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으로 보면 개명사업 같으나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 사람의 눈이 먹먹하고 가슴이 깜짝 놀라운 문제 하나가 돌연이 생겼으니 그것은 무엇인고. 즉 본 신문 제 일면에 큰 글자로 쓴 동양척식회사라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해조신문 1908. 4월 2일)
1908년 봄부터 그해 내내 신문 지면을 뜨겁게 달군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의 설립이었다. 러일전쟁 후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 일본은 경제적 지배를 도모한다. 일본의 독농(篤農)가를 이주시켜 선진 농법의 모범을 보이고 저리(低利)의 식산흥업자금을 공급하여 척식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설립한 것이 동척이다.
을사보호조약과 합방조약 당시 일본 총리였던 가쓰라가 동척법안을 의회에 체줄한 것은 3월18일이었고,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은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동척 설립을 두고 “일본 빈민 600만명을 식민하여 동서남북에 파리 퍼지듯이 산과 들에 등 넝쿨 얽히듯이 일초일목이라도 모두 차지하여 대한 강산에 손이 도리어 주인이 될 것이니 일호반점의 이익인들 한인에게 떨어질리 있겠는가” (1908. 4. 30)라고 비난하였다.
한국 내에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8월에 양국에서 동척법이 공포되고 9월에 설립위원으로 일본측 82명, 한국측 33명이 임명되었다.
농상공부대신에서 내부대신으로 전임한 송병준과 총리대신 이완용은 설립위원에 서로 자기 사람을 심고자 민망할 정도의 다툼을 벌였다. 이완용이 동척 부총재에 자신의 형을 천거하려 하자 송병준은 그에 반대하여 이완용을 논박하였다.
서울의 부호 7명과 13도로부터 각 2명씩 지명된 설립위원 33명이 일본에 간 것은 형식에 불과했다. 동경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안건은 모두 “등을 어루만지고 목을 조르는 조삼모사의 술책이었다” (매천야록)
모호한 구절과 불리한 조건에 대해 전남 위원 박원규 등 열두 명이 목숨을 걸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열두 활불(活佛)이라 하였지만, 송병주는 설립위원이 귀국하자 그들을 명월관에 불러 만찬을 열고 조인을 거절하거나 칙령 없이는 따르기 어렵다고 한 자들을 회유하였다.
마침내 12월 28일 일본 식민정책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동척이 설립(초대 총재 우사가와)된다. 주식 20만주 중 한국 정부가 토지로 출자한 6만주와 양국 황실 지분에 제외한 13만여 주를 양국에서 일반 공모하였다.
자본금은 그해 한국정부 예산의 4할에 육박하는 1천만원이며 그 10배의 채권발행이 가능하였다. 한인 부총재에 전 탁지대신 민영기, 이사에 한상룡, 감사에 조진태가 포함되었다. 동척 본점은 황금정 2정목(현 외한은행 본점 자리)에 위치하였다.
공립신문은 일본신문 만조보에 실린 화보 하나를 소개한다. “동양척식회사라 대서특필로 쓴 기를 들고 앞에 선 자는 일본정부요, 그 옆에 커다란 갓을 쓰고 기다란 갓끈을 늘어뜨리고 입을 넓게 벌리고 열 손가락을 쩍 벌리고 길가에 꺼꾸러진 자는 한인이오, 그 뒤에 일본 농민복장에 칼 차고 삽들고 발 벗고 따라가는 자는 척식회사 위원이요” (10월 28일 ) 비록 회화이지만 동척의 성격과 한인이 처한 실상을 보여 주고 있다.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