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 89년 6월 1일 23시 야간 행군으로 도봉산에 있는 악명 높은 백마 유격장을 향해 한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를 짖누르는 군장을 지고 출발했다. 다섯 시간 반을 걷고 난 후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그 동안 고참들의 무용담을 귀 따갑게 들어야 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몇 달 전에는 휴양소였는데 이제는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시험하는 힘든 훈련의 장소가 되다니... ... 그 다음날 정확히 말해 도착한 그 날! 일요일이라 유격복을 받고 올빼미 번호를 달고 이래저래 바쁘고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날 저녁 비가 올 것 같았다. 독사 새끼 김태현이 曰 “비가 오길 기도해라 비가 오면 유격을 안 받는다.” 그 말을 듣고 잠도 안 자면서 (사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기도한 보람인지 비가 왔다. 그러나 비가 와도 진흙탕에서 구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안녕하십니까? 본 교장은 백마 유격장입니다.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완벽하게 임무수행을 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을 배양하고 인간의 육체적 한계는 강인한 군인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해 주는 곳입니다. 정신 안 차리면 생명에 위협이 따르는 만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유격훈련에 임할 수 있도록 합니다.”라는 김광수 중사가 왜 그리 공포의 대상이었을까? 수통에 물이 있고 아무리 물이 먹고 싶어도 고참 허락 없이는 못 먹던 시절! 오전에 기초 유격으로 이틀 동안은 지겹도록 P.T체조만 할 때는 흙탕물에 포복을 하고 팔굽혀 펴기를 몇 백개를 해도 괜찮은데 오후에 산악 장애물을 탈 때는 비도 그치고 6월의 땡볕이 내리 쬐어 모두를 괴롭게 했다. 몰골에 대하여 잠시 언급 한다면 가랭이, 겨드랑이는 다 터지고 유격복은 반바지와 일반 바지 중간의 길이에 엉덩이 및 팔꿈치에는 덕지덕지 빵구를 떼웠으며 팔의 길이도 짧은 참 웃기는 형상이었다. 유격의 일과를 보면 첫째 날, 둘째 날은 오전에 기초유격 네 시간 오후에 산악 기초 장애물 을 타고 다섯 시에 내릴막 1킬로미터 오를막 1킬로미터를 두 번 왕복하는 것이었는데 힘을 다 소진한 상태여서인지 정말 힘들었으며 산악 기초 장애물에서 11.7미터의 고공에 올랐을 때 고소 공포증이 있던 나는 정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입이 바싹바싹 말랐으며 식은 땀이 줄줄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죽도록 고통스러우면서도 지겨운 P.T체조를 쫄다구라 요령도 못 피우고 구보 때는 아들 낳지 말자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위병소 밖을 나갔는데 주위의 시냇물을 따라 유흥객들이 먹고 두드리고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며 난리판을 치고 있는데 우리는 빠질데로 빠진 힘으로 땡칠이 처럼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구보하자니 정말 초라해지고 열 받았다.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뼈를 깍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사흘째 되던 날 산악장애물을 타고 있었다. 그 다음이 산악 레펠이었는데 비가 장대같이 쏟아 붙자 이제까지 비가 와도 강행하던 대대장님도 안되겠다 싶으셨는지 오후 세시 반 경에 하산을 시켰다. 텐트 안에서 쉬는 것도 잠시 연대장님이 오신다고 다섯 시 반 쯤 구보 집합을 하라는 것이었다. 유격복은 밖에 비 맞는데 걸어 놓아 축축하고 바람은 쌩쌩 휘몰아쳐 육월인데도 몸이 와들와들 떨리며 몹시 춥게 느껴졌다. 청승 맞은 날씨 속에서 초라한 몰골로 비바람을 맞으며 개처럼 6킬로미터를 뛰었다. 담력훈련 코스가 있었는데 담력훈련 출발 전에 장기자랑에서 통과하면 조교가 담력훈련을 제외 시켜준다고 해서 장기자랑으로 뱀장수 흉내를 내었다.(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 경상도의 꽃뱀, 전라도의 물뱀, 제주도의 독사, 강원도의 살모사, 충청도의 능구렁이...... 중간 생략...... 한마리만 먹어봐 40먹은 아저씨 밤 잠 못자... ... 세 마리만 먹어봐 80먹은 할아버지 소변이 담장을 넘어가...... 애들은 가라!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장기자랑이 통과되어서 담력훈련을 안 받을 수도 있었는데 자원해서 받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원래 나는 겁이 많았기 때문이다. 담력 훈련은 기존에 받은 사람은 제외 되었다. 담력훈련을 끝마치고 텐트로 돌아 왔은 때는 약 두시 경이었는데 세시쯤에 불침번 근무가 있어서 정훈 병장과 함께 근무를 설 때 정훈병장이 王高의 서러움을 이야기 했는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외줄 타기를 할 때 장대비가 왔는데 내가 거의 제일 뒤에 코스를 타게 되었다. 산과 산을 연결한 (높이는 대략 50 여미터에 길이는 80미터정도) 로프와 나의 몸에 연결한 로프에 빗물이 먹어 앞으로 전진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던 내가 그 외줄에 매달려 가다보니 힘이 쭉 빠져서 아이고 못가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곳이 가장 높은 지점이며 가장 중앙의 위치라 돌아가지도 못하는 아찔한 장소였는데 유격! 유격!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전진하다 도착지점 20미터 정도를 남겨두고 통닭이 쉬워 보여 (통닭이 되면 눈이 하늘을 향해 공포가 줄어들기도하여) 일부러 통닭이 되었는데 더 힘들었다. 두줄과 세줄은 스릴이 있는 것이 (다리가 약간 후들 거리기는 했지만) 재미 있었고 수평이동(?)은 날아 갈듯한 상쾌함을 주었다. 물론 정지를 제 때 하지 못해 박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 막타워 타기(낙하산 예비훈련)는 뛰어 내리는 것 보다 층과 층에 올라 갈 때 구르는 것(전방에 적이다! 후방에 적이다!를 외치며 점프하면서 라이자(?) 줄을 잡고 원투 스트레이트를 다섯번 이상 씩을 때리는 것이 대부분)이 곤욕스럽게 했다. 막타워 올라갈 때는 차라리 후딱 뛰어 내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막상 문 앞에 서니 솔직히 정말 겁났다. 하지만 사람 죽이는 코스는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뛰어 내렸는데 처음의 그 쾌감은 날아 갈듯 했다. 하강은 물P.T를 하고 난 후 맨 발로 도르레를 들고 80여 미터 높이인 산 중턱의 코스까지 올라가 길이는 120여미터 정도의 와이어 철선에 도르레를 걸고 오로지 자신의 손에 목숨을 걸고 7초 ~ 8초 정도의 스릴을 느끼다 교관의 깃발과 호각 소리에 의해 몸을 V자로 하여 연못에 떨어져야 하는 코스였는데 내려오면서 수영을 할 줄 알면 '유격대!’를 수영을 못하면 ‘맥주병!’을 외치는데 만약 수영을 못하면서 유격대를 외치면 조교들이 일부러 물을 먹였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도 물에 떨어지고 나면 정신이 없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만약에 신호를 못들어 부딪히는 날에는 최소한 혼수상태였을 것이다.(와이어 철선이 끝나는 지점인 다리 옆에 타이어 몇 개로 막아 놓기는 했지만... ...) 나는 물에 들어갈 때 자세가 안 좋아서 낭심이 억수로 아팠는데 찢어졌는지 알고 가다가 이상유무를 확인해보니 벌겋기만 하고 이상은 없었다. 왜 확인을 했냐하면 장가도 못가보고 孤子되기는 싫었으니까! 이로써 유격의 일정이 종료 되었으며 두부와 막걸리 한잔이 주어졌다. 89년 유격하면 못 잊을 악몽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설사! 물갈이를 한 까닭일까? 아니면 비 맞고 구르다 오후에는 뙤약볕 아래서 구르고 탈진 상태에서 구보하고 열 받고 해서일까? 밥이 설익어 아니 물에 담가 놓았다가 꺼낸 것과 같은 밥을 먹어서일까? 아마도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한말짜리 물통에서 수통으로 옮길 때 떨어지는 물을 보고 침이 바짝바짝 마르도록 물을 못먹은 내가 그 물을 철모로 받아서 세 철모를 연거푸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에 열번 이상씩 (평균 15회 정도) 열흘간이나 해대는 설사! 여러분들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하물며 유격장에서 이틀째되는 저녁부터 설사를 시작했으니 그 고생을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유격을 남들과 같이 꿋꿋하게 잘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군인정신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유격을 다 마치고 밤 여덟 시에 유격장을 떠나게 되었을 때 소대장님께서 하얗게 변해있는 내 얼굴 상태를 보고 걱정이 되시던지 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셨다. 그러나 그 때는 못간다고 말을 할 수 없던 시절이었으며 죽어도 가다 죽어야 하는 시절이었기에 갈 수 있다고 했다. X같은 것은 김태현이가 내 목을 찔러 총한 것이 발각되어 영창을 살고 왔고 그 새끼의 동기가 똘아이 분대장 이종원이어서 분대에서 찍혀 13일 차이가 나는 고참과 같이 나누어 무거운 것을 짊어지는 것이 통례인데 나에게 텐트 및 모포 두장, 팩 모두 그리고 활동화, 슬리퍼, 판쵸우의, 야삽 등 들어갈 수 있는 한 다 군장에 집어 놓고 오게 되어 그 무게가 엄청났다. 그 보다 더 X같은 것은 항상 인정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니 저떻니 하면서 제대하면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하나님과 예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목사가 되겠다는 두달 반 정도의 고참 구연길이가 진급휴가를 갔다가 유격장으로 복귀해서 아무 것도 없고 종이가방에 전투복 한 벌밖에 없으면서 바로 나의 뒤에 쫓아 오면서 도와 주기는 커녕 심한 설사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하고 장단지를 걷어 차는 것이었다. 정말 X같아서 원 참... ..., 50분을 걷고 난 후 10분간 휴식할 때 설사를 두번 그 다음에는 세번 세 시간째는 가다가 설사를 하고 뛰어가서 소대에 맞추고 또 가다 설사하고 뛰어가 소대에 맞추고... ... 행군을 다섯 시간 반 정도 했는데 설사를 아홉 번이나 했다. 물이 먹고 싶어 죽겠는데 수통에 물을 쏟아 버리라고 해서 물이 없었는데 바로 앞에 걸어 가던 보름 밑인 병용이에게 물을 남몰래 얻어 먹었는데 그것도 바닥이 나고 하늘과 땅은 노랗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남의 발걸음은 점점 빠르게 느껴지었으며 낭떠러지에 굴러서 죽어 버릴까 하는 유혹이 낭떠러지만 있으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고마운 것은 도착 한시간 정도를 남기고 제대 말년 정훈 병장이 군장의 뒤를 잡게 해서 오를 막이면 끌어 주었던 것이었다.(이것을 본받아 나도 훈련 때 힘들어하는 졸병을 끌어 주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참고 견디며... 견디며... 걸어와 주둔지의 불빛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리게 되었을 때 가도 가도 끝없이 느껴지고 급기야 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치욕으로 기억될 일이 벌어졌다. 가다가 쓰러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는데 고참들 특히 분대장인 종원이의 소총개머리판, 워카발, 주먹세례를 받고 난 후 종원이의 군장은 구연길이에게 맡기고 내 군장은 종원이가 들어 주었다. 식기조인 박상흠이란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었는데 그 다음날 나를 두들겼다. 분대장이 군장에 돌을 가득 채워 놓고 못 일어서자 자신이 일으켜 세운 후 중대 막사에서 화장실을 가는 계단을 오르내리고 때로는 구보를 시켰으며 감시는 박상흠에게 하라고 했다. 오전 내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누며 시키는 대로 했는데 너무 열이 받고 참을 수 없어 중대장님께 구타 및 날이면 날마다 일어나는 가혹행위의 진상을 말하고 나도 영창가게 되면 갈려고(맞은 자나 때린 자를 똑같이 처벌한다는 규정이 있었음) 중대장실을 찾아 갔는데 중대장님이 없어서 그만 두었다. 만약 그 때 계셨다면 수십 명이 영창 및 구속되는 폭풍이 휘몰아 쳤을 것이다. 그리고 유격훈련 때 기억이 남는 것은 분대장과 태현이가 임종호에게 라면 사오라고 시켜 놓고 인원 파악 때 종호가 집합을 하지 못했다고 텐트 안에서 돌맹이 위에 깍지 끼고 머리 박고 또 돌맹이 위에 깍지 낀 상태에서 머리 박기를 한 시간 반 정도 한 후 즉각 시정 표시 안 나게 때린다는 미명 하에 이두박근, 허벅지, 복부를 발과 주먹으로 터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