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민족) 12. 탕구트족, 고유 문자를 발명한 송나라의 숙적
모든 생명체가 언젠가 죽음에 이르듯 사람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사람이 모여 이룬 민족과 나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람, 민족, 국가의 소멸이 일반적인 생물의 죽음과 구별되는 것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유산이 이후 역사 발전의 발판이 되어 후세에까지 그 흔적이 켜켜이 전해진다는 점이다. |
오늘날 중국의 서북부인 감숙성은 사막의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황량한 곳이다. 하지만 800년 전인 13세기까지 이 지역에는 서하(西夏)라고 불리며 번영을 누리던 나라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 서하의 주민들이 바로 탕구트족(Tangut)이었다.
▣ 선비족의 후손?
서하와 같은 시대인 중국송나라 역사를 적은 사서 《송사(宋史)》에 의하면 서하 왕실의 선조는 탁발적사(拓跋赤辭)라는 사람인데, 당나라에 복속하여 당태종으로부터 이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당나라 본토를 휩쓴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탁발적사의 후손인 탁발사공(拓跋思恭)이 사병을 이끌고 나가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우고, 당나라 황실로부터 다시 이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탁발적사는 원래 당항족이라는 중국 감숙성의 부족을 이끌던 우두머리였다. 당항족은 탕구트의 한자식 표기인데, 탕구트족이 대체 어떤 집단인지를 두고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을 벌이고 있다. 대부분은 오늘날 티베트인에 해당하는 강족이라고 보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몽골 계통의 유목민인 선비족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여러 의견을 종합해 보면 탕구트족은 티베트인보다는 선비족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우선 탁발적사의 성씨인 탁발은, 서기 4세기 만주 북부에 살다가 중국으로 남하해서 강력한 제국인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족의 성씨와 같다. 또한 선비족은 용맹한 기마 유목 민족으로 유명했는데, 서하 역시 뛰어난 기병대로 송나라를 두렵게 했다. 그에 반해 강족과 티베트인은 기병보다는 보병에 익숙했다. 이런 배경으로 보면 탕구트족은 서쪽으로 진출했던 탁발선비족의 일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 국내적으로는 황제, 국외적으로는 왕
탁발사공 이후, 탕구트족은 그의 후손인 이계천이 지배했다. 986년, 송나라의 적국인 요나라는 탕구트족과 동맹을 맺고 함께 송나라에 맞서기 위해, 이계천에게 의성공주를 시집보내고 이계천을 하국왕(夏國王)에 책봉했다.
요나라의 지원을 얻자 더욱 기고만장해진 이계천은 1002년 3월, 송나라 영주 지역을 점령하여 ‘서평부’라 이름을 고치고 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1003년 6월, 그는 기병 2만을 이끌고 인주를 포위했다가 송나라 군대의 역습을 당해 상처를 입고 1004년 1월에 사망했다. 이계천의 아들인 이덕명은 1012년에 아버지를 태조 효황제(孝皇帝)로 추종했다. 이때 이미 서하인들은 황제 칭호를 쓰고 있었다.
1021년, 이덕명은 대하국왕 책봉을 준 요나라와는 계속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송나라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1023년, 그는 송나라 경주의 유원채를 습격했으며, 5년 후에는 아들 이원호에게 군사를 주어 감주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931년 10월, 이덕명이 51세로 사망하자 이원호는 아버지에게 태종(太宗) 광성황제(光聖皇帝)라는 존호를 올리고 서하의 왕좌에 즉위했다.
▣ 서하의 영웅 이원호
이원호는 서하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의 치세에 서하는 송나라를 두렵게 하는 서북장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송사》에서는 그에 대해 “용감하고 지혜로웠으며 강인한 성품이었다. 전쟁을 다룬 병법서들을 즐겨 읽었으며 스무 살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싸워 승리했다.”라고 기록했다.
그는 집권하고 나서 서하의 관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군대를 재정비했다. 주로 당나라와 송나라의 관제를 모방해 중서성, 추밀원, 삼사, 어사대, 개봉부, 농전사, 목사 같은 부서들을 설치했다. 그리고 군사들의 훈련을 위해 대규모 사냥대회를 자주 열었으며, 사냥으로 얻은 고기를 부족장들에게 항상 공평하게 나눠주고, 그들이 내놓는 의견 중 좋은 것은 바로 채택해서 민심을 얻었다.
1034년부터 이원호는 송나라와 전쟁에 돌입했다. 먼저 환경로를 들이쳐 약탈했으며, 송나라 군대가 후교룰 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용마령에서 송나라 군대를 격퇴시켰다. 또한 절의봉 전투에서 송나라의 장군 제종구를 생포했다.
다음 해인 1035년에는 서하군이 묘우성을 공격했고, 티베트의 일파인 안자라와 싸워 이격 과주와 사주, 숙주를 점령했다. 이 밖에도 은주, 하주, 유주, 수주, 회주, 염주, 승주 등을 모두 사하군이 장악했다.
이원호의 또 다른 뛰어난 업적은 독자적인 문자를 만든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한자를 모방한 서하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문자를 이용해 대신인 야리인영에게 문법 체계를 정리하고 책을 만들도록 했다. 또한 《효경(孝經)》과 《사언잡자(四言雜字)》 같은 중국의 고전들을 서하 문자로 번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038년, 이원호는 단을 쌓고 책명을 만들어 황제에 올랐다. 그전까지 서하의 군주들은 송나라를 의식해 살아 있을 때는 황제라고 하지 못했는데, 이원호는 그런 불문율을 과감히 깨뜨려 버린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서하국의 진짜 역사는 이원호가 황제라고 칭한 1038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칭제건원을 한 이원호는 다음 해인 1039년,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이 황제에 올랐고 천수례법연조(天授禮法延祚)라는 별도의 연호를 지정했다고 알렸다. 그러나 송나라는 이제까지 속국으로 간주한 서하가 황제라 칭하며 자신들과 대등한 관계에 서려는 처사를 매우 괘씸하게 여겨 서하와의 국경 지역에 연 시장인 호시(互市)를 폐쇄한 뒤, 이원호를 생포해 오거나 죽이는 자에게는 정난군 절도사라는 관직을 내려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 1940년부터 서하와 송나라가 치른 전쟁은 시종일관 서하의 우세로 이어졌다. 섬서성 서북쪽 금명채를 공격한 서하군은 우선 송나라 관리인 도감 이사빈을 사로잡고 안원과 새문 등 여러 요새들을 함락시켰으며, 연주를 포위하던 도중 삼천구에 매복시킨 군사들로 송나라 장수인 유평, 석원손, 부언, 유발, 석손 등을 모두 생포했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 서부에 설치된 진용군을 들이쳐 장수 이위가 지휘하는 송나라군 5,000명을 격파했다.
이듬해인 1941년 2월, 이원호는 위주를 공격하고 회원성을 압박했다. 그러자 송나라 대신 한기와 장수 임복은 1만 명의 건장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서하를 공격하러 호수천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송군은 이원호가 직접 지휘하던 서하군 10만의 매복에 걸려들어 서하군에 포위되었고, 약 6시간에 걸친 처절한 혈전 끝에 절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장수인 임복과 그 아들인 임회량 등 주요 장수들이 모두 전사했을 만큼 치욕적인 대패였다.
승리한 서하군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그해 가을, 풍주성과 영원채를 공격해 점령하고, 송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또한 1042년, 중국인 출신 모사 장원(張元)은 이원호에게 송의 서북 변경을 공격하도록 건의했고, 이원호는 이를 받아들여 10만의 군사를 모아 송을 침범했다. 오늘날 서북 지역 황허강 중류 부근인 정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송군은 장수인 갈회민과 17명의 장교들을 포함한 1만의 군사가 전사하는 등 큰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1044년, 이원호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 찻잎 25만 근을 준다면 이제는 침략하지 않을 테니 전쟁을 멈추고 평화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승승장구하던 서하가 왜 화의를 제안했을까?
비록 서하군이 송군을 연전 연파하기는 했지만, 송나라와의 무역이 단절되는 바람에 서하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서하의 산물 대부분은 송나라에서 들어오는 것들인데, 송나라가 서하와의 교역을 중단하니 서하인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구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이런 국내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원호는 부득이하게 송나라와 화해하고 무역을 재개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한편 화해를 제안 받은 송나라 쪽에서도 서하군의 군사력이 강력하여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원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송나라는 이원호의 요구를 모두 승인하는 대가로, 이원호에게 황제 칭호를 버리고 송나라의 신하임을 인정하라는 조건 하나만 달았다. 이원호는 그 제안에 응했으나 송나라에 보내는 국서에만 자신을 신하라고 했을 뿐, 여전히 서하 국내에서는 황제라고 칭했다.
▣ 철기 부대와 외인부대를 운용하다.
오늘날 중국 서북부의 감숙성과 청해성, 영하회족 자치구에 걸쳐 있던 서하는 영토나 인구수에서 적국인 송나라보다 적었고, 그런 이유로 군대의 수를 늘리기 위해 징병제를 택했다. 서하는 남자아이가 15세 이상이 되면, 모두 어른으로 간주하고 군역의 의무를 매겼다. 이원호가 살아 있을 시기에 서하군의 수는 총 50여만 명에 달했다.
모든 서하의 무관들은 검게 칠한 관(모자)을 쓰고 허리띠에 장식물을 달았으며 철퇴와 단도, 활과 화살을 차고 도룡용의 가죽으로 만든 안장을 말에 실었다. 그리고 서하 병사들에게는 말과 낙타가 한 마리씩 공급됐으며, 그 밖에도 한 개의 활과 500개의 화살과 깃발, 북, 창, 검, 몽둥이, 미숫가루, 양탄자, 도끼, 휴대용 천막, 보따리 등이 개인 장비로 지급되었다. 서하군은 젊고 용감한 사람을 전투병으로 삼았으며, 겁이 많거나 나약한 사람은 후방에서 농사를 지어 식량을 대도록 했다.
서하군에는 성을 공격하는 포병대도 있었는데, 이들은 특이하게도 낙타를 타고 다니며 그 위에 작은 휴대용 투석기인 선풍포(旋風砲)를 가지고 다니며 공격했다. 그러나 선풍포에 넣는 돌은 주먹만 한 크기여서, 위력은 약한 편이었다. 이들은 낙타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기동성이 좋았다.
서하군에는 전쟁 포로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인 ‘금생(擒生)’도 있었는데, 이들의 총인원은 10만이었다. 대개는 송과의 전투에서 생포한 한족 포로였고, 간혹 거란족이나 토번족도 있었다.
서하군에는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을 입은 중무장 기병, 즉 철기(鐵騎) 부대도 있었다. 서하인들은 이를 철요자(鐵鷂子)라 불렀는데, 갑옷이 두꺼워서 적의 공격에 잘 버텼으며, 병사들이 탄 말을 3~5마리씩 쇠갈고리로 단단히 묶었다. 철요자의 총병력은 3,000명 정도로 서하군 최정예 부대였다. 이들은 하루에 100리에서 1,000리까지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기동성이 뛰어났다. 철요자의 명성은 서하의 적국인 송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땅 위에서는 당해 내기 어렵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보통 서하군은 열흘 이내로 전투를 끝내는 속전속결을 선호했고, 휴대 식량도 열흘 분을 넘기지 않았다. 탁발선비족의 후손인 서하인들은 말을 잘 다루고 굶주림과 갈증, 더위와 추위를 잘 견뎠으며, 전황이 불리하면 재빨리 후퇴하여 남은 전력을 보존했다.
이 밖에도 서하군은 주변의 이민족 중에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난 자들을 5,000명 뽑아서 육반직(六班直)이라 부르면, 매달 쌀 2석을 급료로 주었다.
서하에게는 외인부대로 복무하는 외부 동맹군도 있었는데, 횡산(橫山)에 사는 강족(羌族)의 일파인 산와(山訛)였다. 《송사》 등의 사서를 보면 이들은 전투에서 서하인들보다 월등한 용맹성과 기량을 보여, 서하군보다 훨씬 강력했다고 평가받았다.
▣ 송나라를 두려워하지 않다.
서하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영웅 이원호는 1048년, 궁정 반란에 휩쓸려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경종(景宗) 무열황제(武列皇帝)라는 시호를 받았고, 장남인 이양조가 권력을 승계해 차기 황제에 올랐다.
이양조의 치세인 1057년, 서하는 다시 송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그어나 이번에도 전황은 서하가 유리했다. 와우봉 전투에서 송나라 장수 곽은과 황도원은 모두 서하군에 포로로 잡혔고, 송군의 사하군의 포위망에 빠져 참패를 당했다. 군사력에서 밀린 송나라는 무역 관계를 단절해버리겠다고 서하를 협박하여 간신히 휴전을 할 수 있었다.
1607년, 이양조가 죽고 의종(毅宗) 소영황제(昭英皇帝)의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장남인 이병상이 황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069년 8월, 20만의 서하군이 중국 서북부 환경 지역을 침입하여 송나라 장수인 곽경과 고민 등이 모두 전사했다.
잇따른 서하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1071년, 송나라 장수 충악은 나올과 영락천, 상포평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하지만 막상 그해 2월, 서하군이 공격해 오자 충악은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가 모든 요새들을 빼앗겼다. 다른 송군 장수인 연달 역시 서하군의 공격을 받아 심한 부상을 입고 철수했다.
1801년, 서하는 심각한 내분에 휩싸여 큰 위기에 봉착했다. 귀화한 송나라 장수인 이청이 황제 이병상에게 황하 남쪽 땅을 송나라에게 주고 화의를 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병상이 이를 받아들이자 분노한 그의 어머니 양태후가 이청을 죽이고 이병상으로부터 권력은 빼앗은 것이었다.
그러자 서하에 내란이 일어난 것을 빌미삼아 그들을 격파하여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던 송나라 신종 황제는 무려 31만 3,000명의 대군을 전국 각지에서 동원해 서하를 침공했다. 늘 서하군의 침략에 당하기만 했던 송나라로서는 모처럼 서하 국내로 대대적인 반격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양태후는 송군을 서하 영토 깊숙이 끌어들이고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해, 굶주림에 지쳐 스스로 철수하게 하려는 작전을 폈다. 서하인들은 황하의 제방을 터뜨려 송군의 군량미 보급로를 끊었다. 굶주린 송군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철수했는데 때마침 눈까지 내려 2만의 병사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는 피해를 입었다.
다음 해인 1082년 5월, 송나라 관리 서희는 20만의 대병력을 미지성 아래에 집결시키고 소하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30만의 서하군은 철요자 부대를 앞세워 송군을 몰아붙였으며, 그 기세에 놀란 송군은 황급히 미지성 안으로 후퇴했으나, 열흘간의 공방전 끝에 서하군에게 모조리 전멸 당했다.
1115년부터 1119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도 역시 승자는 서하였다. 이 전쟁에서 송나라는 무려 25만의 병력을 잃고, 요새인 장저하성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그리고 1120년부터 송나라는 북방에 새로 등장한 강적 금나라와 맞서 싸우느라 서하를 건드릴 여력이 없었다.
1139년 즉위한 서하의 5번째 황제 이인효는 주변국인 금과 송 두 나라와 모두 우호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로 인해 서하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맞았다. 이인효는 한족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데, 모계의 영향 탓인지 유학에 심취하여 공자를 제사 지내는 공묘를 세우고, 중국식 법전을 만드는 등 중국 문화에 깊이 빠졌다. 이인효는 1193년에 죽었는데, 인종(仁宗) 성덕황제(聖德皇帝)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치세는 서학 역사상 가장 안정적이었다.
▣ 칭기즈칸이라는 무서운 폭풍
1193년, 이인효의 장남인 이순우가 서하 6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서하의 국운이 쇠퇴하던 때였다. 북방 초월에서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무서운 폭풍처럼 서하를 강타하였다. 1205년, 몽골군은 서하의 변방을 습격해 낙타 수만 마리를 약탈하고 철수했다. 하지만 이것은 본격적인 전쟁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몽골의 침략이 있은 지 1년 후인 1206년, 이순우의 사촌 동생인 이안전이 그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여 서하 7대 황제에 올랐다. 불행히도 2년 후인 1208년, 이번에는 칭기즈칸이 직접 이끄는 몽골 대군이 대규모로 서하를 공격했다. 야전에서 몽골군에게 참패를 거듭한 서하군은 수도로 도망쳐 성벽 안에서 몽골군에 저항했다.
하지만 몽골군은 수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황하에 제방을 쌓은 뒤 터뜨리는 수공까지 동원하면서 서하를 압박했다. 결국 더 이상 몽골의 공격을 견디기 어려웠던 이안전은 1209년, 자신의 딸과 많은 비단을 몽골에 바치고 항복했다. 칭기즈칸은 일단 서하를 속국으로 삼는 것에 만족하고 몽골 초원으로 철수했다.
몽골의 위협을 모면한 이안전은 2년 후인 1211년, 종조카인 이준욱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사망했다. 서하의 8대 황제인 이준욱은 몽골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본 금나라도 자신들처럼 약해졌을 것으로 판단하고 금나라의 땅을 빼앗기 위해 금나라를 자주 침범했다.
그러나 비록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금은 만만치 않은 군사력으로 서하군의 침략을 번번이 격퇴했다. 그러는 가운데 서하의 군사력은 급속히 약화하였다.
1219년, 중앙아시아의 원정을 계획하던 칭기즈칸은 서하에 사신을 보내 지원병을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준욱은 금나라와의 전쟁에 골몰하던 터라 칭기즈칸의 요구를 거부했다.
7년 후인 1226년, 중앙아시아 원정에서 돌아온 칭기즈칸은 예전에 서하가 지원병을 안 보낸 일 때문에 서하를 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하를 침공했다. 그러나 사실은 금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서하의 군사력이 거의 다 소진되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서하와 금나라는 서로 무의미한 전쟁을 반복하다가 몽골의 어부지리에 당한 것이었다.
몽골의 침입이 시작된 해인 1226년에 이준욱은 사망했고 그의 먼 친척인 이덕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이덕왕도 같은 해에 죽었고 이현이 제위에 올랐으니, 그가 서하의 마지막 군주였다.
몽골군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였지만, 그래도 서하인들은 끝까지 힘을 합쳐 몽골군에 맞섰다. 하지만 수도인 중흥부에 대지진이 일어나 성벽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몽골군의 포위가 계속되어 물과 식량이 바닥나 굶주림에 시달렸다.
결국 1227년, 이현은 몽골에 항복했으나 서하는 결코 무사하지 못했다. 칭기즈칸은 서하인들이 다시 저항하지 못하도록 이현을 포함한 서하 황족들과 수많은 서하인을 학살했고, 서하의 모든 성과 요새를 파괴해 버렸다. 그리하여 약 200년에 걸친 서하의 역사는 끝이 나고 말았다.
▣ 쓸쓸한 흑장군의 전설
서하가 멸망한 이후, 서하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반적인 통설과는 달리, 서하인 전부가 몽골군에게 죽은 것은 아니었다. 1276년, 엣 서하 황족 출신인 이항이라는 장수가 서하 지역의 청년들로 이루어진 ‘익도신군’이라는 2만의 군대를 지휘하여 원나라의 남송 정복에 동참했다. 그리고 원나라 궁궐을 지키는 숙위군 중에는 3,000명의 서하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자를 개량해 만든 서하 문자 역시, 서하가 망한 후에도 한동안 계속 사용되었다. 원나라 황제 성종은 1298년, 서하 문자로 쓴 불교 경전 《법화경》을 발행했다. 원나라 이후에 들어선 명나라에서도 1502년, 서하 문자로 하북성 보정에 있는 경당(경문을 새긴 돌기둥) 2채에 글을 새겼다.
이 밖에도 몽골군을 피해 달아난 서하인들이 남긴 흔적들이 중국 변방에서 속속 발견되었다. 1931년, 영국인 학자 율분드는 사천의 사투리 중 하나인 ‘가융어’가 옛 서하인들이 사용한 언어라고 발표했다. 또 1944년 사천대학 교수인 등소금은 사천성 강정 목아 지역 주민들이 바로 서하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중국 영화회족 자치구의 주민들이 서하인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서하가 있던 중국 감숙성 지방에는 ‘흑장군(黑將軍)’의 전설이 내려온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장군이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는 내용인데, 망국의 순간까지 몽골군에 항거한 서하인들의 역사가 반영된 흔적일 것이다.
도현신.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