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
어울리지 못했던 어린 시절
물에 섞이지 못하는 기름처럼
바깥으로 맴돌던 나날
문득 다가오던 손길 있었지
"야, 같이 놀자."
"난 잘 못하는데……."
"그럼 깍두기 시켜줄게."
그렇게 손잡고 놀다보면
어느새 익어가는 저녁하늘
나이가 든 만큼
세상도 따라서 삭아온 걸까
남을 밟고 올라야
맑은 공기를 마시는 하늘
내 발 디딜 곳은 보이지 않는데
그날의 아이들 어디 갔을까
나는 말라가는 중이다
상큼한 맛 한번 내지 못하고
뽑힌 채 방치된 무처럼
그렇게 말라가는 중이다.
* 창작동기 :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문득 예전의 그 날이 그리워졌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진정한 만남이란 무엇인가.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아도 서로의 얘기를 깊게 들어줄 수 있고, 서로의 근황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그런 만남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다른 이들에게 이런 만남이 되고 싶다.
남한산성
남한산성이 그저
오늘도 묵묵히 서 있다 말하지 말라
그 성벽 어루만져 본 일 있는가
절망과 궁핍으로 쌓아올린
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보라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고통 속에 백성들은 울부짖는데
청나라 진영 말 울음소리는
오늘도 오늘도 산을 넘는다
보이는가
성벽 틈새마다 들어찬
난도질당한 마음이
들리는가
깃발 펄럭일 때마다 흔들리는
긴 긴 한숨이
아아, 무엇으로 덮으랴
깊게 파인 말발굽 자국 앞에서
남한산성은
오늘도 산자락을 흔들며
눈물 뿌린다.
*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이 두 구절은 김훈 저자의 남한산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창작동기 :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배경인 병자호란은 역사적으로 치욕의 순간 중 하나이다. 한낱 치욕스럽다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우리 선조가 겪어온 역사의 한 부분이기에 쉽게 덮어버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좋은 일은 되도록이면 오래 기억하려고 하고, 나쁘거나 부끄러운 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금세 잊혀지고 덮어버리려고 한다. 이런 부분에서 사람들에게 부끄러워서 잊고 싶은 기억을 마음속에 더 되새기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물론 나에게도 말이다. 역사상 치욕스러웠던 부분 중의 하나인 병자호란. 그 때 일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적게 되었다.