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에 앞서 그리스도교라는 표현과 기독교라는 표현을 구분하여 쓰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카톨릭 교회, 동방 희랍정교회, 개신교 등을 아우르는 용어로 쓰며, 기독교는 그리스도교를 한문으로 표현한 것이 기독교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개신교를 기독교라는 용어로 쓰기도 하므로, 그리스도교와 기독교 표현을 구별해서 사용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여러분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지구에 지난 이천년 동안 빛과 그림자 양면으로 영향을 끼친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않으면, 인류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도, 인류가 나아가야하는 길을 이해하는 데에도 지장이 있습니다.
제가 개신교에 발을 들인지 5, 60년 정도 지났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제가 오늘 학문적으로 교리 이야기를 하기보다, 동서 그리스도교의 여러 사상가, 교회역사, 철학가들을 섭렵한 뒤 김경재가 본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넓은 의미에서의 진리를 찾고 걸어가는 이웃종교인이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제는 “예수의 생명운동과 오늘의 기독교”입니다.
첫째 토막으로 예수의 생명운동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 토막으로 동서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와 동아시아의 위대한 종교인 불교나 유교, 노장사상과 비교할 때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기독교를 성찰하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복음운동입니다. 복된 소리를 전한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예수가 30대에 들어서서 사적인 가정생활을 청산하고 공적인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에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선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운동은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불국토 운동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복음운동, ‘하나님의 나라운동’은 결국, 생명 회복운동이라고 저는 결론을 내립니다. 요한복음서 10장에 예수님께서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건강한 생명, 제대로 된 생명은 기쁨과 의미와 보람과 가치가 충만한 건강한 생명입니다. 나만 아니라 내 이웃사람들과 일체 모든 생명체들이 건강하고 제대로 된 생명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현실적 생명은 겉으로는 휘황찬란해도, 안으로는 병이 들고 찌그러들고 억압받아서 결국 행복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인가? 서력 1세기 초반에 유대 땅에 살았던 예수라는 분은 한 명의 유대인 남자입니다. 예수에 대한 여러 교리적인 첨가사항이 붙지만 예수라는 분은 신화적 인물이 아닙니다. 갈릴리 지역(우리나라로 치면 함경남북도 지역쯤 되는 변두리 지역)에서 30년 동안 농사를 짓고 목수 일을 하면서, 조용히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고, 아버님은 일찍 여의신 듯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형제들과 살다가,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하는 것을 하겠다고 집을 떠나 공적생활을 하셨습니다. 3년 만에 당시 종교, 정치 여러 기득권의 세력 눈앞에 벗어나서 처참한 죽음을 당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역사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뜻있는 일을 하느라 몸부림치며 죽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겠습니까? 당시에는 로마제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로 겉은 평화롭지만 로마제국을 지탱하려면, 막강한 로마 군대가 있었고, 절반 이상의 민생은 노예로 생활했습니다. 노예생활을 견디다 못해 스파르타쿠스와 같이 노예 해방 반란을 일으킨 영웅들이 많이 있었죠. 노예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요청하며 일으켰지만 고난을 겪고 사라졌습니다.
반면에 예수라는 분의 33년의 삶 중에 예수는 공적 생활을 3년 했는데 그동안 공자나 부처님처럼 훌륭한 제자집단을 기르지도 못했고, 예수님이 길렀다는 12제자는 지금은 사도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서 사는 부랑무식한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과 죽음이 그 시대 하나의 저항으로만 그치지 아니하고, 2천년동안 생명운동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수수께끼입
예수의 생명운동이 힘과 의미가 있어서 주변에서 예수를 이어받을 훌륭한 제자집단도 없이 예수가 육체적으로는 불꽃처럼 살고 가버렸는데, 영적인 생명 파동이 호수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원으로 점점 크게 일어 퍼져나가듯, 생명파동의 역사가 전개되었습니다. 때로는 예수의 생각과 뜻과 얼과 영적 생명이, 보다 더 분명하게 파악하고 확대 심화되던 때도 있었고, 예수의 생각과 영 상관없이 운동이 약화되고 변절되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기복이 있으며 역사 굴곡의 파노라마가 2000년의 한 인류 문명 속에 나타난 것이 기독교라고 봅니다. 인문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납득하는 게 어려움이 없죠.
예수라는 분의 언행이, 기존의 가치관에 혁명적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당시에 그의 운동을 지켜보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그대로 놔서는 그들의 이해관계에 큰 지장이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처형은 당시에 로마제국에 정치적 반란자에게 가하는 참혹한 방법입니다. 십자가 형틀에 매어 놓고 온몸에 진흙을 쏟고 시신을 독수리가 다 뜯어먹게 하고 시신을 식구들이 거두지도 못하게 하는 가장 참혹한 형을 예수께서 받았던 것입니다. 도리어 그런 예수의 모습을 보고 로마의 시저나 당시 유대교의 큰 성직자보다도, 그 사람 예수가 진짜 이 세상을 구원할 자라고 믿는 소수사람이 이곳저곳에서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출발입니다.
이 시간에는 논증할 수 없는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신비로운 일이지만 인문학 강의로 듣는 사람이 납득하기 없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단순히 뜻이 높고 고결한 생을 살고 간 예수라는 젊은 청년의 죽음이 너무나 아깝고 아쉬워서, 우리가 그 뜻을 받아서 이어가자고 하는 식으로 기독교가 전개되었을까요? 전태일 열사가 노동운동을 하다가 청계천에서 분신자살을 하면서, 한국노동운동을 바로 세우려고 했으니 우리가 그 뜻을 이어받자고 하는 노동운동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그런 성질의 것도 분명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기독교 발생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 뒤에 연속으로 따르는 무서운 박해와 시련을 죽은 이에 대한 추모와 그 뜻을 계승하려는 의지와 열정만으로는 이겨내긴 쉽지 않습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거목처럼 자랐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신약경전은 짧은 시간에 완결되었는데 예수의 삶을 기록한 4개 복음서는 50년 안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가 죽은 뒤 피의 흔적이 마르기도 전에 아주 생생했던 상황에 만들어 졌으며, 그 당시 예수는 기존 종교질서를 허무는 극악무도한 로마제국의 역적이었습니다. 예수의 추종자를 전부 죽이려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단순히, 전태일 열사의 숭고한 열정을 이어받으려고 했던 인간적 결단만 가지고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신비한 체험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복음서에서 말하기를, 예수는 죽었지만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부활이 무엇인가는 심각한 문제가 나옵니다. 단순히 시체가 소생하였다는 신화적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의 신앙은 동학이 창도할 때 수운 최제우에게 신령한 기운을 몸에 접하는 경험을 한 것을 강신경험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성령강림 체험이라 합니다. 예수라는 뜻을 이어가야겠다는 제자들의 열망에다가 인간 이상의 체험 즉 성령강림 체험이 기독교의 출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 체험과 성령의 강림체험이라는 두 사건은 인간의 인문학적 담론을 넘어서는 영역이지만 그런 것이 있어서 기독교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 점이 동양의 위대한 동아시아 종교와는 다른 특색을 이룬다는 점을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라는 분의 ‘생명을 일으키는 물결파동’이 기독교라는 종교현상의 본질이라고 할 때 혁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 불이 붙으면 얼마나 좋겠나마는 아직 그러지 않아서, 내가 근심이 크다” 말씀하셨습니다. ‘혁명’이라 하면 폭력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혁명’의 본래 뜻은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혁명(革命)
혁은 가죽 혁이며, 가죽 피 와는 다른 것입니다. 가죽 피는 은 짐승을 잡은 뒤에 껍질을 벗기면, 여기에는 살점, 기름, 털, 오물, 피가 붙어서, 이걸로는 가죽을 만들거나 신발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가죽의 피와 오물 즉 불순물을 제거하고, 동물의 본래 가죽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우면서 질긴 장점만살린 것이 가죽 혁입니다. 혁이란 글자 속에 본래 성질을 회복하고 드러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은 목숨 명이지요.
혁명이라는 것은, 사람의 목숨이 본래 깨끗하고 맑고 유연성을 가진 것인데, 역사 속에서 더러운 오물이 묻고 기름이 붙고, 굳어져서 생명의 본래성을 잃어버린 것을 걷어내는 운동입니다. 혁명은 총질하고 칼질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혁명 중에서도 제일 낮은 혁명입니다. 혁명이 아니라 권력의 자리바꿈일 뿐이지요. 혁명은 무력적 행위가 아니라, 생명의 본바탕을 드러내기 위한 근본적인 변혁이 본래 의미입니다.
예수는 자기의 할 일이 혁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불을 지르러 왔다”는 무서운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 혁명은 대단히 조용하게, 그러나 아주 레디컬(radical)한 레볼루션입니다. 래디컬(radical)이라는 영어의 의미는 근본적이라는 뜻입니다. 과격하다는 뜻으로 사전에 나오는데, 레디컬하다라는 말은 식물의 뿌리를 뜻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건강히 자라는 것처럼 나뭇가지 몇 개 전지하는 작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 뿌리를 튼튼하게 하자는 것이 radical의 의미입니다.
즉 예수의 복음운동은 조용하나 근본적인 변혁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쯤 되면 당신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을 합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 들어가려고 하실 때, 제자들이 “난세에 들어가서 개죽음 하려고 하십니까? 지방에 숨으셔서, 제자 기르고 훌륭한 말씀 나누시면서 좋은 세월의 때를 기다려봅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도 70, 80세까지 살으셔서, 인류의 현자로서 훌륭한 언행집을 많이 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세상의 질서가 너무나 깊이 병들어 있고, 너무나 왜곡 돼있어서, 이것을 근본적으로 고치기 위해서는, 당신이 죽는 길밖에 없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그의 언행 전체가 인간 혁명, 사회 혁명, 종교 혁명이라는 3가지 혁명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인간 혁명, 사회 혁명, 종교 혁명의 근원적인 에너지의 불꽃이 불탄 것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혁명을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도 근원적인 인간의 문제가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 것과 통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복된 사람이니, 그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고 깨끗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주변은 가난하고 가난해서 너무나도 가난이 지겨운 사람들이고 목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가 “가난해져라” 말씀하셨는데 이 가난이 무엇일까요? 물질적인 가난일까요? 마음에서 온갖 탐욕으로부터의 자유과 해방을 뜻하는 가난일까요? 해석은 천태만상으로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어요.
더 나아가서, 니고데모라는 당시 지식인이 예수를 밤에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원보다 높은 사람입니다. 로마가 유대민족을 식민지배를 하기는 했지만, 종교 문화 정신면에서는 독립적 자율권을 주었기에 그것을 운영하는 유대인 의결기관으로 산헤드린이라는 기관을 만들고 72명 대표자로 구성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당시에도 혹세무민하는 종교 광신자들이 많이 있었기에 산헤드린에서 예수도 그런 사람이 아닌가 조사를 하기 위해 변장하고 예수의 삶과 치병행위를 보며 치밀한 조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보니까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 생각해서 밤에 찾아가게 됩니다. 니고데모가 찾아가서 예를 표하고 “당신 하시는 일이 보통이 아니오, 당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온 줄 알고 왔소.” 말을 하니까, 예수는 차를 대접하는 것도 없이 거두절미하고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라며 일종의 선문답을 나누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나를 볼 수 없는 것이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이요”라고 말하셨다고 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regenaration, rebirth 의 의미와 동시에 ‘위로부터 난다’는 뜻이 있습니다. 천재적인 영감을 받은 사람은 내 두뇌의 컴퓨터가 순간적으로 작동해서 영감이 생기기도 하지만, 영감이 밖에서 왔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내 것이면서 나를 넘어서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이 스스로를 수양하고 성찰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데 까지 수행을 하는 것과, 그 모든 것 끝에 무언가 공간적으로 위에서 온다는 것은 다릅니다. 기독교는 나 스스로 나를 성찰하고 깨우치고 갈고 닦아서 자기를 완성하는 종교와는 다른 특색이 있습니다.
인간의 혁명은 참 어렵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와 같이 너희도 온전해져야한다’라고 하셨는데 기독교는 인간의 원죄설이 바탕에 있습니다. 저 자신이 살아보니 진리와 영원자, 절대자 앞에서 “나 이만하면 되겠죠?”라고 말할 자신이 없어집니다. 평소에 먼지가 안 보이지만, 햇살이 비칠 때 커튼을 열어 놓으면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보는 것처럼, 인간이 자기성찰을 해도 완전해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 등 모든 선각자들이 인간이 죄인임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해져서 요즘에는 도리어 병통이 났습니다. 자기 자신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나는 처음부터 안되는 놈이야”라고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근데 예수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너는 나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어”라고 민초들에게 격려를 하고 인정을 해주었습니다. “너의 생명 하나가 얼마나 귀한 것인줄 아느냐. 우주를 너 하나하고 못 바꾼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미운 놈 고운 놈에게 고루고루 햇볕도 주고 비도 내린다. 너가 그런 분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자녀가 아버지를 닮아갈 것이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처럼 너희도 온전해져라.” 라고 예수께서 기대를 하시고, 인간의 레디컬(radical)한 혁명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사를 보면, “나는 못 배우고 창녀의 아들이고 무식쟁이이고” 하며 스스로를 학대하고 좌절하던 인간이, 예수의 생명의 말씀에 부딪쳐서 딴 사람이 됩니다. 한국 개신교 짧은 역사에서도 그렇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도 놋그릇 장사하던 부랑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에 불이 붙어서 완전 딴 사람이 된 겁니다. 시장의 깡패도 예수의 말씀에 부딪히면 성자가 됩니다. 기독교는 이렇듯 인간 혁명의 요소가 있습니다. 단순히 교양도 아니고, 수행종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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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회혁명
둘째, 예수의 가르침과 언행에는 사회 혁명적 불꽃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가 많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있으면, 목자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놔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러 갈 것이다. 늦게까지라도 양 한마리를 찾아서, 양 백 마리를 함께 데려오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지요. 또 이런 비유도 있습니다. 사실은 유대 땅이 그렇게 비옥하지 않아 과수밭이 많습니다. 밀밭은 조금 있었습니다. 과수원에서 과일농사 짓는데, 날품팔이를 써서 수확을 했습니다. 당시 유대 인구 절반이 날품팔이였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요즘 실직자가 많은 것처럼 날품팔이를 할 수 있는 자리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루 일할 자리를 찾는데, 9시가 되어도, 12시에도 2시에도 일할 자리가 없는 겁니다. 오늘 일을 해야 가족이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일을 구하지를 못하니 날품팔이가 애가 탔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날품팔이에게 어느 과수원 주인이 일을 줬습니다. 해가 다 질 때까지 1시간 반 정도 일을 했어요. 일이 끝나고 과수원 주인이 급료를 주는데, 아침 7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해가 질 무렵에 일을 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2달란트(화폐단위)씩 급료를 줬다고 합니다. 아침에 온 사람이 화가 나서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이것은 노동의 윤리에 어긋납니다. 우리는 아침 7시부터 왔는데, 조금 전에 와서 일한 사람과 똑같이 급료를 받는 게 어딨소?” 주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애초에 2달란트 주기로 하고, 당신이 일을 하지 않았소? 내가 저녁에 온 사람에게 2 달란트를 똑같이 준 것은 나의 뜻이니, 당신이 받을 2달란트를 받고 가시오.”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용어로 말하자면, 경제의 효율성, 능률성, 합리성에 반합니다. 노동 공정성에 어긋나는 거예요. ‘일한 만큼 돈을 준다.’는 말과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늦게 일한 사람이 게을러서 일을 늦게 시작한 게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서 늦게 구했다는 것입니다. 요즘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 구조 때문에 일자리를 못 얻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도 똑같이 삼시 세끼를 먹어야할 자격과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런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도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회혁명에 대한 얘기 더 하겠습니다. “지위와 직급이 높은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들, 좋은 가문에 태어난 사람들이 대우를 잘 받고, 적당히 존경과 명예를 받으며 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내 제자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내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바닥에 내려가서 힘없는 자들을 도와주고 돌보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정치질서에 어긋나는 말입니다. 예수의 복음의 운동을 깊이 보면, 세상이 당연하고 옳다고 보는 생각과는 다릅니다.
제 어머니가 아홉 형제를 낳았어요. 한국전쟁 때 아버지께서 아이 하나를 데려 와서 열 자식이 되었어요. 열 자식 중에, 공부를 잘 한 사람이 있고, 취직을 잘 한 사람이 있고 못한 사람이 있고,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못난 자식에 더 연민을 가지고 돌아가실 때까지 못난 자식을 걱정하셨습니다. 이게 모성애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렇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너네들이 보기에 세상의 질서가 정당한 경제 질서라 볼지는 몰라도, 너희가 사람이면서 자기자식 열 명 중에 직업을 못 갖고 대학 떨어져서 우는 자식을 보면 부모 마음이 더 아프듯, 하나님도 그렇다. 그렇게 우는 자식이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바뀌어야 한다.”라고 예수가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예수의 사상에는 사회 혁명적 요소가 있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20세기 위대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인데, “사회주의운동은 본래 성경이 가지고 있는 예언자운동의 세속화된 발전 형태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종교도 탈색하고, 신도 필요 없다고 하고, 순순하게 사회과학적인 이론을 정립해서 역사를 변혁하겠다고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평등이라는 정의로움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 생각은 예수로부터 나왔다. 예수의 그 마음은 구약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약,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의 정신이 예수에게서 다시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이고, 그것이 서유럽의 정치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개된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는 냉전시대를 거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 못했습니다. 사회주의라고 하면 공산주의라 해서, 다 잡아 죽였습니다. 사회주의는 그렇진 않거든요. 기독교 위대한 사상가들은 유럽에서 사회민주당 정식 당원이곤 합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3) 종교혁명
세 번째 종교혁명을 봅시다. 예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종교라는 말로 대신해도 좋습니다. 유대교의 율법, 계율 중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적 계율은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어서 종교인들은 계율을 소홀히 하면 안되는 것이지요. 저는 기독교 쪽에서 보기에, 불교의 계정혜 삼학이 늘 존경스러워요. 인간은 태만하고 교만해지기 쉽기에 계율에 매이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을 지켜야한다는 계율도 같은 이치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안식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고 해서, 사람이 죽어가도 노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과 종교가 존재하는 것처럼 되어 버리니까, 예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뒤집어 버렸습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사람답게 살기위해서는 매일 노동에 매여서 365일 맷돌 돌리는 당나귀마냥 일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노동하는 것이지, 노동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가지고 장사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보기엔 큰일 날 소리였습니다.
예수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하셨습니다. 이슬람은 이슬람대로 성전이라 해서 금빛 성전을 지어 놓고, 카톨릭에서도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실제로 제가 예루살렘에 가보니, 별 매력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돌아가셨다는 장소도 정말 그런 장소가 맞을는지 의문이며, 과거 종교의 흔적과 찌꺼기를 붙들고, 그것이 무어 대단한 것 마냥 목숨을 거는 짓들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종교의 특별한 뜻은 성전이나, 특별한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인 것입니다. 요즘 말로 치면, 뉴욕에서도 아니고, 런던에서도 아니고, 사람이 그 마음이 성전이니 그 마음속에 신실함과 진실함으로 예배할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종교혁명입니다. 어느 날은 제자들이 멋진 성전을 보고, 긍지를 느끼며 예수에게 “선생님 얼마나 멋있습니까?” 말했습니다. 예수는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종교가 전통의 무거운 덮개를 쓰면 쓸수록, 점점 이상하게 변질되기 쉽습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혁명하려고 생긴 종교가, 오히려 생명을 억압하는 기제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생명’에서 진동의 원점을 가진 ‘생명의 물결파동’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어서 그것이 들어가는 곳에 인간의 혁명, 사회 혁명, 종교 혁명이 일어나는 물결파의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면 기독교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기독교라는 종교단체로 허세를 부리면, 겉으로는 휘황찬란한데, 예수와는 하나도 상관이 없고, 예수와 그리스도교의 이름을 파는 종교기업체가 돼버립니다. 한국 기독교 130년 역사입니다. 초창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잘은 몰라도 직감적으로 알아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는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한국 기독교는 싫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말이 옳다고 봐요. 저도 목사이고, 한국 기독교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지만, 더욱 호된 비판으로 한국 기독교에게 채찍질 할 필요가 있어요. 아니면 자기도취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판서내용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will 1. 의지 선택결단 2.의미 가치추구
두 번째 큰 세션에서는 첫째 세션에서 한 발 나아가는 말씀을 하겠습니다. 조지훈 교수가 한 말이 있는데요. 지구 전체 지도를 놓고 보면 우리나라 작은 나라지요. 그러나 종교 사상사적으로 보면 특이하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흘러와 마지막으로 몰려든 큰 호수와 같은 곳이 한반도라고 조지훈 교수(겸 시인)이 말했습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에서 대승불교로 꽃 피고 한국에까지 들어와서 꽃피웠습니다. 불자들은 불교가 외래 종교인줄 잘 모릅니다. 그리스도교는 7~8세기 당나라 때 중국까지 왔습니다. 경교라고 불렀습니다. 그때는 중국에서 대승불교가 워낙 꽃이 피어서, 그리스도교가 영향을 미칠 만한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중국 지도자는 그리스도교까지 다 받아들였는데, 기독교의 한 종파인 네스토리우스 교회(Nestorian Church)가 들어와서 경교라고 불렸고, 포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경교는 한반도에는 당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어요. 유물 발굴 속에 십자가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기는 하는데, 사상사적으로는 미미하죠.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지구를 빙 돌아서 19세기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유교와 노장사상은 중국에서 나온 종교인데 한국에 들어왔고, 샤머니즘은 몽고에서 발생한 종교인데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인도계 종교, 중국계 종교, 샘족계 종교, 몽골계 종교가ㅡ 세계의 종교가 한반도에 다 왔습니다. 전세계에 이런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러 종교의 찌꺼기 껍질만 남은 것인가 아니면 종교의 생생한 원형들을 재발견해서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또한 세계에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종교사상의 영성을 제공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우리가 후자 노릇을 해야합니다.
그리스도교 교인 자신도 그렇고, 이웃종교인들도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익숙했던 유불선 3교와 비교해서 특성이 무엇인가? 기독교라는 과일의 독특한 맛이 무엇인지 아는 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드릴 말씀이 많다만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와 비교하겠습니다. 인류의 두 가지 위대한 자태가 있는데, 하나는 불교는 석굴암 좌불상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어간 예수 십자고상이라는 내용의 수필이 있습니다. 부처상 그 자태는 깨달음의 희열입니다. 예수의 자태는 혁명을 하려다가 기득권의 힘에 부딪혀 죽임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라는 학자가 한 말인데, 인류 문명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은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심층적 차원에서 서로 만나서 피차 배워가기 시작하는 발자국을 떼어가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앞으로 몇백년이 더 걸릴 것입니다. 불교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의 종교의 특징을 ‘깨달음’이라고 저는 보았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지요. 마음으로 이해하든, 머리로 이해하든, 실제 우주가 어떻게 되었는지 실상의 존재가 무엇인지 깨달으면 모든 아집에서 벗어나서 보살행을 행할 수 있다가 불교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이에 대비하여, 기독교는 그런 면이 부족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거듭남’의 종교라 볼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의지적인 요소가 강조합니다.
기독교가 낳은 학자인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뜻’이라는 말이, 영어로 표현하면 will 이며 ‘뜻’은 한국어로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의지, 선택, 결단’의 의미입니다. “나는 내 재산 전부를 마음공부에 내놓을 뜻이 있어”라고 말할 때, ‘뜻’은 ‘의지’를 의미하지요. 둘째는 ‘의미, 가치추구’입니다.
우리말 ‘뜻’은 ‘의지’와 ‘의미’가 합한 단어입니다. 묘한 단어이지요.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책은 ‘의지’의 측면에서 한국 역사를 보고, ‘의미’의 측면에서 한국 역사를 보겠다는 책인 것입니다. 이같은 측면으로 역사를 보면 역사 속에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사실 형편없고, 역사에서 꺾였던 사육신, 임경업 같은 사람은 높이 평가됩니다.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본 책인 것이지요. 정교한 역사 교과서는 아니지만, 역사 철학서 책입니다. 함석헌 선생이 시인이기도 합니다. 시민운동가 정도로만 보는 사람도 있지만, 함석헌 선생이 백편 정도의 시를 남겼습니다. <맘>이라는 시의 몇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맘은 꽃
골짜기 피는 란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
맘은 씨알
꽃이 시들어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맘은 차라리 처녀
수줍으면서 당돌하면서
죽도록 지키면서 아낌없이 바치자면서
누구를 기다려 행복 속에 눈물을 지어
함석헌 - <맘>
제가 아는 함석헌의 종교철학은 이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첫 행을 조금만 음미해보겠습니다. ‘맘은 꽃’이라 했습니다. 마음을 사람의 생명이라 바꿔 읽어도 되겠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꽃입니다. 꽃 중에서 골짜기의 난초꽃이라 했습니다. 이 난이 썩은 거름을 먹고 자라 향을 풍깁니다. ‘인간은 너도 그렇다. 혼자 잘나고 똑똑해서 꽃 피는 줄 착각하지 말아라. 너를 오늘 있게 한 무수히 많은 생명의 거름이 있다. 부모님, 친척, 이름 모를 열사, 국내사람 아닌 사람도 있다. 너의 지식, 건강, 재물 중에 너의 것이 어디 있느냐? 다 빌려 쓴 것이지’라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원불교 사은사상이 위대하지요. 원불교 사은사상을 한 줄로 표현하면 이것입니다. “맘은 꽃/ 골짜기 피는 란/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
다음 행을 보겠습니다. ‘맘은 씨알’이라 했습니다. ‘꽃이 시들어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입니다. 사람들은 식물을 볼 때, 잎을 보고 꽃을 보며 관상수로 좋아하지요. 그러나 식물들에게는 씨앗의 알을 여물게 하기 위해 잎도 피고 꽃도 피는 것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에는 잎이 중요한 게 아니고, 꽃이 얼마나 아름다우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 데 신경 쓰지 말고 ‘너 안의 생명의 알이 잘 여물어지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자람의 끝입니다. 결국 생명은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불멸의 것이 있습니다. 정신적 영적인 씨알입니다. 그 씨알이 여물어지느냐 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씨알에서 새싹이 나와서 모든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어서 씨알은 모든 형상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생명 하나는. 내 앞의 무수히 많은 생명의 물줄기와, 나에게 비롯하는 무수히 많은 생명의 물줄기를 이어주는 존재로서의 나인 것입니다. 이 말은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생물학적인 유전자가 전달되는 게 아닙니다. 정신적 생명 영적인 생명, 즉 사람다운 생명을 주는 게 중요한 아니겠습니까.
세 번째 행을 보겠습니다. ‘맘은 처녀’라 했습니다. 처녀는 수줍음을 타면서도 당돌한 면이 있습니다. 정조를 죽도록 지키려 하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임이 오면 아낌없이 바칩니다. 그런데 아직은 아낌없이 바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누구를 기다리면서 행복 속에 눈물을 짓는 존재입니다. 여기서 처녀는 ‘인간다운 사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감투 준다고, 돈 준다고 해서 자신의 지조를 팔아넘기는 사람이 많은 세태를 우리가 요즘 보고 있잖아요.
함석헌의 종교시는 ‘뜻’을 강조하고 있죠. 기독교가 본래 그런 종교입니다. 뜻을 강조하다보니, ‘의지, 선택결단’이 중요하고, ‘의미, 가치추구’를 중시합니다. 기독교는 음양으로 말하자면 ‘양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잘못하다보면, 행동주의가 과도하고, 역사에 대한 참여가 과도해질 수 있습니다. 13, 14세기에는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서 아메리카인들 수탈해서 성당을 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의 참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영성과 십자군의 영성을 구별해야합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점령당했다고 해서 군사를 일으킨 전쟁이지요. 상당히 잔혹했던 전쟁입니다. 십자군의 영성은 정복과 힘과 자기과시 그리고 폭력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의 죽음으로 도리어 빛을 드러내는 의미입니다.
전태일이 불타죽음으로써 당시의 지식인들이 반성하게 했습니다. “청계천에서 12살, 13살 여공들이 오줌 누러 가지도 못하면서 일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내가 석박사 학위를 따서 무엇하겠느냐. 전태일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구나.” 깨닫게 했단 말입니다. 전태일 장례식에 함석헌 선생이 가서 “당신은 진정 우리의 스승이었습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했어요. 1970-80년대 기독교 민중 신학이라는 것의 효시가 ‘전태일 사건’에 있습니다. 외국에서 신학 공부해온 목사들이 전태일 사건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가 민주화운동해서 감옥에 가보니까, 밖에는 큰 도둑들이 잘 살고 있는데 죄수 중에 못 배우고 억울해서 감옥살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민중 신학이 한국 짧은 개신교 역사 속에 싹이 트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십자가의 영성이 십자군의 영성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런데 본래적 예언자 정신을 비쳐보면, 십자가의 영성이 십자군의 영성으로 변질되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우상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상이란 돌이나 흙으로 빚은 무언가를 신성시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지 않은 것을 절대라고 확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신념적 우상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플라톤이 말하는 커다란 동굴에 갇혀버렸습니다. 기독교라는 동굴 속에서 동굴 밖의 빛을 못보고 있지요.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말하는데, 동굴에서만 자란 노예들이 있어서 동굴 밖의 빛은 보지 못하고, 동굴에 켠 촛불만 보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노예 한 명이 동굴을 탈출해서, 태양빛을 보게 됩니다. 그 노예가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자 동굴 밖에 밝은 세상이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동료 노예들은 밖을 보고 온 노예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 노예를 박해한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은 모두, 부분적으로는 동굴에 갇힌 존재죠. 사람이 나빠서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닙니다. 동굴 속에서 자라서 그 세계만 보다 보니, 세상이 그렇게만 보이는 것이지요. 종교란 무엇인가요. 원불교든, 불교든, 가톨릭이든, 종교는 동굴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동굴 밖에 광명천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밝은 눈으로 보고 세상을 보고,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끌어안으면서 자유롭고 주인답게 살자는 것입니다.
<셋째 토막>
한국은 기독교의 좋은 DNA를 받았습니다. 카톨릭은 1784년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1884년에 한국에서 개신교 최초의 교회가 생겼습니다. 개신교가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날 때만 해도, 원불교 여러분 모습과 같았습니다. 금칠하고, 십자가에 네온사인 단 교회 없이 다 순수하고 검소하여 예수의 정신에 눈이 번쩍 뜨여 있었습니다.
한국 종교 문화사 속에, 유교와 불교가 인간이 존엄하다고 가르쳤지만, 실제로 신분 차별, 남녀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모든 직업이 신성하다는 정신을 수혈하는 일에는 크게 성공 못했습니다. 개신교가 짧은 시간 동안 비로소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한국 성서 번역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요즘이야 불경도 한국어로 번역이 많이 됐지만 옛날 민초들은 불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식인들만 유교를 공부하고, 불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가 성경을 번역 했더니, 민초들이 눈을 번쩍 뜨고,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잠에서 깬 것입니다. 서양 의료기술과 과학기술이 전달되고, 교육제도가 도입됐습니다. 개신교가 1884년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 전체가 30만이 안되었을 때만 해도 기독교가 존경을 받았습니다. 생명의 종교운동이라는 희망을 느꼈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초창기 선교사들은 예수의 진짜 제자들이었습니다. 자기 나라에 살면 잘 먹고, 잘살텐데, 한국은 개화기 직전이라서, 특히 여자들은 이질이나 페스트에 전염돼서 죽기도 많이 했습니다. 1세대 선교사들은 종교적 교리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 당시 가장 큰 문제였던 의료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질병 특히 결핵, 나병, 문둥병, 기타 등등 파고 들어갔습니다. 제 고향이 광주인데 마더 테레사 같은 선교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평생 환자 옆에서 그들을 돌보고 살폈던, 평신도 의료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보니, 한국 민초들이 “야소교(예수교)가 무슨 종교지? 가족도 나를 버렸는데, 왜 나를 거둬줄까?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교리, 신학으로 기독교가 전파된 것이 아닙니다. 초창기 20~30만명 정도의 기독교 신자들 속에서는 아가페적인 특성이 있었습니다.0 초창기 교도들은 자기 헌신적인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는 예수의 희생종교에 녹아들어간 것입니다. 한국 첫 세대 30년 동안의 일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를 배반한 종교기업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라 보면, 오해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사람 중에 도둑놈이 많다고 해서 학교를 폐쇄한다고 하면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좋았던 기독교가 왜 이렇게 됐을까요? 2, 3세대 선교사들이 들어올 때, 제1세대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십자가의 영성’을 잊어버리고 ‘십자군의 영성’을 가지고 와서, ‘무식한 조선민족의 종교 후견인 노릇’을 하며 세뇌시켰습니다. 세뇌의 내용은 ‘기성경이라는 것을 글자 하나하나라도 바꿔서는 안 된다. 글자 하나하나가 진리다’는 세뇌였습니다. 19세기 유럽의 기독교 선교 신학이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온 세계를 기독교화 하겠다.’는 소위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식민지정책에 편승해서 교세를 확장하려 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영국, 독일,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미국까지 전부 다 제국주의적으로 식민지를 만들습니다. 그 함선을 타고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졌습니다. 기독교는 싫든 좋든 제국주의적 제3세계 수탈정책에 편승해서 세계종교를 이룬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금은 반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배만 빌려타고 왔지. 이를테면 아편전쟁을 지지한 적이 없어.’ 라고 합니다. 3 1 운동 때만 해도 깨인 선교사들이 ‘조선은 독립을 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너네들의 신변 보호는 해주겠다만 순수한 복음만 전파하지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미국 같은 세속적 국가가 일본과 협약을 맺어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회는 공식적으로는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경우도 있지만, 자발적인 만세운동이었던 것이고, 공식적으로는 참여 안했습니다. 그때부터 보수적 선교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1세대와 다른, ‘십자군의 영성’을 가지고 한국의 기존 종교를 우습게 보고, 반지성주의적 기독교를 가르치며 과학주의와 부딪쳐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기복신앙에 편승하고, 자본주의 생리에 영합하면서, 냉전시대 논리에 예속되어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동굴의 기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첫댓글 도원 교우님 감사합니다!! 정리하느라 고생 많으셧어요~!! 감사합니다!!
정은 성해 도원 교우님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