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속교회이야기Ⅱ. 『갈대상자와 같은 교회』
출2:1-10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1.들어가며
오늘도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 음성을 들으시길 소망합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손자나 아들하고 씨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결과는 뻔합니다. 힘이 세다고 손자를 패대기치는 할아버지는 없습니다. 얍복강가에서 밤새 야곱과 씨름하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일부러 져주시는 겁니다. 왜요?
사랑하니까!!!
엄마는 딸들만 보면 잔소리를 합니다.
“이건 해라, 저건 하지 말아라, 이건 입어라, 저건 입지 말아라, 여기는 가라, 저기는 가지 말아라, 누구는 만나라 누구는 만나지 말아라.” 그러면 딸들이 꼭 하는 소리가 있죠.
“알았어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 엄마는 내가 지금도 애로 보여.”
엄마 눈에는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애로 보이는 겁니다. 나중에 엄마 없이 혼자 김장김치를 해봐야 그때 서야 엄마 생각이 나고 엄마 없이 애가 아파봐야 엄마의 잔소리가 그립고 소중한 것을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기는 어지간히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가 되자 율법을 주시고 레위기를 주시면서
‘이건 먹어도 된다. 저건 먹지 마라. 이건 해도 된다. 저건 하면 안 된다. 저기는 가지 마라 여기는 꼭 가라. 제사는 이렇게 드리고 제물은 이렇게 바치고 절기는 이렇게 하고.’ 세세하게도 적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철저하게 엄격하게 율법을 제정하시고 레위기를 적으셨냐면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이 보통 죄악에 물들고 어둡고 악한 족속이 아닙니다. 그들이 방금 탈출한 애굽도 죄악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가나안은 그보다 더합니다.
입에 담기 민망한 일들이 버젓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문화라는 명목으로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곳이 소돔이고 고모라며 애굽이고 바벨론입니다. 노아의 홍수 시대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레위기를 주시고 율법을 주신 겁니다. 레위기가 읽기에 딱딱하고 어렵고 재미가 없어도 성경은 재미로 보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는 레위기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2.요즘 TV를 보면
그런데 요즘 TV에 나오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가나안, 애굽 저리가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굳이 드라마를 만들려면 엄마의 바다나 아들과 딸과 같은 프로그램 만들어서 실패하고 좌절했지만 엄마가 자녀들을 이끌고 해쳐나가는 모습, 엄마가 귀하게 얻은 아들은 귀남아 귀남아 하고 딸은 후남아 후남아 해도 알고 보니까 엄마도 사실을 딸이었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어디 있냐는 그런 내용 아니면 불멸의 이순신이나 허준 같은 마음이 따뜻한 드라마를 찍어야 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는 수목 드라마 중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연히 잠깐 민지랑 근성이랑 앉아서 보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한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결혼행진을 하는데 신부가 한 여자를 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이 나와요.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서 아빠에게 절규를 합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몰라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이 언니라고요. 결혼을 한다면 이 언니랑 할께에요.” 저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마침 근성이랑 민지가 보고 있잖아요.
‘아이쿠야 이런 문화가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에게 결혼한다는 말이 TV 드라마에서 이렇게 쉽게 나오면 어떻게 하나? 우리 아이들이 이걸 보고 자라면 어떻게 될까?’
목사님 촌스럽게, 고리타분하게 왜 그러세요? 그게 문화잖아요.
그렇게 말하시면 저는 촌스러운 사람, 고리타분한 사람 될께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물들면 어떻게 하죠?
3.갈대상자의 어원
오늘 말씀 보니까 레위 한 남자가 레위 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너무나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애굽 바로의 명령대로라면 아들은 나일강에 던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도 나일강에 던져야 해요. 그런데 이 엄마 아빠는 한가지 복안을 생각합니다. 나일강에 던지긴 던지데 갈대상자에 넣어서 보내자.
구약성경을 보니까 원래 레위들은 무슨 일을 했느냐면 아직 법궤도 장막도 없을 때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입으로 외워서 옮기는 역할을 레위들이 감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부모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요?
이것이 우연이 아닌게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 갈대상자,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전 파피루스의 어원은 모두 하나 ‘테바’입니다.
방주의 어원도 테바고 갈대상자의 어원도 테바고 하나님의 말씀을 만드는 파피루스도 어원은 테바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부모는 나일강에 아들을 던질 때 어디에 담은 것이 됩니까?
그들이 사용한 갈대상자의 어원이 무엇이라고요?
테바!! 하나님의 말씀!!!
그래서 자녀들은 문화로 양육하는 것 아니고 교육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하고 교육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4.가정과 교회
구약시대의 특징이 하나 더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가정과 교회의 구분이 없습니다. 즉 교회가 곧 가정이고 가정이 곧 교회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였고 그곳에서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은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이삭의 쌍둥이 야곱은 아버지의 장막 즉 교회에 거하는 것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교회에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에 오는 것이 좋아서 교회에서 교회학교 보조교사도 하고 찬양대도 하고 심지어 교회 청소도 자기가 솔선수범하는 아이였고 에서는 아버지의 장막보다는 세상으로 들로 들고 뛰고 날뛰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가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바로 가정이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이처럼 주님의 장막이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 자녀들의 팔에 몸에 이마에 하나님의 말씀을 매고 새기고 그들이 말씀을 가까이할 수 있기를 그 말씀이 우리 자녀들을 인도하시길 소망합니다.
5.하나님 역사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보니까 애굽의 공주가 갈대상자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열어보니 히브리 사내 아이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바로의 명령대로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약 이 아이를 버리지 않고 궁에 데려가면 아버지이긴 하지만 바로의 명을 어기는 항명죄가 되고 반대파 사람들이 알게 되면 자기는 항명죄로 처단되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홀렸는지 바로의 공주는 ‘물에서 건진 아이’. ‘모세’라는 이름까지 지어주고 그를 자신의 궁궐로 데리고 갑니다. 지금 그녀의 생각을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시죠?
전지 – 모든 것을 아시고, 전능 –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역사하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의 공주를 통해 모세를 건지셨듯이 우리 자녀들의 인생을 그분께서 전지전능하신 팔로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동행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위에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