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아신대 정종기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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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한국기독교의 화해
* 이 글은 ‘한국기독교의 수난과 화해’를 주제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 발표회(2023. 6. 9, 영락교회)에서 발표자로 나선 정종기 교수의 원고이다.-편집자
이 글은 화해에 관한 논문이나 핸드북이 아니다. 화해에 대해 고민한 것을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6·25전쟁의 결과로 분단의 고착화, 동족상잔의 비극, 냉전 지속, 그리고 원수가 되었다. 현 정부에 들어와 남북관계는 강대강 전략으로 대치의 정점에 있다. 이런 문제를 한국기독교가 해결한다면 그 방법은 ‘성경적 가치의 화해’이다.
화해는 기독교의 참된 가치이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부터 한반도의 통일신학을 발표해 왔다. 물론 1980년대 이전은 통일신학이라기보다는 통일운동으로 봐야 한다. 그 시대는 북한을 연구하기 버거운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가 통일신학을 제대로 발표한 것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주로 진보 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이후는 보수 학자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1980년대의 통일신학은 주로 성경의 역사인 이스라엘과 한반도의 유비적 연계로 분단과 통일을 조명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통일을 향한 실천적 과제가 등장하고, 평화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1990년대는 1980년대의 심화적 현상이 두드러졌고, 통일여성신학이 등장한다. 보수에서는 북한교회 재건에 대한 연구가 나왔고, 이때는 독일 통일을 배경으로 한 한반도의 통일을 접목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는 다양한 통일신학이 등장하여, 삼위일체, 조직신학, 윤리신학, 목회학 등의 배경으로 연구가 진행되었고, 남북화해와 탈북자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2010년대에는 2000년대에 나온 용서와 화해에 대한 연구가 발표된 흐름 속에서 6·25전쟁과 한국기독교의 화해를 생각해 본다.
화해는 한국기독교의 강단의 주요 제목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설교문을 살펴보면 마 5:23-24, 고후 2:5, 고후 5:18-21, 요셉과 형제들 이야기, 다윗과 사울, 탕자의 비유 등을 통해 화해는 성경적 가치로서 ‘신앙을 가진 자는 당연히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성도는 성경대로 화해의 증인이 되어야 하며 화해를 위한 사명을 가졌음을 설교한다. 이런 논리로 한국기독교가 6·25전쟁으로 인해 받은 고통이 있지만 당연히 화해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 왔다.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한국기독교의 화해를 다루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질문을 해본다. ‘화해를 꼭 해야 하나?’ 해야 한다면 ‘한국교회가 화해할 마음은 있나?’ 화해할 마음이 있다면 ‘누구와 화해해야 하며 어떤 준비를 했나?’ 화해할 준비가 되었다면 ‘어떻게 화해해야 하나?’ 즉 “화해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한다.
한국기독교는 6·25전쟁에 대해 꼭 화해해야 하나?
남북은 6·25전쟁으로 인해 서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6·25전쟁의 피해 당사자들인 기독교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기독교는 화해를 위해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데 그 첫째 이유가 성경말씀 때문이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신 일로 화해를 설명한다.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화해는 하나님이 화해의 주체자로 등장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화해를 통한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1 이런 은혜를 받은 인간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 용서가 병행된 화해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고, 나아가 하나가 되는 역사를 낳는다. 성자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는 십자가 죽음으로 나타난 구원사적 가치이다.(엡 2:11-15) 십자가 없이 진정한 화해는 없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버렸다.(엡 4:2-4) 성경은 성도라면 화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기독교가 화해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이다. 더 이상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화해 없는 평화와 통일은 없다. 일방적 평화는 더 많은 군사무기를 도입하거나 개발하여 힘을 축적할 뿐이고 일방적 통일은 힘으로 흡수하는 길뿐이다. 화해는 쌍방이 허락하는 것으로 한국기독교의 화해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한국기독교는 화해할 마음이 있나?
혹자는 북한의 고난의 행군 기간을 통해 한국기독교가 화해를 시도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화해할 마음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한국기독교의 화해의 대상은 누구인가?
한국기독교가 화해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했지만 실제로 한국기독교가 화해할 대상은 누구인가? 대상을 알아야 화해할 것이 아닌가? 대상에 따라 기억부터 화해까지의 적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로 화해의 대상은 인민군, 즉 그 당시 전쟁에 참여한 북한 군인들인가? 한국기독교는 이들을 공산당, 빨갱이로 여기므로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악마였고, 원수였다.
둘째, 화해의 대상이 북한의 기독교인가? 전쟁 당시 남아 처형당하거나, 유배당하거나, 사회적 불이익을 받은 기독교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그동안 챙기지 못해 미안하다’ 하고 화해를 청해야 하나,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북한기독교를 대표하여 화해의 대상자로 나설 수 있나?
셋째, 화해의 대상은 북한 정부인가? 북한 주민들은 용서와 구제의 대상이지만 북한 정부와 체제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넷째, 화해의 대상을 정할 수 없으니 그냥 ‘화해선언’ 하면 어떻겠냐고 해야 하나? 화해를 하려 해도 대상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니 한국기독교는 그냥 ‘화해선언’ 하고 6·25전쟁에 대한 짐을 벗어 버릴까?
화해의 대상을 정하기 어려운 한국기독교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화해를 할 때, 한국교회 성도 개인들의 피해를 포함해서 하는 것인가? 혹시 한국교회는 개인적 피해자들에게 있어서 제3자가 아닌가? 지금 피해자들이 살아 있는데, 한국교회가 전쟁에 대한 화해를 한다면, 그들은 영화 〈밀양〉에 나온 대사처럼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했단 말인가’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한국기독교는 가장 먼저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하나님과 진정한 화해를 하려면 속죄제사와 함께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물론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있지만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화해한 인간이 화목을 지속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단순히 예배를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결단과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나갈 때 가능하다. 북한과의 화해는 매우 어렵다.
한국기독교의 화해 방법 제안
기존의 화해 방법은 ‘가해자의 사과가 전제된 희생자의 용서로 화해가 이루어진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 방법이 타당성이 있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현실 안에서 그런 식으로 화해를 성취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가해자는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진실하게 사과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방식으로 갈등의 현실에서 화해를 제안하고 해결해야 한다.
1) 화해 프로세스
슈라이터는 화해 방안을 세 가지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화해를 개인적 화해와 사회적 화해로 나누고 사회적 화해는 국가라는 토대 위에서 ‘회개 → 용서 → 화해’라는 상징적 과정을 가진다고 하였다.2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회개, 그리고 피해자의 용서에 이어 쌍방의 화해가 이루어짐을 말한 것이다.
슈라이터의 화해 과정은 굳이 사회적 화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은 개인적 화해에도 적용된다. 슈라이터의 화해의 상징적 과정을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하고자 한다. 성경에서의 화해는 ‘회개 → 용서 → 화해’라는 상징적 과정만 거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전 단계인 ‘죄의 자각’과 ‘화해’의 다음 단계인 ‘화목’이 있다. 가해자가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정확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뿐만 아니라 화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최종의 결과가 아니라 ‘화목’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화해 프로세스’라고 칭한다면 화해 프로세스는 ‘자각 → 회개 → 용서 → 화해 → 화목’이 된다. 이 다섯 단계를 통해 6·25와 한국기독교의 화해를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다.
(1) 화해를 위한 첫 번째 단계: (죄의) 자각
화해에서 제일 어려운 과정이 첫 번째 단계인 ‘죄의 자각’이다. 성령의 가장 강력한 역사 중 하나는 ‘자기 죄에 대한 자각’이다. 영적부흥대각성은 죄의 자각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이다. 피해자에게 행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가해자가 알지 못한다면 피해자에게 ‘회개’할 수 없다.
물론 자각은 가해자만 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도 자신이 가해자로부터 어떤 일을 당했는지 정확히 그리고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가해자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희미해지고, 피해자는 피해에 함몰되어 잘못된 기억으로 가해자의 회개에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자각에 대해 미로슬라브 볼프는 『기억의 종말』을 통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잊기 위해서만 기억하시듯 우리는 용서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한다.”3라고 하였다. 미국의 신학자 월터 윙크는 ‘국가 폭력으로 큰 상처를 입은 사회가 회복되려면 가능한 한 많은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진실은 약이다.’4라고 하였다.
6·25에 대한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인식하고 있을까? 먼저 한국기독교는 6·25에 대해 가해자이며 피해자인 것을 기억하자.
① 피해자로서 한국기독교: 북한은 6·25전쟁을 통해 한국기독교에 어떤 피해를 입혔는가? 첫째, 이북지역 교회들의 월남이다. 전쟁 당시만 해도 남한 기독교인의 40%가 피난 이북노회 소속 교인들이었다.5 둘째, 전쟁으로 인해 남한에만 207개의 교회가 파괴되고, 706개의 교회가 피해를 입었으며, 500여 명의 목회자가 죽임을 당하거나 납북되었다.6 셋째, 해방 전후로 한국에서 교회의 분포 밀도가 가장 높았던 평북 용천과 의주 일대는 교인 대다수가 살육당했다.7 넷째,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회자 60여 명은 강제 연행되었다.8 다섯째, 전쟁으로 인해 젊은 목사들은 군인이 부족하여 기독교 의용병으로 끌려가서 낙동강 전선에서 대부분 전사했다.9 여섯째, 한국전쟁 기간 동안 남한 내 기독교인 1,145명이 북한 공산당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공식적인 연구결과가 나왔다.10 11
이 외에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피해를 본 한국기독교는 이런 일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지 못하면 6·25전쟁 때 당신들이 이런 일을 했다고 북한에 말할 수 없다.
② 가해자로서 한국기독교: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런 사실을 북한더러 인지하라고 한들 그들이 이런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회개를 할까? 북한은 이를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이 당한 것에 화를 낼 것이다. 6·25전쟁 시 한국기독교는 피해자인 것과 더불어 가해자이다. 한국기독교는 6·25 때 북한에 대해 가해자로서 어떤 일을 했는지 얼마나 알고 있나?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천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한화룡은 신천사건을 북한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 아니라 좌우익 간 싸움의 결과였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학살에 연루되었다고 한다.12 둘째, 북한 정부에 희생당한 개신교 신자들과는 반대로 국군이나 미군에 의해 북한 정부에 협조하던 조선기독교도연맹 신자들이 희생되기도 했는데, 용강군 진지동교회 장로 김석훈, 강서군 강서교회 장로 김광한, 정평군 무산교회 장로 한성도, 운산군 입석교회 장로 강처인, 안악군 봉산리교회 장로 김영섭, 평안남도기독교도련맹 위원장 윤재만 목사 등이 그런 사례이다.13 이러한 행위자가 국군과 미군이라 해도, 공산주의에 의해 고통받은 기독교인들이 배후가 되었다. 서북청년단도 한 예가 될 것이다.
북한은 6·25전쟁에 대해 가해자보다는 피해자 의식이 앞서 있다. 기독교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다. 우선 김정은 시대에 작성된 문서를 통해 북한이 6·25전쟁을 배경으로 기독교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숭미사대주의 사상을 가진 집단이고, 둘째, 미국의 앞잡이로 침략자이며, 셋째, 분열주의자이고, 넷째, 인민과 조국보다 교회 사업을 확장하려고 하는 자이다.’14고 하였다. 심지어 6·25전쟁 이전에 들어온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매우 컸다. 미국 선교사들은 인도주의 간판을 들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야수적인 만행을 서슴없이 감행15했다고 김일성이 말함으로 철저하게 기독교 만행에 대한 사상교육을 하였다. 김철란의 글을 보면 해방 전 미국 선교사들의 만행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의사로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은 병원을 세워 살인 만행을 저질렀고, 둘째,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전도함으로 노예적 굴종사상을 주입하였고, 셋째, 숭미사대주의 사상을 주입시켰고, 넷째, 교회당으로 오는 여인들을 능욕하고 항거하는 여성은 정신병자로 만들어 지하실에 감금하였으며, 다섯째, 배고파 떨어진 사과를 주워 먹은 아이의 이마에 청강수로 도적이라 적었고, 심지어 사냥개를 풀어 물어뜯게 하였으며, 여섯째, 교회당에 비밀지하실을 만들어 건설이 끝나면 동원된 사람들을 학살하였기에 ‘십자가는 조선 사람들을 사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들어 죽게 한 죽음의 십자가’라고 하였다.16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한쪽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쌍방 간에 소통이 되어야 하는데 한국기독교가 일방적으로 선언한다고 화해가 되는 것인가?
물론 기독교의 화해는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 하나님이 먼저 화해를 하신다. 화해의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생명을 주는 관계를 통해 피해자의 손상된 인간성을 회복하신다. 이것이 바로 화해를 통한 은혜의 경험이다.17 피해자가 신앙으로 은혜 가운데 가해자를 용서하면 희생자에게서 용서받은 가해자는 참회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화해가 전제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가해자로서 한국기독교는 피해자에게 ‘내가 은혜를 받아보니 잘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용서해다오. 그리고 우리 이제 화해하고 새롭게 살자.’라고 해야 하고, 피해자로서 한국기독교는 가해자에게 ‘내가 은혜를 받아보니 당신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내가 용서하겠소. 이제부터 형제로 살아갑시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간섭 없이는 안 된다. 야곱과 에서의 화해에서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미리 만져 놓으셨던 것처럼, 북한의 마음도 하나님이 미리 만져 놓으셔야 하는 것은 아닌가?
(2) 화해를 위한 두 번째 단계: 회개
회개는 가해자가 하는 행위이다. 피해자인 한국교회는 가해자인 북한으로부터 회개를 들어야 하고, 혹 한국교회가 가해자였다면 가해한 사실에 대해 회개를 해야 한다. 북한교회나 북한 정부가 회개할 리가 없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회개하라고 남한의 신학자들은 말한다. 어떤 이는 반공사상에 빠져 북한을 미워한 죄를 고백하라고 한다. 또한 북한교회를 폄하한 것을 회개하라고 한다.18
(3) 화해를 위한 세 번째 단계: 용서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누가복음 17장 1-4절)는 말씀은 한국기독교의 난제이다. 물론 그대로 실천하면 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되 마음으로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면 무엇을 용서할 것인가? 용서는 무조건적으로 주는 것이지만, 주는 쪽에서 건네고 받는 쪽에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선물이다. 용서를 받아들여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19 오대원 목사는 “한국교회는 화해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남과 북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입니다.”라고 하면서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서로 용서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통일에 이를 수 없다.”20라고 하였다. 즉 용서를 통한 화해가 있어야 한반도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한 것이다.
(4) 화해를 위한 네 번째 단계: 화해
조은식 교수는 ‘남북한 교회가 화해의 첫걸음으로서 죄책에 대한 고백을 통한 화해의 길을 열자.’고 주장한다. 사실 남북 간의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전쟁의 기억,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는 ‘누가 먼저 죄책을 고백하며 화해의 첫걸음을 디딜까?’라고 질문하면서 대부분의 남한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남한교회를 향해 죄책을 고백하라고 한다고 하였다. 반공사상에 빠져 북한을 미워하고 북한교회를 폄하한 것과 전쟁 시 행한 행동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다.21
칠십인 역 레위기 25장 9절과 민수기 5장 8절에서 속죄에 대한 말로, ‘힐라스모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속죄라는 단어는 쌍방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용한 속죄는 화해와 같은 단어로 사용되었다. 즉 갈라져 있는 쌍방이 하나가 되고자 할 때 화해의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화해라는 말은 당신이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즉 당신이 그 사람을 불쾌하게 했거나 혹은 무엇인가 빚을 졌을 경우이다. 6·25전쟁 때 한국기독교는 북한에 빚을 졌다.
(5) 화해를 위한 마지막 단계: 화목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성을 ‘화해, 화목, 화평’이라고 묘사했고(고후 5:18, 엡 2:14)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화해, 화목, 화평’을 이루는 삶이라고 지적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살전 5:13) 그리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마 5:24) 하고 말하고 있다.
화해와 화목은 어떻게 다른가? 성경 번역본은 화해와 화목이 섞여 있다. 화해와 화목의 차이가 무엇인가? 화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목이라는 말과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신약을 자세히 읽어보면 화목이 화해를 포함하는 말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의미의 말은 아니다.
첫째로 화목은 온전한 치유를 의미한다. 누군가 원수가 되었을 때, 가해자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가 용서함으로 화해할 수 있다. 이 둘은 화해 이후 서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을까?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아도 화해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 이후 상처치료가 되려면 가족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가족의 형태를 이루는 것이 바로 화목이다. 즉 화목은 화해와 용서를 포함하며 더 나아가 둘 사이의 갈등도 해소하는 것을 말한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 둘 사이는 화해를 했다. 에서가 야곱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야곱은 거부하고 제 갈 길을 갔다. 화해로 둘 사이의 갈등을 완전히 해결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서로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하는 화목의 단계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화목은 더 이상의 갈등이 없는 평화를 의미한다. ‘화목’(和睦)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שׁלם’(shelem, 셸렘)은 화목제물의 ‘화목’(和睦: peace)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שׁלם’(shelem, 셸렘)이다. 이 단어는 ‘화평하게 하다, 평화를 가져오다, 화목하게 하다, 보상하다, 이룩하다’ 등의 수많은 긍정적인 뜻을 갖고 있는 동사형 단어 ‘שׁלם’(shâlam, 샬람)에서 유래되어 화목이라는 뜻과 화목제물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남성 명사형 단어이다.
셋째로 화목은 더 이상 분열이 없는 하나 됨을 의미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화목이 이루어진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형제라고 부를 때 화목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화해를 이루어도 결과가 없다면 어떻게 되나? 예를 들어 요셉과 형들의 사건을 보면 가해자인 형들과 피해자인 요셉이 화해를 하였지만 죽을 때까지 불안해했다. 화해의 결과가 불안일까? 다른 예를 들어 에서와 야곱은 화해를 하였지만 야곱은 형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따로 살게 된다. 화해 이후 분리가 되었다. 또 다른 예로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한 후 불신이 계속 있었다. 화해 이후 화목을 이룬 예는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 사건이다. 아버지는 탕자를 향해 죽었다 살아온 내 아들이라 부름으로 온전한 가족이 되었다. 여기서 이 둘의 관계는 화해를 넘어 가족으로 하나 된 화목을 이루게 된다.
이런 의미의 화목이라면 6·25전쟁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화해는 더 이상 전쟁과 분열이 없는 하나의 통일국가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한국기독교는 좌우 이념으로 분열된 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 어찌 북한과 화목을 이룰 수 있을까?
성경에는 화해 프로세스의 모델이 있다. 그 모델을 통해 화해 프로세스를 이해해보자.
2) 성경의 화해 모델
(1) 요셉과 형들(창 42:9-25)
요셉과 형들과의 사이에서 형들은 가해자이고 요셉은 피해자이다.
① 죄의 자각: 가해자의 죄의 자각이 있었나? 요셉의 형들이 총리를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형들이 서로 한 말 가운데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창 42:21)라고 한 것에서 이미 그들은 가해자로서의 죄를 인지하고 있었다.
② 회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어떤 회개를 하였나? 가해자인 형들의 회개가 나타나지 않으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45:15)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 이후 아버지의 죽음 다음에 그들은 진정한 회개를 한다.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50:17)라고 하였다.
③ 용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 것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에서 나타나고, 이어 ‘당신들은 두려워 말라’(50:21)라고 하면서 형들을 용서하였다.
④ 화해: 형들과 요셉의 진정한 화해는 첫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형들은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50:15)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요셉은 그들을 용서하고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50:21) 함으로 화해를 이룬다.
⑤ 화목: 요셉은 형들의 가족들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았다.(50:22) 요셉은 가해자들인 형들과 함께 살며 화목을 이루었다.
(2) 에서와 야곱(창 27-33장)
가해자인 야곱과 피해자인 에서 관계에서 화해 프로세스를 찾을 수 있다. 에서가 피해자이고 야곱이 가해자인 것은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에서가 이르되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창 27:36)
① 죄의 자각: 가해자인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 사자들을 보내면서 한 말 가운데 ‘내 주(에서)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32:5)라고 한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한 말이라 생각한다.
② 회개: 성경에서 야곱이 에서에게 한 직접적인 회개를 찾을 수 없다.
③ 용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한 말 중에 ‘야곱이 이르되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34:10)에서 용서받았음을 알 수 있다.
④ 화해: 에서와 야곱의 화해는 에서의 말에서 묻어난다.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33:12) 피해자는 가해자와 화해한 후 함께 살기를 청하였다.
⑤ 화목: 에서와 야곱은 화목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에서는 가해자인 야곱과 함께 살기를 원했지만 야곱은 정중히 거절한다.(33:13-15) 세월이 지나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야곱은 결국 에서와 함께하지 않는다. 에서와 야곱은 화해는 하였지만 함께 사는 가족의 길을 택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갔다. 화해는 하였지만 화목에 이르지 못하였다.
(3)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눅 15:11-32)
가해자는 둘째 아들이고, 피해자는 아버지이다.
① 죄의 자각: 가해자의 가해 인식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눅 15:18)에서 나타나고, 피해자의 피해 인식은 나타나지 않는다.
② 회개: 가해자는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15:21)로 아버지 앞에서 죄를 고함으로 회개를 하였다.
③ 용서: 가해자는 용서를 받는 것이고, 피해자는 용서를 해주는 것인데 본문에서는 피해자가 용서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15:20)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춘 것’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 행위이다.
④ 화해: 가해자인 아들과 피해자인 아버지가 화해한 장면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15:22-23) 피해자인 아버지는 주위 사람들에게 아들을 용서했다는 표시를 보이며 화해의 절정을 이루었다.
⑤ 화목: 피해자인 아버지는 화해 이후 한 발언에서 화해 이후의 행보를 볼 수 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15:24) 아버지는 아들과 화해한 후 이제 다시 가족의 모습을 되찾았다. 화목은 가족이 되는 것이다. 화해해도 다시 가족이 되지 않는다면 온전한 화해라고 할 수 없다.
결론
화해 프로세스를 진행하기 위해 몇 가지를 제안함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화해 프로세스의 대상에는 세 영역이 있다. 첫째는 국가, 둘째는 시민사회, 셋째는 개인이다. 한국기독교는 시민사회 영역에 속한다. 세 영역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지만 서로 다른 영역이 있기에 이 중 하나가 화해를 했다고 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6·25전쟁으로 인한 화해는 개인 영역의 화해가 화해 프로세스를 진행하기 가장 쉬울 것이다. 그다음은 시민사회이고 가장 어려운 영역이 국가이다. 국가 영역이 가장 어려운 이유는 남북이 너무나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이웃 국가와 화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의 바탕에 가진 기독교적 가치가 있다. 남북은 공동 가치가 없다. 그래서 화해를 하기 가장 어려운 영역이 된다. 그나마 공동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영역은 시민사회 영역의 남북기독교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기독교가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결단을 해야 한다.
첫째, 6·25전쟁의 배경이 되는 이념을 뛰어넘어라. 물론 한국기독교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념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용납이 아니라 반공 프레임으로 북한과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과 반공이 신학이 된 경우이다. 이제 한국기독교는 북한도 피해자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화해는 이념의 갈등을 극복한 자들의 몫이다.
둘째, 남북이 만날 수 있는 일을 만들어라. 남북이 만나야 화해가 조성된다. 사실 한국기독교는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통해 화해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 안에는 검증과 확인이 안 되는 북한 지원은 핵개발에 사용되고 군부 유지를 위해 사용된다고 해서 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류도 있지만, 지속해서 지원하여 대화의 접촉점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한국기독교의 화해의 걸음이 될 것이다.
셋째, 피해자 보상을 하라. 6·25전쟁 때 한국기독교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면 북한의 피해자뿐 아니라 남한의 피해자까지 보상해 주었으면 한다. 남북 대화가 단절된 이 시점에라도 한국기독교가 북한에 피해자 보상을 하겠다고 나서보는 것이 어떠한지!
넷째, 주위를 둘러보라. 6·25에 대한 화해는 남북 문제를 넘어 중국, 러시아, 유엔 참여국 교회들과의 회개와 용서가 병행되어야 진정한 화해가 된다.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는 독일과 폴란드 교회가 이미 앞서 만남이 있었다. 목사와 신부들이 국가를 향해 화해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북한교회와의 만남을 지속해야 한다. 그런데 보수교단은 북한의 조그련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 북한의 실체가 없으니 한국교회 혼자서 화해를 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이 진정한 화해가 되나?
다섯째, 화해를 먼저 시도하라. 한국기독교가 화해를 먼저 시도하라. 화해는 쌍방이 하는 것이라 하지만 한국기독교가 먼저 회개를 하고, 용서를 하고, 화해를 시도한다면 어느 시점이 지난 후 한국기독교는 할 말이 생긴다. ‘우리는 이렇게 해 왔다고!’ 왜냐하면 화해는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22 먼저 화해를 시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북한에서 살지 못하고 나온 탈북자들과 탈북민들에게 한국교회가 ‘6·25전쟁 때 당신들의 가족들에게 잘못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말하면 어떨까?
여섯째, 기독교 역사학자들을 통해 가감 없이 6·25전쟁 시 일어난 기독교와 관련된 사건을 기록하고 한국교회에 가르쳐라.
일곱째, 화해의 결과는 북한의 복음화이다. 이것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한 전제이기도 하다. 즉 복음 없이 화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럽의 경우 그 배경에는 복음이 있었다. 즉 유럽의 화해의 배경은 이미 유럽이 복음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아직 복음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6·25에 대한 한국교회의 화해는 어렵다고 본다. 북한이 복음화된다면 한반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의 목표가 아닌가 생각한다.
화해는 머리로는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신앙으로 해결하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화해는 단독적인 행위가 아닌 다섯 단계를 가지며, 화해는 화목을 목표로 삼는다. 이 화해 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의 화해 실천은 이 땅에 6·25전쟁과 같은 비극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주(註)
1 조은식, “남북화해를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 「선교신학」 제31집 (2012): 347.
2 Robert J. Schreiter,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Spirituality & Stratergies (New York: Orbis Books, 1998), 64.
3 미로슬라브 볼프, 홍종락 옮김, 『기억의 종말』(IVP, 2016).
4 한화룡, 『전쟁의 그늘』(포앤북스, 2015), 27.
5 탁지일 외, 『6·25전쟁과 한국교회』(CLC, 2020), 88.
6 탁지일 외, 위의 책, 17.
7 탁지일 외, 위의 책, 84.
8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엮음, 『해방 후 월남 기독교인의 활동과 통일』(도서출판 선인, 2018), 69.
9 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한울, 2021), 153.
10 “한국전쟁 중 학살당한 기독교인 1,145명”(http://chdaily.tistory.com/1217), 2023. 5. 27.
11 그 당시 개인적인 아픔을 가진 피해자들이 있다. 거창 위천에 살았던 신은순 씨는 부친인 신봉성 씨가 새벽기도를 하던 중 인민군에게 잡혀 구타당하는 장면을 목격할 때 ‘너희 같은 기독교인들 때문에 부산까지 점령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다 죽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봉성 씨는 사망하고, 곧이어 인민군이 마을에 와서 신은순 씨의 큰오빠인 신호범을 의용군으로 끌고 가 결국 낙동강 전선에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
12 한화룡, 앞의 책, 142.
13 나무위키에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검색(https://namu.wiki/w/조선그리스도교련맹), 2023. 5. 27.
14 정윤일, “종교인들을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
15 김철란, “해방전 우리 인민들에 대한 미국선교사들의 야수적인 살인만행과 그 범죄적성격,” 김일성종합대학학보(력사,법률) 주체105(2016)년 제62권 제4호 재인용. 김일성, 『김일성전집』 제12권, 32-33.
16 김철란, “해방전 우리 인민들에 대한 미국선교사들의 야수적인 살인만행과 그 범죄적성격,” 김일성종합대학학보(력사,법률) 주체105(2016)년 제62권 제4호.
17 조은식, 앞의 글, 347.
18 조은식, 위의 글, 346.
19 미로슬라브 볼프. 앞의 책, 제10장.
20 “복음통일의 최우선 과제는 ‘화해와 용서’,” 「데일리굿뉴스」, 2017년 1월 23일.
21 조은식, 앞의 글, 346.
22 Robert J. Schreiter, 앞의 책, 65.
정종기|아신대학교 북한선교학과 교수이자 고신총회 통일선교원 원장이다. 저서로는 『통일목회를 위한 디딤돌』, 『북한선교개론』, 『남북통합목회의 물결』(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