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대전지회 달밤입니다.
지난 토요일 온라인으로만 뵙던 선배님들을 오프라인에서 직접 뵈면서 청명한 가을하늘속에서 충청수영성과 선유도를 답사하는 배움과 만남이 함께 했던 귀한 시간의 후기를 올려봅니다.
먼저 회장님을 비롯한 운영진분들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많은 회원분들 덕분에 코로나로 끊겼던 이배사 답사가 성황리에 끝난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저는 그저 받기만 한것 같아 죄송스럽고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저와 판부사님은 자차를 이용하다보니 본 답사 후기에는 정규답사지 이외의 보령과 군산지역의 답사내용도 포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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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토) 오전 8시 35분 대전역에서 우리 이배사의 희망이자 등불이며 유명인(?^^)인 판중추부사님을
모시고 대전-당진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목적지인 충남 오천항에 자리한 충청수영성으로 출발합니다.
중간에 회장님께 전화드려보니 시간여유가 있어 문화재 안내판에 백야 김좌진 장군 묘소 안내문이 보이길래
홍성에 있는 생가는 가보았지만 묘소는 안가본 곳이라 판부사님에게 의향을 물어보니 좋다고 하네요^^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묘
<사진 1> 김좌진 장군 묘 안내문
<사진 2> 백야 김좌진 장군 묘 전경 1
묘비에 큼지막하게 적힌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묘"란 17자가 모든것을 말해주는듯 합니다.
<사진 3> 백야 김좌진 장군 묘 전경 2
독립전쟁을 벌이며 탔다는 김좌진 장군의 상징이기도 한 말조각상 한쌍이 마주보고 있는게 특이하네요.
<사진 4> 장군묘 바로 위에는 부모님의 묘가 있습니다. 조금 더 간격을 두면 좋았을텐데???^^
- 장군 부모님 묘는 둘레석이 없고, 봉분도 약간 작아 보입니다.
판부사님왈 장군님 유해를 왜 현충원에 안모셨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시네요^^
아마 잘 모르지만 유족측에서 장군의 묘가 있는 곳이 선산이고 부모님과 함께 모셔져 있어 현충원이나 홍성 생가지로 이전을 안한것 같습니다.
게다가 홍성에 있는 장군의 생가유적지에도 묘소가 없어 별도의 사당을 건립후 홍성군에서 일종의 성역화 작업을 하였으며, 묘소가 있는 보령시에서도 나름대로 성역화 작업을 하여 청산리대첩일인 10월 22일에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는 상황이기에.....
일반인의 입장에서 쉽게 생각하면 한곳에 모아져 있으면 좋지만 유가족들이나 특히 지자체로서는 어느 한쪽이 문화유산이자 관광자원을 양보해야하는 것이라서...게다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해제했다가 다시 지정해야 하는등 행정적으로도 복잡할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 링크한 한건택 내포문화관광진흥원장의 칼럼을 참고하면 좋을듯합니다.
단, 내용중 장군묘 이전연도에는 오기가 있습니다.
http://www.h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974
각설하고 김좌진 장군묘 이력(출처 : 김좌진 장군 묘비석 내용)
- 1930년 1월 22일(29년 음력 12월 25일) 박상실(고려공산당 회원)에 의해 암살된 후 교포들의 사회장후 안치
암살장소는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 신흥촌 금성정미소 부근
- 1940년 9월 일본인들이 장군묘를 훼손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유해 수습후 밀감상자로 위장해 돌아와
출생지인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1934년 이장설도 있음)
- 1957년 음력 1월 15일 오숙근 여사가 돌아가시자 김두한이 선산인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오숙근 여사는 1958년 작고설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정보)
보령 읍성 및 관아문
다시 이동하여 이번에는 이번 답사주제와 연관성이 있는 보령 성곽 및 보령 관아문을 둘러봅니다.
참고로 보령지역의 읍성은 이곳 오천에 자리한 보령읍성과 대천쪽에 있는 남포읍성 두 곳이 남아 있으며,
보령이외의 지역에는 대표적인 읍성이 육군병사가 머무르던 해미읍성을 비롯하여, 안흥성, 면천읍성, 홍주읍성, 결성읍성 등이 잘 남아 있구요~
<사진 5>보령읍성 안내문입니다. 그런데 타이틀이 보령성곽이라고 나옵니다.
안내문의 내용은 보령읍성 설명인데???ㅠ
이렇게 할거면 보령읍성내에 복원된 성곽임을 밝히고 그 규모를 적어주면 이해가 더 쉬울것 같은데...
보령읍성, 보령성곽의 용어통일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진 6> 보령읍성 남문 전경입니다. 우측으로는 송덕비들이 줄지어 서있는게 보이네요.
사진찍는 판중추부사님도 보이고~~~^^
<사진 7>보령 관아문 안내문
<사진 8> 보령읍성의 남문으로 관아의 정문역할을 했으며 현판에는 이산해가 쓴 해월루란 글자가 보입니다.
특이한 것은 성벽이 문루의 폭때문인지 안으로 50cm정도 한번 꺽어들어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진 9> 성벽 앞에 줄지어 선 송덕비들입니다. 두번째것은 귀부와 이수까지 나름대로 흉내를 냈네요.
어설프지만 정성만큼은~~~~~^^
<사진 10>성벽 앞에 튀어 나온 적대입니다. 성벽도 낮으니 적대도 규모가 왜소합니다.
안내문이나 자료에는 높이가 3.5m 정도 였다는데 복원된 부분은 2m가 조금 넘는 정도???
충청수영성 내 영보정
자. 이젠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기에 영보정으로 향합니다.
저 앞에 우뚝한 정자가 보이는게 영보정 같습니다.^^
도로 옆 작은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충청수영성 북문옆을 지나 영보정을 보니 그 규모가 정말 대단합니다.
<사진 11>보령방조제를 기준으로 위는 흙탕물 아래는 푸른물이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어선들이 보이네요.
주위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 몇 컷 찍고 진휼청 쪽으로 내려서니 대여섯분들이 모여 계시는데 느낌이 이배사 분들같아
달밤이라며 먼저 인사를 드리니 방진님부터 뱀발님과 해주오씨님 그리고 충주목사님, 어란포님 등....
아 그리고 사진으로 뵌 경상우수사님등이십니다^^
그사이 이배사의 유명인사(?^^)인 판부사님은 다른 회원분들하고 인증사진찍느라 바쁘시고...ㅋ
<사진 12>진휼청 앞에서 중부지역분들만 모여서 찍었습니다.(좌측 맨끝이 저입니다^^) - 사진 어란포님.
공식 접선장소는 서문 아래 주차장이기에 내려서니
부산에서 출발한 오렌지버스를 타고 막 도착한 이배사의 본진분들이 가득합니다.
주관하시는 남명손서 회장님과 격군님 그리고 금갑도 만호님등...운영진부터 인사드리다보니
보령시에서 나온 해설사님이 자기소개후 영보정에서 앉아 설명을 하겠다고 해서 모두 이동합니다
<사진 13>충청수영성문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문의 홍예를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서문쪽을 복원할 때 조금 더 신경써서 조선시대 건립당시의 석재크기와 비슷한 크기로 자연스럽게 복원을 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곳입니다.
충남역사문화원, 한얼연구원, 백제연구원, 동방연구원 등 여러 발굴조사 전문기관에서 8차에 걸쳐 조사를 하였고 앞으로 2번 정도 더 해서 충청수영성의 발굴조사를 마무리 하면 제대로 된 복원사업을 할 수 있을것 같은데 문제는 예산 ㅠ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령시에서는 2030년까지 충청수영성 성벽 및 문루와 주변 경관을 복원하기 위해 2005년부터 약 380억원을 투입했고, 앞으로 2024년까지 100억원을 더 투입하여 해상공원을 조성하고 판옥선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하네요.
판옥선 복원할 때는 우리 하성군님의 자문을 꼭 받아야 할텐데???^^
<사진 14> 서문 근경 -홍예석 부분만 겨우 남아 있는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사진 15> 서문 확석(문지도리석)
<사진 16> 서문 우측 축성관련 각석 전경
<사진 17>축성관련 각석 세부 사진.
우측부터 두 줄은 연호와 二(三)十七O 十七OO등 월일인듯하고 그 다음은 使胡OO 監官李OOO.....
어쨌든 글자가 판독이 어려운 상태인데 옆이나 아래에 각자를 탁본한것이든 어떤식이든 안내문을
해주면 일반인들에게는 이 성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쌓였는지 도움이 될텐데........아쉽습니다.
서문 바로 위에 있는 진휼청을 지나 약 50여미터를 오르면 아래 사진과 같은 거대한 건물이 나타납니다.
사실 저정도 규모이면 정자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고 누각(樓閣)이란 말이 어울린텐데........
처음부터 저렇게 거대한 규모로 지어놓고 영보정이라고 했을까?
초축은 작은 규모로 세워 정이라 한뒤 풍광 좋은 곳이라 현재의 규모로 확장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발굴조사팀에서도 이 부분을 생각하고 조사를 했을것 같지만 여러가지 궁금증이 많네요.
초축과 관련된 문헌을 좀 더 찾아봐야할듯 하네요. 복원 전문가분들께서 알아서 잘 하셨겠지만서도^^
*참고로 김명래 소장도 1468년 강순이 초축, 1504년 이량이 개축한것으로 2019년 '영보정기'에서 주장하고 있는데 해설사분도 이런 내용을 설명한것 같은데 잘 안들려서???
<사진 18>영보정 전경
2011년 복원정비를 위한 지표조사 - 2013년 12월 착공 - 2015년 11월 완공(약 11억원)
전면 우측으로 축대만 있는 곳은 능허각 기단인데 복원하게 되면 영보정의 풍광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네요.
<사진 19>영보정에서 바라본 오천항 전경
- 좌측 끝부분 저멀리 맨끝에 조금 보이는곳이 안면도 일듯...
<사진 20>정말 아늑한 곳입니다.
저 낚시배들이....조선수군의 배들였다면.....
충청수영이 한창때에는 142척의 배와 8,414명의 수군이 가득하였던 이곳....
저 중에는 거북선도, 판옥선도....그림을 그려보니 장관입니다.
<사진 21>영보정 앞 설명문 그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런데 3층으로 된 거북선의 모습도 보이지만 상상속의 모습과 그림의 모습은 사뭇 다네요^^
충청수영성 바다 맞은편에 있는 건물중 하나는 한산사인듯 합니다.
<사진 22>영보정에 앉아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세상에서 호수·바위·정자·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永保亭)을 으뜸으로 꼽는다"고 했으며, 채팽윤은 "호서의 많은 산과 물중에 영보정이 가장 뛰어나다"고 했을 만큼 경관이 뛰어나 선비들의 극찬을 받아왔던 정자로 알고 있는데....
해설사 선생님은 박은의 시가 영보정을 설명하는데에는 최고인데 외우질 못하신다네요.ㅋ
영보정에 정면에 시판이 걸려있지만 아래와 같이 워낙 길어서리.....^^
격군님께서 만드신 답사자료집에는 장양상의 시와 가상의 영보정 관련 시가 자세히 나오기에
여기에서는 해설사님이 미처 소개 못한 그리고 그렇게 칭찬한 박은의 시만 올려봅니다.
아마 해설사님도 김명래 소장님이 이 시를 극찬하는 최근자료를 보고 소개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후정자(營後亭子) - 박은(朴誾, 1479~1504)
첫째 수
地迫未窮千頃海 땅이 끝나 드넓은 바다는 다 보지 못하지만
山開猶納一頭潮 산이 열려서 한 가닥 조수를 받아들이는구나
急風吹霧水如鏡 급한 바람이 안개 불어 흩고 물은 거울 같은데
近渚無人禽自謠 가까운 물가에 사람 없고 새만 스스로 노래한다
客裏每爲淸境惱 객지에서 매양 맑은 경계 위에 고뇌하지만
日邊更覺故園遙 일변에서 다시금 고향이 아득히 멂을 깨닫노라
苦吟不去乏新語 고심해 시 읊느라 안 떠나니 새 시구가 부족해
愁見落暉沈遠霄 석양이 먼 하늘에 잠기는 광경 시름겨워 보노라
둘째 수
晩潮來處暫欹枕 저녁 조수 밀려드는 곳에 잠시 베개에 누웠다
擡眼忽看洲渚生 눈길을 드니 홀연 새로 물가 생긴 게 보이누나
朝暮應誰事呼吸 아침저녁으로 응당 그 누가 호흡하는 것이리
乾坤終亦有虧盈 하늘과 땅도 마침내는 성쇠를 거듭하는 법이지
南人浮海如行馬 남쪽 사람들은 배 타는 게 말 타는 듯하고
澤國逢春更少晴 물나라는 봄을 만나 날이 조금씩 개는구나
日日倚樓渾不下 날마다 누각에 기댄 채 내려오지 않노니
怪聲時聽白鷗鳴 괴이하게 우는 백구 울음을 때때로 듣노라
셋째 수
平生病眼怯遐矚 평소에 눈병을 앓아 멀리 보기도 겁난 터
尋丈之間殊不分 바로 앞에 있는 사물은 전혀 분간치 못한다
鳥過猶憐一點雪 새가 지나가니 한 점의 흰 눈 같아 어여쁘고
山橫但覺萬堆雲 산이 가로놓였으니 만 무더기 구름만 같구나
西邊落日劇相盪 서쪽으로 떨어지는 해는 몹시도 흔들리고
空裏玄花尤自紛 공중에 흩어지는 헛꽃은 매우 어지러워라
隱几茫茫輒成睡 궤안에 기댄 채 망망하여 문득 잠이 드니
琅然鐵撥只堪聞 낭랑하게 울리는 현악기 소리 들을 만하여라
넷째 수
地如拍拍將飛翼 땅은 새가 날개를 치며 날아오르려는 형국
樓似搖搖不繫篷 누각은 한들한들 매인 데 없는 배 같아라
北望雲山欲何極 북쪽으로 바라보매 운산은 어드메가 그 끝인고
南來襟帶此爲雄 남쪽으로 와 띠처럼 두른 산세 이곳이 제일일세
海氛作霧因成雨 바다 기운은 안개가 되고 이어서 비를 뿌리며
浪勢飜天自起風 물결 형세는 하늘에 닿고 절로 바람을 일으킨다
暝裏如聞鳥相叫 어둑한 중에서 마치 새 우는 소리 들리는 듯
坐間渾覺境俱空 앉았노라니 몸도 경계도 공함을 깨닫겠노라
다섯째 수
憐我朝來獨吟處 어여뻐라 내가 아침에 와 홀로 시 읊던 곳에
一竿初日照簾旌 한 발 높이로 뜬 해가 주렴과 깃발을 비추누나
風颿飽與潮俱上 돛단배는 바람을 가득 받아 조수와 함께 오르고
漁戶渾臨岸欲傾 어촌의 집은 도무지 바닷가에 서서 기우뚱해라
雨後海山皆秀色 비 온 뒤에 해산은 모두 수려한 빛을 띠고
春還禽鳥自和聲 봄이 돌아오자 새들은 절로 소리 화창하구나
客中奇勝猶須句 객지에 절경은 시구를 읊조리게 하지만
平世文章不要名 태평한 세상에서 문장으로 명성을 바라지는 않는다.
출처 : 읍취헌 박은의 「영후정자(營後亭子)」 시제(詩題)와 관련된 영보정 창건내력 검토 논문(저자 김명래 소장)중에서 발췌
문외한인 제가 봐도 시가 좋긴 좋네요.
시평은 전문가인 절이도님이 해주시면 좋을텐데~~~^^
그런데 제목은 수영 뒤에 있는 정자인데 둘째와 네째수에는 누각이 나오니 도통 감이 ㅠㅠㅠ
<사진 23>시원한 바람맞으며 있자니 졸음이 솔솔 올때쯤 설명이 끝나고 영보정을 배경으로 단체사진 찰칵!
- 사진 : 어란포님.
흠차통령절직수병유격장군계공청덕비
영보정을 내려와 뒤편에 있는 북문쪽으로 이동하니 저멀리 오서산 줄기가 보입니다.
오서산은 충남지역에서 억새로 유명한 곳으로 홍성과 보령 그리고 청양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데 예전부터 홍성에서 억새축제를 하는등 활발한 홍보 활동을 했는데 요새는 보령시에서도 홍보를 하는것 같더군요.
어쨌든 오서산에서 보령 성주산 줄기를 넘어서면 충남 내륙으로 들어서고 반대로 보면 서해안 바닷가로 들어선다고 생각하는 되는 산줄기입니다.
다음 탐방지는 유격장군 계공청덕비입니다.
<사진 24>보령 유격장군 계공청덕비 전면인데 400여년의 세월이 무상하게 깨끗합니다. -사진 : 어란포님
<사진 25>계공청덕비에서는 격군님이 메운 우물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현지 해설사님께서 이 유물은 잘 모르는것 같아서 마이크를 잡으셨다는군요.ㅋ
역시 전문가는 다르십니다^^
그런데 저는 대리석으로 잘 만들어진 청덕비보다 비석 위 풀밭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개석(비석의 윗지붕돌)과
그 옆에 있는 문기둥을 올려놓는 큼지막한 장초석 두 개가 더 눈에 들어오더군요.
장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커다란 문이 있었다는건데 전체 충청수영성벽의 구조상으로 볼때 여기에 성문이 있을수는 없고 아마 제자리를 잃은 장초석 두 개와 개석을 한곳에다가 모아놓은것 같습니다.
<사진 26>아쉽지만 시간관계상 충청수영성은 이 정도에서 마치고 점심식사를 위해
오천항에 위치한 우리 식당으로 이동합니다. 점심은 회덮밥과 매운탕였는데 회덮밥은 정말 맛있더라구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진님께서 출간한 귀한 책에 참석자 모든분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적어 필자사인까지 해서 준비를 해주셨는데 송현마을님께서 이배사를 대표하여 먼저 받고 인증샷을 찍고 계십니다.
- 사진 : 어란포님.
<사진 27>방진님의 책과 저자 사인
방진님의 미소가 특히 아름다운 이 책은 이번 8월 8일에 나온 따끈따끈한 2쇄본이더군요.
앞으로 찾는 사람이 더 많아져 10쇄 이상 나갔으면 합니다.ㅋ
참고로 저는 초판본과 2쇄본을 다 가지고 있는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방진님 귀한 책에 직접 사인까지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많이 홍보하겠습니다^^
<사진 28>점심식사후 오천을 떠나 남쪽 선유도로 이동합니다.
고군산진(선유도)
저는 차를 가져왔기에 동행했던 판부사님은 버스로 옮겨타고
나홀로 운전을 하며 부산에서 올라온 오렌지 버스의 갈매기 뒤를 따라 갔죠.
점심식사전 일심님의 짧은 특강이 임팩트 있었는데 버스에서 선유도 선행학습을 할 것을 생각하니 아쉬움이 들지만 버스에 제 차를 메달고 갈수는 없기에~~~^^
사진속 다리는 고군산대교로 선유도를 대표하는 다리입니다.
해설사분도 얘기했던 바로 그 세계에서 최초이자 최장인 외팔(일주一柱?) 다리라고 자랑이 대단했었죠.
<사진 29>무녀도를 지나 선유도에 도착합니다. 참 오래간만입니다. 거의 15년만인듯????^^
<사진 30>버스는 한쪽에 자가용은 주차장에 세운 뒤 도로 건너편에서 저 멀리 두개의 암봉으로 우뚝 솟은 망주봉을 바라보며 해설사 선생님이 설명을 해주십니다.
<사진 31>설명 들을때 핸드폰이 알아서 저절로 찍은건데 사진이 절묘해서 올려봅니다.^^
맨 앞은 해주오씨님, 가운데 잘 나오신분은 당포님^^ 그 다음 절반만 나온분은 동자갑선님 같고 마지막 오른쪽 분은 어란포님 같네요.ㅋㅋㅋ
<사진 32>고군산진터가 있는 주차장쪽에서 설명이 끝난후 망주봉쪽으로 걸어서 이동합니다.
군산권역의 둘레길 이름이 바로 노란색 리본에 나오는데로 구불길입니다.
사진속 나무가 끝나는곳에 우물자리가 있다고하는데 시간관계상 우물터와 오룡묘는 패스합니다.
아울러 망주봉의 두 암봉 사이에 고려시대때의 행궁지가 있었다고 하네요.
이곳에 대해서는 요룡묘를 부안의 죽막동 같은 제사유적지로 추정하고 2015년도에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를 했는데 긴단석렬과 청자편, 백자편, 기와편등이 수습되었더군요.
그리고 사진속 오른쪽 끝쪽에는 고려시대때 수군진터가 있었구요. 그러다가 맨처음 들렸던 반대편으로 조선시대에는 진터를 옮겼구.....
<사진 33>아이스크름을 하나씩 입에 물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로 앞 세분중 가운데 핸드폰 통화하시는 분이 남명손서 회장님이십니다. 아마 버스를 이쪽으로 오라고 전화하시는것 같기도 하고???^^
이 자리를 빌어 이번 답사 무탈하게 진행해주신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사진 34>어란포님이십니다. 마지막 단체사진을 찍어주고 계시는데 포즈가 ㅋㅋㅋ
역시 찍사는 포즈도 남다른가봅니다. 많은 사진들 찍느라 고생하셨고 감사드립니다. 제 사진도...^^
<사진 35>선유도의 서쪽 해변입니다. 가운데 우뚝 솟은게 스카이라인 전망대이자 출발지입니다.
그 뒤에 있는 바위모양 산도 신시도쪽과 마찬가지로 미인이 누워있는 모양이라는데 사진속에서는 미인같지는 않고 사람같기는 합니단 사진상 우측으로 100여미터 가서 찍으면 아름다운 미인의 모습으로 보인다네요.ㅋ
고군산절제사 유허비군
<사진 36>고군산절제사 유허비군 전경입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잡풀이 무성한게 전혀 관리가 안되고 있네요.
다른곳과는 달리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안내판을 세워놓을 정도면 최소한 잡풀이라도 깍아주면 좋을텐데 ㅠㅠㅠ
하긴 조상묘 벌초도 성묘전에만 하는 세상인데 지정문화재도 아닌것을 누가 자주 관리하겠습니까....
그래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진 37>군산진 절제사비 안내문과 대표비석 세부 사진
<사진 38>선유도를 나와 무녀도 앞 빨간다리를 건너 다같이 모여 헤어짐의 인사를 돌아가며 일일이 합니다.
직장에서 시무식과 종무식 할때처럼~~~~^^ 색다르고 참 좋았습니다.
하여튼간 남명손서회장님과 삼도수군통제사 원임회장님과 금갑도만호 총무님 등등... 운영진분들 너무 애쓰셨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저녁용 충무김밥과 거금 교통비가 든 봉투까지 받아 쥐고 판중추부사님과 저는 군산에서 또다른 답사를 시작합니다.ㅋㅋㅋ
시간될때 한 곳이라도 더 보고 싶어하는 제 마음과 똑같은 아니 저보다 더 많은 판부사님을 모시고 움직이다보니 거칠게 없네요^^
군산 지역 추가 답사
<사진 39>군산 시간여행의 거리로 가기전 도로옆에 군산 해망굴이란 근대유적이 보이길래 가보았습니다.
<사진 40>해망굴 전경 사진.
이 굴은 대략 100여미터 정도의 터널로 시내에서 항구쪽으로 빙돌아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일제가 뚫은 터널로 이쪽이 군산항구쪽이고 반대편이 중앙로입니다.
왼쪽 벽에는 6.25 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도 보이는데 설명문을 보니 6.25 전쟁중에는 북한군 지휘본부가 사용했었다네요.
군산 시내 중심가에 있는 시간여행안내센터 주차장에 차를 세운뒤 어디로 갈까하고 코스도를 보는데 판부사님이 대번에 진포대첩비와 최호장군 유적지를 고릅니다.
와우!!! 역시 이순신 장군 매니아인 판부사님을 따라갈수가 없습니다.ㅋㅋㅋ
사실 저는 진포대첩도 최호장군도 처음 듣는거였는데 ㅠㅠㅠ
나이는 어리지만 대단한 판부사님 덕분에 두곳을 다가보려했는데 시간관계상 안될 것 같아 군산의 대표공원인 월명공원에서 호수주변 산책로를 걸으며 바람쐬고 곧바로 최호장군 유적지로 달려갑니다.
<사진 41>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최호 장군 유지에 도착합니다.
참고로 최호 장군은 격군님께서 만드신 답사자료집 12페이지에 보면 충청수사 최호 장군이 잠깐 나옵니다^^
아주 잠깐~~~ㅋㅋㅋ
<사진 42>사진상 좌측 맨앞 기와지붕은 화장실, 그 뒤 기와지붕은 최호장군전시관이며 외삼문과 내삼을 거쳐 좌측 맨 뒤에 있는 맞배식 기와지붕 건물이 사당이며 가운데 높은 2단의 축대 위에 최호 장군의 묘소가 보입니다. 한마디로 정갈하게 정비가 잘 되어 있더군요.
<사진 43>외삼문에 해당하는 충의문을 지나면
<사진 44>충의사란 현판이 보이는 이 건물이 바로 충청수사 최호장군을 모신 사당인데 문이 닫혀 있네요.ㅠ
<사진 45>최호장군 유지 안내문인데 충청수사를 지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참고로 최근에 세운 사진 <사진 41번>의 군산 스탬프 투어 안내문에는 충청도수군절도사라고 명시했네요^^
<사진 46>사당 오른쪽으로는 최호장군과 장군의 부인인 정부인 광산김씨 묘소가 같이 모셔져 있습니다.
<사진 47>충청수사를 지낸분인데 묘비도 단촐하고 조선중기인데 무인석도 없고....
전체적으로 청빈한 느낌의 묘소였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문중의 분위기가 검박한 듯합니다.
<사진 48>묘소에서 바라본 앞 모습입니다. 앞이 탁 트인게 순간 현충사에서 바라본 풍경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도차는 당연히 현충사가 더 높지만 이 지역도 바닷가에서 아주 멀지 않으면서도 아늑하니 길지라는 생각이 드는 곳였습니다.
<사진 49>이배사의 희망이자 등불인 판부사님을 마지막으로 한컷 담아봤습니다.
오가는 차안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보니 저는 나이만 많았지 헛살아더군요.ㅋ
역사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열정 특히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뭐 말할필요가 없더라구요^^
판부사님~~~ 역사를 전공하시니 나중에는 이순신 장군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꼭 썼으면 합니다.
대전으로 오늘 길 버스타고 가시던분들이 마이정에서 보았던 그 멋진 노을을 저희도 고속도로에서 봤는데 저는 운전하느라 담지 못하고 판부사님이 담았는데 별도 답사후기때 올리지 않을까 싶네요.
<사진 50>이배사 답사자료집....격군님의 노고로 만들어진것으로 웬만한 소논문 한편에 뒤지지 않을정도로 알차게 만들어졌기에 마지막 사진으로 올려봅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다음 답사를 기대하며 이만~~^^
첫댓글 와우! 슬쩍 보는데도..5분 걸리네요...달밤님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답사의 모범이시네요..ㅎ
정체라ㅋ
아무렴 일심님처럼 강건하게 장군에 대해
연구하는사람이겠습니까^^
일심님의 닉네임처럼 한마음 첫마음 잃지마시고 정진하시길 감히 건방지게 술김에 적어봅니다^^♥♥♥
ㅇㅇ한편의 기행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니 답사하는 현장 같습니다. 👍 👍 👍
감사합니다.
답글달은것처럼 정기룡 장군님을 먼저 알아보지 못한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건승하십쇼~~♥
"월명야" 님의 생생한 현지사진과 설명을 달아주신 "정기답사 후기"는 지방정부에 발행하는 "역사 홍보자료"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박은"께서 너무도 일찍 돌아가셔서(25~26세?) 안타깝습니다
"전란 속의 두 절경" "영보정" 과 "선유도" 와.... 함께하신 "이배사" 가족여러분들~~
제 가슴에 오랫토록 담아 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벌써 그립습니다~~~
이야
절이도님은 사실 식당에서 맥주가져가시는분이 참 대단하다싶었는데 나중에보니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 자기소신이 대단한분이다 싶었는데ㅋ
자수를 하실정도로 내공이 있으신분였더군요^^
말이 길어지는데 월명야를 기억하면서 언급해주신분은 현재까지 딱 두분!!!
감사할따름입니다.
박은선생 요절이라 그러고보니 정말 꽃다운 청춘에 떠나셨지요.
깜작놀라 찾아보니 맞습니다.
그런데 절이도님께 여쭙고 십습니다.
진심으로~
박은이란분의 시가 정말 그렇게뛰어난가요?
정말 궁금합니다!
말이 길었습니디만
다음에 뵈면 먼저 인사드리고
흥을 조금이나마 배우고싶네요^^♥
@달밤(月明夜) (시평은 전문가인 절이도님이 해주시면 좋을텐데~~~^^)
에구야 월명야님~~ 시평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520여년전에 기록된 "박은선생님 한시" 를 감히 제가 어찌 ...ㅠㅠ ㅎㅎㅎ
당시 천재(17세 진사,그이후 승문원,홍문관 등)였던 "읍취헌"님께서 연산군때 정치적 핍박을 받아
부인 신씨께서는 1503년(연산군 9) 25세로 세상을 떠나고,
본인 박은께서는 1504년(연산군 10) 26세로 갑자사화때 사형을 당했다 합니다.
23세때 파직되어 "스스로 세상사람에게 용납되지 못할것을 알고 자연에 묻혀 밤낮으로 술 과 시" 로써 세월을
보낸 시기에 영보정을 다나녀가셨나 봅니다
당시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본관이 "고령"이라 하니
후손님들께서는 참고하십시요~~
저는 슬쩍 보는데도 10분이 넘게 걸립니다.
대단하신 달밤님!
기행문이 아니라.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집니다.
보충설명까지. 책 한 권을 읽는 느낌입니다.
더 많은 것을 알아가네요..
10여분을 봐주셨다는것은
동지애???^^
산사랑 선배님으로서 남다르다 싶었는데 이번답사는 사정상 모든것에 일부러 관여안하시는것으로 느껴졌습니다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포스는 무시할수 없더군요ㅋ
감사합니다^^♥
꼭 다시뵙고싶습니다
똑같은 내용 같이답사한내용 답사기를 요렇게 저렇게 쓴 글을 읽어면서 참 공부를 알뜰히한다 는 생갓을 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역시
노수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말이 실감나네요.
첫답사 후기를 준비하면서 나름대로 공부도 했지만 다른분들의 후기를 보면서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배운다기보다는 이게 참답사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느끼고 좋게 생각하는것이 참답사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버릇없는말이지만 전문가들만의 죽은 역사보다는 일반인들의 살아있는 생생한 역사복원과 관심을 저는 절실히 원하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강호의 고수님들이 다 모였네요.
멋진 답사기 잘 읽었습니다.
고수라???^^
부족한게 많은 신입에 불과합니다.ㅋ
사진 31번이 마음에 드셨길바라며 판부사님이 당포님께서 여러모로 도와주셨단 말씀들었습니다.
멋진 어르신입니다^&♥
꼼꼼한 답사기 잘 읽었습니다.
이곳저곳 함께 답사한 기분이 듭니다.
계금 청덕비는 1748년 충청수사 조동진이 비 보호각을 세웠다고 합니다. 1872년 보령부 고지도에 유격장군청덕비와 내용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각은 1960년대까지 있었다 합니다.
반갑습니다. 열선루님
열선루란 단어는 한산도가의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공부하면서 알게된 누각인데 영보정과 비교했을때 느낌이 어떠셨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각설하고 청덕비의 비각의 제작연대를 언급하신것은 제가 말한 장초석의 용도를 두고 말씀하지않았나 싶은데 잘아시다시피 비각에는 청덕비 옆에 있는 정도의 장초석을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차로 이동하시느라 노고가 크셨군요.
꼼꼼히 답사하시었군요.
다음에 충청수영 갈 적 김좌진 장군과 함께 돌아볼 자료가 생겼습니다.
덕분입니다.
하성군님은 미리 어부인과 함께 다녀오신거로 알고 있는데 김죄진 장군 묘소보다는 홍성쪽으로 돌아 장군님 생가와 매헌 윤봉길 선생이나 예산 수덕사를 돌아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후기에 적은대로 충청수영의 거북선이나 판옥선 복원시 자문해주세요ㅋ♥
@달밤(月明夜) 선유도만 겉핥고 왔습지요.
참고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판옥,거북선은 진해지회에 귀선님,임란기거북선님이 전문가이시니 그분들께 자문을 구하소서.
저는 비전문가이며 문제만 제기하는 하찮은 이입니다..ㅎ
읽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답사 후 정리하고 쓰는데는 훨씬 많은 공을 들이셨겠지요.
정규 답사 뿐 아니라 틈새답사까지 멋진 답사기를 보며 몰랐던 부분을 채워갑니다.
멋진 답사기에 감사드립니다.
이 늦은시간에 댓글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잘아시다시피 답사든 여행이든 출장이든 기록을 남긴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지요.^^
소심한 사람일수록 더더욱ㅋ
그러나 좋든 나쁘든 기록이 없으면 역사가 없기에 귀차니즘을 물리치고 조금신경써서 끄적거렸을 뿐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진해현감님 옆자리 앉지못해 아쉬울따름이며 진정한고수가 되면 후기든 뭐든 모든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진해현감님에게선 그런 득도의 경지가 느껴지더라구요ㅋ
틈새답사란 용어와 접근법은 제가 아니라 판부사님에게서 나온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달밤님 먼길 자차로 수고많으셨네요
멋진답사후기잘보았습니다 가시는길에
판충부사님과 틈새 답사도 하시고 꾁찬 하루 보내셨네요 덕분에 후기글 보면서 저도 답사를 한듯 후기 넘 잘 올려주셔 감사드립니다
하루종일 운전하니 피곤은 하더라구요ㅋ
담날 출근도 했으니^^
부족한게 많습니다.
잘 가르쳐주세요~^^
달밤님^^
제 책의 토씨 하나까지 오자를 잡아주신 분이십니다. 저도 출판사도 놓쳤던 놀랄 정도의 집중력입니다.
저는 그때 알아봤습니다. "와! 진짜가 나타났다!" 2쇄본에서 수정을 했는데 또 어딘가 튀어나올까 걱정입니다.
큰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 우리 이배사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수준급 답사 후기에서도 배우고 또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어이쿠
절대로 그정도 아니구요~
2쇄 인쇄가 초판본보다 전체적으로 흐립니다^^
주석의 참고문헌은 소소한거지만 마침표와 쉼표 사용여부의 통일성이 필요해보입니다^^
권26권 같은것도 있고~
앞부분 조금 봤는데 본문중 오타는 없구요^^
자세한것은 정독후 차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방진님의 유려한 글솜씨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같은 곳을 다녀왔는데 달밤님 글은 이렇게 풍성하시니 부끄럽지만 ㅎㅎ 달밤님 덕분에 더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ㅠ 무늬만 사학도인 병아리에게 가르침 많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달밤님 말씀을 들으니 지리 공부를 해야겠는 생각이 팍팍 들었습니다. 석사는 한참 멀었으니 내년에 있을 교내에서 하는 학술대회를 노려보겠습니다.ㅎ.. 본 답사 후기는..(먼 산을 바라보기
판부사님같은 사학도는 많지않습니다.진심입니다.
그열정이 부러운 하루였습니다.제자신도 돌아볼수있었고^^
지리공부는 지금처럼 답사를 좋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보면 자연스럽게 됩니다.
내년 학술대회 좋은성과를 응원합니다.
단체답사 잘 다녀오시고
다음에 또 뵈요^^
답사후 또 바쁜 일이 생겨 이렇게 늦게 댓글을 올립니다.
인사도 전에 부탁까지하게 되어 송구스러웠는데 뵙고 보니 문자 그대로 강호의 고수시군요!
튼튼히 뿌리내려 우리 이배사의 동량이 되어 주실꺼죠?
저는 확신합니다. 이배사의 전도는 양양하다는 것을요 오래오래 좋은 도반이 되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시한번 그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또다른 일이 생기셨었군요^^
훤칠하고 인자하신 회장님 뵈면서 너무좋았습니다.
~~~
이번답사 준비하시느라 정말 고샹많으셨기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동량은 아니지만 가입인사때도 도반을 말씀하셨었는데 선배님들의 지시과 지혜를 오랫동안 배우겠습니다^^
컴이 장애를 일으켜서 이제야 답글을 남김니다. 달밤님의 답사후기는 모범 중의 으뜸입니다. 평소에도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분이 누구실까 궁금했는데 이번 답사 시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 그 알집 사고 피해를 입으셨군요ㅠ 큰피해없으셨길바랍니다.
으뜸은요. 부족한게 많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지도편달은 제가 받아야합니다. 윤허하여주십시요. 진심입니다. 다음에 뵐때까지 건강잘챙기세요^^
다시한번 격구님 덕에 멋진 답사 잘 다녀왔습니다.ㅋ
세심하게 답사후기 올려주신 덕분에 마치 답사현장에 있는것 같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알맹이가 없는 후기일뿐입니다. 버드나무 줄기로 부러진다리를 묶고 무과시험을 마무리하는 장군님의 강한 정신력을 상징하는 버드나무란 닉이 참 좋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이든 답사든 남는건 사진과 답사기 뿐이라고 합니다.
달밤님의 답사기를 보니 십년이 지나도 2022년 여름의 이배사 정기답사를 잊지 않을것 같습니다.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어이쿠 임란기 거북선님같은 전문가분께서 과찬을 해주시네요.
당연히 그정도는 아닙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와~~~~~대단하신 달밤님~~여기저기 소문났어요~~고수가 나타났다고~~세심한답사후기 천천히 읽고 복습하고 있습니다.
다음답사기가 벌써 기대가 됩니다요.
고수는 절대아니기에
뜬소문입니다ㅋ
그냥 평수라고 봐주시고 알려주세요.^^
답글이 늦어 죄송~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