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김삿갓
(만萬사事개皆유有정定)32화
마을 사람들은 한바탕 왁자지껄 떠들어대더니, 동서남북 네 패로 나뉘어, 도둑을 본격적으로 추격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김삿갓은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어 가며, 인적이 없는 들판으로 몸을 피하기로 하였다.
얼마를 달려오노라니, 마을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달려오는 소리가 사뭇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가 이렇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앗! 저 멀리 누군가가 도망가고 있는 모습이 가물가물 보인다. 저놈을 따라 잡아라!"
김삿갓은 가슴이 철렁해 와서,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달렸다.
얼마를 달려오다 보니 들판에 우물이 하나 있다. 지팡이를 던져 보니, 물소리가 나지 않는다. 반 길 정도밖에 안 되는 마른 우물이었다.
김삿갓은 구사에 일생을 얻은 듯, 우물 속에 뛰어들기가 무섭게 우물 바닥에 넓죽 엎드려 버렸다.
잠시 후, 추격꾼들은 가까이 다가오다가 별안간 발을 멈추며,
"응? 도망가던 놈이 별안간 없어졌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이 부군에 우물이 있어. 그놈이 우물속에 숨었을지 모를거야."
마을 사람들은 불문 곡직하고 김삿갓의 팔목을 새끼줄로 꽁꽁 묶다가 별안간,
"앗! 이놈의 옷에 피가 낭자하니 이게 웬일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닌가.
피~라는 소리에, 김삿갓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피라니? 내 몸에 웬 피가 묻었단 말인가?'
김삿갓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옷을 살펴보니, 두루마기의 앞자락에 난데없는 피가 군데군데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놈아! 너는 도둑질만 한 것이 아니고 사람까지 죽였구나. 누구를 죽였는지 바른 대로 말하라."
이 사람 저 사람이 눈에서 불이 나도록 따귀를 후려갈기는 바람에,김삿갓의 몸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나는 도둑질을 한 일도 없는데, 더구나 사람을 죽였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자기 말을 믿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김삿갓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대로 대답할밖에 없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또다시 따귀를 후려갈긴다.
"이 우라질 놈아! 사람을 죽인 증거가 있는데, 죽이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변명을 늘어놓을수록 매만 맞게 될 것 같아. 김삿갓은 숫제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늘그은이 하나가 나서더니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타이른다.
"이놈을 아무리 족쳐도 자백을 할 것 같지 않네. 살해한 시체를 우물 속에 처박았을지 모르니까, 우물 속을 조사해 보기로 하세."
역시 늙은이답게 용의 주도한 의견이었다.
젊은이들이 불을 밝혀 들고 우물 속을 살펴보지, 과연 여인의 시체 하나가 우물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의 칼에 찔려 죽었는지, 온몸이 피투성이였던 것이다.
김삿갓은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눈앞이 캄캄해 왔다. 그는 우물 바닥에 시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몸을 숨기려고 시체 위에 납작 엎드려 있었으니 옷에 피가 묻을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실정을 말해 본들, 그 말을 누가 믿어 주랴.
"이놈아! 증거물이 이렇게 뚜렷한데도 네가 죽이지 않았단 말이냐."
마을 사람들은 시체를 꺼내 놓고, 김삿갓을 또다시 개 패듯 하였다.
김삿갓은 버선목이라도 뒤집어 보일 수도 없는 일이어서 꼼짝못하고 억울한 봉변을 당할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마을 사람들은 시체의 얼굴을 불빛에 비쳐 보다가, 별안간 호들갑스럽게 놀라는 소리를 지른다.
"아니, 이 여인은 풍헌 영감님 댁 과부 며느리가 아닌가?"
"아닌게아니라, 틀림이 없어. 그 여인이 요새 어떤 놈팜이와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이 떠돌더니, 그 놈팡이가 바로 이놈이었구나! 이놈아! 과부하고 통정이나 했으면 그만이지, 사람을 왜 죽이기까지 했단 말이냐!"
마을 사람들은 의분을 느꼈는지, 김삿갓을 또다시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살인범의 누명을 꼼짝못하고 뒤집어쓰게 되자, 가슴이 막막해 왔다. 살인범으로 몰렸으니 이제는 죽음을 각오할밖에 없었다.
'하느님은 나를 이런 식으로 죽게 만들 생각이셨던가, 그렇지 않다면 일이 이렇게도 꼬일 수가 없지 않은가.'
김삿갓은 마을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아 가며, 맘속으로는 팔자한탄만 하고 있었다.
이윽고 최 풍헌 영감이 또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함께 등불을 밝혀 들고 나타자나, 젊은이들이 입을 모아 고한다.
"이놈이 풍헌 영감님 댁 며느님을 죽였습니다. 피살된 여인은 며느님이 틀림없사오니, 시체를 직접 보아 주시옵소서."
최 풍헌은 시체를 확인하고 나더니, 기가 막히는지 김삿갓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만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깜짝 놀라며 외친다.
"아니, 이놈은 어제 저녁에 우리 집에서 저녁밥을 얻어먹은 놈이 아닌가. 저녁밥까지 얻어먹은 놈이 내 집 며느리를 죽이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김삿갓은 너무도 기가 막혀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최 풍헌은 김삿갓의 얼굴을 증오의 눈으로 노려보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씹어 뱉듯 말한다.
"사람 같지 않은 놈은 꼴도 보기 싫다. 이놈을 당장 관가에 끌어다가 능지 처참을 시키게 하여라."
김삿갓은 관가로 끌려가면 살아날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일루의 희망을 품어 보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압송되어, 다음날 아침에 포청으로 끌려 나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포도 군사들은 살인범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더니, 한마디의 문초도 없이 덮어놓고 태질을 하고 주리를 틀면서,
"이놈아!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빨리 자백을 하거라!"
하고 무섭게 족쳐 대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가혹한 고문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죽으면 그만 아닌가.'
그렇게 결심한 김삿갓은 마침내,
"그 여인을 내가 죽였소. 범죄 사실을 솔직이 고백했으니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아 주시오."하고 말했다.
형졸은 자백을 받아 내자 크게 기뻐하며 다시 묻는다.
"그 여인은 집을 나올 때 비단 옷과 패물 보따리를 가지고 나왔다고 하는데, 그 보따리는 어디다 감춰 두었느냐."
김삿갓은 그것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왕 살인죄를 뒤집어썼으니 보따리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인이 죽지 않으려고 반항을 하는 바람에, 보따리는 우물가에 그냥 내버려두었소. 지금이라도 찾아가 보면 우물가에 있을 것이오."
문초를 당할수록 몸은 자꾸만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그날부터 칼을 쓰고 옥에 갇혀, 사또의 재판을 기다리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나니, 고문을 혹심하게 당해 사지가 쑤셔 오기만 할 뿐 마음은 오히려 편안하였다.
'사람은 언제든지 한 번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 지금 죽거나 이삼십 년 후에 죽거나 죽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떨쳐 버리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도 평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세상 만사는 모두가 정해져 있는데
가엾은 인생이 부질없이 바쁘게 돌아가네.
하고 중얼거렸다.
언젠가 가족들과 작별하고 방랑의 길에 오를 때에 지껄였던 말을 또 한번 중얼거려 본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할밖에 없는 것이, 만약 김삿갓이 살인범으로 몰려 죽을 팔자가 아니었다면, 아무 죄도 없이 무엇 때문에 도망을 쳤으며 설사 우물 속에 숨어 있다가 잡혔다 하더라도, 어째서 그 우물 속에 여인의 시체가 있었을 것인가.
'옛날부터 팔자 도망은 못 가는 법이라고 하더니, 타고난 팔자만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야'
김삿갓은 불현듯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의 죽음을 연상하였다.
성삼문은 단종을 위해서는 만고의 충신이었다. 그러기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쫒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은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신왕 세조의 손에 무참하게 죽었다. 그것도 성삼문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성삼문은 신념에 살아온 사람이었던 까닭에,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지는 최후의 순간에도 비겁한 태도를 추호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기막힌 사세시 까지 읊지 않았던가.
북소리는 둥둥 인명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해는 저물어 가는구나
황천에는 객주집이 없을 것이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자야 하는고.
죽어 가는 최후의 순간에도 그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김삿갓은 설사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비명 횡사하는 한이 있어도, 성삼문을 본받아 누구한테도 비굴한 태도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내가 비명 횡사하면, 그 대신에 진짜 살인범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게 아닌가. 나는 그것만을 다행히 여기고 순순히 죽기로 하자.'
그러나 죽는다고 생각하니 처량한 감정만은 어찌 할 수 없어서, 어느 날 옥리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느 고을이오?"
죽을 때 죽더라도 자기가 죽는 고장의 이름이나 알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옥리가 비웃는 어조로 말한다.
"멀잖아 죽을 놈이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서 어쩌자는 거냐?"
"죽을 땐 죽더라도 자기가 죽을 장소의 이름이나 알고 죽어야 할 게 아니오."
옥리는 약간 측은한 생각이 드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는 함경도 정평 땅이다."
"엣? 여기가 정평이라구?"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반월 행자의 고향이 정평이라고 했기때문이었다.
그는 김삿갓과 마지막 작별을 나눌 때, (함흥으로 가시는 길에 내 고향 정평에는 꼭 한 번 들러 보아 주십시오.) 하고 신신 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김삿갓은 그와 같은 간곡한 부탁을 받았기에, 정평에는 꼭 들러 볼 생각이었다. 그때만 해도 자기가 정평 땅에서 죽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던가.
(한 치 눈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지라, 내가 반월 행자의 고향인 정평 땅에서 죽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 것인가.)
김삿갓은 세상 만사가 너무도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김삿갓은 사또로부터 정식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본인이 범죄 사실을 자백한 사건에 대해서는, 정식 재판이라는 것은 일종의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천만 다행하게도 정평 군수 현석길은 재판을 잘 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현 사또는 동헌 대청에 덩실하니 높이 올라앉아, 칼을 쓰고 뜰아래 꿇어앉아 있는 김삿갓을 굽어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국문 한다.
"네가 최 풍헌 댁 과수 며느리를 칼로 찔러 죽인 김삿갓이란 놈이냐?"
"예, 그러하옵니다"
"너는 범죄 사실을 모두 자백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냐?"
"예, 그러하옵니다."
이제 와서 부인해 보았자 소용이 있을 것 같지 않아, 김삿갓은 묻는 대로 (예)라고만 대답해 버렸다.
현 사또가 다시 묻는다.
"네가 그 여인을 죽이기까지에는 오랫동안 정을 통해 왔을 것이 분명한데,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그 여인과 정을 통해 왔느냐?"
"........"
있지도 않은 일을 물어 오니, 김삿갓은 말문이 막힐밖에 없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바른대로 말해라! 고문을 당해야만 대답하겠느냐."
김삿갓은 고문이라는 소리에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워낙 고문을 심하게 당해 아직도 사지가 쑤셔 오는 중인데, 이제 또다시 고문을 당했다가는 그대로 죽게 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고문을 피하기 위해, 얼른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도 오래 전부터 정을 통해 왔기 때문에, 언제부터였던가 기억이 분명치 않사옵니다."
사또는 그 말을 듣자 무엇인가 의심쩍은 점이 있는지, 고개를 기울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죄인을 많이 다뤄 본 사람은 죄인을 직접 대해 보면 직감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현 사또는 김삿갓의 진술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최 풍헌의 아들이 죽은 것은 반 년 전의 일이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정을 통해 왔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현 사또는 증거품인 식칼을 내보이녀 다시 묻는다.
"너는 그 여인을 이 식칼로 찔러 죽였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이냐?"
"예, 사실이옵니다."
"이 식칼은 어디서 난 것이냐?"
"그 마을 어느 집 부엌에서 움쳐 내온 것이옵니다."
김삿갓은 문초를 받기가 귀찮아 되는 대로 씨부려대었다.
현 사또는 또 한번 고개를 기웃거린다. 무릇 범죄자는 어떤 경우에나 범죄 사실을 부인하려고 애쓰는 법이다. 죄질이 무거운 사람일수록 그와 같은 경향은 더욱 농후한 법이다.
그런데 김삿갓은 살인범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죄를 부인하려는 기색이 전연 엿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은 진범인이 아니로구나!'
현 사또는 심문을 계속해 볼수록 그런 의심이 점점 농후해 왔다.
그러나 본인이 자백을 했으니, 진범이 나타나기도 전에 무죄 석방은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다시 이렇게 물어 보았다.
"너는 살인범이 분명하므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죽기전에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아무 말도 없사옵니다."
어디까지나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 아닌가.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 보자. 너는 고향이 영월이라고 했는데, 영월에서 정평으로 올 때 어떤 경로를 밟아 왔느냐."
"금강산과 안변 석왕사를 구경하고, 고원.영흥 등지를 거쳐 정평으로 왔사옵니다."
"금강산이나 석왕사에서 혹시 스님들을 만나 본 일은 없느냐."
"스님들을 더러 만난 일이 있사옵니다."
"어떤 스님을 만났는지 자세히 말해 보아라."
"금강산에서는 공허 스님이라는 분을 만났고, 석왕사에서는 반월 행자와 경봉 주지를 만난 일이 있사옵니다."
현 사또는 그 말을 듣더니, 별안간 벼락 같은 호통을 지른다.
"이놈아!멀쩡한 거짓말 그만 하거라. 너 같은 놈이 경봉 스님을 만났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사또는 벼락 같은 호통을 지르고 나더니, 이번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형리들을 굽어보며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저놈을 당장 하옥시켜라. 이삼 일 안으로 처단하기로 하겠다."
김삿갓은 옥사로 끌려오며,
"만사개유정!"
하며 (모든 것은 운명)이라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또 한번 중얼거렸다.
이제는 죽을 날만 기다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현 사또는 김삿갓이 진범이 아니라는 심증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김삿갓에게 (수일 안으로 처단하겠다)는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린 것일까.
거기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깊은 사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 사또는 김삿갓에게 최후의 선언을 내려 하옥시킨 뒤에, 포도청장과 포도 군사 몇 사람을 긴급 소집하여 이렇게 말했다.
"김삿갓은 결코 진범이 아니다. 그러나 진범을 잡기 위해서는 우선 김삿갓을 진범으로 몰아붙여, 그를 처단해 버렸다는 허위방문을 널리 써붙여야 하겠다. 그래야만 진범이 안심하고 나다니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극비밀리에 진범을 탐지해 내도록 해야한다. 그대들은 본관의 말뜻을 알아듣겠는가."
포도 군사들은 사또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사또어른! 김삿갓은 자기가 범인임을 자백했사온데, 이제와서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물론 나도 본인의 자백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태형을 안기고 주리를 틀어 대면, 어느 누가 끝까지 죄가 없노라고 버틸 수 있겠느냐. 김삿갓은 아직도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어 죄를 뒤집어썼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문을 받을 때에는 고통에 못 이겨 허의 자백을 했다하더라도, 그자가 진범이 아니라면 사또께서 국문하셨을 때에는 죄상을 부인했어야 옳을 것이 아니옵니까. 사또께서 국문하셨을 때에도 그자는 자신의 범행을 분명히 시인하였습니다."
"물론 나도 그 점이 약간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유를 철저하게 조사해 봐야 하겠다. 첫째, 김삿갓은 죽은 여인과 오래 전부터 정을 통해 왔노라고 진술했는데, 그 일에 대한 사실 여부를 철저하게 조사해 볼 것. 둘째, 범인은 여인을 살해하기 위해, 그 마을 어느 집에서 식칼을 훔쳐 내어 그 칼로 죽였노라고 했는데, 그 마을에 과연 식칼을 잃어버린 집이 있는가 없는가를 상세하게 조사해 볼 것."
그러나 그 마을에서는 식칼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현 사또는 덧붙여 말하기도 하였다.
"세째, 범인은 석왕사에서 경봉 스님과 반월 행자를 만난 일이 있다고 했다. 경봉 스님은 나하고는 죽마 고우다. 경봉 스님에게 사람을 보내, 김삿갓이 언제 무슨 일로 석왕사에 들렀으며, 김삿갓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보기로 하겠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일을 아무도 모르게 알아보기로 하되, 우선 진범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는 허위 방문을 널리 써붙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래야만 진범이 안심하고 나다닐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정평 고을에는 그날중으로,
(살인범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으니 만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하는 방문이 방방 곡곡에 나붙게 되었다.
현 사또는 살인범을 처단했다는 허위 방문을 그날중으로 방방 곡곡에 써붙이게 하고 나서, 유능한 포도 군사 몇 사람을 시중매로 가장시켜 살인 사건의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하게 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만은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첫째, 살해된 여인은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금실이 남달리 좋아서, 외방 남자와 정을 통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 절대 다수의 의견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을 사람들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되어 있었다. 둘째, 그 마을에서 식칼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 사또가 이미 예언한 그대로였다.
현 사또는 그와 같은 보고를 받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럴테지! 진범인은 식칼의 주인임이 분명한데, 진범인이 식칼을 잃어버렸노라고 신고할 리가 없지 않은가!)
진범인은 그 마을 사람일 것이라고 현 사또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현 사또는 석왕사에 있는 경봉스님에게 친서를 보내, 김삿갓의 사람됨을 알아보았더니, 경봉 스님은 반월 행자를 시켜 즉시 친필 답장을 보내 왔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천하의 대시인 삿갓 선생이 살인범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랐습니다. 무언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된 것 같습니다. 사또께서는 죄 없는 사람을 죽여, 오판의 누명을 천추에 남기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념하소서, 삿갓 선생의 인품에 대해서는 반월 행자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사또께서는 반월 행자와 긴밀히 상의하시와 만에 하나라도 그릇됨이 없도록 신신 당부 드리옵니다.
현 사또는 경봉 스님의 편지를 읽어 보고, 김삿갓은 다른 사람아닌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했던 김병연이었음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리하여 반월 행자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경봉 스님 말씀에 의하면, 그대는 범인 김삿갓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대도 김삿갓을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반월 행자가 결연히 대답한다.
"삿갓 선생은 소승의 스승님으로서, 부처님과 같은 어른이시옵니다.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이곳 정평은 소승의 고향이옵니다. 삿갓 선생께서 제 고향인 정평에서 비명 횡사하신다면, 그런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소승은 오늘부터 만사 제폐하고, 스승님을 구명하기 위해 진범인을 기어코 제 힘으로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반월 행자의 열의는 보통이 아니었다.
현 사또는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면 그대는 나의 포도 군사들과 합심 협력하여, 진범인을 꼭 색출해 주기를 바란다."
이리하여 반월 행자는 그날부터 포도 군사들과 함께 진범 색출에 전력을 기울여 나가게 되었다.
살인 사건이 있은 곳은 눈바위골 이라는 마을이었다. 반월 행자의 본집은 거기서 고개 하나 너머인 뽕나무골이었으므로, 눈바위골 사람들은 반월 행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반월 행자는 범인을 염탐하기 위해 어느 주막에 들르니, 옛날부터 주막을 경영해 오던 육십 노파가 반월 행자를 보고 크게 반가워하였다.
"자네는 중이 되어 금강산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오늘은 속인차림새로 나타났으니 이게 웬일인가."
반월 행자는 싱긋 웃으며 나무 걸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중 노릇을 몇 해 해보니 따분해서 못 견디겠더군요. 그래서 중 노릇을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할머니,나 술 한잔 주시오."
노파는 술을 따라 주면서,
"츠츠츠!이왕 중이 되었거든 불경 공부를 착실히 할 노릇이지, 스님 노릇을 왜 집어치웠단 말인고, 젊었을 때 공부는 안 하고 술이나 마시면 건달밖에 더 될 게 뭐냐 말야."
노파로서는 당연한 푼계였는지 모른다.
반월 행자는 어떠랴 싶어,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돈만 많으면 그만이지, 그까짓 공부는 해서 뭣에 씁니까."
"자네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건달패가 되겠네. 돈은 정당한 노력으로 벌어야 하는 것이야."
노파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났는지,
"참, 요새 관가에서는 살인범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고 하던데, 자네는 거리에 나붙은 방문을 보았겠지?"
"보구 말구요. 나는 살인범을 처형하는 광경까지 내 눈으로 직접 본걸요."
노파는 그 말을 듣자 눈이 휘둥그래지며,
"뭐야? 자네가 직접 보았다구?.... 그 사람이 죽을 때, 자기는 진범이 아니라는 말을 한마디도 아니하던가?"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하던걸요."
"그래에? 그거 참, 이상하다."
노파는 살인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눈치가 분명하였다.
반월 행자는 시치미를 떼고 다시 말한다.
"이상하기는 뭐가 이상해요. 사람을 죽였으면 자기도 죽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만약 진범이 이제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건은 이미 끝이 났으니까,이제는 진범이 나타나도 상관없을 겁니다."
"그래에? 그러면 이제는 개똥 아범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게......"
노파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별안간 말을 뚝 잘라 버리더니, 반월 행자에게 부랴부랴 술을 따라 주며,
"자네가 오래간만에 내 집을 찾아왔으니 한잔 더 하게. 오늘은 술값을 받지 않기로 하겠네."
하고 공연한 너스레를 치는 것이 아닌가.
반월 행자는 개똥 아범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트였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추호도 보이지 아니하고 연방 술만 마셨다.
잠시 후에 반월 행자는 술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동헌으로 부리나케 달려와, 현 사또에게 자초 지종을 낱낱이 보고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살인 사건의 진범인은 개똥 아범이 틀림없사옵니다. 눈바위골에 사는 개똥 아범이 누구인가를 조사하셔서, 범인을 시급히 체포해 주시옵소서."
현 사또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뻤다. 그리하여 개똥 아범이 누구인가를 탐문해 보니, 문제의 인물은 눈바위꼴에서도 불량하기로 소문난 김돌쇠 라는 청년이었다.
현 사또는 세 명의 포도 군사들을 보내 김돌쇠를 즉시 체포해 오게 하였다. 물론 반월 행자도 동행하였다.
그러나 범인이 부재중이어서, 포도 군사 한 사람이 우선 범인의 아내만을 동헌으로 연행해 왔다.
현 사또는 범인의 아내에게 식칼을 내보이며 묻는다.
"이 식칼이 너희 집 식칼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냐?"
김돌쇠의 아내는 식칼을 받아서 이러저리 살펴보더니,
"이 식칼은 쇤네 집 식칼이 분명하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남편이 그 식칼로 사람을 죽인 사실을 마누라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현 사또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면 다시 물어 본다.
"혹시 남의 집 식칼일지도 모르는데, 너는 어디를 보고 너의 집 식칼이라고 주장하느냐."
그러자 여인은 식칼을 남에게 빼앗길까 봐 겁이 나는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식칼은 분명히 저희 집 식칼이옵니다. 혹시라도 남의 집 식칼과 바뀔까 두려워서, 저희 집 식칼에는 칼주루에 개 그림을 그려 두었습니다. 이것 보시옵소서. 여기에 개가 그려져 있사옵니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과연 그 식칼 자루에는 서투른 솜씨로 개대가리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살인 사건의 진범인은 개똥 아범인 김돌쇠가 틀림이 없었다.
마침 그때 포도 군사들이 반월 행자와 함께 범인을 체포해 왔다.
범인을 동헌 마당에 꿇어앉혀 놓자, 현 사또는 범인에게 벼락 같은 호통을 지른다.
"지금 네 여편네는 이 식칼이 너희 집 식칼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너는 이 식칼로 최 풍헌 댁 과부 며느리를 찔러 죽인 것이 분명하렸다?"
범인은 이미 부인할 수가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백한다.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범인의 진술에 의하면, 김돌쇠는 그날 밤 최 풍헌 댁 담을 넘어가 과부 며느리를 겁탈한 뒤에, 비단옷과 패물을 꾸려 가지고 여인을 강제로 끌고 나와 식칼로 찔러 죽여, 시체를 우물 속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패물과 옷보따리는 아직도 상여막에 그냥 숨겨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범인이 무참한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동안 반월 행자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는지 눈을 무겁게 감고 합장하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연방 염불만 외고 있었다.
한편-
사형 선고를 받은 김삿갓은 이제는 싫든 좋든 간에 죽음을 각오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죽음이 두려워 마음이 불안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나니, 마음이 그제야 안정되었다.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라고 말한 고승들의 생사관을 이제야 알것 같구나!)
사또의 말로는, 2,3일 안으로 죽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형언도를 내린 지 4,5일이 지나도 동헌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김삿갓은 어두컴컴한 감방에 진종일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자니, 하루해가 지리해 견딜 수 없었다.
(제-길헐! 죽일 테면 빨리 죽이지 않고, 왜 늑장을 부리고 있는거야.)
그러잖아도 몸은 비비 꼬여 오는데, 감방에는 웬놈의 이와 벼룩이 그렇게도 많은지, 그놈들은 밤이나 낮이나 인정 사정없이 물어 쌓고 있었다.
이러구러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점심때 무렵이었다.
이란 놈도 점심을 먹으려고 출동했는지, 허리춤 속에서 이가 사물거리고 있었다.
김삿갓은 이를 잡으려고, 부랴부랴 허리띠를 풀고 허리춤을 뒤집어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보리알 같은 이란 놈이 도망을 가려고 부지런히 달아나고 있었다.
김삿갓은 이를 잡아 손바닥 위에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즉흥시 한 수를 읊었다.
이
배고프면 피를 빨고 배부르면 물러 가는
3백 곤충 중에서도 가장 못난 네놈아
낮이면 나그네의 품속에 숨어서 살며
주린 배의 쪼르락 소리만 뜯는구나.
꼴은 보리알 같아도 누룩은 될 수 없고
바람 풍 자 되다 말아 매화꽃도 못 떨구네
묻노니 너는 신선도 괴롭힐 수 있느냐
천태 선녀가 머리 긁는 것도 네 탓이니라.
시를 읊는 사이에 이란 놈은 옷깃 속으로 부지런히 기어 들어 가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내 어찌 너를 죽이겠느냐. 나는 어차피 수일 안으로 죽어야 할 몸. 나의 피를 맘대로 빨아 먹어라. 그것만이 내가 이 세상에서 너에게 베푸는 최후의 자비심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를 살려 보내고 있노라니까, 이번에는 장딴지가 바늘로 찔리는 듯이 따끔해 온다. 말할 것도 없이, 벼룩이란 놈이 장딴지를 쏘아 대고 있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벼룩에게 물리는 것이 약이 올라, 바지 위로 장딴지를 때려 갈겼다. 그러자 벼룩은 기절 초풍이라도 했는지, 한동안은 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장소를 옮겨 가지고, 이번에는 무릎 부근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김삿갓은 참다못해 벼룩을 잡아 내려고 바짓가랑이를 활짝 뒤집어올렸다.
그러나 벼룩은 방바닥으로 튀어나오더니, 몇십 길이나 되는 높이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쏜살같이 도망을 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재주로서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고비 원주였다.
(제 길헐! 도망을 가려거든 맘대로 가라지.)
그렇게 체념하며 물린 자국을 살펴보니, 벼룩이 얼마나 많이 물었는지 장딴지와 넓적다리가 마치 복사꽃이 만발한 것처럼 울긋불긋하였다.
김삿갓은 은근히 화가 동해 이번에는 (벼룩)이라는 제목으로 즉흥시를 이렇게 읊었다.
대추씨 같은 꼴에 날래기는 대단하나
이하고는 친구요 빈대와는 사촌이라
낮에는 자리 틈에 죽은 듯이 숨었다가
밤만 되면 이불 속에서 다리를 쏘아 대네.
주둥이가 뾰족하여 물리면 따금하고
펄떡펄떡 뛸 때마다 단꿈이 놀라 깬다
날이 밝아 살펴보면 온몸이 만신 창이
복사꽃이 만발한 듯 울긋불긋 하구나.
이와 벼룩에게 시달리는 고달픔을 시로써 달래고 있노라니까, 문득 옥졸이 감방 문을 요란스럽게 열어 쌓더니, 이렇게 외쳐 대는 것이 아닌가.
"너는 칠성판에서 뛰어나게 되었다. 우리 사또님께서 너를 무죄 석방을 시켜 주신다니, 네 물건을 모두 챙겨 가지고 이리 나오너라."
김삿갓은 옥졸의 말에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사형 선고까지 받은 죄수를 까닭없이 살려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무죄 석방시켜 주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대는 무죄 석방도 모르는가. 우리 고을 사또 어른께서는 맘씨가 부처님처럼 고우셔서, 너를 그냥 살려 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잔소리 말고 빨리 나오란 말이다."
김삿갓은 감방을 나오면서도 영문을 몰라,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터덜터덜 옥문을 나서려니까, 마침 옥문 밖에서는 승복을 갖춰 입은 반월 행자가 합장 명목을 하고 서서,
"옴, 아리사라다바하 일체재앙화위진! 옴, 아리사라다바하 일체재앙화위진(모든 재앙이 깨끗이 사라지게 해달라는 범어로 된 기원사)!"
하고, 알아듣지도 못 할 말을 연방 외어 대고 있었다.
김삿갓은 반월 행자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두 말을 덥석 움켜잡았다.
"아니, 반월 행자가 여기 웬일이오?"
반월 행자는 그제야 눈을 활연히 뜨더니, 김삿갓의 손을 마주 움켜잡는다.
"삿갓 선생! 그동안에 옥고가 얼마나 심하셨습니까. 그러나 이제 모든 액운은 물러가고, 선생은 청천 백일의 몸이 되셨습니다."
눈물겹도록 떨려 나오는 반월 행자의 위안의 말을 듣는 순간, 김삿갓은 그의 덕택으로 살아나게 되었음을 직감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ㅓ 가슴 벅찬 감격을 느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아나게 된 것은 오로지 반월 행자의 덕택이었소."
반월 행자는 힘차게 도리질을 한다.
"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을! 천하 만사는 반드시 사필 귀정인 법이옵니다. 인과응보의 철리가 뚜렷한 법이온데, 아무 죄도 없으신 선생께서 어찌 벌을 받으실 것이옵니까."
"반월 행자는 나의 무고를 알아 주니, 정말 고맙구료. 우리 두 사람은 분명 전생부터 깊은 인연이 있는가보오."
"전생지연이 있다 뿐이옵니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어찌 전생지연이 없겠사옵니까."
반월 행자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생각이 떠오른 듯.
"이번 일에는 본관 사또께서 각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선 사또 어른을 찾아뵈온 뒤에, 저의 집으로 가셔서 당분간 몸을 휴양하도록 하십시다."
하고 말한다.
그리하여 반월 행자와 함께 동헌으로 찾아가니 현 사또는 김삿갓을 반갑게 맞아들여, 그동안의 경위를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김삿갓은 비명으로 죽지 않게 된 것만도 천만 다행하게 여겼다.
그러나 자기가 살아난 대신에 진범이 죽게 된 일을 생각하면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김삿갓은 그날중으로, 뽕나무골에 있는 반월 행자의 집으로 끌려와, 날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아 가며 병든 몸을 편히 쉴 수가 있었다.
반월 행자는 김삿갓이 산수를 좋아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평 고을의 명소인 도성산 관음사와 백운산 환희사, 중봉산 효순사 등을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구경시켜 주었다.
그러나 달포가 지나는 동안에 몸이 어느 정도로 추서지자. 김삿갓은 길을 떠나야 하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러이 절실해 왔다. 석왕사에 돌아가야 할 반월 행자를 오래 붙잡아 두기가 민망스럽기도 했지만, 되도록이면 남에게 폐를 적게 끼치려는 것이 그의 생활 철학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어느 날 조반 후에 반월 행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길을 떠나기로 하겠소. 반월 행자도 오늘은 석왕사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반월 행자는 김삿갓이 떠난다는 말을 듣고 펄쩍 뛸 듯이 놀란다.
"선생은 성치 못한 몸으로 어떻게 길을 떠나신다는 말씀입니까. 몸이 완전히 추서기 전에는 아무데도 못 가시옵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 건강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아요. 나도 떠나겠지만, 경봉 스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반월 행자도 석왕사로 빨리 돌아가야 하오."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이 없을 것을 깨달은 탓인지, 반월 행자는 울상이 되며 말이 없었다.
"인생이란 본시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오. 헤어진다는 것은 다시 만나기 위한 전제이기도 하오.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말고, 반월 행자도 오늘은 석왕사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삿갓 자신도 반월 행자와 작별하자니 가슴이 메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은 제각기 행장을 차리고 나섰다. 이제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웬일인지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반월 행자도 똑같은 심정인지, 마주 선 채 움직이지를 않는다.
김삿갓은 얼굴을 돌려, 자기가 가야 할 방향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 북쪽 하늘에는 성관산이 아득히 가로막혀 있고, 동쪽 산기슭에는 금이강의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 풍경은 이태백의 (송우인)이라는 시에 나오는 풍경과 너무도 흡사하였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그 시의 첫절을 다음과 같이 읊어 보았다.
산은 북쪽 하늘에 가로 막혀 있고
물은 동쪽 성밑을 감돌아 흐른다
이제 여기서 한번 헤어지면
외로운 나그네 정처없이 흘러가리.
김삿갓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이태백의 시를 빌어서 말해 본 것이었다.
이러자 이심 전심이라고 할까, 반월 행자도 김삿갓의 심정을 알아채고, 그 시의 다음 구절을 빌어, 자기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읊어 뵈는 것이었다.
구름처럼 떠나감은 선생의 뜻이요
지는 해를 설워함은 나의 심정이외다
손을 들어 여기서 작별하려니
말은 슬픔에 겨워 자꾸만 울어 쌓소.
반월 행자의 작별시를 듣고 나자, 김삿갓은 눈물이 자꾸만 솟구쳐 올라 얼굴을 돌려 버렸다.
수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며 살아온 김삿갓이었다. 그러면서도 누구하고 헤어질 때에도 슬픔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김삿갓이었다.
그러나 반월 행자와 헤어질 때만은 번번이 단장의 비애를 아니 느낄 수가 없으니, 그것은 무슨 인연일까 싶었다.
김삿갓은 눈물을 씻고, 산길을 걸어 올라오며 혼자 생각해 본다.
(누구하고 헤어질 때에도 슬픔을 몰랐던 내가, 반월 행자와 헤어질 때문은 어째서 번번이 마음이 슬퍼지는 것일까?)
거기에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초인간적인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았다.
감옥에 갇여 있는 동안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서, 산에는 어느새 추색이 농후하다.
다음편-
-허풍선이와 엄처- 계속
소설 김삿갓
지은이 정 비석
옮긴이 주태백이
아~뭉클하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