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하십니까 ?
최근 저의집 응접실 소파에서 굴러 다니던 월간 잡지 "좋은생각"이라는 책에서 우연히 읽은 옻칠예가 전용복씨의 인생을
읽어본후에 감명을 받아 우리 홈페이지에 올리고자 무려(?) 1시간동안 꿍~꿍 독수리타법으로 모두 새로 쳐서 아래와 같이
올렸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더군요.
일본 장인들도 하지 못했던 옻칠을 우리나라 사람이 해냈다는것과 과거 우리 선조들이 초기에 만들었던것을 후손들이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던것이 큰 감명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자금이 허락하면 일본 도꾜에 있다는 메구로가죠엔을 한번 가볼려고 합니다.
감사 합니다.
좀 문장이 길지만 끈기(?)를 가지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1062424E3FF8C10C)
![](https://t1.daumcdn.net/cfile/cafe/110C31424E3FF8D418)
내용 ;
그대, 목숨을 걸었는가 ?
중국을 뜻하는 차이나(china)가 도자기 라는 일반 명사로 쓰이듯, 일본을 뜻하는 재팬(japan)은 “옻칠”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만큼 옻칠문화에 자부심이 강한 일본. 특히 1931년 건립된 메구로가조엔(도꾜에 위치한 국보급 연회장)은 8천여 평에 이르는
연회장 전체가 화려한 옻칠 작품으로 장식된 일본의 자존심이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메구로가조엔이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총 책임을 맡긴 이는 3천명에 달하는 일본 옻칠 장인이 아닌 서른 중반의 젊은 한국인이었다. “ 일본의 소중한 문화재를 되살린
사람은 전용복 장인이 유일 합니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공사 규모 1조원에 달하는 방대한 작업을 한국의 무명 장인들과 3년
만에 완벽하게 복원해 일본 옻칠 역사에 한국의 이름을 아로 새긴 옻칠예가 전용복님(59세)을 만났다.
옻칠예가 “전용복”하면 메구로가조엔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내 옻칠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인데요. 오젠이라 불리는 작은 밥상을 고친 일이 그렇게 큰 기회를 가져올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시 제가 운영하던 부산 공방에 일본인이 찾아 왔습니다. 아서원(雅叙園)이라는 음식점에서 왔다며 소반을
수리해 달라고요. 소반을 고쳐 보내고 며칠 뒤 전화가 왔습니다. 똑 같이 수리 해야할 밥상이 천개 정도 된다면서요.
하길래 동네 중국집쯤으로 생각 했는데 알고보니 명성이 자자한 메구로가조엔(目黑雅叙園)이었습니다. 그 작업이 교두보가
되어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고, 메구로가조엔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메구로가조엔을 처음 방문하던날이 생생합니다.
세월에 부대껴 낡았지만 작품 곳곳에 우리 선조의 물결이 오롯이 살아 있는........ , 특히 <송학도> 귀퉁이에 새겨진 “광신”
이라는 조선 장인의 이름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더군요. “ 네가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다오.”
그 영혼의 소리가 잊히지 않았습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복원 작업을 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원 관련 자료를 보니 피땀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던데요 ?
만약 내가 복원 작업을 실패하면 어땠을까요? “전용복에게서 맡겨서 실패했다”라고 했을까요 ? 아니요. “ 한국인한테서 맡겨
실패했다“라고 했을 거예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목숨 걸고 했습니다. 일본의 모든 작가가 불가능하다고 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호언 장담한 것도 정말 가능해서가 아니었습니다.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죽도록 공부함녀 되지 않겠느냐는 각오였죠. 공사
막바지 6개월간 하루도 방에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 졸았습니다. 적어도 100명이상 전력투구해야 겨우 개관일을 맞출수
있는 방대한 작업을 비자문제로 30명이 감당했으니까요. 조선 장인들이 피땀으로 완성한 작품을 후예인 우리가 복원하는
역사적인 현장이잖아요. 게다가 3분의2는 내 창작품이니 더 애정을 쏟을수밖에요.
자신과의 싸움이었네요
소반 수리를 부탁받았을 때, “작가인 내가 왜 이런 걸 하나 ?” 라고 생각했다면 메구로가조엔 복원작업을 맡지 못했을 겁니다.
늘 배울게 있다고 생각해요. 뒤늦게 공부하고, 일본어를 배우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옻칠 미술관을 세우고........./,
무언가 할때마다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바보냐? ”
“미쳤구나”. “사기꾼 아니야?” 하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희려 가징 견디기 힘든건 마음속에서 “네가 정말 할 수 있어?”
하는 의심이 고개 들 때입니다. 내 좌우명이 뭔줄아세요? “정말 해서는 안 될일은 포기다!”. 문제가 있다면 열쇠도 반드시
있다고 믿지요. 특히 옻칠 비법은 100% 체듯하는 것이기에 지금도 배울 것이 있다면 일본과 한국,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 갑니다. 일본에 정착 했을때도 처음에는 주민들이 인사를 받지 안았습니다. 끝까지 따라가 인사했죠. 그러다 김치도
담가주고...... 나중에는 그들이 먼저 나눠 막자며 배추, 오이를 리어카로 싣고 오더군요. 인간관계도 일도 포기하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됩니다.
옻칠과의 인연, 어떻게 시작 됐나요 ?
제대후 목재회사에 취직해 합판을 나르는 일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가구 디자인 총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세상에
하나뿐인 가구를 만들고 싶어 “예린 공예사“를 차렸지요. 그 과정에서 토기에 옻칠을 입힌 ”와태칠 기법“을 만나면서 옻칠의
황홀한 빛깔에 매혹 되었습니다. 하지만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만나기 전에는 흉내만 낸 게 맞습니다. 그곳에서 강렬한
영감을 얻은뒤 미친 듯 일본 옻칠 산지를 순례하면서 푹 빠져 지냈으니까요.
엘리베이터, 시계, 바이올린,등 선생님 작품을 보면 옻칠 세계가 무궁무진 합니다.
옻칠은 열과 습기에 강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원형을 보존해 주는 천연 도료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수백 년 세월을 견뎌온
이유도 옻칠한 덕분이지요. 최근 들어서는 인체에 해로운 전자파를 흡수하는 등 친 환경 소재로도 주목 받는데요. 이러한
특별함을 더 많은 이와 공유하고 싶어 옻칠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계속 도전 합니다. 순수 예술일수록 대중과 호흡
해야 하니까요. 옻칠 시계도 인체에 좋은 옻 소재를 몸에 지니고 다닐수 없을까 생각하다 떠오른 아니디어입니다.
워낙 정교한 작업이라 거듭 실패한 끝에 2년만에 완성했는데요. 당시 8억여원에 팔리는 값진 성과를 얻었습니다. 요즘은
주거 공간에 옻칠 작품을 새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만들고 싶은 꿈에 사로 잡혔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에까지
옻을 입혀주고 싶습니다.
옻칠 장인 전용복을 있게 한 원천은 무엇인가요 ?
전쟁을 겪은 세대가 그렇든 가난했고, 아버지는 주벽이 심하셨습니다. 갑작스런 형의 죽음으로 어머니도 시름시름 앓으셨죠.
약값과 동생들 학비까지 내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나이에도 부모님 탓이 아니라 현실이 그렇게 만든 거라고 생각했어요.
덕분에 비뚤지 않고 잘 견뎠나 봅니다.그래도 왜 힘들지 않았겠어요? 어깨가 찢어질 듯 연탄을 배달하고 자리에 누우면 이대로
깨지 않았으면 했죠. 국화빵 구울 준비하다 학교가는 친구들을 보면 눈물도 났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잠깐이고 늘 밝게 생각
했습니다. 공부는 나중에 하면 된다고. 결국 이루어 졌지요. 그림도 그렸어요. 미대 진학을 감히 꿈꿀 수 없지만 연말이면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 팔면서 꿈을 잊은적 없었어요. 그 지난한 시간이 오늘의 나를 있게한 원동력입니다.
꿈을 이루셨네요, 그래서 행복한가요 ?
네, 지금 전용복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모든게 편안한 상태가 아니에요. 어떤 상황에서든 희망을 갖는 것이 행복입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젠 줄 압니까 ?. 메구로가조엔 복원 작업을 완성 했을때요? 아니요. 메구로가조엔에서 옻칠 일을 내게
맡기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입니다. 무언가 완성 했을 때보다, 내 것을 펼칠수 있을 때 더 행복 합니다. 23년동안 주 무대이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얼마전 한국에 정착 했습니다. 옻칠예가 한국에서 다시 부흥할 수 있도록 남은 생을 바치려고요. 다시 시작하는 지금, 그래서 행복 합니다.
그가 옻칠로 오죽(烏竹)을 그리는 것을 지켜 보았다. 유연하면서 곧은 대나무를 그려 나가는 거침없는 손놀림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숨죽인 가운데 샥, 샥, 붓질 소리만 작업실을 가득 울렸다. 물심양면 전시회를 도운 은인들에게 선물하려고 그린 대나무,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장, 두장.......2만여장을 버렸다. 그제야 좋다 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수십 만 장을 그린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고 . 누군가가 아닌 자신의 눈을 속이지 않는 진정성, 그것이 바로 전용복을 이끄는 힘이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카페지기
첫댓글 뼈를 깍는듯한 인고의 아픔을 이기고 한국인의 솜씨와 긍지를 보여주신 전용복장인님 같은 훌류한분이 계시기에
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집니다.좋을 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꿈을이룬 전용복씨는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자기가 꿈꾼 분야에서 그꿈이 이루어 졌을때의 보람과 성취감, 한번 느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