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은 충북의 북부 지역이긴 하지만 동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어 수도권에서의 거리가 제법 되는 곳이다. 충북을 남북으로 잇는 고속도로는 중부, 중부내륙, 중앙 셋이나 있는데 제천은 이 가운데 가장 동쪽인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하고 강원도 원주를 거쳐서 가게 된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출발했는데도 이미 많은 차량이 고속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서울요금소 인근에서 꽤 심한 정체가 보이더니 영동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만나는 호법분기점 일대는 아예 차가 가지 못한다.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원주시에 소재한 신림인터체인지를 통해 나온 시간이 11시를 훌쩍 넘어버렸다. 예상보다 1시간 반 이상 더 소요된 듯하다.
[무도리사지, 통불사 석탑재]
첫 목적지로 삼은 제천 학산리 마애선정비(堤川 鶴山里 磨崖善政碑)는 주소지인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산 14번지가 고속도로 위로 표기된다. ‘학산리에서 명암, 명도리로 넘어가는 비끼재길 왼쪽 화강암반에 새겨 있던 것을 200m 정도 아래로 옮겨 해발 350m 지점에 고인돌 덮개돌과 함께 복원하였다.’는 위치정보만 있었다. 그래서 명암리에 있는 백련사를 입력하고 고속도로와 나란히 남동쪽으로 가는 길에 혹시 보일까 주위를 살폈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첫 목적지는 제천 백련사(堤川 白蓮寺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명암리 325)가 되었다. 고속도로 밑을 통과한 뒤 만나는 첫 동네에서 좌회전하여 곧장 산길을 따라 5km 정도 가야했다. 길은 굴곡, 경사, 노면상태 모두 최악이어서 차량으로 오르는데도 매우 힘들었고,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 절은 감악산 중턱에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2년(662)에 의상조사(義湘祖師)가 백련지(白蓮池) 동쪽에 소암자를 창건하고 백련암이라 하였다. 사적비 등이 세워져 있는 석축 아래에 몇 대를 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여기서 오르면 돌로 만들어놓은 일주문을 만난다.
천왕문 역할을 하는 집이 일주문 뒤에 있고, 사천왕상과 인왕상은 대문에 그려놓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작은 중정이 나타나는데 근래에 세운 석탑이 중앙에 자리하고 오른쪽에 대웅전이, 정면에 요사가 있고, 왼쪽으로는 확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대웅전 안에는 불단을 마련하고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그 중 주존인 아미타불은 ‘제천백련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란 이름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륭(乾隆) 원년(元年)(1736년, 영조 2년)에 조성되었으며 높이는 75㎝다. 대좌는 뒤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절 동남쪽 200m 지점 병풍바위 산등에 4각의 기단 위에 부도가 있다고 하지만 표지판도 발견하지 못한데다 물어보기도 뭐해 포기하고 내려오고 말았다.
백련사에서 내려오면서 봉양읍 명암리 635-4에 있다는 제천 명암리 미륵불상(堤川 明岩里 彌勒佛像)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주소지 인근에서 불상을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주소지는 실제 불상이 있는 곳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지만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게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답답한 일이다. 명암저수지 아래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면서 찾아보았다. 능금농원민박이라는 큰 간판이 도로변에 있는데[우리 카페 회원이신 머루눈님이 블로그에 이 내용을 적어두었으며, 이 정보가 불상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간판을 보고 서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곧바로 불상이 보인다.
이 불상은 신라 문무왕 때 어느 스님이 감악산성의 백련사로 가던 도중 도둑을 막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현재 불상의 신체는 무릎 부분이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접합하였는데, 한 때 파손된 것을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민머리에 육계를 표시하였고 백호는 없어졌으며 상호의 마멸도 매우 심한 편이다. 불상 옆에 도로공사로 인한 이전 내력을 적은 비석을 세워두었다.
다음은 봉양읍 구학리 산 224번지에 있는 제천 탁사정(堤川 濯斯亭)으로 향했다. 조선 선조 때 임응룡(任應龍)이 머물던 곳인데 1925년에 후손 임윤근(任潤根)이 팔송정 구지에 정자를 재건하였고 옥파(玉波) 원상(元常)이 청사탁영(淸斯濯纓)하고 탁사탁족(濁斯濯足)의 뜻으로 ‘탁사정(濯斯亭)’이라 이름 지었다. 목조와가의 팔작집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이다. 인근에는 여러 식당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번 답사길에는 천주교성지도 한 곳 찾아본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 배론성지가 그곳으로 봉양읍 구학리 623번지 일대에 있다. 조선 순조 1년(1801)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 때부터 지금까지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배론’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것이다. 천주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받고, 순교한 곳들을 일찍부터 많이 사두었는지 곳곳에 있는 성지들의 영역이 대개 매우 넓다. 이곳 배론성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날 수십 대의 버스와 승용차가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어 여러 성지 중에서도 매우 인기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배론성지의 유적으로는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이 머무르며 ‘백서’를 썼던 토굴과 성 요셉 신학교,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다. 황사영(黃嗣永 1775년~1801)은 정약종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사위로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진지한 토론 끝에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곳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책을 북경주교에게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백서』이다. 이 편지를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에게 시켜 1801년 10월에 떠나는 북경 동지사(冬至使) 일행 편에 끼워 보내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3일 후인 음력 9월 29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대역죄로 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어머니·작은아버지·아내·아들은 모두 귀양 가게 되었다.
황사영백서사건은 여러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겠으나, 아무튼 천주교에서는 순교자로 현양(顯揚)하고 있는가보다. 토굴 옆에는 현양탑이 있고, 그 앞에 황사영동상이 있다. 그런데 동상의 얼굴이 스물여섯에 죽은 사람치고는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인다.
봉양읍 답사의 마지막 장소로 공전리 475번지에 있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37호 자양영당(紫陽影堂)으로 향했는데 배론성지에서도 꽤 멀고, 다음 목적지인 제천경찰서까지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어서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유중교(1821∼1893)가 후진을 양성했던 곳으로 고종 26년(1889)에 창주정사로 세웠는데 1906년 유림에서 자양영당으로 새롭게 세웠다. 이곳에는 주자·송시열·이항로·유중교·유인석·이직신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영당은 전체적으로 공개되어 있었지만 영당 건물 자체는 잠겨 있어 영정을 살펴볼 수는 없었다.
이곳은 고종 32년(1895)에는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이 팔도 유림들을 모아 비밀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데, 이곳 현판글씨는 대부분 유인석이 쓴 것들이다.
현재 이곳에는 별도의 건물을 지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7호 『화동강목(華東綱目)』판목을 보존하고 있다. 이 판본은 1906년 화서 이항로(1792∼1868)의 제자인 김평묵과 유중교가 중국 송·원시대의 전적과 고려시대의 전적을 모아 기록한 『삼강오륜』의 강목으로서, 올바른 예의와 아름다운 풍속을 국민에게 가르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판본의 크기는 가로 33㎝, 세로 21㎝로 총 3,300매가 보관되어 있다.
영당 건물 옆에는 유중교[柳重敎 1832년 ~ 1893년, 두 자료의 출생연도가 다르다.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그렇다. 제대로 밝히고, 잘못된 쪽은 수정해야할 것이다.]의 생가도 보존되어 있는데 초가지붕을 인 모습이 한적한 시골집을 연상하게 한다. 유중교의 호는 성재(省齋)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이항로의 사후에는 김평묵(金平默)을 스승으로 섬겼다.
자양영당 안에는 의병전시관도 있다. 제천지역의 의병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내부에는 의병활동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안에는 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9호 자양금(紫陽琴)도 있는데 이 거문고는 유중교(柳重敎)가 연주하던 칠현(七絃)의 거문고로서 그의 후손인 유성균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기증받아 제천의병전시관에서 전시 관리하고 있다. 1800년대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거문고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전시관 안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4호인 한계군 이공기 호성공신교서 및 초상도 있다고 되어 있으나 부주의한 탓인지 다른 교서는 보았으나 이분의 교서와 초상화는 보지 못했다. 李公沂는 조선시대 선조 때 어의를 지낸 인물이다. 사진은 김상한이란 분에게 내린 교지다.
제천 시내는 지난 답사 때 대략 훑어보았으나 경찰서 내에 석탑이 한 기 있는 것은 이후에 알게 되어 이번에 방문했다. 경찰서 건물 향좌측 잔디밭에 서 있다. 이 석탑은 ‘제천 하소동 오층석탑(堤川下所洞五層石塔)’으로 불리는데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제천경찰서 정원에 위치하고 있던 석탑으로서 1989년 제천경찰서 신축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5층도 아니고 1, 3층 몸돌은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문화재 중에서도 명승이나 사적은 비교적 찾지 않는 편이다. 몇 가지 이유가 없지 않지만 굳이 여기서 말할 필요야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승 제20호 제천 의림지와 제림(堤川 義林池와 堤林 제천시 모산동 241번지 외)을 들렀다. 제천 의림지와 제림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대 수리시설 중의 하나인 의림지(義林池)와 그 제방 위의 제림(堤林) 그리고 주변의 정자 및 누각 등이 함께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는 역사적 경승지이다. 지금은 의림지 주변에 위락시설이 들어서 있어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이날도 수많은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문화재 명칭에 제방 위의 ‘제림(堤林)’이 들어가 있는데 과연 그럴 만 했다. 주변의 숲이 매우 좋은데 특히 남서쪽의 노송(老松)들이 펼쳐내는 아름다움과 기개는 높이 사줄 수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영호정과 경호루, 두 정자도 이 근처에 있다.
영호정(暎湖亭)은 조선 순조 7년(1807) 이집경(李集慶)이 의림지 제방 중앙에 건립한 후 6·25 동란으로 파괴된 것을 그 후손인 이범우(李範雨)가 1954년에 중건하였다. 화강암 석주 위에 건축된 목조 단층 누각으로 건평이 약 13㎡이며 팔작지붕에 정면 2칸, 측면 2칸이다.
경호루(鏡湖樓)는 의림지 서남쪽에 있는 정자로 1948년 당시 제천군수 김득련(金得練), 경찰서장 김경술(金京述)의 발기로 군 산업과장 이형재(李衡宰)의 성의와 서울의 홍순량(洪淳良), 오세진(吳世鎭)의 특지로 목조와가 정면 3칸, 측면 2칸, 2층의 누각을 창건하였다. 누각은 2익공집으로 화반을 쓰고 단청이 되어있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올라가는 길도 교통체증이 보통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송학면에 있는 두 탑만 더 보고 일찍 올라가기로 했다.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제천 소악사지(堤川 小岳寺址)는 내가 찾아본 자료에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시곡리 79’라고 주소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녀온 사람들의 답사기에 따르면 강천사(江天寺)라는 절 바로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선과님, 머루눈님 답사기에서 확인했으니 강천사로 향했어야 했는데...] 내비 검색 결과 두 지점은 꽤 달랐다. 어느 것이 맞는 지 알 수 없어 일단 주소지를 입력하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주소지대로 간 곳은 아세아시멘트공장 건너편 산자락 끝이었다. ‘주소가 잘못 되었구나’ 생각하고 다시 강천사를 입력하고 출발했다. 다녀온 뒤 찾아본 결과 강천사의 주소지는 충북 제천시 송학면 시곡리 산79-6이고, 석탑이 있는 곳은 산79-4 정도 된다. 결국 ‘산’번지를 표기하지 않은 자료를 따르다 보니 엉뚱한 곳으로 가 시간을 낭비한 셈이 됐다.
마을에 들어서 좁은 마을길을 이리저리 따라가다 보면 마을이 끝나는 곳에 [강천사 2.5km]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석탑은 송학산 정상을 향해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이 길도 보통은 아니지만 앞서 들렀던 백련사 가는 길보다는 조금 나았다. 모퉁이마다 강천사에서 세워놓은 표지판들에는 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 여유 있는 마음으로 올라오라는 글귀들이 이어진다. 절집에서 걸어놓은 연등이 막 보이려하는 모퉁이에 근래에 세워둔 듯한 문화재 설명판이 있고, 그 곁에 차 한 대 주차할 공간이 보인다.
제천 소악사지 삼층석탑(堤川 小岳寺址 三層石塔)은 생각보다는 규모도 크고 헌칠한 모습이었다. 탑의 초층 탑신은 2개로 깨졌는데 후에 보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단층 옥개 이상은 양호한 편으로 각 층의 옥개 받침은 모두 4단이다. 이 석탑의 양식은 신라말∼고려초로 시대가 추정되며 높이 2.2m, 기단 1×1m의 크기이다.
무도리사지는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 596번지 일대인데 이곳에 20여 년 전에 새롭게 지어진 통불사라는 절집이 들어서 있다. 절집으로 가는 길은 표지판도 군데군데 있었지만 표지판이 없는 갈림길에는 연등이 걸려 있었다. 일주문도 세워져 있고, 절 입구에 ‘왕박산에 나투신 갓바위 약사여래불 공덕비’와 함께 가족영탑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까지 올라가보지는 않았지만 계단 끝에 심어둔 나무도 그렇고, 대웅전의 모습도 제법 독특한 것으로 보인다.
통불사에 간 것은 입구에 있다는 석탑부재를 보기 위함이었다. 통불사 법당을 짓기 위한 기초공사 중 석탑부재가 출토되어 현재의 자리에 옮겨 쌓았다고 한다. 탑은 많은 부분이 결실되어 있다.
기단갑석 위에 1층 지붕돌이 있고 그 위에 우주가 선명한 탑신석이 한 점, 다시 그 위에 복련이 새겨진 깨어진 부재 한 점이 올려져 있다. 기단갑석을 받치고 있는 돌들은 석탑재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남아 있는 부재가 많진 않지만 기단갑석과 1층 지붕돌로 미뤄볼 때 만만치 않은 크기의 아름다운 석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용문 출처: 문화재청, 전국문화유적총람, 한국사지총람, 역대인물종합정보]
첫댓글 석탑재 두 곳은 아직 미방문입니다. 참고할게요. 명암리불상은 내비에 입력하니 바로 도착한 것 같은데..
석탑재 한 곳입니다. 앞뒤에 올려서 혼란스럽게 한 것 같습니다. 무도리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통불사가 들어섰다고 합니다. 명암리미륵불은 내비가 근처 도로까지 안내했는데 조금 안쪽에 있는 불상을 발견하지 못한 제가 잘못한 게지요.
통불사 석탑재는 첨 보네요.. 제천.. 또 가야네요... ㅎㅎ
소악사지 석탑 입구에 표지판이 들어섰네요.. 한결 찾기가 쉬워진거 같습니다..ㅎㅎ
처음 가면 절까지 일단은.. 올라갔다가 내려오다가 찾는데...^^
저도 표지판 보며 그 생각했습니다.
다들 강천사까지 갔다 다시 내려와 찾으셨다던데, 오르는 길에 표지판이 보여 바로 차 세웠지요.
여기 말고도 비지정들에 표지판을 세웠더군요.
제천은 아직 마음먹고 가보질 못했습니다....
이리 견문을 넓혀주시니 추후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청주...^^
제천과 영동은 아무래도 사시는 데서 좀 멀어서 그런지 충북 다른 지역보다는 많이 가보시지 못하셨나봐요..
제천은 지난번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충분히 답사를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특히 서쪽과 남쪽은 못가본 곳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