추일) - 저문 현실에 순응
【시어 풀이】
<망명 정부의 지폐> : 가치 없고 초라하며 어수선하게 뒹구는 낙엽을 비유. 상실의 이미지.
<포화(砲火)> : 총포를 쏠 때에 일어나는 불
<도룬 시(市)> : 폴란드의 도시 이름
<일광(日光)의 폭포(瀑布)> :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 여름의 화려함과 활기를 잃어버리고 땅에 떨어진 낙엽의 쓸쓸한 모습을 시세 없는 망명 정부의 지폐 조각으로 비유.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 구불구불한 시골길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넥타이의 형상을 빌어 멀어질수록 좁게 보이는 길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 눈부시게 쏟아지는 가을 햇살에 어려 아득히 이어져 있는 시골길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말이다.
<조그만 담배 연기를~들을 달린다> : '조그만 담배 연기'는 기관차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가리킨다. 사물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포착해 내는 재치와 감각이 돋보이는 구절이다.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 '포플라나무의 근골'은 잎새가 모두 져 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의 모습을 나타낸다.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공장'의 이미지를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로 형상화한 표현. '흰 이빨'은 공장의 지붕이 환기하는 이미지인데, 여기서 '공장' 같은 현대적 문물에 대한 시인의 부정적인 태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흰 이빨'의 이미지 때문에 공장 지붕은 평화로운 시골 마음을 위협하는 야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세로팡 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 얇은 조각구름이 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세로팡 지(셀로판 지)는 이국적(異國的)이고 근대적인 감수성을 자극하는 시어로 경박하면서도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 벌레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들판에서 풀잎을 발길로 차는 행위를 공감각적으로 묘사한 표현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 탈출하고 싶은 황량하고 쓸쓸한 시적 자아의 공간은 결국 벗어날 수 없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이 돌팔매는 시적 자아가 현대 문명의 불모성과 황량함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그리움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 구절이다. 이 시가 본격적인 문명 비판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모순적 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쓸쓸한 가을 풍경을 대하는 서정적 자아의 심경을 드러냄. 무기력하고 하릴없어 돌팔매나 던지는 자신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분석】
▶ 제1∼3행 : 낙엽이 ‘밍명정부의 지폐’와 도룬시의 가을 하늘‘로 비유되었다. ’낙엽‘이 인생의 홍혼이나 죽음에 비유되지 않고, 당시 시사적(時事的) 사물에 비유, 독창적인 표현을 보인다. 이와 같이 낙엽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전통적인 발상이나 견해를 이탈하여 오늘의 문명과 그 신선한 감각을 창조, 수용하려는 태도는 모더니즘의 기본적 자세이기도 하다. 편석촌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우리 신시사상(新詩史上)에 비로소 도회의 아들이 탄생」한 것으로 자처했던 태도였었다. 즉 그들은 철저히 20세기의 문학을 역설한 시인들이다. 이 시에서 ’망명정부의 지폐‘나 ’도룬시의 가을 하늘‘은 20세기의 사물이며, 도회적인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 제4∼7행 : 시골의 들길이 ‘넥타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폭포’로, 기차 연기가 ‘담배 연기’로 각각 비유되었다. ‘넥타이, 담배 연기’는 모두 문명 속의 소재들이며, 거기에 ‘급행 열차’까지 등장, 재래적인 서정을 일변시킨다. ‘폭포’(강렬한 낙하)도 본래는 하나의 대자연에서 온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일광의 폭포’로 은유되엇을 때, 그 독특한 비유는 전혀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서정이 주정(主情)에 흐르지 않고, 객관화되었으며, 그김살 없는 회회시로서 참신성을 과시하고 있다. 오후 두 시의 들을 달리는 급행 열차, 따가운 가을 햇볕 속에서 가느다란 연기를 멀리 내뿜는 그 모습은, 의인화되어 한가하고도 적막한 애수(哀愁)의 시정을 물씬 풍기고 있다.
▶ 제8∼11행 : 급행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 뒤, 시인의 시선은 포플라가 서 있고, 공장이 세워져 있는 그 건물의 지붕과 하늘로 옮겨진다. 여기서도 앙상한 포플라 나무가 ‘근골(筋骨)’로, 뾰족한 공장의 지붕이 ‘흰 이빨’로, 흰 구름이 ‘셀로판지’로 각각 은유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앞에서 본 것처럼 새로운 비유이며, 도회적인 것으로 다분히 이국적 정취가 짙게 나타난다. 김광균을 기리켜 소리조차도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의 소유자라고 한다. 가을의 이미지를 이토록 유형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은 그 솜씨는 언어로 이미지를 그리는 회화시의 표본이다.
▶ 제12∼끝 : 비로소 지은이가 등장, 돌 팔매질을 하는 것으로 작품의 끝을 맺고 있다. 던진 돌, 그것은 작자의 분신으로서 ‘고독하게 반원을 긋고’ 있으며, 그 자체가 또한 아름다운 하나의 회화가 되고 있다.
【감상】
이 시는 재치 넘치는 작품으로, 수채화적인 색감보다는 크레파스 그림이며, 비유 상징에 의한 참신성 있는 새 말들을 써서 감각적 수법의 지성미를 발휘한다. 즉, 가을을 맞이하여 무엇에도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허탈하고 고독한 현대 지성인의 정신을 가을의 애수에 융합시켜 놓은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감정이 그림 속에 용해되어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는 ‘회화적 수법’의 시다. -조남익: <현대시 해설>(1979)-
가을날의 쓸쓸한 풍경과 고독감을 시각적 비유와 감각적 시어로 표출한 시이다. 대개의 모더니스트들은 비대한 기계 문명의 황량감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듯이 이 작품도 문명 속의 고독감을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은 특이한 비유가 많은 까닭으로 첫 인상이 매우 어려워 보이는데 사실은 그다지 난해한 작품이 아니다. 이해의 열쇠는 하나하나의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고 우선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일체의 비유적 표현을 제거하고 내용의 뼈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쓸쓸한 낙엽의 모습(1∼3행)
초라하고 구불구불한 길(4∼5행)
들을 달리는 급행열차(6∼7행)
포플라나무, 공장, 철책의 황량한 풍경(8∼10행)
얇은 구름(11행)
쓸쓸한 마음으로 거닐다가 돌을 던져 보는 나(12∼16행).
이것을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제11행까지인데, 한 마디로 쓸쓸하고 황량한 가을날의 풍경을 그린 대목이다. 후반부는 제12행 이후로서, 이 풍경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작중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은 쓸쓸한 가을 풍경 속에 외로이 방황하는 어떤 인물의 경험을 묘사한 것으로 요약된다.
작품의 서두에서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에 비유된다. 그만큼 무가치하게 널리어 있다는 의미와 함께 `망명 정부'라는 말이 주는 쓸쓸함이 여기에 따라온다. `포화에 이지러진 / 도룬 시의 하늘'이란 구절도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보통 생각에 갑작스런 충격을 주는 기발한 표현으로서, 어수선하고 초라한 낙엽의 모습을 전쟁으로 인한 어떤 이국 도시의 폐허와 관련시켜 보게 한다. 구불구불한 길을 구겨진 넥타이에 비유한다거나, 들판을 달리는 열차의 연기를 `조그만 담배 연기'로 은유하는 따위도 이와 비슷한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성된 황량한 느낌은 그 다음 부분에 와서 좀더 강조된다. 시인은 잎이 모두 떨어져 가지만 남은 포플라나무의 모습을 무슨 앙상한 뼈대 같은 `근골'로 말하고, 아마도 부서진 채 있는 듯한 공장의 지붕이 `흰 이빨'을 드러냈다던가,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낀다고 묘사함으로써 더욱 쓸쓸한 분위기를 그려낸다. 구름조차도 풍성하지 않아서 `셀로판지'로 만든 것으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황량한 풍경은 작중 인물의 앞에 있는 사물들의 모습인 동시에 그 자신의 쓸쓸한 심리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는 허전한 생각에 이리저리 방황하며 풀벌레 소리 들리는 풀섶을 공연히 차 보는가 하면 허공에 돌팔매를 던져 보기도 한다. 그러나, 쓸쓸한 풍경 저편으로 반원을 그으며 떨어지는 돌팔매는 그를 더욱 적막하게 한다. 허공을 향해 돌팔매를 던지는 행위가 이 황량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보고자 하는 잠재적 욕망의 표현이라면, 그것이 결국 `고독한 반원을 긋고'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가 이곳으로부터 벗어날 아무런 가능성도 없다는 우울한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은 기발한 이미지에 나타난 신선함과 지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황량한 삶 속에서 방황하는 한 인물의 우울한 노래이다. (김흥규: <한국의 현대시>)
<산업사회 ‘도시인의 가을’ 잔잔히 그려>
이상화는 논길을 여자의 가르마에 비유했다. 그것이 바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라는 유명한 싯구절이다. 그런데 시인 김광균은 <추일 서정>에서 그 똑같은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라고 표현한다. 가르마라고 하면 동백기름을 발라 참빗으로 곱게 빗질한 농촌의 여자 얼굴이 떠오르지만 넥타이라고 하면, 그것도 구겨진 넥타이라고 하면 도시 셀러리맨들의 파리한 얼굴이 연상된다. 아마도 뱀을 ‘꽃대님’ 같다고 비유한 서정주의 토속적 비유 역시 김광균의 시에 이르면 ‘넥타이’나 ‘벨트’로 바뀔 것이다.
시에 있어서의 비유는 장식이 아니라 기능이고, 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이다. 같은 낙엽을 두고 한용운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라고 한 데 비해 김광균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라고 묘사한다. 이 비유의 차이가 바로 한용운과 김광균의 시적 차이인 것이다. 김광균은 그 비유를 통해서 농경시대의 계절 감각을 산업시대의 근대적 도시 감각으로 바꿔 놓았다. 그것은 19세기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서구 작가들이 달을 은화(銀貨)에 비유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패러다임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낙엽과 지폐의 유사성은 그 크기와 두께의 형태성에 있지만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소는 정면에서 충돌한다. 낙엽은 자연적인 것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줍거나 쓸어버리거나 태워버린다. 그러나 지폐는 경제적인 것으로 함부로 주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쓸거나 태워버리는 것과는 반대로 은행 금고에 넣어두려 한다. 하지만 그 지폐에 일단 망명 정부란 말이 붙게 되면 그같은 의미 충돌은 오히려 형태적 유사성보다도 더 강렬하게 밀착된다. 낙엽이 본래의 나뭇가지로부터 떨어져 뿌리를 잃은 이파리인 것처럼 망명정부는 본래의 나라와 그 영토로부터 이탈된 뿌리 잃은 정부이다. 그러므로 낙엽이 옛날의 그 무성했던 이파리가 아닌 것처럼 망명정부의 지폐 역시 이미 옛날에 통용되던 그 지폐가 아닌 것이다. 이제는 낙엽처럼 쓸어버리거나 태워버려도 좋을 지폐이다.
김광균의 새로운 유추작용에 의해서 자연의 계절감을 나타내던 나뭇잎은 정치, 경제의 역사 감각으로 뒤바뀐다. 더구나 그냥 망명정부가 아니라 폴란드라는 구체적인 나라 이름이 붙게 되면 그 시를 썼던 1940년 당시 폴란드가 독일 침공을 받고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웠던 2차대전의 실제 상황과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수선하게 흩어진 검붉은 낙엽들은 폴란드의 망명정부의 지폐에서 다시 ‘포화에 이지러진 /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의 전쟁 이미지로 발전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추일 서정>의 낙엽이 결코 정치적 또는 전쟁에 관한 직접적 언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시인들이 겪고 있는 일상적 체험은 실제적인 것보다 신문이나 사진-영화의 미디어를 통해서 얻어진다. 종이에 인쇄된 경제가 지폐이듯 종이에 인쇄된 정치와 전쟁이 신문이다.
낙엽을 보며 여동생의 죽음을 서러워했던 신라의 승(僧) 영재(永才)의 <제망매가(祭亡妹歌)>의 시적 유전자 속에는 결코 발견될 수 없었던 김광균의 가을 서정은 바로 이 인쇄된 정치와 인쇄된 경제로부터 태어난다. 농촌의 서정이 흙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도시의 그것은 인쇄된 종이(화폐에서 책까지 포함하여)로부터 발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추일 서정>의 낙엽은 또하나의 인쇄된 자연인 것이다.
우리는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정지용의 들판(‘향수’)에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달리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이 ‘공장 지붕’으로 바뀌었다 해서 놀라워하는 것은 아니다. <추일 서정>의 그 급행열차는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으며, 그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즉 그 비유는 모두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의인법(擬人法)으로 되어 있어 그 급행열차와 낯선 공장은 ‘늑골을 드러내고’ 있는 포플러 나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농촌에서 도시로 바뀐 소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사물을 바라보는 시적 감각과 그 시선의 변화에 충격이 있는 것이다.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 그 위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는 그 시적 대상이 인공물(人工物-철책)과 자연물(구름)로 서로 다르지만, 다같이 우리에게 어떤 놀라움을 준다. 농경시대의 구름은 ‘솜’과 비유되고, 유목적 문화라면 양떼나 양털과 비교된다. 그러나 그것이 도시적 패러다임으로 바뀌면 「셀로판지」가 된다. 솜과 셀로판지는 농업-산업의 대비만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가 다르다. 솜과는 달리 셀로판지는 투명하고 차갑고 얄팍하고 비생명적인 느낌을 준다. 거기에 「만든 구름」이라는 표현은 그 인위적 가공성을 더 강화한다. 더구나 셀로판이라는 낯선 외래어의 기호 표현은 구름을 더욱 우리의 흙 묻은 체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한다.
그리고 시골 돌담과 대비되는 ‘철책’ 역시 소재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가 달리 나타나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철책은 우리의 일상적 체험과 괴리된 것으로, 금속성의 무게와 견고함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철책만이 아니라 <추일 서정>에 나오는 모든 사물들은 탈중력적인 이미지의 기화작용(氣化作用)을 일으키고 있다. 폴란드 망명정부니 도룬시의 포화니 하는 정치와 전쟁의 무거운 정황을 담고 있으면서도 <추일 서정>은 조금도 어둡거나 무겁지가 않다. 그 비밀은 시의 마지막 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에 숨어 있다.
회화적 묘사로 일관해 오던 이 시는 마지막 연에서 자신의 감정을 직접 토로하여 처음으로 ‘황량한 생각’이라는 직설적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 황량한 생각을 가시적인 행동으로 나타낸 돌팔매질을 분석해 보면 전혀 무겁거나 어둡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로 ‘던지다’라는 말이 ‘띄운다’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갑자기 무게를 상실한 돌멩이와 만나게 된다. 그뿐 아니라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돌멩이도 거의 무중력 상태의 운동으로 변한다.
반원이라는 기하학적 용어도 그렇지만 ‘떨어지다’가 ‘잠기어 간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름만이 아니라 돌멩이와 가을 풍경 전체가 셀로판지로 만든 것처럼 허공에 탈중력 상태로 떠 있다. 생활, 역사,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언술에서 무게를 빼내 무중력화하는 것이 김광균의 이미지요 그 시의 전략이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언어에서 그 지시적 준거물(準據物)을 빼앗아 버리면 언어는 진술로서의 효용적 가치를 상실한다. 나뭇잎의 가장 아름다운 시적 순간이 아이러니칼하게도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때인 것처럼 언어 역시 일상적 체험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아름다운 단풍이 들고, 시적인 언어로 바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쇄된 정치와 경제, 그리고 그 자연은 이제 비트(bit)라는 또 다른 컴퓨터 신호로 바뀌어 가고 있다. 프리 모던에서 모던으로 패러다임을 바꿨던 김광균의 시를 보면서 우리는 모던에서 포스트 모던으로 넘어가는 그 시적 건널목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 앞에서 지고 있는 저 낙엽들은 어떤 이미지로 바뀌어 갈 것인가를.
- 이어녕(李御寧): 조선일보(1996. 9. 24) -
이 시는 연의 구분이 없지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제1행부터 제11행까지는 자연을 도시적, 문명적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하였고, 제12행부터 끝까지에서는 문명화된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경이 묘사되어 있다.
<외인촌>이 풍경의 묘사로 끝나는 데 비해, <추일 서정>은 후반부가 희귀하게도 시인을 등장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여기서 우리는 문명에 대한 시인의 비판 의식을 엿보게 된다. 그의 눈에 비친 자연은 이미 자연의 모습을 상실한 채 문명화되어 있다. 지폐, 포화(砲火), 넥타이, 담배 연기, 급행열차, 공장, 철책, 셀로판 지(紙) 등으로 비유되는 자연은 시인으로 하여금 '황량한 생각'에 젖게 한다. 그래서 그는 문명의 황량함을 향해 '돌'을 던진다. 그것은 거짓된 문명의 파괴를 위해 던지는 돌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던지는 돌이다. 마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 돌은 다만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갈 뿐이다. 이 시가 겨냥하는 지점은 문명 속의 인간의 고독일 터이다.
'포화에 이지러진' 것 같은 황량한 '가을의 정경'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연 구분이 없는 전 16행의 단연시 구성으로 내용상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1∼3행)에서는 낙엽을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와 '도룬시의 가을 하늘'로 비유하여 이국적 정서와 함께 가을의 애상감, 공허감, 절망감 등을 환기시키고 있다.
둘째 단락(4∼7행)에서 가을은 첫째 단락의 낙엽의 이미지에서 '구겨진 넥타이' 같은 길의 이미지로 전이되면서 앞의 하강적(下降的) 이미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낙엽의 낙하(落下)와 '이지러진'ㆍ'구겨진'으로 나타난 소멸의 가을은, '구겨진 넥타이'나 '일광의 폭포'처럼 시각과 청각의 이미지가 공감각적으로 조응되어 '급행열차가 달리는 들'과 함께 가을의 상실감과 허무감을 심화시켜 주고 있다. 즉, 가을은 '낙엽' → '길' → '들'로 일관되게 전이되어 가을이 주는 소멸과 상실, 낙하와 조락(凋落) 등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셋째 단락(8∼11행)에 들어가면 '포플라나무'와 '공장의 지붕', '근골'과 '흰 이빨', '철책'과 '구름'이 각각 대응되어 있는데, 여기서 '근골'ㆍ'흰 이빨'ㆍ'구부러진'ㆍ'셀로판지' 같은 기계적, 물질적 이미지는 도시의 가을이 주는 메마름, 황폐함과 함께 각박한 현실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푸른빛이 사라져 버린 포플라나무의 앙상한 가지 사이로 보이는 '공장의 지붕'은 황량한 도시 문명에 찌든 모습으로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서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철책'은 구부러진 모습으로 덜컹인다. 이처럼 쓸쓸한 가을의 도시 풍경을 바라보던 화자는 낙엽처럼 가벼워서 쉽게 사라져 버릴 듯한 '셀로판지 구름'이 철책 위에 떠 있는 것을 보며 더욱 고독에 휩싸여 버린다.
넷째 단락(12∼16행)에서는 적막을 깨뜨리는 '자욱한 풀벌레 소리'를 '발길로 차'서 차단시키며 '황량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허공에 돌팔매 하나'를 띄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에 한낱 돌멩이를 집어던지는 허망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 돌팔매는 다만 '고독한 반원'을 그으며 떨어질 뿐이다. 화자는 황량한 현실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제 나름대로 노력을 벌이지만,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그 분위기에 더욱 휩싸여 버린다. 그러므로 현실 상황의 극복 의지를 갖지 못한 채 그저 쓸쓸해하기만 하는 화자는 바로 1930년대의 어두운 시대를 황량한 가슴 하나로만 바라보고 있던 시인 자신의 모습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 김광균 : 시 <추일서정>
첫댓글 덕분에 모처럼 다시 읽어보는
싯귀네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