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스 사장님의 인생 이야기
"주민 생애사
사람 설고 말도 설은 거제에 뿌리를 내린 정운영 이야기
#연달아 두 차례 태풍이 지나가며 무더위를 몰아냈다. 큰 피해를 주는 태풍을 반길 리야 있으랴만 늦더위 꼬리라도 잘라주니
세상일이란 다 나쁜 것만도 다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은 어떤 인생 이야기를 들을까, 옥 뜨락으로 향한다. 양지바우
돌아 부는 바닷바람인지, 등성이 넘어온 산바람에 묻어온 것인지 옥포 거리는 가을 냄새가 난다.
#디에스 건설(주)의 정운영 사장은 1952년생으로 충북 제천이 고향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로 알려진 천둥산 박달재에서
태어나 자랐다. 누대에 거쳐 그곳에 터를 잡고 부를 이룬 집안 7남매의 맏이다. 제천, 단양 일대는 시멘트 광산지역이다. 새마을 사업과 개발붐 이전부터 사람과 돈이 모여들었고 일찍이 시로 승격되었다. 아버지는 사업수완이 좋았다. 충주와 제천에서 나는 곡물을 거두어 가서 팔고 새우젓을 대량으로 들여와 내륙인 충주와 제천 일대에 도매로 파는 중간상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방앗간과 옹기공장을 크게 해서 늘 일꾼이 북적거렸다.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 넉넉한 집안의 장남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듯해도 속으로 곪는 아픔은 있었다. 어릴 때 손을 다쳤는데
육이오 전쟁 직후 시골의 낙후된 의료 환경에서 제대로 치료를 못 하여 크게 덧났다. 기능을 다 할 수 없는 손을 비관하여 방황
하기도 하고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해 또래들보다 학교 진학이 늦었다. 자라면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느라 아버지의 땅 수십
마지기가 날아갔으나 지금도 손이 성치 못하다.
#열여섯 살 때, 아버지는 방황하는 아들 운영을 절로 보냈다. 불교에 귀의하여 세속 버리기를 바랐다기보다 스님과 생활하며
마음잡기를 원하며 아버지는 아들을 절에 맡기고 쌀과 돈을 대주었다. 절 뒤편 요사채에는 공부에 전념하는 일반인들이 여러 명 있었다. 스님은 그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스님을 따라 절 마당 잡초를 뽑기도 하고 떨어진 낙엽을 쓸며 한 해를 보냈다. 어느 날 스님이 굽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저 소나무는 어떻게 살까?” 물었다. 소년 운영은 ‘그냥 살지요’ 라고 얼버무렸다. 스님은 “그래. 네 말이 맞다.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살고 다 산다.” 그는 일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또래보다 한두 해 늦었지만 마음잡고 공부하여 서울로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부친을 많이 닮은 그는 공고 전자과를 다닐 때부터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었다. 세운상가에서 라디오부품을 사다가 조립하여
아는 사람들에게 싸게 팔면서 고장이 나면 무료로 수리도 해주니 주위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학교 다니랴, 라디오 조립하랴 그런 가운데에서도 학업성적은 늘 우수했다. 졸업 후 춘천의 TBS라디오 방송국에 입사하여 근무하면서도 삼천리 자전거를 현금으로 대량 구입하여 할부로 팔아 이문을 남기는 등 장사수완을 키웠다. 춘천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결혼을 하고 9년 만인 1978년 고향으로 내려와 농협 연쇄점을 인수했다. 집안 식구가 모두 동원되어 하는 일이라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농협 연쇄점을 하면서도 주민들이 채취한 산채나 농산물을 사들여서 대도시에 도매로 팔아 주민에게 나은 수익을 안겨주며 신뢰감을 돈독히 쌓았다.
#그동안 승승장구 잘 나가던 그에게 갑자기 어려움이 닥쳤다. 1979년 여름 홍수가 나서 제천, 단양이 물에 잠겼다. 단양군청마저 물에 잠겨 신단양으로 군청을 옮긴 일도 그때 홍수를 겪고 나서의 일이다. 그가 밭떼기로 사놓은 그 일대의 넓은 옥수수밭과 마늘밭이 다 쓸려 내려가고 자갈밭이 되었다. 쓰러진 옥수숫대에서 흙투성이가 된 옥수수를 한 가마니 따서 담아놓고 낙심하는 것을 본 아버지가 땅을 팔아 일부 빚잔치를 해주었다. 그런 형편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고생을 겪었다. 다시 고향을 떠나 울산으로 내려왔다.
#울산 현대조선에 입사하여 도장작업을 했다. 그때 도장과 인연을 맺은 것이 평생 업으로 삼는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소 다니면서도 3년 동안 고추 장사를 해서 수익을 얻었으나 경주의 포도밭 농사는 태풍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 다시 시작해보리라 결심
하고 청주에 있는 처가에 아내와 세 아이를 맡겨놓고 혼자 1983년 거제도로 와서 대우조선해양 특수도장팀에 특채 입사했다.
#사람 설고 말도 설어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으나 시간이 흐르며 차차 익어갔다. 가족을 데려왔다. 돈이 모이는 대로 조금씩 땅을 샀다. 훗날 자신의 사업을 하기 위한 기반이었다. 14년간 대우조선해양 근무하고 사표를 썼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이었다. 시작한 사업은 정수기 대리점이었다. 초기에는 잘 되어 곳곳에 대리점을 확장을 했다가 IMF를 겪으며 시쳇말 그대로 쫄딱
망했다. 아이들 학업마저 중단해야 할 만큼 위기에 놓였으나 맏딸이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몸담아 동생들 학비조달을 맡아주었다. 1998년 가게를 얻어 방수 도장업을 시작하였고 불철주야 일하여 4년여 만에 빚을 다 갚았다.
#몇 해 전부터 대우해양조선에 근무하던 아들이 그의 사업을 맡았다. 아들에게 일을 가르치며 후선으로 한 발 물러앉았지만 앞을 내다보며 장기 계획을 세우고, 장비 구입 등 큰 규모의 투자 등은 그가 결정한다. 고등학교 다니며 전자부품을 사다가 라디오를 조립하여 팔 때나 이십여 년 기반을 단단히 다져 온 디에스 건설(주)을 경영할 때나 남에게 손해를 끼치며 내 이득을 취하지 않는 것은 변함없는 사업 경영 신조다. 틈틈이 시간을 내어 장애인 기업을 둘러보며 조언을 하고 돕기도 한다. 오십 년을 쉬지 않고
걸어왔다. 그는 사업수완이 좀 있고 운이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방황과 좌절로 주저앉지 않고 이겨내며 고비를 넘겨왔다고 해야 맞다. 칠순의 그는 여전히 다부진 체격과 호탕한 성격의 의욕 넘치는 현역이다."
디에스 정운영 사장님의 인생이야기를 듣다보니 참 대단하시고 멋진 분이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하는데 사장님은 정말 집안의 맏이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하시고
사업가의 자질이 충분하시고 부지런하시고 삶의 열정이 정말 대단하시고 많이 베푸시고 사랑의 온기가 느껴지시는 분
온갖 인생 경험을 통해 지금의 사장님으로 변신한 성공한 사장님이시다. 사람이 인생을 살다 보면 산전수전을 다 겪는다.
죽을 것 같아도 죽지 못해 살고 있고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이들의 인생사가 드라마처럼
그냥 말로 하는 예기이지만 그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통 속에서 죽지 못해 살아야만 하는 심정 살아보지 않고는 말을 할 수가 없다.
피눈물을 쏟으며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면서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잠 못 이루고 아쉬운 소리 목메이는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살아야 하기에, 목숨이 붙어있기에, 견뎌야 하기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살아야 하는
인생행로에서 얼마나 처절한 몸부림을 했을까? 정말 인생 밑바닥까지 가본 사람만이 인생의 맛을 안다.
아픔과 괴로움 힘든 여정 속에서 온갖 풍파를 견뎌야 했던 지난 수많은 시간이, 세월이, 흐른 뒤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라고 하지만 삶의 현장과 고통과 그 야속했던 인연들과 부딪치면서 살아온 세월이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고 예기할 수 있지만, 그 순간은 죽을 만큼 힘든 고비를 넘겨야 했고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만 하고 아픔을 딛고 설 수밖에 없는 몸부림,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버티고 버텨왔던 순간들이
지금에 와서야 되돌아보니 기적 같고 살다 보니 살아진다는 말들이 실감이 난다.
세상은 쉽게 가는 사람들도 많고 사기 치는 사람들도 많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참 많다.
공평하신 하느님은 우리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하셨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고 감사함을 전할 수 있다.
신앙이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고 견딜 수 있었다.
오직 믿는 하느님만이 위로자요 구세주이심을 감사찬양 드립니다.
첫댓글 사장님은 기부도 많이 하시고 어려운 이웃들을 참 많이도 도와주시는 멋진 분
인물도 훤하시고 성격도 좋은시고 몸도 마음도 잘생긴 분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