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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 번역상의 몇 가지 문제점
김 경 래
들어가는 말
한 언어로 된 글의 내용을 다른 언어로 바꿔 옮기는 것을 번역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많은 언어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번역문의 내용이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완벽하게 옮겨주기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낱말들이 갖는 의미의 범위가 언어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ןא(쬰)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 ‘아벨은 양(ןא) 치는 자’라고 하였는데 (창4:2), 사실상 아벨의 가축떼 중에는 ‘양’ 뿐만 아니라 염소도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예로서, 우리말 성경 누가복음 13장 6절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는 문구 때문에 ‘왜 하필이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는 것인지’ 고민하는 성경 학도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여기 나타난 번역상의 문제점을 미리 알았다면 이러한 고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 거의 예외없이 ‘포도원’으로 번역된 헬라어 낱말 αμπελων(암펠론)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히브리어 ם(케렘)에 이르게 되는데, 이 낱말은 어떤 종류의 밭이나 과수원이든 뜻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처럼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낱말이다. 다시말해서 반드시 포도를 심은 ‘포도 과수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위의 두 예에서 보듯이 히브리어의 ןא(쬰)이나 ם(케렘)은 각각 우리말의 ‘양’이나 ‘포도원’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의미를 포함한다. 좀 미숙한 번역자는 히브리어 낱말 ןא(쬰)과 ם(케렘)을 우리말에서 그나마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양’이나 ‘포도원’으로 번역을 하면서 이 낱말들이 여러번 나오자 아예 기계적으로 번역을 하기 때문에 성경 원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오해나 고민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 번역자 자신이 이해하였다고 해서 안이하게 특정 낱말들을 기계적으로만 번역한다면 얼마든지 독자들에게 모호한 번역문을 남길 수도 있다. 특별히 위의 예들처럼 두 언어(원문의 언어와 번역문의 언어)에 있어서 의미의 범위가 아주 판이하게 다를 경우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인류 문화의 전달에 있어서 번역은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하여 왔다. 더욱이 성경 번역이 지구상의 복음화에 가져온 공로는 아무도 무시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성경을 갖지 못한 민족이나 부족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며, 또한 이미 자기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진 이들을 위하여는 계속하여 그 번역문을 검토하고 수정하여 원문에 가까운 의미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신약 성경을 번역함에 있어서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사도행전의 우리말 번역문에 나타난 몇 가지 오류들을 찾아내어, 왜 그러한 오류가 생긴 것인지 항목별로 분석해 봄으로써 신약 성경 번역자들이 범할 수 있는 잘못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헬라어 지식의 결핍
때때로 신약 성경 번역자가 헬라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부주의로 인하여 그릇 번역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류의 오류는 가능한 한 피하여야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한글 번역문에서 이러한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사도행전 14장 1절의 개역 성경은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고 읽고 있다. 여기 ‘함께’라고 번역된 헬라어 문구는 κατα το αυτο(카타 토 아우토)이다. 이 헬라어 문구는 여기서 ‘같은 식으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안디옥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고니온에서도 두 사도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이다. 표준 새번역은 이를 ‘이전과 마찬가지로’라고 옳게 번역하였다.
사도행전 17장 4절. 개역의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를 따르면,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 또는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과 동격을 이루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은’ 무리는 오직 이 두 무리 뿐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따르자면, 표준 새번역대로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서 ‘바울과 실라를 따른’ 무리 중에는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 즉 데살로니가 회당의 유대인들도 있는 셈이 된다 (17:1 참조). 개역은 아마도 헬라어 και.......τε.......τε 구문의 용법을 이해하지 못하여 오류를 범한 것 같다.
사도행전 21장 16절. 이 구절의 헬라어 구문은, 분사 αγοντες(‘데리고 가다’)와 간접 목적어 Μνασωνι τινι(‘나손이라는 사람에게’) 사이에 ‘나손’을 수식하는 관계 대명사절 παρ’ ᾧ ξενισθωμεν(‘우리가 그의 집에 묵게 될’)이 삽입되어 있어서 약간 까다롭게 보이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개역에서는 3격(간접 목적어)의 Μνασωνι τινι를 4격(직접 목적어)으로 잘못 번역하여,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는 터무니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여기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자면, “우리가 그의 집에 묵게 될, 구브로 (출신)의 한 오랜 제자 나손이라는 사람에게로 데려다 주었다”가 된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 구절이 올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 지식의 결핍
신약 성경이 비록 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사실이지만,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많이 인용 내지는 암시하고 있고, 게다가 신약을 기록한 사람들이나 그 안에 나오는 인물들이 거의 히브리 언어권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신약 성경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히브리 언어적 요소는 신약을 이해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모르거나 또는 무시한채 헬라어 지식만으로 신약 성경 번역에 임할 경우, 이러한 점에서 오류를 범하거나 모호한 번역문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다음의 예들을 보기로 하자.
사도행전 2장 3절의 γλωσσαι ωσει πυρος(‘혀들이 불처럼’)이라는 헬라어 문구는 ‘불꽃’(flame)을 뜻하는 히브리어 표현 שׁא ןושׁל(레숀 에쉬; 사5:24)를 연상케 한다. 이 히브리어 표현을 직역하면 ‘불의 혀’라는 말이 된다. 나는 사도행전 2장 3절과 4절에 일종의 언어 유희가 있다고 본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갈라진 혀들’이 아니라, ‘불의 혀들’, 곧 ‘여러 갈래로 갈라진 불꽃’이였다 (3절). 누가는 이 현상에 대한 묘사를 받아서, 4절에서 “그들이 다른 ‘혀들’(곧,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혀’가 ‘말(=언어)’을 뜻하는데 쓰이기도 하는 것은 히브리어서나 헬라어에서나 (심지어는 영어를 비롯한 여러 유럽 언어에서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볼 때, “그리고 그들에게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라는 표준 새번역보다는, 약간 모호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개역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가 더 낫다고 본다.
사도행전 20장 28절. 이 절을 가지고 한때 한국 교계에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폐일언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한 개역은 오역이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한 표준 새번역이 적합하다. 개역의 오류는 헬라어 지식의 결핍(헬라어 문구 του ιδιου에 대한 오해)을 그 원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 του ιδιου의 히브리어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오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나오는 헬라어 ιδιος는 ‘유일한’을 뜻하는 히브리어 דיחי(야히드)와 동일한 개념을 담고 있다 (예: 창22:2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가리켜 ךדיחי ‘너의 독자’라고 하셨다). 실제로 ιδιος의 독립적 (명사) 용법은 사도행전 안에서만도 여기 말고 몇 차례 더 나온다 (4:23; 21:6; 24:23).
이스라엘 역사 및 문화 이해의 결핍
오늘날 미국에서 현대어로 된 한글판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한다고 가정해보자. 기본적으로 역자는 영어와 한글을 잘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이조 시대의 역사 및 문화적 상황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는 일급 번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을 번역하고자 하는 이는 성경의 언어 뿐만 아니라, 성경의 밑바닥에 깔린 지리, 역사, 문화, 풍습 등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밑바닥 지식의 결핍 때문에 때때로 성경 번역자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사도행전 5장 21절.주후 1세기 유대인들의 종교적 중심 기구였던 산헤드린(공회)은 현직 및 전직 대제사장, 우두머리 장로들, 명가문의 주요 인사, 율법 학자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헬라어로는 συνεδριον(쉰에드리온: 여기서 ‘산헤드린’이 나왔다) 또는 γερουσια(게루시아)라고 불리웠다. 사도들을 심문하고자 소집되었던 것은 ‘συνεδριον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γερουσια’가 아니라, ‘συνεδριον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γερουσια’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헬라어 και는 보통 ‘그리고’라는 뜻이지만, 때때로 이 경우에서처럼, 동격 관계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개역과 표준 새번역 모두 잘못 번역되었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개역의 행5:21). 필자는 “공회 곧,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회를 다 모으고”라는 번역을 제안하는 바이다. 여기서, 언어적으로만 보더라도, γερουσια는 단수 여성 명사로서, ‘원로들’ 모다는 ‘원로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사도행전 21장 26절. 이 구절에서는 결례(성결 예식)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장로들의 충고를 따라 성결 예식을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 성결 기간이 차서 제물을 바치게 될 날을 보고한다. 개역은 마치 성결 기간이 만기된 것인양 잘못 번역하였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것을 고하니라”). 그러나 이 날은 성결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다. 그리고 바울이 보고한 내용은 앞으로 언제 그 기간이 끝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기간은 21:27에서 밝힌대로 7일이다.
개역에 나타난 오역은 나실인의 제도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연유했다고 보여진다. 나실인의 성결 예식에 대하여는 민수기 6:1-21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표준 새번역은 비록 여기서 바울이 보고한 날자를 ‘정결 기한이 차는 날짜’로 제대로 보긴 하였지만, “정결 기한이 차는 날짜와 각 사람을 위해서 예물을 바칠 날자를 신고하였다”라고 두 문구를 연결함으로써 좀 미흡한 점을 보인다. 필자는 “정결 기한이 차서 각 사람을 위해서 예물을 바쳐야 하는 날짜를 신고하였다”라는 번역을 제안한다.
전체 문맥 이해의 결핍
글마다 흐름이 있다. 글 안에 흐르는 맥을 가리켜 문맥이라고 한다. 어떠한 글이든간에 그 내용을 십분 이해하려면 문맥을 파악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문맥은 글 안에 있는 어휘의 최종적인 의미를 결정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동일한 낱말이나 표현이 어떠한 문맥 속에 들어 있느냐에 따라서 뜻이 달라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모든 글에 있어서 이처럼 중요한 문맥을 번역자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는 이미 번역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번역자는 한 문장 또는 한 문단 등으로 구성되는 짧은 문맥 뿐 아니라, 늘 글의 전체 문맥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이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정 분량을 번역한 후에 수시로 그 내용을 글의 전체 문맥에 비추어 검토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래에 전체 문맥을 소홀히 한데서 온 오류 두 가지 예를 제시하고자 한다.
사도행전 10장 23절. 베드로를 따라 가이사랴 고넬료에게로 간 인원은 개역의 행10:23에 의하면 “욥바 두어 형제”이다. 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갔다”고 보고한다 (행11:12). ‘두어’라는 우리말은 ‘둘 가량’을 뜻하므로, 개역 성경에 의하면 사도행전 10장 23절과 11장 12절 사이에 모순이 생긴다. 그러나 헬라어로 이를 읽을 경우 아무런 문제가 없다. τινες(티네스)는 “몇몇”이라는 뜻이다. 우리 개역에서처럼 반드시 ‘두어’라고 할 필요도 없거니와, 오히려 전체 문맥을 통해 볼 때 그래서는 안된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욥바에 있는 신도 몇 사람도 그와 함께 갔다”라고 적절하게 번역하고 있다.
사도행전 21장 27절. 바울의 성결 예식에 관한 부분(사도행전 21-24장에 걸쳐 언급됨)에 있어서, 앞서 설명한 대로 (21:26) 이스라엘의 역사 및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거니와, 더 나아가서는 글의 전체 흐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까닭에 (여기에 덧붙여 헬라어에 대한 이해 결핍도 있다) 개역과 표준 새번역을 비롯한 거의 모든 역본들이 사도행전 21장 27절을 잘못 번역하고 있다. 필자는 사도행전 21-24장의 전체 흐름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고, 또한 사도행전 21장 27절에 나오는 문제의 헬라어 구문 Ως δε εμελλον αι επτα ημεραι συντελεισθαι의 용법을 언어학적 측면에서 고찰함으로써 행21:27의 정확한 이해 및 번역을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 한글의 몇가지 역본들을 살펴보자: (개역) “그 이레가 거의 차매”; (표준 새번역) “이레가 거의 끝날 무렵”; (공동 번역) “이레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 (새번역) “그 이레가 거의 끝날 무렵”; (표준 성경) “그 이레가 다 되어 갈 때에”. 이상의 번역들은 모두 그 의미상 일치하며, 동시에 모두 잘못되었다.
그럼 행21-24장에 나타난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행21-24장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붙잡히고, 가이사랴에 보내져 두 해 동안 감금된 일을 기록하고 있다. 행21-24장을 통하여 우리는 시간을 보여주는 구절들을 여러번 발견할 수 있는데, 이제 그러한 문구들의 도움을 통하여 시간의 진행을 추적해보기로 하자.
행21:15-17 (제1일): 바울은 마침내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은 바울 일행을 기쁘게 맞이한다. 편의상 이 날을 제1일로 잡도록 하자.
행21:18-25 (제2일): ‘그 이튿날’ (21:18) 바울은 야고보를 비롯 교회 장로들을 만난다. 선교 보고가 있은 후 장로들의 충고가 따른다. 할례파 유대인들을 생각하여 율법에 따른 몇 가지 의식을 그들에게 보여주라는 충고였다.
행21:26 (제3일): 바울은 장로들의 충고를 따라 성결 예식을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 성결 기간이 차서 제물을 바치게 될 날을 보고한다. 이 날은 성결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다. 그리고 바울이 보고한 내용은 앞으로 언제 그 기간이 끝나는가 하는 것이다. 그 기간은 21:27대로 이레이다.
행21:27-22:29 (문제일): 이부분은 바울이 잡히는 날에 대한 기록이다. 21:27은 이 글에서 문제삼고 있는 구절이므로 편의상 이날을 ‘문제일’이라고 하자. 이 문제일에 대하여는 마지막 24장까지의 검토가 끝난 후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행22:30-23:11 (문제일+1일): 잡힌 다음 날에 바울은 공히 앞에 서게 된다 (22:30).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격려하신다 (23:11).
행23:12-31 (문제일+2일): 이 날 (23:12) 40여명의 유대인이 바울을 죽이기로 공모한다. 이 음모는 바울의 조카를 통하여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에게 알려진다. 천부장은 병력을 동원하여 그날 밤에 바울을 가이사랴의 벨릭스 총독에게로 호송한다 (23:23 이하).
행23:32-35 (문제일+3일): 다음날 바울은 총독 벨릭스에게 이관된다. 벨릭스는 바울을 헤롯 관저에 가둔다.
행24:1-23 (문제일+8일): 24:1의 ‘닷새후’는 바울이 가이사랴의 총독에게로 이관되어 헤롯 관저에 갇힌지 닷새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날은 문제일+8일이 된다.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과 몇몇 장로들이 변사 하나를 데리고 가이사랴로 내려와 바울을 고소함으로써 재판이 열린다. 이날 바울은 변명을 하는중에 ‘자기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지는 열 이틀도 되지 않는다’(헬라어 동사의 현재 시제에 주의할 것)고 말한다 (24:11). 따라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날을 제1일로 볼 경우에 이 날은 대략 제12일이 된다.
행24:11은 바울이 잡힌 문제일 (21:17)이 언제인가를 밝혀주는 중요한 열쇠이다. 우선 바울이 성결 예식을 한 날부터 문제일까지의 기간을 (문제일을 포함하여) ‘문제 기간’이라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셈문제를 만들 수 있다: 2일+문제기간+8일=12일. 여기서 ‘2일’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성결 예식을 하기 전날까지의 기간이다. 이 셈을 풀면 문제 기간은 결국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문제일, 곧 바울이 잡힌 날은 성결 예식을 행한 그 다음날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 행21:26-27로 다시 돌아가서 서원과 성결 예식에 관하여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민수기 6장에는 나실인의 서원, 곧 특별한 서원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나실인은 서원하고 나서 구별하는 날 기간 동안에는 머리를 깎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나실인이 부정하게 될 경우에 그는 성결 예식을 행하고 제7일에 머리를 밀고 제8일에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 행21:27에서 말하는 ‘이레’는 바로 이기간을 가리킨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성결 예식을 행한지 하룻만에 유대인에게 붙잡힌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문제는 문제의 구문 Ως δε εμελλον αι επτα ημεραι συντελεισθαι을 살펴보는 일이다.
이 구문에 나타난 동사 συντελεω는 행21:27 외에 막13:4; 눅4:2,13; 롬9:28; 히8:8에도 나타난다. 눅4:2,13; 롬9:28에서는 ‘마치다’, ‘이루다’의 뜻으로 쓰였고, 히8:8에서는 ‘(언약을) 세우다’의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막13:4에는 행21:27과 거의 같은 구문이 나타나 있다: οταν μελλη ταυτα συντελεισθαι παντα. 이 구절에 대한 우리 역본들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개역)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표준 새번역) “이런 일들이 다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공동 번역) “그런 일이 다 이루어질 무렵에는”; (새번역) “이런 일이 다 이루어지려고 할 때”; (표준 성경)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행21:27에 대한 역본이 모두 거의 일치하는 반면에 막13:4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두 동사 μελλω와 συντελεω의 결합이 번역상 어려움을 초래했다고 본다. μελλω는 보통 다른 동사의 부정형과 결합하여 ‘...하려고 하다’의 뜻으로 쓰이거나 또는 단순히 되따르는 동사를 미래형으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συντελεω는 이제 살펴본대로 흔히 ‘마치다’, ‘이루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들 두 동사가 결합된 헬라어 구문을 우리말로 옮길 때에 후자를 강조한다면 그릇된 번역이 되기 쉽다. 어디까지나 주동사는 μελλω이다. 막13:4는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려 할 때’ 또는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라고 번역함이 적합하다. 이 경우는 미래를 가리킨다. 그러나 행21:27의 경우 동사 μελλω는 미완료형 시제로 쓰였다. 이 시제 때문에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모든 역본들이 잘못 번역했을 것이다. 우선 ‘거의’나 ‘다’라는 단어를 더한 것은, 원문에는 사실상 나타나지 않는데,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친데서 온 결과이다. 행21:27의 문제의 구문을 직역한다면 ‘그 이레가 이루어지려고 하였을 때’ 또는 ‘그 이레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을 때’가 된다. 문제의 구문에 대하여 필자는 ‘이레가 차갈 무렵에...’라는 번역을 제안한다. 이렇게 번역할 경우, 앞에서 살펴본대로 이 날이 이레 중 둘째 날이라고 해도 문제될 바가 없다.
나가는 말
이제까지 필자는 어찌보면 ‘하찮은 얘기들’만 늘어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래, 당신 말이 모두 옳다고 하자. 그것 때문에 무엇이 달라진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필자로서는 성경의 작은 부분이라도 정성스럽게 다루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이상의 고찰을 해본 것이다.
성경이 과연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에 비록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라도 주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필자는 이상의 고찰이 앞으로 우리말 성경을 원문에 가깝게 다듬어 나갈 ‘하나님의 종들’에게 귀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신약 속의 구약: 마태 복음 (1)
“그 말씀” 1995년 11월호 원고. 김 경 래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신약 성경 속에는 구약 성경을 인용 내지 암시하고 있는 부분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의 많은 헬라어 표현들이 구약의 히브리어적 표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신약 속의 구약적 요소는 신약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신약은 신약만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경우는 구약과 더불어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실 신약 성경은 그것이 기록되던 시대(주후 제1세기)의 유일한 성경이었던 구약 성경으로 가득차 있다. 때로 신약 성경의 어떤 부분은 구약의 주석서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실제로 히브리서 같은 책은 구약 성경의 주석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적인 목적 이외에도, 신약의 작가들은 자기의 주장을 옹호하거나 또는 예언의 성취를 보이고자 종종 구약 성경을 인용하는 일이 있다. 신약에서 구약의 인용문을 발견할 경우, 구약의 본문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 그리고 혹시 구약의 어느 특정 사본과만 일치하는 것은 아닌지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약에서 구약의 내용을 암시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경우 구약의 해당 본문(들)과 비교하며 신약 성경에서 의도하는 바를 주의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서 요한 계시록의 경우, 구약 성경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예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을 면밀히 조사하며 읽을 경우에 그 안에는 구약 성경을 암시하는 구절들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헬라어 표현이나 어휘 중 구약의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적 표현 내지 어휘를 배경으로 하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어휘나 표현들을 순수한 헬라어 차원에서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이미 구약 히브리어 문학권의 옷을 입은 ‘외국산 헬라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헬라어만의 어원 분석을 통하여 신약 특정 용어의 신학적 또는 성경학적 의미를 찾아내려는 의도는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할 수도 있다.
이번 호부터는 마태 복음 첫 장부터 차례로 신약 속에 나타난 구약적 요소 내지는 배경을 살펴보고 필요한 경우 보충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물론 이런 류의 접근은 대부분의 주석 책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굳이 붓을 든 이유는 그러한 요소들을 문헌학(philology)을 기초로 삼고 성경 사본학의 도움을 얻어 보다 충실하게 심층 분석하고자 함이다. 아울러 우리 한글 번역본(개역과 표준 새번역을 중심으로)에 번역상의 문제점이 발견될 경우, 이도 역시 간단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메시야의 뿌리를 찾아서 (마태1:1)
신약 성경의 첫 책인 마태 복음의 맨 처음에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다. 이처럼 무미건조하게 나열된 이름들은 우리 이방인 독자들에게 ‘지루하다’는 인상을 주는가 하면, 또는 ‘별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예수라는 한 유대인이 과연 메시야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기록이야 말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민족들에게 그러하듯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혈통상의 ‘뿌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의 선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기록한 구약 성경 안에는, 야웨 하나님께서 특별히 정하신 ‘한 분’에 대하여 그들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이 분명히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이 특별하신 분은 여러 명칭을 가지고 있으나, 그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라고 불렀다. 메시야의 혈통상의 뿌리는 구약 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그에 부합하여야만 진정한 메시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마태는 자기 복음서 서두에서부터 예수님의 ‘뿌리’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메시야는 누구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명백하게 약속을 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의 경우 삼하7:13-16; 대상17:11-14; 시편89:3-4; 132:10-12을, 아브라함의 경우 창세기22:18를 참조할 것).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서도 이 약속을 누누히 확인해 주셨다 (이사야11:1-5; 예레미야23:5-6; 30:9; 33:15; 에스겔37:24-28; 호세아3:5).
마태는 여러 이름들을 나열하기에 앞서서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 내지 출생을 다루는 계보’임을 언급하고 있다. ‘족보’ 또는 ‘계보’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비블로스 게네세오스’(Βιβλος γενεσεως)는 창세기5:1에 나오는 ‘세페르 톨도트’(תודלות רפס)라는 히브리어 문구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표현으로 보인다. ‘세페르’는 보통 ‘책’을 뜻하는 단어이며, ‘톨라도트’(תודלות)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총 39회, 모두 연계형(‘톨레도트’, 또는 ‘톨도트’로 발음된다)으로 사용되었다. ‘낳다’라는 뜻의 어근 ‘얄라드’(דלי)에서 파생한 이 명사형 ‘톨라도트’(תודלות)는 보통 ‘출생에 의한 관계’(창세기5:1; 10:1; 11:10, 27; 25:12, 19; 36:1, 9; 민수기3:1; 룻4:18 등등)와, 더 나아가서는 ‘개인이나 가문이나 피조계의 역사’(창세기2:4; 6:9; 37:2)를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창세기 제5장에서 모세가 ‘첫 사람 아담’(로마서5:14에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하였다)의 ‘톨라도트’를 기록함으로써 시작된 메시야의 계보는 마태가 아담의 후손중 택함받은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계보를 ‘마지막 아담’(고전15:45)이신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기록함으로써 그 끝을 맺는다. 이런 점에서 구약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계보들은 메시야를 추적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주(主)와 야웨 (마태1:20)
헬라어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를 그대로 음역하여 사용한 예가 없다. 야웨를 언급하고자 할 경우 사용된 헬라 단어는 ‘퀴리오스’(κυριος)이다. 이는 이미 주전 3세기에 유대인들이 토라(모세 오경)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그대로 발음하는 것을 꺼려하여 아예 ‘주’라는 뜻의 헬라어 ‘퀴리오스’(κυριος)로 번역한 전통이 신약 성경에도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도 종종 ‘주’라고 지칭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평범한 의미의 ‘주’로 지칭한 예가 많이 있기 때문에 때때로 혼동이 있다.
‘퀴리오스’(κυριος)는 신약 성경에 모두 합하여 749회 가량 출현한다. 구약을 인용하거나 암시하는 경우에 등장하는 ‘퀴리오스’는 대부분 야웨를 가리킨다 (예: 마태3:3; 21:42; 마가12:11 등). 하나님의 ‘영, 천사, 손, 이름, 말씀’등을 가리킬 때, 주체로서의 소유격 명사 ‘퀴리오스’ 역시 야웨를 가리킬 때가 많다 (예: 누가1:66 ‘주의 손’; 야고보5:10 ‘주의 이름’). 마태1:20의 ‘주의 천사’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신약 성경의 서신들에서 예수님을 즐겨 ‘주’(=퀴리오스)라고 부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야웨 하나님과 같은 차원에서 예수님을 호칭한 것이다. 한편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주의깊게 읽을 경우 ‘야웨’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특별히 앞으로 약속된 메시야와 관련되어 쓰인 예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예: 이사야2:1-4; 42:1-9; 43:1-21 등). 그리고 모세에게 자신을 ‘야웨’로서 처음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보이도록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다’ (출애굽기 제3장). 그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무리는 외치기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였다 (마태21:9). 이 말씀은 시편118:26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야웨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적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 곧 ‘야웨’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야웨는 간접적으로 메시야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녀’로 번역된 히브리어 ‘알마’ (마태1:23)
마태1:23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는 이사야7:14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거기서 이 말씀은 야웨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악한 왕 아하스에게 주신 징조이다.
우선 ‘부를 것이다’라는 동사의 주체가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들이 덧붙인 모음을 통하여 볼 때) ‘그녀’(여성 3인칭 단수)인데 반하여, 칠십인역에서는 ‘너’(남성 2인칭 단수)로 되어 있으며, 마태 복음에서는 ‘그들’(여기서는 막연한 주체를 뜻하는 비인칭의 3인칭 복수)로 되어 있다.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은 동일한 히브리어 자음 글자들(תארקו)에 어떻게 모음을 다느냐에 따라서 생기는 차이점이므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즉, 맛소라 성경은 이를 ‘웨카라아트’(תא)로, 칠십인역은 ‘웨카라아타’(א������)로 읽은 것이다. 그리고 마태 복음에서는 ‘이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사람의 범위를 넓혀준 셈이다. 이런 식의 인용을 문제 삼을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야웨께서 친히 주신 징조는 아주 독특한 것이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그녀가)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사야7:14). 이사야 제7장의 예언은 먼 훗날에 오실 메시야와 가까운 날에 성취될 일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먼저 이 아이는 가까운 미래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하나의 징조가 될 것이다. 이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아람과 이스라엘 두 나라의 백성은 사로잡혀 가서 그 땅이 버려지게 되고, 그 무렵에 이 아이는 버터와 꿀을 먹게 될 것이다 (이사야7:15-16). 주전 732년에는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하여 다메섹이 무너지고, 주전 723년에는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에 의하여 사마리아가 무너진다.
앗시리아에 의한 아람과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유다 땅의 초토화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8:1-8에서 약간 달리 표현되어 있다. 이사야는 먼저 하나님의 명령대로 많은 사람이 분명히 볼 수 있도록 커다란 서판에 “속히 노략이 임한다. 약탈이 임박하다”라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 여선지자’(틀림없이 이사야의 아내를 가리킬 것이다)와 동침하자 그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 이 아들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속히 노략이 임한다. 약탈이 임박하다”는 이름을 얻는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아빠, 엄마”라고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약탈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8:1-4).
이런 점에서 이사야7:14-16의 예언은 일단 “속히 노략이 임한다. 약탈이 임박하다”라고 불리는 이사야의 아들이 징조가 되어 성취될 것이다. 이사야7:14에서 ‘처녀’로 번역된 히브리어 ‘알마’(המלע)는 구약 성경에 모두 7회 나타나는데 (창세기24:43; 출애굽기2:8; 잠언30:19; 시편68:25; 아가1:3; 6:8; 이사야7:14), ‘처녀’라는 뜻 말고 ‘젊은 여인’을 뜻할 수도 있다. 특별히 이사야7:14에서는 ‘알마’에 정관사가 붙어서 (המלעה) ‘그 처녀’ 또는 ‘그 여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사야8:3의 ‘그 여선지자’는 7:14의 ‘그 여인’을, 그리고 거기 이사야의 아들은 7:14-16의 ‘아들’을 성취시켜 주는 첫 번 째 (그러나 ‘궁극적인 성취’는 아닌)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와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주시는 징조요 예표였다 (이사야8:18).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7:14의 예언을 훨씬 후에 있을 메시야의 처녀 탄생(마태1:22-23)과 연관시켜 주는데 전혀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는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가 훨씬 지난 후 (대략 주전 3-2세기 경, 곧 예수님의 출생 전) 유대인들이 이사야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 그들은 7:14의 ‘알마’를 ‘파르테노스’(παρθενος)로 옮겼다. 문맥을 통하여 이를 ‘처녀’로 이해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하여 처음 이 말씀을 하실 때에도 이를 ‘처녀’로 의도한 바가 다분하기만 하다. 그래야만 이것이 특별한 징조가 될 수 있어서, 불신으로 가득찬 아하스 왕에게도 뚜렷한 증거가 되겠기 때문이다.
아는 것과 동침하는 것 (마태1:25)
때때로 히브리어 표현이 우리 한글 표현과 일치하거나 또는 그 둘 사이에 비슷한 점을 발견할 때 은근한 호기심이 발동함을 금할 수 없다. 히브리어 낱말 중에 ‘야다아’(עדי)라는 동사가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알다’라는 뜻인데, 특별히 남녀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동침하다, 성 관계를 맺다’는 뜻으로 탈바꿈한다. 우리 한글의 ‘알다’에도 ‘겪다’, 또는 ‘관계하거나 관여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비록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히브리어 ‘야다아’의 이런 용법에 어느 정도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야다아’가 ‘동침하다, 성 관계를 맺다’는 뜻으로 사용된 예로는 창세기4:1, 17, 25; 24:16; 38:26; 사사기11:39; 19:22, 25; 삼상1:19; 왕상1:4 등을 들 수 있다. 리브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어느 남자도 그녀를 알지 아니한 처녀”였다 (창세기24:16). 입다가 “그 서원 한대로 딸에게 행하매,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였다 (또는, ‘알지 아니하였다’)” (사사기11:39).
마태1:25(“아들을 낳기까지 그는 그녀를 알지 아니하였다”)의 헬라어 동사 ‘기노스코’(γινωσκω)는 이런 용법의 히브리어 동사 ‘야다아’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용된 개념을 그대로 따라서 사용한 일종의 ‘외국산 헬라어’가 되는 셈이다. 누가1:34에도 ‘기노스코’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기까지 ‘전혀 남자를 알지 못한’, 다시 말해서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는 숫처녀였다 (누가1:34). 그리고 그녀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후에도 그의 남편되는 요셉은 그녀가 아기를 낳기까지 그녀를 ‘알지 아니하였다’ (마태1:25). 다시 말해서 그녀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7:14의 예언대로 순전한 처녀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동방 박사들 (마태2:1-12)
마태2:1, 7, 16(2회)에서 ‘박사’라고 번역된 헬라어 ‘마고스’ (μαγος)는 신약 성경에 모두 6회 쓰였다 (마태복음 2장의 4회 외에 사도행전13:6, 8에 나타남). 사도행전에서는 바예수라고 불리는 거짓 선지자를 가리켜 ‘마고스’ (단수형), 곧 ‘박수 (남자 무당)’라고 하였다. 마태 복음 제2장에서는 모두 복수형 ‘마고이’(μαγοι)로 나타나는데, 이는 사도행전 13장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예수와는 달리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에게 경배하고자 멀리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마태 복음 제2장의 ‘마고이’는 구약을 인용한 것도 아니요, 암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구약 성경의 고대 헬라어 역본들을 통하여 헬라어 ‘마고스’로 번역된 성경 셈어를 찾아보고 그 의미를 구약의 도움을 얻어 추적해보고자 한다. 히브리어(다니엘1:20; 2:2)와 아람어에 (다니엘2:10, 27; 4:4[7]; 5:7, 11, 15) 같이 쓰이는 명사 ‘아샤프’(ףשׁא)는 고대 헬라어 역본들에서 공히 ‘마고스’(μαγος)로 번역되었다. 칠십인역에서는 다니엘2:2; 2:10의 ‘아샤프’를, 테오도티온역에서는 모든 경우(구약에 다니엘서에만 8회 등장)의 ‘아샤프’를 헬라어 ‘마고스’로 번역하였다.
이 단어가 다니엘서에만 (그것도 대부분 이람어로) 나오는 것은 아마도 바벨론에서 빌어온 ‘외래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니엘의 문맥에서 ‘아샤프’는 ‘마술사’, ‘점장이’, ‘지혜자’ 등을 뜻하는 낱말들과 나란히 나타난다. ‘아샤프’ 또는 ‘마고스’가 정확히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바벨론 제국의 왕 주변에 있으면서 왕의 결정과 제반 국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이들은 ‘동방’에서 왔다. 히브리어에서 ‘동방’은 보통 ‘해 뜨는 곳’으로 표현된다. 성경적 세계관에서 볼 때 이스라엘 땅에서 말하는 ‘동방’은 오늘날의 극동 아시아가 아니라, 보통 근동의 동쪽에 위치한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를 가리킨다 (이사야41:2, 25; 43:5; 46:11 참조). 이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북동쪽에 위치한 아람 역시 ‘동방’으로 불렸다 (창세기29:1; 민수기23:7 참조). 참고적으로 이사야24:15(“그러므로 너희가 ‘우림’에서 야웨를 영화롭게 하며...”)의 ‘우림’(‘빛’을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한 단어임) 역시 일반적으로 ‘동방’으로 해석되는데, 아마도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또는 아람 등을 포함하는 이스라엘의 북동쪽 지역을 가리킬 것이다.
이들 동방 박사들이 본 별은 일찍이 동방의 아람에 살던 (민수기23:7) 발람이 이스라엘에 관하여 예언할 때 언급한 바 있는 ‘야곱의 별’(민수기24:17)을 상기시켜 준다. 아마도 이방 세계 안에 발람의 이 예언(“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셋의 자손을 다 멸하리로다”)은 오랫동안 전수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이들 동방 박사들까지도 이 예언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당시에 실제로 나타났던 이 특별한 별은 동방의 박사들에게 ‘유대인의 왕’의 출생을 말해주는 확실한 징조가 되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드린 예물(‘금과 유향과 몰약’)은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가져온 예물(‘향품과 금과 보석,’ 왕상10:1-10)과 비슷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스바의 사람들이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야웨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이사야60:6). 아마도 과거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예물을 증정한 일이 하나의 예표가 되어 장차 이와 비슷한 일이 ‘유대인의 왕’ 메시야에게도 있을 것임을 의도한 것 같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바친 값비싼 예물은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하여 거기서 지내는 동안 아주 유효한 비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베들레헴은 작은가, 작지 아니한가? (마태2:6)
마태2:6에 미가의 한 예언이 인용되어 있다. 미가5:2(히브리어 성경으로는 5:1)에 나오는 이 말씀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또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들 중에 있기에는 작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먼 옛날부터요, 태초부터이다” 칠십인역은 이를 “또 너 에브라다의 집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천천(千千) 중에 있기에는 작다.....(이하 상동)”라고 옮기고 있다. 칠십인역의 ‘유다 천천 중에’는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표현 ‘베알페 예후다’(הדוהי יפלאב)를 약간 달리 번역했고, ‘에브라다’ 앞(헬라어에서는 앞이 됨)에 ‘집’이라는 주석적 요소를 삽입하였을 뿐이지, 맛소라 성경과 동일한 히브리어 저문(底文, Vorlage)을 반영한다. 참고적으로, ‘베알페 예후다’라는 표현은 삼상23:23에 한 번 더 나타난다.
에브라다는 베들레헴 사람들이 속한 족속(집안) 이름이거나 (삼상17:12; 룻1:2 참조), 또는 베들레헴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창세기35:19; 룻기4:11 참조). 아니면, 본래 베들레헴에 사는 족속(집안) 이름으로 시작하였다가 그 족속 이름이 성의 이름과 나란히 쓰였을 수도 있다.
마태 복음에 인용된 내용은 미가서의 본문과 약간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너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통치자들 중에 결코 가장 작지 않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양육할 통치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다.” ‘유다 땅’이 ‘에브라다’ 대신 들어가 있고, ‘족속들’이나 ‘천천’ 대신에 ‘통치자들’이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어근 ‘알렢-라멛-페’(פ-ל-א)는 모음을 달리 읽을 경우 (‘알루프’ ףולא) ‘영도자’ 또는 ‘통치자’의 뜻이 된다. 그리고 미가서의 ‘내게로’와 마태 복음의 ‘내’(소유격)라는 차이점이 있고, 마지막으로 ‘작다’와 ‘결코 가장 작지 않다’는 상반된 차이점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약 성경 기자가 구약을 인용할 경우 반드시 문자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미가의 예언 활동이 있기 약 300년 전, 베들레헴의 목동 출신인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 받음으로써, 그때까지 ‘작은’ 지위의 베들레헴은 (삼상16:4 참조) 역사적으로 중대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이 사건을 상기하면서, 주전 8세기 말엽에 선지자 미가는 “유다 지파 가운데 베들레헴의 지위가 비록 미약하지만, 장차 거기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전하였다. 이제 그 메시야가 미가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시대에, 마태는 “메시야를 배출시킨 성이기에 베들레헴은 결코 작지 아니하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헤롯의 아기 예수 살해 계획 (마태2:13)
헬라어 ‘멜로’(μελλω)는 보통 다른 동사의 부정형과 결합하여 ‘장차~하려고 하다’의 뜻으로 쓰이거나 또는 단순히 되따르는 동사를 미래형으로 만들어준다 (마태3:7; 16:27; 17:12, 22; 20:22; 24:6 참조). 마태2:13의 마지막 문장의 주동사는 ‘멜로’(μελλω)의 3인칭 단수형 ‘멜레이’(μελλει)이고, 이와 연결되는 부정형 동사는 ‘찾다’(to seek)를 뜻하는 ‘제테인’(ζητειν)이다. 그러므로 시제를 정확하게 하여 이 문장을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헤롯이 (곧) 아기를 죽이려고 그를 찾으려 할 것이다 (또는, ‘찾을 것이다’)”가 된다.
우리 한글 개역과 표준 새번역은 다같이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로 번역함으로써, 마치 요셉이 꿈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순간 이전부터 헤롯이 아기 예수 살해 계획을 착수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정도의 뉴앙스 차이야 얼마든지 묵인해 줄 수 있겠으나, 보다 정확한 본문 이해를 위하여 차라리 “죽이려 할 것이니”와 같이 확실히 미래 시제를 보여주는 표현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헤롯이 아기 예수 살해 계획을 착수한 것은 가장 빠를 경우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한 바로 다음날이었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2:20에서 마태는 “아기의 목숨을 찾는 자들이 죽었다”(‘찾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위하여 과거 분사가 아닌 현재 분사 οι ζητουντες가 사용됨)고 정확하게 시제 묘사를 하고 있다. 구문론상 이 문장은 우리 말로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다”로 번역할 수 있다. 헬라어 동사 ‘멜로’(μελλω)와 연관된 번역상의 실수는 이미 지난 10월호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사도행전21:27 참조).
신약 속의 구약: 마태 복음 (2)
“그 말씀” 1995년 12월호 원고. 김 경 래
신약 성경 저자들의 구약 해석 방법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그들은 구약 본문에 나타난 단순한 문자적 의미를 기술하는 접근 방법 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의 해석을 시도하기도 한다. 마태복음 제2장을 통하여 우리는 마태가 구약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독특한 접근 방법을 취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는 구약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문과 메시야 예수님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연결시켜 해석을 내린다. 마태를 비롯하여 유대인인 이들 신약 성경 기자(記者)들의 해석 방법을 이해하려면, 먼저 유대인 랍비들이 (구약) 성경을 해석하던 방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랍비들이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데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양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프샤트’(טשׁפ), ‘레메즈’(זמר), ‘드라쉬’(שׁרד), ‘쏘드’(דוס)가 그것들인데, 중세 때에 유대인들은 이 네 낱말의 첫 글자들을 모아서 ‘낙원’을 뜻하기도 하는 ‘파르데스’(סדרפ)라고 불렀다.
첫째,‘프샤트’(‘단순한’이란 뜻)는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가리키는데, 언어 분석과 역사 배경의 고찰을 통하여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를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레메즈’(‘암시’라는 뜻)는 본문의 특정 단어나 구절 등이 ‘프샤트’에 의하여 드러나지 않는 진리를 암시하고 있는지 고찰하는 것이다. 이 접근 방법은 하나님이 성경 본문을 통하여 성경 기자(記者)들 자신도 모르고 있는 일들까지도 암시하고 있슴을 전제 조건을 함축하고 있다.
세째, ‘드라쉬’ 또는 ‘미드라쉬’(‘탐구’라는 뜻)는 본문에 나타난 문자적 뜻을 따르지 않고, 본문에서 가능한 모든 풍유적 또는 교훈적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과거 유대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구약) 성경의 ‘일반적 연구’ 내지는 ‘해석’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과거 유대인 랍비들이 (구약) 성경 해석한 것을 모아 놓은 책을 가리켜 ‘미드라쉬’라고 부르는 것이다.
넷째, ‘쏘드’(‘비밀’이라는 뜻)는 히브리어 글자들의 수치(數値) 분석, 이상한 철자법, 글자의 위치 이동 등을 통하여 본문 안에 숨겨져 있는 특별한 의미나 또는 무슨 신비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접근 방법은 하나님이 성경의 세미한 부분, 심지어 글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슴을 전제 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아들 (마태2:15)
마태2:15의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구절은 호세아11:1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문구는 호세아서의 문맥에서 ‘바로에게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끌어낸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며, 메시야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하는 바가 없다. 마태가 이러한 구절을 인용하여, 그것을 어린 예수의 이집트 여행과 연관시키는 것은 좀 이상해 보인다. 혹자는 마태가 구약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한 것이라면서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 설명한 바 유대인 랍비들의 네 가지 성경 해석 방법에 여기 마태의 해석을 적용시켜보면, 얼마든지 마태2:15에 나타난 유대인적인 해석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만일 여기서 마태가 호세아의 글을 인용함에 있어서 그 문구의 평범한 의미(‘프샤트’)만을 취하면서 그것을 아기 예수와 연관시켰다면, 그는 만인의 비난을 들어 마땅하다. 여기에 나타난 해석 방법은 결코 ‘프샤트’일 수가 없다. 그렇다고 호세아11:1에 무슨 비밀이나 신비한 의미(‘쏘드’)가 있어서 메시야와 관련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보는 것도 적합치 않다. 또 마태가 은연중 또는 의도적으로 자기가 얘기하고자 하는 메시야를 이스라엘과 관련된 구절 속에까지 끼워넣어 읽은 것(일종의 ‘드라쉬’적 접근)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이 또한 별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여기서 (호세아1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내 아들’이라고 부른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이다”라고 하셨다 (출애굽기4:22).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묘사한 예를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레미야31:9, 20; 말라기1:6; 신명기32:6, 18; 이사야63:16; 64:8 등 참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것은 이스라엘 민족 뿐만이 아니다. 메시야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이사야9:6; 시편2:7; 잠언30:4; 삼하7:14; 시편89:27).
이와 비슷한 예로서, 이스라엘 백성과 메시야가 다 같이 ‘야웨의 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야웨의 종’이라는 표현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경우는 이사야41:8-9; 42:19; 43:10; 44:1-2, 21를 들 수 있고, 메시야를 가리키는데 사용된 경우로는 이사야42:1; 49:3, 6; 52:13; 53:11이 있다. 이처럼 메시야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끔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러 모로 메시야의 표상(表象)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메시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신 것도 (이사야49:3,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의 ‘이스라엘’, 곧 메시야께서 민족 단위로서의 ‘이스라엘’을 구속하는 사명을 받으신 것이다 (이사야49:6; 53:4-6 참조).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또는 ‘야웨의 종’이라고 불린 이스라엘 민족이, 그 이름으로 보나 그 역사로 보나,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는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해주는데 충분한 ‘요소’가 됨을 알 수 있다. 마태는 호세아11:1에서 선지자가 가리키는 바가 ‘메시야’가 아니요 ‘이스라엘 민족’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아주 깊이 관련된 개인적인 ‘이스라엘’로서 (이사야49:3 참조), 그가 이집트에서 온 일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일과도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고 느꼈을 것이다.
마태는 기록하기를, 아기 예수의 이집트 체류는 “야웨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호세아11:1에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가 이해하고 기록한 이상의 메시지를 그에게 주신 셈이 된다. 다시 말해서 장차 있을 예수님의 이집트 체류까지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 안에서 한 가지 표현이나 문구가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 외에 다른 의미까지 암시하고 있는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7:14-17의 예언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겠고, 삼하7:12-16의 예언도 그러하다. 특별히 후자의 경우 같은 메시지 안에 솔로몬과 메시야가 때로는 함께 그리고 때로는 별도로 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이 야웨를 위하여 전 짓기를 원하자 하나님은 다윗을 축복하시면서 그에게 태어날 아들에 관하여 약속하신다. 이 약속은 일차적으로는 솔로몬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메시야를 암시하고 있다.
“.....야웨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7:11-16).
이와 같은 맥락에서 메시야, 곧 ‘야웨의 종’을 통하여 구속받은 모든 성도는 ‘야웨의 종들’이라고 불린다 (이사야54:17). 이들 ‘야웨의 종들’은 이사야51:7의 ‘그 마음에 야웨의 율법이 있는 백성들’, 또는 65:10의 ‘야웨를 찾은 야웨의 백성’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으며, 53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 ‘야웨의 종’이 보게 될 그의 ‘씨’이기도 하다 (53:10-11 참조). 다른 말로, 이들 ‘야웨의 종들’은 ‘야웨의 종’을 대표로 삼는, 구원받은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구속받은 성도의 ‘첫 열매’이시다.
신약 성경에서는 성도 또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고전12:27; 에베소서1:23; 4:12, 16; 골로새서1:18, 24). ‘그리스도의 몸’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 자신(自身)’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자기를 따르는 무리(성도)와 동일시하여 부를 수 있는 것도, 해석상 이 같은 ‘레메즈(암시)’를 적용할 때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라헬의 통곡과 베들레헴 학살 (마태2:18)
예레미야31:15을 인용한 마태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역시 마태2:15과 비슷한 방식의 해석을 취한 예가 된다. 예레미야 제 31장의 전체 문맥을 통하여 헤롯이 베들레헴 유아들을 학살한 사건을 직접적으로 가리킬만한 문구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예레미야 제31장은 그 내용에 있어서 호세아 제11장과 아주 흡사하다. 둘 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이스라엘의 반역과 그에 따른 형벌, 그리고 그 후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 등을 공통 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두 곳 모두 ‘이스라엘’과 ‘에프라임’을 함께 번갈아가며 사용한 점으로 보아 주로 북왕국 이스라엘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31:15에 나오는 묘사는 북왕국 이스라엘 지파들이 (그리고 더 나아가서, 후에 베냐민과 유다 지파마저도) 포로로 끌려갈 때에 무덤 속의 라헬이 자기 후손들을 위하여 심히 슬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헬은 요셉의 생모이므로, 다윗 왕조에 반기를 들고 떨어져 나간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표적 지파인 에프라임에게는 (그리고 남왕국 유다의 베냐민 지파에게도) 직접적인 조상이 된다.
야곱의 가족 일행이 벧엘을 떠나 에브랏, 곧 베들레헴에 거의 도착하였을 때, 야곱의 아내 라헬은 아들(베냐민)을 낳고는 극심한 산고(産苦)로 그만 죽고 만다. 야곱은 라헬을 베들레헴 길에 묻고는 비석도 세워주었다 (창세기35:16-20 참조). 마태는 라헬의 무덤이 베들레헴에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헤롯이 베들레헴과 그 부근의 유아들을 학살한 사건을 예레미야31:15에서 묘사한 바, ‘무덤 속 라헬의 통곡’과 연관을 시킨 것이다.
마태는 ‘레메즈(암시)’라는 접근 방법을 통하여 예레메야의 문구를 인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마태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헤롯의 행동을 통하여 새롭게 성취된 것으로 이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과 모세 (마태2:13-21)
요셉이 어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한 일, 헤롯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를 죽이고자 베들레헴 일대의 유아들을 다 죽인 일, 그리고 헤롯이 죽고 나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일 등은 모두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에게 있었던 일들을 상기시켜 준다. 이들의 경우, 앞서 설명한 두 경우(호세아11:1과 예레미야31:15)와는 달리 직접 인용문을 들어 성취 여부를 밝힌 바는 없으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에게 있었던 일들은 사건 그 자체로서 메시야 또는 그와 관련된 일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마태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기록하는 동안 오래전 자기 선조들의 역사를 회상해 보았을 것이다.
야곱은 기근을 피하여 가나안 땅을 떠나서 요셉이 기다리는 이집트 땅으로 모든 가족을 데리고 찾아왔다. 야곱 일행이 이집트로 내려가기 전 브엘세바에 모여 있을 때, 하나님은 밤에 이상(異像)중에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하나님이다.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이집트로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46:4-5).
마태2:13에 기록된 바,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라는 말씀은 위의 사건을 상기시켜 준다. 야곱이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나 다 같이 꿈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가나안 땅에서의 위험을 피하여 이집트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의 이집트 여행은 모두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 사건 뿐 아니라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 일’ (출애굽기2:11-15) 역시 다소나마 마태2:13에 기록된 일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헤롯은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 했고’, 바로는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았다’. 한편 바로는 이 일 전에도 이스라엘 자손이 번창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에게 고역을 시키다가는 모든 사내 아이를 죽이라고 했었다. 모세는 이런 위협 속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믿음과 용기로 (히브리서11:23 참조) 바로의 죽음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모세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 아이들이 바로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던 것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님도 헤롯에게 마찬가지였다. 이집트의 바로는 이스라엘의 많은 남자 아이들을 죽였지만,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해낼 구원자 모세를 죽이는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헤롯은 베들레헴 일대에서 두 살 아래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였지만, ‘유대인의 왕’을 죽이는 일에는 실패하였다.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렀던 모세는 시내산에서 야웨 하나님을 만난다. “야웨께서는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다’고 하신다” (출애굽기4:19). 모세는 바로가 죽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이집트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기 예수 또한 ‘헤롯이 죽기까지 이집트에 있었는데’ (마태2:14), “헤롯이 죽은 후에 야웨의 사자가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다’고 지시하자, 그 분부대로 ‘이집트를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온다’ (마태2:19-21).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과 모세가 여러 모로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훗날 모세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차 오실 메시야를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라고 소개하면서 이와 같이 충고한다: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히브리서의 기자(記者)도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히브리서3:1-6).
이처럼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나 사건들을 통하여, 그것들이 겉으로 명백히 드러내는 일차적인 의미 외에도, 그것들 안에 담긴 ‘암시적’ 의미까지도 캐내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성경 해석은 특정한 문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적용시키는 방법 말고도, 때때로 다음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일종의 ‘말장난’(wordplay)을 통하여 접근하는 방법도 포함한다.
나사렛 사람 예수 (마태2:23)
마태2:23은 많은 성경 독자들을 당혹케 해온 구절이다. 구약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예언한 문구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사렛’이란 지명조차 구약 성경에는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럼 먼저 마태2:23 본문을 우리 말로 다시 옮겨 보기로 하자.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로 와서 살았다. 이리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 성경으로 가기 전에 먼저 신약 성경 안에서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린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태2:23에서 ‘나사렛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Ναζωραιος(‘나소라이오스’)이다. 이 명칭(Ναζωραιος)은 신약 성경에 모두 13회 (마태2:23; 26:71; 누가18:37; 요한18:5, 7; 19:19; 사도행전2:22; 3:6; 4:10; 6:14; 22:8; 24:5; 26:9. 사본간에 표기상 약간 차이점이 있는 마가10:47; 누가24:19을 포함하면 모두 15회) 나타나는데, 약간 달리 표기된 Ναζαρηνος(‘나사레노스’)와 마찬가지로 항상 예수님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Ναζαρηνος(‘나사레노스’)는 신약 성경에 모두 6회 (마가1:24; 10:47; 14:67; 16:6; 누가4:34; 24:19. 마가10:47; 누가24:19의 경우, 어떤 사본들에는 Ναζωραιος으로 표기됨) 나타난다. 따라서 Ναζωραιος(‘나소라이오스’)와 Ναζαρηνος(‘나사레노스’)의 두 가지 형이 합하여 신약 성경의 19 곳에 출현하는 셈이다.
한편 동네 이름으로서의 ‘나사렛’(Ναζαρεθ과 Ναζαρετ 두 가지 표기법이 나타남)은 신약 성경에 모두 12회 출현한다 (마태2:23; 4:13; 21:11; 마가1:9; 누가1:26; 2:4, 39, 51; 4:16; 요한1:45, 46; 사도행전10:38). 헬라어 Ναζαρεθ이나 Ναζαρετ을 히브리어로 다시 옮길 경우 ת(나쯔랏)이 될 것이다. 마태2:23을 민수기6:1-23의 나실인(רי)과 연관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으나, 예수님이 ‘나실인’으로 지내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오히려 예수님은 ‘음식에 있어서 절제 생활을 한’ 세례자 요한과는 대조적으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들으신 적도 있다 (마태11:16-19).
아마도 마태는 메시야를 가리켜 ‘한 가지’라고 부른 이사야의 예언(“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사야11:1)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란 히브리어 ‘네째르’(ר)를 번역한 것인데, 나사렛의 히브리어 발음 ‘나쯔랏’(ת)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 연관성이 지적된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11:1)에서 ‘네째르’가 메시야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므로, 마태는 이를 약간 변형시켜 ‘나사렛 사람’(히브리어로 ירצנ, ‘노쯔리’ 또는 יתרצנ, ‘나쯔라티’)이라는 칭호를 예수님에게 주며, 이를 헬라어로는 Ναζωραιος(‘나소라이오스’)라고 음역한 것이다. 이상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히브리인의 문학에서 결코 드물지 않은 ‘말장난’이 여기에도 적용된 것이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를 가리켜 말할 때, ‘가지’(‘네째르’, ר) 말고도 이와 비슷한 낱말들(우리 말로는 ‘가지,’ ‘싹,’ ‘순(筍)’ 등으로 번역됨)이 몇 차례 언급된 적이 있다. 히브리어로 ‘호테르’(ר, 이사야11:1), ‘쩨마흐’(ח, 이사야4:2; 예레미야23:5; 33:15; 스가랴3:8; 6:12)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참고 구절들 중에 예레미야23:5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나 야웨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리고 메시야는 이사야53:2에서 ‘연한 줄기’(קוֹיּ, ‘요네크’)와 ‘마른 땅의 뿌리’(שׁ, ‘쇼레쉬’: 여기서는 ‘줄기’로 번역할 수도 있슴)와 비유되기도 하였다.
마태가 다른 곳들과는 달리 2:23에서는 ‘한 선지자’(단수)가 아니라, ‘선지자들(복수)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비단 이사야의 예언(11:1)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내용의 모든 메시야 예언(이사야4:2; 53:2; 예레미야23:5; 33:15; 스가랴3:8; 6:12 등)을 염두에 두고 마태2:23을 기록한 듯 하다.
이러한 예언들 속에 나타나는 언어적 연관성 외에, 실제 역사적 관점을 통해 볼 때도 ‘나사렛 사람’이란 칭호는 ‘고난받고 멸시받는 메시야’(시편22:1-31; 이사야52:13-53:12 참조)에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나사렛이란 동네는 하찮은 촌구석이었음에 틀림없다. 나사렛이란 지명은 구약 성경 외에 외경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친구 빌립으로부터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라고 소개받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한 마디로 나사렛 예수를 무시해버렸다 (요한1:45-46).
구약의 선지자들이 메시야를 ‘고난받고 멸시받는 종’으로 묘사한 바 역시,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이 되심으로써 다소나마 성취된 것으로 마태가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신약 속의 구약: 마태 복음 (3)
“그 말씀” 1996년 1월호 원고. 김 경 래
‘회개’에 관한 간단한 고찰 (마태3:2)
헬라어 신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회개’를 뜻하는 낱말은 동사형 μετανοεω (‘메타노에오’), 명사형 μετανοια (‘메타노이아’)이다. 헬라어에서 이 낱말은 ① ‘뒤늦게 알아내다’, ② ‘마음, 생각, 견해 등을 바꾸다’, ③ ‘후회하다’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낱말은 다분히 구약적 뉘앙스를 함축하여 사용된다.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의 이 낱말의 의미론적 고찰을 위하여 헬라어 차원에서의 어원학적 고찰만으로는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이 되는 구약에서 이 낱말의 상대가 되는 히브리어 낱말을 찾아 그 용례를 분석함이 올바른 방법론이라고 하겠다.
신약 성경의 ‘회개’와 가장 가까운 구약의 낱말은 히브리어 בושׁ(‘슈브’)이다.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의 이 동사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1,059회 나타나는데, 그중 약 51회의 경우 ‘회개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용례들을 분석해볼 경우,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가 ‘회개’의 대상자이며 (예레미야8:5 참조), ‘악한 길을 떠나서’라는 문구 내지 이와 유사한 문구와 더불어 사용된 경우가 많다 (왕하17:13; 대하6:26; 이사야31:6; 예레미야18:11; 25:5; 35:15; 44:5; 에스겔13:22; 14:6; 18:23, 30; 33:9, 11, 12, 14; 스가랴1:4; 욥기36:10 등). 그리고 ‘슈브’와 ‘마음을 다하여’가 결합한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다’라는 문구도 자주 나타나는 편이다 (삼상7:3; 왕상8:48; 왕하23:25; 대하6:38; 요엘2:12).
이상의 용례를 종합하여 볼 때, 구약 성경의 ‘회개’란 하나님을 떠나 악한 길로 행하던 자가 이제까지 가던 길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 정반대 방향인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또는,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단순히 생각만을 바꾸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가 아니다. 어느 새 교인이 교리 학습을 통하여 사상을 무장한다고 하여 그가 회개하였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단순히 악한 길을 떠난다고 해서 온전한 회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아무리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불의한 길을 피한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사람의 생각과 행실의 방향을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로만 맟추어 두는 것이 회개이다.
헬라어의 ‘메타노에오’ (μετανοεω = 전치사 μετα + 명사 νους와 관련된 동사형 νοεω )와는 달리 히브리어 동사 ‘슈브’는 단순히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을 갖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서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슈브’에 대하여도 언급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났던 피조물 인간이 조물주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 역시 인간에게로 ‘돌아오신다’. 다음 구절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돌이키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말라기3:7; 이 외에도 스가랴1:3; 예레미야12:15; 미가7:19 참조).
하늘 나라, 하나님의 나라 (마태3:2)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광야에 울려 퍼지는 세례자 요한의 이 메시지 역시 전혀 새로운 메시지라기 보다는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치고 기록한 말씀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하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세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하기보다는, 이 표현의 구약적 배경만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의 표시로,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다니엘4:23; 마태21:25; 누가15:21; 요한3:27 참조). 이런 점에서 마태 복음의 ‘하늘 나라’는 다른 복음서들의 ‘하나님 나라’와 완전히 일치한다. 마태4:17과 마가1:15, 마태5:3과 누가6:20, 마태11:11과 누가7:28, 마태13:11과 누가8:10, 마태19:14과 마가10:14 등을 비교함으로써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에서 ‘나라’로 번역된 헬라어 βασιλεια(‘바씰레이아’)와 히브리어 תוכלמ(‘말쿠트’)는 다같이 ‘왕’을 뜻하는 남성 명사에서 파생한 여성 명사로서, 본래 ‘왕권(王權), 다스림, 통치’ 등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무슨 시공간 개념보다는, 상태적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표현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상태’, 또는 ‘하나님의 왕권이 (인간 가운데) 확립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는 구약 성경 안에 이미 십분 소개되어 있다. 구약 성경을 전반적으로 훑으면서 설명해나가다 보면 한 권의 책이 나올 것이다. 필자는 대표적으로 다니엘과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이 개념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다니엘서에는 ‘왕권’, 또는 ‘나라’를 뜻하는 낱말들이 성경 다른 책들에 비교해볼 때 상당히 많이 출현한다. 앞서 언급한 תוכלמ(‘말쿠트’)는 16회, 이와 비슷한 뜻의 아람어 낱말 וכלמ(‘말쿠’)는 53회, 또 다른 비슷한 히브리어 낱말 הכולמ(‘멜루카’)는 1회로, 다니엘서에만 모두 합하여 자그마치 70회나 나타난다. 이들은 대부분 이 세상 나라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다음 구절들은, 이 세상 나라들과는 대조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고 있다: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4:3);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로 이르리로다” (4:34); “그는 사시는 하나님 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6:26);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4);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 (7:27).
이사야서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왕권 내지 통치’는 하나님이 장차 이 땅에 보내실 메시야를 통하여 성취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사상은 다니엘7:13-14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야 왕국’이라고도 표현할 수도 있다. 장차 하나님이 만민을 친히 다스리실 것인데 (이사야2:4; 33:22), 그의 왕권은 장차 올 메시야에게 주어질 것이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의 통치 원칙은 ‘공평과 정의’요 (9:7; 11:3-4),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9:7). 이 일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이므로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 하리라” (45:23).
이상 간단히 고찰한 바만을 통해서 보더라도,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가 구약의 예언에 근거를 두고 있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복장과 먹거리 (마태3:4)
세례자 요한은 약대 털로 만든 옷을 몸에 걸치고, 가죽띠로 허리를 둘렀다. 요한의 이러한 복장은 엘리야의 복장을 연상케 한다. 북왕국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의 신하들이 묘사한 엘리야의 모습은 “털이 많은 사람이요,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있는” 사람이었다 (왕하1:8). 아하시야가 신하들의 설명을 듣고 즉시 엘리야임을 알아챈 것으로 보아, 엘리야는 늘상 그런 모습으로 다녔던 것 같다. 한편 엘리야의 겉옷은, 그 재료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엘리사를 후계자로 부를 때 처음으로 등장하여 (왕상19:19), 요단강물을 쳐서 가를 때 사용된다 (왕하2:8). 엘리야가 하늘 위로 들림받으면서 엘리야의 겉옷은 그의 후계자 엘리사가 물려받게 되며, 엘리사는 그 옷으로 엘리야가 행한 동일한 - 요단강물을 가르는 - 이적을 행한다 (왕하2:13-14).
말라기4:5-6의 “야웨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는 예언은 제2성전 시대의 유대인들로 하여금 메시야 강림이 있기 전에 엘리야가 임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그릇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던 바 엘리야는 다름아닌 세례자 요한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태17:10-13). 천사 가브리엘도 이 일을 요한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명백히 말하고 있다: “저가 또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누가1:17).
세례자 요한의 먹거리는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이들 먹거리는 당시 값비싼 별미가 아니요, 유다 광야(유다 광야는 완전한 사막이 아니라 사람이 어느 정도 거주할 수 있는 곳이다)에서 굶어죽지 않고 근근이 구해서 연명할 수 있는 식량 자원이다. 먹을 수 있는 네 가지 종류의 메뚜기에 대하여는 레위기11:21-22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런 역할의 들꿀에 대하여는 이사야 7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7:21-25은 유다의 황폐한 땅에 남은 자들이 버터와 꿀을 가지고 생계 유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버터와 꿀은 비록 땅이 황무하게 되고 밭을 경작할 수 없어서 곡식이나 포도주는 얻을 수 없으나, 그나마 온갖 잡초가 무성하여 소나 양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우유와 야생 채취도 가능한 들꿀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복장과 먹거리가 오늘날 한국인에게는 값비싼 치장품이나 구하기 힘든 건강식으로 보일는지 모르나, 사실상 주후 1세기의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보통 가난한 자들이나 입고 먹는 것들이었다.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 (마태3:9)
유대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아브라함을 ‘우리 아버지’(히브리어로 וניבא, ‘아비누’)라고 즐겨 부른다 (요한8:33-59 참조). 물론 여기 ‘아버지’에는 ‘조상, 선조’의 뜻이 있다 (히브리어로는 ‘아버지’나 ‘조상’이나 다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심지어는 죽어서 음부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부자도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른 것을 보게 된다 (누가16:24, 30).
세례자 요한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 성경을 비롯 히브리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말장난’을 찾아볼 수 있다. 요한의 말을 히브리어로 재구성해 볼 때, וניבא (‘아비누’ = ‘우리 아버지’), םינבא (‘아바님’ = ‘돌들’), םינב (‘바님’ = ‘자손’), 이 세 낱말이 서로 비슷한 글자들을 가지며 유사하게 들리는 것을 보게 된다. 요한은 히브리 언어의 이런 점을 이용하여 ‘말장난’식 표현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한 요한의 말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여 ‘돌들’을 ‘평민’으로 유추해석한다든지, 또는 ‘하나님이 정말로 돌들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일으키신다’고 해석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오히려 요한은 아브라함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 위선적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일종의 ‘말장난’을 통하여 약간 비꼬는 투로 이 말을 내뱉은 것이다.
마귀, 사탄 (마태4:1)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지음받은 후 뱀의 시험을 받았듯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다. 시험하는 자는 예나 지금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꼬투리삼아 시험을 시작한다. 물론 전자가 시험에 실패한데 반하여, 후자는 거뜬히 시험을 이겨낸다.
우리말 성경에 ‘마귀’로 번역된 헬라어 낱말은 διαβολος(‘디아볼로스’)이다. 이 낱말은 히브리어 ןטשׂ(‘사탄’)을 번역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공히 ‘대적하는 자, 중상하는 자’ 등의 뜻을 기초로 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사탄을 뜻하는 διαβολος(‘디아볼로스’)라는 단어는 모두 38회 나온다. 이 외에도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그대로 음역한 Σατανας(‘사타나스’)가 36회, Σαταν(‘사탄’)이 1회 출현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명사형 ןטשׂ(‘사탄’)은 모두 27회 나오는데, 그중 18회 가량은 칠십인역에서 διαβολος(‘디아볼로스’)로 번역하였다. 구약 성경에서 ‘사탄’이 가장 많이 언급된 책은 욥기이다 (모두 14회).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사탄’ 또는 ‘디아볼로스’를 ‘마귀(魔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이왕에 이처럼 번역한 바에야 이 용어를 정확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탄, 곧 마귀는 하나이지 결코 복수가 될 수 없다.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는 이 용어 사용에 있어서 혼돈 상태에 빠진 경향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찬송가 (제388장) 가사에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번역문이 아닐 수 없다. 영어로는 ‘Fight against the devil’로서 분명히 단수형(the devil)으로 나와 있다. 찬송가 제393장의 ‘마귀들의 군사들과 힘써 싸워서’, 제389장의 ‘원수 마귀 모두 쫓겨가기는’, 그리고 제397장의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라는 구절도 다같이, 마치 마귀가 여럿 있는 듯 보이게 오역한 문구들이다. 기도문 중에도 ‘무슨 마귀 물러가고, 무슨 마귀 물러가고....’와 같이 각종 마귀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을 내쫓고자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칼을 들고 무작정 싸우러 나온 어리숙한 자와도 같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헬라어 διαβολος(‘디아볼로스’)와 히브리어 ןטשׂ(‘사탄’)에 대한 번역문으로서, 최선책은 아니지만, 개역의 ‘마귀(魔鬼)’보다는 표준 새번역의 ‘악마(惡魔)’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약 성경에 총 60회 나오는 δαιμονιον(‘다이모니온’ = ‘귀신’)이나 이와 비슷한 뜻의 ‘(악하고 더러운) 영’은 얼마든지 복수로도 사용될 수 있고, 또 실제로 여러 경우에 복수형으로 등장한다. 귀신(鬼神)이나 악하고 더러운 영(靈)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多數)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우리말 찬송가의 문제는 아마도 마귀(魔鬼)와 귀신(鬼神)을 혼동한데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점에 있어서, 적어도 ‘귀(鬼)’자로 인한 혼동을 방지할 수 있는 표준 새번역의 ‘악마’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사탄과 예수님의 공방전 (마태4:3-10)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함에 있어서 한 번 구약 성경을 인용하는데, 하와에게 그랬듯이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킨다. 예수님은 세 번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답하시며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신다. 그러면 여기서 사탄과 예수님의 공방전에 인용된 구약 성경의 구절들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이 떡이 되라고 말해보라’는 사탄의 첫 공세에 예수님은 신명기8:3의 말씀을 들어 응수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이 말씀은 신명기 본문의 문맥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이제까지 지내온 광야 40년 생활의 목적과 의미를 밝히는 내용중의 일부로 나온 것이다. 마태4:2의 (예수께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는 구절은 신명기8:3 상반절의 ‘(40년동안)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라는 구절을 연상케 한다. 역사를 통해볼 때, 이스라엘 자손은 40년을 배우고도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은 40일의 금식 후에도 이 시험에 굴하지 않으셨다.
두 번 째 시험에서 사탄은 시편91:11-12 말씀을 인용한다. 사탄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무모한 행동을, 성경을 인용해가면서 교묘하게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시편 91편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 받는 보호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무모한 행동에 대한 안전을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사탄은 이와 같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특(邪慝)하게 이용하면서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주(=야웨)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이 말씀의 출처는 신명기6:16로 볼 수 있다. 거기(신명기6:16)에 보면,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야웨를 시험하지 말라”고 하였다. 맛사는 ‘므리바’라고도 불리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목이 말라 부르짖으며 모세와 다투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한데서 나온 이름이다 (출애굽기17:1-7).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탄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의도적으로 무모한 행동을 요구한 것이요, 예수님은 이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단호히 책망하신 것이다.
사탄의 세 번 째 시험에 맞서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시면서, 신명기6:13의 말씀을 들어 “주(=야웨)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대답하신다. 일찍이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여 그들을 넘어뜨리는데 성공하였던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무참하게 패하고 만 것이다.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에 맞서서 세 번 모두 신명기의 말씀으로 대답한 사실은 흥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사실상 신명기는 시편, 이사야서 등과 더불어, 신약 성경 기자(記者)들에 의하여 즐겨 인용된 인기있는 책 중의 하나이다. 쿰란에서 발견된 성경 사본들 중에서도 신명기의 조각 사본들이 차지하는 수치상의 비율은 최고치를 보인다. 제2성전 시대를 통하여 신명기는 많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애송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구약) 성경 전부를 샅샅이 다 뒤질 것도 없이, 신명기의 몇몇 구절만으로도 능히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실 수 있었다.
큰 빛을 보게된 땅 (마태4:12-16)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변의 가버나움(히브리어로는 ‘크파르나훔’이라고 하는데, 이는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선지자 나훔의 고향이 아닌가 한다)으로 이주하심으로, 갈릴리 호수 주변의 스불론과 납달리 지방에는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 이사야의 예언(9:1-2)이 성취된 것이다. 이 예언을 이사야서에서의 문맥을 따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야곱의 집으로부터 얼굴을 가리우시는” (이사야8:17) 야웨 하나님은 언젠가는 다시 “그 얼굴을 들어 그 백성에게 비취실 것이다” (민수기6:24-26 참조). 일찌기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 땅은 온갖 외침(外侵)에 시달림을 받아 왔었다. 앞으로는 이 고난의 땅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임할 것이다. 열방의 압제하에 오랜 흑암기를 지난 이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할 것이다 (이사야9:1-5).
이러한 일은 한 아기의 탄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여기 등장하는 “한 아기”의 탄생은 이사야7:14의 예언을 궁극적으로 성취시켜 주는 사건이다. 그에게 주어진 여러가지 이름들은 그가 평범한 아이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야웨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동시에 그의 유일한 대변자가 되시며, 다윗에게 약속된 ‘영원한 통치권’(사무엘하 7장 참조)을 일임받으실 분이다. 그럼 이 아이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소개를 들어보기로 하자.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야웨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9:6-7).
이 아이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는’ 임마누엘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 아이에 대한 다양한 소개로 점철되어 있다. 하나님이 모든 나라들을 멸하시고 마침내 친히 통치하심도 결국은 이 아이를 통하여 이루시는 일임을 이사야는 외치고 있다.
마태는 예수님의 일생과 사역을 기술하면서, 가버나움을 중심으로한 그의 활동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시켜주는 것으로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 특별히 분열 왕국 시대에 - 남쪽의 예루살렘과 유다가 양지였다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음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왕국 안에서도 특별히 북쪽의 갈릴리 지역은 변방에 위치하여 주변 강대국들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안한 날이 드물었다. 예수님은 이들 오랫동안 시달리고 지친 백성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참고적으로 이사야9:1(히브리어 성경으로는 8:23 = 마태4:15) “바다 길”의 “바다”는 지중해가 아닌 갈릴리 호수를 가리키며, 이 길은 지중해변의 대로가 아니라 갈릴리 호수 서쪽으로 통하는 길을 가리킨다. 히브리어에서는 ‘바다’도 ‘호수’도 모두 ‘얌’(םי)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담수인 갈릴리 호수도 히브리어로는 ‘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약 속의 구약: 마태 복음 (4)
“그 말씀” 1996년 2월호 원고. 김 경 래
메시야 도래(到來)와 복 있는 사람 (마태5:3-12)
마태5:1-12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동과 선포는 누가6:20-26과 더불어 구약의 한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켜 준다. 일찍이 모세는 장차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토라(율법)의 모든 말씀을 돌들 위에 기록하고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그 토라의 말씀을 따라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였다 (신명기 27장 참조). 이 명령을 따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에발산과 그리심산 앞에 나누워 세우고 토라에 기록된대로 모든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한다 (여호수아8:30-35). 이스라엘 백성이 새 땅, 곧 가나안 땅에서의 삶을 토라에 나타난 모든 말씀을 따라 축복과 저주를 선포함으로써 시작하였듯이,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끌어들이시는 예수님께서는 친히 ‘산 위에 오르셔서’ (마태5:1) 뭇 사람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산 위에 올라가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되도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마태5:3). 이 말은 헬라어로는 μακαριοι (‘마카리오이’, 형용사 μακαριος의 복수형임)라고 하는데, 히브리어의 ירשׁא (‘아슈레’)를 옮긴 것이 확실하다. 구약 성경에 총 45회 나오는 이 낱말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문장 맨 앞에 나오며, 시적인 표현에 주로 사용된다. 특별히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은, 그 첫머리부터 이 낱말로 시작되는데, 이 낱말을 여러 차례 담고있다 (1:1; 2:12; 32:1, 2; 33:12; 41:1; 65:4; 84:4, 5; 94:12; 106:3; 112:1; 119:1, 2; 127:5; 128:1; 137:8; 144:15; 146:5 등 참조). 시편의 첫 시(詩)에서처럼, 예수님은 마태5:3-12에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시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상은 이사야14:30; 25:1-5, 29:19; 41:17-20; 66:2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편에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보호하시는 야웨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곳곳에 담겨 있다 (시편12:5; 35:10; 40:17; 69:33; 70:5; 72:4, 12-14; 74:21; 82:3-4; 86:1; 109:22; 132:15; 140:12). 마태5:3의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이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염두에 두고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표현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가 아니라, ‘이 세상의 부귀나 영화와는 상관없이 도리어 고난당하며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겸손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난한 자’는 ‘겸손한 자’ (이사야11:4) 또는 ‘하나님의 백성’과 (시편72:2) 대구(對句)를 이루어 나란히 나타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러 오셨다 (이사야61:1 참조). ‘애통하는 자’ 역시 메시야를 통하여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사야62:2-3 참조).
마태5:5의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문구는 시편37:11에서 인용된 것이다. 거기 문맥에 의하면 ‘온유한 자’는 ‘이스라엘중 온유한 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땅’, 곧 ‘이스라엘 땅’을 차지할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땅’ (γη, ‘게’)이라는 표현은 대략 18 곳에서 제1차적인 뜻으로서 ‘이스라엘 땅’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들중 두 곳에서는 아예 ‘이스라엘 땅’이라고 명시하였으며 (마태2:20, 21), 네 곳에서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마태5:5 / 시편37:11; 마태24:30과 계시록1:7 / 스가랴12:10, 14; 에베소6:3 / 신명기5:17). 나머지 경우들은 누가4:25; 야고보5:17, 18; 히브리11:9; 계시록20:9 등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창세기1:28) 첫 사람 아담이 본래 거주하던 땅은 최적의 생활 환경을 가진 에덴 동산이었다 (창세기2:8).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에덴 동산에서 쫒겨나서, 저주받은 땅을 경작하며 살아야 했다 (창세기3:17-19, 23). 동생을 죽인 가인은 아예 ‘땅에서 피하여 방랑하는 자’로 전락하게 된다 (창세기4:10-16). 노아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 말고 다른 모든 인류를 ‘땅 위에서 살 자격’이 없는 것으로 보고 홍수로써 그들을 모두 쓸어버리신다. 365일간 방주에 피신했던 노아와 그의 가족은 마침내 ‘땅’에 다시 발을 디디고 살게 된다. 노아 가족 여덟 명 만이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후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별도로 지정하시고, 이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소유지로 약속하신다 (창세기12:1, 7; 13:14-17; 17:8 등).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키고자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 다윗 등을 보내신다.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을 거스림으로 이 땅에서 쫒겨나는 쓰라린 경험을 맛본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 가운데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땅을 차지함은 곧 이스라엘 민족의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전 700년 경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중 오직 ‘남은 자’만이 ‘이 땅’을 차지할 것임을 여러 차례 시사한 바 있다 (1:19, 25-27; 4:2-6; 6:13; 11:11-16; 35:1-10; 43:1-7; 49:5-26; 51:11; 56:8 등). ‘이스라엘중 남은 자’라는 개념은 ‘이스라엘중 온유한 자’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이사야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볼 때, 이스라엘중 ‘남은 자’를 그들 조상의 ‘옛 땅’으로 회복시키는 원동력은 ‘야웨의 종’, 곧 메시야 예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다.
마태5:6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르게 될 것’이라는 문구는 다분히 이사야55:1-5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사야44:3도 참조). 야웨 하나님은 값없이 베푸는 은혜를 내놓고 만인을 초청하신다. 누구든지 자기의 결핍을 깨닫고 구하는 자는 거저 받을 것이다. 그가 세우고자 하시는 ‘영원한 언약’은 ‘다윗에게 베푼 확실한 은혜’ (이 표현에 대하여는 시편89:49; 대하6:42을 참조할 것)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윗’은 메시야의 표상(表象)이 되는 예전의 ‘이스라엘 왕 다윗’을 추억하는 표현인 동시에 ‘그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레미야30:9; 에스겔34:24; 호세아3:5; 이사야11:1, 10; 삼하7:12-16 참조) 메시야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는 ‘만민의 증거’요, ‘만민을 다스리시고 명령하시는 지도자’로 세우심을 받았다. 그로 인하여 일찍이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던 이방 사람들이 시온의 영광을 보고는 찾아와 야웨의 은혜를 받아누리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에 연합할 것이다.
위의 구절들 (구약 성경의 사상을 반영하는 마태5:3-5)과 마찬가지로 마태5:6에 반영된 이사야55:1-5 역시 메시야의 도래(到來)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따라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며 사람들을 초청하신 것이다 (요한7:37-39). 성령께서도 ‘교회’와 더불어 동일한 초청장을 발하신다 (계시록22:17). 그리고 이사야55:1-5에 나오는 하나님의 초청은 마태22:1-14의 비유를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마태5:8의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문구는 어느 정도 시편24:3-6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야웨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시편 24편 역시 메시야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詩)이다.
마태5:3-12이 반영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메시야의 도래(到來)와 연관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태5:3-12의 말씀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메시야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제 메시야가 오셨다. 과거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약속과 위로의 말씀이 이제 직접 메시야를 통하여 선포된 것이다. 마태5:3-12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구절절이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외친 ‘메시야 도래’를 당장의 현실 속에서 보고 깨닫기를 촉구하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땅의 소금, 세상의 빛 (마태5:13-16)
예수께서는 소금이 내는 ‘짠 맛’의 가치를 가지고,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땅의 소금’ (το αλας της γης, ‘토 할라스 테스 게스’)이라는 표현 가운데 ‘땅’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땅’을 뜻하기도 하고 지구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 일차적 의미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천국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그 땅의 소금’이 되어 맛을 낸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언급하셨을 것이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라는 말씀은 구약 성경에서 직접 인용된 것은 아니지만, 소금을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에 있어서 소금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위기2:13). 에스겔43:24에는 번제물 위에 소금을 치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민수기18:19에는 ‘소금 언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하나님이 제사장 아론 자손에게 주시는 영원한 응식(應食)에 대한 변함없는 약속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다윗과 그 자손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주신 것도 ‘소금 언약’이라고 불리웠다 (대하13:5). 엘리사 선지자는 소금을 가지고 여리고의 물 근원을 고치기도 하였다 (왕하2:19-22).
“세상의 빛”(το φως του κοσμου, ‘토 포스 투 코스무’)과 유사한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의 예언에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이방의 빛’ (םיוג רוא, ‘오르 고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사야42:6; 49:6). 메시야가 ‘이방의 빛’인 것처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당연히 그 빛을 받아 전해주기 위하여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야웨 하나님이 시온을 향하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야웨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사야60:1), 예수께서도 친히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마태5:·16).
토라의 일점일획 (마태5:17-20)
히브리어의 ‘토라’(הרות)는 본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주전 3-2세기 사이에 걸쳐서 완성된 히브리어 구약 성경의 헬라어 역본 ‘칠십인역’에서는 ‘토라’를 ‘노모스’(νομος)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노모스’는 보통 ‘법(法)’ 내지는 ‘규범’을 뜻한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에게 삶의 지침이 되므로 얼마든지 이처럼 번역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세 오경만 헬라어로 번역된 시기가 주전 3세기 경인 점을 감안해볼 때, 늦어도 헬라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주전 4-1세기를 가리킴) 부터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이미 ‘토라’를 일종의 ‘종교법의 총체(總體)’로서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헬라어 낱말은 신약 성경 안으로 들어왔으며, 다시 (이 헬라어의 영향으로) 번역을 거쳐 기독교 세계에서 ‘the Law’, ‘율법’ 등과 같이 헬라어 ‘노모스’와 맥을 같이하는 낱말들로 옷입고, 히브리어의 ‘토라’에 대한 대변자의 자리를 굳히었다. 이러한 번역 과정과 더불어 헬라어 ‘노모스’(νομος)와 및 이와 비슷한 의미 영역을 가진 기독교 세계 언어들의 단어들은 ‘토라’ 또는 더 나아가서 ‘구약 성경’ 전반에 대한 이해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해온듯 하다. 불행한 사실은 이러한 영향력이 긍정적인 면에 있지 아니하고, 대체로 부정적인 면에서 작용했다는 점이다.
주후 1세기에 활동하였던 사도 바울은 아마도 유대인과 및 이방인 가운데 이미 편만했던 ‘토라’에 대한 ‘노모스’적 이해를 염두에 두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서신들에서 ‘노모스’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이러한 ‘노모스’적 개념 외에도 예전부터 유대인들은 ‘토라’라는 용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토라’는 1) ‘모세 오경’, 2) ‘구약 성경 전체’, 3) ‘구약 성경에 미슈나, 탈무드 등 유대인의 구전 토라를 포함한 것’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마태5:17에서 ‘토라’, 곧 ‘노모스’는 ‘선지자들’(히브리어로 ‘네비임’이라고 함)과 나란히 등장한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보통 구약 성경을 삼분하여 가리킬 때 사용하는 ‘토라(저자의 이름을 따라 ‘모세’라고도 함), 네비임, 케투빔(대표적으로 ‘시편’이라고도 함)’ 중 대표적으로 앞의 둘만을 언급하신 것이다. 구약에 대한 이러한 명명(命名)은 신약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태7:12; 22:40; 누가16:16, 29, 31; 24:44; 요한1:45; 5:46-47; 6:45; 사도행전10:43; 13:15, 27, 40; 15:15; 24:14; 28:23; 로마서3:21 등 참조).
문맥을 통하여 볼 때, 마태5:18의 ‘노모스’, 곧 ‘토라’는 앞서 17절에서 언급한 구약 성경 전체를 대표하여 거론되었다. 18절의 서두에 나오는 ‘아멘’(개역 성경에 ‘진실로’라고 번역됨)도 이러한 사실을 잘 입증해준다. 여기서 이 낱말은 히브리어의 그것을 헬라어로 그대로 음역하여 표기한 것인데, 히브리어에서 ‘아멘(ןמא)’은 ‘그것은 사실이다, 그대로 되기를!’ 등의 뜻을 가지면서, 일반적으로 앞에서 한 말에 대하여 동의 내지는 확신을 표시할 때 사용된다 (민수기5:22; 신명기27:15-26; 시편41:13; 72:19; 89:52; 106:48; 예레미야11:5; 28:6; 느헤미야5:6, 13; 마태5:26; 6:2, 5, 16; 10:15, 42; 13:17; 18:18; 23:36; 24:34, 47; 26:13; 로마서1:25; 9:5; 11:36 등 참조).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마태5:18 말씀은 바로 앞의 5:17 말씀을 다시 확인하며 강조하시는 말씀이 되는 셈이다.
마태5:18의 ‘일점일획’은 헬라어의 ιωτα εν η μια κεραια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를 번역한 것이다. 이 문구를 직역하면 ‘하나의 이오타 또는 한 획’이 된다. ‘이오타’(ι)는 헬라어 알파벳의 열 번 째 글자로서, 히브리어 알파벳의 열 번 째 글자인 ‘유드(י)’를 대변하는 것이다. 사실상 ‘유드(י)’는 히브리어 알파벳중 가장 작은 글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단지 정방형의 아람어 글자일 때만이 사실이며, 고대 히브리어 알파벳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정방형의 아람어 알파벳에서는 ‘달렡(ד)’과 ‘레쉬(ר)’, ‘베이트(ב)’와 ‘카프(כ)’ 등 사용되는 획의 근소한 차이에 따라서 서로 달라지는 글자들이 존재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주후 1세기에 유대인 중에는 정방형의 아람어 글자체가 이미 고대 히브리어 글자체를 물리치고 히브리어 표기를 위한 문자 언어로서의 자리를 굳게 차지하였슴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해 일대에서 발견된 고대 사본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많은 이들이 구약 성경, 더 나아가서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축자 영감설을 주장하기 위하여 마태5:18의 말씀을 인용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믿고 그것의 완전성을 변호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성경 기록의 문맥에 나타난 본래 의도를 무시하고 무조건 아전인수격인 해석을 추구함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특정한 교리적 주장을 옹호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낱낱이’ (일점일획까지라도) 예수님 자신을 통해 반드시 성취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마태5:17-20의 말씀은 소위 ‘율법과 은혜’의 상호 관계에 대하여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권위 및 성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명시적 또는 암시적으로 기록된 모든 예언을 이루시고자 오셨다. 다시 말해서 그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예언)의 ‘결정체(結晶體)’가 되신다. 마태5:17-20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이미 율법을 다 이루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식의 유추 해석을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노모스’적 개념에 빠진 이들의 과오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5-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을 이제까지 ‘율법’(=노모스)적으로만 좁게 이해하였던 주후 1세기의 유대인들과 더 나아가서는 금세기의 한국 교회에게 ‘토라’ 본래의 뜻을 밝혀주는 귀한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유대인의 욕설과 게헨나 (마태5:22)
마태5:22에 유대인들의 두 가지 욕설(辱說)이 등장한다. ‘라카’(ρακα)와 ‘미련한 놈’(헬라어로 ‘모레’, μωρε)이 바로 그것들이다. 후자는 순수한 헬라어로서 번역 그대로 ‘미련하다’는 뜻을 담은 낱말이요, 전자는 히브리어 내지 아람어를 소리나는대로 헬라어 글자로 표기한 것이다. 히브리어의 ‘레이카’(הקיר)와 아람어의 ‘레이카’(אקיר)는 모두 קיר(‘레이크’)에서 파생한 것들이다. 형용사 קיר (레이크)는 문자적으로 “비어 있는, 텅빈”이라는 뜻인데, 이 용법으로는 사사기7:16 (“빈 항아리”); 창세기37:24; 41:27; 신명기32:47; 느헤미야5:13; 에스겔24:11; 이사야29:8; 왕하4:3; 잠언12:11; 28:19에 등장한다. 두 번째로 이 문자적인 뜻이 연장되어 “빈털털이의, 천대받는, 경시되는, 경박한”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이런 용법은 사사기9:4; 11:3; 대하13:7; 삼하6:20 네 곳에 등장한다.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문헌에는 ‘레이카’(אקיר/הקיר)라는 표현이 곧잘 등장하곤 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한 이방인이 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말하였다; ‘우리 집에 당신을 위하여 아주 좋은 음식을 준비하였다’. 그것이 무어냐고 묻자, 그는 ‘돼지 고기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사람은 말하기를) ‘레이카! 당신하고는 정결한 고기도 함께 먹지 못하겠다.” 아마도 ‘골빈 놈’이라는 우리말의 욕설과 같은 것이 ‘레이카’에 가까운 의미를 전달해주지 않는가 한다.
마태5:22의 우리말 번역 ‘지옥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전의 문구를 문자적으로 재번역하면 ‘불의 게헨나’가 된다. 그리고 ‘게헨나’(γεεννα)란 히브리어의 ‘게 벤 히놈’ (םנה ןב איג)을 줄인 ‘게 히놈’ (םנה איג)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이 히브리어 표현은 ‘히놈의 아들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예루살렘 옛성의 바로 남쪽 옆에 위치한 조그만 골짜기를 가리킨다. 아마도 한때 이 골짜기 땅을 소유했던 사람이 ‘히놈의 아들’이었던 것 같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벤 히놈’ 또는 ‘히놈’ 골짜기는 온갖 우상 숭배, 특히 몰렉 신에게 유아들을 불로 살라 바친 일로 유명하다 (여호수아15:8; 18:16; 느헤미야11:30; 왕하23:10; 대하28:3; 33:6).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상 숭배가 심했던 이곳 히놈 골짜기(또는 ‘도벳’이라고도 함)가 변하여 ‘살육(殺戮)의 골짜기’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예레미야7:29-34; 19:1-15). 이러한 배경들과 한가지로 이사야30:33에서는 도벳을 ‘진멸과 태움의 장소’로 묘사하고 있다: “대저 도벳은 이미 설립되었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즉 야웨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 이러한 구약적 배경은 ‘히놈 골짜기’(게헨나)를 얼마든지 ‘지옥’의 대명사로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준다고 하겠다.
한편 영원한 형벌의 처소에 있는 ‘불’에 관하여는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땅의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붙게 하는도다” (신명기32:22);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이사야33:14);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고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이사야66:24) 등의 구절을 통하여 그 가공(可恐)함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이미 토라에도 나타나 있는 사상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11:44-45); “너희는 거룩하라. 나 야웨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9:2); “너는 네 하나님 야웨 앞에 완전하라” (신명기18:13). 토라를 ‘완전케 하고자’ 오신 주님으로서 (마태5:17), 토라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마태복음 5장 등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코 모세의 토라를 폐기(廢棄)시키고 그것을 대체(代替)하기 위한 교훈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토라와 선지자들’(마태5:17에 대한 위의 설명문 참조)의 대대적 성취가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를 인도하는 장본인으로서, 토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풀어보이시며 본래 토라 속에 깊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파헤쳐주신 것이다. 그의 가르치심이 일반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세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에’ 무리들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태7:28-29).
불행하게도 토라를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 곧 신구약 성경에 대한 피상적인 가르침은 과거 유대인 서기관들이나 토라 학자로부터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생들’ 사이에 널리 퍼져왔슴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필자 또한 그러한 무리중 한 사람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면서, “누구든지 이 계명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태5:19)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깊이 새겨둔다.
신약 속의 구약: 마태 복음 (5)
“그 말씀” 1996년 3월호 원고. 김 경 래
구제에 관하여 (마태6:1-4)
마태6:1은 마태 6장 전체에 대한 머릿말이 아니다. 그것은 마태6:2-4과 더불어 구제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마태6:1의 ‘의’(δικαιοσυνη, ‘디카이오쉬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쯔다카’(הקדצ)는 보통 ‘의’(義)를 뜻한다. 이러한 의미로 ‘의를 행하다’ (הקדצ השׂע, ‘아싸 쯔다카’)라는 표현은 구약에 총 26회나 등장한다. 그러나 주후 1세기를 전후하여 유대인들 사이에 이 표현이 뜻하는 바는 점차로 축소되어 ‘구제 행위’를 뜻하는 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듯하다. 유대교 문헌에서 이 좁은 의미로는 자주 나타나는 편이다. 이는 마치 우리 말에서 ‘적선(積善)’이 얼마든지 구제 행위를 뜻하는데 사용되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구제’라는 의미로서, 1절의 ‘디카이오쉬네’는 다음의 2, 3, 4절에서 다른 비슷한 낱말로 대체된다. ελεημοσυνη(‘엘레에모쉬네’)가 바로 그것이다. 이 낱말은 보통 ‘자비, 긍휼’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구제 행위를 ‘의’ 또는 ‘자비, 긍휼’이라는 미덕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오늘날의 유대교 사상에서도 동일한 맥락을 보인다.
선한 눈과 악한 눈 (마태6:22-23)
마태6:22-23의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순전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 그러나 네 눈이 나쁘면 네 온 몸이 어둡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어떠하겠는가?”라는 말씀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다. 언어마다 숙어(熟語) 내지는 관용어가 있다. 이런 표현들의 요소 하나하나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번역하여 다른 언어로 옮겨놓을 경우 우리는 그 표현 본래의 의미와는 다른 엉뚱한 의미를 얻게 되어 결국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오해까지 할 수 있다.
본문중 ‘눈이 나쁘다’나 ‘눈이 순전하다’는 헬라어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히브리어상의 숙어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표현에서 ‘순전한 눈’ (הבוט ןיע, ‘아인 토바’)은 ‘관대함’을 뜻하고, ‘나쁜 눈’ (הער ןיע, ‘아인 라아’)은 ‘인색함’을 뜻한다.
‘좋은 눈’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의 잠언22:9에서도 ‘관대함’의 의미로 사용된 바 있다: “선한 눈을 가진 자(ןיע בוט, ‘토브 아인’)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이 구절에서 ‘선한 눈을 가진 것’과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나쁜 눈’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의 신명기15:9; 28:54, 56에서도 ‘인색함’의 의미로 사용된 바 있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7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ןיע הער, ‘라아 아인’)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야웨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신명기15:9). 여기서 말하는 ‘악한 눈’이란 율법의 제도를 악이용하여 가난한 이웃 돕기를 거절하는 옹색한 마음을 가리킨다.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에 대하여 그의 눈이 악하여져서 (וניע ערת, ‘테라아 에이노’), 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난케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연고일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그 자녀에 대하여 그녀의 눈이 악하여져서 (הניע ערת, ‘테라아 에이나’)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난케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니라” (신명기28:54-57). 이 구절은 자기 자식을 잡아먹게 되는 극한 상황 속에서는 아무리 유순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가까운 사람과 나누워 먹기는 커녕 혼자 욕심내어 먹으려한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잠언23:6; 28:22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악한 눈’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눈이 악한 자의 (ןיע ער, ‘라아 아인’) 음식을 먹지 말며 그 진선을 탐하지 말지어다” (잠언23:6). “눈이 악한 자는 (ןיע ער, ‘라아 아인’)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잠언28:22).
이상으로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들을 통하여 볼 때, 마태6:22-23의 말씀은 결코 애매모호한 말씀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해석이 맞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보다 넓은 문맥을 살펴보기로 하자. 마태6:19-34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물질적 소유’와 관련된 가르침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다 (19-21절). 물질적 소유에 대하여 인색한 (다른 말로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바로 어두움 가운데 살면서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이요, 관대히 베풀줄 아는 (다른 말로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으로서 하늘에 그 보물을 쌓아두는 것과 같다 (22-23절). ‘온 몸이 밝다’고 하거나 또는 ‘어둡다’고 함은 ‘눈’과 관련된 히브리어 숙어에서만 이런 일종의 말장난이 가능하다.
계속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말씀하시하고 있다 (24절). 물질적 소유에 대하여 ‘나쁜 눈을 가진’ 이, 곧 인색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인 셈이다. 예수께서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 등 육체에 필요한 인간의 모든 물질적 소유는 결코 탐욕이나 염려나 추구의 대상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이 추구의 대상임을 가르치신다 (25-34절). 이러한 흐름을 통해서 보더라도 22-23절의 말씀이 물질적 소유와 관련된 가르침인 것이 분명하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마태6:30)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신약의 기록 가운데는 구약에 대한 주석적인 요소가 많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이들은 모두가 유대인이거나 또는 유대인의 사상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가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의 성경(구약) 해석 방법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 그런 방법들은 그들이 기록한 신약 성경에 반영되어 있다. 이는 신약 성경 저자들 뿐만 아니라 복음서 안에 직접 인용되어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옛부터 유대인 랍비들은 모세 오경을 서로 통일성을 이루는 신성한 단일 문서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특정한 해석 원칙들을 통하여 토라 안에 함축된 보다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해석 원칙들의 목록에 관한 기록은 세 가지로 전해내려오는데, 힐렐의 7 가지 원칙, 랍비 이스마엘의 13 가지 원칙, 랍비 엘리에셀의 32 가지 원칙이 바로 그것들이다. 힐렐이 주전 1세기에 살았던 사람이므로, 이러한 원칙들은 주전 1세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음에 틀림없다.
이들 여러가지 성경 해석 원칙들중 ‘칼바호메르’(רמחו לק)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사소한 것에서 더 중요한 것을 끌어내는’ 해석 방법을 가리킨다. 마태6:30에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해석 방법을 통하여 무리를 가르치셨음을 볼 수 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은 하찮은 식물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그러한 들풀마저도 아름답게 옷입히신다. 그러니 들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우리 인간에 대한 조물주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떠하겠는가?
이런 식의 설명은 여기 말고도 신약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태7:11; 10:25; 12:12; 누가11:13; 12:24, 28; 로마서5:9, 10, 15, 17; 11:12, 24; 고전12:22; 고후3:9, 11; 빌립보2:12; 빌레몬16; 히브리서9:14; 10:29; 12:25 등 참조).
이방인과 유대인과 고난의 종 (마태8:5-17)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과 로마인 백부장 사이에 있었던 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의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고 메시야의 관계를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여도 자기 하인이 낫겠다’는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신 예수께서는 연이어 말씀하시기를,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시었다 (마태8:10-12).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많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버림을 당하는 반면 도리어 이방인 중에서 많은 이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리라는 뜻이다.
주후 1세기에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이 대대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여졌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 역시 이 일을 현실에서 보기까지는 의심과 심지어는 멸시의 늪을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사도행전10-11장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을 또한 염두에 두셨다. 아니, 이스라엘을 택한 그 일 자체가 바로 이스라엘 뿐 아니라 또한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문을 열어두기 위하심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8:17에서도 인용된 바 있는 이사야 53장만 보더라도 잘 나타나 있다. 마태는 예수님의 행적을 통하여 이사야 53장의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중 비록 짧지만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은 ‘룻기’를 통하여도 그 암시하는 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마태8:11)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암시해주는 바가 있다.
신약 성경의 첫 책인 마태복음은 메시야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된다. 마태복음 제1장 예수님의 족보에는 그의 모친 마리아를 제외하고 모두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이들 네 여인중 적어도 셋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다. 밧세바는 헷 사람 우리아를 남편으로 두긴 하였으나, 아버지 이름이 순수한 히브리 이름인 ‘엘리암’인 점을 보아 그녀 자신은 이스라엘 사람이었을 것이다 (삼하11:3 참조). 이들 세 이방 여인은 일찌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선택에서 제외된 이방인이 어떻게 다같이 메시야 안에서 하나가 되는지 암시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첫번째 여인은 다말이다.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는 다말에게서 쌍동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다말은 유다의 아내가 아니라 그의 며느리이다. 유다가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 사람들 중에 살며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취하고 가나안 여자 다말을 며느리로 취한 일,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 악을 행하여 죽임당한 일, 남편을 잃고 후사를 세울 의무가 있던 시동생마저도 잃고 과부로서 기다리며 어서 속히 막내 시동생을 통하여 죽은 남편의 가계를 이으려던 다말의 갈망, 그리고 시아버지 유다의 속셈을 알아채고 편법을 써서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얻어내는 다말의 행동 등은 창세기 38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두번 째 여인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 등장하는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다. 그녀는 자기 집에 들어온 이스라엘 정탐꾼 두 사람을 도와 그들의 목숨을 살려준 댓가로 여리고성이 패망하는 날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행운의 이방 여인이었다. 라합의 행운은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기사를 듣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를 ‘상천 하지에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여호수아2:8-11) 행동한 신앙의 댓가였다. 그녀는 후에 유다 지파의 두령이었던 나손(민수기1:7)의 아들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는다.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는 대제사장 아론의 아내이다 (출애굽기6:23). 이처럼 라합이 혼인한 살몬은 유다 지파중 유력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아마 살몬은 라합의 도움을 받았던 두 정탐꾼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일찌기 나오미의 며느리가 되어 과부가 되었으나, 위에 언급한 살몬의 아들 보아스와 재혼하여 라합의 며느리로 들어온다. 이로써 한 집안의 시어머니 며느리가 고스란히 이방 여인으로 채워지게 된 셈이다. 룻에 대하여는, 구약 성경중 그녀에 대한 기록이 한 권의 독립된 책으로서 할애될 정도로 중대한 의미가 담겨져 있으므로, 상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룻이 속하는 모압 족속은 그들의 조상인 모압에게서 유래되는 명칭이다. 모압은 소돔 고모라가 망한 후 죽음을 모면한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롯 자신의 큰 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창세기19:37). 모압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그들을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을 저주케 하려 하였었다’ (신명기23:4). 에돔 사람이나 애굽 사람의 삼대 후 자손은 야웨의 총회에 허용된 데 반하여 (신명기23:7-8), 모압 사람은 롯과 그의 작은 딸 사이에 태어난 벤암미(창세기19:38)의 후손인 암몬 사람과 더불어 ‘십대뿐 아니라 영원히 야웨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못박음으로써 (신명기23:3), 십대 이후에는 야웨의 총회에 들어오도록 허용될 수 있는 사생자보다도 (신명기23:2) 못한 대접을 받은 셈이다.
룻은 이러한 명령이 떨어진지 불과 네 세대도 지나지 않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물론 룻은 여자였기 때문에 남자 보다는 쉽게 야웨의 총회 곧 이스라엘 백성의 틈에 끼여 들어가기가 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모압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일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여인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기1:16)라는 굳센 다짐과 고백으로 야웨의 총회에 대한 그녀의 집념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시아버지도 남편도 잃고 시동생도 없던 룻이 야웨의 총회에 들어가기를 바란 것은 결코 남자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보아스는 룻의 이러한 집념을 간파하고 “야웨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기2:12)는 말로 그녀를 축복할 뿐 아니라, 후에 친히 그녀를 아내로 취하여 자신의 축복을 현실화시킨다.
옛적에 보아스를 통하여 모압 여인 룻이 진정한 의미에서 야웨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유대인 이방인을 막론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과거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일과 메시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이방 교회를 세우신 일은 결코 서로 대치되는 일은 아니다. 이러한 일은 모든 일을 순서대로 질서있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한 결과이다.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라의 본 자손들’ 곧 유대인들중 대부분이 자기들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옛날 이방 여인으로서 야웨의 총회에 들어와 ‘현숙한 여인’이라고 (룻기3:11), 그리고 ‘외로운 시어머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라는 (룻기4:15) 칭찬을 들었던 룻과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께 신실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본 백성 유대인의 칭찬을 들으며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시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로마서11:11.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이사야 53장 역시 예수께서 마태8:11-12에서 언급하신 바, 메시야를 중심으로 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 문제를 암시해주고 있다. 그러면 이사야 53장 (정확히 구분하자면 52:13-53:12이 한 단원임)중 전반부(52:13-53:6)만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골고다 고난’을 묘사한 시편 22편과 ‘그의 승리와 영광’을 노래한 시편 110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52:13-53:12에 집중적으로 묘사된 ‘고난의 종’은 이사야49:7; 50:4-9에서도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한 특이한 인간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한 몸에 깊은 고난과 고귀한 영광을 공유하게 되는 존재이다.
고난의 종이 이방 가운데 형통할 것이다. 야웨의 종이 비인간적으로 고난받으신 후에 높이 들리시는 것을 보고 열방은 떨며, 열왕은 놀라서 입을 열지 못한다 (이사야52:13-15). 선택받은 유대인에 앞서 이방이 먼저 그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일에 대하여는 이미 이사야49:7; 51:4-5; 52:10 등에도 암시되어 있다. 야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고난의 종을 멸시하고, 그의 장래에 관한 예언도 믿지 않았다. 그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 우리는 도리어 그를 비웃었고, 그를 멸시하여 그에게서 고개마저 돌렸다 (이사야53:1-3).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곧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42:24; 64:1-12 참조). 이런 의미에서 1절은 요한12:37-38; 로마서10:16에 인용되었다. 이방은 예전에 들어본 일도 없는 복음을 듣고 쉽게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나, 이스라엘은 예전부터 들어온 일, 곧 야웨의 종이 누구며, 그의 사역이 무엇인가 하는 점과, 그의 고난과 영광에 대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자신의 불신으로 이방에게 쉽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길을 내어준 이스라엘은 (로마서11:25, 30-31 참조) 장래의 어느 시점에 가서는 결국 자기들이 거부한 바 고난의 종을 만나서 시정받고 그분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스가랴12:10; 로마서11:26 참조). 이때가 바로 이사야 53장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과거에 고난의 종을 멸시한 이스라엘이 이제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야웨께서는 각기 제 길을 따르며 하나님을 거스려온 우리의 죄를 그에게 지우셨다 (이사야53:4-6). 이 부분에서는 야웨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은 ‘야웨의 종’(=‘그’)과, 조상 때문에 야웨의 선택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거스려 ‘그’에게 고난을 지우게 한 또 다른 ‘야웨의 종’, 곧 이스라엘(=‘우리’)이 대조적이다. 6절은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귀양살이)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호세아3:4-5 참조).
오늘날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이사야 53장을 이스라엘 백성과 열방의 관계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선택받은 백성 곧 유대 민족이 열방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의 복음이 이방 세계까지 확장된 이후로 반기독교적 입장을 지키려는 유대인 랍비들이 고집하는 것으로서, 중세 이후 대부분 유대인 랍비들의 사상을 지배하는 해석으로 남아있다. 신약 성경을 필두로 하여 기독교도들이 이사야 53장을 예수님과 연관시켜 해석하는데 대립하여 유대교 랍비들은 이의 메시야적 해석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회당에서 이사야 52:13-53:12을 읽는 것마저 금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고대의 유대인 랍비들은 이 예언을 메시야와 연관시켜 해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탈무드의 한 곳에서는 (T.B. Sanh., 94a)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을 메시야로 이해하는 동시에 그를 히스기야왕과 관련시켰다. 그리고 요나탄의 아람어 탈굼에서는 이 ‘종’의 형통함을 메시야와 연관시키고, 고난받는 종은 이스라엘과 연관시키었다: “보라 나의 종 메시야가 형통하리라” (52:13의 탈굼); “그들(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오심을 고대하는 동안 그들의 양상은 열방 가운데 어두울 것이며, 그들의 영광은 사람들의 영광보다 못하리라” (52:14의 탈굼). 비록 이런 해석들에 미흡한 점이 있긴 하지만, 과거의 랍비들은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야에 관한 메시지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처음부터 이 예언의 의미를 깨달은 것 같지는 않다. 공생애 기간중 예수님은 몇 차례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언급하신 적이 있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 공생애 후반기에 적어도 네 차례에 걸쳐 이 일을 예고하셨다: 1)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마태16:21-28 = 마가8:31-39 = 누가9:22-27); 2) 변화산을 내려오면서 (마태17:12 =마가9:9-13 = <약간 다르게> 누가9:44); 3) 갈릴리에서 (마태17:22-23 = 마가9:30-32); 4)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마태20:17-19 = 마가10:32-34 = 누가18:31-34).
이때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고 당치도 않은 일로 간주하거나 (마태 16장 베드로의 경우) 아니면 심히 근심하면서 실망감을 표시하였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메시야 곧 유대인의 왕을 기대하던 주후 1세기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고난받는 메시야”는 상상밖의 개념이었거나 아니면 받아들이기 거북한 일이었다. 화려한 메시야, 원수를 쫓아내고 온 천하를 호령하는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기대하던 그들로서는 비천하고 고난받는 메시야 개념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그의 제자들은 이 메시지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는 훗날 나이가 들어 쓴 편지 가운데서 (벧전 2:21-25) 이 예언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초대 교회 일곱 집사중의 하나인 빌립 또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을 때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예수님과 연결시켰다. 그 경위를 누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950년전 에티오피아의 한 고관 내시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그곳서 유대인들이 섬기는 야웨 하나님을 경배한 후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민족적인 배경을 통해 볼 때 그가 유대인인지 아니면 이방인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비록 이방의 고관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독실한 신자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사에 이르는 길을 지날 때 마차 안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이때 빌립이라고 불리우는 한 유대인이 그에게 접근한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령으로부터 ‘예루살렘에서 가사에 이르는 길까지 가라’는 지시를 받고 거기에 이른 것이다 (사도행전8:26-29).
에티오피아 내시는 마침 이사야의 예언을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당신 지금 읽고 있는 글을 이해하십니까?” 하고 빌립이 물었다. “가르쳐주는 이가 없는데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하고 내시가 대답하였다. 내시는 친절하게도 빌립을 마차 안에 올라앉으라고 청하였다. 빌립이 보니 내시가 읽고 있던 글은 이사야 53장이었다. 내시는 이 예언의 내용이 선지자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를 가리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빌립은 이 예언의 주인공이 바로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유대인 예수라고 밝히면서,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왕 메시야요,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구세주라고 가르쳐주었다 (사도행전8:30-39).
야웨 하나님은 본래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거의 독점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 곧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우리 이방 교회가 메시야로 믿는 예수를 인정하기는 커녕 그를 배신자로 또는 사깃군으로 간주한다. 왜 선택받은 민족이 그들의 왕 메시야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혹시 유대교의 한 이단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성경적 유대교의 원뿌리를 (원래 전통을) 우리 이방 교회가 이어가고 있는 것인가? 한편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방 교회의 괴수’ 예수에 대하여 고민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불쌍하게도 이방 기독교인들이 거짓 메시야를 추종하고 있다고 한다. 혹자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갈래로 보는 동시에 이방 기독교인들을 이등 유대인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고난의 종’을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위의 물음에 대하여 속시원한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 예수는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의 심장이요 중심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느 누구도 그를 피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와 한바탕 생사간의 대결을 벌여야 한다. 예수, 그는 도전자로 오셨다. 그리고 그의 도전은 그의 고난과 영광을 통하여 선포된다.
지난 2,000년 동안 이방인들은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려왔다. 같은 기간 동안에 대부분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심을 입은 이 ‘고난의 종’을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나는 이사야 53장의 메시지가 오늘날 누구보다도, 옛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받았었던 이들 유대인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그 첫째 이유로는, 고난의 종이 보고 만족히 여길 ‘씨’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으나, 유대인 가운데서도 역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요, 그 둘째 이유로는 이 예언의 내용을 통해볼 때, 이방인의 복종이 있은 후에 유대인의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후에 야웨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나, 곧 그들이 찌른 자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스가랴12:10). 이 예언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서, 장차 유대인들이 그들이 찌른 바 자기들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날이 반드시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신약 속의 구약: 마태 복음 (6)
“그 말씀” 1996년 4월호 원고. 김 경 래
예수님과 죄 용서 (마태9:1-8)
한 중풍 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죄 용서’ 선언은 유대인들에게 큰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나님 한분 외에는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해줄 수 없다’는 그들의 사상 (마가2:7 참조) 때문에 예수님의 이러한 선언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죄 용서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러한 견해는 결코 그릇된 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한 중풍 병자에게 ‘죄 용서’를 선언한 이 사건에 관한 기록은 (마태9:1-8; 마가2:1-12; 누가5:17-26) 예수님에게도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죄 용서’의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기록이다.
그럼 먼저 구약 성경을 통하여 ‘용서’의 개념을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죄 용서’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1. 머릿말
구약 성경에서 ‘용서’의 뜻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낱말들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חלס(‘살랔흐’)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어근 חלס에는 한글의 ‘용서’ 또는 영어의 ‘FORGIVE’와는 달리 깊은 다른 뜻이 함축되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째, 구약 성경의 용서(חלס)는 오직 하나님만이 베푸시는 행위이며, 인간 상호간의 행위가 아니다. 둘째, 구약 성경의 용서는 ‘형벌에 대한 면제’를 수반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용서받은 사람 사이의 화목’이라는 결과를 수반한다. 그럼 이 두 가지 결론에 대한 입증을 위하여 구약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어 어근 חלס의 제용례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2. 어근 חלס에서 파생한 낱말들의 품사별 고찰
히브리어 어근 חלס는 구약 성경에서 동사(ח)로 46회, 형용사(ח)로 1회, 명사(הי)로 3회 등장한다. 동사형으로는 기본형인 카탈형(ח)이 33회, 그리고 수동형인 닠탈형(ח)이 13회 출현한다. 이들 모든 동사형은 예외없이 직접 간접으로 하나님을 그 주체로 하여 사용되었다. 그리고 형용사형과 명사형은 항상 하나님의 속성을 기술할 때 사용되었다.
2.1. 형용사형(ח)과 명사형(הי)
구약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형용사형 ח는 시편 86편 5절에 나타난다.
י־ל ד־ב ח בוֹט י האַ־י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기서 형용사형 ח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할 때 잘 쓰이는 ‘인자’(ד)와 더불어 나란히 하나님의 속성을 기술하는데 사용되었다.
명사형 הי 역시 세 번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문구에 사용되었다.
시130:4 א ן הי ־י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느9:17 דו־ב םאַ־ םוּח ןוּנּ תוֹחי וֹל האַ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단9:9 תוֹח םי וּני יא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히브리어 어근 חלס의 명사형과 형용사형의 용례만 통하여 보더라도 구약의 ‘용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2. 동사 능동형 (ח)
히브리어 어근 חלס의 동사 기본형인 카탈형 ח는 능동의 뜻을 갖는다. 이 능동형 동사는 구약 성경에서 총 33회 나오는데 예외없이 모두가 하나님을 그 주체로 삼고 있다. ח의 주체인 하나님은 1인칭(민14:20; 대하7:14; 렘5:1, 7; 31:34; 33:8; 36:3; 50:20), 2인칭(출34:9; 민14:19; 왕상8:30, 34, 36, 39, 50; 대하6:21, 25, 27, 30, 39; 시25:11; 단9:19; 암7:2; 애3:42), 3인칭(민30:6, 9, 13; 신29:19; 왕하5:18, 18; 24:4; 사55:7; 시103:3)으로 각기 사용되었다.
2.3. 동사 수동형 (ח)
חלס의 닠탈형 ח는 수동의 뜻을 가지며, 구약 성경에서 항상 ‘대속하다’라는 뜻의 동사 ר와 함께 나타난다. 이 수동형은 민수기의 3회(15:25, 26, 28)를 제외하고는 모두 레위기에서 집중적으로 (10회: 4:20, 26, 31, 35; 5:10, 13, 16, 18, 26; 19:22) 사용되었다. 이들의 경우에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이 동사 ח의 동인으로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모두가 제사와 관련되었고 또한 대속받은 (ר) 결과를 가리키므로 결국 용서의 주체는 하나님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서 다룰 것이다.
3. 히브리어 어근 חלס와 관련된 단어들을 토대로 한 의미 분석
히브리어 구약 성경의 특정한 단어를 연구하고자 할 때 자주 쓰이는 방법중의 하나는 그 단어 주변에 나타나면서 연구 대상이 되는 단어와 관련이 있는 낱말들을 함께 분석 연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문 성격상 주변의 관련 단어들은 문제의 낱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제한 내지 규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 히브리어 문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중 하나는 대구법(對句法)이다. 대구법이란 간단히 설명하자면 서로 비교될 수 있는 내용(유사, 대조, 점강 등)을 나란히 병행시켜 문장을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문체는 구약 성경의 운문체에서 자주 접하며, 때때로 산문체에서도 접할 수 있다. 히브리어 문장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특정한 단어의 용법을 그 주변 단어들을 통하여 밝힐 수도 있다. 다음은 이 방법을 통하여 히브리어 어근 חלס의 용법을 고찰해본 것이다.
3.1. 동사 חלס와 동사 רפכ의 병용
위에서 밝힌대로 레위기 4,5장과 민수기 15장 등에서 수동형 동사 ח는 항상 또다른 동사 ר(대속하다, 보상하다)와 함께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13회에 걸쳐 나타나는 이들 두 동사형의 병용은 속죄제(레위기 4장과 민수기 15장) 또는 속건제(레위기 5, 19장)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문장 형식을 기초로 하여 구성되었다:
וֹל ח ן וי ר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이들 용례를 통하여 속죄(רפכ)의 네 가지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속죄(רפכ의 키텔형) 행위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제사장(ן)이다. 13회 모두 예외없이 제사장이 속죄 행위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둘째, 속죄받는 사람은 때로 개인일 수도 있고 (레4:26, 31, 35; 5:10, 13, 16, 18, 26; 19:22; 민15:28) 또는 이스라엘 전체 회중인 경우도 있다 (레4:20; 민15:25, 26).
셋째, 속함을 받아야하는 이유는 개인 또는 회중이 하나님의 금령을 지키지 아니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명시해주는 문구로는 וֹתא (그의 죄로부터 레4:26; 5:10), א־ר וֹתא־ל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레4:35; 5:13; 19:22), ע־ל אוּה ג־ר וֹת ל (그가 부지중에 그릇 범한 허물을 위하여 레5:18) 등인데, 이들 문구는 위 문장 형식에서 항상 ן (제사장) 다음에 끼여 쓰인다.
넷째, 위의 문장 형식 안에 때때로 속죄를 위해 사용되는 제물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레5:16과 19:22에 םאָ לי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그리고 속죄의 결과는 항상 וֹל ח(문자적으로 ‘그를 위하여 사하여질 것이다’)라는 문구로 나타난다. 이 문구의 동사는 수동태형으로서 누가 용서하는지 그 동인이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전체 문맥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 동인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속죄제나 속건제와 관련된 상황에서 חלס는 반드시 속죄 또는 대속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חלס는 대속 내지는 보상(רפכ)이 선행되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문맥에서 히브리어 어근 חלס의 뜻을 한글의 ‘용서’에만 국한시킬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구약의 율법에 이미 죄와 허물에 대한 용서가 단지 뉘우치는 감정과 잘못에 대한 고백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대속물(속죄제나 속건제)을 통하여 온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죄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하겠다.
3.2. 동사 חלס와 전치사 ל의 병용
어근 חלס의 능동형 동사 ח는 전치사 ל를 통하여 용서받는 대상과 내용을 연결해준다. 우선 용서받는 대상으로서는 수동형의 경우처럼 개인이 될 수도 있고 단체가 될 수도 있다. 민30:6, 9, 13; 신29:19; 왕하5:18; 렘5:7에서는 개인을 언급하고 있으며, 렘5:1(예루살렘); 왕상8:50; 대하6:39 (백성); 렘50:20 (하나님이 남긴 자) 등은 집단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용서의 내용 역시 수동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ןוֹ������, תא 등의 낱말들로 표현되어 있다. 민14:19; 렘31:34; 33:9; 시25:11; 103:3에서는 ןוֹ만 언급되었고, 왕상8:34, 36; 대하6:25, 27; 7:14에서는 תא만이, 그리고 렘36:3; 출34:9에서는 ןוֹ과 תא 두 낱말이 함께 나타난다.
3.3. 유사 병행구에 사용된 חלס의 관련어들
히브리어 어근 חלס가 등장하는 모든 예문중에서 다음의 네 구절은 현저한 유사 병행 구문을 보여준다. 이들 유사 병행 구문에 나오는 낱말들 역시 חלס의 이해에 빛을 던져준다.
사55:7 וֹל ה־כּ וּני וּני הה־ל ב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렘33:8 י־וּא ר םוֹ־ל םי
י־וּא ר םיוֹנוֹ לו י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시103:3 יאָ־ל א יוֹ־ל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렘31:34 דוֹע־ר ל םאוּ םוֹ ח י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어 어근 חלס나 또는 이와 유사한 뜻을 가진 단어가 ‘긍휼, 자비’의 뜻을 가지는 어근 םחר과 관련되어 사용된 예는 사55:7 말고도 왕상8:50 (חלס), 시103:12-13 (עשׁפ קיחרה), 미7:19 (תאטח ךילשׁה) 등이 있다. ‘정결케 한다’는 표현 역시 죄의 용서와 관련하여 레16:30; 겔36:25,33; 37:23; 시51:4,9 등에 나타난다. ‘다시는 죄를 기억지 아니한다’라는 표현도 사43:25; 64:8; 시25:7; 32:2; 79:8 등에 나타난다.
위에서 인용한 네 병행문구와 그와 유사한 다른 구절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חלס) 행위는 긍휼히 여기시고 (םחר), 정결하게 하시고 (רהט), 치료하시며 (אפר),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시는 (רכז אל) 복합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모든 요소는 하나님의 한 속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다음 구절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해준다.
민14:19 ל ה ם ןוֹ א־ח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결국 이 구절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사람에게 달려있기보다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속성으로부터 기인함을 보여준다.
4. 칠십인역을 통한 히브리어 어근 חלס의 의미 고찰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주전 3-1세기경에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당대의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 내지 해석의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50회 출현하는 어근 חלס의 용법을 칠십인역에 나타나는 헬라어 번역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의 세 헬라어 낱말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 ιλεως ειναι/γιγνεσθαι (힐레오스 에이나이/기그네스타이) : חלס를 어근으로 하는 히브리어 낱말이 ‘자비 또는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의 이 헬라말로 번역된 것은 모두 17회나 된다 (민14:20; 왕상8:30, 34, 36, 39, 50; 대하6:21, 25, 27, 39; 7:14; 렘5:1, 7; 31:34; 36:3; 50:20; 암7:2). 이 사실은 또 다시 히브리어 חלס의 뜻이 히브리어 낱말 ד(자비, 인자)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잘 증거해준다.
나) αφιειν / αφιεναι (아피에인 / 아피에나이) : 이 헬라말의 원래 뜻은 ‘내버려 두다, 놓아두다’이며, 신약 성경에서 보통 ‘용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어근 חלס의 수동형 동사 전부와 민14:19; 사55:7의 능동형 동사가 (모두 15회) 이 말로 번역되었다.
다) ιλασκεσθαι / ιλαζειν (힐라스케스타이 / 힐라제인) : 첫번째 낱말과 같은 계열인 이 헬라어 낱말의 원뜻은 ‘화목케 되다, (하나님의 기분이) 가라앉다’이다. 히브리어 어근 חלס에 대한 번역으로 모두 7회 나타난다 (왕하5:18, 18; 24:4; 대하6:30; 시25:11; 애3:42; 단9:19). 한편 이 낱말의 명사형인 ιλασμος(힐라스모스)는 חלס의 명사형 הי를 번역하는데 두 번 사용되었다 (시130:4; 단9:9).
이상의 자료를 통하여 우리는 히브리어 어근 חלס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내지는 ‘화목하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죄를 그냥 버려둠으로써 죄인과 화목하고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행위인 것이다.
5. 용서와 형벌
구약의 용서 개념은 형벌의 면제를 수반하는가? 이 물음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히브리어 어근 חלס의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그럼 히브리어 어근 חלס가 나오는 동시에 형벌의 문제도 다루고 있는 민수기 13-14장과 출애굽기 32-34장 등의 내용을 검토하여 용서와 형벌의 관계가 어떠한지 살펴보기로 하자.
Berkeley에 있는 켈리포니아 대학교의 성경학과 교수였던 Jacob Milgrom은 출34:6-7에 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기술과 민수기 13-14장 및 출애굽기 32-34장에 기술된 사건들을 통하여 히브리어 어근 חלס는 ‘형벌에 대한 면제’라기 보다는 ‘계약의 재확증’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Vertical Retribution: Ruminations on Parashat Shelah", in Conservative Judaism 34.3 [1981] pp. 11-16; Milgrom의 레위기 1-16장 주석 p. 245).
Milgrom 교수는 출34:6-7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 (한글 개역 성경의 조그만 글자 ‘형벌 받을 자는’이란 문구는 히브리어 본문에 없는 것으로 번역자가 첨가한 것이다)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자비와 공의 두 가지 속성으로 나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 곧 형벌은 자비에 의하여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시행되는 것이라고 해설한다.
그는 마치 아이러니와 같이 들리는 이 구절을 히브리어 어근 חלס의 뜻을 통하여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용서는 형벌을 아주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서 하나님과 문제의 개인 내지 단체와의 계약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우리는 Milgrom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몇몇 성경 기사들을 통하여 이를 확증할 수 있다.
민수기 13-14장은 정탐군들의 보고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과 거역을 기술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불신에 노한 하나님은 그들을 한꺼번에 멸하시고 모세로 더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시겠다고 한다 (14:11-12). 그러자 모세는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들추기면서, ‘하나님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용서해달라’고 탄원한다 (14:19). 14:20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의 탄원대로,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그 다음절인 21절 역시 ‘그러나’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불신한 백성들에 대한 형벌과 (14:21-23), 더불어 그 자손들이 짊어질 벌(14:33)에 대하여도 언급하신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그 자손들은 40년간 광야에서 유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용서가 이스라엘 자손의 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해주지는 않은 것이다.
출애굽기 32-34장의 기술 역시 이스라엘 자손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시작된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는 동안 백성과 아론은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것에 절하며 방자한 일을 행한다. 모세는 진노하신 하나님더러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호소한다 (32:32. 여기 사용된 히브리 동사는 חלס가 아니라 אשׂנ이다). 이 때에 이미 언급한 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말씀이 (34:6-7) 공포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언약을 세우심으로써 (34:10 이하)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모세의 명을 따라 레위 자손의 칼에 맞아 죽은 이가 3천명 가량 되며 (32:25-29), 하나님도 친히 백성을 치신다 (32:35). 또 다시 하나님의 용서는 형벌에 대한 면제가 아니라 계약의 갱신임을 보여준다.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 마침내 자신의 죄를 가리고자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은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선지자 나단의 질책에 직면한다. 이때 다윗은 바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단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고 대답한다 (삼하12:13.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동사는 ריבעה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윗의 역사를 계속하여 보는대로 그는 자신의 목숨만 부지했을 뿐 (12:13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밧세바와 불륜의 관계를 맺어 태어난 아들을 잃는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집안에 온갖 화를 당하게 된다. 범죄한 다윗은 비록 용서를 받았으나, 자신의 죄값을 단단히 치뤄야 했던 것이다.
이상의 사건들을 통하여 볼 때,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는 무언가 부족한 감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어근 חלס의 의미와, 속죄제 및 속건제에 대한 규례 (대표적으로 레위기 4-5장을 참조할 것) 등을 고려해볼 때, 자비하신 하나님은 용서를 통하여 이미 약속하신 바 계약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유지하시는 동시에 죄에 대한 형벌만은 계산에서 빼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용서에 대한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필연케 한다고 할 수 있다.
6. 예수님의 용서와 바리새인들의 반응
위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구약 언어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는 복음서에 기술된 예수님과 서기관들과의 마찰 사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시몬이라고 불리우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였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울면서 그 발에 향유를 부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Αφεωνται σου αι αμαρτιαι)고 하자,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기를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였다 (눅7:36-50).
지붕에서 내리워진 중풍병자를 향하여 예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αφιενται σου αι αμαρτιαι)고 선언하시자, 거기 있던 서기관들이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면서 불평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하려 하노라” 하시면서 그 병자를 치료하신다 (막2:1-12; 마9:1-8; 눅5:17-26).
예수께서는 이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이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도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신약 속의 구약: 마태 복음 (7)
“그 말씀” 1996년 5월호 원고. 김 경 래
목자없는 양 (마태9:35-37; 10:6; 15:24)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의 성읍들과 마을들을 다니면서 복음전하시고 가르치시고 치료도 하실 때, 그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목자없는 양’과도 같았다 (마태9:35-37; 마가6:34). 이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야말로 복음전파가 가장 시급한 이들이었다 (마태10:5-6). 심지어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딸을 위하여 간절히 애원하는 한 이방 여인을 향하여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마태15:21-24). 예수께서 이처럼 불쌍히 여기시고 시급하게 생각하신 ‘목자없고 잃어버린 양’은 누구며 어떠한 사람들인가? 이 표현 역시 다분히 구약적 배경을 깔고 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통하여 그 역사 문맥적 의미를 찾아봄이 좋을 것이다.
‘목자없는 양’이란 표현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곳은 민수기27:17이다.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간절히 구할 때 사용한 경우로서, 모세는 지도자가 없을 경우의 이스라엘 백성을 ‘목자없는 양’에 비유하였다. 여호사밧이 유다왕으로 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미가야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목자없는 양’에 비유하였다 (왕상22:17; 대하18:16).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비참한 상황은 예레미먀, 에스겔, 스가랴와 같은 후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도 묘사된 바 있는데, 특별히 마태9:36의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한다”는 표현은 이들 선지자들이 언급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반영해주고 있다. 이들 세 사람은 유다 나라가 망하기 시작할 때부터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새롭게 건설을 하는 기간 사이에 활동하였던 선지자들이다. 이 무렵에 이들 선지자들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은 ‘잃어버리고 흩어진 양’이요,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목자들, 곧 이스라엘의 정치 및 종교적 지도층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예레미야50:6-7, 17; 에스겔34:1-31; 스가랴10:2-3).
특별히 에스겔 34장에서는 양떼를 돌보지 않고 자기 배만 채우는 목자들을 심도깊게 비난하는 한편, 장차 하나님이 참 목자를 이스라엘 위에 세우실 거라는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 복음 10장에 기록된 바, 예수께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들어 가르치신 말씀도 다분히 에스겔 34장을 반영하고 있다. ‘목자들’, 곧 이 땅의 지도자들이 양떼를 제대로 돌보지 아니하여 흩어지게 하고 온갖 위험에 빠뜨린데 대하여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친히 구원의 대책을 제시하신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흩어진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고쳐주시고 안전하게 인도하시겠다는 내용의 에스겔 34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장차 오실 메시야에 관한 농도깊은 예언이다.
에스겔 34장 등에 비추어 볼 때, 예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 (마태15:24)라는 말씀을 통하여 당신 자신이 메시야되심을 간접적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이러한 구약 예언의 배경을 무시하고 복음서를 읽을 경우, 예수께서 이방 여인에게 던지신 이 말씀은 편협할 정도로 치우친 민족주의적 발언으로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나의 표적 (마태12:38-42)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예수께 찾아와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예수께서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전체 구약 성경 중에서 요나서가 차지하는 분량은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게다가 선지자 요나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무슨 특별한 예언이나 메시지를 남기지도 아니하였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요나의 예언 활동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니느웨성의 멸망에 관한 예언이요 (요나서 참조),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지경의 회복에 관한 예언이다 (왕하14:25-27). 후자는 당대에 성취되었고, 전자는 니느웨 백성의 회개로 그만 불발탄으로 끝나고 만다. 이는 요나 자신도 예측했던 바이다.
예언적 메시지와 그것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요나는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선지자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요나라는 인간에게 있었던 특이한 경험은 그 사건 자체로서 구약 성경의 어느 예언 못지 않게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시야 예언은 선포된 메시지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족장들의 인생 삶이나 또는 선지자 자신의 개인적 경험으로도 나타난다. 이사야의 예언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선지자 요나에게 있었던 특이한 경험은 후자를 대표할만하다고 하겠다.
요나는 히브리인으로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이방 세계를 향하여 도전적인 메시지를 선포하여야만 했던 선지자이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라는 요나의 도전적 메시지는 사실상 요나 자신에게 있었던 개인적 경험에 의하여 확고부동하게 지탱되었다. 사흘밤 사흘낮 큰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에 강한 힘을 불어넣어준 요인이 된 것이다. 다른 말로 니느웨 백성에게 있어서 요나의 메시지 보다는 요나 자신이 표적이 된 것이다 (누가11:30 참조).
구약 성경은 신약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진다.이러한 해석 방법들 중에서 요나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특정 인물의 특별한 삶이나 경험이 훗날 구속사 속에서 이루어질 사건에 대한 하나의 표상으로 해석되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이때, 요나나 니느웨 사람들의 역사적 실존 여부에 대하여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하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신학자들중에는 성경 기록의 역사성은 전혀 중요시하지 않고 (사실 이들중에는 그 역사성을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비유적 해석만을 취하여 종교적 교훈 내지는 교리를 추출해 내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때때로 이들의 해석 방법이 논리적인듯이 보이며, 결과적으로 볼 때도 아름답거나 고상한 종교적 교훈들을 밝혀내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이러한 이들은 역사적 사건들에 바탕을 둔 기독교의 신앙 체계를 뿌리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 가운데 적은 분량으로 기록된 요나의 경험을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해석한다. 아니, 예수께서는 요나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 아무런 의심없이 인정하시며, 더 나아가서는 그에게 있었던 사건이 메시야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역설하신다. 구약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기록된 사건이나 인물의 역사성을 의심하거나 그에 대한 결정을 유보한 채 내리는 모든 해석은 비록 그 내용이 아름답고 우리의 삶에 유익하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기독교 신앙을 망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사야가 받은 메시지 (마태13:10-17)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내 다윗을 따르는 무리와 압살롬을 따르는 무리의 대접전이 벌어진다. 다윗은 출전하는 장수들에게 자기를 생각하여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압살롬의 자랑스런 머리카락이 나무가지에 걸리어 결국 압살롬은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요압은 자기 왕의 부탁을 무시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에 대하여 전혀 모른 채, 아무쪼록 자기도 이 희소식을 다윗에게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압에게 간청한다. 그러나 요압은, 압살롬을 죽인 일로 결코 다윗 왕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미 미천한 구스 사람을 전령으로 보냈고, “이 소식으로는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자기가 아끼는 아히마아스를 말린다 (삼하18:1-23).
어떤 소식은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수확하는 날의 얼음’과도 같겠지만 (잠언25:13), 어떤 소식은 듣는 사람의 애장을 끊고 마침내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진위 여부와는 아랑곳없이 듣는 사람의 귀를 간질이는 달콤한 메시지가 있는가 하면, 듣는 사람을 두렵게 하고 그의 분노를 살 수도 있는 ‘충직한 메시지’도 있다. 압살롬의 죽음에 관한 소식은 다윗왕의 분노를 살 수도 있는 메시지였다. 그래서 요압은 이 일로 아히마아스를 아끼고 대신 천한 구스 사람을 보낸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기 나라의 멸망에 관한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다. 그가 이 메시지를 전했을 때 그가 받은 것은 불신과 비난과 옥살이 등 온갖 고난이었다. 사랑하는 자기 민족의 멸망을 외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예레미야는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고 (예레미야9:1) 호소하였겠는가. 누가 이와 같은 메시지를 원하겠는가? 이 얼마나 슬픈 사명인가?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 역시 자기 백성에 대한 일종의 저주였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 못할 것이다.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 귀를 무겁게 하고, 그 눈을 덮으라. 그리하여 그들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고, 그 귀로는 듣지 못하고, 그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라” (이사야6:9-10).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이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이사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을 가리켜 ‘입술이 부정한 백성’이라고 불렀었다 (이사야6:5).
만일 우리가 전할 메시지가 이러한 내용이라면, 아마도 복음 사역을 자원하는 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줄행랑을 칠지도 모른다. 선지자는 전할 메시지의 내용을 자기가 알아서 정하지 못한다. 자기의 생각에서 나오는 대로 메시지를 외치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듣는 대상만을 의식하여 그들의 귀를 부지런히 간질어주기만 하는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다. 돈을 받으면 단 말을, 못받으면 쓴 말을 뱉는 이 역시 사깃꾼이다.
이사야가 이 메시지를 받은 후 700여년이 지나서, 예수께서는 다시 동일한 메시지를 꺼내어 유대인들의 귀에 외치시면서, 이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다. 주후 1세기 유대인의 영적인 상황은 그로부터 700여년전 이사야가 받은 메시지의 내용 그대로 전개된 것이다. 그러면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계속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사야는 이처럼 예기치 못한 메시지를 듣고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위하여 걱정스런 마음으로,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묻는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은 가혹할 정도로 단호하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야웨께서 사람들을 멀리로 옮기고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다나, 엘라 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6:11-13).
비교적 짧고 간단한 대답 같지만, 그 내용은 택함받은 백성 곧,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의 끝까지 겪어야 할 운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마치 눈 멀고, 귀 먹고, 또 둔한 마음을 소유한 자와도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듣고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이처럼 둔해진 마음은 단시일 내에 밝아지지 아니할 것이다. 도시들이 다 폐허가 되고, 주민들은 도망하거나 죽임을 당하고, 집들은 주인을 잃고, 토지는 황무케 되며, 백성들이 먼 곳으로 포로되어 끌려가서 이스라엘 땅이 거의 초토화되기까지 이 민족의 이런 비극적 무지(無知)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이 민족의 대부분이 망하고, 그중 십분의 일만 남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파멸에 이를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중 대략 열 지파가 연합하여 시작한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3년에 국가로서의 생명이 끊기었다. 유다 지파를 주축으로 하고 거기에 베냐민 지파가 합류한 유다 왕국은 주후 588년에 망하였다. 그후 페르시아가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지에서 고토로 돌아온다. 이때 유다 지파가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자연스럽게 ‘유대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주전 6세기 곧 페르시아 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피로 물든 파란만장한 민족사를 보게 된다. 헬라 나라, 로마, 비잔틴 세력, 아랍 국가들, 십자군, 다시 아랍 세력, 터어키 사람,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기까지 이스라엘 땅은 끊임없이 이방인의 발에 짓밟혀 왔다. 그동안 유대인, 곧 과거의 이스라엘 민족은 수없이 짓밟히고, 포로로 끌려가고, 죽임 당하였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의 민족사적 비극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준다. 그뿐인가. 유대인은 심지어 문명화와 과학화를 자랑하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히틀러와 그를 추종하는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하여 단시일 내에 600만이라는 대인구를 잃었다. 그것도 우리가 다 아는대로, 너무나 처참한 방법으로. 이것이 택함받은 백성의 운명이었다면 본디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우리는 절대자의 냉혹한(?) 일처리 방법 앞에서 그만 입을 다물게 될 뿐이다.
유대인 자신들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이방인들도 ‘택함받은 백성’ 곧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가혹한 취급에 대하여 의아해 하면서, 혹자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혹자는 그 해답을 찾고자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이 일로 박수를 보내는 일부 이방인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택함받은 백성에 대한 이제까지의 가혹한 처사 때문에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고 원대한 계획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엘라 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는 “남은 자”에 관하여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4:3; 6:13; 10:20-23; 37:32). 하나님은 반드시 과거에 택한 백성 이스라엘, 곧 오늘의 유대인을 다시 부흥시키신다. 그러나 오직 남은 자만이 이 영광에 들어올 것이다. 유대인이 이제까지 비록 오랫동안 그들의 왕 메시야 예수를 부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언젠가 그들은 반드시 자기들의 왕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것이다. 그들은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울 것이다” (이사야27:6).
지금으로부터 약 1900여년 전 바울 사도는 이상 언급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보면서,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라는 말로써 자기 민족 곧 유대인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밝히고 있다 (로마서11:1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약속은 절대자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며, 그의 종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이기에 반드시 우리 인간의 어느 시간(역사) 안에서 성취될 대대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장로의 유전 (마태15:1-20)
종교적 유대인들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부딪힌 이유 중의 하나는 소위 ‘장로의 유전’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15장에 기록된 사건을 이해하려면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의 종교적 특성을 알아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신구약 성경 뿐만 아니라, 주후 1세기를 전후하여 전승되다가 후에 문자화된 유대인들의 여러 종교적 문헌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면 책의 민족이라고 불리우는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종교적 문헌들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유대교에서는, 시내산에서 이미 하나님의 모든 ‘토라’(가르침)가 모세에게 하달되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약 성경은 ‘기록된 토라’(성문 율법)요, 나머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은 ‘입에 의한 토라’(구전 율법)라고 한다. 이들이 말하는 구전 율법에는 에스라 이후 주후 5세기까지 약 천년간에 걸쳐 집성된 유대 현인들의 문헌들이 포함된다. 결국 구전 율법도 성문화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입에 의한 토라도 기록된 토라와 마찬가지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것인데, 후자만 기록되고 전자는 대대손손 입에서 입을 통하여 전수되었다고 한다.
쿰란 일대에서 발견된 고대 사본들중에는 모세 오경의 구절구절을 주제별로 묶는다든지 하여 새롭게 편집한 사본들도 있다. 이러한 류의 문헌들이 그후 미슈나라고 불리우는 구전율법의 결정체(結晶體)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미슈나는 토라에 나오는 다양한 법들을 해석하여 정리한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율법의 중요한 법들에 대한 해석은 주후 70년 이후에 활발하게 진행되어서 주후 200년에 이르러 그 기록이 완성된다. 여기서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랍비들 사이에 있었던 법 해석 활동이 주후 70년 이전에도 끊이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슈나는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1)“씨앗”에서는 농경법과 땅 경작에 있어서의 종교적 의무 등을 다룬다. 2) “절기”에서는 안식일을 비롯한 종교적 절기들을 다룬다. 3) “여자”에서는 혼인, 이혼, 간통, 서원 문제 등을 다룬다. 4) “손해”에서는 민사 및 형사 문제를 다룬다. 5) “성물(聖物)”에서는 희생 및 동물 문제를 다룬다. 6) “정결”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의 깨끗한 여부를 다룬다.
주후 3-5세기에 걸쳐 미슈나에 대한 주석이 편집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탈무드라고 한다. 탈무드의 본문은 미슈나가 되겠고, 주석 부분은 특별히 ‘그마라’라고 일컫는다. 구전 율법인 미슈나의 내용을 두고 랍비들이 벌인 토론 내용을 종합하여 편집한 것이 탈무드이다. 미슈나 및 탈무드와 거의 같은 시대에 편찬된 다른 종류의 유대 문헌으로서 미드라쉬라는 것이 있다. 미슈나가 주로 종교법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반하여 미드라쉬는 성경에 대한 교훈과 설교 중심의 주석이다.
일반적으로 유대교에서는 사람이 지켜야 할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고 말한다.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모세에게 하달된 계명은 613가지나 된다. 그중 365가지는 하지말라는 소극적 명령인데 그 수가 태양력에 의한 한 해의 날수와 같고,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은 248가지인데 이는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지체의 수에 해당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율법의 해석과 구체적인 적용에 비상한 관심을 보여왔으며, 그 결과로서 율법에 딸린 방대한 문헌을 전해온 것이다. 마태 15장에 기록된 바, 종교적인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마찰은 바로 이러한 ‘계명’에 관한 문제로 기인한 것이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종교적 유대인들은 ‘장로의 유전’, 다시 말해서 모세 오경에 대한 당대의 종교적이고도 통상적인 ‘해석과 적용’을 중시한데 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기록된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하신 것이다.
‘장로의 유전’이라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보다 더 잘 지켜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위적이고도 제도적인 요인들이 개입하면서 그것은 점차로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사람의 계명’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고자 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구속시키는 굴레의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마태 23장 참조).
신약 속의 구약: 마태 복음 (8)
“그 말씀” 1996년 6월호 원고. 김 경 래
스올의 문(門) (마태16:18)
신구약 성경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히브리식 표현들은 때때로 우리같은 타문화권 독자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문구중에서도 더러 순수하게 히브리적인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러한 표현들은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무런 어려움없이 이해되는 것들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를 가리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16:18)고 말씀하셨다. 여기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음부의 권세’ (각주에는, ‘음부의 대문’)라고 번역한 문구는 하나의 독특한 히브리식 표현이다.
헬라어로 ‘퓔라이 하두’ (πυλαι ᾅδου)라고 읽는 이 표현은 본래의 히브리어 표현을 문자적 의미를 따라 그대로 옮긴 것이므로, 그 헬라어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는 없다. 이 표현을 다시 히브리어로 옮기면 ‘샤아레 스올’ (לואשׁ ירעשׁ)이 된다. 일단 ‘스올’이라는 낱말은 그대로 남긴 채 이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스올의 문들’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스올’과 ‘문(들)’이 구약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 낱말 ‘스올’ (לוֹא)은 구약 성경에 모두 합하여 65회 출현하는데, 칠십인역에서는 거의 전부 ‘하데스’ (ᾅδης)로 번역되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지하 세계’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러한 용법에 대하여 특별히 신학적인 해석을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낱말은 단순히 당시 (성경 시대) 히브리인들의 문화 및 언어 관습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스올’에 가장 가까운 우리말 표현은 아마도 ‘저승’이 될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스올’은 때때로 의인화되어 신체 기관의 일부와 연결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자면 ‘스올의 배(腹)’ (요나2:3), ‘스올의 손’ (호세아13:14; 시편49:15; 89:48), ‘스올의 입’ (시편141:7) 등이다. 이런 표현들과 더불어 ‘스올의 줄’ (삼하22:6; 시편18:5)과 같은 표현은 모두다 ‘스올’을 의인화하여 ‘죽음’이란 뜻으로 사용된 것들이다. ‘스올’이 ‘죽음’에 대한 대체어로 사용된다는 사실은 위에 언급한 구절들에 나오는 댓구적(對句的) 표현들만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삼하22:6과 시편18:5에서는 ‘사망의 올무’, 그리고 호세아13:14과 시편89:48에서는 ‘죽음’이, ‘스올’과 어울려 생겨난 표현들과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한편 구약 성경에 빈도 높게 등장하는 히브리어 낱말 ‘샤아르’ (רעשׁ)는 일반적으로 ‘성문’, 또는 ‘벽이나 성에 나 있는 넓은 입구’를 뜻한다. 때때로 이 단어는 비유적인 방법으로도 사용되는데, 그 경우에는 보통 ‘(성문으로 대표되는) 거주지’ 또는 ‘영역’을 가리킨다. 성문은 성의 출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서 성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욥기38:17의 ‘사망의 문’과 ‘사망의 그늘진 문’이라는 표현은 모두다 ‘사망이 지배하는 영역’을 가리킨다. 죽을 병에서 치료받은 히스기야는 그 감사기도의 서두에 마태16:18에 나오는 ‘스올의 문’이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사야38:10). 이 역시 ‘죽음의 영역’ 또는 ‘죽음’ 자체를 가리킨다. 이 표현은 또 다시 외경중 하나인 지혜서16:1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며 사람들을 ‘음부의 문’ 안으로 데리고 가실 수도 있고 데려 내 오실 수도 있습니다.”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마태16:18에서 예수께서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망의 영역’ 또는 ‘사망’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내 교회”를 이길 수 없다. 이와 동일한 사상은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25:8; 호세아13:14; 고전15:54; 계시록20:14 등). 참고적으로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다” (고전15:26)라고 한 점을 통하여 볼 때,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 ‘대적’ 또는 ‘원수’의 ‘성문’(רעשׁ)을 얻을 (또는 ‘함락시킬’) 것이라는 약속은 (창세기22:17; 24:60) 다분히 메시야 예언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 (마태24:15)
마태복음 제24장 (마가복음 제13장, 누가복음 제21장에 해당)은 전체적으로 예언적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그중 15-28절 (마가13:14-23; 누가21:20-24에 해당)의 말씀은, 중복적으로 성취될 가능성을 포함하면서도, 우선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대환난을 언급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역사적 환난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마태24:15).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에는 (마가13: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라고 적혀있다. 한편 누가는 종교적 관점을 탈피하고 군사적 관점을 취하면서 이를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누가21:20)고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예루살렘이 군대에게 함락되는 일은 주후 70년에 처음으로 있었다. 이 해에 그 성전마저도 불에 소실되었다. 따라서 마태24:15-28은 주후 70년에 처음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은 무엇이며, 다니엘이 예언한 바와 예수께서 예언한 바는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우리말 개역 성경의 마태24:15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번역한 이 표현에 해당하는 문구는 다니엘서의 세 곳에서 발견된다. 다니엘9:27에서는 ‘미운 물건’ (‘쉬쿠침 메쇼멤’ םמשׁמ םיצוקשׁ, 표준 새번역에서는 ‘흉측한 우상’)으로 약간 달리 번역되었다. 다니엘11:31 (‘하쉬쿠츠 메쇼멤’ םמושׁמ ץוקשׁה)과 12:11 (‘쉬쿠츠 쇼멤’ םמשׁ ץוקשׁ)에서는 동일한 표현이 단수형으로 나타나는데, 거기서 개역은 각각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과 ‘멸망케 할 미운 물건’으로 번역하고 있다.
먼저 다니엘9:24부터 시작되어 9:27에서 끝을 맺는 ‘칠십 이레’에 대한 기사는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크게 잘못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개역 성경의 치명적인 실수는 25절에서 발견된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라는 개역의 번역문은 오역으로서, 표준 새번역에서처럼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리고 예순두 이레 동안 예루살렘이 재건되어서.....”로 번역하여야 옳다.
다니엘9:24-27의 ‘일흔 이레’에 대한 해석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다양하게 나타난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 부분을 일반적으로 메시야와 연관시켜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24절에서 언급한 바, ‘일흔 이레’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지게 되는 상황, 곧 “반역이 그치고, 죄가 끝나고, 속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원한 의를 세우시고, 이상과 예언이 응하는” 일은 (이사야40:2 참조) 다분히 메시야의 도래와 더불어 이루어질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기름부음을 받은 자’나 ‘왕’을 메시야와 연관시키려는 의도 때문에 개역에서 보는 것처럼 본문의 수치를 억지로 조합하는 치명적인 오역까지 생긴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다니엘9:24-27에 대한 서로 다른 여러 해석을 설명하기보다는, 이제까지 15년 가까이 자신의 전재산과 열정을 쏟아가며 성경 연대기 연구에만 몰두해온 미국인 학자 Eugene Faulstich의 해석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History, Harmony & Daniel - A New Computerized Eval!!uation, Spencer, 1988).
폴스팈에 의하면 (p. 106), 다니엘9:24-27의 일흔 이레, 곧 490년은 고레스가 유대인 귀환과 예루살렘 중건을 명한 칙령이 공포된 해 (고레스 원년)인 주전 551년에 시작된다 (대하36:22-23; 에스라1:1-4; 이사야44:28 참조). 이때부터 ‘통치자인 메시야’ (개역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으로 번역됨)까지 일곱 이레가 소요된다 (25절). 여기 ‘메시야’(חישׁמ)와 ‘통치자’ (‘나기드’ דיגנ) 모두 정관사 없이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여러 ‘메시야’나 ‘통치자’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고 또 이 경우에는 그렇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주전 551년서부터 일곱 이레, 즉 49년이 되는 해는 주전 502년이 된다. 폴스팈의 연대 계산에 의하면 이 해에 느헤미야가 하나니의 보고를 듣고 예루살렘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느헤미야1:1-2 참조).
그 다음 예순 두 이레 안에 예루살렘 성은 중건되고 거리와 해자도 모두 이룰 것이다 (25 하반절). 그리고 ‘그 예순 두 이레’ (히브리어 성경에 정관사가 있음) 후에 ‘다른 메시야’ (히브리어 성경에 정관사가 없음)가 끊어져 없어진다 (26절). 폴스팈은 (p. 107) 다시 주전 502년으로부터 62이레, 곧 434년이 되는 해인 주전 68년에 대제사장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난 일을 가지고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4권 1장 2절) 이 구절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반 이레, 곧 3년 반 후인 주전 64년에 예루살렘성과 그 성전이 로마의 폼페이에게 함락되고 성전 제사는 멈추게 된다 (유대고대사 14권 4장 3절). 주전 61년 유대인의 정권은 로마에 의하여 완전히 끝나고 만다. 이 해가 바로 다니엘의 일흔 이레가 끝나는 시점이다 (폴스팈, p.110). 그리고 주전 64년 이후로 예루살렘과 성전에 들어오게 된 이 ‘멸망의 가증한 것’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훼멸되기까지 (주후 70년) 성전에 머물 것이다 (폴스팈, p.144).
다니엘11:21-45은 시리아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4세 (주전 175-164)에 대한 예언임이 분명하다. 에피파네스라고도 불리는 그는 유대인의 성전과 제단을 더럽히고 유대인을 혹독하게 박해한 일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런 일들은 마카비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카비1서 1:10-64; 마카비2서 5:11-18; 6:1-11). 그중 마카비1서 1:54 (“백 사십오년 기슬레월 십오일에 그들은 제단 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세웠고.....”)에서 다니엘의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주전 167년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에 제우스를 위해 제단을 세웠는데, 마카비서는 이를 다니엘 예언 (11:31)의 성취로 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요세푸스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한다 (유대고대사 12권 2장 6절).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은 다니엘12:11에 세 번 째로 등장한다. 폴스팈은 다니엘9::27에서처럼 여기서도 또 다시 이 표현을 ‘로마 군대’로 이해한다 (p. 139). 그리고 그는 다니엘12:11-12의 예언을 주후 66년에서 70년 사이에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두고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으로 설명한다 (p. 140).
이상의 해석을 종합하여 볼 때, 다니엘서에 세 번 언급된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서는 아니되는 외국 군대 내지는 그들이 세운 이방신의 제단을 가리킨다. 11:31에 언급된 바는 마카비서와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서 보는대로 이미 주전 167년에 성취되었고, 9:27에 언급된 바는 주전 64년에 한 번 성취되고 주후 70년까지 계속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12:11에 언급된 바는 주후 66-70년 사이에 성취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표현을 다니엘서에서 빌어오시면서 앞으로 40년 후 (주후 70년)에 있을 역사적 대사건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리고 누가가 마태24:15 (=마가13:14)의 병행구절에서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누가21:20)고 묘사한 점 역시 이상의 해석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덧붙여서 이러한 예언은 얼마든지 중복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다니엘로부터 인용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 자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찰해보기로 하자. 먼저 히브리어 성경에 모두 28회 나오는 ‘쉬쿠츠’ (ץוקשׁ)는 ‘가증함’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호세아9:10; 나훔3:6; 에스겔5:11; 11:18), 이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우상 내지 이방신 숭배와 관련된 것을 비꼬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신명기29:17; 왕상11:5, 7; 왕하23:13, 24; 대하15:8; 에스겔7:20; 11:21; 20:3, 7, 8; 37:23; 이사야66:3; 예레미야4:1; 7:30; 13:27; 16:18; 32:34; 스가랴9:7). 히브리어 어근 ‘샤맘’ (םמשׁ)은 ‘황폐화하다, 버려지다’ 또는 ‘파멸시키다’,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결과로서 ‘놀라게 하다’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다니엘에 나타나는 이 두 단어의 결합 형태들은 (9:27의 ‘쉬쿠침 메쇼멤’ םמשׁמ םיצוקשׁ, 11:31의 ‘하쉬쿠츠 메쇼멤’ םמושׁמ ץוקשׁה, 12:11의 ‘쉬쿠츠 쇼멤’ םמשׁ ץוקשׁ) 모두다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무언가 ‘매우 혐오스러운 것’을 가리킨다. 로마 군대 뿐 아니라 어느 누구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더럽히고 모독하는 모든 세력은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로 불리게 될 것이다.
인자의 재림에 대하여 (마태24:29-31)
마태24:29-31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재림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편의상 주제별로 분류해보면, 1) 천체의 변화, 2) 사람들의 통곡, 3) 영광중에 임하는 인자, 4) 택한 자의 집결이 될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모든 내용들이 전부 구약 성경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마지막 때에 있을 천체 변화에 대하여 마태는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구약 성경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13:10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34:4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에스겔32:7 (“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워 별로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우며 달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학개2: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2:21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선지자 스가랴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을 대대적인 통곡에 대하여 예언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스가랴12:10-14). 스가랴는 이러한 통곡 사건이 천하 만국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여올 때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가랴12:1-9 참조).
이런 점에서 스가랴서 12장은 마태복음 24장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마태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과 계시록1:7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은 특별히 마지막 때에 있을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회개를 언급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두 구절 모두 ‘땅’은 특별히 ‘이스라엘 땅’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온 지구상에 흩어진 불신자들의 애처로운 통곡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회개의 눈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24:30에서도 보는 것처럼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신약 성경에서 재림 예수는 일반적으로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또는 ‘능력과 영광중에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태16:27; 25:31; 26:64; 요한1:51; 사도행전1:11; 살전1:10; 4:16; 유다14; 계시록1:7). 일찍이 선지자 다니엘은 ‘인자’의 재림에 대하여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 바 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7:13-14). 이와 관련하여 스가랴 역시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스가랴14:5).
마지막으로 주께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말씀은 구약의 신명기30:4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이사야27:13 (“그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스가랴2:6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등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대로 재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철저히 구약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구약 성경을 버려둔 채 신약 성경만 가지고 해석을 시도하는 신학적 방법론은 그릇된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신약은 반드시 구약을 통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몸값 (마태27:9-10)
마태27:3-10에서 마태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죽음과 그에 따른 공동 묘지용 토지 구입에 관하여 기술하면서 구약 성경으로부터 한 본문을 인용하고 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태27:10).
예레미야서 전체를 통하여 여기 인용된 내용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본문이 있다면 아마도 32:6-9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여호와의 말씀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예레미야가 토지를 구입한 일은 훗날 바벨론 유수 이후에 백성이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가옥이나 토지매매가 다시 이루어질 것에 대한 예표가 되었다 (예레미야32:15).
아무리 보아도 여기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말씀이 마태복음에 인용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마태의 인용문은 스가랴서에서 그 정확한 출처를 찾아볼 수 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스가랴11:12-13).
마태복음 본문에서 거의 대부분의 사본이 “예레미야”로 읽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태가 본래 그렇게 기록하였음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예레미야서에서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스가랴서에서 온 것으로 보이므로 (11:13), 몇몇 소수의 사본에서는 이를 “스가랴”라고 바꿔읽거나 아니면 아예 삭제해버린 경우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대답은 그리 시원치가 못하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라이트푸트의 설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탈무드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이 문제를 설명한다 (J. Lightfoot, A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from the Talmud and Hebraica: Matthew - 1 Corinthians, vol. 2 "Matthew-Mark", Peabody, 1989 <1859년 최초로 Oxford에서 Horae Hebraicae Et Talmudicae라는 제목으로 출판됨> pp. 362-363).
“‘랍비들의 전통에 의하면 선지서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12소선지서.....이사야가 예레미야와 에스겔 두 사람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를 먼저 두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열왕기서가 멸망으로 끝나고, 예레미야서 전체는 멸망에 관한 것이며, 에스겔은 멸망으로 시작하고 위로로 끝나고, 이사야서는 전체적으로 위로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멸망에 멸망을 연결하고, 위로에 위로를 연결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멸망을 다루는 책들은 그 책들대로 함께, 그리고 위로를 다루는 책들은 그 책들대로 함께 두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옛적에 예레미야서는 선지서 전체의 맨 앞에 놓였었음에 틀림없고, 나머지 모든 책들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마태16:14 참조). 따라서 마태가 스가랴서의 본문을 예레미야의 이름 아래 인용한 것은 전체 선지서의 맨 앞에 나오는 이름으로 그것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유대인 학자 다비드 스턴 (David H. Stern) 역시 그의 주석에서 (Jewish New Testament Commentary, Jerusalem, 1992) 이를 기억에 의한 인용이라고 하면서, 라이트푸트와 같은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좀 미흡한 감이 있으나 필자는 이 두 사람의 설명을 통하여 마태27:9-10에 나타난 문제점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장난
김 경 래 (전주 대학교 기독교학과)
히브리인들의 문학에는 심심찮게 말장난이 등장한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의 경우 말장난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헬라어 신약 성경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히브리어 내지 아람어로 돌아가야만 말장난의 유무를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헬라어에서 셈어로 재구성한 결과에 객관적인 타당성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 가운데 히브리 문학적 말장난을 밝히는 작업은 신약 성경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작업의 도움이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오해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구도 더러 있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히브리 문학의 말장난에 대한 연구는 아주 희박한 것이 현실이다. 이 주제의 연구에 대한 서곡으로서,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장난들을 조사해보고 그것들의 분석을 통하여 성경 해석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 이 글에서 시도하는 바이다. 이 글의 일부 내용은 구약을 통하여 신약을 이해한다는 각도에서 간단하게나마 「그 말씀」지(誌)를 통하여 산발적으로 소개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말장난과 관계가 있는 내용만을 정리하여 마태복음 속의 말장난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태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1:21).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이름짓기는 그 이름을 소유하게 될 사람의 운명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태어날 무렵에 본인 또는 부모에게 발생한 특이한 상황을 나타내는 이름짓기도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의 평생 삶 내지 역할과 관련하여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예로는 이스마엘 (‘하나님이 들으시다’라는 뜻, 창16:11), 이삭 (‘웃다’라는 뜻, 창17:15-19), 야곱과 에돔 (창25:25-26, 30), 게르솜 (출2:22), 사무엘 (삼상1:20) 등을 들 수 있고, 후자의 예로는 솔로몬 (대상22:9)과 예수님 (마1:21) 등을 들 수 있다.
이사야의 아들과 (사8:3-4) 호세아의 아들딸은 (호1:4-2:1) 그들이 속한 민족의 운명을 대변하는 이름을 얻게 된 경우들이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름을 바꿔준 예로는 아브라함과 사라 (창17:5, 15), 이스라엘 (창32:28) 등을 들 수 있다. 솔로몬의 경우에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이라는 뜻의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내려주신 적이 있다 (삼하12:24-25). 이들 외에도 성경에서의 이름 짓기에는 여러가지 동기와 방법을 엿볼 수 있다.
이름 짓기에 있어서 이처럼 이름을 통하여 출생시의 상황, 그 사람의 인생이나 역할, 및 그가 속한 민족의 운명 등을 대변해주는 방법은 일종의 말장난적 요소라고 보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의 이름이 구약 성경중에 여러가지로 나타나는 것은 그의 역할이 그만큼 다양하고 폭넓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예를 들어 이사야 9:6에만 나타난 메시야의 이름은 자그마치 다섯이나 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장차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들을 위하여 요셉이 주의 사자를 통하여 지시받은 이름은 ‘예수’이다. 이러한 이름을 부여하는 이유인즉,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이었다. 이 아들은 자신의 역할과 관계있는 이름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표기하면 עושׁי (‘예슈아’: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아’로 표기됨)가 된다. 히브리인 중에 결코 드물지 않은 이 이름을 긴 꼴로 바꾸면 עשׁוהי (‘예호슈아’: 우리말 성경에는 ‘여호수아’로 표기됨)가 된다. 그리고 이 이름들은 헬라어로는 다같이 Ιησους (‘예수스’: 우리말 성경에서는 ‘예수’로 표기함)라고 음역된다. 히브리어로 עושׁי나 עשׁוהי 모두 ‘여호와’와 ‘구원’을 뜻하는 두 단어가 합성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지자 이사야의 이름인 היעשׁי = והיעשׁי (‘이샤야’ = ‘이샤야후’)도 순서만 다를 뿐 이와 동일한 합성어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이끌어낸 이스라엘 자손을 가나안 땅으로 이끈 여호수아, 선지자중의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이사야, 인류를 그들의 죄악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이 동일한 뜻을 가진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은 무언가 의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를 진정한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는 이는 모세의 후계자 Ιησους (= 여호수아)가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 Ιησους (= 예수님)이시다 (히브리서 4:1-16 참조).
나사렛 사람 예수 (마태2:23)
나사렛이란 동리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2:23).
마태2:23은 많은 성경 독자들을 당혹케 해온 구절이다. 구약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예언한 문구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사렛’이란 지명조차 구약 성경에는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럼 먼저 마태2:23 본문을 우리 말로 다시 옮겨 보기로 하자 (사역).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로 와서 살았다. 이리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 성경으로 가기 전에 먼저 신약 성경 안에서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린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태2:23에서 ‘나사렛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Ναζωραιος(‘나소라이오스’)이다. 이 명칭(Ναζωραιος)은 신약 성경에 모두 13회 (마태2:23; 26:71; 누가18:37; 요한18:5, 7; 19:19; 사도행전2:22; 3:6; 4:10; 6:14; 22:8; 24:5; 26:9. 사본간에 표기상 약간 차이점이 있는 마가10:47; 누가24:19을 포함하면 모두 15회) 나타나는데, 약간 달리 표기된 Ναζαρηνος(‘나사레노스’)와 마찬가지로 항상 예수님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Ναζαρηνος(‘나사레노스’)는 신약 성경에 모두 6회 (마가1:24; 10:47; 14:67; 16:6; 누가4:34; 24:19. 마가10:47; 누가24:19의 경우, 어떤 사본들에는 Ναζωραιος으로 표기됨) 나타난다. 따라서 Ναζωραιος(‘나소라이오스’)와 Ναζαρηνος(‘나사레노스’)의 두 가지 형이 합하여 신약 성경의 19 곳에 출현하는 셈이다.
한편 동네 이름으로서의 ‘나사렛’(Ναζαρεθ과 Ναζαρετ 두 가지 표기법이 나타남)은 신약 성경에 모두 12회 출현한다 (마태2:23; 4:13; 21:11; 마가1:9; 누가1:26; 2:4, 39, 51; 4:16; 요한1:45, 46; 사도행전10:38). 헬라어 Ναζαρεθ이나 Ναζαρετ을 히브리어로 다시 옮길 경우 ת(나쯔랏)이 될 것이다.
마태2:23을 민수기6:1-23의 나실인(רי)과 연관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으나, 예수님이 ‘나실인’으로 지내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오히려 예수님은 ‘음식에 있어서 절제 생활을 한’ 세례자 요한과는 대조적으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들으신 적도 있다 (마태11:16-19).
아마도 마태는 메시야를 가리켜 ‘한 가지’라고 부른 이사야의 예언(“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사야11:1)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란 히브리어 ‘네째르’(ר)를 번역한 것인데, 나사렛의 히브리어 발음 ‘나쯔랏’(ת)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 연관성이 지적된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11:1)에서 ‘네째르’가 메시야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므로, 마태는 이를 약간 변형시켜 ‘나사렛 사람’ (히브리어로 ירצנ, ‘노쯔리’ 또는 יתרצנ, ‘나쯔라티’)이라는 칭호를 예수님에게 주며, 이를 헬라어로는 Ναζωραιος (‘나소라이오스’)라고 음역한 것이다. 이상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히브리인의 문학에서 결코 드물지 않은 ‘말장난’이 여기에도 적용된 것이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를 가리켜 말할 때, ‘가지’(‘네째르’, ר) 말고도 이와 비슷한 낱말들(우리 말로는 ‘가지,’ ‘싹,’ ‘순(筍)’ 등으로 번역됨)이 몇 차례 언급된 적이 있다. 히브리어로 ‘호테르’(ר, 이사야11:1), ‘쩨마흐’(ח, 이사야4:2; 예레미야23:5; 33:15; 스가랴3:8; 6:12)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메시야는 이사야53:2에서 ‘연한 줄기’(קוֹיּ, ‘요네크’)와 ‘마른 땅의 뿌리’(שׁ, ‘쇼레쉬’: 여기서는 ‘줄기’로 번역할 수도 있슴)와 비유되기도 하였다.
마태가 다른 곳들과는 달리 2:23에서는 ‘한 선지자’(단수)가 아니라, ‘선지자들(복수)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비단 이사야의 예언(11:1)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내용의 모든 메시야 예언(이사야4:2; 53:2; 예레미야23:5; 33:15; 스가랴3:8; 6:12 등)을 염두에 두고 마태2:23을 기록한 듯 하다.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 (마태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태3:9).
유대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아브라함을 ‘우리 아버지’(히브리어로 וניבא, ‘아비누’)라고 즐겨 부른다 (요한8:33-59 참조). 물론 여기 ‘아버지’에는 ‘조상, 선조’의 뜻이 있다 (히브리어로는 ‘아버지’나 ‘조상’이나 다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심지어는 죽어서 음부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부자도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른 것을 보게 된다 (누가16:24, 30).
세례자 요한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말장난을 찾아볼 수 있다. 요한의 말을 히브리어로 재구성해 볼 때, וניבא (‘아비누’ = ‘우리 아버지’), םינבא (‘아바님’ = ‘돌들’), םינב (‘바님’ = ‘자손’), 이 세 낱말이 서로 비슷한 글자들을 가지며 유사하게 들리는 것을 보게 된다. 요한은 히브리 언어의 이런 점을 이용하여 ‘말장난’식 표현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한 요한의 말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여 ‘돌들’을 ‘평민’으로 유추해석한다든지, 또는 ‘하나님이 정말로 돌들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일으키신다’고 해석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오히려 요한은 아브라함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 위선적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일종의 ‘말장난’을 통하여 약간 비꼬는 투로 이 말을 내뱉은 것이다.
사람낚는 어부 (마태4:18-19)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태4:18-19).
비유를 비롯하여 예수님의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연구해보면, 대부분 그의 말씀이 아주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쉽게 표현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깊고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대부분 함축적이면서도 그 말씀을 꼭 들어야 할 사람에게 있어서는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경우가 많이 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둘다 어부였다. 갈리리 호수 근처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고기잡는 일이었고, 결국 그 일이 그들의 거의 유일한 생존 수단이 되어버렸다. 어부인 이들을 부르실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히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아마도 결코 고상하거나 철학적인 표현이 아닌지는 모르나, 어부인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으로 들릴만한 말씀이라고 하겠다.
‘어부’는 히브리어로 גיד (‘다야그’)이다. 여기 헬라어 신약 성경의 본문에 나오는 복수형 αλιεις (‘할리에이스’)를 히브리어로 옮기면 םיגיד (‘다야김’)이 된다. 그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은 αλιεις ανθρωπων (‘할리에이스 안트로폰’)이라는 헬라어 문구를 번역한 것인데, 이 문구는 직역하면 ‘사람들의 어부들’이 된다. 그리고 이 헬라어 문구는 다시 히브리어로 םדא יגיד (‘다야게 아담’)이라고 복원할 수 있다.
어부란 당연히 물고기를 포획하는 사람이다. 뭍짐승이나 날짐승을 잡는 사람들을 가리켜 어부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이들 형제를 부르시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일종의 쉬운 말장난을 통하여 장차 그들이 수행할 새로운 사명에 대하여 그 핵심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신 것이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이런 말장난식 표현을 듣고 그 뜻을 깨닫고자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선한 눈과 악한 눈 (마태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태6:22-23).
마태6:22-23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다. 언어마다 숙어(熟語) 내지는 관용어가 있다. 이런 표현들의 요소 하나하나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번역하여 다른 언어로 옮겨놓을 경우 우리는 그 표현 본래의 의미와는 다른 엉뚱한 의미를 얻게 되어 결국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오해까지 할 수 있다.
본문중 ‘눈이 나쁘다’나 ‘눈이 순전하다’는 헬라어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히브리어상의 숙어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표현에서 ‘순전한 눈’ (הבוט ןיע, ‘아인 토바’)은 ‘관대함’을 뜻하고, ‘나쁜 눈’ (הער ןיע, ‘아인 라아’)은 ‘인색함’을 뜻한다.
‘좋은 눈’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의 잠언22:9에서도 ‘관대함’의 의미로 사용된 바 있다: “선한 눈을 가진 자(ןיע בוט, ‘토브 아인’)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이 구절에서 ‘선한 눈을 가진 것’과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나쁜 눈’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의 신명기15:9; 28:54, 56에서도 ‘인색함’의 의미로 사용된 바 있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7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ןיע הער, ‘라아 아인’)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야웨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신명기15:9). 여기서 말하는 ‘악한 눈’이란 율법의 제도를 악이용하여 가난한 이웃 돕기를 거절하는 옹색한 마음을 가리킨다.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에 대하여 그의 눈이 악하여져서 (וניע ערת, ‘테라아 에이노’), 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난케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연고일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그 자녀에 대하여 그녀의 눈이 악하여져서 (הניע ערת, ‘테라아 에이나’)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난케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니라” (신명기28:54-57). 이 구절은 자기 자식을 잡아먹게 되는 극한 상황 속에서는 아무리 유순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가까운 사람과 나누워 먹기는 커녕 혼자 욕심내어 먹으려한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잠언23:6; 28:22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악한 눈’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눈이 악한 자의 (ןיע ער, ‘라아 아인’) 음식을 먹지 말며 그 진선을 탐하지 말지어다” (잠언23:6). “눈이 악한 자는 (ןיע ער, ‘라아 아인’)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잠언28:22).
이상으로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들을 통하여 볼 때, 마태6:22-23의 말씀은 결코 애매모호한 말씀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마태6:19-34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물질적 소유’와 관련된 가르침들이다. 이처럼 보다 넓은 문맥을 통해 보더라도 마태6:22-23에 대한 위의 해석이 맞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질적 소유에 대하여 인색한 (다른 말로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바로 어두움 가운데 살면서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이요, 관대히 베풀줄 아는 (다른 말로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으로서 하늘에 그 보물을 쌓아두는 것과 같다 (22-23절). ‘온 몸이 밝다’고 하거나 또는 ‘어둡다’고 함은 ‘눈’과 관련된 히브리어 숙어에서만 이런 일종의 말장난이 가능하다. 따라서 마태6:22-23은 히브리어 차원에서의 숙어와 말장난을 이해하지 못하면 애매모호한 구절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죽은 자로 죽은 자를 묻게 하라 (마태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마태8:22).
어디든지 그를 따르겠다는 한 서기관에게는 부정적으로 대답하신 주님께서는, 부친 장례를 위하여 우선 말미를 달라는 제자를 향하여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시면서 단호히 거절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 중에도 말장난이 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다. ‘죽은 자를 장사할 수 있는 자들’은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은 아니다. 여기서 같은 표현이지만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든지 알아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가리켜 ‘잠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제자들의 오해 때문에 결국 예수께서는 그들이 흔히 사용하는 언어로 명백히 그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11:11-14). 사실 예수님의 눈에 비추어 볼 때, 보다 심각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요 영혼의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이러한 이해 때문에 위와 같은 말장난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이 반석 위에 (마태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16:18).
예수님의 열 두 제자중 흔히 수제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바로 베드로이다. 그는 베드로 외에 시몬 또는 게바라고도 불린다. 시몬은 ‘듣다’라는 뜻의 낱말에서 파생한 히브리어 이름이요, 게바(אפיכ)는 ‘바위, 반석’을 뜻하는 아람어 이름이다. 그리고 베드로(Πετρος)는 아람어 게바와 마찬가지의 뜻을 가지는 헬라어 이름이다.
마태16:18에 나타난 말장난은 베드로라는 이름 뜻 때문에 생긴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를 가리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16:18)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라는 이름 자체가 헬라어이기 때문에 이 말장난은 굳이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복원하지 않더라도, 헬라어 본문만을 가지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절의 표현 자체가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이상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의 ‘반석’을 꼭 베드로와 동일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 구절을 가지고 마치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나 수장이 된 것인양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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