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
가슴속의 비밀(2)
동혁은 저의 집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영신에게 보여주기가 싫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어머니나 아버지나,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 짐작대로 영신을 저의 색싯감으로 알고 놀리기까지 하는 것이 싫어서, 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를 꺼렸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예야, 좀 가가이 보자꾸나. 먼 광으루만 보구 어디 알 수 있니? 색싯감을 서넛째나 퇴짜를 놓더니만, 연분이 따루 있는 줄이야 누가 알었겠니? 으물스레 굴지 말구, 저녁엔 꼭 데리구 오너라.”
하고 아들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며느릿감을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사실, 정분이, 차순이, 필례 할 것 없이 동네의 색시들은, 동혁이를 믿고 있었는데, 당자가 ‘안직 장가를 아니 들겠다’고 쇠고집을 세워서, 다른 데로 혼인을 한 뒤에, 벌서 아들딸들을 낳고 사는 중이다. 근동에서도 여러 군데서 통혼이 들어왔건만, 아무리 사윗감을 탐을 내어도, ‘글쎄 갓 서른까진 장가를 안 든다니까…..암만 해보구려’하고 막무가내로 말을 아니 들어왔다. 어제 저녁에는 동화도 형과 겸상을 해서 밥을 푹푹 퍼넣다가,
“성님, 사람이 썩 무던해 뵈는데….쇠뿔도 단결에 빼랬다우. 그 덕에 나두 고만 장나가 들어봅시다.”
하고 뒤퉁그러진 소리를 해서, 형은,
“너두 날 놀리는 셈이냐? 그렇게 급헌데, 누가 너 먼첨 장가를 들지 말라든.”
하고 씁슬히 웃었다.
한편으로 영신이도 동혁의 생활이 보고 싶었다. 오래 두고 머릿속에 그려보던 것과 같은가, 또는 얼마나 틀릴까— 하고 적지 아니 궁금히 여기다가, 동혁이가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가서 둘러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차한 살림이요, 더구나 홀앗이라, 번쩍거리는 세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문학교까지 다니던 사람이 거처하는 방으로는, 너무나 검소하다. 흙바닥에다가 그냥 기직때기를 깔았는데, 눈에 새틋하게 띄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윗목에 놓인 책상에는 학교에 다닐 때 쓰던 노트 몇 권이 꽂혔고, 신문 잡지가 흐트러졌을 뿐이요, 아랫목에는 발길로 걷어차서 두르르 말아놓은 듯한 이불 한 채가, 동그마니 놓였다.
참 한 가지 잊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은 마분지로 도배를 한 벽에 붙은 사기 등잔인데, 그것도 오늘 지나다니며 들여다본, 다른 농가의 것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무엇을 장하게 차리는 것도 아니나, 눈 어둔 어머니는 부엌 속에서 데그럭거리며 어둡도록 꾸물거린다. 조금 있자, 건배의 아낙이 달걀 한 꾸러미를 행주치마로 감추어가지고, 노인의 응원을 하러 왔다.
“그 색시 복성스럽게 생겼습죠? 조금두 신식 여자 티가 없구, 아주 서글서글헌 게 속 터진 사내 같어요.”
하더니,
“인제야 부엌일을 면하시나 봅니다.”
하고 밥을 푸는 동혁의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번에두 김칫국버텀 마시는 셈인지 누가 아나. 내 뱃속으루 났어두 당최 그눔의 속을 들여다볼 수가 있어야지. 내가 무슨 팔자에, 살아생전 그런 며느리를 얻어보겠나.”
하고 마누라는 한숨을 내쉰다. 박 첨지와 동화는 자리를 내어주느라고 마실을 갔는데, 윗간에서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세 사람은 농촌 문제를 토론하고, 요새 한참 떠드는 중에 있는 자력갱생 운동을 비판하는데, 건배의 아낙이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참 정말 미안허군요. 이렇게 여기꺼정 출장을 허셔서…..”
하고 영신이가 일어나며 상을 받아 들었다. 동혁의 어머니가 문밖까지 따라와, 눈을 찌긋 하고 영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숫제 찬 없는 밥을 대접헌답시구…..온, 시굴 구석이라 뭐 있어야지. 늙은 사람이 헌 거라구 숭을랑 보지 말구 많이 지슈.”
한다. 영신은 일어서며,
“온 천만의 말씀을 다 허십니다. 들어오십시오.”
하고 공손히 예를 한다.
“괜찮소. 어서 자슈.”
하고 여전히 ‘허우’를 하니까, 영신은,
“말씀 낮춰 허십쇼.”
하고 정말 색시처럼 조심스러이 앉았다. 건배의 아낙은 남편을 보고,
“그런데 두 분이 얘기두 조용히 못 허게시리, 뭣허러 줄줄 따라댕기는거요? 집에 가서 어린애나 좀 봐주지 않구.”
하니까,
“흥,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이, 자리를 가려서야 되나.”
하고 건배는 소매를 걷으며 젓가락을 잡는다.
영신은 매우 유쾌한 그날그날을 보냈다. 날마다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은행나무 밑으로 올라가서 조기회에 참례를 하였다.
“아직 힘드는 운동은 허지 말구 편히 쉬시지요.”
하고 동혁이가 말려도, 남에게 조금이라도 지는 것을 대기하는(몸씨 꺼리거나 싫어하다) 영신은, 맨 뒷줄에 서서 끝까지 체조를 하고, 또는 여러 사람과 함께 <애향가>를 불렀다.
“얘, 동혁이헌테 온 여학생이, 체조를 다 헌다드라.”
하는 소문이 쫙 퍼지자, 이삼일 동안에 조기회원이 부쩍 늘었다. 늙은이 여편네들 할 것 없이 모여들어서, 무슨 구경이나 난 것처럼 운동장인 잔디밭이 삑삑하도록 들어차는 날도 있다.
그러나 그네들은 운동꾼이 아니요, 구경꾼인 것은 물론이다.
“허, 이거 장꾼버덤 엿장수가 많다더니, 왼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드나.”
하면서도 건배는, 여러 사람이 모인 김에,
“여러분, 조기회에 참가를 헙시오. 아침 일즉이 일어나 운동을 한바탕허면 정신이 쇄락해지구(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깨끗하다) 첫째 소화가 잘됩니다.”
하고 구세군처럼 선전을 하다가,
“우린 밥이 너무 잘 내려서 걱정이라네.”
“제층이나 나거든 옴세.”
하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있어서, 건배는 아무 말 못 하고 뒤통수를 긁었다.
영신은 농우회원들끼리만 모이는 일요일에도 방청을 하였다. 처음에는 뒷줄에 가 앉아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만 듣다가, 건배의 동의와 만장의 찬성으로,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청석골에서는 저 한 몸으로 분투하는 이야기며, 남의 강제나 또는 일종의 유행으로 하는 소위 농촌운동과,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해야만 할 농촌운동을 구별해가면서, 그 성질을 밝히고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녀를 불문하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 단결할 필요와, 언제나 서로 연락을 취하자는 부탁을 하였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으나, 영신의 말은 억양이 심해서 유창하지는 못해도, 조리가 닿고 열이 있어서, 농우회원들은 물론, 동혁이도 ‘그동안 고생도 많이 허구, 수양도 어지간히 했구나.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헌 것두 많은걸’하고 속으로 혀를 빼물 정도였다. 건배의 아낙도 문밖에서 동리 여편네들과 엿듣고는, 매우 감동이 되어,
“여자두 저만큼이나 났어야, 사내들헌테 코 큰 소리를 해보지.”
하고 자기가 보통학교 졸업밖에 하지 못하고 시집이라고 와서, 살림과 어린것들에게 얽매여, 늙어만 가는 것을 분하고 절통히 여겼다.
온 지 나흘 되는 날 저녁에 영신은, 건배의 아낙을 앞장세우고, 동네에 말귀 알아들을 만한 여인네들을 그 집 마당에 모아놓고, 또 한 번 일장연설을 하였다.
“내가 이 한곡리에 와서, 며칠이라도 지내게 된 걸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이 동네에도 부인들끼리의 회를 하나 모아드리고 가겠습니다.”
하고 그런 모임을 조직할 필요를 역설하였다. 부인회를 모은 대야, 그네들은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 터이요, 남자들처럼 금주 단연을 하거나 도박 같은 것은 금할 필요도 없고, 살림살이를 이 이상 더 조리차(알뜰하게 아껴쓰는 일)를 해서 저축을 할 여지도 없지만, 당분간은 여자들의 글눈을 뜨여주는 강습회일만 하더라도, 남자들의 힘을 빌지 말고 여자들끼리 자치를 해서, 지금부터 하루에 쌀 한 숟가락, 보리 한 줌씩을 모아서라도 농한기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그. 경비를 써나갈 것을 힘 있게 말하였다.
마당 가득히 모인 여인네들은, 손 하나 들 줄은 모르면서도, 모두 찬성한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래서 영신은, 회 같은 것을 조직하는 데 훈련을 받아온 터이라, 건배의 아내를 회장격으로 추천해서 ‘한곡리 부인근로회’라는 단체 하나를 조직하였다. 그러고는 앞으로 유지해 나아갈 방법까지 세워서, 건배의 아내에게 소상 분명히 일러준 후, 그와 앞으로는 형님 동생을 하자고 해서, 의형제까지 맺고 굳은 악수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 한 가지 몹시 거북한 것은, 식사를 할 때는 물론, 농우회 석상에서나, 마당과 행길에서까지, 회원들과 동네 여자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거리며, 뒤를 쫓아다니면서까지 동혁이와 영신의 행동과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은 털끝만치도 이상한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처음 대하는 손님과 다름없이, 더면더면하게 굴었다.
그 뒤로 기만이는, 영신을 청하려고 몇 번이나 동혁의 집으로 행랑아범을 보내고, 머슴을 시켜 청좌하는 편지까지 보내고 하였다. 동혁은,
“그분이 왜 우리 집에 있는 줄 아나?”
해서 돌려보내기도 하고, 전해달라는 편지는 받아두고도, 영신에게 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영신이가 그런 편지를 직접 받았더라도, 몸이 불편하다고 핑계를 하든지 해서, 이른바 초대회에 까닭없는 주빈 노릇 하기를 거절하였으리라. 동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나, 무슨 집회 같은 데는 자발적으로 출석을 하였지만, 기만의 심심풀이를 해주거나, 그런 사람이 자랑하는 생활을 보기 위해서, 더구나 홀로 지낸다는 남자를 찾아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업을 위해서는 소 갈 데 말 갈 데 없이 다니나, 이러한 경우에는 처녀로서의 처신을 가지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기만이는 매우 분개하였다.
“제가 얼마나 도고헌(스스로 높은 체하여 교만하다) 계집이길래, 내가 여러 번 청하는데 안 온단 말이냐!”
하고 하인을 세워놓고 몰아대다가,
“동혁이버텀 못생긴 자제지. 저헌테 온 여자를 내가 어쩔 줄 아나.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
하고 벼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낮이 훨씬 겨워서, 기만은 자회색 봄 양복을 말숙하게 거들고, 도금으로 장식을 한 단장을 휘두르며, 바닷가 영신이가 유숙하는 집으로 찾아갔다. 영신은 잡지를 보고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며,
“어디 가시는 길이서요?”
하고 달갑지 않게 맞았다.
“하두 여러 번 청해두 안 오시길래, 몸이 편치 않으신가 허구,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하고 구며대는 말에, 영신은
‘지나는 길이라니 바닷속에 볼일이 있어나?’
하고 속으로 웃었다. 이러한 궁벽한 촌에서, 빳빳한 칼라에 자줏빛 넥타이를 매끈하게 매고 나온 것이, 옥색 저고리에 부사견 바지를 입었던 것만치나 눈허리가 시었다. 방으로 들어오라고만 하면, 마냥 늑장을 부리고 앉을 것 같아서, 멀리 신작로 편짝을 바라다보고 앉았다가, 양복쟁이 서넛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게 뭘 허러 쏘다니는 사람들인가요?”
하고 한마디를 물었다. 기만이는 문지방에 가 걸터앉으며, 안경 속에서 실눈을 짓고, 맨 앞에 곡마단의 원숭이처럼 허리를 발딱 젖히고, 자전거를 저어가는 사람을 가리키더니,
“저게 우리 아니키(형)예요. 저 아니키 때문에, 온 창피해서……”
하고 기만은 고개를 돌리며, 소태나 먹은 듯이 입맛을 다신다. 영신은 건배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형제분이 뜻이 맞지 않으시는 게로군요?”
하고, 아우의 편을 드는 체하니까, 기만이는 피죤을 꺼내 피어 물며,
“아니키는 당최 이마빼기에 송곳을 꽂아두 진물 한 방울 안 나올 에고이스트야요. 돈푼 긁어모으는 것밖에는 아무 취미도 모르는 인간인데, 게다가 면협의원인가 허는 게 큰 벼실이나 되는 줄 알고 뽐내는 화상이야 요란허지요. 이래저래 나허군 매사에 충돌이니까요. 오늘 아침에두 대판으로 싸웠는걸요.” 한다.
“왜요?”
“아, 엊저녁엔 공직자 부스럭지들을 대접헌다구 주막의 갈보까지 불러다가, 밤새두룩 술상을 벌여놓구 뚱땅거려서, 잠두 못 자게 굴길래, 그래서 한바탕 야단을 쳤지요.”
하고, 백판 아무 상관도 없는, 더구나 초면의 여자를 대해서, 제 형을 개꾸짖듯 한다. 영신은 담배 연기를 피하느라고 외면을 하면서,
‘참 정말 별 쑥스런 자제를 다 보겠군.’
하면서도, 하는 소리를 들어보느라고,
“그래두 그만치 유력허신 분이니까, 동네일은 열성 있게 보시겠지요?” 하고 넘겨짚었다. 기만은, 핥아놓은 것처럼 자꾸를 바른 머리를 홰홰 내저으며,
“말씀 마세요. 박동혁이 김건배 헐 것 없이, 이 동네의 젊은 사람들은 아주 원수치부를 허는걸요.”
“왜요? 퍽 건실헌 분들인데요.”
“그 속이야 뻐언하지만….그까짓 게 무슨 얘깃거리나 되나요?”
하고, 기만은 일본말로,
‘도니가꾸 안나 진부쓰가 무라니 오루까라 난니모 데끼꼬 아리마센요(아무튼 저따위 인물이 동네에 있으니까 무슨 일이구 될 턱이 없지요).”
하고 결론을 짓더니, 조츰조츰(망설이며 조금씩 자꾸 움직이는 모양) 영신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말머리를 돌려려고 든다. 영신은 어이가 없어,
‘대체 당신은 얼마나 낫소?’ 하고 입 밖까지 나오는 말을 마른침으로 꼴깍 삼기코, 솜털 하나 없이 면도질한 기만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때 마침 건배의 아낙이 꽃게를 서너 마리나 들고, 새로 조직된 부인근로회의 회원들을 대여섯 사람이나 데리고 왔다. 영신은 구원병이나 만난 듯이 그네들을 반기는데, 기만은,
“그럼 내일 저녁에래두 놀러와 줍시오. 꼭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어물어물 하다가 멋쩍게 꽁무니를 빼엇다.
일주일 동안이나 동혁이와 건배 내외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숙식이 부드러이 지내서, 영신은 건강이 매우 회복되었다. 처음부터 어느 한 귀퉁이에 병이 깊이 들었던 것이 아니요, 영양 부족과 과로한 탓으로 전신이 매우 쇠약해졌던 터이라, 불과 며칠 동안에, 눈에 보이는 듯이 피부가 윤택해지고 혈색이 좋아졌다.
영신이 자신도 동지들의 자별한(본디부터 남다르고 특별하다) 정의에 눈물이 날 만치나 고마워서, 아침저녁으로 한곡리 청년들의 건강과 그네들의 사업을 위해서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처음에는 고작해야 사나흘만 견습도 할 겸 쉬어가자던 것이 ‘하루만 더, 이틀만 더’하고 간곡히 붙잡는 통에, 자별한 호의를 매몰스러이 뿌리치고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그중에도 건배의 아낙은,
“아우님, 우리가 한 번 작별허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
하고 눈물을 흘려가며 붙잡아서, 차마 떼치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신은 하루라도 더 남의 신세를 지며 저 혼자만 편하게 지내는 것이, 무슨 죄나 짓는 것처럼 청석골 사람들에게 미안하였다. 영신이가 청석골로 내려가, 자리를 잡은 뒤에 야학의 교장 겸 소사의 일까지 겹쳐 하고, 어린애들에게는 보모요, 부녀자들에게는 지도자가 될 뿐 아니라, 교회의 관계로 전도 부인 노릇도 하고, 간단한 병이면 의사 노릇까지 하여왔다. 그렇게 몸 하나를 열에 쪼개내도 감당을 못할 만치나 바쁘게 지내던 사람이, 여러 날 나와 있으니, 모든 사세가 하루라도 더 머무르기가 어려웠다.
그중에도 눈에 암암한(기억에 남는 것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것은 저녁마다 손목과 치마꼬리에 매어달리던 어린이들이요. 귀에 쟁쟁한 것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던 아이들의 목소리다. 엄동설한에도 홑고쟁이를 입고 다니던 계집아이들 — 그러면서도 으슥한 구석으로 선생을 무작정 끌고 가서, 황률(황밤)이나 대추 같은 것을 슬며시 손에 쥐어주고는 부끄러워서 꼬리가 빠질 듯이 달아나던 그 정든 아이들— .
한 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어느 눈 내리던 날 밤, 야학을 파하고 사숙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잃어버리고 일갓집에 붙어서 사는 금분이란 계집애가, 숨이 턱에 닿아서 쫓아오더니, 선생님의 재킷 주머니에다가 꽁꽁 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넌지시 넣어주고달아났다.
“아서라, 이런 것 가져오지 말구우, 네나 먹어라. 응. “
하면서도 영신은 어린애의 정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왜 콩이나 밤톨이거니. “
하고 만져보지도 않고 가서 재킷을 벗어 거는데, 방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지는 것을 보니, 껍질을 말끔 깐 도토리였다.
영신은 떫어서 먹지도 못하는 그 도토리를, 접시에 소복이 담아 책상머리에 놓고 들여다보고 손바닥에 굴려보고 하다가 콧마루가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뜨끈하게 솟던 생각이 났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금세 그 아이들이 보고 싶어, 당장 날아서라도 가서 안아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엇다.
거짓말을커녕, 실없는 소리도 잘하지 않는 동혁이까지,
“발동선이 고장이 나서 못 댕긴다는데, 저 바다를 건너뛸 재주가 있거든 가보시지요.”
하고 붙잡는 바람에, 그 말을 곧이듣고 한 이틀을 더 묵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신은 누구에게나 발표하지 못할 고민을 가슴속에 감추고 왔었다 사실은 그 고민을 해결 짓기 위해서 동혁이와 의논을 할 양으로 일부러 온 것이었다. 정양을 하려는 것도, 동혁이가 실지로 일하는 것이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십이 훨신 넘은 처녀로서, 저 혼자로는 해결 지을 수 없는 일생에 가장 중대한 문제와 부닥쳤기 때문이다. 여간한 남자보다도 용단성이 있는 영신이건만, 동혁이와 단둘이 만나서 가슴속의 비밀을 조용히 고백할 기회도 없었거니와, 동혁의 얼굴만 마주 대해도 그 말을 끄집어내려던 용기가, 자라 모가지처럼 움츠러들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