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P>
<P> 사랑하는 당신께</P>
<P><BR> 창밖은 칠흑처럼 깜깜합니다. 멀리서 밤길을 달리는 차 소리가 다가오다가 <BR>사라졌습니다. 아마도 인적이 드문 길에서 무척 속력을 내었나봅니다. 제 <BR>등줄기가 그 차소리를 따라서 쭈욱 굳어오다가 다시 편안해집니다. 혹여라도 <BR>당신이 오시나 했었나봅니다. 당신은 바쁜 사람인데 말이에요. </P>
<P><BR> 지금 막 청소를 마쳤습니다. 그릇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옷장 속의 옷들을 <BR>차곡차곡 개어놓고 먹다 남은 냉장고의 음식들도 버렸습니다. 빨래하는 내 <BR>손이 안쓰럽다면서 당신이 손수 골라주셨던 하늘색 세탁기 속에 들어 있는 <BR>빨래는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가 사실은 조금 혼자서 웃기도 했습니다. </P>
<P> <BR>왜냐구요? 빨래라니요. 사실 이 밤중에 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BR>그것도 이웃에서 행여 누치챌까봐 조심조심 그릇들을 챙기고 내 삶을 <BR>정리하면서, 그러면서 빨래라니요... 그런 자신이 조금 어처구니도 없고 그랬기 <BR>때문에 웃었던 겁니다. 하기는 그보다 더 우스운 일은 그 다음에 생겨났습니다. <BR>저는 세탁물을 뒤졌지요. 쿰쿰한 냄새가 나는 빨래 속에서 당신의 팬티와 <BR>런닝셔츠를 발견하고 그것을 손으로 문질러 빨았습니다. 언제나처럼... 하기는 <BR>그 옷을 손으로 빨기 전에 대야를 챙기고 비누를 꺼내들면서, 저를 비난 하던 <BR>한 친구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중독이라구요... 제가 당신을 위해 빨래를 하고 <BR>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는 것, 그녀는 그런 일들을 중독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BR>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중독되어 있다나요... 하지만 그 친구가 <BR>무어라 하든 저로 말하자면 당신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소중해지는 <BR>마음입니다. "그것도 중독이야." 그 친구는 말했지요. 그래요, 그래서 웃음이 <BR>나왔습니다. 웃으면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담담하구나, 하고 말이에요.</P>
<P><BR> 지금 저는 당신과 늘 마주않아 있던 식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BR>잠시 고개를 들어 보니 집안이 윤이 납니다. 냉장고 손잡이에 붙은 <BR>알루미늄판이 거울처럼 반짝입니다. 싱크대 구석이나 가스레인지 아래에 낀 <BR>때는 너무 오래되어서 애를 먹기도 하였습니다만, 철수세미로 문지르고 <BR>문질렀더니 겨우 제 빛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마의 땀을 닦아가며 그것들을 <BR>윤내다가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세월들을 이렇게 <BR>닦아낼 수만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많은 눈물과 땀방울을 <BR>흘려서라도 처음처럼다시 윤이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BR>말입니다. 잠시 저는 수세미를 손에 든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대체 왜 <BR>이러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것도 중독일까요... 아닙니다. <BR>중독이라니요... 당신에 대한 제 사랑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싫습니다... <BR>잘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요, 습관이라는 말이 좋겠지요... 별로 마음에 <BR>드는 단어는 아니지만 중독보다는 병적으로 들리지 않아서 좋은 것 같군요. <BR>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 놓자고 <BR>펜을 든 것은 아닙니다. </P>
<P><BR> 오늘 오후엔 백화점에 다녀왔더랬습니다.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지요.<BR> 어제까지는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더랬습니다. 어제는 당신도 아시다시피 <BR>김장을 했거든요. 절여놓았던 배추를 물에서 건져 소쿠리에 받쳐 물기를 <BR>빼놓고, 커다란 무를 씻어서 채를 썰었습니다. 그러고는 멸치젓을 달여서 <BR>한지에 받쳐 즙을 걸러내놓고 갓하고 미나리도 다듬어 씻어놓았습니다. 며칠 <BR>전에 까놓은 마늘을 절구에 빻고 김칫속을 버무렸습니다. 일을 마치고 보니 <BR>벌써 경울의 짧은 해가 졌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올 <BR>겨울 내내 당신하고 이 김치를 먹겠구나, 하고 말이에요. 멸치다시를 낸 물에 <BR>잔치국수를 삶아 넣고는 볶아놓은 쇠고기 고명과 시금치 웃기를 얹고 이 김치를 <BR>얹어 먹으면 문득 겨울밤도 훈훈해지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BR>있겠구나... 저는 조금 들떠버렸었나봐요. 당신의 회사로 전화를 <BR>걸어버렸으니까요. 당신은 또 늦으시겠다고 했습니다. 내 귓가에 들려오는 <BR>당신의 목소리 너머로 또다른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컴퓨터의 프린터가 <BR>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이어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BR>겨우 말했습니다. "김장을 했어요... 열 표기를 담갔어요. 배추가 아주 <BR>달아요." "정말 피곤하다니까..." 저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BR>말했습니다. 당신을 피곤하게 하는 제가 정말 미웠습니다. 당신은 괜찮다고 <BR>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다시 한 번 말했습니다. <BR>저는 정말 나쁜 여자인가봐요. 당신은 괜찮다고, 바쁘니까 그냥 끊자고 <BR>하셨습니다. 괜찮다는 당신의 말에 용기를 내어서 저는 말했습니다. 굴이 <BR>싱싱하길래 조금 샀어요. 사태도 조금 샀어요. 보쌈을 좋아하시잖아요. <BR>된장하고 고추장을 섞어 배춧국도 끊였어요... 오늘 저녁은 꼭 집에 와서 <BR>드세요... 아닙니다.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셨지요? 말을 다 마치기 전에 <BR>뚜우뚜우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이 끊으신 건가요? 아닙니다. 그저 전화가 <BR>끊겼을 거예요. 우리 집 전화는 당신의 회사 다이얼만 돌리면 이상하게 고장을 <BR>일으키곤 하니까요. 당신이 그러셨잖아요. 당신 회사의 전화 상태가 좋지 <BR>않다고... 저는 어제 밤 열두시가 되어서 보쌈을 먹었습니다. 돼지고기 사태를 <BR>, 마치 아몬드처럼 길쭉하게 모양도 예쁘게 빠진걸로 정육점에 부탁해서 <BR>한근이나 사두었었는데 그걸 삶아서 다 먹었어요. 살이 찌려나봅니다. 당신은 <BR>살이 쪄도 절 사랑하신다지만 전 살찐 여자는 싫어요.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BR>결혼과 함께 은퇴했다가 살이 잔뜩 쪄서 돌아온 탤런트를 두고 당신은 <BR>말씀하셨죠. 정말 보기 싫군...<BR> 아닙니다. 전 살이 찌지 않도록 노력해왔어요. 당신과 함께한 지 삼년이 <BR>지났지만 전 아직 처녀 때 스커트를 입을 수 있거든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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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래요, 오늘은 백화점에 갔었어요... 스커트를 한벌 샀어요. 비둘기색 개버딘이에요. 처음에 <BR>한 번만 드라이를 해주면 그 다음에는 손빨래를 해도 된대요. 세일이 끝나서 <BR>한산한 매장을 뱅글뱅글 돌면서 검정 카디건도 한벌 샀습니다. 흑진줏빛 <BR>블라우스도 한벌 사고 공단으로 만든 리본이 달린 자주색 구두도 한 켤레 <BR>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주색 꽃 무늬가 화려한 스카프도 하나 사려고 했는데 <BR>그만 지갑이 텅 비었더군요... 그동안 당신이 주신 반찬값을 조금 아껴서 <BR>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찾았거든요. 저는 매장에 있는 아가씨에게 그건 다음에 <BR>와서 사겠다고 말했습니다. 꼭 사고 싶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BR>말했습니다.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쓰는 상투적인 핑계처럼 보이려고 <BR>일부러 별로 미안한 표정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여자가 와서 그 <BR>스카프를 만지작거렸어요. 단발머리를 하고 헐렁한 청바지를 입은 채 유모차를 <BR>끌고 있던 그녀의 손 위로 그 스카프를 넘겨주었을 때, 마치 그 스카프가 <BR>가시덤불로 짠 거친 직조물처럼 제 가슴을 스쳐가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는 <BR>그것을 목에 둘러보고 결국 그것을 샀습니다. 저는 다른 스카프를 고르는 <BR>척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유모차에 앉아서 빤히 저를 <BR>바라보던, 토끼 모양의 목도리를 두른 아이의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BR>당신이 지난달에 제가 모은 적금을 다 가져가셨다는 걸 이야기하려는 것도 <BR>아니구요. 아닙니다. 그게 아닌데 글이 왜 이렇게 써지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BR>제 느낌을 숨김없이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집으로 <BR>돌아온 저는 새로 산 옷들을 옷걸이에 잘 걸었습니다. 바라보니까 참 <BR>좋았습니다. 저걸 입고 어딜 가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갈 곳이 <BR>없었습니다. 제게는 저런 차림으로 갈 곳이 없어요. 대리점도 <BR>그만두었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혼자서 그 옷을 입어보았습니다. 구두도 <BR>신었어요. 방안의 장판이 구둣굽에 상처입을까봐 조심조심 걸어도 보았습니다. <BR>저는 지금 그 옷을 입고 이 글을 씁니다.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보기는 정말 <BR>처음입니다.</P>
<P><BR> 우리가 처음 만나던 무렵에 저는 정말 촌스러웠지요. 당신이 그러셨잖아요... <BR>보따리만 들려놓으면 영락없이 서울역 앞의 갓 상경한 소녀 같다구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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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실은 뒤돌아보기도 싫은 시절입니다. 오빠 등록금 대기가 빠듯했어요. 제가 살던 그 <BR>소도시에 있던 여대 앞엔 나가보지도 않았지요. 너무나 입고 싶은 옷이 많아서 <BR>언제나 그 거리를 피해다녔답니다. 저 여대생들은 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BR>옷가게에 걸린 옷들을 저렇게 잘도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더는 하기 <BR>싫었던 스물한살, 그때 나의 삶은 언제나 귀에서 아린 겨울바람 소리가 <BR>났습니다. 그때 당신이 당신이 내 앞에 와주셨지요. 당신은 제가 근무하던 <BR>잡화점에 면도기를 사러 오셨습니다. 출장을 왔는데 그만 면도기를 빼놓고 <BR>왔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그때 당신에게선 벌써 애프터 셰이브 로션의 <BR>향취가 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은 신용카드를 내미셨지만 우리 가게에선 <BR>그때 신용카드를 받지 않았지요. 당신은 몹시 당황해하셨습니다. 전 당신에게 <BR>그냥 맘에 드는 물건을 가져가시고 대금은 다음에 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BR>당신은, 서울에서 오신 당신은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날 어떻게 믿느냐고 <BR>말이지요.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은 믿을 수 있는 분 같았습니다. 그러니 <BR>혹시 그게 운명은 아닐까 하고 저는 그후 내내 생각했습니다. 다음달에 다시 <BR>그 도시에 오신 당신으 제게 말했지요.</P>
<P><BR> "아가씨, 서울로 취직하고 싶지 않아?"<BR> 그래요, 서울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다시금 기억이 살아납니다. 마치 <BR>오래 덮어두었던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선명하게 말이에요... 제가 <BR>스물한살이던 그때 그 소도시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성당이 있었습니다. <BR>그 성당의 마당에는 성모상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 <BR>성모상을 지나치면서 늘 빌었습니다. 아아, 나를 이곳에서 탈출시켜주세요. <BR>누군가가 와서 내 삶을 뒤흔들게 해주세요... 저는 한 번쯤 내 귓가에도 <BR>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스치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쁜 옷을 입고 영화 구경을 <BR>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고 싶어... 나에게도 그럴 권리는 있잖아? <BR>누군가게에 그렇게 대어들고 싶기도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내게 <BR>물어주셨던 겁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모르겠어요. 얼굴도 붉히지 <BR>않고 저는 말했습니다. 저를 서울로 데려가주시겠어요?</P>
<P><BR> 저는 당신의 전화번호를 들고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BR>도와줄 사람은 당신 한분뿐이었어요. 공중전화를 들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BR>누르는데 그 전화의 꼬불거리는 줄이 마치 제가 이 세상에서 붙들고 있는 <BR>유일한 줄, 이런 표현이 괜찮다면 마치 탯줄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BR>어머니이고 저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인 듯이 말이에요. 만일 <BR>당신이 그 전화가 이어진 그 선의 끝에계시지 않으면 숨이 턱하고 막혀버릴 <BR>듯이 겁이 났었지요. 당신은 거기 계셨습니다. 오래전에 예정된 운명처럼요. <BR>그리고 저는 당신 친구의 전자대리점에 취직했습니다. 당신은 자주 대리점에 <BR>오셨어요. 가끔 절 데리고 나가 양식을 사주시기도 했지요. 처음 포크와 <BR>나이프가 여러개 있는 식탁에 앉았을 때 제가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당신은 <BR>모르실거예요. 그것들은 내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처럼 식탁 <BR>위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P>
<P><BR> 당신은 당황하는 제게 무척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맥주를 몇잔 드시고 <BR>저를 빤히 바라보셨지요. 제가 예쁘다는 말을 하실 때 떨리던 당신의 입매를, <BR>그 입매의 괴로운 듯한 뒤틀림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BR>기혼자였고 한 아이의 아빠였음을 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BR>아이의 아빠이며 한 여자의 남편인 당신... 여기서 그만 당신과의 만남을 <BR>끝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이미 이루어좋은 생애에 <BR>끼여드는 건 옳지 않다고 다짐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BR>꼭 그만큼의 끌어당김이 내 마음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 <BR>자리였습니다. </P>
<P><BR> 그래요. 그 자리를 맴돌던 제게 어느날인가는 또 당신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BR>대리점 사장님인 당신 친구분하고 당신하고 또 한 친구분-당신들은 아주 어릴 <BR>때부터 친구라고 말했습니다-들이 모여서 갈비를 먹기도 했지요. 그때 우리 <BR>대리점 사장님이 저를 보고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BR> 좋은사람...<BR> 또 한 친구분도 말했습니다.<BR> "이놈 정말 좋은 놈이에요."<BR> 그 며칠 후인가 당신이 제게 여행을 제의하셨을 때 제가 당신을 따라나선 <BR>것은 아마도 그 말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사람, 좋은 남자... 나는 사람들이 <BR>어떤 여자를 가리킬 때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BR>나는 당신의 제의를 무겁게 받아들였습니다. 좋은 남자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BR>그것도 당신하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였던 사람들이 한 말을 제가 어떻게 믿지 <BR>않겠습니까... 대천 바닷가에 엷은 주황색 노을이 깔릴 때, 그 노을이 <BR>바라다보이는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당신은 지금 별거중이라는 말씀을 <BR>하셨습니다. 곧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것이고 그리고 괴롭하고요... 당신 <BR>아내의 의심증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남자인 당신을 당신의 <BR>아내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다고요. 직장을 여러번 옮긴 것도 그 아내 <BR>때문이었다고요.</P>
<P><BR> 도망가고 싶은 의무감과 당신 쪽으로 끌려가고 싶은, 팽팽히 이어진 내 <BR>마음의 망설임이, 그 팽팽한 현이 제 가슴속에서 툭, 끊어져버렸습니다. <BR>의처증에 걸린 남자의 아내를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저의 <BR>어머니였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였던가요, 사료값도 안 되는 값으로 소를 <BR>팔아버린 후 아버지에게서 도지기 시작한 그 병... 한 사람이 한 사람을 <BR>터무니없이 의심할 때 오는 불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였기에 당신을 <BR>받아들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뜬눈으로 새운 제 귓가에 밤새 파도소리가 <BR>들렸습니다. 내 귓가에서 처음으로 겨울바람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당신의 <BR>목에 팔을 두르고 말했었지요.<BR> "전 당신에게 좋은 여자가 되고 싶어요."<BR> 그래요, 그 밤에 당신이 먼저 잠드셨을 때 저는 혼자 다짐했습니다. 좋은 <BR>여자가 되겠다고 말예요.</P>
<P><BR> 당신은 저를 자주 찾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속옷도 빨아드리고 머리도 <BR>잘라드렸습니다. 머리를 자르려고 목욕탕에서 커다란 보자기를 두르고 앉은 <BR>당신의 모습은 천진한 소년 같았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이 <BR>사람을 악마 같은 부인으로부터 구해드리자고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옥 <BR>끝까지라도 뛰어들겠다고요. 아아, 정말이지 내 몸 하나 부서져서 당신을 구할 <BR>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 같은 건 조금도 무섭지 <BR>않았습니다. 당신은 내게 좋은 분이셨으니까요. 당신은 정말 좋은 <BR>남자였습니다. </P>
<P><BR> 그리고 일년 후 우리는 산부인과로 갔지요... 의사는 경고했지요, "세 번이나 <BR>이러시면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고 말이에요. 당신은 <BR>울먹이셨습니다. 미안하다고 내 손을 잡고 몇번이나 말씁하셨습니다. 저는 <BR>울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이해했으니까요. 당신 부인이 아이를 낳고 난 후 <BR>의심증이 생겼지 때문에 당신은 아이가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렇게 <BR>될까봐 무섭다고 하셨습니다. 전부인하고의 상처가 너무 깊다고 <BR>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내 뱃속에서 세 번째나 <BR>꿈틀거리는 이 생명들에 대해 더 집착이 생기기 전에 없애버리고 싶은 <BR>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사랑을 잃지 않는 방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BR>당신은 괴로워하셨습니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BR>고개를 저었지만 당신은 믿지 않으시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마취에서 덜 <BR>깨어나 힘이 없었던가봐요. 저는 더 힘차게 고개를 저어드릴 수 있었는데 <BR>말이에요.</P>
<P><BR> 당신은 그 며칠 동안 회사에 휴가를 내고 저를 간호해주셨습니다. 제 건강은 <BR>이미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대리점도 그만두고 늘 누워야 했었으니까요. 그러던 <BR>어느날인가 제가 기운을 좀 차리자 당신은 제 손을 이끄셨습니다. 우리는 <BR>강변으로 드라이브를 나갔지요. 봄볕이 강물 위로 쏟아져내리고 벚꽃이 흩어져 <BR>휘날렸습니다. 저는 당신의 옆좌석에 앉아서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볕을 <BR>쬐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좋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이마에 손을 <BR>짚었습니다.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였습니다. 내 인생의 겨울바람 소리는 <BR>당신을 아게 된 후 사라졌지만 이 화사하기만 한 봄볕은 어쩐지 저와 어울리지 <BR>않는 것만 같아서 겁이 났습니다. 내 행복감이 이 봄날의 꽃이파리처럼 그저 <BR>흩날려버릴 것만 같아서 저는 두려웠던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강변이 잘 <BR>내려다보이는 까페에 차를 세우셨고 우리는 그리로 들어가 싫토록 봄 강물을 <BR>바라보았습니다.</P>
<P><BR>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당신은 그 집의 토분항아리에 가득 꽂힌 <BR>패랭이꽃 다발 앞에 서 계셨습니다. 저 역시 아까부터 그 황토색 토분에 가득 <BR>꽂힌 연보라색 패랭이꽃다발을 누여겨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꽃은 참 <BR>아름다웠습니다. 엄지손톱만한 수백의 꽃송이들로 이루어진 패랭이꽃 다발...<BR> 자리로 돌아온 당신은 물으셨습니다.</P>
<P><BR> "저 꽃이 조화일까 진짜일까?"<BR> 우리는 함께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꽃은 완벽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BR>연보랏빛은 진줏빛 광택을 발하고 있었고 잔디잎새 같은 연초록 이파리는 <BR>알맞게 늘어져 있었으니까요. 당신은 조화 같다고 하셨고 저는 진짜 패랭이꽃 <BR>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기를 걸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물으셨습니다.<BR> "왜 진짜라고 생각하지?"</P>
<P><BR> 저는 머뭇거렸습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BR>아까부터 그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저는 그 아름답기만 한 꽃의 아랫부분, <BR>그러니까 토분과 맞닿은 언저리에서 시들어 누렇게 된 이파리를 하나 발견했던 <BR>겁니다. 조화라면 그런 걸 만들 필요가 없었겠지요. 시퍼렇게 살아 날뛰는 <BR>것만 만들어도 되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가짜입니다. 살아 있는 것에는 <BR>분명히 생채기가 있습니다. 촌에서 자란 사람은 누구나 그걸 알고 있습니다. <BR>들꽃이나 나무에도, 새나 강아지나 들고양이에도, 하다 못해 구르는 돌멩이까지 <BR>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생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그걸 <BR>설명해드리고 싶었지만 당신이 웃으실까봐 겁이 났습니다. 터무니없다고도 <BR>말씀하실 것만 같았어요.</P>
<P><BR> 당신은 고개를 갸웃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BR> "정말 알 수가 없군."<BR> 우리는 말을 멈추고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BR>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토분 어저리에 있는 <BR>누렇게 시든 이파리를 집어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생각을 겨우 <BR>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BR> "이건 그저 우연히 끼여든 불순물일 뿐이라구."</P>
<P><BR>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습니다. 당신은 좋은 생각이 있다면 주인 모르게 <BR>패랭이꽃 한송이를 집어내셨습니다. 패랭이꽃은 진줏빛 광택을 입힌 듯 <BR>으느은하게 빛났습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꽃 같았습니다. 당신은 잠시 <BR>궁리하더니 그 연한 연보라색 꽃이파리를 손톱으로 누르셨습니다. 그것이 <BR>가짜꽃이었다면 당신의 손톱 밑에서 구겨졌다가 다시 펴지겠지만 진짜꽃이라면 <BR>다시는 예전처럼 꽃이파리를 펼 수 없겠지요... 아아, 그런데 그것은 살아 있는 <BR>꽃이었습니다. 당신의 손톱 끝에는 금방 푸른 물이 들어버렸고 당신의 <BR>손아귀에 있던 패랭이꽃은 푸른 즙의 덩어리가 되어 사라져버렸습니다. 뭉개진 <BR>꽃은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당신은 낭패한 표정을 <BR>지으셨습니다.</P>
<P><BR> 우리는 그날 해가 질 무렵 노을을 마주보며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운전을 <BR>하시는 당신의 손톱 밑에 푸른 패랭이물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BR>불길한 징조였을까요? 저는 그후로도 오래오래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산 <BR>것을 짓이긴 벌이었을까요? 당신은 저의 집에 발길이 뜸하시게 되었습니다. <BR>그리고 밤마다 제 가슴속에 패랭이꽃이 피었다가 짓이겨져 푸르게 <BR>물들었습니다.</P>
<P><BR> 그리고 가끔은 비가 내렸습니다. 제가 세들어 사는 집의 낡은 한옥기와 <BR>위로도, 너무 오래되어서 얇은 꺼풀이 일어나는 나무로 된 저의 창틀 위에도 <BR>비는 내렸습니다. 당신의 아내가-아,내,라는 말을 쓰기가 힘이 듭니다. 아내가 <BR>그분이니 저는, 저는 당신의 무엇이 되는 겁니까? 당신은 어찌하여 제게 단 <BR>하나의 이름도 허락하지 않으셨나요?-저를 찾아온 날도 그랬습니다. 제가 문을 <BR>열었을 때 그분은 낡은 감색 우산을 쓰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눈동자가 제 <BR>눈과 마주쳤습니다. 바라보시는 눈빛이 어찌나 서글프던지 저는 눈길조차 <BR>돌리지 못하고 멍청하게 그분의 동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은 끝내 제 <BR>방안으로 발길을 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제서야 그분의 눈 아래에서 귓가까지 <BR>검푸르게 덮인 기미자국을 저는 볼 수 있었습니다. 입매가 선명해서 자존심이 <BR>센 분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만 그분은 저를 한참이나 바라보시다가 <BR>말했습니다.</P>
<P><BR>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생겼다고 전해줘요."<BR> 그분의 눈매가 왜 그렇게 슬퍼 보였을까요? 저는 덜덜 떨면서 그분이 딛고 <BR>선 땅위에서 그분의 흰 카바 위로 튀어오르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BR>빗방울 속에 흙탕물이 튀기고 그분의 낡은 구두코는 질퍽하게 젖어 있었습니다.<BR> 그리고 그분은 가셨습니다. 이 말을 당신께 이제서 전해도 될까요? 그분은 <BR>가시기 전에 다시 말했습니다.<BR> "아가씨도 돈을 떼었나?"<BR>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드렸어요" 대답하고 <BR>싶었지만 그분의 말이 제 입을 막았습니다.<BR> "정신차려요. 그 인간은 악마야."</P>
<P><BR> 그날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요, 이제사 다 고백할랍니다. <BR>저는 그 길로 뛰쳐나가서 당신의 회사 앞으로 갔습니다. 어떻게 당신의 오랜 <BR>친구가 하는 말과 당신의 아내였던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렇게 다를 <BR>수가 있단 말입니까. 저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제 일생을 걸었는데 <BR>이제사 당신의 아내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당신이 악마라고 하다니요...</P>
<P><BR> 퇴근하는 당신은 낯선 여자와 함께 계시더군요. 저는 밤 열두시 반 종로 3가, <BR>알전구가 늘어진 그 많은 포장마차의 대열 속에 당신들 둘을 두고 집으로 <BR>돌아왔습니다. 당신들은 몹시 취해 있어서 제가 그 곁을 스치고 지나가도 아무 <BR>기척도 느끼지 못하시더군요. 그래요, 저는 그날 밤부터 잠들지 못했습니다. <BR>천개의 눈을 가지고도 제가 가진 보물을 지키기 위해 한 개의 눈은 감지 않고 <BR>부릅뜬 전설 속의 용처럼 눈을 감지 못했던 겁니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제 <BR>마음 속의 한눈은 퍼렇게 눈을 뜨고 제가 사는 집 밖의 좁은 골목길과 큰길가의 <BR>버스정류장과 아스팔트 위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당신은 어떤 <BR>여자와 함께였습니다. 당신은 거기서 다른 소녀에게 포크와 나이프를 쥐는 <BR>법을 가르쳐주고 당신은 거기서 한 여자에게 돈을 받아내고 또 거기서 당신은 <BR>패랭이꽃을 짓이겨서 그 여인의 눈 아래에서 귀밑까지 파란 꽃물을 들이고 <BR>계시더군요.</P>
<P><BR> 처음에 저는 몹시 울었습니다. 당신이 오신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장을 <BR>보고 상을 보아두었지만 당신의 얼굴을 보면서, 당신이 제가 끓인 생태찌개를 <BR>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 드시는 모습을 보자 그만 참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BR>당신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P>
<P><BR> 남자는 달라, 마음이 없어도 여자를 만나고 이빨을 쑤시고 그리고 잠을 잘 수 <BR>있어... 그럴 때 남자들은 좋은 줄 알아? 남자도 괴롭다구... 하지만 그게 <BR>남자야. 여자들은 그럴 수 없지... 그게 남녀의 차이야.<BR> 그래요, 저는 당신의 말을 믿었습니다. 저를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요. 저의 <BR>엄마를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내를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BR>세상에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면 자지 않습니다. 그래요... 떼를 쓰듯 <BR>제가 반박하자 당신은 또 말씀하셨습니다.<BR> 창녀들은 다르지... 걔네들은 그런 여자의 속성 때문에 희생되는 여자들이야. <BR>그러니까 여자도 아니지.</P>
<P><BR> 당신은 울고 있는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셨습니다. 그러고는 말씀하셨지요. <BR>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라고,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함께 <BR>자는 건 그저 아무 일도 아니라고... 그건 사랑하고는 분명 다른 일이고 저를 <BR>보면 애처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요. 제가 울면 당신 가슴이 너무나 <BR>아프다고요.</P>
<P><BR>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추호도 당신의 사랑을 의심해본 일이 없습니다. <BR>남자니까 그러실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물론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BR>이 순간까지 제 생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BR>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 사실도 의심해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남자를 <BR>가리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여자를 가리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BR>것과 다르다는 걸 알지 못했던 것뿐입니다.</P>
<P><BR> 이제 새벽이 오려나봅니다. 언젠가 당신과 함께 가서 보았던 연극의 한 <BR>장면처럼 창밖이 푸르게 변해갑니다. 깊은 강물처럼 그윽하게 푸른 빛입니다. <BR>저는 이제 이 글을 마쳐야 합니다. 그리고 떠나야겠지요, 아침이 오기 전에. <BR>그래서 방안으로 비춰드는 보자기만한 햇빛에도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BR>이끼라도 낀 것처럼 검푸른 제 얼굴의 기미가 보이기 전에 말이에요.</P>
<P><BR> 사랑하는 당신, 이 글의 서두에서 제가 말씀드린 제 친구는 제게 그랬습니다. <BR>당신을 떠나라고요.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에게 이야기를 <BR>꺼내기 훨씬 전인 맨 처음부터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BR>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요. 사랑했기 때문에, 이미 운명이라고 느껴버렸기 <BR>때문에, 그리고 어떤 기약의 징표처럼 제 얼굴에 돋은 검푸른 기미 때문입니다.<BR> 저는 당신께 애원했었습니다. 술에 취해 가끔씩 찾아오는 당신 앞에서 <BR>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건 저뿐이고, 다른 <BR>여자는 그저 다른 여자일 뿐, 아무 의미도 아니라고...</P>
<P><BR> 사랑하는 당신.<BR>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해주셨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요. 옛날 옛날에 어떤 <BR>여자가 살았답니다. 그 여자에게는 글공부를 하는 남편이 있었는데 남편이 늘 <BR>과거에 떨어지는 바람에 살림은 너무나 가난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BR>비장한 각오로 서울로 시험을 보러 떠나고 여자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답니다. <BR>그날 밤, 그 여자를 사모해오던 동네 머슴이 그녀의 집으로 뛰어들어 여자를 <BR>안으려 했답니다. 여자는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답니다. </P>
<P><BR>은장도로 가슴을 찌른 거지요... 서울로 가던 그녀의 남편은 어떤 주막에서 <BR>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아내가 나타나 말하기를 "몇날 몇시 어떤 <BR>주막에 가면 아무개라는 이름의 수험생을 만날 것인즉 그 나그네와 붓을 바꾸어 <BR>가집시오" 했답니다. 꿈에서 깨어난 남편은 길을 가다가 아내가 꿈에서 일러준 <BR>대로 어떤 주막에 당도해 아무개라는 나그네를 찾으니 그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BR>신기한 마음에 그 나그네와 하룻밤을 새우면서 과거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BR>나누다가 장난삼아 붓을 바꾸자고 했답니다. 이미 친하게 된 그들은 붓을 <BR>바꾸었고 부인의 예언대로 남편은 과거에 급제했다는 이야기입니다.</P>
<P><BR>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진심을 다해 원하는 일이 있다면 <BR>죽어서라도 그 뜻이 이루어지는 거라고요. 살아 있었다면 그 부인은 남편을 <BR>도울 수 없었을까요?</P>
<P><BR> 사랑하는 당신.<BR> 언젠가는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다리에서 강물을 향해 몸을 던지는 <BR>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대부분은 <BR>신발을 벗어놓고 강물로 뛰어드는데, 그들이 벗어놓은 신발은 언제나 그들이 <BR>떠나온 육지를 향해서 벗어져 있다는 거였어요... 저는 그 구절을 읽다가 잠시 <BR>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왜였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발을 그쪽으로 <BR>벗는다는 건 그의 온몸을 그쪽을 향해 비틀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들은 <BR>바라보았을까요? 떠나기 전에, 영영 이별하기 전에 그들이 걸어왔던 삶이 묻은 <BR>그곳을...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혹시나 그들이 몸을 비틀었던 <BR>것은, 그리하여 그들이 살았던 육지를 향해 신발을 벗어놓게 만든 것은 혹시나 <BR>희망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들의 구두코는 육지를 향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BR>희망을 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요. 만일 그들이 죽기 전에 바라본 그 <BR>지나온 삶에 대한 한오라기의 희망이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BR>그런데 희망은 그들이 이미 살았던 육지에만 있어야 하는 건가요? 깊고 푸른 <BR>강물은 정녕 절망이기만 할까요?</P>
<P><BR> 새 구두가 좀 발에 끼이는군요. 방금 저는 공단으로 만든 리본이 달린 <BR>자주색 새 구두를 벗어서 당신이 늘 웃으며 들어오시던 문 쪽으로 <BR>돌려놓았어요. 이제 좀 발이 편안합니다.</P>
<P><BR>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소희약국에서 다행히 저를 믿고 약을 주었습니다. <BR>제가 지난 한해 동안 꾸준희 약을 사갔기 때문입니다. 행여 그분들에게 누가 <BR>되지 않도록 당신이 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방을 뺀 돈은 아주 <BR>작겠지만 당신의 아내에게 전해주십시오. 저는 이 순간까지도 내내 당신 <BR>아내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라 마음이 아픕니다. 그분에게 전해주십시오. 제가 <BR>사죄하고 있다고요. 저는 한때 그녀가 어리석다고, 너무 어리석어서 악마가 <BR>되었다고 착각했었습니다. 그걸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비키니옷장 <BR>밑바닥에 모아둔 돈이 약간 있습니다. 당신의 바바리가 낡은 것 같아서 하나 <BR>장만해드리려고 했던 것이니 주저 말고 좋은 것으로 골라 사세요. 그러고 나서 <BR>전화를 반납하고 가재도구를 정리하면 제 장례비는 나올 겁니다. 집에는 <BR>알리지말아주세요. 그 시절은 죽음을 걸고서라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BR>않습니다.</P>
<P><BR> 그러고 나면, 제 방값이 당신의 아내에게 가고 당신이 새 바바리코트를 <BR>고르고 제가 한줌 흙으로 뿌려지고 나면, 저는 아마도 뻑뻑한 구두를 벗은 발이 <BR>편안해지듯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 편안함으로 저는 늘 당신의 등뒤에 <BR>있겠습니다. 어느날 길을 걷다가 문득, 또는 소녀를 만나 포크와 나이프를 <BR>사용하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다가 문득, 그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BR>사랑한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등뒤에서 짓이겨 진 채로 한줌 즙으로 화해버린 <BR>검푸른 기운이 느껴지시면 제가 왔다고 생각하세요.</P>
<P><BR> 오래도록 생각했지만 제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제가 당신의 <BR>괴로운 남자됨에서 당신을 구해드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BR>할머니의 옛얘기 속의 정절 깊은 여인처럼 저도 당신을 지키고 싶으니까요. <BR>당신이 제게 생전에 베풀어주셨던 그 사랑을 잊지 않은 채로 저는 푸릇푸릇하게 <BR>이 대기에 스밀 것입니다.<BR> 사랑하는 당신, 그러면 안녕히.<BR> <1993, 샘이깊은물 12월호> </P>
<P> </P>
<P>공지영. 창작과 비평사<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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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야
대단하다 이글 다 베껴쓰느라고 고생했다야
밤에 잠안자고 이글 작성했나
손가락 아팠겠다.
타이핑의 귀재라고 들어는 봤나? 몰라.... 날아 다니는 손가락이라고 들어봤나? 몰라.... 언제 왔다갔니? 라고 들어봤나 몰라... ㅋㅋ 손가락이 아니라 자판이 아팠겠지..ㅋㅋㅋ.. 근데 복순아.. 너 지금 날 존경하고 있지? 푸하하하하.. 내가 널 위해서라면 이깟 괴로움 쯤이야.. 언제든지 말만 해라.. 넌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돌진 하겠다..알았냐? 킥킥
흑흑흑 감격의 눈물이거 알징
가슴아프다.. 제니야., 넘 가슴이 아프다. 그사랑이.,
그치? 받는 사람은 몰라도 주는 마음은 그래도 행복할거야... 마음은 많이 아프지만 말야... 사실 사랑 받는 것 보다 더 행복한게 주는 거라잖아.. 받아만보고 사는 사람은 그 행복을 못느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