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
신 영숙
정! 이라 소리 내어 말해 보고 그 의미를 가만히 음미 해 본다. 왠지 가슴이 따뜻해지고 살아갈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예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청춘, 이는 듣기만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라는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의 신선한 감동! 아직도 그 싯귀를 기억하고 있다. 그와 같이 정이란 단어도 늘 우리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는 말이다. 흔히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에 대해 감격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로 바로 한국인의 정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정을 느끼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살기를 바란다. 정은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고 살아갈 용기가 새삼 솟아오르게 하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돌아보면 자신도 모르게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존재감을 더 확장시켜 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최진사댁 셋째 딸은 온 동네 총각들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한 때 유행한 노래도 있으나 우리집 셋째 딸인 나는 아들보기를 기다리신 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이번에야 말로 아들 일 것이라고 기대하셨다가 많이 섭섭해 하셨다고 한다. 요즘은 아이들을 귀하게 여겨서 오히려 예의 없이 자기만 아는 왕자, 공주들이 된다는 염려들이 있으나 우리 집은 아이도 7명에 또 서울에 산다는 걸로 사촌들, 고향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어서 늘 집안에 손님들도 있어선지 부모님들이 우리의 필요는 잘 채워 주셨지만 귀여워한다는 표시는 별로 기억이 없다. 오히려 엄마에 대해 기억되는 것은 따뜻함 보다는 괜한 자괴감을 느낀 기억이 있다. 골목에서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 나를 부르더니 일본식 집의 오시레(일종의 창고 공간)의 미닫이문에 유용한 글귀들을 붙여 놓았는데 한 곳을 가리키시면서 읽어 보라고 하셨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결국 내게 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은근한 질책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었으나 당시는 왜 나만 불러서 그래하는 억울함을 느낀 기억이 있다. 7 남매의 딱 중간으로 늘 부모님이나 윗 형제들 의견에 따라 도매금으로 의사가 결정되곤 하여 내 주장이 통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초등학교 이학년 여름 방학에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갔는데 당시 유행으로 머리에 파마를 하고 갔다. 매일 빗어야하는데 대충 물 만 바르고 뛰어나가 동네아이들과 어울리기 바빴다. 어느 날 머리를 빗으려하니 도저히 빗이 내려가지를 않고 아프기만 하여 참 난감하였다. 큰 엄마가 있으면 좋겠는데 마침 밭에 가셨는지 안 보이고 한참을 혼자서 고생하고 있는데 조용히 저 쪽에 계시는 것 같던 할아버지께서 오셨다. 내게서 빗을 넘겨 잡으시고는 찬 물을 발라가며 엉킨 머리카락을 풀면서 찬찬히 머리를 빗겨 주셨다. 할아버지가 이런 일을 해 주시다니, 놀랍기도 하고 너무 황송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이었다. 가끔 서울 집에 오셨을 때도 인사만 하고 별로 가까이 지내지 않아서 늘 할아버지가 어려웠는데, 엄마라면 몇 번은 잔소리를 했을 텐데 그 오랜 시간을 공 들여서 내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주셨다. 그 섬세하신 손길에 마치 내가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어찌나 감동이 되고 할아버지가 고마운지.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만져 주시던 시간은 내가 정말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면서 할아버지는 전혀 깨닫지도 못하신 시간 동안에 인정받기를 그리워하던 내 마음을 흡족히 채워주셨다. 내가 고마워하는 것에 할아버지도 감동을 하셨는지 얼마 후에는 나와 사촌 남동생만 데리고 동네의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 가셨다. 온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것도 신기했고 정상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새가 죽어서 뼈만 남아 있었던 걸 보며 약간 무서웠던 기억, 할아버지가 이 산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아버지는 역시 말이 없으셨다. 그러나 산에 갔다오는 동안에도 별 말씀은 없으셨지만 왠지 할아버지가 나를 예뻐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 마음이 기쁘고 오랜만에 느끼는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별로 말씀이 없으시고 가끔 서울 오실 때만 볼 수 있어서 형제들도 늘 어려워했는데 그날 이후론 할아버지가 겉보기와 달리 속으로는 정말 착하고 마음도 따뜻하다고 믿게 되어서 형제들이 혹여 할아버지를 나쁘게 말하면 꼭 내가 나서서 두둔하곤 했다.
할아버지 얘기를 하다보니 자연히 둘째 사촌 오빠가 생각난다. 사촌들이 고등학교부터는 시골에서 올라와서 우리 집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녀서 둘째 오빠는 우리 오빠 밑이라서 작은 오빠라 불렀다. 그는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후에 고교 선생님이 되었듯이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인지 아무도 오빠에게 권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중학교 들어가니 자기가 영어를 가르쳐 주겠노라 하였다. 마침 집에 할머니 동생의 아들이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도 나이는 좀 많았어도 나와 같이 중학교 들어갔으니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처음 보는 영어 글씨 쓰는 것도 재미있고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내가 스스로 대견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같이 공부하던 아저씨는 작은 오빠 질문에 하나도 대답을 잘 못하여 나와 대비되는 것도 어린 마음에 더 공부에 신이 났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 해 겨울에 나는 생각지도 못할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큰언니가 학과 친구들과 원어민을 초대하여 영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그 분이 큰언니와 친하게 되었나 보다. 어느 저녁 날 집에는 동생들과 나, 마침 시골에서 올라온 할아버지만 계셨는데 그 미국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왔다. 자연히 내가 상대하게 되었는데 나는 겨우 큰언니가 집에 없다. 아직 안 왔다만 영어로 떠듬거리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할아버지가 나보고 그 사람 저녁 먹었냐고 물어 보라신다. 역시 할아버지는 참 따뜻한 분이시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하이고, 참 영어실력 들통나게 생겼네 걱정하면서, 저녁식사가 영어로 뭐더라?하는 한편, 두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서퍼(supper)라는 단어가 떠올라서 겨우 물어보니 먹고 왔다고 한다. 안방 창가의 응접세트에 앉아서 언니 오기를 기다리는데 심심하지 않도록 뭔가를 해야지 싶었다. 손짓으로 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미국 아저씨와 다이아몬드 게임을 하고 있는데 옆의 창문을 가리키면서 자기가 춥다고 자꾸 창문을 닫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미 유리로 막혀 있는데 뭘 닫으라는 거야 하면서도 거기에 대꾸할 실력은 안 되어서 답답하여 게임 판 만 보고 있는데 마침 큰 언니가 왔다. 창문의 유리는 다 반투명으로 되어있고 현관 쪽 유리 만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맑은 유리로 되었는데 그 아저씨는 그게 뚫려 있는 줄 알고 자꾸 닫으라고 한 거 였다. 참 착하고 재미있는 아저씨였으나 결과적으로 아버지가 극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둘은 헤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본토인과 영어 연습하게 되어 떨렸지만 스스로 대견하게 여겨진 경험이었다. 그 일 이후로 영어로 말하는 것에 울렁증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반에서도 영어를 잘하게 되었으니 다 작은 오빠가 내게 준 큰 선물이었다. 떨리는 일도 기꺼이 해보는 것으로 스스로도 대견하게 여기는 기초가 되었으니 그 사건은 내게 자존감을 높이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서로 정을 주고 받는 일은 주변을 훈훈하게 할 뿐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학교를 세워주고 교육을 시킴으로 가난한 막노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아이들에서 많은 의사, 전문직들이 나왔다는 기사, 시골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다 시를 쓰게 한 일도 다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따뜻한 보살핌의 결과이다. 요즘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세계적 상황에서도 참 살벌한 사건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그 사건의 주도자들이 어릴 때부터 가족이나 주변사람들과 정을 주고 받으며 자신의 존재감에 감사하며 귀하게 여기면서 성장했다면 사회의 소중한 일원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니 다들 바쁘게 살아가는 현실에서 작은 일에도 서로 정을 주고 받는 노력은 사회를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될 것으로 믿는다.
첫댓글 할아버지에게 서 느꼈던 정을 이렇게 오래도록 까지 가슴에 남아 있다는것이 놀랍기도 하고 또 그래서 우리는 늘 좋은말로, 다정한 말로, 친절한 말로 (어른이든 아이든) 상대를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군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